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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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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김용덕

 

머리말

한 나라의 역사를 볼 때 역사학자들읁 '지맂거인 조건이 어떠하였는가, 어떠한 인간들이 사라았는가' 하는 것을 제일 기초적인 이해의 수단으로 삼는다. 일본사를 볼 때도 땅과 인간이 일본 역사의 전개에서 어떠한 영향을 주었느냐에 대해 지적할 수가 있겠다.

일본의 땅은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훗카이도·혼슈·시코쿠·규슈 등 4개의 큰 섬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일본에는 수천 개의 섬이 있다. 오늘날 4개의 큰 섬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제일 먼저 연결된 것이 혼슈와 규슈사이의 간몬 해협인데 자동차, 기차가 바다 밑으로 달리고 있다. 혼슈와 훗카이도 사이에도 같은 해 다릴로 연결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은 면적 약 38만 평방 킬로미터의 섬나라로서 남북 22만평방 킬로미터인 우리 나라의 1.7배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은 화산으로 이루어진 섬이기 때문에 화산 피해가 많고, 지진·태풍의 피해도 심각해서 이용할 수 있는 면적은 그리 넓지 않다. 또한 상당히 높은 산들이 많은데 높이 2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 약 70개 이상 있다. 따라서, 국토가 산맥으로 많이 갈라져 있으며, 산맥이 많다 보니 그에 따라 강도 많이 흐르고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일본의 경지율이 우리 나라보다 낮은 약 17% 정도라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인의 기원은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얼굴이 우리와 비슷하고 언어의 구조도 비슷하기 때문에 몽골리안이라는 것은 대체적으로 인정이 되나, 일본에는 아이누족이라는 것도 있다. 오늘날 미국이 인디언을 보호하듯이 일본도 훗카이도 일부 지역에 보호지역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지만, 현재 순수 아이누족을 찾아보기는 힘든 실정이다. 그러나 아이누족은 역사적으로는 중세까지도 대단한 세력으로 북방에 남아 있었다. 아이누족의 정벌을 위한 대장군의 칭호가 나중에 일본에서 장군이라는 칭호, 즉 '쇼군'이라는 말의 시초가 될 정도였다. 또 남방 계통의 인종이 우리보다는 훨씬 많다. 일본 사람의 풍습이라든지 모양 등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일들은 말레이 폴리네시아 계통, 즉 남태평양 계통의 종족읻.ㅏ 일본 사람은 키가 작고 털이 많으며 치아가 고르지 못한데, 치아가 고르지 못한 것은 남방 계통의 특성이고 수염이 많은 것은 아이누족 계통의 특성이라고 한다.

문화적, 의식적 측면에서 일본 민족이 형성되는 것은 대개 5세기 이후로서 이 시대가 고분 시대 후기에 해당한다. 이 시대에는 큰 무덤이 많이 축조되었으며 통일 권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통일 왕조가 나타나는 것은 그보다 100여 년이 훨씬 지난 뒤의 일이다. 일본 민족은 다양한 요소에 의해, 또 오랜 기간에 걸쳐 문화적으로는 대륙적인 것을 지배 문화로 수용하면서 형성되었다. 오늘날 일본 인구는 1억 2천만이 넘는다. 이와 같은 풍토, 지리적인 조건 속에서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사의 전개에서 어떤한 특질을 보이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풍토적 배경과 특질

일본은 동아시아의 변경에 위치한 섬나라로서 독자적인 문화의 원천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외래 문화를 받아서 자기 문화로 만들어 갈 수 밖에 없었다. 즉, 외래 문화에 대해서 종속적이고 수용적인 입장이었다. 일본의 고대 문화는 한반도를 통해서 전래되거나 중국과의 의도적인 접촉을 통해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이점도 있었다. 자기 나라에 필요한 문화는 받아들이지만 필요하지 않을 경우에는 바다를 자연의 장벽으로 삼아 수용을 절제, 조절할 수가 있었다. 고대 국가의 형성 과정을 보면, 일본인들이 국가 경영에 요구되는 기본 지식을 받아들여 충분해졌다고 생각될 때, 소화를 해내는 동안 이 지리적인 장벽을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나 한국 같은 선진 외국이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일본을 개명시키겠다는 의도가 없을 경우에는 일본은 자기들이 필요에 따라 직접 와서 배울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수나라나 당나라를 모방하기 위해서 일본은 견수사(絹隋使)나 견당사(遣唐使) 같은 대규모 사절단을 보냈던 것이다. 견수사는 수나라의 수명이 짧았던 이유로 얼마 보내지 않았지만 견당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수백 명씩 보냈다. 특히 그 사절단 속에 유학생을 끼워 보내 다음 사절단이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중국 문화를 배워왔으나 838년에 마지막 견당사가 다녀온 후로는 중국에 가지 않았다.

그 후 일본 안에서 독자적으로 그것을 소화하면서 일본적인 성격이 그 내부에서 생겨 나는데, 소위 헤이안 문화가 그것이다. 헤이안이란 오늘날의 교토로서 교토에 왕실이 들어서면서 꽃핀 문화를 말한다. 헤이안 문화가 일본의 고유 문화라고 일본 사람이 많이 이야기하고, 이 시기에 『만연집』과 같은 고전 작품들이 나오지만, 헤이안 문화가 생기기 전 일보의 고대 문화는 한반도와 중국 대륙 등을 통해 배워 온 문화가 기본이 된 것이었다. 이것이 일본에서 헤이안 문화로 꽃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지리적인 단절을 이용해서 스스로 외래 문화를 소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졌던 것이다. 일본과 견주어 한반도는 독자적 문화를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일본보다 적었다. 한반도는 만주를 통해 직접 중국과 연결되어 있어, 중국에서 왕조가 바뀐다든지, 특별한 지방 생긴다든지 또는 새로운 정치 사상이 왕조 교체와 함께 일어나면 그것이 한반도로 직접 밀려오게 된다. 한반도는 이것을 절단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지리적인 장벽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의 영향이 급속도로 그리고 직접 미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문화로 토착화하는 데 필요한 여유가 일본보다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섬나라라는 지리적 여건이 또하나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외부 침략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는점이다. 일본 역사상 외국 군대가 국내로 직접 들어간 것은 1945년 이전에는 없었다. 1945년부터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일본을 군정으로 통치한 7년간을 빼고는 일본 역사상 외국군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물론 몽고군이 쿠빌라이칸 때 두 번(1274, 1281) 일본을 점령하려고 갔던 적이 있지만, 요행히도 그 당시에 불어닥친 태풍 때문에 성공할 수가 없었다. 일본을 처음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일본의 사원을 보고 그 규모의 거창함에 놀라는 일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큰 사원들은 고대 일본의 힘이 강성해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대규모 건축물은 우리 나라에도 존재했으나 외침에 의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신라 때 만든 경주의 황룡사나 백제에서 만든 익산의 미륵사 같은 것들도 복원을 하면 일보의 어느 절보다도 큰 절일 것이 확실하다. 피장적 관찰로 일본의 불교 문화가 엄청난 규모로 발전했고 우리 나라는 그렇지 못했다고 자칫 속단하기 쉬우나 외침이 없었던 일본은 문화를 보존할 수 있는 여건이 우리보다 더 나았다.

섬나라이기 대문에 나타나는 단점도 있다. 우선 섬나라이기 때문에 생기는 폐쇄적인 속정을 들 수 있다. 외국과 고립되었다는 인식에서 동질성이 형성되지만 그 동질성은 베타적인 성격을 띠기 쉬운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런 것들을 일본만 지니고 잇는 독특함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고립된 지리적 환경 때문에 그 독특함을 일본 역사를 신성화하는 데로까지 확대시켜 외국에 대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을 왜곡하는 경향이 많았다.

일본은 외국 문화를 수입하여 일본화시키는 경향이 뚜렷하다. 예를 들어, 일본의 천황관을 보자. 그들은 그것을 자기 나라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중국과 한국의 영향을 받아 고대 국가가 형성될 무렵에는 중국·한국의 왕 개념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를 일본 안의 단절된 상태 속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뒤에 천황의 위치를 승격시킨 것이었다.

불교도 일본에서는 특이하게 변하고 있다. 우리 나라도 무론 불교가 토속 신앙과 많이 결부되어 있지만 일본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특히 많이 나타난다. 흔히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신도(神道)와 불교가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서 불교 사원 안에 신도적 요소가 많고 또 신도 내부에도 불교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다. 신불습합적인 논리에서는 신도와 불교는 하나로서 일본 천황은 석가모니가 일본에 현세불로 나타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 사상이 일본 불교의 중요한 조류를 이루고 있다.

유가사상(儒家思想)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천황이라고 하는 존재를 전제로 하고 유가 사상을 받아들이기 대문에 천황은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독특한 것이다. 유가에서는 왕을 죽인다든가 왕을 내몬다든가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왕이 무도한 경우에는 정당화될 수 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왕조교체가 자주 일어난 이유의 하나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본의 유학자들은 충성의 대상을 바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유가의 이념이 구현되고 있는 곳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군림하는 일본뿐이다'는 식으로 유가를 일본식으로 변형하고 있다. 더 심한 것은 기독교가 일본식으로 변형된 예이다.

1945년 이전 일본 군국주의 시대 때 "일본에는 이미 유일신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 그것은 천황에 의해 계속 내려왔고 신도가 일본 기독교를 토착화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때문에 일본 기독교 사상은 신도와 연결될 수 있다."고까지 얘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일본의 독자성을 강조하다보니까 외국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일본형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일본의 지리적 폐쇄성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리적인 조건으로 인한 또 하나의 불리한 점은, 일본 전체에 지진과 태풍의 피해가 잦아 언제나 불안한 심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불안이 현세 허무적인 생각으로 치닫는 수가 많다는 점이다. 죽음에 관한 일본인들의 생각은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 우리 나라에서는 죽음을 모든 것이 끝나는 절대적인 의미로 생각하는 데 비해서 일본에서는 생과 사의 갈림길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살까지도 미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불아한 자연 환경에 대해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대응 방식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석조 건축물은 별로 짓지 않는다. 물론 큰 빌딩은 예외겠지만 일반 주택은 아직도 목조를 중심으로 한다. 목조가 거축 기술상 지진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는 까닭에서이다. 자연 환경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응이라 하겠다.

한편 일본 사람은 끊임없이 저축을 하는데 이는 자본 축적을 위해 위로부터 강요된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쌓아 두어야만 하는 관습에서 나온 것이다. 늘 도사리고 있는 불안함을 달래려는 데서 나왔다고 볼 수도 있다. 불안에 따른 강박 관념이 저축 성향을 낳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불안은 종교적인 깊은 명상이나 수행보다는 현세적인 복을 기원하는 민간 신앙을 발전시켰다. '신도'라고 하는 것을 일반적인 고등 종교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일본인들에게는 현세 긍정적이고 쾌락적인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일본에는 높은 산과 그에 따르는 강이 있어 뚜렷하게 지역이 구분되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사회 조직과 풍습의 특성이 뚜렷하다. 예를 들어, 고대 국가가 확립된 뒤 '구니'라는 것은 많은 경우, 나라가 아니고 풍습이 다른 지방을 일컫는다. 도쿠가와 시대에 이르면 정치적인 편의를 좇아 전국이 260여 개의 번으로 나누어지는데, 연합체의 성격을 띤 중앙 정부가 있어서 중앙 정부는 여러 번들의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메이지 시대까지 획일적인 중앙 집권제는 자리잡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무로마치 막부나 덕도쿠카와 막부에 중앙 집권적인 성격이 없지 않았지만 전체 번의 연합체ㆍ조정자ㆍ관할자와 같은 것이었다. 지역 사회는 중앙의 공권력에 의해서 완전하게 통합되기는 어려웠다. 일본 역사에서 봉건 분할 체제의 요인은 지리적인 조건과 특성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인종과 사회 문화적 특질

일본인들의 가족관 또한 독특하다. 이는 지리적 조건보다는 인종적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의 같은 문화권 속에서 일본 특유의 토착적인 관습이 그만큼 오래 지속되어 왔다는 것은 인종적인 요인, 특히 아이누 계통의 요인보다 남방 계통의 요인이 더 강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분학자들 가운데에는 아이누적인 요소가 더 강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관습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이누 계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인들은 근친혼을 한다. 물론 친남매 간은 안 되지만, 삼촌·사촌 간에는 결혼을 할수있다. 우리 나라에도 유가 문화가 지배적이기 전, 고려 시대까지는 왕실에서 근친혼을 했었으나 유가적인 관념이 철저해지는 조선조부터 금기시해 왔고 이 관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일본은 양자를 맞아들일 때도 혈연과는 무관하게 맞아들인다. 우리 사회에서는 양자를 맞아들일 때 관습적인 틀이 있다. 즉, 자식이 없을 때는 핏줄을 나눈 형제의 자식가운데 한 사람을 양자로 맞고 그것이 안될때 사촌·육촌의 아들 가운데서 양자를 맞아들인다. 핏줄을 따져 양자를 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능력 본위로 양자를 들인다. 물론 친척 가운데 능력있는 사람이 있으면 양자로 맞이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혈연에 연연하지 않는다. 회사 사장이라면, 그 회사 안에서 능력있는 사람을 골라 자기 딸을 주고 성을 주어서 자기 가문을 사위가 잇게 한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결혼을 해서 처가 쪽의 성을 갖게 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는 형제 수상으로 유명한데, '기시'라는 성은 기시 노부스케가 양자로 들어간 집안의 성이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테키도 처가의 성을 땄다.

일본 사람들은 '가'라고 하는 것을 우리와 달리 '핏줄의 계승'보다는 '집안의 명예나 전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즉 '가문'을 추상적인 연속체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식의 혈연적인 '가문'을 지탱하는 덕목은 '효'이며, 따라서 부모에게서 받은 것은 조금이라도 훼손시킬 수 없다는 '신체발부 수지부모'의 관념이 강하다. 그래서 자살은 부모에 대한 불효요,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처럼 '가문'을 이름ㆍ명예ㆍ전통으로 생각할 경우, '효'의 실행보다는 명예ㆍ전통을 위한 '충'이 '효'에 우선하는 경향이 짙어서 사무라이들이 자살을 하는 경우에도, 가문이 중요할 뿐 부모ㆍ처자 등은 상대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지막 문화적특색으로 들수 있는 것은 신도와 같은 주술적인 특이한 신앙 형태가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왔다는 점이다. 토속신앙은 어느 문화에서도 다 보이지만 신도는 윤리적인 기본의식이 박약하다. 덕을 쌓아야 내세가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가미사마'에게 복을 빌어서 복을 받겟다는 즉자적인 관념이다. 인간과 신의 구분이 우리와는 또한 다르다. 신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초월적인 의미를 가지고 잇는데, 일본에서는 신을 이 초월적인 의미의 신과 인간의 중간 단계에 두고있다. 일본에서는 '의민 신앙'이라는 것도 많다. 예컨대, 농촌에서 농민이 도탄에 빠졌을 때 앞장서서 관원에 호소하다가 그것도 안되어 결국, 농민을 이끌고 난을 일으킨 주모자들은 난이 평정된 후에는 처형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관에서도 어느 정도 양보를 하게 되기 때문에 농민들은 지도자의 희생의 대가를 받게 된다. 그리고 지도자는 처형당하고 난 후 신앙의 대상이 된다.

일본에는 군신이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러ㆍ일 전쟁 때 유명한 장군으로, 명치천황이 죽었을 때 따라 죽은 '노기 마레스케'라는 대장은 일본에서 신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신에 대한 관념이 우리와는 다르다. 다른 나라의 고등 종교를 본떠 일본 신도를 개화시켜 나간 것이 아니라. 신도가 나름대로 지속되어 오면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고등 종교까지도 일본형으로 바꾸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특질

지리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일본 정치사의 몇 가지 특색을 살펴 보자. 우선 주목되는 것은 좁은 농경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사실이다. 제한된 경지 면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즉 제한된 식량을 가지고 많은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강력한 신분질서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질서가 유지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웠다는 것이 일본적인 조건이라면 우리는 일본에 비해서는 여유가 있엇다. 우리 나라에서는 먹을 것이 없으면 화전민이 될 수도 있었으나 일본은 산이 높기 때문에 화전을 할 수 있는데도 별로 없었다. 주어진 땅 안에서 먹고 사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이렇게 형성된 철저한 신분 질서 사회는 계층 사회를 만들어 내고, 계층 사회가 유지 되려면 계급이 세습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기가 속해 있는 계층 속에서의 자기의 위치는 고정될 수밖에 없었고, 법과 도덕도 만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계층에 따라 차별이 생겼다. 사무라이가 일반 농민보다 잘사는 이유는 일반 농민들의 지도자로서 모범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지만, 대신 법과 윤리는 더 엄하게 적용되었다. 농민들에게는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인정해 주면서 법과 도덕의 적용은 덜 엄했지만 복종은 절대적인 것으로 강요 되었다. 움직일 수 없는 신분 질서 속에서 한 개인이 취할수 있는 성취의 방향이란 자기가 속한 집단 속에서, 자기에게 부여된 조건속에서 가능한 극한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어느 도장공이 일본적인 신분 질서 속에서 칼을 만드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그 신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전통 시대의 일본사회였기 때문에, 주어진 조건 가운데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좋은 칼을 만드는 길밖에 없었다. 장인 의식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극한을 추구하는 것이 일본 문화의 특색인 것이다. 철저한 장인 의식과 직업 윤리, 이것은 신분 이동이 불가능한 계층적이 지배 질서 속에서 나왔다고 볼 수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볼 때 동아시아에서 일본만이 과거 제도를 채택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고등 문관 시험이라는 것을 채택하기 전까지 일본에는 과거 제도가 없었다. 과거 제도란 것은 유가 정치권 속에서 엘리트를 뽑는 기본적이 방법인데 일본에서는 이를 채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과거를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한다는 생각이 세습적인 신분 질서가 지배하는 일본 사회에 부합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학자 리즈만이 지적한 이 특징을 더 발전시킨 것이 역사학자 라이샤워이다. 즉, 일본 사회는 목표를 지향하는 사회이고, 한국이나 중국같은 사회는 지위를 지향하는 사회라고 보는 것이다. 일본 사회는 지위 상승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분적 한계 속에서 자기의 목표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일본의 근대화를 해명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곧, 일본이 근대화에 재빠리 성공한 것은 전형적인 봉건사회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잇다. 서양에서도 전형적인 봉건 사회를 겪고 난 다음에 근대화로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처럼, 극한을 추구하는 일본 사회에서는 기술 축적이 가능했다. 반면 과거제도가 채택된 사회는 하나의 목표에 대한 집념보다 지위 상승을 위한 공부를 중시하게 되므로 장인 의식 등을 통한 기술 집적이 박약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주장들은 전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일단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일본 사회의 철저한 질서 의식이 외국인들의 눈에는 아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비치기도 하였다. 1776년에 일본에 왔던 스웨덴 사람 툰베리는 일본에 관한 그의 기록에서 일본을 제 1급의 나라로 평가하면서 조직화된 사회 질서는 서양 어느문명과 견주어서도 모자라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습적인 신분사회 속에서의 질서의식이라는 것이 자기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시민 사회의 질서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1700년대 말의 일본의 사회질서는 세습적인 신분사회 밑에서의 복종이라는 질서, 즉 봉건적 복종의 질서였으나 근대 사회의 질서는 복종의 질서가 아니라 자기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 질서를 지켜야 하는 자율적 개념이었다. 이른바 근대 시민 사회적 질서이다. 1700년대 말 서양의 시민 질서 의식이란,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근대 국가가 형성되면서 시작되는 질서 의식이고, 이 당시 일본의 질서 의식은 세습적 신분제 아래에서 주어진 일을 다해야 된다는 전통적인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일본적 특성의 또 하나는, 집단에의 강한 귀속성 때문에 책임전가 의식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신분 이동의 폭이 제한되어 있고 상하의 질서 체계가 엄격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집단에 속하게 된 개인에게는 주어진 임무를 다하는 것만이 요구되었지 개인의 주체적인 결정과 책임은 요구되지 않았다. 어느 면에서는 책임의 면제이며, 자기가 속한 집단으로의 책임 전가라고도 볼 수있다. 한번 임무가 주어지면 주어진 조건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책임의식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무책임의 체계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소속 구성원들의 책임 면제 관념은 다른 집단에 대해서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선악의 판단 없이 자기 집단이 요구하는 바를 기계적으로 수행하게 만든다. 일본 사람이 외국에 나가 잔인해지는 이유를 이 점과 관련시킬 수도 있다. 임진왜란 때나 제 2차 세계 대전 때 일본 병사들의 가학 행위는 주체적인 책임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집단에 대한 철저한 귀속감, 철저한 충성심 들이 개인 윤리 의식을 마비, 말살시켰다고 본다.

정치사적인 면에서 마지막 특색은, 분할된 땅을 통합하고 일본인들에게 동질성을 갖게 한 구심점으로의 천황 제도이다. 천황제도에는 일본 나름의 신성성이 부여되어 있으며, 천황은 왕조 교체의 차원을 넘는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천황제는 정치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쓰여왔다. 아무리 전근대 사회라고 하더라도 통치자는 어디에서든 통치의 정당성을 찾아야 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이를 천자의 개념, 즉 천명에서 찾는다. 천명이란 맹자의 말대로 백성의 마음이 쏠리는 데에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통치의 정당성을 천명에서 찾았고 더 구체적으로는 민심에 두었다. 못된 군주가 백성을 괴롭힐 때는 '천명이 떠났다'는 명분에서 그 왕조를 무너뜨린 사람이 천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 나라 경우에는 엄밀히 말하자면 중국의 인정을 받는 데에서 통치의 정당성이 나왔다. 중국에 사신이 가고 조공을 하는 것도 그 방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반정으로 새로운 정권을 세운다 해도 독자적인 지배의 정당성을 대외적으로 갖지는 못하였다. 중국에서 책봉을 해줄 때에야 비로소 정당성을 갖는 것이었다. 조선 태조가 왕이 되었지만 중국에서 인정을 해주지 않자 계속적으로 사신을 보냈던 일, 그 후에도 반정이 있으면 어김없이 중국측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했던 일이 이를 증명한다. 일본은 이를 천황에게서 찾았다. 일본에서 왕조 교체와 비슷한 현상을 찾는다고 하면 막부가 교체되는 것이다. 막부는 교체될 때마다 지배의 정당성을 천황에게서 받아 왔다. '쇼군'이라는 칭호를 받음으로써 지배의 정당성을 받게 되는 것이다. 천황이란 고대에는 제정 일치의 주재자였으나 막부가 생긴 이래로는 정치로부터 초월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세속 지배권을 장악한 막부는 천황으로부터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받음으로써 백성에게는 충성과 복종을 요구할 수가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장군은 번의 대명, 즉 번주들을 인정하는 권한을 갇고 있었다. 한편 번에 사는 백성들은 그 번의 대명에게만 충성하면 되었다. 그러나 막부에서는 백성들의 충성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충성의 사슬을 만들었다. 즉 백성은 사무라이에게 복종을 해야 되고 사무라이는 자기가 속한 번의 대명에게 충성을 하여야 하고 번의 대명은 막부의 장군에게 충성을 해야 하고 장군은 천황에게 최종적인 충성을 바쳐햐 한다는 것이다. 막부는 세속의 정치를 맡았기 때문에 정치 변화에 따라서 많은 영향을 받지만 천황은 신성한 성격이 부여됐기 때문에 세속권의 흥망 성쇠에 영향받지 않는 존재였다. 세속으로부터 초탈함으로써, 즉 세속적 정치에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천황은 세속 정권의 지배자에게 위협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통치의 정당성을 세우는데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천황은 일본 역사상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다. 물론 천황제는 명치유신 이후 왕정 복고의 논리에 의해 지위가 격상되어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시대로 돌아가게 된다. 천황은 오히려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자기의 초월적인 위치를 유지해 갔다. 제 2차 세계 대전후 일본 헌법이 민주 헌법으로 바뀌면서 천황은 국가의 상징으로 규정된다. 국가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천황은 앞으로도 국민 감정의 구심으로서 존속할 것이다.


김용덕/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이며, 저서로는 '명치유신의 토지 세제 개혁','일본 근대사를 보는 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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