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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왜 읽는가 / 김현(金鉉)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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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왜 읽는가 / 김현(金鉉)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이어서였겠지만, 어렸을 때에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어머니나 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드러누워, 어머니나 아버지가 해 주시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그 옛날 이야기의 종류는 아주 다양해서, 전래의 동화에서부터, 내가 잘 알 수 없는 나라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이었다. 그 이야기들의 거의 대부분을, 나는 커서 이 책 저 책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물론 그 재미는 옛날만 못했다. 어렸을 때 즐겼던 목화, 다래, 감꽃, 삘기, 조선배추 밑둥 등이 먹고싶어, 나이든 뒤에 어렵사리 그것들을 구해 먹었을 때의 맛 비슷한게, 그 옛날 이야기들은 추억의 달무리 속에서 더욱 빛나고 있었다.

 

어렸을 때에 그토록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어린애를 이끌어, 알 수 없는, 혹은 너무 자주 들어 익숙히 알고 있는 이야기의 세계로 달려가게 했을까? 지금도 대부분의 경우, 어머니 아버지의 추억은 그 이야기의 부드러운 공간 속에 녹아든다. 그 부드러운 어투하며, 포근한 무릎, 그리고 시원하고 따뜻했던 방바닥 등의 공간이 그 추억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언제나 되돌아가고 싶은 공간이며, 그 곳에서는 삶이 살만하다고 느껴지는 공간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린애였을 때의 나의 삶은 말타기, 자치기, 구슬치기, 제기차기, 땅따먹기 같은 놀이 공간과 그 이야기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야기의 공간 속에서 나를 끝내 놓아주지 않은 것은 호기심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그 좁은 공간 밖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옛날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그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삶과는 다른 어떤 삶이 있는 것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호기심은 이야기를 들을 때의 그 만족 혹은 행복의 느낌과 교묘하게 융합하여 삶의 공간을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호기심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 호기심의 심리적 자리를 끝까지 파헤쳐 본 정신 분석학은 그 자리가 욕망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편하고 즐겁게 살고 싶다는 생득적(生得的)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살게 된 후에, 그 욕망을 최소한으로 규제하려는 시도가 생겨나게 된다. 정신 분석학에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쾌락 원칙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규제하는 법규들은 현실 원칙이라고 부른다. 쾌락 원칙이 현실 원칙에 의해 적절하게 규제되지 않으면 사회는 성립될 수 없다. 그 현실 원칙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 윤리에 위배되는 일을 금하는 갖가지 금기들이다. 그 금기 때문에 욕망은 억압되고, 억압된 욕망은 원래의 욕망을 변형시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바로 그 욕망을 변형시켜 드러낸 것이어서 사람들의 한없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자기 욕망의 원초적 모습을 감지할 수 있다.

 

쾌락 원칙이 지배하려 하고 있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욕망, 즉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소유 욕망인데, 그 소유 욕망은 모든 재화(財貨)-성적 재화와 물적 재화-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재화는 적고 욕망은 크기 때문에, 거기에도 현실 원칙이 작용하며, 그 현실 원칙 때문에 금기(禁忌)가 생겨난다. 그 금기에 대한 호기심이 바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호기심이며, 그 금기에 대한 호기심이 바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그 욕망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욕망이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호기심이나 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실제로 이야기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취하는 건강한 사람들도, 술에 취해 의식이 어느 정도 마비되면, 다시 말해 의식이 죽음과 가까워지면, 한없이 이야기하려 하고, 한없이 들으려 한다. 술좌석에서, 한 이야기가 되풀이 이야기되고, 이미 들은 이야기를 또다시 들으려는 욕심이 생겨나는 것은, 술이 억압된 욕망의 뿌리를 흔들기 때문이다. 의식이 완전히 죽지 않는 한, 속에 있는 말-이야기가 모두 밖으로 나오는 법은 거의 없다. 아니 절대로 없다.

 

이야기가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것은, 이야기에 대한 다음의 옛이야기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천 하룻동안, 한국식으로 말하면 영원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밤마다 이야기를 하게 운명지워진 한 여인이 나온다. 세헤라자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자기 아내의 부정에 크게 노하여, 여자의 정절을 믿지 않게 된, 그래서 하룻저녁을 같이 보낸 여자를 죽이는 나쁜 습관을 가지게 된 왕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왕 앞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유예시켜 나가다가, 결국 왕의 나쁜 버릇을 고치게 된다. 그녀의 이야기는, 죽이고 싶어하는 왕의 욕망과 살고 싶어하는 그녀의 욕망 사이에 있다. 아니 차라리 그녀의 이야기는 그 두 욕망 사이의 가교(架橋)이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한, 두 욕망은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그 어느 쪽 긴장이 풀어져도 그 결말은 죽음이다.

 

죽음과 싸우는 세헤라자드 이야기 못지 않게, 레비스트로스라는 프랑스의 한 인류학자가 대번에 그리스의 미다스왕 이야기와의 유사성을 발견해 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 역시 이야기가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임금님은 자기 비밀이 퍼지면 조롱거리가 되기 때문에 이야기를 끝까지 막으려 한다. 이야기를 하면, 혹은 이야기를 잘못하면 죽는다. 그런데도 복두장이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실제 복두장이는 이야기가 하고 싶어 죽을 병에 걸린다. 그는 대나무숲에 가서 이야기를 하고서야 살아난다. 그것은 이야기에 쾌락 원칙이 숨어 있다는 한 좋은 증좌이다. 쾌락 원칙을 감추고 현실 원칙을 감수하면서, 사실은 변형된 모습으로 쾌락 원칙을 드러내려 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죽음-금기와 맞닿아 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나, 그 마음의 뿌리는 쾌락의 원칙에 가능하면 가까이 가, 현실 원칙의 금기를 이겨 보려는 욕망이다. 쾌락 원칙이 현실 원칙을 이길 수는 없다. 쾌락 원칙이 현실 원칙을 이길 때,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사회는 그래서 쾌락 원칙을 좇는 사람들을 감옥이나 정신 병원으로 보낸다. 이야기는 그 감옥이나 정신 병원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쾌락 원칙이 현실 원칙을 피해 자신을 드러내는 자리이다. 아니다. 이야기는 쾌락 원칙이 자신을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현실 원칙이 쾌락 원칙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으며, 그것은 올바른 것인가 아닌가를 무의식적으로 반성하는 자리이다. 쾌락 원칙만을 좇아서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현실 원칙이 적절하게 쾌락 원칙을 규제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반성할 수 있다. 그래야 자유로운 공간이 조금씩 넓어질 수 있다.

 

 

이야기의 종류는 한이 없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수효도 한이 없으며,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의 수효도 한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라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그 이야기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 세속적 이야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우리가 삶을 영위해 나가면서 매일 듣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저녁에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그 날 일어난 일들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아내의 이야기이다. 세금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이웃집 여자 이야기, 신문 가십란 이야기 등 그녀의 이야기는 한이 없다. 그 이야기는 거창한 것도 아니고 별난 것도 아니다. 대개의 경우,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은 사소한 것들이며,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것들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사소한 이야기들 속에, 한 철학자가 범속한 트임, 세속적 트임이라고 부른 삶의 예지가 번득이는 경우가 있다.

 

그 삶의 지혜가 상투화되면, 다시 말해 공공의 의견이 되면, 그것은 속담으로 축소화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거나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한다.”와 같이 이야기 속에 담긴 지혜는 속담으로 정리되고, 그 정리는 새 변형, 새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 세속적 이야기 곁에, 혹은 위나 아래에 환상적 이야기라고 부를 수 있는 별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사소한 실제의 이야기들과 다르게 비현실적인 별난 이야기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것이 아닌 묘한 이야기들이다. 그 비일상적 이야기들은, 일상적 이야기들이 속담으로 정형화되듯, 수수께끼로 정형화된다. 깎아 낼수록 커지는 것은 무엇일까? 연필심. 그런 수수께끼는 일상적인 것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환치시킨다. 수수께끼는 환상적 이야기 속에서 기능적으로 작용, 여러 변형을 만들어 낸다. 환상적 이야기에는 그 기능적 수수께끼들이 많다. 일상적 이야기의 이편은 현실이며, 환상적 이야기의 저편은 꿈이다. 현실과 꿈은 일상적 이야기나 환상적 이야기를 매개로 인간의 삶 속에서 연계된다.

현실이나 꿈은 삶이지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는 현실과 꿈 사이에 있다. 현실과 꿈 사이에 있는 이야기를 정제하여 줄글로 옮겨 놓은 것이 소설이다. 모든 이야기가 다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태여 장르별로 가르자면, 어떤 것은 소설이 되고, 어떤 것은 자서전- 회고록이 되고, 어떤 것은 수필이 된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쓴 글이 아니다. 그것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서술의 측면에서는 나의 입장에서, 내가 읽은 것, 보고 들은 것을 삽화적으로 나열하고, 거기에서 삶에 대한 어떤 태도를 찾아내 표명한다. 어떤 태도를 표명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철학에 가깝지만, 내가 읽고, 보고, 들은 것을 삽화적으로 나열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문학에, 아니 소설에 가깝다. 그것은 철학의 세계관과 소설의 구체성 사이에 존재하는 장르이다. 그것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모아, 세계에 대한 태도를 표명한다. 수필의 이야기들은 단편적이지만, 구체적이고 비관념적이다. 단편적인 혹은 삽화적인 이야기들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태도를 표명하기 때문에, 그것은 비체계적이고 반체계적이다. 비체계적이고, 반체계적이지만, 그 이야기들에는 진솔한 삶의 지혜가 담겨져 있다. 자서전-회고록은 수필보다 더 유기적이고 체계적인 수필이다. 자서전-회고록은 쓰는 사람의 과거에서, 의미있고 특징적인 사건들을 끄집어 내,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배열하고 그 유기적인 배열 속에서, 삶에 대한 일관된 태도 표명을 이끌어 내는 이야기이다. 자서전-회고록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삽화적이고 일화적인 이야기들이 아니고, 쓰는 사람인 내가 의미있게 체험한 사건들이나 이야기들이다.

 

소설은 수필이나 자서전과 다르게, 쓰는 사람이 읽거나 보고 들은 것을 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소설 속의 인물들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이야기이다. 콩트<장편소설(掌篇小說)>나 단편 소설 등은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삽화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으며, 중편 소설이나 장편소설은 유기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소설에 나라는 인물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 인물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에 대한 중요한 혼란 중의 하나는 소설 속에 나오는 내가 바로 쓰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믿는 경향이다. 소설 속의 나는, 삼인칭 그의 변형이지, 소설을 써서 원고료를 받아 생계를 꾸려 나가는 소설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의 나 속에 소설가가 조금도 투영되지 않는다는 진술은 아니다. 소설 속의 소설가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다. 소설 속의 사건은 현실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변형시킨 것이다.

 

흔히 쓰이는 예이지만, 가령 술이 반 남아 있는 술병을 보고 아 이제 반밖에 안 남았구나.’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야 아직 반이나 남았구나.’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소설 속의 사건이 현실의 사건을 변형시킨 것은 그런 의미에서이다. 그 때의 변형은 해석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어떤 이야기이든,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사건을 재현할 수는 없다. 사건은 어떤 형태로든지 해석되어야 변형되어 전달될 수 있다. 해석 없는 전달은 있을 수 없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다시 욕망이라는 개념과 만난다. 사물을 해석하는 힘의 뿌리가 욕망이다. 현실 원칙 때문에 적절하게 규제된 욕망이, 마음의 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가, 사건들을 이야기할 때, 슬그머니 작용하여, 객관적 사실을 자기 욕망에 맞게 변형시킨다. 객관적 사실이, 자기의 욕망을 크게 자극하지 않을 때, 그 변형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 다시 말해 자아 밖에 있는 사실이 자아 속에 있는 욕망을 크게 자극할 때, 그 변형은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것이 된다. 그 세계는 세계를 욕망하는 자의 변형된 세계이다. 그 세계는 작가가 해석하고 바꿔 놓은 세계이다. 그 세계가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작가에게 중요하지 않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 세계가 자기의 욕망이 만든 세계라는 사실이다. 세계는 세계를 욕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생생해지고 활기 있게 된다. 소설은 그 욕망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시처럼 감정의 세계만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고, 철학처럼 세계관만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구체적으로, 욕망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소설은 그 어떤 다른 예술보다도 구체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세계를 보여 준다.

 

소설 속에는 세 개의 욕망이 들끓고 있다. 하나는 소설가의 욕망이다. 소설가의 욕망은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욕망이다. 자기 욕망의 소리에 따라 세계를 자기 식으로 변모시키려고 소설가는 애를 쓴다. 두 번째의 욕망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욕망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 역시 소설가의 욕망에 따라, 혹은 그 욕망에 반대하여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계를 변형하려 한다. 주인공, 아니 인물들의 욕망은 서로 부딪쳐 다채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의 욕망은 소설을 읽는 독자의 욕망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슨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나아가 소설가의 욕망까지를 느낀다. 독자의 무의식적인 욕망은 그 욕망들과 부딪쳐, 때로 소설 속의 인물들을 부인하기도 하고, 나아가 소설까지를 부인하기도 하고, 때로 소설 속의 인물들에 빠져 그들을 모방하려 하기도 하고, 나아가 소설까지를 모방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읽는 사람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욕망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 자기가 세계를 어떻게 변형시키려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그 괴로움은 나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왜 즐거워하는가, 그 즐거움에 나도 참여할 수 있는가, 그것들을 따지는 것이 독자가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는 양식이다.

 

그 질문은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이 세계의 현실 원칙은 쾌락 원칙을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도 같다. 그 질문을 통해, 여기 내 욕망이 만든 세계가 있다는 소설가의 존재론(存在論),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하는 읽는 사람의 윤리학과 겹쳐진다. 소설은 소설가의 욕망의 존재론이 읽는 사람의 욕망의 윤리학과 만나는 자리이다. 모든 예술 중에서, 소설은 가장 재미있게, 내가 사는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를 반성케 한다. 일상성 속에 매몰된 의식에 그 반성은 채찍과도 같은 역할을 맡아 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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