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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명령을 받는 사람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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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명령을 받는 사람

 

김 명 정

 

정신 분석학의 두 가지 명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시작한 정신 분석학도 다른 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사실을 관찰하고 그 관찰된 자료를 정리하고 풀이함으로써 얻어진 이론 체계라 할 수 있다.

정신 분석학에는 가장 기본이 되는 두 가지 명제가 있다.

첫째는 사람의 정신과 행동은 예외 없이 모두 인과론의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가 그 현상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원인에 필연으로 따라오는 것이고 아무것도 우연히 생겨나는 것은 없다. 이를테면 일상 생활에서 무엇을 깜박 잊어버리는 수가 가끔 있다. 그럴 때에는 거의 그것을 우연히 잊어 버렸다거나 그저 그냥 잊어버린 것으로 여기고 만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그 뒤의 분석학자와 정신 치료자들이 밝혀내 왔고 지금도 줄곧 관찰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러한 '우연한 잊어버림'이란 없고 사실은 어떤 뚜렷한 원인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찾아보면 잊어버리고자 했던 의도나 소망이 숨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꿈도 마찬가지다. 간밤에 당치도 않은 꿈을 꾸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저 아무 뜻도 없는 개꿈으로 여기기 일쑤이나 꿈은 엄연한 인과 법칙에 따라 꾸는 것이고 꿈꾼 사람의 정신 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정신 분석학의 둘째 명제는 사람의 마음에는 무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의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거의 예외 없이 의식 세계였던 데에 견주어 정신 분석학은 보통 상황에서는 의식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를 이른바 심층 심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보통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그의 마음과 행동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과정이 있다. 이를테면 어떤 순간에 전혀 뜻이 없어 보이는 자잘한 느낌이나 생각이 우연히 떠오른다. 그럴 경우 그 느낌이나 생각이 바로 앞의 느낌이나 생각, 어떤 경험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일 때도, 그것은 어떤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 반드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뜻하지 않게 어떤 실수나 실언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하기 싫은 일이나 괴로운 일은 잘 잊어버린다. 외상값 같은 일도 잘 잊기 쉽다. 그러나 애인과 만날 약속을 잊는 일은 드물다. 만일에 그것을 잊었을 때에 애인에게서 마음이 변했다는 항변을 듣는다면 펄쩍 뛰면서 정말 정직하게 그것을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적어도 무의식 속에서는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다. 직장에서 좀 쉬고 싶고 전보다 더 식구들의 보살핌을 받고 싶었던 사람들이 우연히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수가 가끔 있다. 교통 사고 같은, 겉으로는 우연한 사고로 입원한 사람들 중에도 입원함으로써 무엇인가를 얻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이럴 때는 대개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쉬운 원인들을 앞장 세워 나타난다.

프로이트의 비관적 인간관

사람의 말과 행동은 이와 같이 의식과 무의식의 복합 작용으로 만들어지지만 프로이트는 오히려 무의식의 비중이 더 크다고 했다. 물에 떠 있는 얼음에 견주어 볼 때에 물 위에 솟아올라 있는 부분이 의식이라면 물 아래 잠겨 있는 더 큰 덩어리가 무의식이라고 했다.

프로이트는 사람의 무의식 속에는 타고난 두 가지 본능 곧 성적인 본능과 공격 본능이 있음을 관찰했다. 그는 이 두 가지 본능을 타고난 정신의 힘으로 생각했다. 이 힘은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근원은 몸에 있으나 물리적인 에너지는 아니라고 했다. 말하자면 이 힘으로 모든 마음의 작용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성적인 본능은 다른 이름으로 삶의 본능이다. 이 본능으로 자기 보존과 만족 그리고 종족 보존이 가능해진다. 그 힘은 우리가 아는 성적인 욕구와 직결되어 있고 그 근원은 성기나 입이나 항문 같은 이른바 성감대인데, 이 부분을 자극함으로써 쾌감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삶의 본능이 바로 성적인 욕구만은 아니다. 여기서 분화되어 나오는 것으로서 사랑과 창조 욕구 따위가 있다. 공격 본능 또는 죽음의 본능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파괴적이고 적대적인 모든 요소를 다 포함한다. 아울러 자기 주장, 야망, 경쟁, 이기려는 욕구, 성공하려는 욕구가 여기에 포함된다. 공격 본능과 성적인 본능은 늘 뒤엉켜져 나타난다. 이를테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이나 사랑하는 식구를 위하여 남과 싸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는 무지막지한 의도적인 범죄행위에도 무의식적으로는 성적인 만족이 따른다고 한다.

성격이 이드, 자아, 초자아의 세 가지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도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이드는 보통 때는 무의식 속에 있다. 원시적이고 생물적인 충동을 통틀어 이드라고 하는데, 이러한 본능 충동은 위에 쓴 대로 성적인 본능과 공격 본능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이 두 가지 본능은 이른바 쾌락 원칙에 따라 무조건 바로 충족되기를 바란다. 체면도 없고 남을 생각할 줄도 모르고 현실을 생각할 줄도 모른다. 맹목성과 충동성과 비합리성을 지니고 있고 통일된 논리 체계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면서 내가 아닌 세계가 있고 남이 있으며 그것과 따로 떨어진 자기가 있음을 알게 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적응과 방어가 필요함을 알게 되다. 이드의 쾌락 원칙만 가지고는 생존할 수 없음을 알면서 이른바 현실 원칙을 요구하게 된다. 자아는 현실을 지각하고 평가하며, 맹목적인 이드의 충동과 초자아의 이상과 양심 사이에서 용납될 수 있는 타협적인 역할을 하게 한다. 자아는 지각, 사고, 감정, 행동을 통하여 현실과 만나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타협하고 해결하고 방어한다. 자아는 거의 습득의 과정을 밟아서 점차로 발달해 나가는데 여기에는 자기와 주위 사람들과의 접촉 관계가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본 자아는 약하다. 이드를 부리기보다 그 눈치를 보고 잘 모셔야 하는 처지다. 따라서 이드를 통제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부분적인 통제에 그친다. 자아는 이드의 눈치를 살펴야 할 뿐만 아니라 외계와 초자아의 눈치도 봐야 한다. 자아의 기능은 거의 의식적인 성격 기능이라고 할 수 있으나 상당한 부분은 무의식적인 기능이다.

초자아는 양심과 비슷하다. 초자아는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내재화된 사회의 가치와 도덕의 가치를 유지하면서 자아를 감독하고 충동하고 협박하는 구실을 한다. 자아를 협박하여 이드의 충동을 막으려 한다. 초자아는 가장 늦게 형성된다. 나이가 다섯 살쯤이 되면 부모가 내린 금지 의무 사항 같은 것이 처음에는 비판 없이 내재화되어 형성되기 시작하여 청소년기까지 이어진다. 초자아의 둘째 기능은 자아 이상을 갖게 하는 것인데, 자아 이상이란 그가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닮으려는 사람의 내재화된 심상이라 할 수 있다. 자아를 행정부라 한다면 초자아는 입법부에 해당한다.

프로이트가 설명한 '사람'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면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생물로서 타고난 본능부터가 그렇다. 분별 없고 맹목적일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본능이 공존하는 데서부터 운명의 갈등이 시작된다. 물론 이러한 본능을 잘 승화시킴으로써 건설적인 문화를 창조할 수 있기는 하다. 이를테면 도를 닦고 고행을 하고 온갖 고통스런 일을 도맡아 하다가 순교하는 성자의 행위는 그가 타고난 강렬한 파괴 본능이 자기 자신을 향하면서 승화된 것이다. 외과 의사가 부지런히 수술을 할 때에도 그 바탕에는 파괴와 죽음의 본능이 깔려 있다. 그러나 승화를 시키려면 미리 본능의 힘을 억압해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문명이란 본능을 억압한 데서 나온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사람들의 본능은 그만큼 많이 억압되어야 하고, 따라서 사람들은 신경증의 고통을 받게 된다. 사회와 사람 사이에도 적대 관계가 있다. 사회의 눈으로 보면 사람의 본능은 억압하고 길들여야 한다. 반대로 한 사람의 안녕을 위주로 생각하면 본능은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본능을 억압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아도 강하지 못하다. 늘 이드의 눈칫밥을 얻어먹고 사는 것이 자아다. 상전은 이드뿐만 아니고 초자아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현실에 마주치면 자아는 이드의 편을 들기 쉽다. 사면초가는 아니더라도 삼면초가의 난처한 처지에 있는 것이 자아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기보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존재이다.

프로이트는 자기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토템 신앙과 금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렸다. 옛날 원초의 아버지가 여자를 모두 자기가 차지하려고 아들을 모두 내쫓았다. 어느 날 이 아들들이 힘을 합쳐서 아버지를 죽이고 그 육신을 나누어 먹었다. 그러나 죽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미움의 갈래에서 죄책감이 생겨 죽은 아버지의 소망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하여 아들들은 서로 여자를 차지하려는 경쟁을 벌이지만 근친상간을 금하는 데에는 합의를 했다. 그리고 죄책감을 줄이려고 토템 동물, 곧 상징적인 아버지를 정해서 그를 섬기기 시작했고 금기도 생겼다.

토템 신앙이란 아들과 아버지와의 상징적인 계약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보살펴 주고 그 대신에 아들은 아버지를 섬긴다. 곧, 아버지가 잘 해 줄 때는 아들들도 아버지를 존경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의미가 있다. 고러나 시간이 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 커져서 아버지가 완전해 보이고 완전한 자유의 구현같이 보였다. 그래서 그를 이상적인 대상으로 떠받들고 싶어졌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없어졌다. 뛰어난 인물이 나오면 그를 아버지같이 떠받들어 아버지 신이 되고 사람들이 떠받들던 동물은 신성을 잃고 오히려 아버지 신에 드리는 제물이 되었다. 이리하여 다시 아버지의 승리로 돌아가 아버지가 지배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없던 사회에서 점차로 부권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두 가지 감정은 지금도 토템 신앙으로 남아 있다. 모든 종교는 죄책감을 누그러뜨리는 문제와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기독교의 주제는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했고 그 뒤로 아버지가 보낸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만 속죄와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혈통의 신성시나 형제애 따위도 여기서 비롯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회는 범죄 행위의 공모 위에 그 바탕을 두고 있고 종교는 그 뒤에 오는 죄책감과 뉘우침 때문에 생겨났으며 도덕도 사회의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발달은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무자비한 권력자가 나타날 때에 그를 열광적으로 따르는 것도 이런 원초의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적인 죄책감 때문이다.

이러한 비관적인 인간관은 프로이트 뒤를 이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많이 고쳐졌다. 프로이트의 계승자들은 자아가 정말 그렇게 약하고 주도권이 없는 수동적인 존재인가에 의문을 갖고 자아가 처음에는 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성장하면서 이드와 정면으로 맞서서 이드를 억압할 수도 있고 본능을 자아 마음대로 부릴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사람의 주인은 이드나 초자아가 아니고 자아라는 것이다.

융의 집단 무의식

프로이트 후에 여러 정신 분석학자들이 나와 저마다 독특한 이론을 폈다. 그 중의 하나가 융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무분별함과 맹목성과 비합리성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위험한 존재로 묘사했다. 그러나 융은 사람의 무의식을 그렇게 위험하게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속에 무시무시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는 소중한 지혜가 들어 있고 앞날을 지시하는 길잡이가 그 속에 숨어 있다고 했다. 융은 두 가지의 무의식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개인 무의식이고 또 하나는 집단 무의식이다. 개인 무의식은 그 개인이 어릴 때부터 쌓아 온 의식적인 경험이 인생을 통하여 무의식에 억압되어 그의 경험, 사고, 감정,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이고, 집단 무의식은 옛 조상이 경험했던 의식이 쌓인 것으로서 사람들의 공통된 정신의 바탕이고 경향이며 경험의 정해진 틀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프로이트가 말한 동물스런 경향도 있지만 가장 사람답고 고상한 경향도 있으며 그것은 과거의 축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으므로 이를 우리가 의식할 수 있으면 그 속에서 지혜를 찾아낼 수 있다. 또 집단 무의식은 그 자체의 운행 법칙과 자율성이 있다. 의식과 무의식은 무의식 자체의 자율성에 힘입어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조화되는 관계를 이룬다. 말하자면 무의식은 우리가 믿을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요소가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융이 중요하게 여긴 개인화는 이러한 내적인 것을 인식함으로써 자기를 확대해 나가고 성장시키는 것을 뜻한다.

프로이트에게서 성적인 본능과 성적인 힘을 가리키는 리비도는 융에게서는 성만이 아닌 모든 정신적인 에너지를 가리킨다. 그것은 미분화된 에너지로서 여러 형태로 분화되어 나타날 수 있다. 젖먹이가 젖을 빠는 것은 성적인 것이 아니라 영양 공급의 기능을 갖는 것이다. 거기에 만족과 쾌감이 따르지만 쾌감이라고 해서 반드시 성적인 것은 아니다. 쾌감을 향한 힘이 모두 성적이라면 배고픔도 성적인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리비도는 성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종교에서와 같은 힘이나 의미를 발견하려는 힘으로도 나타난다. 융의 정신의 힘, 곧 리비도는 많은 부분이 자연 법칙에 따라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쓰이지만 적은 부분은 상징을 통하여 변환되어 문화 활동으로 나타난다. 상징이란 모든 심리 현상을 말한다. 이를테면 공상, 꿈, 신화, 의식 따위가 그것이다. 또 이러한 상징은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고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가리키는 구실을 하므로 이로써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 이 상징은 늘 무의식 속에서 형성된다.

프로이트는 본능과 문화 사이에 역관계가 있어서 하나가 성하면 다른 하나는 망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융은 리비도가 바로 문화의 원천이므로 그 사이에 그런 역관계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프로이트가 종교를 신경증이라고 한 데에 견주어 융은 종교를 정신 생활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적들로 둘러싸인 외롭고 불안한 존재로 보았지만 융은 무의식 자체에 어떤 자율성과 지혜가 있다고 봄으로써 사람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랑크의 능동적 인간

프로이트가 무의식은 강하고 이에 맞서는 자아는 너무 약하고 수동적이고 주도권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에 견주어 랑크의 의지 개념은 대단히 인상깊다. 랑크에 따르면 사람은 원시적인 충동을 타고난다. 자아가 이를 억제하거나 이용하려 할 때에 의지가 생겨난다. 의지는 본디 자신의 모든 충동을 억제하려고 생겼으나 그것이 밖으로 향하면 아이들에게서 보는 고집과 저항과 반항이 생겨난다. 의지는 마침내 발달하여 본능을 창조적으로 이용하고 억제하는 사람의 적극적인 주체가 된다. 리비도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의 가장 강한 마음 속의 힘은 의지이므로 사람은 수동적인 도구가 안 될 수가 있다. 이 개인의 의지와 개인을 넘어선 힘 사이의 갈등에서 의식화 과정을 겪고 인격을 발달시킨 사람은 일반 대중에게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 된다.

랑크의 자아는 프로이트의 자아와 달라서 더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창조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아 이상을 계발할 수가 있다. 무의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자아가 그것을 제어할 수 있다. 의지가 발달해 감에 따라 사람의 단계적인 발달도 가능해진다. 랑크는 세 가지 발달 단계를 이야기했다. 첫째 단계는 보통 사람이고 둘째 단계는 신경증적인 사람이고 셋째 단계가 창조하는 사람이다.

첫째 단계는 부모나 사회나 도덕률 같은 바깥의 강요나 자신의 성욕 같은 안쪽의 강요를 받고 그것을 이루려고 의지를 발동하는 단계이다. 이럴 때에 그는 보통 사람이 된다. 그저 남과 같이 되려 하고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어떤 주어진 역할을 하는 체한다. 남의 표준을 그대로 자기에게 적용함으로써 남과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이 단계의 사람들의 의지는 사실은 수동적인 것이고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의 의지를 문화에 굴복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보통 사람은 그런대로 알력도 없지만 창조성도 없다. 인격의 조화는 꽤 되어 있어서 괴로워할 줄도 모른다. 이 사람들은 자기 마음 속의 과정이나 동기를 잘못 이해한다. 죄책감을 느낄 수 있으나 그 대상은 늘 다른 사람이다. 랑크는 프로이트가 설명한 사람이 바로 이 단계의 사람이라고 했다.

둘째 단계는 신경증적인 사람들로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같이 느끼고 남들의 기준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늘 자기와 사회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무능과 열등감을 느끼면서 산다. 그러면서도 어떤 역할을 하는 체하기를 거부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이 되지도 못한다. 자기 의지가 약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다.

셋째 단계는 독창성을 가진 예술가나 철학자와 같은 창조적인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은 남과 자기를 견주지 않고 자기의 기준으로 살아간다. 자기의 능력과 이상 사이에 조화를 이루면서 자기의 이상을 실천해 나가는 사람이다. 제 스스로 충동 요인에서 어떤 것을 창조할 수가 있고 남을 보고 닮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아 이상을 계발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남과 타협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자기 것을 강요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세계와 갈등 없이 살아간다. 이들도 남과 자기에게 죄책감을 느낄 수가 있지만 그것이 자기를 무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죄책감이 자극이 되므로 이들이 느끼는 죄책감을 창조적인 죄책감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랑크와 인간은 자기를 스스로 형성해 나갈 수 있는 능동적인 인간이다.

호나이, 프롬, 설리반의 사회 심리학

프로이트가 사람을 설명할 때에 사람의 본능과 사람 자신에게 주안점을 두었던 데에 견주어 호나이, 프롬, 설리반 같은 학자들은 문화와 사회에 눈을 돌렸다. 호나이는 극단으로 도대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본능이란 없다고까지 이야기했고 호나이와 프롬은 죽음의 본능이 없다고 했다. 설리반은 대인 관계를 떠나서는 사람을 말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프롬도 사람의 형성은 본능보다 학습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문화에 의하여 동기와 행동이 결정된다고 했다. 물론 사람에게는 생리의 욕구보다는 사람의 사회적인 욕구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사람의 본능과 사회·문화 사이의 역 관계를 이야기한 데에 견주어 이들은 사회가 억압하는 기능이 있지만 오히려 창조하는 기능도 있다고 했다.

호나이의 이론에 따르면 요즘 사람들의 특징은 불안이다. 그러나 이 불안은 주로 환경에서 나온다. 부모의 사랑이 부족하거나 아이에게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이거나 아이를 속이거나 그의 뜻을 꺾거나 할 때에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부모와 세계를 향한 적개심이 생긴다. 그러나 부모를 버릴 수는 없으므로 적개심을 변장하거나 억압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불안이 생긴다. 그런데 불안이란 그것을 느끼는 주체에게는 비합리적인 것이고 요즈음의 서양 문화는 비합리성을 가장 멸시하므로 그것은 아주 참기 어렵다. 근래의 서양 문화권에서 이 불안을 피하는 방법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랑을 구하는 방법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태도로 살면 남이 싫어하거나 거절하는 것을 겁내고 혼자 있는 것을 못 참는다. 무조건 사랑을 구하지만 사랑을 주어도 자기는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도 못한다. 둘째는 권력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내가 힘이 있으면 네가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언제나 내가 옳고 내 식으로 해야 하고 남을 조종해야 하고 남에게 굽히거나 타협하지 못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굽히는 것이다. 사랑도 권력을 위한 도구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남에게 속임수를 당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셋째는 복종하는 방법이다. '내가 복종하면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고 나를 사랑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넷째는 물러서는 방법이다. '내가 물러나면 무엇이 나를 해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래서 감정에서 완전히 초연해지거나 불안을 일으킬 만한 생각이나 감정의 상황을 피한다. 술이나 약이나 성행위나 일에 열중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프로이트의 알력은 삶과 죽음의 본능에서 운명적으로 생겨나는 것이지만 호나이의 알력은 환경이 적절하면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다. 호나이는 사람은 그의 잠재 능력을 발전시킬 욕망과 능력이 있으며 남과 자기의 관계가 혼란되지 않으면 그것은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프롬은 사람을 그 본능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고 했다. 생리의 본능이 채워져도 권력과 사랑과 파괴를 위한 투쟁이나 종교와 정치와 인도적인 이상을 위한 투쟁이 생기고 이러한 것들이 삶의 특성을 결정한다. 곧, 실존의 이중성이 있다. 사람은 자연과 하나임을 알면서 그 자연을 초월할 줄 알고 불멸을 원하면서도 꼭 죽을 것임을 안다. 그래서 그 사이의 조화와 평형을 되찾으려면 종교가 필요하고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는 게 프롬의 생각이다.

사람은 인류의 역사에서나 개인의 발달 과정에서나 처음에는 나와 자연 사이의 연대감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고립과 불확실성과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연대감이 사람의 이성과 비판 능력을 저해함을 알고서 고립과 자유를 구하게 된다. 곧, 개인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개인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문화와 가정이다. 개인화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므로 중도에 포기하려는 충동이 일어난다. 그럴 때에 그것을 푸는 방법은 사랑과 생산적인 일로써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온 인류에 소속해 있다는 느낌과 인류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안정감을 얻을 수가 있다. 개인화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도피 방법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형성된다. 비생산적인 성격은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고 모든 자원과 가치가 남에게만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무엇이거나 남에게서 받으려는 수용 성격, 남에게서 뺏으려는 약탈 성격, 무엇이나 손에 들어온 것은 지키면서 남에게는 웬만하면 주지 않는 저장 성격, 자기의 인격을 시장 가격으로 가치가 정해지는 상품으로 보는 시장 성격이 들어간다. 생산적인 성격은 자기를 사랑할 능력이 있고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인간 관계를 맺을 수가 있다. 그는 자기 이성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고 나아가 세상에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한다.

설리반은 사람에게 필요한 욕구가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신체 생리적인 욕구와 사회적인 욕구가 그것이다. 생리적인 욕구를 채울 때에 만족이 생기고, 사회적인 욕구를 채울 때에 안정감이 생긴다. 사람은 그 두 세계와 밀접히 서로 작용하면서 살기 때문에 만일에 그 둘 중에 한 가지 세계에서 완전히 끊기면 제대로 살 수가 없는 존재이다.

불안은 생리 욕구를 문화에서 용납되는 방법으로 성취하지 못할 때에 생겨난다. 곧, 대인 관계와 관련해서 생겨난다. 그런데 어릴 적에는 사람의 대인 관계가 부모의 태도에 따라 수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도 부모가 자기를 평가하는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이 핵이 되어 평생동안 계속되기가 쉽다. 이렇게 이루어진 자기 자신의 제한성과 특이성 때문에 자라난 뒤에까지 자기에 대한 남들의 의견을 왜곡하여 평가하게 된다. 자기의 색안경으로 남이 자기를 잘못 평가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남과의 관계가 건전하지 못하게 되고 알력이 생기며 불안정해진다. 설리반은 사람의 마음과 인격이 대인 관계에서 생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나 인격 자체가 대인 관계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충동이나 본능이나 마음의 구조가 아니고 대인 관계의 상황임을 밝히고 너무 주관적인 설명에 기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정신 분석학의 마지막 목표

정신 분석학의 마지막 목표는 사람의 인격 성장을 돕는 일이다. 정신 분석학의 근본 명제가 사람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인격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아를 강화해야 하고 반대로 초자아는 너무 강하거나 폭군이어서는 안 된다. 사회의 질책에 지나치게 만감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웬만하면 억압을 적게 하는 것이 좋다. 억압하는 데에 힘을 소모하고 나면 자기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쓸 힘이 부족해진다. 융은 본디의 자기가 되라고 한다. 자기의 무의식이 의미하고 목적하는 것을 발견해서 책임 있고 독자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자기 마음의 세계와 바깥 세계 중에 어느 하나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짐으로써 평형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충고한다. 랑크는 자기가 남과 다른 점을 주장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자율적이고 독립된 독특한 개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려면 창조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그가 내놓은 사람의 한 전형은 바로 창조적인 예술사이다. 문화학파인 프롬은 생산적인 성격을 지향하라고 했다. 세상과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관련을 맺고 이성의 힘으로 인간의 존재나 사태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사랑으로 세계와 하나가 되어 세계를 위하여 어떤 것을 생산하라고 했다. 자기 자신을 뚝 떨어진 존재, 더 나뉠 수 없는 존재, 곧 개인으로 체험하되 인간과 자연과 정의로 관계 맺고 분리와 소외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를 이루라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정신 분석학파에 공통되는 점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을 알고 자신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기 전에는 어떠한 발전도 있을 수가 없다.


 

김명정/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며, 저서로는 히스테리 신경증 환자에 관한 임상적 고찰, 환자와의 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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