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동양 철학과 현대 과학이 만나는 곳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동양 철학과 현대 과학이 만나는 곳

 

프리초프 카프라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무례한 일이 아니다. ......

모든 길을 가까이, 자세히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 보아라.

그리고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 없는 길이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Carlos Castaneda), 『돈환 (Don Juan)의 가르침』

 

 

현대 물리학은 인류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막중한 영향을 끼쳐 왔다. 그것은 자연 과학의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자연 과학과 기술 공학의 결합은 행ㆍ불행 간에 지상의 생존 조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오늘날 원자 물리학의 성과를 이용하지 않은 산업은 거의 없을 정도이며, 이것이 원자 무기에 이용됨으로써 전세계의 정치 구조에 끼친 영향력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영향권은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그것은 사상과 문화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어서 우주에 대한,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일대 수정을 하게끔 했다. 20세기에 있어서의 원자 (原子)와 아원자 (亞原子) 세계에 대한 탐구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고전적 이념의 한계를 드러나게 해 주었으며, 우리가 종래 지녀 왔던 기본 관념의 대부분에 걸쳐 근본적인 수정이 불가피하게 해 주었다. 예컨데 이원자 물리학에 있어서의 물질의 개념과 고전 물리학에 있어서의 전통적인 실체관은 전혀 다른 것이다. 공간, 시간, 인과율과 같은 개념도 마찬가지다. 이런 개념들은 우리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데 기본이 되는 것인데, 이의 급격한 변모에 따라 우리의 세계관도 함께 따라서 변해 온 것이다. 현대 물리학으로 인한 이러한 전환은 지난 수십 년 이래 많은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서 폭넓게 논의하여 왔지만 이런 변화들이 동양의 신비주의 속에 자리잡고 있는 관점과 매우 유사한 방향의 세계관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 대해서 좀처럼 깨닫지 못하였던 것 같다.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들은 극동의 종교 철학에 표명된 여러 개념들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비록 이러한 유사성이 아직까지는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지 않지만 인도와 중국, 일본 등지에 강연 여행을 다니면서 극동 문화에 접촉할 수 있었던 금세기의 몇몇 위대한 물리학자에 의해서 주목을 받아 왔다. 다음의 세 인용문은 그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인지(人智)에 관한 일반적 관념 ……원자 물리학 분야에서의 여러 가지 발견에 의하여 설명되고 있는 이러한 것은 본질적으로 생소한 것이거나 전대 미문(前代未 聞)의 것이거나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문화사 속에서도 하나의 맥락을 가지고 찾을 수 있는 것이며, 불교나 힌두 사상 속에서는 더 중요한 중심적 위치를 점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옛 지혜의 예증이자 그것의 장려이며, 또한 그것을 한층 더 갈고 다듬는 일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J.)

원자 이론의 가르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거대한 존재의 드라마에 있어서 관객이며 연기자로서의 우리 입장을 조화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부처나 노자(老子)와 같은 사상가들이 일찍이 부딪쳤던 인식론적 문제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닐스 보어(Niels Bohr)

지난 전쟁 이후 이론 물리학 분야에 끼친 일본의 지대한 공헌은 극동의 전통속에 담긴 철학적 이념과 양자 이론의 철학적 본질의 사이의 어떤 관계를 시사한 점일 것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이 글의 목적은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과 극동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 속에 들어 있는 기본 사상들 사이에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20세기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이 어찌하여 힌두교도나 불교도, 도가(道家) 신도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보게끔 우리에게 강요하느냐, 또한 미시 세계의 현상, 즉 모든 물질을 생성하고 있는 아원자들의 속성과 그 상호 작용을 기술하기 위하여 두 이론을 결합하려는 최근의 시도를 살펴보면 이 유사성이 얼마나 더 뚜렷해지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현대 물리학과 동양적 신비주의자 가운데 어느 쪽에서 한 말인지 모를 지경에까지 종종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동양적 신비주의'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힌두교와 불교와 도교의 종교적 철학을 뜻한다. 그들은 정묘(精妙)하게 짜여진 수많은 계율과 철학 체계를 포용하고 있지만 그들의 세계관의 기본 특성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점은 동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신비적 성향을 가진 철학에서 어느 정도씩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의 논점을 대범하게 일반화하자면, 현대 물리학이야말로 이제까지 모든 시대와 전통의 신비주의자들이 지녀 왔던 관점과 매우 유사한 세계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모든 종교 속에는 신비적 전통이 담겨 있으며 서양 철학의 많은 힌두교의 『베다경』이나 『역경(易經)』,『불경』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나, 이븐 아라비의 수피 교(敎)나 야키 마술사 돈 환(Don Juan)의 가르침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서양에서는 언제나 방계적인 역할을 한 데 불과하지만 동양에 있어서는 철학적·종교적 사상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는 데 동·서양 신비주의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편의상 '동양적 세계관'에 관해서 논할 것이며, 오직 특별한 경우에만 신비적 사상의 다른 원천을 언급할 것이다.

만약 오늘날 물리학이 본질적으로 신비적인 세계관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가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2,500년 전의 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되겠지만 서구 과학의 나선형식(螺線形式) 발달 자취를 따라 살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그것은 초기 그리스의 신비적 철학에서부터 출발하여 주지주의적 사고의 인상적인 발전을 통해 융성하고 개화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점차 그 신비적 근원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극동의 세계관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서구 과학은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고 다시 초기 그리스나 동양 철학의 관점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직관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치밀하고 정교한 실험과 엄밀하고도 일관성 있는 수학적 형식주의 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서양 철학이 다 그런 것처럼 물리학도 그 근원은 기원전 6세기의 초기 그리스 철학, 곧 과학과 종교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문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오니아의 일레토스 학파의 현인(賢人)들은 이러한 구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이 '피지스(physis)'라고 불렀던 사물의 본질, 즉 진정한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물리학(physics)'이란 용어도 이 그리스 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것은 원래 모든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노력을 뜻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모든 신비주의자들의 중심 과제였던 것은 물론이지만, 특히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은 이런 신비주의적 경향을 실로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들은 생물과 무생물, 정신과 물질을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후대의 그리스 인들은 밀레토스 학파를 '물활론자 (hylozoist, 物活論者)' 즉 '물질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들은 모든 존재의 양식을 생명과 영성(靈性)이 부여된 '피지스'의 구현으로 보았기 때문에 실제 물질에 해당하는 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탈레스는 모든 물질은 신성(神性)으로 충만해 있다고 선언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인체가 공기에 의해 유지되듯이 우주는 우주의 숨결인 '프노이마(pneuma, 靈魂)'로 지탱되는 일종의 유기체라고 본 것이다.

밀레토스 학파의 일원론적, 유기론적 관점은 고대 인도나 중국의 철학과 극히 근사한 것이었으나 동양 사상과의 유사성이란 면에서 본다면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에서 훨씬 더 뚜렷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를 부단히 변화하고 영원히 '생성'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지한 존재란 거짓된 바탕위에 놓여진 것이며, 그의 보편 원리는 만물의 부단한 활동과 변화를 상징하는 불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내의 모든 변화는 대립자들의 역학적이며 주기적인 상호 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고 가르쳤으며, 대립자의 쌍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았다. 이 대립하는 힘들은 내포하면서 초월하는 통일체를 그는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이 통일체의 분열은 엘레아 학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학파는 여러 신과 인간의 위에 신성한 원리가 있다고 간주했다. 이 원리는 처음에는 우주의 통일체와 동일시되었으나 후에 와서는 이 세계의 위에 군림해서 지배하는 지적이요 인간적인 선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끝내는 정신과 물질의 분열, 즉 서양 철학의 특성이 된 이원론으로 이끌어 간 사조가 시작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세차게 맞선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이 방향으로 과감히 나아갔다. 그는 그의 기본 원리를 '존재'라고 부르고 그것을 유일 불변의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변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보는 듯한 변화란 단지 감각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철학으로부터 모든 변화하는 속성의 주체로서 불멸의 실체라는 개념이 자라나게 됐으며, 이것이 곧 서양 사상의 기본 개념의 하나가 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심히 대척적 (對蹠的)인 관점을 극복고자 했다.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의 존재라는 이념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영원한 생성 이념을 융화시키기 위하여 불변의 실제를 갖는 어떠한 것 속에 '존재'가 나타난다고 보고 이것의 결합과 분리가 이 세계 내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에서 가장 명료하게 표현된 원자----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의 개념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은 정신과 물질을 명확히 구분했으며, 물질은 몇 개의 '기본적 구성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것들은 진공 속에서 떠돌고 있는 완전히 피동적이며, 본질적으로 죽은 입자인 것이었다. 그 운동의 원인은 설명되지 않았으나 물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적인 근원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외부의 힘과 자주 연관되어 언급되곤 했다. 이러한 사고는 그 이후 서양 사상의 기본 요소가 되는 마음과 물질,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을 이루게 된다.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란 생각에 일단 접하게 되자, 철학자들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세계, 즉 인간의 영혼과 윤리의 문제에 그들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기원전 4, 5세기 그리스 과학과 문화의 전성 시기 이래 2천 년 간 이상이나 서양 사상을 사로잡는다. 고대의 과학적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조직화되었는데 그는 그 이래 2천 년 동안이나 서구의 우주관의 기초가 된 한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인간 영혼에 대한 문제와 신의 완전성에 대한 생각은 물질 세계보다 훨씬 값진 것이라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모형이 그토록 오랫동안 도전을 받지 않고 내려온 것은 분명 물질 세계에 대한 흥미의 결여와 중세를 일관해서 그리스도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를 강력히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 해방하기 시작하고 자연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보이게 된 르네상스에 와서야 비로소 더 발전하게 된다. 15세기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과학적 정신에 의한 자연의 연구에 접근하게 됐으며, 사변적인 개념들을 실증하기 위한 실험이 이루어 졌다. 이와 같은 발전은 수학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과 병진했기 때문에 수학적 언어로 표현되고, 마침내 실험에 바탕을 둔 적정한 과학적 이론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갈릴레이는 실험적 지식을 수학과 결부시킨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그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정신·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를 초래한 철학 사상의 발전이 근대 과학의 탄생을 선행하고 동반했다. 이 공식화는 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는 자연을 마음과 물질이란 두 개의 분할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였다. 이 '데카르트 적'인 분할은 물질을 죽은 것으로, 자신들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하고, 물질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조립된 제각기 다른 객체의 모임으로 보도록 허용했다. 아이작 뉴턴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의 기계론(적 역학)을 구축함으로써 고전 물리학의 기반을 다졌다. 뉴턴의 이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은 17 세기 후반부터 19세기말까지 모든 과학 사상을 지배했다. 그것은 신성한 법을 펼쳐 천상에서부터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전제적인 신의 이미지와 흡사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자연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자연의 기본 법칙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영원 불변한 신의 율법으로 보여진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고전 물리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한 몫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이르기까지 서양의 일반적 사고 방식에 끼친 영향도 지배한 바가 있다.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분할의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은 육체 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그 육체를 통제해야 한다는 속 빈 과업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본능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개인은 그의 활동이나 재능, 감정, 신앙 등에 따라서 수없이 쪼개진 많은 분야로 더욱 분열돼 갔고, 이것은 한없는 갈등을 일으켜 형이상학적 혼란과 좌절을 끝없이 유발시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내적 분열은 곧 '외부' 세계를 제각기 분열된 대상과 사건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연 환경은 제각기 다른 이해 집단에 의해 착취되는 따로 떨어진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취급된다. 이 조각난 관점은 나아가 사회에까지 확장되어 저마다 다른 국가, 인종, 종교, 정치 집단으로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분열― 이 정말 다른 조각들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일년의 사회적·생태적·문화적 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를 자연과 인류 동포로부터 소외시켰다. 그것은 자연 자원을 대단히 부당하게 분배시켜 경제적 무질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폭력은 우발적이거나 제도화되어서 파도처럼 밀어닥치고 있으며, 추악하게 오염된 환경 속에서 생명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데카르트적인 분할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혜택이 된 동시에 유해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고전 물리학과 기술의 발달에는 극히 성공적이었지만 우리의 문명에 대해서는 많은 역작용을 초래했다. 데카르트적인 분할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그 기원을 두었으며 또 이러한 관점에서만이 진실로 그 발전이 가능했던 과학이 20세기에 와서 이제 그 분열을 극복하고 초기 그리스와 동양 철학에 표명돼 전일 (全一)의 이데아로 다시금 이끌리고 있다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적인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동양의 신비론에 있어서는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인색하는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리된 것으로 구분하고 이 세계 내에서 고립된 자아로서 우리 스스로를 체험해 보려는 경향은 우리들이 측정하고 분류하려는 심성에서부터 연유되는 환각이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 철학에서는 아비댜 (avidya), 즉 무지라고 불리며 극복해야 할 마음의 불안 상태로 간주되는 것이었다.

 

마음이 흔들리면 잡다한 사물이 생기지만,

마음이 고요하면 잡다한 사물이 사라진다. ― 아쉬바고샤(Ashvaghosha)

동양의 신비주의는 각각의 종파에 따라 세세한 면에서는 다른 점도 많지만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강조하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중심적 교의가 되는 것이다. 힌두교도건, 불교도건, 도가의 신도이건 간에 그들의. 지상의 목적은 모든 사물의 전일성과 상호 연관성을 깨달아 고립된 개별아(個別我)라는 관념을 초극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것 ―개오(開悟)라고 부르는 ―은 지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인적(全人的)인 체득이며 그 구경(究竟)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대부분의 동양 철학들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철학인 것이다.

그레서 동양적 관점에서는 자아를 쪼개진 대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본원적인 것이 아니며 어떻한 대상도 활동하고 무상하게 변전하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동양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므로 시간과 변화를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란 영겁토록 움직이고, 살아있고, 유기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불가분의 실재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운동과 변화가 사물의 근본적 속성이기 때문에 그 운동을 일으키는 힘은 고대 그리스의 관점에서처럼 객체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근원적인 성질이다. 따라서 신성에 대한 동양의 이미지는 이 세계를 위에서부터 지배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사물을 그 내부에서 통어하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깃들여 있으나,

이 세상 모든 것과는 다르고,

이 세상이 모든 것이 알아보지 못하나,

그의 몸은 이 세상 만물,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

그 네 영혼,

안에 있는 불멸의 통치자.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피니샤드(Brihad-aranyaka Upanishad)

 

동양적 세계관의 기본적 요소는 현대 물리학에 나타나는 요소와 마찬가지이며 동양적 사상,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신비적 사상이 현재의 과학 이론에 일관성 있고 적절한 철학적 배경을 마련해 준다. 이와 같은 세계 이념 속에서라야 인간의 여러 과학적 발견이 그 정신적 목적 및 종교적 믿음과 완전히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의 두 가지 기본적인 주제는 모든 현상의 전일성 및 상호 연관성과 본질적인 역동적인 우주이다. 우리가 미지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어떻게 현대 물리학자들이 동양의 신비주의자처럼 이 세계를 불가분, 상호 작용, 부단한 운동의 구성 분자로써 이루어지는 한 체계 ― 인간 존재도 이 체계의 불가결한 한 부분이다 ―로 보게 되는가를 깨달 을 것이다.

동양 철학의 이 같은 유기적·생태학적 세계관이야말로 동양 철학이 최근 서방에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아직도 기계론적인 분열된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의 서양 문화권에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 사회의 저변에 만연되고 있는 불만의 잠재 이유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점증하고 있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동양적인 해방에의 길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동양의 신비 사상의 이끌려서 『역경』을 탐색하거나 요가나 기타 명상법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반 과학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과학, 특히 물리학을 현대의 기술 문명이 초래한 모든 사악함에 책임져야 할 상상력 없고 편협한 교조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과학에 대한 이미지는 개선될 것이다. 또한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도(道)〕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途煲)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프리초프 카프라/1966년 비엔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캘리포니아, 산타 크루즈, 파리 대학 등에서 이론 고에너지 물리학을 연구했다. 또한 현대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일반 논문을 쓰면서 영국과 미국 등에서 강연도 하였다.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