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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없다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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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없다

 

강 신 표

 

현대 사회 속에 살아 있는 전통 문화의 규칙

한국 현대 사회 속에는 두 개의 문화가 있는데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임희섭 교수는 문화 정체성을 논할 때는 '전통 문화'와 '문화적 전통'을 구분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전자는 기본적으로 '과거 전통 사회의 문화'라는 뜻이며, 후자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축적된 문화 양식으로서 현재의 사회 환경 속에서도 유지되고 있는 문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고유 문화로서 '과거에 속하는 것'은 '전통 문화', '현재에 속하는 것'은 '문화적 전통'이라는 것이다. 문화의 연속과 단절을 논할 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측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의 고유 문화를 다루면서 과거에 속하는 것과 현재에 속하는 것을 구분하기란 곤란한 일이다. 왜냐 하면, 고유 문화는 이미 역사적 전통의 배경을 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와 혼란이 제기되는 것은 '문화란 무엇이냐'라는데 대해 각 학문마다 정의가 다종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문화인류학 안에서도 경험론적 입장과 관념론적 입장에 따라 문화의 정의가 완전히 다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현대의 한국 사회 문화 속에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전통 문화라고 본다. 필자는 최근에 '전통적 생활 양식의 구조'를 논하면서 우리 전통 문화의 특성인 '가족주의적 문화'의 성격을 다시 세 가지 차원으로 요약해서 정리해 보았다. 첫째가 급수 성이요, 둘째가 집단성이요, 셋째가 연극·의례 성이다.

 

급수성은 바둑의 급수처럼 모든 인간 관계를 등급별로 파악하려는 성향이다. 가족 관계에서 부자로부터 시작되는 촌수의 항렬이며, 신분 차등 서열이며, 요즘 많이 논의되는 관료적 권위주의 등이 급수 성을 보여 주는 예들이다. 중앙과 지방, 도시와 농촌, 양반과 평민, 혼 반, 지체, 그리고 일류 학교와 이류학교, 학력 예비 고사 등급 등은 우리 사회를 '지각하고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마음속의 형식'이며, 이러한 급수적 차등 의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이를 속여서까지 형 대접을 받고 싶어하고, 유언비어가 유행할 때는 누가 더 많은 속보를 더 빨리 아느냐를 경쟁한다. 옛날에는, 한 집안이 사환을 얼마나 냈느냐를 자랑하면, 다른 집안은 학자를 얼마나 배출했느냐를 자랑했다. 또한 한 집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벼슬했느냐를 자랑하면, 다른 집안은 얼마나 높은 벼슬을 했느냐를 경쟁했다. 오늘날 급수 경쟁에 가장 좋은 실례로는 시계라면 로렉스, 넥타이라면 피에를가르댕 등의 일류·외제·유명 상표의 선호도에서 잘 나타난다. 이 밖에도 혼수 경쟁 등 하나하나 다 열거할 필요도 없다.

 

둘째로, 집단성은 한 개인이 가족 집단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다. 혈연, 지연으로 한 개인이 어떤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개인이 한 개인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속한 집단에 대한 평가가 곧 그 개인에 대한 평가로 간주된다. 한 개인의 잘못은 그가 속한 집단·가족·문중·지방 등의 잘못으로 책임이 확대되어 간다. 이른바 공동체 의식이 그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라는 것으로부터 '우리 집안을 위하여 한 개인은 흔쾌히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정신은 가족주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사회 특성들이다. 동족(씨족) 집단, 파족, 우리집안, 우리 고향 사람, 학교 동창,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대우 가족', '삼성 가족' 등 대기업들도 가족 집단인양 가족을 내세우며 집단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전통 사회의 혈연 및 지연처럼 현대 사회에서는 학업·직업 및 작업의 업보로 함께 만난 업연이 또 하나의 연줄 망을 이루고 있다. 사실 출세하고 사업하고 취직하고 정치하는 데 이러한 연줄 망 내지는 연줄 결속 체에 직접·간접으로 소속되지 않고서는 빛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혈연 집단에서 보이던 분절 현상이 업 연 집단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대기업·군대·정당 등의 여러 업 연 집단에서 쟁점이 생길 때마다 혈연 집단의 파벌 계보 형성 원칙이 똑같이 작용하여 업 연 집단 내의 결속이나 이산을 몰고 온다.

 

세 번째의 연극·의례성은 우리의 과거 전통 사회로부터 오늘날 현대 사회로까지 면면히 잘 이어져 오고 있는 특성이다. 그런데 이 특성은 우리 언어의 문법처럼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문화적 문법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는 두 사람이 친형제 또는 친부자가 아니더라도 형뻘 동생뻘 사이라든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보여질 수 있는 관계 상황에 처하게 되면 각자 자기 역할을 연극적으로 또는 의례적으로라도 수행해야 하는 '마음속에 있는 형식' 인 것이다. 어르신네가 걱정 하 실까봐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때에 따라서는 할 수도 있다. 회의하는데 자기의 생각은 안건에 반대하지만 "그 자리에서 '차마' 반대할 수 있어야지?" 그래서 표결에서는 찬성해 놓고, 나와서는 반대한다. 이른바 '예'와 '아니오'가 연극·의례 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겉으로 하는 또는 체면상의 '예'와 '아니오'가 되기 쉽다. 연극·의례성의 사회는 연극과 의례를 잘해야 정치도 사업도, 심지어 학문(?)도 잘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관청이나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출세한 사람일수록 아랫사람이 무엇을 요청했을 때 가부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고 한다. 찬반과 가부를 딱 잘라 말하지 않고, 찬성하는 것 같으면서도 반대하는 것 같고, 그래서 시험 답안지○,×만이 분명할 뿐 찬반 양쪽 어느 집단에 대해서도 욕을 먹지 않는 연극을 잘해야 잘 사는 사람이 된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말끝마다 붙이는 '같아요'나 '글쎄요' 같은 표현은 전통 문화의 이러한 구조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장 일치', '일 사 불란' 등의 표현이 오늘날 한국 정당들이 의논하는 자리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연극·의례 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김광억 교수는 한국 농촌에서 이견 조정 및 분쟁 해결의 정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를 자세히 보고하고 있다. 지도자나 중재를 넣어서 마을 전체 사람들의 '만장 일치'를 공식적(표면상)으로 얻게 되며, '양편 다 말이 된다'는 식으로 분쟁의 해결을 이끈다. 한국 전통 문화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이다. 시비와 분쟁이 있었을 때, 그 해결이 양편 다 옳은 것으로 되는 동시에 양편 다 옳지 않은 것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 어느 것도 용납 안 된다면 '없었던 것'으로 하는 방안밖에 없다. 황희 정승의 명판 결인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것도 이런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우기면 되고, 큰소리만 치면 안 될 것도 없다' 등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얼마 전 필자는 서울 마포 아파트에 임시로 이사와 있으면서, 일요일 오후 아파트 잔디밭 옆 한 쪽에서는 40, 50대의 남자 어른들이 장기를 두고 있고, 그 옆에는 5, 10세 정도 남녀 아이들 10여 명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는 부인 네 들이 아이들 유모차를 끌거나 아이들을 안고 나무 밑에 모여 있었다. 한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자전거를 가진 아이가 자기 발등을 여러 번 찧는다고 한 번 찼는데 쓰러졌다. 울음이 터지자 '엄마' 하고 큰 소리를 지르고 떠들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져 서로 편들어 주기 바쁘다.

 

한 녀석이 "너는 뭐야?"라고 하자 "사람이다."라고 한다. "사람이 뭣고?" 하자 "사람도 모르나." 한다. 고만고만한 또래의 크고 작은아이들이 공식처럼 목청을 돋구어 이런 대화들을 합창하고 있다. 남자 어른들은 장기 두기에 여념이 없고, 저쪽 편 부인 네 들은 아이들 이름을 부른다. 우리는 여기서 연극·의례 성, 집단성 그리고 급수 성이라는 한국 전통 문화의 가족주의 특성이 각기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이 삽화 속에 다 함께 엉켜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아파트촌이라는 현대 사회 속에서 한국의 오랜 전통 문화의 여러 규칙들이 이렇게 어린이 사회화 과정 속에서부터 실천되고 실습되어 재현되는 것이다.

 

근대화와 전통 문화 그리고 사회 문제

지난 40년간의 한국 근대화 과정은 사농 중심의 농경 사회로부터 공상 중심의 산업 사회로의 변동이었다. 농경 사회의 특성은 순응과 안정인 데 반하여 산업 사회는 모험과 도전이 그 특성이다. '농경'과 '산업'이라는 두 사회의 문화적 특성을 한국 전통 문화와 서양 외래 문화의 특성으로 바꾸어 이해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한다'와 '된다'라는 두 개의 상징은 각각 '산업 사회 문화의 모험과 도전' 그리고 '농경 사회 문화의 순응과 안정'을 뜻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이 겪은 지난 백년간의 '외세의 도전'은 '된다'는 것으로 살아 온 사람들에게 '한다'를 익혀야 한다는 도전이었다. 해방 이후 40년간 한국인이 해 본 '제한된 실험'은 한 마디로 '하면 된다'로 표현될 수 있다. 비록 제한된 기회였지만 '한다'를 '된다'에 접목시켜 성공시켰을 때 지난 백 년 간 한민족이 서양 중심의 국제 사회에 당당한 일원으로 참여하고자 노력해 온 것이 성공한 것이다. '조국 근대화'의 국가적 목표가 '선진 조국 창조'라는 구호로 바뀐 데서도 '하면 된다'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한다'의 극단인 '하면 한다'가 힘을 발휘했다.

 

'하면 한다'의 짝은 '되면 된다'이다. '순응과 안정'의 생활 원리는 '되면 된다'를 철칙으로 삼고 언제나 때와 장소를 가리고 어떤 난관도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것이다.

 

'하면 한다'라는 '모험과 도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어떠한 해괴 망칙한 짓도 다 '실험'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토끼가 방아 찧는 달나라'

 

까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고, 생각하는 컴퓨터로 인간을 대신할 로봇까지 만들어 내는 실험을 계속하는 것이다. 순응과 안정은 인간 사회와 자연에 대해서도 조화를 추구한다. 모험과 도전은 사회와 자연에 갈등과 대립을 추구하며 자연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하여 공해를 가져온다. 서양 산업 문명의 '한다'가 가져 온 문제가 강 건너 불이 아니라 이제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이 되었다.

 

'하면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가릴 것이 없다. 돈과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다 '하면 한다'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되면 된다'를 믿고 때에 따라서는 '한다' 하더라도 '되면 한다'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천륜과 인륜을 가리고 도리를 다하는 것이 삶의 양식이었다. 실험이란 없다. 오직 성현과 조상들이 대대로 해온 대로 하늘과 땅을 믿고 순리대로 '되는' 것을 실천할 뿐이었다. 비록 '한다'손치더라도 조상의 음덕으로 또는 하늘이 도와서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조상과 성현이 얼마나 훌륭했던가를 신화로 만들어 후손들로 하여금 이를 따르도록 했다. 이들은 언제나 극단으로 치닫지 않으려는, 어떤 인간적 한계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다'와 '된다'가 성공적으로 접목된 지난 40년간 새로운 사회 문제들이 많이 파생되었다.

 

첫째로, '하면 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쌓아 왔는가 하는 점이다. '부국'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가족주의적 집단적으로 호소하며 밤낮으로 죽도록 뛰게 했는데, '하면 된다'를 체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도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들도 있다. '하면 한다'가 통하던 것을 누려 온 사람들은 계속 그것을 누리려는 타성이 있다. 따라서, '좋은 시절'이 다 갔다고 푸념만 하게 된다. 대다수 한국인이 '된다'는 것을 믿고 있었을 때 '한다'를 적극적으로 실험한 사람들은 길바닥에 질 편하게 깔린 기회를 얼마든지 독점할 수 있었다. 국토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정부 고위 관리부터 시작해서 온 백성이 얼마나 많은 '한탕'을 할 수 있었던가? 강남 개발, 여의도 개발, 강동 개발 등은 '하면 한다'로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면 한다'가 언제까지나 어떤 것에나 마냥 통할 수 없다. 소비 풍조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게 되었고 외채도 엄청나게 불어났으며, 지나치게 비대해진 대기업들은 도산하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각종 대형 사고가 터무니없게 터져 나오고 있다. 교육 개혁도 '하면 한다'는 실험이 이제 '되면 된다'는 전통 문화의 지혜를 다시 한 번 되씹어 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둘째로, '한다'는 것을 앞세우다 보니 실험해야 할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이다. 성의 개방 문제도 그런 데서 온 것이다. 특히 매스컴을 통해 새로운 외래 정보가 끊임없이 밀려들어 와 종전에 해 보지 않았던, 그리고 상상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다 실험해 보도록 밀어부치고 있다. 자연 과학의 끝없는 연구 발전처럼 인간 의식과 사회 체제가 가진 끝없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도 현대 서양 과학 기술 문명 사회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해서 필요하다. 더욱이 자유 민주주의의 자본주의 체제는 이러한 실험 정신을 빼놓고서는 유지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조국의 분단 상황에서 비롯되는 '제한된 실험'은 세계 무대에서 한국인의 뜻을 펴보기에 너무나 많은 제약을 주고 있다. '한정된 실험의 기회'는 엉뚱하게도 실험해 보아야 하는 것은 못하게 하고, 실험해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용납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누가 그것을 결정하느냐에 달렸다. 어떤 집단의 이해 관계가 이 결정에 크게 영향을 미치느냐가 문제이다.

 

집단간의 이해 관계가 대립할 때 정치 권력의 급수가 높고, 집단성이 강하고, '연극·의례'를 잘하는 집단이 이기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해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대화를 하면 다음과 같은 '대화 연습'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아니다/그렇지 않다/나는 반대한다. 네/그렇습니다/저는 찬성합니다. 물론이다/너는 언제나 찬성해야 한다/나를 반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너의 사전에는 반대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고/나의 사전에는 찬성이란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말을 쓰지만/우리의 사전은 서로 다릅니다/앞으로 더욱 주의하여/반대하시기 전에 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를 쓴 김광규 시인은 시 앞에 주를 달아 놓고 있다. "안개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의 문형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지금 근대화되었다고 하면서 대화의 기본 문형도 모른 채 대화를 실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셋째로, 근대화의 목표로 설정되었던 '부국', '강병', '민주'라는 상징과 그 상징의 의미 내용 사이의 괴리 문제이다. 특히 '민주'라는 상징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느냐에 대한 혼란이 있다. 전통 문화의 문법에서는 각 집단이 자기가 주장하는 것만이 '만주'이고 '민주화'이다. '국민적 합의'라는 단어도 '연극·의례'상으로 존재할 뿐인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라, '민주화'를 '한다'고 하면서 그 내용은 오직 '연극·의례'뿐일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아무리 상대가 '민주'를 내세우고 있지만 오직 '연극·의례'로 그럴 뿐이라고 몰아붙일 수도 있다. 정부와 학생, 여당과 야당,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불신은 우리 문화에 내재하고 있는 문화적 문법에서 오는 것도 많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경험을 실제로 지난 40년간의 역사적 시간 속에서 무수히 많이 체험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천륜과 인륜의 도리 속에 '된다'로 살던 때의 문화적 문법이 어떠한 규제도 속박도 없는 '한다' 속에 그 나래를 폈을 때, 그것이 무리 없이 제자리를 찾아들 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대가를 치르는 실험의 역사가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

 

맺는 말

'한다'와 '된다'는 우리 문화적 문법 속에 같이 존재하고 있는 구조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를 역사적으로 보면 '된다' 중심에서 '한다' 중심으로 변환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환은 많은 문제를 수반하고 있다. '된다'의 상황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한다'의 상황에서 새로이 문제가 되는 수도 많다. 이제 '한다'가 현대 세계 질서의 기본 상황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세계 속의 선진 조국 창조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문제에 부닥치고, 또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역정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좀더 깊이 통찰해야 한다. 문제를 문제로 느끼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통찰하는 지혜도 갖추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 우리의 참모습을 대면함으로써 우리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더욱 쉽게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김광규 시인은 <안개의 나라>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언제나 안개가 짙은/안개의 나라에는/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안개 속에 사노라면/안개에 익숙해져/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보려고 하지 말고/들어야 한다/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귀는 자꾸 커진다/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토끼 같은 사람들이/안개의 나라에 산다.

 

나는 언젠가 한반도의 생김새를 토끼 모양으로 그린 옛 민화를 본 적이 있다. 해방 40 년의 한국 사회는 왜 '안개의 나라'가 되었고, 한국인은 왜 그 속에서 살아 야 하는가?


 

강신표/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이며, 저서로는 '한국 문화 연구',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과 한국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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