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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의 철학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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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의 철학

김진성

 

 

 

문명에 짓눌린 20세기 초반의 서구

 

철학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그의 사변의 세계에서는 자유스러우나, 문제를 문제로서 의식하는 데는 그렇게 자유스럽지 못하다. 철학자는 그의 시대가 봉착한 문제를 ‘주어진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은 철학적 인간학의 창시자인 셸러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장 문제거리로 등장한 시대였다.과학적 인식의 발달과 함께 인간과 우주에 대한 고전적 해석은 무너지고, 새로운 학설이 등장되었다. 그러나 과학적인 이론의 타당성은 확실한 것인가? 브륀티에르가 말한 ‘과학의 파산’의 조짐이 바로 과학의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기술 문명은 인류를 정말 유토피아에로 인도하는 선을 지니고 있는가? 또한 2차 대전은 이성에 대한 맹목적 확신과 문명에 대한 낭만적 긍지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문명은 탈을 쓴 야만인, 이것이 폐허의 거울에 비친 서구인의 참모습이었다. 과 연인간의 도덕성과 정신성은 문명과 함께 성숙했는가? 역사의 방향은 무엇이며, 인류에게 미래는 보장되어 있는가?

 

바야흐로 서구는 숱한 사상적.시대적 난제를 위기 의식 속에서 안은 채, 바로 그들이 쌓아 올린 문명의 중압에 짓눌리어 신음하고 있었다. 베르그송은 누구보다도 이 시대의 가쁜 숨결을 같이 청진하고 인간과 우주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정신적 질서의 복권

 

20세기 초반은 과학주의와 실증주의의 유물론이 지배 하고 있었다. 당대의 기계주의와 유물론에 근원적이고 가장 성공적인 비판을 하고 있는 베르그송이 그의 모든 저서에서 놀라운 일관성을 가지고 이룩한 작업은 단 한 가지로 요약된다. 정신과 정신적 질서의 복권, 그는<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에 관한 시론>(1889)에서 지속하는 자아의 자유를, <물질과 기억>(1896)에서 뇌와 독립해 존재하는 기억의 실재성과 영혼불멸의 가능성을, <창조적 신화>(1932)에서 최후로 신을 되찾는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작업은 다른 하나의 결론에 수렴된다. 즉 인간과 우주, 삶에 대한 존재론적 긍정이다. 당대의 과학주의는 멀지 않아 우주의 모든 사태와 운행을 불변의 법칙 속에서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인식론적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과학주의가 그러한 긍지 속에서 하나하나 밝혀 낸 인간과 세계는 우리에게 살맛을 잃게 하는 무의미와 폐허였다. 실증주의 심리학에 의하면 인간은 그의 고유한 정신성과 가치를 박탈당하고 물질처럼 필연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꼭두각시로 화한다.

과학적 심신 평행론과 의식 부대 현상론에 의하면 우리는 한번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원자들의 무의미한 이합 집산에 불과하며, 그 속에서 사는 인간에게도 특별한 삶의 목적이나 가치는 주어지지않는다. 도덕의 절대성을 찾는 마음은 인생이 허무하지 않음을 찾는 마음과 통한다. 그런데 뒤르켕류의 사회학에 의하면 도덕적 의무는 결국 일정한 사회집단의 표상이며, 사회적 교육이 우리에게 심어준 것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과학주의의 생과 우주에 대한 비판론에 대해 베르그송은 그의 지속의 이론, 생명의 악동의 진화론, 사랑의 신의 이념을 통해 인간과 우주에 확고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이 그의 철학이 당대의 지식인으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얻게 된 근본 이유이다.

 

베르그송 철학이 지니는 가장 중대한 철학사적 의의는 그의 역동적 형이상학에 있다. 형이상학은 세계의 존재와 설명의 원리로서 자존적이고 완전한 존재를 찾는다. 서양 형이상학의 원조인 플라톤은 이러한 존재를 본질이라고 한다. 본질주의 입장에서 보면 시간적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한 세계이다. 왜냐하면, 경험계의 모든 사물들은 타자와의 끊임없는 관계맺음과 영향 속에서 본질의 순수성을 온전히 구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물들의 본질이 절대적인 자기 동일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가능한 모든 관계맺음에서 독립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의 본질계에서는 변화와 운동이 일어 나지 않으며, 따라서 시 간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본질은 자기 내부에서나 밖에서 그의 존재를 파괴할 아무런 요인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영원히 존재한다. 모든 사물의 본질이 상호 간섭 없이 공존하는 영원의 차원이 이데아이다. ‘시간은 영원의 모상’이라는 플라톤의 존재론은 서양 철학사에 생성보다는 존재에, 시간보다는 영원에, 운동성보다는 부동성에 보다 높은 존재의 우위를 두는 정적 형이상학의 문을 열었다.

 

생명의 본질은 자발성

 

그러나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러한 본질주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있다. 생명의 운동은 타자와의 관계맺음에서 타자화하지 않고 일자화하여 무규정성에로 하강하지 않고 자기 규정에로 상승한다. 따라서 사실이 지적하듯이, 관계맺음과 운동 속에서 존재가 형성되고, 다가 성립하며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생명의 운동은 관계 속에서 일자가 타화한다는 본질주의의 합리성에 역행하는 비합리적 세계이다. 생명의 본질은 자발성이다. 자발성은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본질과 같으나, 타자와의 관계맺음에서 능동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본질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위이다. 이러한 자족적인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연속화하기 위해 시간을 탄생시키며, 따라서 시간성은 본질주의의 견해처럼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절대적이다. 자족적인 시간성의세계는 그 존재근거로 다른 것에 의존해 있지 않다. 시간성 밖의 불변의 원리와 초월적 존재를 부인하며 역설적으로 존재와 부동성 속에서 생성과 운동의 결핍을 본다. 그리고 본질보다 자발성이 선행하는 기능 일변도의 역동적인 형이상학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을 지니는 것은 순수한 자발성 자신이며, 만유가 시공 속에서 연속된 운동을 하고 있는 한 이러한 자발성은 단 하나이다.

 

태초에 우주적 생명의 추진력이 있었다. 이 추진력은 물질의 저항을 뚫고 무수한 생명체로 진화한다. 베르그송은 다윈류의 진화 이론을 거부한다. 다윈의 적자 생존과 자 연 도태설은 엄밀히 말해 이미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 왜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 새로운 종의 탄생은 이해하지 못한다. 나아가서 이 우주에 최초로 생명이 자리 잡은 시점의 어디에 자연 도태의 계기가 있었겠는가? 사실 하등 동물은 그것이 생존하는 한 고등 동물과 마찬가지로 물질과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셸러가 말했듯이, 원초적인 생명력의 입장에서 보면, 하등 동물이 고등 동물보다 훨씬 우월하다. 왜 생명은 최초의 성공적 적응에 안주하지 않고 위험 부담을 안으며 보다 복잡하게 진화해 왔는가? 쇼펜하우어의 ‘생에 대한 맹목적 의지’는 틀렸다. 생명의 이 적의에 가득찬 세계에서 살아 남겠다고 몸부림치는 가엾은 존재는 아니다.

생명의 . 진화는 물질의 필연성을 더 완전히 극복하고 자신의 자유와 창조성을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다.

생명의 악동, 이러한 생명의 진화는 인간에 있어서 가장 성공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베르그송은 기계론 못지않게 목적론을 배격한다. 자발성은 활동성이며 진정한 자발성은 끊임없이 새롭고 창조적인 활동을 재개하는 데서 성립하기 때문에 언젠가 스스로의 활동성이 소진될 어떤 정적인 상태를 지향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에 보다 많은 양의 비결정성과 자유를 심는 것을 소임으로 하는 진화의 원리에서 보면, 인간은 지구 위에 있는 전체적인 생명구조의 존재 근거’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창조적 진화>에서 우주를 ‘지속의 상 아래서’조망하는 베르그송은 인간과 우주에 대해 ‘위대한 긍정’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서양 철학사에 있어서 낙관론을 표방하는 거의 유일한 시간성의 철학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에서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시간성의 철학은 비관주의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베르그송에 있 어서 시간은 소멸과 부재의 차원이 아니라 생성과 충만, 그리고 창조의 차원이다. 이러한 그의 존재론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생명의 악동’이 ‘사랑의 악동’으로 발전함으로써 그 마지막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신 앞에 선 인류, 그 집단적 구원

베르그송의‘닫힌 도덕’, ‘열린 도덕’그리고‘정적 종교’, ‘동적 종교’의 이념은 역사 철학, 나아가서 인간 구원의 이론이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이론은 실증주의자 콩트의 ‘사회 정태학’,‘사회 동태학’의 이념에서 이미 다루어진 문제이다. 콩트는 ‘사랑을 원리로, 질서를 기초로, 진보를 목표로’하는 사회진화의 ‘인류 종교’의 이념을 제시한다. 그러나 어디에서 인류에 대한 박애의 존재론적 가능성을 찾을 것인가? 실증주의에 있어서 사랑은 문자 그대로 ‘무로부터의 창조’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베르그송은 기독교 신비 체험가들의 경우를 엄정한 방법론적 숙고를 거쳐 객관적 사실로 인정하고 기독교의 창조 신을 인정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신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하듯이 똑같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하나같이 보여준다.••••• 창조는 신이 창조자들을 창조하고 자기의 주위에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들을 둘러싸는 작업이다.” 사랑이 신의 창조의 원리라면 인류에 대한 사랑은 우주에 생성의 원리에 합일하는, 진리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신 앞에 선 단독자’의 이념은 틀렸다. 신은 명상의 대상이 아니라 행위의 대상이며, 그 행위는 인류 전체에의 사랑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신 앞에 선 인류, 그 집단적 구원, 이것이 베르그송 철학의 결론이다.

베르그송 철학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우주, 인간과 산을 잇는 연속성의 철학이다. 이 우주는 절대적인 세계이며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은 의미 있고 환희에 가득찬 것이된다. 가장 훌륭한, 베르그송 연구가인 얀켈레비치는 그이 철학의 의의를 다음과 같은시적인 표현으로 집약한다. ‘이 아침의 환희, 이 저녁의 환희’

 

김진성/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젊은 나이에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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