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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생명의 형이상학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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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생명의 형이상학

 

 

박 이 문(포항공대 철학)

 

 

생물과 물질은 어린애들도 쉽게 가려낸다. 그러나 막상 생물의 본질이 그 밖의 존재들의 본질과 어떻게 다르냐를 결정하기란 생물학자나 철학자에게도 그리 쉽지 않다. 본질적 물음은 형이상학적 물음이다. 우리는 지금 생명의 형이상학적 속성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에 대한 답을 더듬기 전에 먼저 형이상학적 문제의 성격을 밝힐 필요가 있다. 그 다음 기존하는 답들을 서로 비교 대립시키면서 그것들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보다 적절한 새로운 대답을 제안해 보기로 한다.

 

1. 생명의 형이상학적 문제

 

1) 생명 재고의 동기

육체와 대조되는 의식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비추어 생명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철학사에서 별로 중요한 문제로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다르다. 인간은 지금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심각한 도전과 위협을 받고 있다. 날로 악화되는 공해와 생태계의 파괴는 인류의 실존적 위협으로 나타나고, 과학적 세계관이 인간의 자존심에 정서적 상처를 내고, 첨단 과학기술이 세계와 사물 현상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오래 된 근본적 신념을 흔들어 놓고 있다. 반 세기전만 해도 상상해 볼 수 없었던 공해가 생태계의 파괴와 인류의 존속을 심각하고 절박하게 위협하게 됐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반드시 어떤 깊은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우주는 갈릴레이, 데카르트, 뉴턴 등에 의해 정묘하지만 무의미한 기계로 나타났다. 다윈은 만물의 영장으로 자처했던 우리 인간이 원숭이와는 물론 버러지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시사했다. 이런 사실에 우리는 지적 충격을 받고 우리의 자존심은 깊은 상처를 입게 됐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돌이나 빗방울과 다름없이 분자나 원자로 완전히 분해될 수 있는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첨단 과학의 강력한 학설이 우리가 갖고 있던 물질, 생명체 그리고 인간 간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신념을 가차없이 당혹스럽게 부수어 놓으려 한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생물학적 멸종과 지적 파산에 직면한 현 상황에서 인간의 본질만이 아니라 더 일반적으로 생명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고찰과 대처가 절실하다. 한 종으로서의 인간의 생존만을 위해서도 그렇다. 오늘날 생명에 관한 생물학적 및 지적 심각성은 생태계와 인간의 보존을 위한 구체적 행동만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 차원에서 생명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요청한다.

 

2) 형이상학적 문제는 어떤 성질의 것인가

<철학>이란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흔히 그리고 고대로부터 철학은 진리의 추구를 의미했다. 여기서 철학은 과학은 물론 어쩌면 예술에 비추어 스스로를 규정할 문제를 갖게 된다. 과학은 물론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도 진리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현대적 철학관이 나왔다. 이른바 분석철학가들의 철학관이 그 예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철학은 어떤 객관적 진리를 발견함에 있지 않고 다양하게 사용되는 언어의 개념적 의미와 개념들 간의 수평적 논리를 정리하고 밝힘으로써 개념적 교통 정리를 하는 작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념 정리는 그 자체로서는 지적으로 불만족스럽다. 그것의 궁극적 목적은 역시 사물 현상에 대한 <진리>의 탐구, 보다 보편적이고 보다 근본적 진리 탐구에 있다. 그러므로 <철학적>이란 <근본적> 혹은 <궁극적>이란 말과 같은 뜻을 갖는다. 사물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우선 지각에 근거한다. 그러나 지각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한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지각적 차원을 넘어 <비지각적>일 수밖에 없는 본질을 추구한다. 비지각적 존재에 대한 탐구는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이라 불려왔다. 그러므로 여기서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철학><형이상학>을 같은 의미로 이해해도 좋다. 생명에 대한 전문적 진리 탐구의 분야를 <생물학> 혹은 <생물과학>이라 한다. 그러나 과학으로서의 생물학은 지각적 경험에서 출발하고 지각적 경험에서 끝난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생물학적> 진리는 그것이 곧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진리가 될 수 없다. 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전자에 있어서의 진리는 피상적이고 만족스러울 수 있을 만큼 근본적이지 않다.

 

3) 형이상학은 경험과학을 전제하나?

생명의 형이상학은 생명에 대한 본질적 진리를 찾고자 한다. 따라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우리의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한 대답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가시적 즉 형이상학적 진리는 가시적 진리, 예컨대 일상 경험적 진리 혹은 과학적 진리를 전제하거나 아니면 그런 것을 자료로 쓰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생명의 형이상학은 가장 첨단적 생명 과학적 지식 즉 정보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철학 즉 형이상학과 과학을 혼동해서도 안되지만 분리해서도 안되는 것은 그것들이 서로 뗄 수 없는 상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형이상학적 문제는 생명의 본질을 규정하는 비가시적인 무엇이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이며 그런 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이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가 된다. 이와 같은 생명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 제기는 다윈 이래 적지 않은 생물학자들에게 인간과 침팬지 같은 고등 동물의 근본적 차이가 확실치 않게 되었듯이 적지 않은 과학자들에게는 생명과 비생명의 정확하고 결정적 구별이 잘 서지 않고 있음을 전제한다. 가시적 차원에서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차이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보다 더 분명하다. 다윈의 진화론이나 멘델의 유전학이 발명된 후에도 생명체와 비생명체 간의 차이는 누구에게나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는 금세기 후반부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진화 현상과 유전 현상에 대한 분자생물학, 신경과학, 인지공학, 인공지능, 유전공학 등의 발달로 생물과 인간에 대한 본질 그리고 각기 그것들의 존재론적 즉 형이상학적 특수성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 무너지고 있거나 아니면 크게 흔들리게 됐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4) 형이상학의 본질은 세 가지

생명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대한 위와 같은 이론적 갈등을 과학적 세계관이 새롭게 형성됨으로써 그 세계관과 전통적 세계관의 충돌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똑같은 갈등은 최신의 첨단 과학의 결과에 대한 해석에서도 반영된다. 이것은 갈등되는 두 개의 입장 간에 어떠한 입장을 택하든 과학과 생명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관한 검토와 논쟁과 판단은 과학적 세계관 특히 첨단 과학의 과학적 결과를 검토하지 않고는 공론에 그칠 것임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전통적 세계관에 내포된 생명관과 과학적 세계관에 내포된 생명관 간의 갈등과 또 다른 한편으로 첨단 과학 내부에서 생기는 생명관의 갈등은 존재론 즉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유물론과 생명론 또는 기계론과 유기론 간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대립은 다같이 존재론과 인식론에서 일원론과 이원론 혹은 다원론 간의 갈등으로 그 모습을 띤다. 한편 인식론적 시각에서 볼 때 생명의 본질에 대한 갈등은 인과적 설명이 함의하는 환원주의와 목적론적 설명이 전제하는 총체주의 간의 양상으로 축소된다. 이러한 두 입장 간의 다양한 갈등은 결국 생명을 물질의 형태로 보느냐 아니면 물질이 생명의 형태로 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요컨대 문제의 초점은 <생명><물질>간의 환원성으로 축소될 것 같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게 단순치 않고 선명치도 않다. (C. Hull)에 의하면 <환원>이라는 말은 철학자나 과학자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그것은 대체로 인식론적, 물리적, 그리고 이론적 등 3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 인식론적 환원은 인식 이론과 인식 대상 간의 관계 문제로서 이론적 개념의 지칭 대상을 보다 기본적 대상으로 환원시킴을 의도한다. 가령 모든 과학적 명제는 입장에 따라 물리적 대상 혹은 감각 자료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둘째 물리적 환원 간에는 인식 이론이 가정하는 사물들 간의 관계에 걸린다. 그 환원에 의하면 어떤 사물의 체계는 그 구성요소로 분석되며, 이런 구성요소에 의한 설명은 그것들의 속성에 의해 다시 설명됨을 의미한다. 가령 가스의 속성은 분자 운동으로 설명되고 유전자의 형태는 분자의 형태로 환원되어 설명된다. 셋째 이론적 환원은 이론 체계 간의 관계에 관여되는 데 한 이론의 전제는 다른 이론의 전제에 의해서 설명됨을 말한다. 가령 열역학 이론은 통계역학 이론으로, 케플러의 천체 운동의 법칙과 갈릴레이의 물체 낙하의 법칙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속에 환원되어 설명된다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환원은 서로 연관이 있다. 헐이 설명한 환원은 과학 철학에서의 환원에 국한된다. 과학에서 존재는 필연적으로 물리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전혀 다르다. 모든 존재가 반드시 물질적이라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헐이 말하는 <물리적> 환원은 훨씬 포괄적 의미를 갖는 <존재론적> 환원이란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생명체와 비생명체가 존재론적으로 서로 환원된다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다는 말은 그것들이 서로 동일한 존재라거나 아니면 이질적 존재라는 말이기는 하나 그런 존재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존재의 본질 즉 형이상학적 속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구체적 실험에 앞서 논리적으로 세 가지 가능성으로 검토될 수 있다. 즉 물질과 생명이 서로 환원된 결과로 나타나는 본질의 속성은 제1과 제2의 가능성인 각기 물질이거나 생명일 것이며, 3으로 가능한 것은 생명도 물질도 아닌 의식 혹은 정신이라는 형이상학적 속성을 갖게 될 것이다.

 

2. 생명의 형이상학적 탐구 방법

 

1) 물질 환원은 전략적

인식은 그 대상의 존재를 전제하며 존재는 인식을 전제한다. 따라서 인식과 존재는 서로 떼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우리의 초점은 그 중 하나의 문제에 집중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우리의 관심은 생명의 존재적 본질 즉 생명의 본질이 물질적 본질로 환원될 수 있느냐 아니면 그 역이냐 혹은 생명도 물질도 아닌 무엇인가의 형이상학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느냐를 알아보는 데 있다. 문제는 방법적으로 생물과 물질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다른 것에 환원시켜 보는 작전이 바람직한가를 결정하는 데 있다. 논리적으로만 볼 때 생명의 물질적 환원이 있을 수도 있고 그것의 역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생명의 본질을 캐내는 작업을 하는 데 어떤 식의 환원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과학적 사고의 발생 초기,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한 예를 볼 수 있듯이 생물 현상 특히 인간 형태의 설명 모델은 물리 현상까지 설명하려 했다.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생물들은 번식하려고 애쓰듯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자연 현상은 바위가 자신의 자연스러운 즉 원래적 자리에 가려는 바위의 본성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천문학, 데카르트의 철학 그리고 뉴턴의 역학 이후 정반대의 태도가 등장했고 그런 태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확산되고 확고해지는 추세이다. 물리 현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던 설명의 틀이 생물 현상, 인간 행동, 사회 현상까지를 일괄적으로 오로지 인과적 법칙에 의해서만 설명하자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주장했던 바와는 달리 물질적 존재에 대한 확신은 비물질적 존재에 대한 신념보다 더 원초적이며 더 확실하며 더 보편적인 것 같다. 모든 인식이 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만큼 덜 확실한 신념 즉 명제는 그보다 더 확실한 명제에 비추어 그 진위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생물체와 물질 간의 환원성의 문제에 있어서 후자가 전자로 환원될 수 있느냐를 검토하는 것보다는 전자가 후자로 환원될 수 있느냐를 검토함이 방법론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지고 있는 것은 각 분야에서의 첨단 과학적 지식과 기술 특히 최신의 첨단 생명 과학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눈을 감지 않는다면 생명의 형이상학적 고찰이 생명의 과학적 고찰과 개념적으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전자는 후자를 전제하지 않고는 자칫하면 공허한 탁상공론에 빠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물질의 생명 환원 가능성을 시도하기보다 생명의 물질적 환원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시험해 보는 편이 전략적으로 효과적일 것이다. 첨단 생명과학은 이와 같은 전략이 자명한 선택임을 전제하고 모든 생명 현상을 궁극적으로는 순전히 물리적 현상으로만 환원될 수 있음을 전제한다.

 

2) 대립되는 이론의 비교검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첨단 생명과학의 탐구 결과는 아직도 위와 같은 기계론적 유물론이 형이상학을 결정적으로 확인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첨단 생물 과학자들 간에도 생명의 본질에 대해 대립되는 형이상학적 견해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첨단 과학 내부에서의 생명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대한 갈등은 전통적 즉 현대 과학 이전까지 지배했던 세계관에 내포된 생명의 형이상학과 근대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현대 과학 그리고 최신 첨단 과학이 발달되면서 세계적으로 지배하는 세계관에 내포된 생명의 형이상학 간의 갈등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대한 상반되는 대답은 더 일반적으로 각기 전통적이라 부를 수 있는 생명관과 과학적이라 명명될 수 있는 생명관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밝히고자 하는 생명의 형이상학적 본질은 전통적 생명관과 과학적 생명관을 첨단 과학이 보여주는 여러 객관적 사실에 비추어 서로 비교 검토하는 방법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접근되고 밝혀질 수 있다.

 

전통적 생명관과 과학적 생명관의 대립 관계는 인식론의 양측에서 서로 다르게 좀더 구체적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위의 두 가지 생명관은 각기 목적론적 설명 모델과 인과적 설명 방법과의 갈등으로 나타나고, 존재론적으로는 유기적 생명론의 형이상학과 기계론적 유물론의 형이상학으로 대립하며, 인식론과 존재론의 양측에서는 환원적 일원론과 전체적 이/다원론 등으로 나타난다.

 

 

3. 대립된 생명의 형이상학

 

1) 목적론적 설명과 인과적 설명

생명의 형이상학적 즉 비가시적 본질에 대한 인식은 바로 그 생명의 현상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지각적 인식에서 출발하고 그러한 인식에 뿌리를 박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어떤 대상을 하나의 현상으로서 지각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지각되는 그 현상을 설명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각 대상의 차원에서 생명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고대에는 항상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적어도 일상적 차원에서는 예외 없이 생물 현상과 물리 현상은 각기 달리 독립된 두 양식 즉 목적론적 설명양식과 인과적 설명양식을 갖는다. 모기가 살을 쏘는 사실은 피를 빨아먹고자 하는 모기의 목적에 의해서, 연어가 목숨을 걸고 갯물을 따라와 알을 낳고 죽는 현상은 그 생선이 자신의 새끼를 번식하려는 목적에 의해서 설명된다. 이와 같은 목적론적 설명이 봄에 싹이 나고 꽃이 피는 현상에도 적용될 수 있을런지 모른다. 식물이나 동물의 현상들과는 달리 적어도 오늘날 산업화된 사회에서 돌이 땅에 떨어지거나 물이 어는 현상은 각기 그것들의 물리적 원인에 의해서만 설명된다. 앞서 언뜻 비쳤듯이 원시 사회에서는 물리 현상까지도 목적론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한 예는 당시로는 극히 과학적 정신을 갖고 있었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헤겔의 형이상학적 역사철학이나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형이상학적 진화론은 가장 거창한 사념적 존재에 가장 포괄적으로 적용된 목적론적 설명의 예이다. 오늘날 이른바 선진 사회에서도 일상생활에서는 인간의 행동이나 생물의 형태는 물론 물리 현상까지도 목적론적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목적론적 설명은 설명 대상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 의도적 주체임을 전제하며 인과적 설명은 그러한 전제를 부정한다. 적어도 지각적 차원에서 우리가 생물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모든 존재가 반드시 일종의 목적을 갖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도 그렇고 첨단 과학자에게도 그렇다. 만일 이러한 전통적 그리고 지각적 신념에 근거가 있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 현상은 물리 현상에 적용되는 인과적 설명과는 별도로 목적론적 설명만이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 자명하다고 전제해왔던 상식과는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다. 17세기에 이미 데카르트는 물리 현상들은 물론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들은 한낱 교묘한 기계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이 철학자의 이러한 존재론적 신념은 모든 생물 현상도 물리 현상과 똑같은 방법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아무튼 20세기 초엽에 생긴 논리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을 대표하는 예를 들어 햄펠이나 그의 제자 러드너 혹은 심리학자 스키너 같은 이들은 모든 경험적 앎은 과학적이고 모든 과학적 앎은 한결같이 똑같은 과학적 설명이 가능한 것이라 하며 과학적 방법이라 가설 연역적 구조를 가진 인과적 설명 방법이며, 그러한 통일된 설명 방법이 물리 현상은 물론 생물 현상, 인간의 심리 현상 그리고 사회 현상에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통일과학을 지향하고 그러한 과학의 가능성을 믿는다.

이것은 모든 과학의 통일이 각기 그것들의 인식 대상의 획일적 동질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과학의 분류가 존재하고 있는 사실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다양함을 말해 준다. 과학의 통일은 그 대상이 아니라 그것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과학적 신념을 다른 신념으로부터 구별해 주는 유일한 근거는 그 신념의 내용과는 상관 없이 오로지 그 신념에 도달하는 절차 즉 방법일 뿐이며 이런 방법으로 얻은 신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앎 즉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가 주장하는 위와 같은 과학적 방법론 즉 가설-연역적 설명 모델과 대립되는 목적론적 설명 모델은 원시적 사회의 낡은 유산이거나 오늘날까지도 과학적 지식에 어두운 일반 대중의 그릇된 관습만으로는 볼 수 없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일원론적 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저항, 따라서 일원론적 지식관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반발은 첨단 과학에 익숙한 철학가들 가운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사회철학자 윈츠, 역사철학자 드레이, 그리고 과학철학자 폴라니가 그렇고, 해석학의 창설자 딜타이가 19세기에 이미 그랬고, 그 뒤 가다머와 리꾀르가 그에 동조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자연 현상과 사회 현상사이에는 각기 그 성질상 동일한 방법을 적용할 수 없고 전혀 다른 설명 모델을 필요로 한다.

 

논리실증주의가 믿고 있는 과학적 방법의 모델이 물리 현상은 물론 생명 현상까지도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와 같은 방법에 바탕을 둔 물리 혹은 생물 현상에 대한 인식을 <설명>이라 부른다. 이런 방법과는 다른 인식의 모델 즉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일원적 인식 방법과 구별되는 해석학적 인식 모델을 <이해>라고 부른다. 인식 대상의 존재론적 속성에 따라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있고 그와는 달리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현상은 그것이 어떤 물리적 인과법칙의 한 예로서 실증되었을 때 그것은 <설명>된다. 이와는 달리 어떤 현상이 어떤 의미 체계의 문법적 규범의 틀 안에서 무엇인가의 언어적 기능을 하는 한 예로서 보여졌을 때 그 현상은 <이해>된다. <설명>은 어떤 현상을 순전히 물질로 보고 그것의 기계적 작동을 밝히는 작업을 의미하며, <이해>는 어떤 인식 대상을 하나의 기호 즉 언어로 읽는 행위를 지칭한다.

 

일원론과 이원론 중 어떤 입장을 택하든 하나의 인식론이 각별히 특정한 존재론적 입장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물리 현상에 적용될 수 있는 인과적 설명 모델이 생물학은 물론 사회과학에도 한결같이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리실증주의는, 생물은 물론 인간의 심리 현상 그리고 사회 현상도 궁극적으로 물리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존재론적 유물론을 필연적으로 전제하지는 않는다. 거꾸로 과학의 이원론적 방법론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논리적으로 이원론적 존재론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전자는 일원론적 유물론을 은밀히 전제하고 후자는 이원론적 존재론을 암암리에 전제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원적 유물론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면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일원적 과학 즉 인식 방법이 보다 강력히 정당화될 수 있다. 첨단적 발달을 하면 할수록 과학은 유물론적 세계관이 옳다는 신념을 더욱 굳게 하는 것 같다.

 

2) 기계론적 유물론과 유기적 생명주의

기계론적 유물론은 고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 세계관 속에 이미 암시되고, 갈릴레이, 데카르트의 철학, 뉴턴의 역학, 다윈의 진화론, 멘델의 유전학에서 그러한 암시가 진리일 가능성으로 바뀌고, 최근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첨단 생명과학에서 그러한 가능성은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가는 것 같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 따라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우선 순전히 물질을 의미하는 단 세 가지 화학 원소 C.O.H로 표시된다. 만일 생물이 이같은 화학 원소로 충분히 서술된다면 그것은 점차적으로 작아지는 미립자의 현상으로 서술된다. 즉 화학 원소들은 분자로, 그 분자는 원자로, 그 원자는 전자로, 그 전자는 쿼크 등등으로 거의 무한히 분석되고 그런 미시적 물질로서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물리학, 분자생물학, 신경물리학, 유전공학, 인공지능, 뇌신경학, 지능공학 등등의 전위적 과학들의 결과는 모든 생명이 완전히 물리적 미립자로 분석되고 서술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거의 확신시킨다. 생명도 물질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질적 실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며 물리적 현상을 어떤 용도에 비추어서 효율적으로 서술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이 순전히 물리적인 속성으로 완전히 설명된다면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한 속성으로 전제되는 의식, 자아, 영혼은 동물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물리적 속성을 <실용적으로 유용하며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것으로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철학자 데넷은 생각의 신비로운 원천으로 믿어져 왔던 <두뇌를 하나의 기계라 주장하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신비로움을 느끼는 인간>도 역시 하나의 기계에 지나지 않음을 오래 전부터 역설해왔다. 여태까지 아무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한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자아 혹은 영혼, 사랑과 같은 감정도 한결같이 물리적 현상으로 만족스럽게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쌕크스는 인간의 물리학적 설명과 동시에 이른바 자아나 영혼의 존재 개념이 양립할 수 있음을 논한다.

 

모든 물리 현상이 기계적 인과 관계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역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 생물체,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은 서로 본질적 즉 형이상학적으로 차이가 없다. 어떤 사물에 붙혀진 생명, 자율성, 영혼, 정신, 존엄성, 자아, 목적 등의 개념들은 근본적으로 똑같은 현상에 대한 다양한 목적을 충당시키기 위해 고안된 전략적 서술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들이 지칭하는 듯한 특별한 존재 즉 순전히 물리 현상으로 분석되지 않는 특별한 형이상학적 지칭 대상들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생명의 본질이 물리적 속성으로 완전히 환원되고 또한 생명의 물리적 충분조건을 완전히 안다면 그런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신비롭게만 생각되던 생명은 마치 공작품을 만들 듯이 인위적으로 제작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시험이 벌써 얼마 전부터 있었다. 그런 시험이 아직 만족스러운 해답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랑통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몇 천 년 후가 될 지 모르나 언젠가는 인공적 생명이 제조될 것이고 따라서 <인간은 기계이다>라고 확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컴퓨터를 사용하면 생명만의 독특한 형태를 나타내는 물리적 조건을 이미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일원적 유물론이 주장하는 생명관의 어려움은 인공 생명 제작이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도 있지만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생명 현상의 신비성, 물질과 생명 간의 지각적 단절성에 있다.

 

모든 생명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어떤 목적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이 물리 현상의 인과적 법칙에 의해서 아무래도 설명되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자이며 생화학자인 모노는 유물론적 형이상학의 테두리를 떠나지 않고 이 문제를 풀려고 한다. 어떤 상상력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를 구성하는 미립자들이 조합될 수 있는 통계적 가능성은 무한이라 할 만큼 크다. 그런 조합으로부터는 우리의 상상력이 미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존재가 새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도 동물도 인간도 다같이 그러한 조합의 결과이며, 그러한 조합은 어떤 신비스러운 존재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우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자연 현상을 철칙같이 엄격히 지배한다고 믿고 있는 자연의 필연적 법칙도 역시 우연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첨단 과학의 결과와 첨단 과학자들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니무스와 아니마로 불리우던 형이상학적 생명체에 대한 신념, 보다 우리 가까이에서 한 때 이목을 끌었던 과학자 드리쉬의 생명 혹은 유기주의적 생명관 그리고 베르그송이 그의 책 창조적 진화론에서 주장한 엘랑 비탈 즉 <생명활소>라 명명한 형이상학적 생명관이 잘못되었음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베르그송의 진화론이 철저히 사념적 형이상학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것이 목적론적이라는 점에서 그의 진화론은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과 다를 바 없다. 다윈의 진화론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적자생존에 의한 <자연선택>의 개념은 <자연>에 어떤 목적이 있음이 전제되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다윈의 진화론이 말하는 바 생물 현상은 물론 베르그송이 논하는 바 형이상학적 우주 전체는 목적론적으로만 설명될 뿐 기계적 인과 관계로는 물론 <우연>의 소산으로도 만족스럽게 설명될 수 없을 듯싶다.

 

첨단 과학자들 혹은 첨단 과학 기술자들은 물론 그러한 이들에게 큰 감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철학자들의 대부분도 일원적 유물론의 형이상학을 수용한다. 그러나 똑같은 결과가 같은 첨단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과학자들 간에 서로 다른 생명의 형이상학으로 유도한다. 소수이긴 하나 적지 않은 첨단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똑같은 첨단 과학의 결과에서 기계론적 유물론의 일원적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이원적 아니면 다원적 형이상학을 수용하여 적어도 생물의 형이상학적 속성만은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을 것으로 해석한다. 가령 생물학적 진화론의 세계적 권위자로 알려진 해밀턴은 생물의 <자연선택> 현상의 물리적 현상을, 모든 형상을 오로지 <우연>으로만 보고자 하는 앞서 말한 생화학자 모노와는 달리, 어떤 초월적 즉 정신적 또는 영적 인격자의 <의도>를 전제하고 오로지 목적론적으로밖에는 달리 이해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첨단 과학이 날로 발달하는 바로 21세기의 문턱에 새삼 생명이라는 환원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존재와 그런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이 보다 적절할 수 있다는 것과 그와 아울러 과학 때문에 죽은 줄 알았던 <살아 있는> 신의 존재 가능성이 다시금 생기게 되었다는 보도도 있다. 한마디로 생명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대한 문제는 첨단 과학에 의해서 결정적 해결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더 혼탁하게 된 듯하다. 과연 생명은 무엇이냐? 그것은 물질로 환원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후자의 경우 그것의 형이상학적 속성은 어떻게 서술될 수 있는가? 여기서 다시 문제로 돌아 왔다. 이제 우리는 일원론적 유물론도 아니며 이원론 혹은 다원론도 아닌 존재 일반에 대한 존재론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4. 존재의 비개념성

 

1) 생명의 물질성

아무리 생명이 물질과 다르고 그것들 중의 어느 하나가 다른 어느 것인가로 환원될 수 없다 해도 물질적 조건을 완전히 떠난 생물체는 실제로 발견할 수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구체적 사실은 생명과 물질 사이에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과 그러한 관계가 우연적이 아니라 필연적임을 암시한다. 별도의 범주에 속하는 두 가지 구체적 존재간의 관계가 필연적이라는 사실은 그 관계가 절대적이 아니라 비절단적 즉 불연속적이 아니라 연속적이기 쉽다는 것을 암시하며, 그러한 존재의 범주와 존재 자체간의 의미론적 관계, 여기서는 더 구체적으로 <생명><물질>이라는 존재 <범주>의 개념들과 각기 이런 낱말들이 지칭한다고 전제되는 구체적 생명체들이나 물질들 간의 의미론적 관계가 재고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재고가 어쩌면 <생명>의 본질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현명한 길이 될지도 모른다.

 

2) <단 하나>로서의 존재 : 개념적 단절성과 존재적 연속성

존재 범주를 가리키는 한 개념은 한편으로 그것과 다른 개념과 논리적으로 구별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과 역시 논리적으로 엄격히 구별된다. 가령 <생명>이나 <물질>이라는 존재 개념들은 각기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이 구체적 생물체나 구체적 물질과는 역시 논리적으로 엄연히 구별된다. 그리고 생명이란 말의 개념적 의미와 물질이라는 말의 개념적 의미는 <> 혹은 <외뿔소>라는 말의 개념적 의미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애매모호하지 않고 투명하며 따라서 그것들 간의 관계는 혼동될 수 없다. 요컨대 반드시 어떤 기호 즉 언어로 표시되어야 하는 존재 범주를 가리키는 말들의 의미는 논리적 즉 개념적 단절관계를 이중으로 갖는다. 그것들은 한편으로 자신의 지칭 대상 즉 어떤 존재와 단절 관계를 갖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들 간의 논리적 즉 개념적 단절 관계를 갖는다.

 

물론 개라는 개념과 외뿔소라는 존재 개념들은 보다 포괄적 개념인 동물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 통일됨으로써 그 속에서 비단절적 연관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동물이란 개념은 식물이라는 개념과 단절적 관계를 갖고 있지만 그것들은 보다 포괄적 존재 개념인 생물이라는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개념들과는 달리 이 두 개의 개념들을 포괄할 수 있는 더 포괄적 현상적 존재 개념을 생각해 낼 수 없다. 이 두 개념만은 개념상 서로 단절적 즉 비연속적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물이라는 개념과 물질이라는 개념의 단절성은 다른 한편으로는 각기 그런 개념이 지칭하는 구체적 생명이라는 존재 즉 생명체들과 구체적 물질 즉 물체들과의 단절성을 자동적으로 함의하지 않음을 명백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개념 간에는 절대적 단절이 있지만 존재 간에는 단절이 없다. 생명이라는 개념과 물질이라는 개념은 결코 혼동될 수 없이 서로 다르지만, 어떤 구체적 현상 혹은 존재를 생물이라는 범주 속에 분류해야 하는가 아니면 물질이라는 범주 속에 분류해야 하는가의 결정은 절대적 확신을 갖고서 내릴 수 없다. 즉 구체적인 어떤 것들을 존재적 즉 현상적 차원에서 볼 때 그것들 간의 관계는 단절적이 아니라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파란색과 노란색 혹은 원숭이와 인간은 각자 개념상 분명히 서로 다르지만 구체적으로 각기 그것들이 정확히 어떻게 해서 절대적으로 구별되는가를 결정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신념과 경험 대상들을 수없이 다양한 개념 속에 분류한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의 분류는 엄밀한 차원에서 볼 때 어디까지나 개념적 분류에 지나지 않지 실제로는 엄격히 분류될 수 없다. 좀 비약적인 논리로 말해서 모든 존재는, 이미 老莊이나 철학적 힌두교나 철학적 불교나 그 밖에도 플로티누스나 스피노자나 니체 등이 알고 있듯이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단절될 수 없는 <단 하나>, 즉 물질이라는 개념이나 생명이라는 개념으로도 서술될 수 없는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해서 개념적으로 표시하는 사물 현상의 다양성은 각기 독립된 다양한 존재들을 지칭하지 않고 다 똑같은 하나 혹은 전체라고 밖에는 달리 부를 수 없는 존재의 다양한 측면들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 존재는 다른 존재로 환원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물질을 생물로 환원한다거나 생명을 물질로 환원한다는 것은 다같이 처음부터 공허하다. 물질의 본질을 물질적으로 규명하려는 양자 역학은 궁극적으로 물질이 그냥 물질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없음을 물리학적으로 증명했다. 물질과 비물질의 구별이 거의 그 의미를 잃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을 서로 끊어서 생각해서는 안될 고리로서 연결되어 있는 것과 똑 같은 이유와 논리에서 물질, 생물 그리고 인간은 서로 간에 어떠한 선도 명백히 그을 수 없는 연속적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단 하나>로서의 존재 전체 안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어떤 척도에 의해서 그것들간의 우열 계층을 매긴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거나 생물이 광물보다 귀하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도 갖지 않는다. 생명의 형이상학적 본질과 그 의미도 위와 같은 포괄적 형이상학의 새로운 비전의 테두리 안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5. 맺는 말

자신이 갖고 있는 지적 능력을 자부해 온 인간이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 살아왔다. 그는 세계를 인간중심적 입장에서 의인적으로만 보아왔다. 그러나 첨단 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그것들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위와 같은 세계관이 하나의 환상이었음을 증명한다. 불행히도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무고(無辜)한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과거에 그것은 잘해야 인류의 허영심을 채우는 아편의 기능을 했고 오늘에 와서 그것은 인류의 존속이 걸린 위협으로 나타났다. 오늘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결정적 문제인 생태계의 파괴는 인간중심적이며 의인적 세계관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낡고 잘못된 세계관을 생태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계관으로 대체해야 한다. 즉 모든 현상과 사물의 가치는 인간중심적 입장에 서 있는 의인적 세계관으로부터 생명중심적 입장에 서 있는 의생적 세계관으로 전환해야 한다.

 

<하나로서의 존재 전체>의 공간과 시간적 한계 즉 그 크기는 어떠한 지적 빛도 도달할 수 없이 방대하다. 우리는 그러한 우주를 생각하며 파스칼 그리고 칸트와 더불어 경탄하며 그 우주의 방대성에 비해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존재라는 사실에 겸허해진다. 지적 능력을 자부하는 인간은 그러한 우주, 아니 존재 일반의 기원이나 이유를 라이프니츠나 하이데거와 더불어 묻지만 대답을 찾지 못한다. 세미텍 종교의 신에 의한 창조설이나 과학자들에 의한 <대폭발>설도 우리의 물음에 대해서는 전혀 만족한 대답이 될 수 없다. 하물며 그런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주 안의 생물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앞으로 인공 생명, 인공 인간의 제작이 가능하게 된다 해도 위와 같은 궁극적 문제는 영원히 신비에 쌓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지적 차원을 떠나서 즉 궁극적 문제에 대한 진리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존재가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황홀감과 경외심에 빠뜨리게 한다는 사실이다. 방대한 태양계, 더 방대한 은하수, 그리고 그러한 은하수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수는 모든 이유를 초월해서 우리를 압도한다. 그만큼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존재 자체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귀중하다. 길가의 한 돌조각이나 밭고랑의 한 흙이 이러하다면 하나의 생명은 그것이 아무리 원초적이라 해도 그만큼 더 신비롭고, 그만큼 더 아름답고 그만큼 더 황홀스럽고 그만큼 더 경외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더 놀랍고 황홀스러운 것은 지금까지 알기로는 그 방대한 우주 안에 오직 우리가 사는 지구 외에는 <생명>의 흔적이나 신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희귀성만으로 생명은 <신성>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하고 아름답다. 이런 것을 의식할 때 인류는 물론 생명 자체를 위협하게 된 공해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더욱 확고해진다. 인류의 가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에 앞서 생명의 절대적 고귀성을 위해서이다.

< 과학철학이란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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