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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고 죽어라(Die Broke)" - 스테판 M. 폴란, 마크 레빈(S.M.Pollan,M.Levine)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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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고 죽어라(Die Broke)" - 스테판 M. 폴란, 마크 레빈(S.M.Pollan,M.Levine)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 세계관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적합하지 않는 것일 때도 말이다. 예컨대, 노비 제도가 소멸된지 한참 뒤에도 상당수의 시골 머슴들은 여전히 '머슴'으로 살고 있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그들은 머슴으로 사는 것 외의 다른 삶의 방식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시키는 대로 일해서 주인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는 것, 그것 외의 다른 삶의 목표란 알지도 못할뿐더러 있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등하게 변한 세상에서 여전히 '머슴'으로 살고 있는 그가 과연 제대로 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당장은 그럴지도 모른다. 주인에게 칭찬과 사랑 받는 성실한 '모범 머슴'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런 삶의 모순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 계기가 주인집의 몰락이 될 수도 있고, 외지로 공부하러 떠나려 하는 자식이 준 충격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그의 세계관이 변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기 힘들다는 점이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있는 지금에서도, 대부분의 이들에게 이런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앞서의 '머슴들'처럼, 현실에는 전혀 적용될 수 없는 낡은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예컨대, 우리는 여전히 20세기 중반에나 통할 법한 다음과 같은 '삶의 모델'을 갖고 있는 것이다.

 

"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업()을 얻고, 성실히 노력해서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며 헌신적으로 일하여 자기가 속한 직장을 더욱더 안정되게 하고, 이를 통해 회사와 자신의 입지와 신용을 더욱더 공고히 한다. 나아가 가능하면 경제적 기반을 빨리 갖춰서 일찍 은퇴하여 한가롭고 여유 있게 살다가, 많은 재산을 후손에게 남겨준다."

 

우리는 대체로 이와 같은 목표를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위의 목표가 실현 가능한 것인가? 70-80년 상황이라면 가능했었는지도 모른다. 열심히 공부하여 일류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면 내노라 하는 직장에 취직하여 정년을 보장받으며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도 좋은 직장은커녕 단돈 몇 푼을 받는 임시직을 얻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다. , 취직해서는 어떤가? 직장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다 해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영미권 국가들에서는 경제 호황기의 가장 잘 나가는 기업에서조차 '경영합리화'라는 미명하에 대규모 감원을 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또한, 세월이 가면 자동적으로 봉급이 오르던 과거와는 달리, 수입은 해마다 그대로이거나 심지어 줄어들기까지 한다. 저축을 해서 안정된 기반을 갖춘 후 은퇴를 한다? 그야말로 이 것은 '꿈같은 소리'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은퇴'는 더 이상 평생 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휴식이 아니다. 과거 정년이 65세였던 시기의 평균 수명은 63세였다. 현재의 평균 수명은 70세를 훌쩍 넘어서 80세에 육박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 대다수 직장의 정년은 55-63세이다. 은퇴한 후 근 20년의 세월을 '휴가'로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이토록 휴식은 축복이라기보다 고문에 가깝다.

 

 

, 용케 재산을 잘 보전하고 불려서 자식에게 많은 돈을 남겨주었다고 해도, 이 또한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 유산을 두고 갈등하는 수많은 부모 자식들을 보라. 더 많은 유산을 남겨주려는 부모의 마음 때문에, 정작 '지금' 돈이 꼭 필요한 자녀들은 고통을 받고 부모를 원망하게 된다. , 부모의 돈이 '유산'으로 여겨질 때 부모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는 모든 돈은 곧 자녀들에게 '유산의 상실'로 여겨진다. 자손을 위해 유산을 남겨야 한다는 극히 '인간적인' 고정 관념 때문에 오히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비인간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지은이들은 이제 현실과 맞지 않는 가치관은 과감하게 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다 쓰고 죽어라'의 철학이다.

 

먼저, 지은이는 우리에게 '오늘 당장 사표를 써라'고 충고한다. 실제로 다니는 직장에 사표를 내라는 말이 아니다. 직장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으로 생활하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자신의 직장과 직위는 곧 자기 자신의 사회적 자아였다. 따라서 직장에서 쫓겨남은 곧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봉제 계약과 대규모 감원이 일상화된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개인에게 직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자신의 직업과 직장은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다. 이 것은 그냥 돈을 버는 수단일 뿐이다. 최선을 다해 생업에 충실해야 하지만 나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프로 운동 선수들은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구단이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거나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다른 구단이 나타나면 미련 없이 팀을 떠난다. 더 이상 직장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 현실에 있어, 우리는 과거의 천직(天職)관을 버리고 이런 '상업적 직업주의'를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몸값을 높일 수 있는 부단한 자기 계발이 당연히 요구된다.

 

둘째, 지은이는 '현금으로 지불하라'라고 충고한다. 더 이상 직장은 안정적이지 않다. , 시간이 흐른다고 자동적으로 수입도 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소비는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비를 가급적 불편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돈을 쓰기가 불편하다면 충동적으로 돈을 쓰기 전에 이것이 과연 내게 필요한가를 한번 더 생각하게 때문이다. 돈을 찾고 쓰는 것을 편리하게 함으로써 소비를 무한정 부추기는 신용카드 사용은 최소화해야 한다. '현금으로 지불하라'는 충고는 바로 이런 뜻이다.

 

셋째, 지은이는 '은퇴하지 말라'고 말한다. 현대 사회의 노동은 과거처럼 튼튼한 육체 없이는 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정신노동이 대부분이기에 능력으로만 따지자면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굳이 은퇴할 이유는 없다. , 평균 수명이 80세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은퇴 후 근 20년을 '휴가상태'로 보낸다는 것은 개인이나 사회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는 언제까지 돈을 모았다가 그 돈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은퇴한다는 식의 재정설계를 포기해야 한다. 삶의 끝까지 일하는 것이 현명하다. 평생동안 한 가지 일만을 죽을 때까지 하라는 뜻은 아니다. 나이 들면 여건에 따라 파트 타임으로 할 수 있는 일, 아니면 보다 단순한 업종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하며 그 속에서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넷째, 지은이는 '다 쓰고 죽어라'라고 말한다. 유산에 대한 집착이 평생 삶을 찌들게 한다. 여기서 벗어나 '지금' 진정 필요한 데에 돈을 쓰도록 하라. 후손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우리가 유산을 요구할 자연적인 권리도 없다.) 꼭 후손들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금 배풀어라. 후손들이 자신이 죽기를 바라고 스스로도 '자손을 위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궁핍한 삶을 꾸려가지 말라. 유산에 대한 그릇된 집착만 버리면 지금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살수가 있다.

 

지은이의 가치관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 " 불가능한 목표(안정적이고 월급을 잘 주는 만족스러운 직장)를 포기하고, 잘못된 경제습관(신용카드를 사용해 저축을 못하는)을 버리고, 임의의 마감 시간(65세의 은퇴)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경제적 불멸에 대한 어리석은 꿈(유산 상속)을 꾸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실용서이다. 책에서 이처럼 '새로운 삶의 철학'을 말하는 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다 쓰고 죽기 위한' 여러 가지 재정적 방법-보험 관계, 주택, 투자 자문, 유언장 작성법 등등-에 할당되어 있다. 지은이들이 재정 설계사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이점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책의 실용적 가치는 그다지 크지 않다. 이 책이 설정하고 있는 미국의 상황과 지금의 한국의 현실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실용서'임에도 국내에서는 삶의 지침을 새롭게 제시하는 '인생철학(?)' 책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이런 유의 책들이 거의 그렇듯이 이 책도 첫 장만 읽으면 나머지 내용을 모두 알 수 있는 그런 책 중에 하나이다. 끝없는 중언부언이 읽는 독자를 지치게 한다. 재정 설계사가 아닌 이상, 이 책에서 지금의 서평 이상의 유용한 내용을 얻기 힘들 것이다. 돈주고 살만한 책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읽고 싶다면 빌려 읽거나 서점에서 읽도록. 신문 칼럼 이상의 의미는 없는 책이다.

 

교사 안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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