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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정체에 관한 논쟁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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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정체에 관한 논쟁

 

곽 영 직 ( 수원대, 물리학 )

 

 

빛의 속도 측정

 

빛의 여러 가지 성질을 알아내려는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이 장에서는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있었던 빛의 속도에 대한 실험과, 입자설과 파동설 사이의 논쟁을 간추려 보고자 한다. 빛의 속도는 인간의 감각보다 훨씬 빨랐으므로, 빛이 전파하는 데는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빛의 속도가 유한한 값일 가능성을 처음으로 지적하고, 실험적으로 이 값을 결정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갈릴레이였다.

 

갈릴레이는 램프를 든 두 사람을 멀리 떨어져 있도록 한 다음, 한 사람이 상대방 불빛을 보면 즉시 램프의 뚜껑을 벗기고 상대방에게 빛을 보낼 수 있도록 하여 빛이 왕복하는 시간을 측정하려고 했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 빛의 속도를 측정하기에는 사람의 반응이 너무 느리고 빛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불가능했지만, 빛의 속도가 유한할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빛의 속도를 최초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측정한 사람은 덴마크의 천문학자 뢰머(16441710)였다. 1610년에 갈릴레이에 의해 목성의 4개의 위성이 발견되었는데, 뢰머는 당시에는 가장 안쪽에 위치한다고 믿어졌던 위성 이오의 운동을 이용하여 빛의 속도를 결정하려고 하였다. 이오는 42.5시간마다 한 바퀴씩 목성 둘레를 공전하고 있는데, 지구가 지구의 공전궤도를 따라 빠르게 움직이면서 이오의 공전을 관찰하므로,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면, 지구의 위치와 상대속도에 따라 지구에서 관측한 이오의 공전주기와 이오가 목성 뒤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타나는 시간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뢰머는, 지구가 목성에 가까워질 때 지구에서 측정한 이오의 주기가 짧아지고 식(eclipse)의 시간이 짧아지는 것을 관측하였다. 이 시간차를 이용하여 뢰머는 빛이 지구궤도를 가로지르는데 11분이 걸린다고 설명하고 빛의 속도는 227km/sec라고 했다. 이것은 오늘날 정밀하게 측정된 빛의 속도의 70% 정도에 지나지 않아 오차가 30%나 되는 값이지만, 당시의 실험 기술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뢰머의 중요한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는 생각은 별로 일반의 주의를 끌지 못하다가, 50년이나 지난 후에 영국의 브래들리(16931762)가 광로차를 예측하고부터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걸어가면서 관측하면 앞에서부터 사선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만약에 움직이는 방향을 반대로 하면 빗방울은 반대 방향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관측된다.

 

마찬가지로 공전운동에 의해 계절에 따라 지구의 움직이는 방향이 달라지므로, 항성에서 오는 빛의 방향이 계절에 따라 다르게 관측돼서 항성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 보이는데, 이런 현상을 광로차(光路差)라고 한다. 브래들리가 예측한 광로차는 독일의 천문학자 베셀(17841864)에 의해서 실험적으로 검증되었는데 백조자리의 61번 별의 광로차는 0.3초였다. 이것은 매우 작은 값이어서 그때까지의 천문 관측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전체의 현상이 아닌 지구상의 실험 장치를 이용하여 빛의 속도를 처음 측정한 것은 프랑스의 피조(18191896)였다. 피조는 고속도로 회전하는 톱니바퀴를 이용해서 8km를 빛이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여 빛의 속도를 315km/sec라고 했다. 아직 정확한 값은 아니었지만 오차는 훨씬 줄어들었다. 피조의 동료였던 푸코는 피조의 실험 장치를 이용해서 통속에 물을 채우고 물 속에서의 빛의 속도를 측정하여,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빛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한 것은 19세기에 빛의 속도 측정에 전념한 마이켈슨과 몰리였다. 그들은 간섭계(干涉計)를 이용하여 빛의 속도와 파장을 정확히 측정하였으며, 오늘날에는 레이저를 이용하여 달과 같이 먼 거리에 있는 물체 사이에 빛을 왕복시킴으로써 정확한 값을 얻어내고 있다.

 

빛의 본질에 관한 논쟁

 

빛의 속도 측정과 함께 빛의 본질에 대하여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것도 섞인 것이 없는 순수한 빛인 백색이 빛의 본성이라고 보고, 색채는 백색과 어둠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혼합비에 따라 그 색채가 달라진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검은 숯을 태우면 빨간 빛이 나오는데 이것은 불에서 나오는 빛과 숯의 어둠이 섞인 결과라고 했다. 또한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깔로 나뉘어지는 현상은 프리즘의 두꺼운 부분을 통과한 빛이 얇은 부분을 통과한 빛보다 유리에 함유된 어둠을 많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생각은 17세기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1672년에 발표된 빛의 색채에 관한 새 이론이라는 논문에서 뉴턴은 프리즘을 이용하여 백색광이 여러 가지 단색광을 분광되는 것을 보이고, 이것은 단색광이 굴절성이 다른 여러 가지 입사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각각의 입사선은 고유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여 색채는 백색광과 어둠의 배합이라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부정했다. 뉴턴은 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제1의 프리즘으로 분광된 단색광을 제2의 프리즘에 의해 다시 분광하는 실험을 하였다. 이 실험에서 그는 한번 분광된 단색광은 더 이상 분광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고, 단색광의 굴절률이 색깔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밝혀냈다.

 

뉴턴에 의해 빛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제기된 후 빛의 본성에 대한 논쟁에서 핵심적인 과제로 취급되었던 문제는, 빛이 알갱이인 입자의 흐름이냐 아니면 파동이냐 하는 것이었다. 빛의 정체에 관한 논쟁은 이미 뉴턴 이전에 입자설을 주장한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뉴턴이 빛의 본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부터 본격적인 논란이 시작됐다. 빛의 경계면에서 진행 방향을 바꾸는 굴절 현상에 대한 정확한 법칙은 1621년에 스넬(15911626)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는 입사각과 굴절각의 사인이 두 매질의 경계면에서 일정한 비를 이루는 것을 발견했다. 데카르트는 스넬의 굴절 법칙을, 빛이 빠른 직선운동을 하는 미립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기초해서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빛이 반사하는 것은 빛의 입자가 경계면에서 역학 법칙에 따라 튕겨나오는 것이고, 굴절은 빛 입자의 속도가 매질에 따라 다른데 경계면을 통과하는 동안 경계면에 수직한 속도성분은 달라지지만 평행성분은 달라지지 않아 생기는 현상이라고 했다. 빛이 밀한 매질과 소한 매질의 경계면에서 굴절하면 밀한 매질에서의 굴절각이 소한 매질에서의 입사각보다 작아지는데, 이것은 밀한 매질에서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푹신푹신한 융단 위에서보다 딱딱한 책상 위에서 공이 더 잘 구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했다.

 

 

데카르트의 이런 생각을 이어받은 뉴턴은 입자설을 이용하여 빛의 직진, 반사, 굴절 등 빛의 여러 가지 특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광입자는 직선으로 운동하여 주변의 에테르의 진동을 일으키는데, 이 진동이 광입자의 운동을 강화하기도 하고 약화시키기도 한다고 했다. 운동이 강화된 입자는 경계면을 뚫고 지나가는 데 필요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약화된 것은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반사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뉴턴의 입자설로서는 새로 발견되는 빛의 여러 가지 현상을 간단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새로 발견되는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입자에는 많은 가정이 덧붙여져야 되었는데, 결국 빛입자는 인력이나 반발력을 가져야 했으며, 자전운동을 하고, 한 쪽을 둥글고 다른 쪽은 뾰족한 이상한 모양을 하게 되었다.

 

빛의 파동설은 볼로냐의 수학 교수였던 그리말디(16181663)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그는 빛이 직선으로만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림자의 끝에는 색깔이 물들어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빛은 파동과 같은 운동을 하는 액체이며 진동이 달라지면 색채가 달라진다고 하였다. 뉴턴과 동시대에 살았던 후크와 호이겐스 등의 학자들은 그리말디의 <광액이론>을 발전시켜 빛은 움직이는 매질이 아니라, 정지되어 있는 매질 속을 진행하는 파동이라고 하는 광파이론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파동설은 빛의 가장 명백한 성질의 하나인 직진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파동이 굴절과 회절을 하여 굽어져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방파제로 둘러싸인 항구 안까지도 파도가 들어오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현상이었으므로 빛의 직진을 파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뉴턴 자신은 입자설과 파동설 사이에서 어느 한 학설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은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뉴턴이 입자설을 지지했었다는 사실이 입자설을 유리하게 하여 빛의 정체에 대한 첫 번째 라운드의 논쟁에서는 입자설의 판정승으로 끝나게 되었다. 당시에 뉴턴의 권위는 자연과학계에서는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성역이었으므로 입자설은 뉴턴의 권위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입자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18세기 말에 화학자 라부아지에(17431794)가 발행한 원소표의 첫머리에 빛입자가 실려 있는 것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빛의 정체에 관한 논쟁의 제2라운드는 15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9세기 초에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 때 파동설을 가지고 입자설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영국의 의사였던 영(17731829)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간섭에 관한 실험을 하였는데, 슬릿을 이용한 그의 간섭 실험은 오늘날에도 기초광학 실험실에서 <영의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재현되고 있다. 영은 그의 간섭 실험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1세기 이상이나 잠자고 있던 파동설을 다시 들춰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뉴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오히려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의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풀리기 시작하였다. 1808년에 복굴절을 연구하고 있던 말뤼(17751812)가 우연히 창문에 반사하는 빛이 편광된 빛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상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고전적인 입자 이론은 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으므로 입자설은 신뢰도를 현저히 잃게 되었다.

 

입자설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파동설을 재건한 것은 토목기사였던 프레넬(17881827)이었다. 1818년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는 <빛의 회절을 설명하는 이론>을 현상모집했다. 과학 아카데미는 입자설을 이용해 회절을 설명함으로써 입자설을 확고히 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는데, 뜻밖의 수상자는 파동설을 들고 나온 프레넬이었다. 이 사건으로 갑자기 파동설은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고 입자설의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프레넬은 또한 두 개의 거울을 이용하여 아주 간단하게 훌륭한 간섭 무늬를 얻을 수 있었고, 파동 이론을 이용하여 이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그는 또한 복굴절을 설명하기 위해 빛이 진행 방향에 수직으로 진동하는 횡파라고 가정하여 복굴절에 관한 것까지도 파동론의 한계 내에 수용하였다.

프레넬에 의해서 광학은 통일성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입자설이 기묘한 입자를 이용해서 몇 가지 성질을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파동설이나 입자설은 다분히 현상론적인 설명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파동설이 입자설보다 빛의 여러 가지 성질을 설명하는 데 효과적이기는 했지만 입자설로도 나름대로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입자설과 파동설은 매질 속에서의 빛의 속도에 대해 정반대의 설명을 하고 있었다. 파동설에 의하면 빛은 매질 속에서 속도가 느려진다고 했는데 반해 입자설에서는 매질 속에서 빨라진다고 했다. 따라서 매질 속에서 빛의 속도를 측정하면 파동설과 입자설의 우열을 쉽게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내 1850년 프랑스의 푸코(18191868)가 물 속의 광속을 측정하여, 물 속에서 느려지는 것을 증명했다. 푸코의 실험은 프레넬의 이론과 함께 빛의 파동설을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해주었다.

고 대

가 설

빛의 전파에는 속도가 필요하지 않다.

갈릴레이

가 설

빛의 속도가 유한한 값일 것이다.

실험 방법

램프이 불빛이 전달되는 속도를 측정

결 과

빛의 속도가 너무 빨라 측정에 실패

뢰 머

실험 방법

목성의 위성인 이오의 공전 주기를 이용

브래들리

사실 관찰

걸어가는 방향에 따라 빗방울이 떨어지는 방향이 다른 것처럼 보인다.

예 측

광로차

검증(베셀)

백조자리 61번 별의 광로차가 0.3초이다.

피 조

실험 방법

고속도로 회전하는 톱니바퀴를 이용하여 빛이 8를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

푸 코

실험 방법

피조의 장치를 이용하여 물 속에서의 빛의 속도를 측정

파생된 문제

파동설에 결정적인 증거 제공

마이켈/몰슨

실험 방법

간섭계를 이용하여 빛의 속도와 파장을 측정

현 대

실험 방법

레이저를 이용하여 먼 거리에 있는 물체 사이에 빛을 왕복시켜서 빛의 속도를 측정

프레넬의 수학적 재능과 푸코의 실험이 파동설을 튼튼한 토대에 올려놓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빛의 정체에 관한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파동은 우리가 파도의 전파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 전파하기 위해서는 매질이 필요한데 공간에는 광파를 전달시킬 매질이 없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레넬은 에테르라는 매질이 공간에 가득차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실험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었다. 이 매질을 찾아내려는 실험적 노력이 아무런 효과없이 끝났을 때 나온 새로운 이론이 우리가 뒤에서 다루게 될 상대성 이론이다.

 

파동설은 전기와 자기를 연구하던 맥스웰(18311879)에 의해 더욱 확실한 토대를 다지게 되었다. 맥스웰은 전기장과 자기장의 전파에 관한 방정식을 그때까지 잘 알려졌던 패러데이법칙과 암페어의 법칙으로부터 수학적으로 유도했다. 이 방정식에 의하면 전자기파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놀랍게 일치했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맥스웰은 자신이 체계화한 이론을 바탕으로 빛을 전자기파와 비교하여, 최종적으로 빛은 전자기파라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이때가 1871년이었다.

 

그러나 맥스웰의 전자기파는 실험적으로 그 존재가 입증된 것이 아닌 이론적인 것이었는데, 맥스웰이 죽은 후 1888년에 독일의 헤르츠(18571894)가 실험에 의해서 전자기파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전파 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빛의 전자기파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고 빛이 전자기파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파동설도 20세기가 되자 곧 아인슈타인의 광입자설에 의해 시련을 맞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미루기로 한다.

< 알기 쉬운 과학 이야기, 1990, 사민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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