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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 부버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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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어(根源語)로서의 '나'와 '너'

 

세계는 사람이 취하는 이중적(二重的)인 태도에 따라서 사람에게 이중적이다.

사람의 태도는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Grundworte)의 이중성에 따라서 이중적이다.

근원어는 낱개의 말이 아니고 짝말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나-너(Ich-Du)'라는 짝말이다.

또 하나의 근원어는 '나-그것(Ich-Es)'이라는 짝말(합성어)이다. 이때에 '그것'이라는 말을 '그(Er)' 또는 '그 여자(Sie)'라는 말로 바꿔 넣더라도 근원어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따라서 사람의 '나'도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근원어 '나-너'의 '나'는 근원어 '나-그것'의 '나'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근원어는 그들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진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근원어가 말해짐으로써 하나의 존재가 세워지는 것이다.

근원어는 존재를 기울여 말해진다.

'너'라고 말할 때는 짝말 '나-너'의 '나'도 함께 말해진다.

근원어 '나-너'는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근원어 '나-그것'은 결코 온 존재를 기울여서 말할 수 없다.

 

'나' , 그 자체란 없으며 오직 근원어 '나-너'의 '나'와 근원어 '나-그것'의 '나'가 있을 뿐이다.

사람이 '나'라고 말할 때 그는 그 둘 중의 하나를 생각하고 있다. 그가 '나'라고 말할 때 그가 생각하고 있는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또 한 그가 '너' 또는 '그것'이라고 말할 때 위의 두 근원어 중 어느 하나의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과 '내'가 말한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나'라고 말하는 것과 두 근원어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근원어를 말하는 사람은 그 말 속에 들어가 그 안에 선다.

 

사람의 삶은 타동사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Etwas)'을 대상으로 삼는 활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무엇인가를 지각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감각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표상(表象)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의욕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이 모든 것과 이러한 따위의 일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과 이러한 따위의 일들은 한데 어울려 '그것'의 세계를 이룩한다.

그러나 '너'의 세계는 다른 바탕(기초)을 가지고 있다.

'너'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있는 곳에는 또 다른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그것'은 저마다 다른 '그것'과 맞닿아 있으며, 다른 '그것'에 맞닿음으로써만 존재한다. 그러나 '너'라고 말하는 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아무것과도 맞닿지 않는다.

'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무엇'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너'라고 말을 건널 때 그는 '관계'의 상황 속에 들어 서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무슨 뜻일까? 사람은사물의 표면의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경험한다. 그는 이 사물들로부터 그것들의 성질에 관한 지식, 곧 경험을 얻어낸다. 그는 사물에 붙어 있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경험만으로 사람에게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은 사람에게 오직 '그것'과 '그것'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즉 '그'와 '그', '그 여자',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져다 줄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엇'을 경험한다.

'외적(外的)'경험에다 '내적'경험을 덧붙인다 해도 사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의 신비를 무디게 하려는 사람의 욕망에서 생겨난 것이다. 내적인 것도 외적은 것도 똑같이 사물들 가운데의 하나일 뿐이다.

나는 '그 무엇'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때에 '명백한'경험에다 '은밀한'경험을 덧붙인다 해도 사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저 자신만만한 지혜는 사물 안에 있는, 비의(秘義)에 정통한 자들을 위해 남겨진 밀실(密室)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열쇠로 열어 본다고는 하지만. 아, 신비함이 없는 은밀함이여! 아, 정보(情報)의 더미여! '그것' 그것은 언제나 그것일 뿐이로다!

경험하는 사람은 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경험은 실로 '그 사람안'에 있으며 그와 세계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경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세계는 스스로를 사람들의 경험에 내맡기지만, 그러나 경험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왜냐하면 세계는 경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경험으로서는 세계에 아무 영향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경험으로서의 세계는 근원의 '나-그것'에 속한다. 그러나 근원어 '나-너'는 관계의 세계를 이룩한다.

관계의 세계가 펼쳐지는 영역은 셋이 있다.

첫째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여기서는 관계는 아직 어둠 속에서 흔들리며,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뭇 피조물들은 우리와 마주 서서 활동하고 있지만 우리에게까지 오지는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향하여 '너'라고 말해도 그것은 말의 문턱에 달라붙고 만다.

둘째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여기서는 관계가 명백해지고 언어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너'하는 말을 건널 수가 있고 받을 수도 있다.

셋째는 정신적 존재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여기서 관계는 구름에 덮여 있으나 스스로 나타나고, 말없이 말을 낳고 있다. 우리는 '너'라는 말을 듣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부름받고 있음을 느끼며 대답한다-형성하면서, 사고하면서, 행위하면서, 즉 우리가 입으로는 '너'라고 말할 수 없지만 우리의 존재를 기울여 저 근원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끌어들여 근원어의 세계와 관계를 맺게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우리 앞에 현전(現前)하면 생성되는 자를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너'의 옷자락을 바라본다. 모든 것에서 우리는 영원한 '너'의 옷자락을 바라본다. 모든 것에서 우리는 영원한 '너'의 나부낌을 들으며, 각 영역에서 그 나름의 방법을 따라 우리는 모든 '너'에게서 영원한 '너'를 부르는 것이다.

- 부버의 너와 나에서

 

이해와 감상

 

오늘날 사람들은 '깨어진 세계' (마르셀)에서 '찢기고 또 자기도 찢으면서, 해체되고 또 자기도 그 해체 작업에 한몫 거들면서 분열되고 또 자기도 분열을 추진하면서' (피카드) 살아가고 있다.

 

실로 우리들 현대인은 기계 ·기술 문명의 경이적인 진전과 그에 따르는 대중 사회의 상황, 수평화의 진행 속에서 아무런 내적 연관도 없이 살아가며, 스스로의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송두리째 잃어가는 '인간 소외' , '아톰화(化)'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적 상황을 부버는 '아르바이트 배후로의 인간의 낙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세계를 이제는 더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나 부버는 예언자다운 형안으로 고도의 기술 혁신에 의한 기계화가 인간의 비인간화, 자기 상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꿰뚫어 보았다. 그 위기의 핵심은 오히려 이러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이른바 근원어 '나­그것 '의 지배 아래 스스로를 매몰해 버리는 데 있으며, 사람이 이미 근원어 '나-너'를 말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버는 깨어진 세계, 인간의 자기 상실, 아톰화(化)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데서 온 것으로 보고, 이를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 곧 '나'와 '너'의 대화를 통하여 회복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사상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만남'(Begegnung, meeting)'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를 가리켜 흔히 '만남'의 철학자, '관계'의 철학자, '대화'의 철학자라고 하는 까닭을 이해하게 된다.

《나와 너》의 전편을 지배하며 흐르는 울림은 '처음에 관계가 있다'고 하는 명제로 된 주조음(主調音)이다. 이것은 '인간 존제의 근본적인 사실은 인간과 함께하는 인간이다'《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인간성의 근본 형식을 명제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계는 두 개의 근원어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로서만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근원어를 떠나서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으며, 이 근원어가 말해짐으로써만 존재는 성립되는 것이다. 사람의 '나'는 '나'만으로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나-너' '나'이거나 '나-그것'의 '나'이거나이지, 이 밖의 '나'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이 두 가지의 근원어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 걸일까?

'나-너'는 내가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비로소 말할 수 있는데 반해, '나-그것'은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근원어 '나-너'의 '나'는 인격으로 나타나서(소유격이 없는) 주체성으로서의 자기를 의식한다. 인격은 다른 인격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타난다'

 

그러나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은 '그것', 즉 비인격적 존재로 나타나게 되며 결국 나의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다.

오늘날 문제되고 있는 인간성의 상실이란 실상 인격이어야 할, 그리고 인격과 인격의 사귐 가운데 있어야 할 인간의 삶이 비인격화되어 '그것'으로 전락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나-너'에 있어서의 모든 '너'는 언젠가는 '그것'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에 우리 운명의 깊은 우수가 깔려 있다. 더없이 사랑하는 애인이라도 '나-너'의 인격적 관계는 때의 흐름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고, '너'는 '그것'으로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낱말의 '너'를 넘어서 보다 깊이 파고들어가 마침내 '너' 이면서 결코 '그것'이 되지 않는 '영원한 너'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낱낱의 '너'를 제쳐놓고 단숨에 영원한 '너'에게로 비약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우리 앞에 현전(現前)하며 생성되는 자를 통하여 '영원한 너'의 옷자락을 보게 된다. 모든 것에서 우리는 영원한 '너'의 나부낌을 들으며, 관계의 영역에서 그 나름의 방법을 따라 모든 '너'를 향해 영원한 '너'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람은 근원어 '나-너'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인격적으로 된다. 그리고 이 '나-너' 의 근원어가 강하게 되는 것은 구의 '너'가 영원한 너'가 될 때 정점에 다다른다. 이 '영원한 너'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워 왔지만 역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부버는 말한다. 그리하여 '영원한 너'로서의 하나님을 향하여 '너'라고 부를 때, 우리의 '나'는 인격적 존재의 가장 깊은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요컨대 부버에 의하면 인간의 세계에는 두 가지의 근본적으로 다른 질서가 있다. 그 하나는 '나-너'의 근원어에 바탕을 둔, 참다운 대화(Dialogue)가 이루어지는 인격 공동체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을 자기의 욕망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 곧 '그것'으로밖에는 보지 않는'나-그것'의 근원어에 바탕을 둔, 오직 독백(Monologue)만이 이루어지는 집단적 사회이다.

오늘날 더욱더 무서운 힘으로 인간을 '그것'으로 만들어 가는 현대의 기계문명과 산업사회 속에서, 극단의 이기적인 개인주의와 횡행하는 이 때, 자기를 잃어 버리고 고독에 우는 인간이 진정한 자기를 회복하고 참된 인격적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데 있어서, 부버의 이 인격적 '만남'과 '대화'의 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의의는 자못 크고 귀중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깊은 사상과 생명력을 간직한 이 책은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데가 있고, 그 표현 또한 사상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다. 얼핏 보아 수학의 정리를 방불케 하는 문장으로 시작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문제의 핵심에 독자를 끌어 넣는 처음 부분이라든지, 도처에 불쑥 나타나는 문답, 산문시와도 같이 아름다운 형상적 표현, 짧은 신화적인 삽화만으로 된 마디, 어떤 부분에서는 극도로 간결한,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포개고 포개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에 독자는 어리둥절하면서도 한없는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부버의 사상, 아니 그의 인격의 강한 현존성에 접하고 크나큰 감동에 젖게 된다.

참고 자료

부버(1878~1965)

독일의 유대인 사상가.

빈 출생. 빈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시오니즘의 문화운동에 종사하여 그 기관지와 도서출판에 손대는 한편 경건주의 및 동양철학을 연구하고, 헤브라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1923~1933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강의했고 1938~1951년에는 예루살렘의 헤브라이대학에서 사회철학 교수로 있었다.

그는 유대적 신비주의의 유산을 이어받아 유대적 인간관을 현대에 살리려고 하였다. 그는 유대적 인간은 감수적 ·객관적이기보다도 발동적(發動的)·주체적이며 실체내(實體內)가 아니라 오히려 관계내(關係內)에서 산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나’와 ‘너’의 연관이 그의 철학의 중심 문제로 수립되어 독자적인 실존주의적 사상이 전개됨과 동시에, 사회와 국가의 관계를 묻고, 마르크스주의를 배격하였으며 오히려 ‘유토피아에의 길’을 탐색하였다. 주요저서에 《인간의 문제 Das Problem des Menschen》(1948) 《유토피아에의 길 Pfade in Utopia》(1950) 《사회와 국가》(1952) 등이 있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면 마르틴 부버(1878~1965)는 유대인으로 1878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세 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어린 시절을 렘베르크에 있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의 조부 솔로몬 부버는 유대인 사이에서 이름 높은 학자로서 그 지방의 '하스칼라(계몽운동)'를 이끌던 지도자였다. 렘베르크는 옛 폴란드령으로 그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의 학문적 중심지였다. 따라서 부버는 학문 연구에 다시 없이 적합한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히브리어와 유대교, 그리고 유대 민족의 구비전설(口碑傳說)에도 정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의 부버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인상을 준 것은 하시디즘의 신봉자들과 함께 보낸 생활의 체험이었다. 그는 빈과 베를린의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전공했고, 이 무렵에 대두하기 시작한 시오니즘 운동에 가담, 그 기관지의 편집을 맡았다. 1916년 시오님즘의 전파를 목적으로 한 '선민(選民)'지를 창간하여 그 주필로 활약한 한편, 독일 신비주의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19세기의 사상가들, 특히 키에르, 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등의 강력한 영향하에 변화를 보이면서 저 유명한 '나와 너'의 사상이 명확한 윤곽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1923년부터 10년간 프랑크 푸르트 대학에서 비교종교학 강의를 해오다가 1933년 나치스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어 각국을 전전하다가 1938년 만 60세에 팔레스티나에 정착,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에서 사회철학을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1965년 85세를 일기를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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