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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 아리스토텔레스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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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완결된 행위의 모방

육절운율(서사시)에 의한 모방과 희극에 관해서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비극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로 하자.

우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부터 비극의 본질을 규정해 보자.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진 완결된 행위를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한 언어를 사용하되 이를 작품의 각 부문에 따로따로 삽입하며, 서술적 형식이 아니라 드라마형식을 취하며,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쾌적한 장식을 한 언어' 라 함은 리듬과 하모니를 가진 언어를 말하고 '작품의 각 부분에 따로따로 삽입한다' 함은 어떤 부분은 운문에서만 진행되고, 어떤 부분은 노래에 의하여 진행됨을 말한다.

비극의 모방은 등장인물의 실연(實演)에 의하여 이루어지므로, 첫째배우의 분장(扮裝)(비극 배우들은 배역에 알맞는 가면을 썼고 - 적어도 아이스퀼로스 시대에는 - 긴의상을 입었고 굽이 높은 반장화를 신었다. 그리고 여자역은 남자배우들이 연출하였다. 희극배우들도 역시 가면을 썼지만 그들의 가면은 비극 배우들의 가면에 비하여 그로테스크했고 쉽게 식별할 수 있는 타입의 것이었다. 그리고 코로스는 새나 개구리나 벌로 분장하기 위하여 그로테스크한 의상을 입었는데 춤을 출 때에는 겉옷을 벗었다.)을 이 불가피하게 비극의 일부분이 될 것이고, 다음은 시어(詩語)가 비극의 부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양자가 모방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시어란 운문의 작성을 의미하고, 음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은 행위의 모방이고 행위는 행위자(배우)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행위자는 일정한 성격과 사상을 가지게 마련이므로 왜냐하면 행위의 성질도 성격과 사상에 의하여 규정되기 때문이다 성격과 사상은 모든 행위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성공과 실패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행위는 플롯에 의하여 모방된다. 나는 플롯이란 말로는 행위의 결합을 의미하고, 성격이란 말로는 행위자가 어떤 성질의 사람인가를 규정할 수 있게 해주는 바를 의미하고, 사상이란 말로는 행위자들이 무엇을 증명하거나 어떤 의견을 진술할 때 그들의 언사에 나타나는 바를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부분을 가지게 마련이며, 이 여섯 가지 구성 부분이란 곧 플롯과 성격과 시어와 사상과 분장과 음악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시어와 음악]는 모방의 매개체에 속하고 한 가지[분장]는 모방의 양식에 속하고 세 가지[플롯과 성격과 사상]는 모방의 대상에 속한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인들이 이러한 구성부분을 사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분장과 성격과 플롯과 시어와 음악과 사상은 모든 작품에 공통되기 때문이다.

이 여섯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그것은 비극의 인간이 모방이 아니라, 행위와 생활과 행복과 불행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위 가운데 있으며, 생활의 목적도 일종의 행위이지 성질이 아니다. 성격은 인간의 성질을 규정하지만, 행복과 불행은 행위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드라마의 행위는 성격을 묘사하기 위하여 드라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와 플롯은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가장 중요하다. 더욱이 행위 없는 비극은 불가능 하지만, 성격 없는 비극은 가능할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작가들의 비극에는 성격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의 시인들에게 공통된 결함이다. 이러한 현상은 화가들 중에서 제욱시스(Zeuxis)를 폴리그노토스(Polygnotos)와 비교할 때에도 나타난다. 왜냐하면 폴리그노토스는 훌륭한 성격화가인데, 제욱시스의 그림에는 아무런 성격이 표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시인이 성격묘사에 있어 탁월한 뿐 아니라, 사상적인 면에서도 훌륭하게 다듬어진 일련의 대사를 내놓았다 하더라도 그것만은 비극의 효과로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점에서는 다소 미비한 점이 있더라도 플롯, 즉 사건의 결합을 구비한 비극이 비극의 효과를 훨씬 더 훌륭하게 달성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극에서 우리를 가장 많이 감동시키는 것은 급전(急轉 Peripeteia)과 발견(Anagnorisis)인데 이들은 둘 다 플롯에 속하는 부분이다. 또 한 가지 증거로 시작(詩作)의 초심자들이 플롯의 구성보다도 먼저 시어와 성격묘사에서 성공을 거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초기의 시인들 거의 전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비극의 근본 또는 정수는 플롯이며, 성격은 제2위이다 – 이점은 그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아름다운 색채라도 아무렇게나 칠한 것은 흑백의 그림만큼도 쾌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 비극은 행위의 모방이며, 비극이 행위자를 모방하는 것도 행위를 모방하기 위해서이다.

제3은 사상이다. 사상이란 가능한 말과 그때 그때의 상황에 알맞은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비극의 대사와 관련시켜 이러한 능력을 연구하는 것은 정치학과 수사학의 영역에 속한다. 왜냐하면 옛 시인들은 등장인물을 기피하느냐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 그의 의도를 분명하게 해준다. – 따라서 일반적으로 화자(話者)가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기피하느냐가 분명치 않은 대사는 성격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나 사상은 무엇을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논증하거나, 일반적으로 무엇을 표명할 때 그 언사 속에 나타낸다.

여러 가지 구성요소 가운데 제4의 것은 시어이다. 시어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언어로 사상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기능은 운문이나 산문에 있어서나 동일하다.

나머지 두 개 가운데서, ‘음악’은 비극이 주는 여러 가지 쾌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분장은 우리를 매혹하기는 하나 예술성이 가장 적고, 시학 그 자체와 가장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비극의 효과는 공연이나 배우 없이도 달성될 수 있으며, 배우의 분장은 시인이 할 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상 제조인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시학(詩學)Aristorteles; Peri Poietikes에서

 

 

이해와 감상

 

창작예술에 관한 시학은 그 전권(全券)이 전하지 못하는 소책자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저서들이 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만 가지고도 그의 이름을 불후의 것으로하기에 족할 만큼 미학, 예술학 분야에 끼친 업적은 지대하다.

시학의 원어는 poietike인데 이 말은 그 뜻이 매우 다양하다. 그것은 처세술(art of life)과무엇을 만드는 제작술을 뜻하며 제작술에는 건축술, 조선술 등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기술(Useful art)과 예술(fin art)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이 시학에서는 모방기술로서의 창작예술에만 국한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모방기술에는 색채와 형태를 매재로해서모방하는 오늘의 조형예술과 소리를 매재로 해서 모방하는 오늘의 음악, 시문학, 무용 등이 있는데, 여기서 논하는 것은 주로 후자인 소리를 매재로 하는 모방기술을 다루고 있고, 그 가운데서도 비극시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학에 있어서 '시'가 시(문학), 음악, 무용 등을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면 이들 가운데는 공통성과 차이성이 있어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원리에 의하면 모방의 매재, 대상, 양식에 의거한다. 이들에게 공통되는 요소는 모방의 매재인 소리이며, 이는 율동(rhythm), 언어, 해음(tune)의 셋으로 이루어지며, 이 셋이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여러 분야로 분류된다. 율동, 언어, 해음이라는 세 요소는 전부 시간적 계기를 가지고 있어 시간예술을 형성하여 회화나 조각과 같은 공간미술과 구별된다. 시(창작예술)와 학문을 구별하는 것은 운율의 유무가 아니라 모방의 유무에 있다. 예술이 모방기술이라는 정의는 플라톤의 '국가'에 처음으로 나온다. 그에 의하면 감성계의 사물은 진실재(眞實在)인 '이데아'의 모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예술은 이 모상을 또 모방한 것이다. 여기에 플라톤이 예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근거가 있다. 예술가는 진실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 모산 혹은 영상을 모방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가 모사하는 사물의 민상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고 한다. 이처럼 플라톤이 사용한 모방이라는 용어를 아리스토텔레스도 차용(借用)하고 있으나 그의 스승의 견해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술이 모방하는 대상은 감성계의 사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성격, 감정과 행동 등의 인간의 마음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모방이 예술의 특색이라고 할 때 모방성이 가장 강한 것은 조형예술이요, 가장 약한 것이 음악이라고 우리는 보통 생각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대로 음악이 모방성이 가장 강하다고 한다. 이 말은 음악이야말로 가장 표현적인 것, 가장 잘 감성을 구상화하는 것, 더 자세히 말하면, 예술가가 느끼거나 상상한 감정에 유사한 감정을 타인의 심중에 가장 효과적으로 환기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진지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유명한 말도 시의 모방성이 단순한 사진과 같은 복사적인 모방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며, 시의 의도가 개별적 사물의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의 새로운 구성화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모방이라는 전통적 용어를 빌려 쓰기는 하였으나 플라톤의 의미보다 더 한층 심화된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미술의 성격을 한층 더 깊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시의 기원에 대하여 4장에서 논하고 있다. 시의 기원은 원시적인 두 본능, 즉 모방하려는 본능과 타인에 의해 모방된 것에 대하여 기쁨을 느끼는 본능에 기인한다고 한다.우리는 모방된 사건이 비록 그 자체에 있어서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이에 대하여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비극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시의 종류를 구분하고 그 중에서도 비극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요, 쾌적한 장식은 한 언어를 사용하되, 이를 작품의 각 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되며 서술적 형식이 아니라, 드라마 형식을취하며,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고 정의를 한다. 시의 목적 또는 그 효용으로서 그가 내세운 카타르시스(katharsis)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을 알아보기로 하자.

카타르시스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더 이상 언급하고 있지 않으므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없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보아,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정화'를 의미한다는 윤리적 견해와, '감정의 배설'을 의미한다는 의학적 견해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바로크(barock)시인들과 프랑스 고전주의 시인들과 더불어 레싱이 주장하는 견해이고 후자는 베르나이스가 주장하는 견해이다.

플라톤은 모든 존재자는 최고선인 이데아의 실현을 그 궁극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예술도 인간의 성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하는 도덕적인 견해를 개표하고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조화와 균형 등이 이루어진 도덕적인 음악 이외에 열광적인 음악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러한 음악의 목적은 카타르시스에 있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광란적인 정열이 있으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감정이 억압을 받는다. 그러나 광란적인 음악을 듣고 자기 속에서 그러한 감정을 일으켰을 때 이러한 열광적인 감정이 배설된 것처럼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어떤 양식으로든 배설되어야 하며, 그들의 정신은 경쾌해질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배설적 멜로디(purgative melodies)는 인류에게 악기 없는 쾌락을 준다'고 말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도덕적이기보다는 같은 종류의 감정을 자극, 환기시킴으로써 배설하여 경쾌한 정신이 되게 하는 데 그 효용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참고 자료

아리스토렐레스(BC384 ~ BC332)

 

아리스토텔레스는 B.C.384년에 마케도니아의 남쪽 칼키디키 반도에 있는 작은 도시 스타게이로스에서 왕의 시인인 니코마쿠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에 아테네에 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의 입학한 후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플라톤 밑에서 이 천재는 스승의 사상을 배운 후 점차 스승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B.C.344년 마테도니아의 왕 필립포스의 초청을 받아 왕자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 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동정(東征)의 길에 오를 때까지 그의 측근에 있었다. B.C.335년 아테네에 온 후 왕의 도움을 받아 교외 뤼케이온에 도서관, 박물관 등의 많은 시설을 갖춘 학원을 세웠다. 그는 뤼케이온에 소요로(Peripatos)를 거닐면서 강의하였다고 하여 그 학파를 소여학파하고 부르기도 한다. B.C.323알렉산드로스대왕의 죽음과 더불어 그리스에는 반 마케도니아의 기운이 일어나 그에게도 영향이 오세 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껴 에우보이아 지방에 있는 칼키스로 은퇴한 후 수개월만에 사망하였다.

그의 철학적 연구발전 과정은 대체로 3기로 분류된다. 제1기는 아카테미아 시대의 수학기, 제2기는 유랑시대의 과도기, 제3기는 뤼케이온시대의 완숙기이다. 제1기에 그는 플라톤적인 대화편을 저술하였다고하나 현재에는 단편만이 남아 있다. 제2기에는 그의 후기 대작인 형이상학, 논리학, 정치학의 원형이 남아 있다. 제3기에는 현존하는 그의 모든 저작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방대한 그의 학술적 저술로 말미암아 그는 만학(萬學)의 아버지하고 불리게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살펴 보면 고대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로 스타게이로스 출생.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가 대립되었다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 왜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所與)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

【논리학】 학문적인 인식은 사물이 지닌 필연적인 관련을 그 원인에 따라 인식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서 삼단논법의 형식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삼단논법이 이러한 논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제1전제를 말한 공이론(公理論)도 뛰어났다. 그의 논리학서는 《오르가논 Organon》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하여졌다.

【자연학】 운동 ·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연구가 자연학이라고 불린다. 그는 여기서 네종류의 원인[四因論]을 들었다. ① 질료인(質料因:사물이 ‘그것’에서 되어 있는 소재), ② 형상인(形相因:사물이 ‘그것’으로 형상되는 것으로,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③ 동력인(動力因:‘그것’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이 되는 힘), ④ 목적인(目的因:그 사물 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②, ③, ④는 자연물에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으로 자연물은 이루어지고,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생성 발전의 과정으로서 자연의 존재는 파악된다. 질료는 거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디나미스[可能態]로, 최종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최종목적(텔로스)인 엔텔레케이아[完成態], 에네르게이아[現實態]야말로 자연 존재의 우월하는 원인이라고 한다(목적론적 자연관).

【형이상학】 존재자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으뜸되는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을 소피아(지혜) 또는 제1철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시에 보다 고귀한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신학이기도 하다. 신(神)은 으뜸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기도 하다. 신은 질료에서 떠나, 영원 불변한 관조(觀照) 안에 머무는 자기사유자(自己思惟者)로서 최고의 현실태이고, 그것 자신은 부동이면서 ‘사랑을 받는 것’으로서 일체의 것을 움직이는 ‘부동의 제1동자(動者)’이다. 그것은 자연계를 초월하는 자연계의 근거로서의 종극목적이다. 이 학문은 뒤에 형이상학(메타피직스)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은 이 학문이 뒤의 전집 편집에서 주어진 위치에서 유래된 것이다.

【윤리학】 행위의 종극 목표는, 신의 자기사유의 활동을 모방하는 이성적 관조에 놓여 있으나, 이것은 약간의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중용(中庸)으로서의 덕이 행위의 목적이다.

【정치학】 인간은 국가적 동물이다. 공공의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선(善)은 실현된다. 그런까닭에, 윤리학은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가 교대로 다스리는 자가 되는 곳에서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나라 제도가 있다고 한 정체론(政體論)은 온건한 민주주의의 뛰어난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시학】 창작의 본질은 모방(模倣)에 있다. 비극은 숭고한 행위의 모방이며, 숭고한 인물이 불행에 빠져가는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관객 가운데서 일어나는 연민과 공포의 정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정서를 정화(淨化)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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