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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록 / 몽테뉴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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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력의 불확실성에 대하여

이것은 바로 이 시구가 말하고 있다.

 

좋게든 나쁘게든, 말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호메로스

옳거나 그르거나 간에 여러 면으로 말하는 법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한니발은 로마군을 이겼다. 그러나 그는 이 승리를 이용할 줄 몰랐다.

-페트라르카

이 사고방식에 찬성해서 최근 몽콘툴에서 얻은 승리를 추격하지 않은 과오를 잘했다고 보거나, 스페인 왕이 우리 군대에 대하여 생캉탱에서 얻은 승리를 이용할 줄 몰랐다고 비난하는 자는, 이 과오가 그 심령이 자기 행운에 도취되고, 그 마음이 이 행운의 시초에 만족하게 충일되어, 벌써 그가 획득한 바를 소화하기 힘겨워 그것을 키워갈 취미를 잊은 데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한아름 잔뜩 껴안아서 더 잡을 여유가 없었으니 운수가 그의 눈에 이러한 좋은 수를 담아 줄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적에게 마음에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는 방법을 준다면, 여기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적군이 완전히 분쇄되어서 놀라 흩어졌는데도 감히 추격하지 못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던 자가 어떻게 적군이 뭉쳐 재기해서 울분과 복수의 마음으로 다시 무장하고 나오는 것에 대한 공격을 또다시 감행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운이 전부를 끌어갈 때에, 전부가 공포에 눌렸을 때에.

-루카누스

그러나 결국 그가 방금 잃은 것밖에 더 나은 일이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타격의 수로 승리가 결정되는 격검과는 다르다. 적이 제 발로 걸어가는 한 다시 똑같은 싸움을 해야 한다. 전쟁은 끝맺지 않으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카이사르는 저오리쿰 시 근처에서 겪은 최악의 고전에서 품페이우스의 군사들을 보고, 만일 그들의 부대장이 승전하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자기가 패했을 것이라고 그들을 책망했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왔을 때에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적을 추격해 나갔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그것을 욕심에 한계를 두지 못할 만큼 만족해 할 줄 모르는 주급한 정신의 소치이고, 하느님이 은총에 정해놓으신 척도를 억지로 물려받게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남용하는 짓이며, 승리의 뒤에 위험을 뛰어든다는 것은 승리를 또한번 운에 내맡기는 짓이며, 군사술의 가장 큰 예지의 하나는 적을 절망에 몰아넣지 않는 일이라고 어째서 말하지 못할 것인가? 실라와 마리우스는 사회전쟁에서 마르시 족들을 패배시키고 난 뒤에, 남아 있는 한 부대가 절망적으로 광분한 맹수와 같이 그들에게 돌격해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기다려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드 포와 경의 경우, 만일 그분이 라벤나의 승전에서 너무 심하게 패잔군을 추격하지 않았더라면, 자기의 죽음으로 그 승리에 오점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역사적인 기억이 너무 생생했기 때문에 당기앵 경은 세리졸의 승전에서 그런 참변을 피할 수 있었다.

사람의 무기를 들 수밖에 달리 피할 도리가 없을 정도까지 공격하는 일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불가피성이란 사나운 스승님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궁지에 몰리면 약자도 강자가 될 수 있다."(포르키우스 라트로)

죽음에 도전하는 적을 치기에는 승리의 대가는 크고도 무겁다.

-루카누스

그 때문에 화락스는 라케데모니아 왕이 만데니아 인들에게 승리를 얻은 날, 패전의 궤멸을 모면한 1000명의 아르고스 인들을 추격해서 도전하지 못하게 막고 그냥 자유로이 달아나게 두어서 패배에 분격한 용맹을 떨쳐 보기 위해 대들게 하지 않도록 하였다. 아키덴 왕 클로도미르는 부르고뉴의 왕 공드말에 승전하고, 그가 패배에서 도주하는 것을 추격하다가, 마침내는 고개를 돌려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적이 악착같이 대들었기 때문에 승전의 성과를 잃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싸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군졸들을 화려하고 풍부하게 무장시킬 것인가, 또는 다만 필요한 정도로 무장시킬 것인가, 둘 중에서 택해야 할 자는, 전자의 편을 유리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세르토리우스, 필로포에멘, 브루투스, 카이사르 등의 사람들이 선택한 방법이다. 군사들을 화려하게 장식해주면, 명예욕과 영광욕에 자극을 주며 자기의 무기를 재산이나 상속품처럼 아껴야 하기 때문에, 전투에 부딪칠 때에 더 악착같이 싸운다. 크세포논이 말하기를, 이 때문에 아시아인들은 전쟁할 때에 그들의 가장 소중한 재물과 아울러 아내와 첩도 데리고 간다고 했다.

그러나 한편에는 군사들에게 자기의 생명을 보전할 생각을 키우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방법으로는 병사들을 이중으로 모험을 무릅쓰기가 두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며, 적에게는 이 풍부한 전리품을 목포로 승리할 욕심을 북돋워 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로마군이 삼니트 족과 대전했을 때에 그것이 놀랄 만큼 로마군의 사기를 북돋워주었던 일이 주목되고 있다. 안티오쿠스는 한니발에게, 자기의 로마 군에게 대항시키려고 준비한 군대의 장비가 모든 점에서 화려하고 훌륭함을 보여주며, 그에게 "로마 군들은 이 군대로 만족할 것인가?" 하고 물어 보았더니 "그들이 만족하다니? 물론 그렇고말고! 그들이 아무리 탐욕스럽다 해도 말이야." 라고 대답했다.

 

리쿠르고스는 자기 부하들이 장비를 화려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패전한 적을 약탈하는 것조차 금지하며, 싸움 잘하는 것과 아울러 빈한과 검소함이 빛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도시 공격에서나 다른 데서나 적에게 접근하는 경우, 우리가 군사들에게 달려들어 온갖 욕설을 퍼부어 모욕하고 경멸하는 짓을 마음대로 하게 두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모욕한 자에게서 기대할 거리가 없을 것을 깨닫게 하며, 적이 사정과 체면을 보며 싸우리라는 희망을 없애버리고, 자기들이 살아날 방도는 승리의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델리우스의 경우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오토와 대전했을 때 그의 군졸들은 전쟁을 오랫동안 해본 일이 없었고, 도회의 유쾌한 생활에 젖어 있었으므로 용기가 약해져 있었다. 그러자 그는 병사에게 로마에 두고 온 여자들이나 잔치 생각만 하는 겁쟁이라고 욕을 퍼부으며 놀려 약을 올려 주었는데, 그것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용기를 그들에게 불어넣게 되었다. 그래서 적의 주먹을 자기 자신에게 끌어와서는 그들을 밀어 낼 도리 밖에는 없었다. 진실로 가슴 저리게 모욕을 받으면, 자기 임금의 싸움을 위해서는 비굴하게 굴던 자들도 자신의 싸움으로 삼고 용기를 내어 싸우게 된다.

한 군대의 지휘관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중시하고 의지하고 있으며, 적의 목표가 주로 그의 목을 노리고 있는 만큼, 그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고찰하면, 여러 위대한 장수들이 한창 뒤섞여 싸울 때의 의상을 바꾸어 변장하는 술책을 쓰는 것은 우리가 보아 온 바에 의하면 의심을 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폭풍우 같은 굉장한 소문을 성문 앞에서 들으면 부대장이나 병사들이 헐레벌떡거리며 몰려오는 것을 맞아들이게 되면, 이러한 격동 중에 그 주민들이 나쁜 짓을 꾸미지나 않을까 하는 것도 대단히 우려되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튼 임금님은 산 너머 이탈리아 땅에 두었던 군대를 돌려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와 반대로 영토 안에서는 자기 편에 둘러싸여 있으니, 모든 편익을 실수 없이 풍부하게 얻을 것이고, 강물이나 통로는 자기에게 충성을 받치며 식량과 금전을 호위 없이 안전하게 운반해줄 것이고, 신하들은 위험이 가까운 만큼 자기에게 더 헌신하게 될 것이며, 자기 방비를 위해서 많은 도시와 요새가 있으니, 기회와 편익에 따라서 싸움을 걸고 안 걸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좀 지체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성 안에 들어앉아서 편안하게 있는 동안, 적군은 적대하는 땅에서 앞이나 뒤나 옆이나 자기에게 싸움을 걸지 않는 것이란 없고, 자기 군대를 교체시키거나 확대할 아무런 방법도 없고, 병이 나돌게 되면 부상자들을 뉘어 치료할 만한 집도 없고, 금전도 식량도 창을 들고 약탈해와야만 하고, 휴식하여 숨쉬게 할 여가도 없으니, 복병이나 기습을 막기 위해 그 고장이나 그 나라 지형과 지세를 잘 아는 자도 없이 이러한 곤란에 질력이 나서 적군은 저절로 붕괴될 수도 있고, 만일 전투에 패하는 날이면 남은 군대는 수습할 길도 없는 사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편이나 저편이나 예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스키피오는 땅을 지키며 자기가 있는 이탈리아에서 적과 싸우기보다는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적군의 땅을 공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었는데 그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한니발은 그 전쟁에서 자기가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자기 땅을 지키러가다가 패망했다. 아테네 인들은 자기 땅에 적군을 남겨두고 시칠리아로 건너갔다가 반대의 운명에 부딪쳤다. 그러나 시라쿠사왕 아가토클레스는 자기 고장의 전쟁은 놓아두고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행운을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결과는, 특히 전쟁에 있어서는 대부분 운수에 달려 있고, 그 운수는 우리 생각이나 조심성에 따라서 도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버릇처럼 말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다. 이 시도 그것을 말해준다.

 

흔히 소홀한 조치가 성공하고, 조심하다가 실수한다.

운수는 반드시 행운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에게

승인과 원조를 주는 일 없이, 피차를 가리지 않고 돌아간다.

그것은 우리들 위에 군림하여 우리들을 지배하는 특별한 힘이 있어

모든 인생의 사물들을 그의 법 아래에 두기 때문이다.

- 마닐리우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의도와 고려가 거기에 많이 달려있으며, 역시 운수가 사고방식을 혼돈시키고 불확실하게 만든다.

우리는 함부로 날뛰며 분별없이 추리한다. 그것은 우리들과 같이 우리의 사고력은 대부분 우연에 매여 있기 때문이고 '플라톤' 속에서 티마에오스는 말한다.

-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Michel. Montaigne ; Essais

이해와 감상

 

몽테뉴 자신이 그 서문에서 '나 자신이 이 책의 내용이라' 라고 말한 대로 그의 생활과 작품은 통일체이다. 그의 '수상록' 에서도 천여 권의 장서로 둘러쌓인 서재로 이용되는 성의 탑에 관한 말이 나온다. 이 탑에서 즐겨 책을 읽고 명상하고 창을 통하여 밖의 생활을 관찰하였다. 보르도와 파리 여행에서 그는 많은 사람을 관찰하였다. 독서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생각나는 바를 기록하였고, 이 기록들을 비교 검토하여 결론을 내리곤 하였다.

1572년에서 시작한 몽테뉴의 수상록은 짧은 교훈이 담긴 이야기였다. 그는 이 수상록에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거의 표명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경우, 그는 세네카의 스토아철학을 따르고 있다. 몽테뉴는 물론 그의 서제에서만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국내에서는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에 치열한 싸움으로 내란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몽테뉴가 수필을 쓰기 시작한 해에, 8,000명의 개신교도들이 학살당한 바르토로기의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1580년 보로도에서 수상록을 발간한 다음 몇몇 친구들과 함께 스위스, 독일, 이태리를 거쳐 로마로 향하였다. 삼년 전부터 그는 담석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그리던 로마를 방문하기 위하여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에게 명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이 일에 관하여 '허영에 관하여' 라는 수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아직 이태리에 체류하고 있을 무렵인 1581년 9월,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다는 통지가 전하여 졌다. 그는 거절하였으나 왕의 요청으로 1585년까지 시장으로서 근무하였다. 53살에 몽테뉴는 다시 수상록에 손을 댈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출간된 된 수상록의 성공으로 그는 자신을 얻었기 때문에 이 세째번의 수상록에서 좀 더 솔직하고 대담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많은 여행으로 자신의 체험이 넓어졌다. 특히, 흑사병이 번지고 있었던 이 무렵에, 몽테뉴는 박식한 학자 또는 귀족들만이 죽음의 문제에 관한 독점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현학적인 교훈보다는 자연이 가르쳐 주는 바가 많다고 믿게 되었다.

1588년 파리에서 수상록 제3권의 출간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몽테뉴는 인질로서 몇 시간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된 사건이 있었으나 카트리느 드 메디시의 주선으로 곧 석방되었다. 수상록 제3권이 출간된 다음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앙리4세로부터 파리로 다시 와 달라는 초청이 전하여졌다. 그러나 건강 때문에 이 초청에 응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1592년 9월 13일, 기독교도로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

몽테뉴가 모든 계층의 인간에게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인간이란 무엇이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라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연구와 관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자신이 가장 손쉬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몽테뉴가 회의주의에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빼앗겼지만, 회의주의에만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는 책이 주는 교훈에 회의를 느꼈으나 인생이 주는 교훈에는 그렇지 않았다.

몽테뉴는 인간이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동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월성은 정도의 차이이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지능과 행동면에서 동물이 인간보다 우월할 수도 있다는 예를 보여준다. 인간은 지식을 자랑 하지만 그 지식이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가 될 경우가 더욱 많다. 그 이유는 지식의 바탕은 감각에 입각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은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 따라서 인간은 느끼고 지각하는 바를 왜곡하게 된다. 인간이 5관이 아닌 8 또는 10관을 가졌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리라.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영원하고 불변한 진리의 세계와 접해야만 된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도움이 없는 한 인간은 영원히 무지한 존재이리라.

불완전한 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사는 방법을 배운다면 생을 즐길 수도 있고, 주변의 인간과 자신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사는 방법을 터득할 수도 있으리라. 이러한 문제들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주변의 인간과 생을 알지 않고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한다. 반면에 그 어떤 인간이 그 사람은 나쁘다. 좋다, 현명하다, 무식하다라고 할 경우, 그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서로 너무도 유사하기 때문에 나를 통하여 모든 인간의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행복하게 살려면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앎으로써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에게 우리의 길을 찾아 달라고 한다. 즉, 남의 힘을 통하여 생활하고 사고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다르게 태어나듯이 모든 인간은 다른 생을 가져야 한다.

몽테뉴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가 가르치는 바는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을 배우느냐라는 문제이다. 몽테뉴의 문체는 당시에는 관심과 존경을 끌지 못하였다. 모방, 형식, 현학, 난해함이 유행하던 이 시기에 그의 문체는 평이하고도 개성적이다.

참고 자료

몽테뉴(1533∼1592)

프랑스의 사상가 ·모랄리스트.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성(Montaigne城:현재의 생 미세르 드 몽테뉴 마을) 출생. 프랑스의 르네상스기(期)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자이며 《수상록 Les Essais》의 저자이다. 대대로 보르도에서 살았던 부유한 상인 가문으로 에이퀨을 성으로 삼았다가 증조부 라몽 에이퀨 때 몽트라베르 남작령(男爵領)에 속하는 몽테뉴성과 그 영지를 매수하여 귀족이 되었다. 아버지 피에르는 프랑스와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한 군인으로 문예 애호가이기도 하며, 만년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다. 어머니의 가계는 포르투갈계(系) 유대인의 피를 받았다고 한다.

몽테뉴는 어려서 라틴어 교육을 받았고, 1554년 페리그 재판소에 근무하여 1557년 보르도 고등법원 참사관이 되었다. 그는 때때로 궁정에 찾아가 프랑스와 2세, 샤를 9세의 신임을 얻었다. 1565년 프랑수아즈 드 라 샤세뉴와 결혼, 156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테뉴 영주가 되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번역한 15세기 에스파냐 신학자 레이몽 스봉의 《자연신학(自然神學)》을 1569년에 간행하였다. 1571년 37세로 법관생활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작 생활로 들어갈 결심을 하였으나, 신 ·구파의 종교전쟁에 휩쓸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1577년 나바르왕 앙리(뒤의 앙리 4세)의 시종이 되었다. 1580년 써 모은 수필을 간추려 《수상록》(2권)을 보르도에서 간행하였다. 이 해 신장결석(腎臟結石) 치료를 겸하여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관광길에 올라 1년 반을 외국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여행기 Journal de voyage》(1774)가 나왔다. 여행 중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된 것을 알고 1581년 말 귀국하였다.

1583년 보르도 시장에 재선되었으나 종교적 내란과 페스트의 유행 등 많은 난국을 맞았다. 1586년에 몽테뉴성으로 돌아가 《수상록》에 증보와 수정을 가하고, 다시 제3권의 수필을 새로 집필하여 1588년 파리에서 《수상록》(3권)을 출판하였다. 그가 ‘결연(結緣)의 딸’이라고 부르기까지 한 구르네와 알게 된 것도 이 해이다. 만년에는 앙리 4세로부터 궁정 출사(出仕)를 간청받았으나 굳이 사양하고 《수상록》 가필(加筆)에 착수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는 처음에 금욕적(禁慾的) 인생관에 호의를 가진 듯이 보였으나, 중도에는 온건한 회의론에 기울어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루크레티우스를 통하여 에피쿠로스의 자연주의에도 공명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자기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근거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변천하는 대로의 인간을 그려, 자연에 대하여 단순히 몸을 맡기는 데에 인생의 지혜를 추구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르네는 그가 마지막 손질한 것을 기초로 하여 《수상록》의 신판을 펴냈다. 그는 이 《수상록》(3권)으로 프랑스에 모랄리스트의 전통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래의 프랑스 문학, 유럽 각국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B.파스칼은 몽테뉴의 인생관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을 관찰하는 점에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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