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고백록 / 아우구스티누스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내 영혼이 주님을 우러러

주님을 찬양함

 

주님이시여,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하십니다. 당신의 힘은 위대하시며, 당신의 지혜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 당신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한 인간이 감히 찬양을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께서는 친히 당신을 찬양하는 일이 기쁨이 되게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만 안식을 취합니다.

주여, 당신을 부르는 것과 당신을 찬양하는 것 중에서 어느것이 먼저인지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나 감히 누가 당신을 알지 못하면서 부르겠습니까? 당신을 모르면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당신이라 부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은 당신을 알기 위해서 당신을 부르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아직 믿지도 않는 이를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요? 또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요? 진실로 주님을 찾는 자는 주님을 볼 것이며,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주여, 나는 당신을 부르면서 찾고, 믿으면서 부르고 싶습니다. 당신은 이미 우리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당신이 주신 나의 신앙이 당신을 부릅니다. 독생자가 인간이 되셔서, 그 설교자의 봉사를 통해서 내 마음속에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주님

 

그러면 나는 주님이며 하느님이신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주님이시여,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이시여, 내가 주님을 부를 때, 내 안의 어느 자리로 들어오실 수 있겠습니까? 나의 주, 하느님이시여, 내 속에 당신을 영접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나를 두셨지만 그 천지에 당신을 영접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 없이는 그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거늘,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당신을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당신이 내 속에 계시지 않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는데, 당신에게 내 속에 들어오시라고 애원해도 괜찮은가요? 왜냐하면 나는 아직 저승에 있지는 않지만, 만일 내가 저승에 간다 해도 당신은 그곳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주님이시여! 당신이 내 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당신에 의해서, 당신을 통해서 당신 속에 존재하므로, 내가 당신 속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여,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당신 속에 있는데 당신을 어디에다 영접하겠습니까, 또는 언제부터 당신은 내 안에 들어오시겠습니까? '나는 하늘과 땅을 채우노라.' 고 말씀하신 하느님을 내 안에 영접하기 위해서 나는 하늘과 땅 이외의 어느 곳으로 가야 하겠습니까?

<제1장 '어린 시절'에서>

 

남을 속이다

 

열아홉 살부터 스물여덟 살에 이르는 9년 동안, 우리는 소위 자유인을 위한 학예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히, 또는 종교라는 허울 속에 숨어서 갖가지 욕정에 속고 속이며, 유혹하는가 하면 유혹당하기도 했습니다. 전자는 오만에 불과하고 후자는 미신이었으므로 이들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나는 세속적인 명예를 얻기 위해 극장의 박수 갈채, 시문 백일장, 풀꽃으로 만든 화관 따기 경기, 어리석은 무대 경연, 무절제한 욕정에까지 이르렀으며, 그러면서도 이러한 것들로부터 깨끗이 벗어나기 위해 이른바 '선택된 자'나 '성자'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바쳤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음식을 뱃속에서 요리하여 우리를 구제하는 천사나 신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일들을, 나로 말미암아 나와 함께 속임수에 빠진 친구와 더불어 했습니다.

주여, 아직 당신에게 굴복하지 않은 거만한 자들은 나를 비웃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 앞에 나의 추악함을 고백합니다. 제발 부탁하오니 현재의 나로 하여금 잘못된 과거의 죄를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 앞에 기쁨의 선물을 바치게 해주십시오. 당신이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길 이외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또 아무리 잘된다고 해도 당신의 젖을 빨고 당신을 썩지 않는 음식삼아 먹는 자밖에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구나 인간밖에 되지 못한다면 대체 어떤 인간이란 말입니까? 힘 있고 강한 사람들은 우리를 비웃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무능한 채로 당신에게 고백할 따름입니다.

 

 

애첩과 각본작시

 

그 무렵 나는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정욕에 굴복하면서도 남을 설득시키는 기술을 팔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주여, 나는 선한 제자를 두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속이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겐 속임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고한 자의 생활을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죄한 사람의 선상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여, 그러나 당신은 멀리서, 정직하기는 해도 짙은 뭉게구름 속에서 불안하게 가물거리는 나의 노력을 보셨습니다. 헛된 것을 사랑하고 속임수를 꾸미는 자들에게, 비록 나도 그들과 한패였지만, 선생이랍시고 그러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 무렵 나는 수 년 동안 한 여성과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합법적인 혼인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각없이 들뜬 정욕에 못 이겨 찾아낸 상대였지만, 나는 그 여자만을 지키며 그녀에 대해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때 나 자신의 경험에서 배운 바는, 자녀를 낳기 위해 맺은 정당한 부부 생활과 서로 마음이 맞아서 성관계를 맺는 애정 생활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성관계로 맺어진 경우에 원하지 않은 자식이 생기면 싫을 것 같지만, 일단 태어난 자식은 자연 사랑하게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극시(劇詩)의 백일장에 참가하기로 결심했을 때, 한 점술가가 나타나 장원하도록 해줄 테니 사례금을 얼마나 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추잡스런 의식을 소름이 끼치도록 싫어한 나는, 비록 승리의 관이 금으로 되었다해도 이기기 위해 파리 한 마리도 죽이는 것은 싫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점술가는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려던 것인데, 악마들한테 그와 같은 영광의 제물을 바치면 그들이 내편에 서서 나를 도와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하느님이시여, 신에 대한 정결 때문에 그것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다만 무슨 빛나는 물체로 밖에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허구를 동경하는 영혼은 당신을 떠나 거짓을 믿고 바람을 삼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위해 귀신들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거절한 내가, 나 자신을 저들에게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사실 '바람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악마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으로서, 그릇된 길을 걸어서 저들의 쾌락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일일 뿐입니다.

<제4권 '우울한 고백'에서>

이해와 감상

 

한 영혼이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지내다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 그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는 내용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이다. 작자 자신도 이 책을 가리켜 "나의 고백' 은 나의 생활 속의 악과 선에 관하여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을 찬미한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고백' 전 13권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란 맑은 거울 앞에서 서로 싸우는 영혼과 육신, 그리고 자기 분열로 번민하는 자기를 세워 놓고 그 가장 깊은 곳까지 메스를 가하려는 고뇌의 분석의 책이다.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근 160년 전에 집필된 책인데도 자기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고민하여 구원을 찾는 현대인의 모습을 읽게 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가리켜 '최초의 근대인' 이라고 한다.

 

'고백' 의 집필 동기는 히포의 주교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성이 높아질 대로 놓아진 400년경, 그의 지난날의 생활고 현재를 알기 원하는 신도들의 요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그 내용으로 보아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출생에서 어머니 모니카이 죽음에 이르는 자전(自轉)으로서, 지난날의 자기 생활을 말하면서 죄를 고백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부분(1∼9권), 둘째는 현재 힙포의 주교로서 하나님 앞에 감사 찬미를 드리는 부분으로, 신의 인식에 관한 사색과 함께 기억·시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10권), 셋째는 창세기 제1장의 주해를 통하여 창조자 하나님을 찬미하는 부분(11∼13권)이다.

그는 십대 때에 벌써 정욕의 세계에 깊이 빠져 들어갔고, 강한 정욕과 죄의식이 그를 괴롭혔다. "내 영혼이 내 마음의 처참한 상태를 바라볼 때 그만 나는 마치 눈물의 소나기를 맞이한 듯 울음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비참한 심정으로 무화과나무 아래 몸을 던지고 울면서 "오 주님! 언제까지 당신은 진노를 품으시겠습니까, 영원히 내게 대하여 진노를 발하시겠습니까? 우리 이전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이때 이웃집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여왔다. "톨레 레게(Tolle Lege! 들어서 읽어봐라)." 그 소리는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소리처럼 느껴져, 그는 성서를 펴들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대목을 읽어보았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3∼14).

 

그 순간 그는 일생을 신에 대한 사랑과 봉사에 바칠 것을 결심했다. 그는 자기의 사생아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의 나이 서른세 살, 아데오다투스는 열여섯 살 때였다.

이상과 같이 아프리카 지방 타가스테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게 되기까지의 구체적인 과거의 고백이 제9권까지의 줄거리이다.

제10권에서 제13권까지는 주교로서의 자기 비판과 사상의 고백이 제9권까지의 줄거리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고 있다.-"나란 무엇인가? 나란 것은 마음이다. 마음 그 자체는 기억이다." 만일 마음으로부터 일체의 기억, 곧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감정 따위를 빼버린다면 무엇이 남게 되는가? "기억은 위대하다. 하나님, 그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가공할 성질의 것, 심원하고 또한 다양한 것입니다."

망각했다고 하는 것 자체조차 기억이 아닌가.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하게 부르짖고 축복을 갈구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 이전의 축복된 세계가 내 기억 어디엔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축복을 구한다는 것은 나를 존재하게 하고 모든 존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내 기억 속에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다.

또한 마음이 바로 기억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마음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뜻한다. 이리하여 제11권, 즉 '고백'중에서 러셀이 가장 독창적인, "철학적 작품" 이라 평한 시간론이 전개된다.

시간, 즉 과거, 현재, 미래란 무엇인가? 과거는 지나가 버려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 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 그리고 현재란 이 미래 가 끊임없이 그것을 통하여 과거로 흘러가는 것으로 그 어떤 깊이도 존재도 지니고 있지 않다.

"과거, 현재 , 미래가 존재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 오히려 과거의 것인 현재(기억에 의해서)요, 현재의 것인 현재(지각에 의해서)요, 미래의 것인 현재( 기대에 의해서 )라는 편이 옳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 이란 무엇인가? 제12권과 13 권에는 시간론에 따른 창세기의 해석이다. 창세기 1장 1 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 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천지를 강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는가? 이단자의 이런 질문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

"시간 그 자체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에는 어떠한 시간도 거쳐갈 수 없다 ."

즉 , 시간이 본질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이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창조에 의해 시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시간의 창조주이기에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신 것이다.

 

참고 자료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 ·사상가.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 성인(聖人). 그의 생애는 주요저서라고 할 수 있는 《고백록(告白錄) Confessions》에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新)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主敎)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만족(蠻族) 침입의 위험을 직접 당하면서 죽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윤리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며, 윤리적인 선악은 그 사랑이 무엇으로 향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였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義人)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惡人)이라고 하였다.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