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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 스피노자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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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규정

1. 욕망이란, 인간 본질 그 자체이다. 이 경우 인간은 주어진 각 변화 상태(변체=변양)에 의하여 어떤 것을 하게끔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앞서 욕망이 자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 그 차체라고 말했다 이 경우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유기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한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같은 주해에서 나는 인간의 충동과 욕망에는 실제 아무런 차이점도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하여 두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충동을 의식하건 않건 간에 충동 그차체에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충동. 의지. 욕망 혹은 잠재적 충동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인간본성의 모든 노력을 통일적으로 총괄하기 위하여 나는 욕망은 정리했다

예를 들면 욕망이란 어떤 것을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의 인간 본질 그자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정으로 보아서는 정신이 자신의 욕망 혹은 충동을 의식할 수 없다 따라서 이와같은 의식의 원인을 포함하기 위해서는 그의 주워진 각 변화상에 의하여 결정되는 한이라는 조건을 첨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본성의 변화상태를 인간 본질의 개개의 상태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상태가 본래적인 것이건 혹은 그것이 사유의 속성으로 파악되건 연장의 속성으로 파악되건 혹은 그들 양자에 동시에 속하건 어떤 경우건 좋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욕망이라는 개념을 근거로 인간의 노력. 잠재력 충동. 의지 등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감정의 변화에 따라 다양화하며, 그리고 때로는 흔히 상호 대립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인간은 여러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이끌리고 또 자기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

2.기쁨은 인간이 보다 작은 안전성에서 보다 커다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3.슬픔이란 인간이 보다 커다란 안전성 보다 작은 완전성에로 이행하는 것이다

설명.....나는 이행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쁨은 완전성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실제 이행하려고 하는 완전성을 지니고 태어났다면, 인간은 아무런 기쁨의 감정도 없이 완전성은 지니게 될 것이다 이것은 기쁨의 감정에 대립되는 슬픔의 감정을 보면 더욱 면백하다 실제 슬픔은 보다 작은 안전성에로 이행하는 데서 성립되며 보다 작은 완전성 그 자체로 인하여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이 어떤 완전성에 관여하는 한 슬프게 될 수없다 그리고 슬픔은 보다 커다란 완전성이 결핍하기 때문에 성립된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결핍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픔의 감정은 구체적인 작용이며, 그 작용은 보다 작은 완전성에로 이행하는 작용 이외의 아무런 작용도 아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활동력이 감소하고 혹은 억제되는 구체적인 작용이다 이 이의 쾌감이나 상쾌. 우울 .고통에 관한 정의들을 생략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여러 감정들을 주로 신체에 속하며 그리고 기쁨이나 슬픔의 어느 종류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4.경탄이란 정신이 그 때문에 움직여지지 않도록 묶여져 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다

정신이 그처럼 몰두하는 것은 그 상상이 특수하며 그 이외의 상상과는 전혀 관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5. 경멸이란 어떤 것이 정신을 거의 감동시키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눈 앞에 보면서도 그 안에 있는 것보다 그 안에 있지 않은 것을 상상하도록 정신을 유발시키는 상상이다.

여기서 나는 존경이나 모멸(侮蔑)의 정의를 생략하려 한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바로서는 어떤 감정도 이 두 감정도 이 두 개념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6. 사랑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설명

이 규정은 사랑의 본질을 충분히 명백하게 설명해 준다. 그러나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과 합일(合一)하려는 사랑하는 사람의 의지이다라고 정의하는 작가(作家)들의 정의는 실은 사랑의 본질이 아니고 오히려 그 하나의 특질을 표현하는 데 불과하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이 작가들에게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의 특질에 대해서도 선명한 개념을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런 점으로 보아 그들의 정의(定義)가 적어도 부정확하다는 것을 누구나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랑의 특질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내부에 있다. 따라서 의지에 의하여 사랑하는 대상과 합일하려고 할 때, 나는 그 의지(意志)라는 개념을 동의라든가 혹은 마음의 심려, 즉 자유로운 결의로는 이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이 없을 때는 자기 자신을 그것과 합일하려고 하며, 혹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거기에 있을 때는, 그것이 눈앞에 언제나 계속 있기를 욕망하는 것으로는 해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에 예로 든 것처럼 어떤 욕망이 없다 해도 사랑은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의지를, 나는 사랑하는 대상이 눈앞에 있기 때문에 사랑을 주는 쪽에서 일어나는 만족이라고 간주한다. 그 만족에 의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이 강하게 되거나 혹은 적어도 유지되어 진다.

7. 미움은 외적인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설명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앞 정의의 설명에서 언급했음으로 쉽게 이해될 것이다.

8. 애호〔애모〕는 우연히 기쁨의 원인이 되는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9. 혐오〔꺼림〕는 우연히 슬픔의 원인이 되는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10. 헌신이란 우리가 경탄하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설명......놀라움〔경탄〕이 사물의 신기한〔새로운〕 것에서 생겨나는 것을 이 부의 정리 52에서 증명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어떤 것에 대한 놀라움을 몇 번이나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놀라움을 중지 할 것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헌신이라는 감정이 쉽게 단순한 사랑으로 그 성질을 바꾸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1. 조소(嘲笑)란 우리가 경멸하는 것이 증오하는 것에 내재(內在)하고 있음을 상상할 때 생겨나는 기쁨이다.

12. 희망이란 불안정한 기쁨이다. 즉 그것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갖는 미래(未來)나 혹은 과거의 사물에 대한 관념에서 생겨난다.

13. 무서움〔공포=두려움〕은 불안정한 슬픔이다. 즉 그 결과에 대하여 우리가 어느 정도 의심을 갖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에 대한 관념에서 생겨난다.

설명

이들 두 규정에서 볼 때, 무서움을 동반하지 않는 희망이란 있을 수 없고, 또 희망을 수반하지 않는 무서움이란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면 희망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은 미래의 희망적인 존재를 배제(排除)하여 버리려는 어떤 것에 관해서도 또한 상상하고 있음이 상정(想定)된다. 고로 이 경우 그는 슬프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가 희망에 의존하는 동안,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것을 두려워(무서워)한다고 상정된다. 그러나 반대로 무서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증오하는 것의 결과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사람은 그런 것의 존재를 배제하려는 어떤 것의 결과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사람은 그런 것의 존재를 배제하려는 어떤 것을 상상한다. 이 때문에 그는 기뻐할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이 상상하는 한(限), 그런 것이 실현되지 않도록 희망한다.

14. 안전(안심)은 하나의 기쁨이다. 즉 의심의 원인이 제거되어진 미래나 과거의 존재 물에 대한 과념에서 생겨나는 기쁨이다.

15. 절망이란 하나의 슬픔이다. 즉 의심의 원인이 제거되어진 미래나 과거의 어떤 것에 대한 관념에서 생겨나는 슬픔이다.

설명

사물의 결과에 관해 의심이 원인이 제거된다면, 희망에서 안심(안전)이 무서움(공포)에서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은 원인이 제거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과거나 미래의 사물이 현실적인 존재로 상상하는데 서, 그리고 현재 눈 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서, 혹은 그가 의심을 품고 있는 그런 것의 존재를 배제하려는 어떤 다른 것을 상상하는데 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개개 의 사물의 결과에 관해 전혀 확신이 없다 해도, 우리는 그 결과에 관해 의심을 품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일어난다. 이미 우리가 증명한 것처럼, 어떤 것을 의심하지 않는 다는 것과, 어떤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서로 별개의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증명한 것처럼, 어떤 것을 의심하지 않는 다는 것과, 어떤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서로 별개의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과거나 미래의 사물에 대한 상(像)으로 부 터도, 현존하는 사물의 상에서 얻어지는 것과 같은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에 의해 움직여(자극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16. 희열(기쁨을 가져오는 것)은 뜻밖에 실현되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17. 양심의 가책이란 하나의 슬픔이다. 즉 희망에 반하여 실현된 과거의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18. 동정은 우리가 동류(同類)라고 상상 되는 다른 사람에게 당면한화(禍)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19. 호의(好意)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20. 적의(敵意)한 타인에게 화(禍)를 끼지는 사람에 대한 증오이다.

21. 과대평가란 다른 사람에 관하여 사랑 때문에 정당한 것 이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22. 과소평가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미움 때문에 정당한 것 이하로 평가하는 것이다.

23. 질투[시기]는 다른 사람의 행운을 보고 슬퍼하며, 반대로 다른 사람의 화를 보고 기뻐하도록 사람을 자극[동하게]하는 경우의 슬픔이다.

 

이해와 감상

 

스피노자의 철학사상은 합리적 세계관으로, 범신론, 숙명론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스피노자는 우선 우주 자체를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라고 복 그것의 존재를 위해서는 신이 필요하다는 데카르트의 사상을 비판하고, 우주 자체는 완전히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모든 것은 논리적으로 혹은 인과론적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있고, 우주의 일부인 인간의 지능은 이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보았다. 모든 것은 반드시 그 이유와 원인이 있고, 이 우주 전체의 이유와 원인은 우주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영원의 시각에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스피노자는 우주의 본질을 실체(Substantia)라고도 한고 자연(Natura)이라고도 하여 신=실체=자연이란 등식이 성립되게 하였다.

모든 것은 합리적으로 되어 있고 모든 사건은 모두 이유가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숙명론적이었다.

 

스피노자가 가장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썼고, 그의 사상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윤리학’은 그의 사상을 무신론이라고 정죄하려는 신학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가 죽은 후에 비로소 출판되었다. 일반적으로 ‘윤리학’이라고 알려진 이 책은 실제로 윤리의 문제가 그 주된 내용이 아니고 오히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인식론, 인간학이 정리된 것이다. 모두 5부로 된 이 책은 1. ‘신에 대하여’ 2. ‘정신의 본성과 근원에 대하여’ 3. ‘감정(Affectus)의 근원과 본성에 관해서’ 4. ‘인간의 예속 혹은 감정의 힘에 관해서’ 그리고 5. ‘지능의 힘에 대해서 혹은 인간의 자유’로 나누어져 있다.

‘기하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윤리학’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자기의 사상을 서술하는 방식을 나타낸 것이다. 즉 각 제목 밑에 ‘정의’, ‘공리(公理)’, ‘명제’들이 주어지며 그 명제들은 증명되는 식으로 쓰여져 있다.

완전한 조화를 이룩하고 있는 유기적인 전체(신, 자연)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바와 같이 정신적인 실체와 물질적인 실체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일 뿐이며,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그 실체의 두 속성에 불과하다 하였다. 그리고 이 두 속성을 가진 자연은 능산적(能産的)자연과 소산적(所産的)자연으로 나누어 고려될 수 있는데, 전자는 영원한 법칙에 따라 모든 사물을 생기게 하는 힘이요, 후자는 전자에 의하여 생겨지나 곧 없어지는 모습을 말한다. 그러나 그 모두는 물론 전체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독존적인 실체와는 달리, 의타적 존재들은 모두 양태(Modus)들이라고 부르고, 그러나 모든 양태들은 물론 유기적으로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만물은 모두 자체실현을 위하여 노력하며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이 이루어질 때 쾌감을 느끼고 방해될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감정도 필연적인 법칙에 의하여 일어난다. 그는 선과 악도 쾌감과 슬픔과 비슷하게 설명하여 자기충족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선이며 방해하는 것을 악이라 하였다. 인간은 감정의 힘을 원동력으로 하여 자기충족을 추구하지만 이성의 조절이 없으면 타인과 충돌을 일으켜 방해를 받는다. 이성은 감정을 조절하여 더 올바르고 효과적인 만족을 얻게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성 스스로가 감정(Affectus)dl 되어서 역행하는 감정을 억누르기도 하고 자기충족을 성취시키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모든 것이 예외 없이 인과법칙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모든 사건과 행동은 항상 필연적이며, 따라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간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환상이며 마치 돌멩이가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면서 스스로 원해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선을 위하여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역설하였다.

스피노자 철학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으나 독일 시인 레싱과 철학자 헤르더에 의하여 재발견되었고, 헤르더를 통하여 괴테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낭만주의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힘입은 바 크다. 신, 인간, 자연의 근본적인 일체성이 낭만주의의 한 중요한 요소이며, 그것은 스피노자의 상당한 영향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스피노자의 유기적이요 숙명론적인 자연관은 그 외에도 쇼펜하워와 니체, 베르그송 등의 생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스피노자는 한편으로는 철저히 수학을 모형으로 한 합리론을 주장하면서도 감정과 의지에 관심을 기울였고, 낭만주의와 신비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참고 자료

 

스피노자(1632-1677)

네덜란드의 철학자.

암스테르담 출생. 포르투갈계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 유대교단의 학교에서 헤브라이어와 성전(聖典)을 공부하였고, 카바라의 신비사상에도 접하였으나, 졸업 후에는 고전어를 공부하고 인문주의적인 교양을 쌓아 점차 이단적인 서구적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수학 ·자연과학도 공부하였고, 데카르트 철학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으며, 이 학설에 의거하여 성전과 조상의 학문을 대담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슬려 1656년 끝내 파문선고를 받았다. 유대교 광신자 중에는 그의 암살을 기도하는 자까지 출현하였으므로, 그는 각지를 전전하면서 극도로 고립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오히려 한가한 시간이 생겨 연구생활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신(神)·인간 및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짤막한 논문》 《지성 개선론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을 집필하였고, 《데카르트 철학 원리 Renati de Cartes principiorum philosophiae》(1663)를 출판하였다.

1663년 폴부르크로 이사하였고, 1670년 다시 헤이그로 이사하였다. 1673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 정교수로 초청하였으나, 사상의 자유와 《에티카(윤리학)》의 완성을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이 해에 《신학정치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을 익명으로 출판하였으나, 이것이 신을 모독하는 책이라고 비난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그는 15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한 주저 《에티카 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1675년 완성)를 생전에 출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 그 자체가 사후 100년 동안 무용지물로 매장되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명성과는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여가에 렌즈를 갈아서 생활비를 조달하였다. 그는 《국가론 Tractatus politicus》(1677)을 마지막 저작으로 남기고 폐결핵으로 죽었다.

F.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평하여 ‘신에 취한 사람’이라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며, 스피노자는 “모든 것이 신이다”라고 하는 범신론(汎神論)의 사상을 역설하면서도 죽은 후에까지 유물론자 ·무신론자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신이란 그리스도교적인 인격의 신이 아니고, ‘신은 즉 자연이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자연에 있어 만물은 신의 형태를 빌린 것이고, 자연을 초월한 곳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개물(個物:個體)은 신의 내적 필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와 같이 신에서 유래된 인과(因果)의 사슬에 의해 엄밀히 결정되는 필연(必然)의 세계를 말하면서, 인간의 최상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

스피노자는 사물에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자존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근거로 정치와 도덕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인간에게 있어 자율적인 이성의 작용이 자존성(自存性)이며, 도덕의 실제 목적은 이성의 작용으로 생기는 희열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 이성의 최고 작용은 신과의 필연적인 관계에서, ‘영원한 형상 밑에서’ 사물을 직관하는 것으로서 이것에 따르는 자족감이 바로 ‘신의 지적 사랑’이며, 여기에서 도덕의 최고 이상이 추구되었다. 스피노자 자신은 무신론자 ·유물론자로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지만, 그의 철학 특히 자연이라는 범신론이나 연장(延長)의 속성 사고방식 속에는 이러한 해석을 낳을 소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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