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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과 설명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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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과 설명

 

김 광 수 ( 한신대, 철학 )

 

 

1.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참으로 빈약하다. 사과 모양의 물체를 보며 이것은 사과이다.’ 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듯싶다. 사과 모양을 한 대상을 내가 직접 관찰하였고, 그 관찰에 근거하여 그 대상이 사과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관찰한 것은 사과 자체가 아니라, 사과 모양을 한 물체였고, 사과 모양을 했다고 다 사과는 아니기 때문이다.(요즈음 웬만한 음식점 진열장에는 먹음직스러운, 그러나 먹을 수 없는, 밀랍 음식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관찰에 의한 주장을 기초적 주장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바로 이 관찰이 사실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직접 관찰한 것은 빨간 색, 둥근 모양 등의 겉모습뿐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겉모습만에 근거해서 그 대상이 꼭 사과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관찰을 더 해야 내가 자신있게 󰡒이것은 사과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냄새를 맡아보면? 깨물어보면? 일상적으로는 전혀 문제되지 않을지라도, 엄격히 말하기로 하자면, 이 모든 관찰에 의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이 사과가 아닐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관찰에 의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관찰의 직접 대상인 제한된 종류의 감각 소여(sense data)들뿐인 반면, 사과의 본질적 속성들 모두가 우리의 감관에 잡히는 감각 소여로 나타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물자체(das Ding an Sich)’를 직접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문제는 인식론뿐만 아니라 언어철학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사과 자체에 대해 말하고, 또 그러한 언표 행위가 허락되지 않는가? 그렇게 엄밀하게 따지면 도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주장들을 보면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박군이 싱글벙글하는 것을 보고] 오늘 박군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다.

[오늘까지 해가 동쪽에서 뜬 것을 보고] 내일도 해는 동쪽에서 뜰 것이다.

 

박군이 싱글벙글하는 것은 관찰할 수 있지만, 그에게 오늘 좋은 일이 있다는 사실은 관찰한 일이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언행을 관찰할 뿐이다. 오늘까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관찰했지만, 내일도 해가 동쪽에서 뜰지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심코 이 주장들이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관찰에 의한 주장들인 양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이다.

우리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주장들은 이상과 같이 특수한 현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특수한 현상에 관한 주장들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보편적) 현상에 관한 주장들이다.

 

역사는 역사 법칙에 따라 전개된다. (역사주의)

세상의 본질과 원리는 물이다. (탈레스)

인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 (운명론)

딸 시집갈 때 저고리 하나를 빼어놓지 않으면, 친정이 망한다. (속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목적론적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의 영혼은 육체의 죽음 후에도 살아 남는다. (영혼불멸설)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소위 엄밀 과학의 체계를 이루는 법칙들도 사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현상에 대한 일반적 주장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엄밀 과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소위 인문과학사회과학의 명제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설명을 꾀하는 형이상학적 이론들의 명제들도 역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 종교적 명제들, 윤리적 명제들도 모두 인식의 한계를 넘는 점에서는 같다. 이 주장들 어느 것도 기초적 주장이 아니며, 기초적 주장들로부터 연역적으로 타당하게 도출되는 주장도 아니다. 이 주장들이 담고 있는 사실에 접한 일이 없으며, 우리가 접한 사실로부터 이 주장들을 연역해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주장들 모두는 우리의 인식 체계 밖에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논증을 요구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한 기초적 주장들의 대부분이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들보다 더 많은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 놀라움과 호기심 : 인식론적 자아의 확대

 

그러나 이 모든 주장들을, 그리고 이와 유사한 모든 주장들을, 우리는 지식의 체계 밖에 놓아두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내일 해가 뜬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 잠자리에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연과학의 법칙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원시인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동차, 비행기, 전기, 컴퓨터 등의 문명의 이기들이 없는 매우 불편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흑사병, 천연두 등의 전염병에 속수무책일 것이고, 살아 남는 사람들도 얼마 안되는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고통스럽고 위험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물음을 묻는 동물이다. 어떤 일이 상궤를 벗어나면 왜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방안에 낯선 보따리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을 경우 이를 무심코 넘겨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보따리에 현찰 천만 원이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아무리 신경이 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천만 원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놀라움의 정도도 달라지겠지만, 보따리에서 단돈 10원이 나와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놀라운 사건이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에 부딪친다. 그리고는 그러한 사건들이 왜 일어났는가를 알고 싶어한다. 그렇게 엄청난 돈 보따리가 왜 내 방에 놓여 있을까? 누가 그랬을까? 이렇게 묻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주장들을 포괄할 수 있도록 인식의 체계를 확장하는 길을 모색하게 된다. 인식론적인 자아의 확대를 꾀하는 것이다. ‘인식론적 자아의 확대,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이 아는 영역의 확대이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뜻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따르자면, 나의 세계의 한계(즉 자아의 한계)는 나의 언어의 한계(나의 앎의 한계)를 넓힘으로써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건이 놀라움이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가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크게 놀라운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평범한 일일 수 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평범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크게 놀라운 사건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즉 어떤 사건에 놀라고 어떤 사건에 놀라지 않는가가,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한다.

 

시인은 늘 다니던 거리에서 낯설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은 사과의 떨어짐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왜 세계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말하는 그런 방식으로 되어 있을까? 이런 물음을 묻는 사람은 철학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 삶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그래서 저마다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간다. 그러나 철학자들에게는 삶 자체가 커다란 수수께끼가 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사과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이런 큰 물음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자들은 인식론적 자아를 가장 크게 확대하려는 자들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만족할 수 있는 이유일지 모른다.

 

3. 가설과 증거

 

어떻게 해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며, 맛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인식론적인 자아의 확대 의도는 이와 같이 자가당착적인 물음에 답해야 하는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대상이 우리의 인식 능력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그러한 영역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노출된 현상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지 일어나면, 일어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믿는다. 라이프니츠가 충족이유율이라고 이름한 이 원칙을 받아들일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물음이다. 이 원칙을 받아들여야만 할 어떤 이성적인 이유도 발견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 원칙을 만고의 진리로 여기고, 이 원칙에 의해 사실의 세계에 대한 지식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충족이유율에 따라 우리는 알려진 현상(결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알려지지 않은 현상(원인)이 무엇일까를 이모저모로 추측해 보고 가설을 던진다. 가설은, 알려진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서, 알려지지 않은 세계 속의 현상에 대한 주장이기 때문에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은 수도 있다. 아무리 많은 증거가 뒷받침된다 해도, 가설은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주장인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맞는가설을 던질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해야 어떤 가설이 맞는가설이라고 판정을 내릴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인과관계는 알지 못하는 세계와 아는 세계와의 인과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설을 던지는 행위나 가설을 평가하는 행위는 완전히 자의적인가? 그렇지 않다. 어떤 가설이든지 가설로서 제시되기 위해서는 어떤 증거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증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다. 가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현상에 관한 주장이지만, 그 근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에 있다. 이 근거를 다리로 해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알지 못하는 세계로 확장되어 나간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아는 세계에 근거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관하여 말하게 하는 추리는 모두 비증명적이다. 전제들의 참이 결론의 참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리는 개연성이 높은 가설을 도출시키는 논증이기 때문에 비증명적 논증이라 한다. 우리는 비증명적 논증을 아래와 같이 분류하여 연구하게 될 것이다.

비증명적 논증

 

본질적으로 증명적인 논증 본질적으로 비증명적인 논증

(적어도 높이 정당화되는 (가설의 추리)

숨은 전제를 보충함으로써

연역적으로 타당하게 될 수

있는 논증)

 

과학적 가설 형이상학적 가설

 

특수한 가설 일반적 가설

 

귀납적 일반 가설 설명적 일반 가설

 

4. 가설의 자격 : 설명력

 

가설은 어떤 것이든지 본질적으로 우리의 인식의 한계 너머에 있는 사태에 관한 진술이다. 즉 가설은 어떤 시점에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사태를 그리는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태에 관한 주장이 모두 가설인 것은 아니다. 1999년에 지구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노스트라다무스를 비롯한 여러 예언가들은 1999년도에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지구는 1999년도에 종말을 맞을 것이다.󰡓는 주장은 가설이 아니다. 어떤 주장이 가설이 되기 위해서는 가설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럼 어떤 주장이 가설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할까?

 

설명력. 어떤 주장이 가설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가설 H가 어떤 현상 e에 대해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H를 받아들일 경우 왜 e가 일어났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 이야기를 통해 이 점을 이해해 보자. :

 

제우스의 형제가 거신(巨神)족을 쳐부숴서 지옥으로 추방하자, 이번에는 새로운 적이 생겨났습니다. 그 적이란 튀폰과 브리아레오스, 엔켈라도스와 같은 거신들인데, 그들 중에는 백 개의 손을 가진 자도, 또 불을 뿜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정복되어 에트나 산 밑에 생매장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이 산 밑에서, 때에 따라서는 어떻게 해서든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서 버둥거리어 지진을 일으켜서는 그 섬(시켈리아 섬)을 진동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이 거신들의 숨결이 에트나 산을 꿰뚫고 피어오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화산이 분화한다고 말합니다. (토머스 불핀치, 그리스 로마 신화)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이 분화하는 것을 보고 옛사람들은 크게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왜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를 알고 싶어한 끝에 다음과 같이 추리한 것이다. :

 

[논증A]

e :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이 분화한다.

H : 에트나 산 밑에 생매장되어 있는 거신들이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서 버 둥거린다.

 

이 논증은 물론 연역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또한 이 논증을 연역적으로 타당하게 만들 수 있게 하는 숨은 전제도 찾을 수 없다.

 

만일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이 분화한다면, 에트나 산 밑에 생매장되어 있는 거신들이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서 버둥거린다.

 

는 조건문을 숨은 전제로 보충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높이 정당화되는 주장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본질적으로 전제의 참에 의하여 결론의 참이 증명되는 증명적 논증이 아닌 것이다.

 

그럼 우리는 이 논증을 폐기해야 할까? 이제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답을 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위의 논증은, 전제가 결론의 참을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전제가 결론에 대해 전혀 무관한 이유는 아니다. 전제와 결론의 위치를 바꾸어 다음과 같은 논증으로 구성해 놓고 보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

 

[논증B]

H : 산 밑에 생매장되어 있는 거신들이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서 버둥거린다.

a : 만일 H라면,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이 분화한다.

e :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이 분화한다.

 

이 논증은, 논증A의 결론인 H를 전제로 하였을 때, 적어도 높이 정당화되는 보조전제 a의 도움을 받아, 문제의 현상 e를 도출시키고 있는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이다.

 

이처럼 논증B의 형식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논증 A와 같은 비증명적 논증은 전제로 결론의 참을 증명하고자 하는 추리가 아니라 결론으로 전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추리이다. 즉 논증 A는 문제의 현상 e를 설명하는 가설을 추리하는 비증명적 논증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가설 H는 적어도 높이 정당화되는 보조전제들 alan과 함께 문제의 현상 e를 연역적으로 타당하게 도출시킬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 e에 대한 설명력을 가진다고 한다. 특히 보조전제가 완전히 정당화될 경우 He에 대하여 강한 설명력을 가진다고 한다.

 

어떤 주장이 가설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바로 이 설명력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설의 설명력이 가설의 정당성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가설의 설명력에 관한 한 우리는 가설 자체가 얼마큼 정당화되는가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과연 H를 참이라고 가정했을 경우 문제의 현상이 도출되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그렇다는 답을 할 수 있으면, H는 가설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는 답을 해야 하면, H는 가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5. 과학적 가설의 요건 : 검증가능성과 반증가능성

 

모든 가설은 설명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가설이 과학적 가설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을 더 갖추어야 한다.

 

검증가능성. 과학적 가설은 검증가능해야 한다. 가설은 본질적으로 인식의 한계 밖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사태에 대한 주장이지만, 참인 주장으로 의도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식으로든 적어도 높이 정당화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어야 한다.

 

검증가능성이란 원칙적인 검증가능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외계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현재의 시점에서는 기술적으로 검증가능한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원칙적으로 검증가능하다. 우주 구석구석을 탐사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과학 이론은 가설의 체계로서 이론을 구성하고 있는 가설들을 검증해 볼 수 있는 실험 상황을 허용해야 한다. 뉴턴의 물리학 이론이 나온 것은 1687년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 이론을 검증해 볼 수 있는 길이 없었다면, 이론으로서의 가치를 전혀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1695년 젊은 천문학자 핼리가 뉴턴의 이론을 혜성들의 운동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1682년에 나타난 혜성의 진로와 운동에 관한 기록을 뉴턴의 이론에 적용시켜 혜성이 75년 주기로 나타난다는 계산을 해내었다. 그리고 실제로 혜성은 175812월에 다시 나타났다. 물론 핼리는 혜성이 다시 나타나기 15년 전에 죽고 없었다. 핼리가 1705년 혜성에 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을 때는 무관심했던 유럽의 지성은 적어도 두 번 놀랐다. 핼리의 예측이 맞아서 놀랐으며, 핼리의 예측이 맞음으로 해서 뉴턴의 이론이 검증되었기 때문에 놀랐던 것이다. 만일 뉴턴의 이론이 검증가능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의 이론은 전혀 과학 이론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좋은 가설은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게 하는 힘이 있다. 설명의 논리적 형식과 예측의 논리적 형식이 같기 때문이다. 과학적 가설들이 법칙으로서의 자격을 갖게 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과학적 가설들이 현상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실험을 통해 검증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미래에 일어날 현상을 예측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진의 발생과 화산의 분화를 설명하고자 하는 에트나 산 밑에 생매장되어 있는 거신들이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서 버둥거린다.’는 가설은 검증가능하지 않다.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실험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신화에 나오는 가설은 과학적 가설로서의 자격이 없다.

 

어떤 가설이 검증되었다는 것은 그 가설이 참인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핼리가 혜성의 출현을 예측한 논증을 다음과 같이 단순화시켜 생각해 보자. :

 

[논증C]

 

뉴턴의 이론

1682년에 나타난 혜성의 진로와 운동에 관한 자료

뉴턴의 이론이 옳고 1682년에 나타난 혜성의 진로와 운동에 관한 자료가 모두 옳다면 혜성은 75년 주기로 출현할 것이다.

만일 혜성이 75년 주기로 출현한다면, 혜성은 1758년에 다시 출현할 것이다.

혜성은 1758년에 다시 출현할 것이다.

 

혜성은 이 논증의 결론이 예측한 바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사실은 뉴턴의 이론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미치지 못한다. 타당한 연역 논증의 성질상 결론이 참이라고 해서 전제들이 모두 참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증가능성. 과학적 가설은 반증가능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상식, 통념, 신념, 이념, 이론들 중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식 체계로는 반증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이 있다. 󰡒반증되지 않는 것은 검증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무지에의 호소라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 체계에 의해서 반증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가설이나 이론의 장점이 아니라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어떤 가설이 반증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세계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가설이 거짓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

 

--H

 

그리고 세계가 어떻게 변하든 거짓될 수 없는 가설은 모든 가능세계 속에서 참인 가설, 즉 필연적으로 참인 가설이다.

 

H

 

그러나 필연적으로 참인 가설은 어떤 가설일까? 그것은 세계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동어반복적 가설이다. 그리고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동어반복적 가설은 가설로서의 자격이 없다. 동어반복적 가설은 정보력이 없기 때문이다. 가설은 세계 속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된 것이기에 정보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뉴턴의 물리학 이론은 반증가능하다. 뉴턴의 물리학 이론에 따라 핼리가 계산한 혜성의 출현 주기는 75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혜성이 75년 주기로 나타나지 않으면 논증C의 결론이 부정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경우 전제들 중 적어도 하나가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보조전제들은 모두 적어도 높이 정당화된다. (그렇게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의심되는 것은 뉴턴의 이론이다. 즉 뉴턴의 이론은 반증가능한 이론으로서 과학적 가설의 체계로서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운명론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불우한 운명을 극복하고자 발버둥친다면, 그 행위도 운명적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일어난다. 따라서 운명론은 반증불가능하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그것은 `운명적으로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을 과학적 이론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운명론은 형이상학적 가설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가설들은 운명론의 경우처럼 과학적 가설을 평가하는 잣대에 의해서 평가할 경우 가설의 지위마저 확보할 수 없게 된다. 볼테르의 말을 빌자면 󰡒형이상학은 의혹의 장이고 영혼의 소설이다.󰡓만일 우리가 과학적 가설의 요건을 형이상학적 가설의 요건으로 삼게 되면, 형이상학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가 불가피하게 형이상학적 가설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고 그래서 적어도 이 가설들을 평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이 장의 마지막에서 형이상학적 가설을 평가하는 방법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6. 가설들의 경쟁

 

어떤 가설이 가설로서의 자격을 얻기 위한 `설명력이라는 조건은 단지 필요조건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 어떤 주장이 가설로서 인정되기 위해서는 설명력을 가질 필요가 있지만,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가설이 좋은 가설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설명력은 가설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못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4세기 중엽에 발생한 흑사병은 전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감소시킬 정도의 재앙이었다. 흑사병의 원인을 몰랐던 탓으로 사람들의 공포가 가중되는 가운데 수없이 많은 가설들이 난무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악마설 :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다. (그래서 이 가설을 믿는 사람들은 약초를 태우

거나 나무의 액을 구해서 마시는 일도 있었다.)

 

천벌설 : 하늘이 천벌을 내렸다. (이 가설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흑사병이 유행하 는 동안 기도만 하면서 위엄있게 죽어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적인 행동도 있었다. 완전한 알몸 또는 반나체의 남 녀가 찬송가를 부르며 손에는 십자가와 못이 박혀있는 가죽끈을 들고 마 을과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거리를 다니면서 그 가죽끈으로 자신의 맨살을 채찍질하여 살점이 찢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러한 미 치광이짓들은 흑사병과 함께 프랑스, 오스트아,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 유럽각지로 번져갔다. 이들은 자기 몸을 채찍질하는 고행을 통해 신의 노 여움을 푼다는 것이었다.)

 

천체이변설 : 토성과 목성이 겹치는 천체 이변이 일어났다. (파리대학의 의학부가 발표한 것이었다.)

 

독물설 : 누군가 물에 독을 탔다. (그래서 평소의 증오 대상이나 집단에 대한 복수 가 행해졌다. 특히 유태인들이 샘이나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은 대규모 적인 유태인 학살을 가져왔다. 그래서 당시 수많은 유태인들이 애매하게 생매장되거나 불 속에 던져져서 타 죽어갔다.)

 

흑사병의 원인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오늘날 되돌아보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중세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들이 가설적이라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에 따라 기이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흑사병의 예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가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일차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는 동일한 현상을 설명하는 경쟁 가설이 무수히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가설들 중에서 어떤 가설이 좋은 가설일까? 어떤 가설이 다른 가설들보다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시원한 대답은 없다. 즉 가설을 평가하는 기계적인 방법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설 평가가 자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 체계를 최대한 확장하고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가설을 다루기 때문이다.

 

7. 특수한 가설의 추리

 

왜 대통령의 크리스탈 술잔이 소프라노 가수가 날카로운 고음을 내었을 때 박살이 났을까?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가설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저격설 : 소프라노 가수가 날카로운 고음을 내는 순간 누군가 레이저 총으로 대통 령을 저격하려다가 실수로 술잔이 맞았다.

진동설 : 소프라노 가수가 날카로운 고음을 내는 순간 발생한 공기의 진동이 우연 히도 술잔의 공명 진동수와 일치했고, 그래서 에너지의 전달이 최대화되었 다.

귀신설 : 소프라노 가수가 날카로운 고음을 내는 순간 대통령의 술잔에 붙은 귀신 이 술잔을 깨뜨렸다.

 

이 가설들 모두는, 만일 참이라면 문제의 현상을 설명한다. 그러나 어떤 현상에 대한 설명력을 가진 가설들이 둘 이상 있을 경우 그 중 어떤 것을 최선의 가설로서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정합성, 증거력, 단순성 등이 그 기준의 역할을 한다.

 

정합성. 가설은 정합성이 높을수록 좋은 가설이 된다. 어떤 가설이든지 확립된 지식의 체계와 잘 어울리지 않으면 빈약한 설명으로 파기된다. 이 단계에서 귀신설은 폐기된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지식 체계가 귀신설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민한 독자는 가설의 정합성 요건이 미묘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가설이든지 이미 확립된 지식의 체계와 어울리지 않고서는 살아 남지 못할 경우, 기존의 지식 체계에 새로운 가설이 뚫고 들어갈 길이 없지 않을까? 지동설 이전에는 천동설이 확립된 지식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고, 지동설은 천동설과 양립할 수 없으므로, 지동설은 천동설을 이기기는 고사하고, 하나의 가설로조차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경우 지동설은 폐기될 것이고, 계속 천동설을 믿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정합성 요건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러한 반론은 자기부정적인 면이 있어서 의도한 바대로의 성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반론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정합성 요건이 불합리한 것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지식의 확장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갈릴레오의 시대에 지동설이 확립된 지식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할 때, 근대판 프톨레마이오스가 천동설을 들고 나왔을 경우, 이를 저지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지식 체계는, 만일 안정되었을 경우, 강한 보수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면, 기존의 지식 체계 내에 일단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기존의 지식 체계는 그 체계를 계속 유지시키려는 방향으로 새로운 지식의 도전에 대처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이론이든지 확립된 지식 체계의 시민권을 획득하려면, 그 체계와 양립한다는 것을 보여주든지, 아니면 기존의 체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전자의 방법은 새로운 지식을 얻게 하고, 후자의 방법은 새로운 지식으로 옛지식을 대치하는 일종의 지식 혁명이 일어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지식 체계는, 만일 안정되지 않았을 경우, 그 체계를 안정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갈구하게 된다. 그래서 안정되지 않은 기존의 지식 체계에 질서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이론은 크게 환영을 받는다. 반면 기존의 지식 체계를 흔들어 그 질서와 통일성을 위협하는 이론은 환영받지 못한다.

 

증거력. 가설은 그 가설이 옳다는 증거가 많고 옳지 않다는 증거가 적을수록 좋은 가설이 된다. 어떤 가설 H가 어떤 현상 d를 설명할 경우, dH에 대한 긍정적 증거라 하고, H-d를 설명할 경우, dH에 대한 부정적 증거라고 한다. 그리고 가설은 긍정적 증거가 많고 부정적 증거가 적을수록 좋은 가설이 된다.

 

위에서 든 예를 가지고 연구해 보자. 만일 대통령의 크리스탈 잔이 깨어진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진동설이 옳다면, 대통령의 곁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내무부장관의 잔도 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내무부장관의 잔도 대통령의 잔과 꼭 같은 잔이었기 때문이다.

 

내무부장관의 잔이 깨어졌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진동설은 긍정적 증거를 하나 가지는 셈이 된다. 그리고 저격설은 부정적 증거를 하나 가지게 된다. 반면에 내무부장관의 잔이 깨어지지 않았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진동설은 부정적 증거를 하나 가지게 되고, 오히려 저격설이 긍정적 증거를 하나 가지게 된다.

 

보완가설. 어떤 가설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증거는 그 가설이 최선의 설명으로 채택되는 길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가 된다. 그래서 적어도 부정적 증거를 가지고 있는 어떤 가설이 가설로서나마 명맥을 유지하려면, 그 부정적 증거를 어떤 형식으로든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보완가설이다.

 

진동설이 옳다면 내무부장관의 잔은 왜 깨어지지 않았는가? 같은 장소에 있었고 꼭 같은 잔이었는데, 하필이면 왜 대통령의 잔만 깨어졌는가? 내무부장관의 잔이 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진동설에 대한 부정적 증거가 아닌가? 아니다.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내무부장관의 잔은 같은 회사의 제품이고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대통령의 잔보다는 조금 더 두꺼웠을 수 있다. 이 경우 내무부장관의 잔은 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내무부장관의 잔이 대통령의 잔보다 약간 더 두꺼웠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면, 내무부장관의 잔이 깨어지지 않은 것이 설명된다.

 

이와 같이 부정적 증거를 해소시키는 주장을 보완가설이라 하는데, 보완가설은 물론 별도로 그 정당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보완가설은 실질적으로 부정적 증거를 해소하지 못한다. 그래서 보완가설을 많이 필요로 하는 가설은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다.

 

단순성. ‘오캄의 면도날로 알려진 단순성의 원칙󰡒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존재자의 수는 필요 이상으로 증가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원칙이다. 단순성의 원칙은 세계가 경제성의 원칙에 따라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가능하면 멀리 돌아가기보다는 지름길을 가고자 한다. 천 원 짜리 물건을 만 원 주고 사지 않는다. 바퀴벌레를 잡기 위해서 바퀴약을 뿌릴지언정 집을 불태우지 않는다. 나아가 우리는 자연 현상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한다. 한송이 패랭이꽃이 피게 하기 위해서는 그 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원리가 필요될 뿐이다. 자연은 패랭이꽃이 피게 하기 위해서 패랭이꽃이 피게 하는 데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원리를 적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현상을 단순하게 설명하는 가설을 선호한다고 볼 수 있다.

 

고대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모두 설명력이 있었으며, 증거력의 면에서도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그러나 정합성의 면에서는 천동설이 우위에 섰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동설이 채택되게 된 것은 이 이론이 천동설에 비해 월등하게 단순한 방법으로 천체의 운행을 설명하였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잔이 깨어진 이유를 귀신설로 설명하려는 것은 정합성의 원칙에도 어긋나고 반증가능성이나 검증가능성도 없으며 증거력도 없지만, 단순성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이 가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존재(귀신)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8. 인과관계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을 추리하는 것은 현상의 원인을 찾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인과관계에 대한 연구를 별도로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독재자 이 죽은 원인은 무엇이었던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많은 종류의 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심판 우주적 이성의 작용

의 종신 집권의 획책 심복 간의 세력 다툼

의 대권 야욕 팔자 소관 (운명)

의 성격 의 열등감

의 총격 심장 및 두개골에 총알 관통

뉴턴의 운동 법칙 (총알의 관성) 대뇌 및 심장 기능의 정지

사망 직전 우주의 물리적 상황

 

일상적으로는 위와 같은 설명 하나하나가 다 사망의 원인으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곧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원인이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이들 모두가 다 원인은 아니라면, 어떤 것이 진짜원인일까? 도대체 진짜원인 같은 것이 있을까? 어떤 것이 가짜원인이라면, 왜 그것이 진짜원인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도대체 원인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궁금증들을 가지고, 먼저 원인으로 제시된 것들의 성격부터 분류해 보자.

부터 까지는 의 죽음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을 하고 있다. ‘목적론적 설명은 다음과 같이 어떤 사건이 어떤 존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어난 것으로 설명한다. :

 

원인 C

(미래사건 F를 일으키고자 하는 어떤 정신적인 존재의 지향적 태도)

결과 E

(F를 실현시키는 수단)

?

미래사건 F

 

특히 는 어떤 거시적 목적 또는 설계를 원인으로 들고 있는 반면, , , 는 인간의 목적, 계획 또는 의도를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이하는 기계론적 설명을 하고 있다. ‘기계론적 설명은 다음과 같이 사건들을 목적이나 의도와 같은 지향적 태도를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순수하게 사건들간의 관계로 설명한다 :

 

원인 C(사건 C)

결과 E(사건 E)

 

특히 의 성격이나 열등감과 같은 구조적 심리 현상들을, 이하는 물리적 사건들을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은 목적론적 설명과 기계론적 설명의 중간쯤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목적론적 설명과 기계론적 설명 중 어떤 것을 택하는가는 설명 대상인 사건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형이상학적 입장을 전제로 한 시각을 제외해 놓으면, 사건들은 크게 인위적 사건과 자연적 사건으로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인위적 사건들에는 목적론적 설명을 적용하고, 자연적 사건들에는 기계론적 설명을 적용하면 된다. 그러나 자연적 사건들 중에도 일종의 목적론적 설명이 제시되는 경우가 있다. 󰡒심장은 왜 뛰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혈액을 순환시키기 위해서󰡓라는 식의 목적론적(기능적) 설명이 아직도 생물학에서 통용되기 때문이다.

 

어떤 설명 방식을 택하든, 어떤 사건을 불러일으킨 원인, 즉 결과에 대한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이상적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들에 유의해야 한다. :

 

. 원인은 결과에 앞선다. 그러나 앞서는 사건이 모두 원인인 것은 아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기식의 우연한 전후 관계를 인과관계로 보면 원인오판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목적론적 설명의 경우를 미래의 사건이 현재의 사건을 일으키는 경우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미래의 사건은 미래에 있지만 미래의 사건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목적이나 의도 등은 결과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원인과 결과는 시공적으로 가까이 있다. 그러나 시공적으로 가까이 있다고 해서 모두 인과관계는 아니다. 또한 달의 차고 기움이 인천 앞 바다의 높이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시공적으로 근접해 있지 않은 경우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 인과관계는 인과법칙을 함축한다. 특히, 사건들간에 인과관계가 이루어졌으면, 그 사건들을 인과관계로 맺어주는(예화시키는) 인과법칙이 존재한다. 따라서 인과법칙의 산물이 아닌 단순한 전후 관계를 인과관계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 인과관계의 기술은 정확할수록 좋다. 그래서 인과관계에 대한 이상적인 기술은 인과법칙을 드러내게 된다. 인과관계가 인과법칙을 함축하지만, 모든 인과관계에 관한 기술이 인과법칙을 기술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인과관계에 관한 일상적 기술은 대부분 부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 어떤 사건 N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다른 사건 E가 일어나지 않을 경우, NE에 대한 인과적 필요조건이라 하고, 어떤 사건 S가 일어나기만 하면 다른 사건 E가 일어날 경우 SE에 대한 인과적 충분조건이라 할 때, 어떤 사건에 대한 이상적인 원인은 그 사건에 대한 인과적 필요충분조건이다. TV가 작동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중요 부속품들 하나하나가 될 것이며, 그 필요조건들의 총체가 충분조건이 된다. 그러나 TV 작동의 충분조건은 필요조건이 아닌 것을 포함할 수 있다. 예컨대 TV를 받치고 있는 다리는 없어도 TV 작동에는 지장이 없기 때문에 필요조건이 아니다. 따라서 TV 작동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TV 작동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필요조건들만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흔히 제시하는 일상적인 의미의 원인은 이상적 원인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이상적 원인을 결코 가려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상적인 원인의 발견은 과학의 목표로서나 적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주어진 조건에 관한 한 최선의 설명을 발견하는 법을 알 필요가 있다.

 

9. 유비추리

 

우리는 흔히 비유를 들어 말한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저녁 노을 같았다󰡓와 같은 직유를 사용하기도 하고, 󰡒나의 마음은 붉게 타올랐다󰡓와 같은 은유를 사용하기도 한다.

비유는 적절하고 성공적으로 이용만 되면 매우 유용하다. 비유는 표현을 비옥하게 하고 강한 정서적 반응을 고취시킨다. 예수가 제자를 `사람을 낚는 어부라 부른 경우라든가, 한 사람의 고독하고 험난한 인생살이를 `험한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조각배의 운명이라고 묘사한 경우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경우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직접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울 때, 설명이 가능하게 한다. 원자 구조, 분자 구조에 관한 비유는 애매한 개념을 분명하게 하고, 그 비유의 모델에 따라 더 깊은 탐구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나아가 직접 추리가 어려운 논증을 전개하는 데 쓰일 수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적자 생존의 원칙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자연적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가를, 좋은 품종의 가축만이 주인의 사랑을 받고 살아 남을 수 있는 점에 비유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비유를 이용한 추리, 즉 유비추리는 다음 형식을 취하고 있다. :

 

XY는 다르지만 p, q, r이라는 속성을 가진 점에서 같다.

Xs 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Ys 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유비추리는 비증명적 논증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전제의 참이 결론의 참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대상들인 XY가 공유하고 있는 속성들 p, q, rXY의 본질적으로 중요하고 유관한 속성들이고, sY의 우연한 속성이 아닐 경우, 결론의 참이 매우 높게 정당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인간이면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친구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내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의 내적인 관찰을 통해 안다. 그러나 내가 친구의 마음을 관찰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구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유비추리를 내가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나와 친구는 다르지만, 사람으로서의 외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언어를 사용하 여 의사를 소통하며, 행위를 하는 등의 속성을 가진 점에서 같다.

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친구도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만일 지금이 인간공학이 대단히 발달한 미래의 어느 때라면, 이러한 추리를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겉보기에는 사람과 구분이 안되지만 마음이 없는 인조인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경우, 겉모습의 유사성으로부터 마음의 존재를 유추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입장에서는 󰡒친구도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은 최선의 설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가설에 필적할 만한 다른 가설이 없는 가운데, 나와 내 친구가 공유하고 있는 속성들이 본질적으로 중요하고 유관한 속성들이고, 내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의 우연한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대상들이 공유한 속성들이 본질적으로 중요하고 유관한 속성들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 외의 속성들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면, ‘잘못된 유비추리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유비추리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

 

. 가정된 유사성을 조사한다. 가정된 유사성이 참이 아닐 수도 있고, 유사성의 근거로 제시된 속성들이 우연하고 비본질적인 것들일 수 있다. 또한 두 대상은 세 가지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다른 열 가지 점에서는 다를 수 있다.

. 두 대상 중 한 대상이 가지고 있다고 제시된 속성이 그 대상의 우연한 속성이 거나 그 대상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속성인지 조사한다.

. 가정된 유사성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그 유사성을 받아들임으로써 받아들이 지 않을 수 없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다른 속성이 있는지 조사한다. 그러한 속성이 발견되면, 제시된 유비추리에 대한 반례가 발견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독재자들이 내세우는 국가론인 유기체론에 의하면, 국가는 유기체에 비유된다. :

 

개인의 국가에 대한 관계는 한 유기체의 부분과 전체의 관계와 정확하게 같다.

한 유기체의 부분은 전체에 예속적이다. , 부분은 전체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그 존재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만일 다리가 썩으면, 유기체 전체를 위해서 잘라버려야 한다.

 

∴ ⑶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익은 국가의 이익에 예속적이다. , 개인의 이익은 전 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정당화된다. 그래서 만일 개인의 이익이 국 가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개인의 이익은 희생되어야 한다.

 

는 옳다 하더라도, 은 어떤가? 물론 여러 면에서 국가는 유기체와 비슷하다 하겠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며, 전체와 부분이 있고, 머리에 해당하는 중요한 부분과 지체에 해당하는 덜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양자는 다른 면도 많다. 유기체의 부분은 전체에서 분리되었을 경우에 살 수 없지만, 개인은 국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딴 섬에 살 수도 있고, 외국으로 이민을 갈 수도 있다. 개인은 국가에 저항하여 국가의 성격 자체를 바꿀 수도 있지만, 유기체의 경우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유기체와 국가의 유사성을 받아들이게 되면, 유기체론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유기체의 경우, 뇌가 고장이 나면, 유기체의 전체의 건강을 위해, 뇌수술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수뇌가 독재를 하게 되면 국가 전체를 위해 수뇌부를 수술해야 하는 것이다. 독재를 정당화시키려 한 유비추리가 독재 타도를 정당화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나 우연적 속성들의 유사성에 근거해서 추리하는 것은 오류추리가 된다. 다음 예를 보자. :

 

나와 친구는 다르지만, 같은 하숙방을 쓰고 있고, 같은 종류의 구두를 신고 있 고, 같은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다.

나는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 ⑶ 친구도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나와 친구의 유사성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제시된 하숙방, 구두, 이발소 등은 모두 나와 친구에게 우연적으로 관계된 것들이다. 또한 내가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다는 것도 우연적인 일이다. 따라서 친구도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다는 결론은 어떤 개연성도 부여받지 못한다.

 

럿셀에 의하면 󰡒과학은, 비록 특수한 것에 대한 관찰로부터 출발하지만, 특수한 것보다는 일반적인 것에 관여한다. 과학에서, 어떤 사실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예화인 것이다.󰡓

 

그러나 귀납추리나 유비추리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일반성은 기껏해야 기술적(서술적)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귀납추리는 󰡒모든 까마귀는 검다.󰡓와 같은 일반적 주장을 개연성이 높은 주장으로 정당화시켜 주지만, 이러한 일반성은 󰡒왜 모든 까마귀는 검은가?󰡓와 같은 물음에 답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지적 호기심은, 관찰된 특수 사실들을 일반적으로 기술하려는 귀납추리의 방법이나, 서로 다른 대상들의 부분적 유사성을 확대하려는 유비추리의 방법으로는 만족되지 못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연구한 모든 방법을 종합적으로 적용한 비증명적 논증을 통해서 현상에 대한 설명적 일반 가설을 추리해 낼 수 있어야 이러한 지적 호기심이 만족되며, 과학이 발전하는 것이다.

 

10. 설명적 일반 가설

 

만일 우리가 관찰한 것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일상적인 어휘만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곧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일반성의 상한선에 도달하고 만다. 종이를 불에 태우면, 종이는 재로 변한다. 이 경우 우리는 󰡒종이가 재로 변하게 하는 원인은 불이다.󰡓는 귀납적 일반 가설(진술)을 귀납적으로 추리해 낼 수 있다. 쇠를 공기 속에 놓아두면 녹이 슨다. 그래서 우리는 󰡒쇠를 공기 속에 놓아두는 것은 쇠가 녹슬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기술적 일반 가설을 귀납적으로 추리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왜 불은 종이를 재로 변하게 하며, 왜 공기는 쇠를 녹슬게 하는 것일까? 일상적 어휘들만으로는 이러한 물음들에 답할 수 없다. 일상적 어휘들만으로는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일반성의 상한선에 부딪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은 새로운 어휘,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문제의 현상에 대한 설명을 도모하게 되는데, 이 경우 과학이 추리하려는 것을 설명적 일반 가설이라고 한다. 과학 발전의 핵심은 바로 이 설명적 일반 가설의 추리에 있다.

 

18세기 초, 과학자들은 종이가 타고 쇠가 녹스는 두 가지 현상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설명적 일반 가설을 정립시키기 위해 격론을 벌였다. ‘플로지스톤 이론산소 이론의 대결을 간단히 살펴보자.

 

플로지스톤 이론 : 종이와 쇠는 다같이 플로지스톤이라고 하는 물질을 함유하고 있다. 종이는 타는 과정에서 이 플로지스톤이 분리되어 재로 변한다. 쇠가 공기 속에 있을 때 이 플로지스톤이 쇠를 떠나기 때문에 쇠는 녹이 슨다.

산소 이론 : 공기 속에는 산소라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다. 이 산소가 물질과 결 합함으로써 종이는 타서 재가 되고 금속은 녹이 슨다.

 

여러 가지 실험 끝에 라보아제의 산소 이론이 플로지스톤 이론보다 더 좋은 것으로 판명이 났다. 중요한 실험들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실험] 밀폐된 곳에서 수은을 가열하였다. 그 결과 쇠찌꺼기가 형성되었는 , 그 수은 찌꺼기의 무게는 본래 수은의 무게보다 더 무거웠으며, 밀폐된 곳의 공기는 실험 전의 무게보다 가벼워졌다.

 

이 실험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산소 이론에 대한 긍정적 증거가 되었다. :

 

산소 이론

밀폐된 곳에서 수은을 가열한다.

만일 산소 이론이 옳다면, 밀폐된 곳에서 수은을 가열할 경우, 수은 찌꺼기의 무게는 본래 수은의 무게보다 더 무거울 것이며 밀폐된 곳의 공기의 무게는 실험 전의 무게보다 가벼워질 것이다.

∴ ⑷ 수은 찌꺼기의 무게가 본래 수은의 무게보다 더 무거워지고 밀폐된 것의 공기의 무게는 실험 전의 무게보다 가벼워질 것이다.

 

실험의 결과는 산소 이론이 예측하는 바를 정확하게 나타내었던 것이다. 반면에 이 결과는 다음과 같이 플로지스톤 이론에 대한 부정적 증거가 되었다. :

 

플로지스톤 이론

밀폐된 곳에서 수은을 가열한다.

만일 플로지스톤 이론이 옳다면, 밀폐된 곳에서 수은을 가열할 경우, 수은 찌 꺼기의 무게는 본래 수은의 무게보다 더 가벼울 것이며 밀폐된 곳의 공기의 무게는 실험 전의 무게보다 무거워질 것이다.

∴ ⑷ 수은 찌꺼기의 무게가 본래 수은의 무게보다 더 가벼워지고 밀폐된 곳의 공 기의 무게는 실험 전의 무게보다 무거워질 것이다.

 

실험의 결과는 가 거짓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에 대한 강력한 부정적 증거가 제시된 것이다. 플로지스톤 이론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이 부정적 증거를 해소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보완가설을 내놓았다 :

 

[보완가설] 플로지스톤은 부정적 무게를 가지고 있어서, 플로지스톤을 가진 어떤 물 질로부터 플로지스톤이 제거되면, 그 물질은 더 무거워지고, 어떤 물질에 플로지스톤이 첨가되면, 그 물질은 더 가벼워진다.

 

그러나 이 보완가설은 임시변통적인 보완가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 보완가설을 받아들이게 할 만한 어떤 이유도 없는 상태에서, ‘부정적 무게라는 개념이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무게라는 개념과 정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설명적 일반화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얼마나 넓혀 줄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작은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예가 보여주는 것은 일반적으로 참되다. 즉 일상적 개념을 사용한 기술적 일반화는 곧 일반성의 상한선에 부딪치게 되고, 우리의 세계를 새로운 개념들과 이 새로운 개념들이 도입하는 새로운 요소들로 다시 생각해 봄으로써만이 보다 높은 일반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과학은 우리가 관찰하는 현상들의 근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개별적이고 상이하다. 따라서 그런 개별적이고 상이한 현상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하려 한다면, 그들을 한데 묶어 일반적 설명을 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용어가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결합 용어의 도입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가운데, 우리는 현상의 비밀스러운 근저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상식 및 저급한 수준의 과학으로부터 고급의 과학으로 가는 결정적 단계는 이와 같이 새로운 개념의 형성에 의해 취해진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개념들을 이용한 설명적 일반 가설들은 현상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설명으로서 형성되고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형성은 과학적 천재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일단 새로운 개념이 형성되고 가설이 설정되게 되면, 최선의 설명을 이끌어내기 위한 비증명적 논증의 평가 방법이 적용되게 된다.

우리가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의 법칙들도 사실은 설명적 일반 가설들에 불과하다. 현재의 시점에서 최선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더 좋은 가설에 의해 대치될 때까지 법칙의 지위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

< 논리와 비판적 사고, 1995, 철학과 현실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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