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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孟子) / 맹자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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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성선(性善)에의 신뢰

 

맹자 양나라 혜왕을 찾아 뵈신대 왕(혜왕)이 말씀하시되 “노인께서 천리를 멀다아니 하시고서 나를 찾아 오시니 또한 장차 써 우리 나라에 유익한 일이 있으십니까?” 맹자 대답하여 말씀이시되 “왕은 어찌 반드시 이(利)를 말합니까? 또한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왕이 말씀하시되 ‘무엇으로써(어떻게 하여야) 내 나라를 이롭게 할 것인가?’ 하며, 대부는 말하되 ‘무엇으로써 나의 집을 이롭게 할 것인가?’ 하며, 선비와 모든 사람들은 말하되 ‘무엇으로써 나의 몸을 이롭게 할 것인가?’ 하여 상하 사람이 서로 이(利)를 가지고 싸우면 곧 이 나라가 위태할 것입니다.”

 

“만승의 나라에 그 임금을 죽이는 사람은 반드시 천승의 집이요, 천승의 나라에 그 임금을 죽이는 사람은 반드시 백승의 집이니, 만에서 천을 취하며, 천에서 백을 취하는 것이 많음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진실로 의(義)를 뒤로 하고서 이(利)를 먼저 하면 다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아니함이라. 어질(仁)고서 그 어버이를 버리는 사람이 잇지 아니하며, 의롭고(義)서 그 임금을 뒤로 하는(등지는) 사람이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은 또한 인(仁)과 의(義)를 말씀할 따름이시니 어찌 반드시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양나라 혜왕이 말씀하시되 “덕이 적은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마음을 다할 뿐이니, 하내(河內) 땅이 흉년이 들면 곧 그 백성을 하동(河東) 땅에 옮기고 그 곡식을 하내 땅에 옮기며, 하동이 흉년이 들면 또한 그러하나니, 이웃 나라의 정치를 살펴보건대 내가 마음을 쓰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웃 나라 백성이 적어지는 데 보태지지 않으며 나의 백성이 많아지는 데 보태지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맹자 말씀하시되 “왕이 싸움을 좋아하실새 청컨대 싸움하는 것으로써 비유하리이다. 북소리 요란하게 북을 치고서 군기를 이미 접하여 싸우다가 갑옷을 버리고 군사를 이끌고 도망가되 혹은 백 보쯤 도망한 뒤에 그치고 혹은 오십 보쯤 도망간 뒤에 그치고서 오십 보로써 백 보 도망간 것을 웃으면 곧 어떠하니이꼬?” 왕이 말씀하시되 “옳지 않은 것이니 다만 백 보는 아닐지언정 이것도 또한 도망한 것입니다.”

 

무릇(대저)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 남이 이를 업신여기며, 집은 반드시 스스로가 헌 뒤에 남이 이를 헐고,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가 친 뒤에 남이 이를 치니라.

 

지금은 넷째 손가락(무명지)이 굽어져 펴지지 아니함이 있는 것이 아프고 일에 해로운 것이 아니지마는, 만일 능히 이를 펴는 사람이 있으면 곧 진나라, 초나라의 길을 멀다고 아니하고서 찾아가나니, 이것은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음을 위하여서니라.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면 이를 미워할 줄을 알되 마음이남 같지 아니한 것은 미워 할 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이른바 종류를 모르는 것이니라.

 

맹자 말씀하시되 “군자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천하에 왕이 되는 것은 더불어 있지 아니하니라. 부모께서 함께 살아 계시며 형제가 사고가 없는 것이 첫째 즐거움이요, 위를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아래를 굽어보아서 사람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이 둘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것이 세째의 즐거움이니라.”

 

맹자 말씀하시되 "섬기는 일이 무엇이 큼이 되느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큼이 되니라. 지키는 것은 무엇이 큼이 되는고? 몸을 지킴이 큼이 되니라. 그 몸을 잃지 않고서 능히 그 어버이를 섬기는 사람을 나는(이를) 들었고, 그 몸을 잃고서 능히 그 어버이를 섬기는 사람ㅇ르 나는 듣지 못하니라. 무엇이 섬기는 것이(일이) 되지 않으리오마는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섬기는 일의 근본이요, 무엇이 지키는 것이 되지 않으리요마는 몸을 지키는 것이 지키는 것의 근본이니라."

맹자 말씀하시되 "옛적의 군자는 허물이 있으면 곧 이를 고치더니, 지금의 군자는 허물이 있으면 곧 이를 따르니라. 옛적의 군자는 그 허물에 있어서 일식과 월식과 같아서 백성이 다 이를 보고, 그 고치는 데 미치어서는 백성이 다 이를 우러르더니, 지금의 군자는 어찌 한갓 이를 따르기만 하리요? 또한 좇아서 이를 위하여 변명하니라."

인(仁)은 사람이 지녀야 할 마음이요, 의(義)는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이라. 그 길(義)을 버리고서 말미암지 않으며, 그 마음(仁)을 방치하고서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슬프도다. 사람이 닭이나 개가 도망감이 있으면 이를 구할 줄 알지만 방심(放心)이 있으되 구할 줄을 알지 못하나니, 학문의 도(길)는 다름이 아니라 그 방심을 구할 따름이니라.

맹자 말씀하시되 "자신을 버리는 사람은 가히 더불어(함께) 말함이 있지 못할 것이요, 자신을 버리는 사람은 가히 더불어 일을 함이 있지 못할 것이니라. 말이 예와 의가 아닌 것을 이르되 자포라 하고, 내몸이 능히 인에 거하고 또 의를 말미암지 아니하는 것을 이것을 이르되 자기라 하니라. 인(仁)은 사람이 살 평안한 집이요, 의(義)는 사람이 행할 바른 길이니, 현안한 집을 텅 비었다 하여 거하지 아니하고, 바른 길을 버리고서 말미암지 아니하니 슬프도다."

맹자 말씀하시되 "어질면 곧 영화스럽고 어질지 않으면 곧 욕되니라.지금에 젖는 것을 미워하면서 어질지 아니한 데서 사나니 이것은 젖는 것을 미워하면서 아래에 거하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이것을 미워할진대 덕을 귀히 여기고 선비를 높이는 것만 같은 것이 없느니라. 어진 선비가 높은 지위에 있으면 능한 사람이 직장에 있으면, 나라가 (잘 다스려져서) 한가할지니, 그 때에 미쳐서 그 정치와 형벌을 밝게 하면 비록 큰 나라라도 반드시 이를 두려워할 것이니라.

맹자 말씀하시되 "천시(좋은시운)는 지리(地利)만 같지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니라. 삼리(三里)의 성(入城)과 칠리(七里)의 성(外城)을 포위하여 이를 공격함에 이기지 못하나니, 무릇 포위하여 이를 공격하면 반드시 천시(좋은시운)를 얻음이 있건마는 그러나 이기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천시가 지리만 같지 못함이니라. 성이 높지 아니함이 아니며, 못이 깊지 아니함이 아니며, 군사와 무지가 굳세고 날카롭지 아니함이 아니며, 곡식이 많지 아니함이 아니건만 다 버리고서 여기를 떠나가나니 이것이 지리가 인화만 같지 못한 것이니라."

맹자 말씀하시되 "사람을 사랑하여 친하여 지지 않으면 그인(仁)을 반성하여 보고, 사람을 다스려서 잘 다스리지 않으면 그 지혜를 반성하여 보고, 사람에게 예의로 하여서 대답이 없으면 그 공경함을 반성하여 보고, 행동하고서 얻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다 자기 몸에 반성하여 구할지니, 그 몸이 바르면 천하 사람들이 여기에 돌아오니라."

맹자 말씀하시되 "왕이 천하의 왕이 못되는 것은, 하지 아니하는 것이언정 능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니이다." 왕이 말씀하시되 "하지 않는 것과 또 능하지 못한 것의 모양이 어떻게 다릅니까?" 맹자 말씀하시되 "태산을 끼고서 북해를 뛰어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능하지 못한다 하면 이것은 진실로 능하지 못한 것이어니와, 어른을 위하여 나뭇가지를 꺾어 오는 것을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능하지 못한다 하면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이언정 능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까닭으로 왕이 천하의 왕이 못 되는 것은 태산을 끼고서 북해를 뛰어 넘는 종류가 아니라, 왕이 못 되는 것은 이것은 어른을 위하여 나뭇가지를 꺾는 종류입니다."

맹자가 말씀하시되 "사람이 다 사람의 어려운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니, 선왕이 사람의 어려운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사 이에 사람의 어려운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정치를 하시니라. 사람의 어려운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마음으로써 사람의 어려운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정치를 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가히 이것을 손바닥 위에 운전할 수가 있습니다."

 

 

이해와 감상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맹자는 전국시대라는 혼란기 속에서 산 사상가였고, 그의 이상은 봉건제도를 주초와 같은 형태로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학설에 봉건적인 정치의식ㆍ도덕의식이 짙게 점철되어 있을 것은 용이하게 짐작되는 일이나, "시대" 라는 이름의 그런 운무를 헤치고 맹자 자신에게 접근했을 때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맹자'를 통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것은 그의 강력한 인간신뢰다. 그가 살고 있었던 시대를 역사에서는 전국시대라 부른다. 그 직전의 시기는 춘추시대며,공자가 살고 있던 때는 그 말기였었다. 즉 전국시대의 중기에 해당했다. 그것은 소위 하극상의 시대였으며, 하극상까지 하는 판국에 대등한 나라끼리의 전쟁을 꺼릴 리가 없는 것이어서 싸움은 국내와 국제간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런 살발한 시대, 힘만이 지배하는 시대에 사는 지식인이 갈 길은 몇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현실은 긍정하고 그 속에 뛰어드는 방향이다. 부국강병을 주장하고, 병법을 논하는 따위의 지식인이다. 또 하나는 현실에서 등을 돌려 자기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이다. 소위 은둔사상이 그것인바, 이런 고답적 도피사상으로서 우리는 도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상되는 것은 높은 이상을 내걸고 어지러운 세상을 수습하고자 하는 길이다. 박애주의ㆍ평화주의를 표방한 묵자도 이 계열에 속할 것이며, 맹자 역시 이 대열에 귀속된다고 보아야 한다.

맹자가 사숙한 것은 공자였으며, 그는 공자의 사상을 자기의 이상으로 삼아 그것으로 천하를 구하고자 노력하였다. '맹자' 첫머리에 나오는 것은 양혜왕과의 대담이다. 맹자는 국가를 이롭게 하는 방법에 관해 관심을 보이는 혜왕에게, "대왕께서는 왜 이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따름입니다." 라고 반박했다. 도의에 입각한 정치는 저절로 천하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만들며, 드디어는 왕자가 될 수 있다는 맹자의 주장은 어느 왕 앞에서나 되풀이되었거니와, 힘과 힘이 맞부딪치고 있던 당시의 정세로 볼 때 현실과의 사이에 어떤 갭이 있는 것 또한 부정은 못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자는 이 주장을 끝가지 밀고 나갔다. 이것은 굉장한 그이 신념이겠지만 그러한 확신으로 그를 몰고 간 것은 인간이란 원래 선하다는 자각, 바꾸어 말하면 인간성에 대한 신뢰였다고 보인다.

맹자의 중심사상이 되는 것은 물론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당시의 중국은 여러 나라가 대립하여 서로 싸우고 있던 시기인 만큼 각국 정부는 사상가들을 우대했으므로 극도의 언론 자유가 보장되어, 중국 오천년 역사에 있어서 사상적인 황금시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서 두드러진 사상가는 묵자·양주였는바, 묵자는 박애주의·실용주의를 주장했고, 양주는 감각론적 개인주의를 부르짖었다. 이런 속에서 맹자는 공자의 도만이 진리임을 굳게 믿고, 그것을 굳게 지켜 나갔다.

다만, 특이한 것이 있다면, 인 외에 의를 존중하여 공자의 사상인 인으로 집약되는 데 대해, 맹자의 그것은 인의로 대표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에 다시 의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던가. 의란 질서라 할 수 있다. 부자간의 질서, 부부간의 질서, 군신간의 질서, 그런 것을 중국인들은 의라는 말로 표현했다. 전국시대에 이르자 이런 인륜의 질서가 극도로 문란해졌기에 맹자가 특히 여기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유는 거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며 당시의 사상계의 동향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에서 묵자의 박애주의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묵자의 박애주의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무차별한 사랑이었다. 이런 사랑은 대부분의 세계 종교가 역설하는 바이기에 오늘의 우리 눈에는 이상하게 비칠 것도 없겠으나, 인륜을 중시하는 맹자의 입장에서는 양상이 그렇게 비치지는 않았다. 인간관계에는 친소가 있다. 그 친소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유교의 근본적인 입장이었다. 공자가 주장한 인의란 한 마디 말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개념이거니와, 그것이 외부로 작용하는 경우 ! 사랑이 될 수도 있는바, "가까운 데에서 먼 데로"라는 것이 그 원칙이었다. 부모에 대한 사랑과 이웃을 대하는 사랑에는 차등이 있어야 하며, 이웃과 먼 지방의 사람사이에도 차등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고 또 그것이야말로 정당하다는 사고방식이었다. 맹자가 보기에 묵자의 박애는,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금수의 도라고 생각되었다. 그러기에 이에 대항하기 위해 특히 의라는 덕을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맹자의 만년의 대부분을 제후에 대한 유서로 보냈던 바, 그가 항상 주장한 것은 이 인의에 의한 정치였다. 어떤 경우에도 동요함이 없었던 근본적 신조였다. 무력으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국가에서 군비 같은 것은 제쳐두고 인의에 의한 정치를 하라고 하는 주장은 처음부터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었다. 맹자의 웅변에 압도되어 그것이 옮음을 일단 인정하면서도 군주들은 막상 그 정책을 채택하려고는 안했다. 이것은 반드시 군왕들 쪽에서만 잘못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정이라 해도 거기에는 구체적인 정책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으나, 맹자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이와 같이 맹자는 당시의 모든 국가들이 요구하는 부국 강병책은 아무것도 내놓은 것이 없는 반면, 인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전국을 비판 단죄한 점에서는 매우 준렬하였다.

 

맹자의 정치 사상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민중 본위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맹자는 진심편에서 명확히 선언했다. "국가에서 볼 때 가장 귀중한 것이 백성이요, 가장 가벼운 것이 임금이다." 라고. 그가 보기에는 국가란 민중의 행복을 보장해 주기 위한 기관이며, 국가의 주인은 임금이 아닌 백성들이었다. 왕자가 받는 천명이란 것도 사실에 있어서는 민중의 지지를 의미하는 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민중을 괴롭히는 임금을 갈아치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맹자가 후대의 왕조에 의해 좀체 그 권위를 공인받지 못한 데에는 이런 반역적인 그의 학설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민주적 사고 방식은 현대에서도 충분히 그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공자 시대에는 아직도 추상적 사고는 발달되지 못했고, 공자 자신도 인격 수양에 치중했을 뿐 인간의 본성에 관해 구체적으로 사색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서자 여러 사상가들이 나타나 각기 주장을 내세웠으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차츰 사색하기에 이른 것도 자연적인 추세였다고 할 수 있다. 성(性)은 심(心)과 생(生)의 합자(合字)인바, 처음부터 천부의 능력이나 성질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맹자의 견해는 어떠했던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인간의 본성이 선량함을 주장했다. 소위 성선설(性善說)이다. 그러면 그런 결론에 도달한 근거가 된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라 할 때 그것을 인간의 특질, 인간만이 지닌 고귀한 성질로 보지 않았나 하는 점이 생각된다. 그는 다른 동물과 사람을 구별하여,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인의(仁義)가 있는 까닭이라고 했다. 즉 도덕적 존재인 것은 사람밖에 없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라고 생각한 것이겠다.

둘째로는 이와 관련해서 그가 지녔던 유교적 인생관이 그것을 요청했다고도 할 수 있다. 순서로 따지자면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안 다음에 인의가 귀중함을 인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인의가 진리임을 공자를 통해 배운 뒤에 그 근거를 찾아 인간의 본질에까지 손을 댄 것이겠다. 따라서 인의의 덕이 내부에서 나왔다면 처음부터 본성을 착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여지가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로 사단설(四端說)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인간성에 대한 고찰인 바, 처음부터 인간성 중에 포함된 악은 외면했다는 점에서, 출발로부터 성선설을 예상하고 들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단이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인데, 이것들은 각기 인·의·예·지의 단서라는 생각이다. 즉 누구라도 동정심을 다소라도 안 가진 사람은 없거니와 그것을 확장·성장시키면 인(仁)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세 가지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누구나 느끼는 의문은 그러면 인간이 지닌 악은 무시되어도 좋으냐 하는 생각이다. 맹자도 그것을 인정했다. 인간의 본성에는 악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감각에 얽매이는 데서 오는 과오라 해서 이것을 본성에서 제외하였다.

맹자는 성선설에 의해 인간의 무한한 도덕적 가능성을 믿어, 어지러운 사회 상황에 처해서도 실망하지 않고, 위대한 도의적 사회가 출현할 것을 기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맹자의 수양론(修養論)도 이 성선설을 기초로 해서 전개되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각적 욕구가 그것을 방해하기에 악을 범하게 된다. 따라서 그런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한 방법이며, 사단(四端)을 확장·육성해 가는 것이 한 방법이다. 전자를 소극적 수양론이라 한다면, 후자는 적극적 수양론이 될 것이며 이 양자를 병행하는 것에서만 인격의 완성을 기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그의 성선설은 유교의 도덕철학으로서 송대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인정되어, 그의 위치는 확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실의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내일을 믿는 마음, 이것이 없다면 인류는 위기를 무엇으로 극복해 가겠는가. 지금 인류는 심한 인간 불신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의 이런 불굴의 신념은 큰 고무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맹자는 사상가·정치가·철인·웅변가·문학자의 모든 면을 가지고 있었고, 그 어느 한 면만으로 운위(云謂)될 성질의 인물이 아니지만,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 인간 신뢰라는 이 한 점에서만 바라본다 해도 영원한 인류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하겠다.

참고 자료

맹자(BC.372~289년으로 추정)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맹가(孟軻)의 저술.

그의 문인들이 스승이 죽은 후에 정리한 것이라는 견해들도 있으나, 수미 일관된 체제 등을 들어 일반적으로 맹자의 직접 저술로 인정하고 있다. 송대의 유학자인 주자(朱子) 등에 의해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후한(後漢) 말기의 조기(趙岐)와 주자가 붙인 주석이 가장 수준 높은 해설서로 통용된다. 양혜왕(梁惠王)·공손추(公孫丑)·등문공(웽文公)·이루(離婁)·만장(萬章)·고자(告子)·진심(盡心)의 7편으로 구성되었다.

양(梁)의 혜왕에게 ‘이(利)’를 구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왕께서는 오직 인의(仁義)를 말씀함에 그칠 것이지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라는 어구로 쐐기를 박은 첫머리의 기사가 전체 저술의 개요를 이루는데, 공자의 인(仁)에 대해 의(義)를 더하여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그것은 다시 본성이 선하다고 전제하여 인간을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성선설(性善說)과 민의(民意)에 의한 폭군의 교체를 합리화한 혁명론(革命論)을 중심 기둥으로 삼고 있다. 정의에 따른 사회생활을 강조하고 그 물질적 기반을 매우 중시하였으나, 대인(大人)의 일과 소인(小人)의 일을 구분하여 육체 노동자에 대한 정신 노동자의 지배를 합리화하였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현대사회에서는 그 전체적인 사회 ·정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지만, 크게는 ‘성선설’로부터 구체적으로 ‘호연지기론(浩然之氣論)’에 이르는 견해들은 시대를 뛰어 넘어 인간 생활의 한 지침이 되고 있다. 빈틈없는 구성과 논리, 박력 있는 논변으로 인해 《장자(莊子)》 및 《좌씨전(左氏傳)》과 더불어 중국 진(秦) 이전의 3대 문장으로 꼽히는 등 문장 교범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왔으며 한문 수련의 필수적인 교재이다. 또 ‘오십보백보’ ‘알묘조장(拘苗助長)’ 등의 절묘한 비유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돋우고 논지를 철저히 이해시켜 준다.

보조 자료

 

맹자의 생존연월에 관해서는 설이 구구하나, 대체로 BC.372~289년으로 추정된다. 성은 맹이고 이름은 가(軻)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에는 '맹가는 추나라 사람이다. 학문을 자사(子思:공자의 손자)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도(道)를 통한 다음 여러 곳을 떠돌다가 제나라 선왕(宣王)을 섬겼다. 선왕은 그를 쓰지 못했으므로 양(梁)으로 갔다. 양의 혜왕도 맹가의 주장은 실행하지 않고, 그의 주장은 당시의 실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운운으로, 누구나 반드시 있게 마련인 자(字)까지도 밝혀 있지 않을 만큼 극히 간략하게 다루어져 있다. 우리가 그의 전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맹자가 51세 때 혜왕을 만나 인의(仁義)의 도(道)를 역설하면서 정계에 나서면서부터이다. 혜왕이 죽자 양나라를 떠나 제(齊)로 가서 성왕의 고문이 되어 소국(小國)을 이상적인 모델국가로 이룩해 보려는 의욕으로 정전제(井田制) 등을 실행하려고 힘썼다. 얼마 뒤 그는 술의 고문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망할 때까지 은퇴생활에 들어가 매일 애제자들과 문답을 나누면서 문인(門人)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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