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매헌에게 주는 글[與梅軒書]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매헌에게 주는 글[與梅軒書]

 

홍대용(洪大容) 지음

유승주(柳承宙) 옮김

 

독서는 실로 기억하여 외어 읽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초학자(初學者)로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더욱 의거할 데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매일 배운 것을 먼저 정확하게 외고 음독(音讀)에 착오가 없이 한 뒤에 비로소 서산(書算)을 세우고, 먼저 한 번 읽고 나서 다음에는 한 번 외고, 그 다음에는 한 번 보며, 한 번 보고 나서는 다시 읽어 모두 3, 40 번 되풀이한 뒤에 그친다. 매양 한 권이나 흑은 반 권을 다 배웠을 때에는 전에 배운 것도 아울러 또한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외고, 그 다음에는 보되, 각각 서너너덧 번 반복한 뒤에 그친다.

 

글을 읽을 때에는 소리로 읽어서는 안 된다. 소리가 높으면 기운이 떨어진다.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눈을 돌리면 마음이 달아난다. 몸을 흔들어서도 안 된다. 몸이 흔들리면 정신이 흩어진다.

 

글을 욀 때에는 틀려서는 안 되고, 중복되어도 안 되고, 너무 빨라도 안 된다. 너무 빠르면 조급하고 사나워서 음미함이 짧으며, 그렇다고 너무 느려도 안 된다. 너무 느리면 정신이 해이하고 방탕해져서 생각이 부풀어진다.

 

책을 볼 때에는 마음 속으로 그 문장을 외면서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하여 찾되, 주석(註釋)을 참고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궁구해야 한다. 만일, 한갓 눈만 책에 붙이고 마음을 두지 않으면 또한 이득이 없다.

 

이상의 세 조목은 나누어 말하면 비록 다르나, 요컨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체득해야 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모름지기 몸을 거두어 단정히 앉고, 눈은 똑바로 보고, 귀는 거두어들이며, 수족은 함부로 놀리지 말며, 정신을 모아 책에 집중해야 한다. 계속 이처럼 해 나가면 의미가 날로 새로워 자연히 무궁한 묘미가 쌓여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 공부할 때에 회의(懷疑)를 품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이다. 그러나 그 병의 근원을 따져 보면, 뜬 생각에 따라 쫓다가 뜻을 책에 전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뜬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 억지로 배제하려고 하면 이로 인해 도리어 한 가지 생각을 더 첨가시켜 마침내 정신적인 교란만을 더하게 된다. 어깨와 등을 꼿꼿이 세우고, 뜻을 높여 한 글자 한 구절에 마음과 입이 상응하게 되면, 뜬 생각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게 된다.

 

뜬 생각이란, 하루 아침에 깨끗이 없어질 수는 없다. 오직 수시로 정신을 맑게 하는 방법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흑 심기가 불편하여 꽉 얽매여 없어지지 않으면, 묵묵히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배꼽 근처에 집중시킬 때 신명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뜬 생각은 사라지게 된다. 과연 이러한 방법을 잘 실행한다면, 얼마 안 가서 공부하는 것이 점점 익숙해지고 효험이 점차 늘어나 오직 학식만이 날로 진척될 뿐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고 기운이 화평하여 일을 함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에만 힘쓰고 정밀하게 된 다. 위로 이치에 통달하는 학문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의리(意理)는 무궁한 것이니, 함부로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문자를 거칠게 통한 사람은 반드시 의문이 없게 마련인데, 이는 의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궁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문이 없는 데서 의문이 생기고, 맛이 없는 데서 맛이 생긴 뒤에라야 능히 글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다.

 

독서는 결코 의문을 품으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뜻을 오로지 하나에만 집중하여 읽고, 읽어 가되 의문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의문이 생기면 반복해서 참고하고 연구해야 한다. 반드시 문자에만 집착하지 말고, 혹 일을 당했을 때는 시험도 해 보고, 흑 노는 가운데서도 구하기도 하며, 무릇 걸어갈 때나 앉고 누울 때에도 수시로 궁구하고 탐색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기를 끊이지 않고 계속하면 통하지 못할 것이 거의 없고, 설사 통하지 못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먼저 이처럼 궁구하고 탐색한 다음에 남에게 물으면 마침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깨달을 수가 있다.

 

독서할 때에도 쓸데없이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음독이 뒤섞이게 하거나, 억지로 자구를 맞춘다든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어려운 것을 들추어 낸다든가, 남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나쳐 버리고 돌아 보지 않는다든가, 한 번 묻고 한 번 대답 하고는 다시 더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익을 구하는 데 아무 뜻이 없는 사람이 니 더불어 학문을 할 수가 없다.

성현의 언어를 볼 때는 고인을 참고하고, 이미 이루어졌던 자취를 더듬어 그것을 내 자신에게 돌이켜 적당한 변통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흠앙하고 부러워하며, 고마움 속에 간절함이 마치 바늘로 몸을 찌르는 것 같아야 한다. 고인의 독서는 대개 이러한 본령이 있었으니, 이와 같이 아니 하면 모두가 거짓 학문이 되고 만다.

 

나는 일찍이 맹자(孟子)내 뜻으로써 남의 뜻을 거슬러 구한다.’는 이의역지(以意逆志) 네 글자를 가지고 독서의 비결로 삼았다. 고인이 지은 글에는 의리와 사공(事功)뿐만 아니라 시문을 짓는 방법이나 기승전결 등 문장의 말기(末技)라도 모두가 각각 그 뜻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제 나의 뜻으로써 고인의 뜻을 받아들여 빈틈없이 합하고 흔연히 풀리면, 이는 고인의 정신과 식견이 내 마음 속에 침투해 들어온 셈이 된다. 비유컨대, 굿을 하는 무당이 신이 내려 혼령이 몸에 붙으면 훤히 깨달아져 그것이 어디로부터 어디에 왔는지 아는 것과 같다. 능히 이와 같이 되면, 장구(章句)에 의지하거나 묵은 자취를 답습하지 않아도 모든 변화에 적응하되, 이리 가나 저리 가나 근원을 찾게 될 것이니, 나도 또한 고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독서한 연후라야 가히 자연의 기교를 체득할 수가 있다.

 

고인의 글을 짓는 것은 문장에 힘써 공명을 취하려는 것도 아니요, 널리 보아 기억한 것을 밑천으로 삼아 명예를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장에 힘쓰고 널리 보아 기억한 것을 밑천으로 삼으려는 사람도 또한 조급하게 섭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종일 외고 읽어 눈이 글줄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스스로 이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입으로만 읽고 마음을 쏟지 않으니, 작자의 본지(本志)에다 견주어 볼 때, 열 겹 스무 겹의 철관(鐵關)이 가로막혀 있을 뿐이다. 이 어찌 도에서 더욱 더 멀어지지 않겠는가? 이는 천하의 쓸모 없는 재주이다.

 

초학자의 독서에 있어서 누구인들 그 어려움을 괴롭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괴롭고 어려운 것을 그대로 두고 편의함만 찾아 구차스럽게 편안히 지내려고 한다면, 이는 쓸모 없는 재주로 끝날 따름이다. 만약, 조금만 스스로가 굳게 참고 반성하며 점검하기를 잊지 않는다면, 십여 일 내에 반드시 소식이 있어 고난은 점차 사라지고, 취미는 날로 새로워져서 점차 손이 저절로 춤추고, 발이 저절로 뛰는 지경에 이르리니,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생 백 년간에 근심과 괴로움이 쉴새없이 찾아들어 편히 앉아 독서할 시간이란 거의 얼마 안 되는 것이다. 진실로 일찍 스스로 깨달아 노력하지 않고, 구차스럽게 살아가다가는 쓸모 없는 재주로 끝나고 말 것이니, 만년에 가서 궁박한 처지에 놓였을 때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