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 학교에서 바라본 두승산의 변화하는 모습과

그 위로 기우는 낙조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늦가을의 노쇠하고 쓸쓸한 햇살을 어깨에 싣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차를

2층 혹은 3층에서 바라보는 일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학교 뒷편의 넓은 택지와 산, 그리고 그 산 아래로 아침이면 몰려오는 산안개가 우리를 즐겁게 한다.
빈 땅에 씨를 뿌리는 부지런한 농부의 때묻은 몸동작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른 새벽, 초췌한 모습으로 자판기 옆에서 커피잔을 들고 뒷산을 바라보는

3학년 학생의 굽은 어깨가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 굽은 어깨에는 미래의 꿈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견뎌내는 인내의 아름다움이 있다.

자율학습을 하다가 엎드려 잠든 아이의 고단한 뒤척임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그 뒤척임에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땀이 젖어 있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등교하는 학생의 젖은 머리카락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삶은 맹목적인 환희이다.
그 젖은 물기에는 아직 때묻지 않은 삶에의 환희가 담뿍 담겨있다.

아침 자율학습에 늦지 않기 위해 커다란 보폭으로 등교길을 재촉하는 아이의 상기된 얼굴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목적이 있는 자는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아침부터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들지 않는다.
목적이 없는 자가 남의 삶에 시비를 건다고 했던가.

토요일 오후

모두 떠난 교실의 한구석에서 영어 단어를 외우고 소설책을 읽고 일기를 쓰는 아이의 차분한 표정,
식당에서 주변의 눈초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어장을 힐끔거리는 아이의 단호한 표정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아,
휩쓸리는 세상에,
자아가 없는 세상에,
오히려 주체가 없는 자들이 큰 소리 치는 세상에,
이만큼 작은 용기를 낸다는 것은,
또 그런 모습을 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른 아침 담임 선생님의 책상을 정성스레 닦고 정돈하는 주번의 손,
아직은 철없는 몇 명 아이들 때문에 상처받은 선생님에게 부끄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힘내세요, 라고 한마디 내던지고 얼른 교무실을 떠나는 아이의 목소리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나와 너>를 고민할 줄 아는 아이들과 한 공간에서 숨쉬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행복한가.

꿰맨 스타킹을 신고 자신있게 복도를 활보하는 아이의 걸음걸이,
모두들 황급히 떠나간 토요일 오후 말없이 학교 주변 쓰레기를 줍는 아이들,
수업시간에 졸아서 죄송하다고 하굣길에 교무실에 들러 조그맣게 말하고 지나가는 아이들,
작문 시간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는 아이들의 표정,
타자실(지금은 없어졌지만)에서 들려오는 소나기같은 타자소리,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뿐인가.

 

 

자꾸만 다른 길로 가려는 친구에게 매일같이 쪽지를 보내는 황홀한 손,
불우이웃돕기 때문에 깨뜨린 돼지 저금통을 아낌없이 가져오는 깨끗한 손,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 때문에 답답해 눈물 짓는 그 열심,
자정이 지난 시간 음악실의 커텐 너머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미전을 준비하기 위해 밤을 지새며 그림을 그리는 충혈된 눈,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삶의 즐거움이란 결국 삶에 대한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삶에 준비란 없다.
고등학교 3년은 결코 대학을 위한 준비기간일 수 없다.
그 자체가 삶이다.
삶의 사막을 건너는 자에게 주어진 임무는 '열심히' 걷기이다.
물론 걷다보면 때로 두 다리를 뻗고 쉬는 시간도 필요하고 때로 노래를 불러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러나 역시 우리의 임무는 걷기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 지 아는 자는 없다.

 

그늘이 넓다고 오래 쉴 수 없고 오아이스가 있다고 그곳에 취해 쓰러질 수도, 자만할 수도 없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의미보다는 열심히 '산다'는 것이 우리의 주된 임무일 것이다.

'열심히'라는 말이 너무 진부하고 쑥스러운가.
그럼 '무심코' 걸으라.
그늘에서 안일하게 쉬는 자들이, 걷다가 넘어지는 자들을 비웃는 웃음을 두려워 하지 말라.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