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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시간과 공간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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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시간과 공간

 

A.하우저

영화에서의 시간과 공간

연극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영화와 닮은 장르이다. 특히 시간적 형식과 공간적 형식을 종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일부는 공간적이고 일부는 시간적일 따름이다.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이 보통 같이 있는 것이지 영화에서처럼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이 결합된 4차원의 `시간.공간적'인 것이 아니다. 영화와 다른 예술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즉 영화에서는 공간이 시간 비슷한 성격을 띠고 시간은 또 어느 정도 공간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 조형 예술 또는 무대 위의 공간은 항상 정적이고 변하지 않으며 아무런 목표나 방향이 없다. 그것은 동질적인 공간이다. 그 중 어느 부분이 시간적으로 다른 부분의 전제 조건이 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고 그 속에서 움직일 수 있다. 움직일 때의 여러 국면이 어떤 일정한 발전의 단계가 아닌 만큼 그 전후 관계나 순서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반대로 시간은 문학에서---특히 연극에서---어떤 일정한 방향과 전개의 목표, 관객의 시간 경험에 구속되지 않는 객관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시간은 사건을 아무렇게나 담아둔 저장소가 아니라 정돈된 순서를 의미한다.

연극에서의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범주는 영화에서 그 성격과 기능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우선 공간은 그 정적 특성을 잃어버린다. 안일한 수동성을 상실하고 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말하자면 공간은 바로 우리 눈앞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유동적이고 제한이 없고 미완성된 공간이며 그것 자체의 역사, 그것 자체의 둘도 없는 순간, 그리고 그 나름의 순서와 단계를 지닌 공간이다. 동질적인 물리적 공간이 여기서 이질적 요소로 구성되는 역사적 시간의 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개별적인 단계가 이미 같은 성질이 아니며 그 공간의 부분 부분이 서로 동등한 가치를 지닐 수 없다. 특별히 중요한 위치들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것은 전개 과정에서 우선권을 가지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공간 경험의 클라이막스를 뜻하게도 된다. 예를 들어 클로즈업(close-up)의 사용은 공간적 기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시간적 전개 과정에서 도달 또는 능가해야 할 어느 단계를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영화에서는 클로즈업을 멋대로 쓰지 않는다.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클로즈업의 잠재적 에너지가 작용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할 곳에 삽입된다. 클로즈업이란 단순히 세부를 한 조각 떼어내서 틀에 넣은 그림이 아닌 것이다. 바로크 미술에서 르뿌쏴르(repoussoir)를 이룬 인물처럼 클로즈업도 항상 어떤 전체적 이미지의 일부일 뿐인 것이다. 바로크 미술의 이러한 기법도 영화의 공간 구조에서 클로즈업이 주는 효과와 같이, 그림 전체에 동적인 성격을 넣어준다.

그런데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이 마치 그 기능의 상호 교환을 토대로 연결되기나 한 것처럼, 공간이 시간적 성격을 띰과 동시에 시간은 공간적 성격을 띠게 된다. 즉 순간들의 배열 순서에 일종의 자유가 생긴다. 우리는 다른 장르에서는 오직 공간 속에서만 자유롭게 움직였는데, 이제 영화에서는 시간 속에서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방향에 전혀 관계없이 마치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가듯이 시간상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움직인다. 사건 진행과정의 여러 단계를 분해하여, 말하자면 공간적 질서의 원칙에 따라 이것들을 배합하는 것이다. 즉 시간은 한편으로는 그 연속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고정된 일방통행 적 성격을 잃어버린다. 클로즈업으로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는가하면, 플래쉬백(flash-back)으로 거꾸로 돌릴 수도 있다.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반복도 된다. 또는 미래의 전망을 통해 앞으로 껑충 뛰어나갈 수도 있다.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앞뒤 순서로 보여줄 수 있는가 하면 시간적 간격을 가진 사건들을 이중 노출이나 교대적 몽따주(montage)를 통해 동시에 보일 수가 있다. 먼저 것이 나중 나오기도 하고 나중 것이 먼저 나오기도 한다. 영화의 이러한 시간 개념은 일상 경험이나 연극에서의 그것과 비교할 때 철저히 주관적이고 일견 무질서한 것처럼 보인다. 경험적 현실의 시간은 고르게 흘러가고 빈틈없이 연속된 시간이며 절대로 역행할 수 없는 질서를 이루고 있어, 그곳에서 사건들은 마치 '컨베이어벨트'위에서처럼 차례차례 진행된다. 연극의 시간은 경험적 시간과는 좀 다른 것이 사실이다 (무대 위에 정확한 시간을 알리는 시계를 놓아두는 것이 어색한 이유는 이러한 차이 때문이다.). 그리고 고전주의 연극 이론에서 규정되는 시간의 단일성이 경험적 시간을 근본적으로 제외하는 것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으나, 연극에서의 사간 관계는 영화의 시간의 비하면 일상 경험의 시간 질서에 훨씬 가까운 셈이다. 따라서 연극에서는, 적어도 연극의 어느 특정한 막 안에서는, 일상 현실의 시간적 연속성이 그대로 보존된다. 여기서도 실생활처럼, 사건은 중단·비약·반복 또는 역전을 허락치 않는 전진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일어난다. 이 법칙은 또 고전된 시간 기준을 의미한다. 즉 주어진 마디- 막이나 장 -안에서는 임의적으로 시간이 빨라지거나 늦어지거나 멈춰지는 법이 없다. 이와 반대로 영화에서는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들의 속도뿐 아니라 그 속도를 측정하는 기준 자체도 촬영 속도와 필름 편집 요령, 클로즈업의 수효 등에 따라 장면마다 달라질 수 있다.

극작가는 희곡 구성의 논리에 의해 똑같은 시점의 반복을 못하게 되어 있는데, 바로 이런 반복의 수법이 영화에서는 가장 강렬한 심미적 효과의 근원이 되는 수가 많다. 물론 연극에서도 이야기의 일부가 회고적으로 처리된다거나 시간적으로 앞서 일어난 사건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나 대개는 지난 일들은 일관된 서술을 통해서든 산발적인 암시에 그치고 말든, 간접적으로 표현되기 쉽다.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는 플롯의 과거 시점에 돌아가 그것을 연속적 사건의 진행 도중에, 그러니까 연극적 현재에 직접 끌어넣는 것을 희곡의 수법은 허용하지 않는다. 아니,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허용하게 되었는데, 아마 영화의 직접적인 영향 때문이거나 현대 소설에서도 익히 보는 새로운 시간관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기술적으로 아무런 불편 없이 어느 장면의 촬영 위치를 변경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애초부터 시간을 불연속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어떤 장면에 이질적인 사건을 삽입하거나 어떤 장면의 부분 부분을 여기저기 갈라 넣음으로써 그 장면의 긴장을 높일 수 있는 손쉬운 길을 열어 준다. 이리하여 영화는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치면서 건반을 상하 좌우로 제 멋대로 두들기는 것 같은 효과를 흔히 낸다. 예컨대 어떤 영화의 첫머리에 사회 생활의 출발을 하는 젊은 주인공을 본다. 곧 이어서 옛날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그를 목격한다.

플롯이 좀더 진전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된 그를 보고 한동안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본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는 그가 죽은 후, 다시 시점을 돌이켜, 아직도 친척이나 친구들의 기억속에 살아 있는 옛날의 그를 보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의 불연속성으로 하여, 플롯의 회고적 전개와 전진적 전개가 아무런 시간 순서의 제약 없이 완전히 자유롭게 결합될 수 있다. 그리하여 시간의 끊임없는 굴절과 변동을 통해, 영화 감상 체험의 본질을 이루는 가동성이 극도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시간의 참된 공간화는 나란히 전개되는 플롯들의 동시성이 묘사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떨어져 일어나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각기 다른 사건을 동시적으로 체험할 때 비로소, 시간과 공산 사이로 움직이며 시간적 질서와 공간적 범주를 모두 요구하는 일종의 '떠 있는 상태'에 들어간다. 사물이 동시에 멀고도 가까운 상태, 시간적으로 서로 가깝고 공간적으로 먼 상태에서 처음으로 4차원적 시공이 구성되는데, 이러한 4차원적 시공- 말을 바꾸면 시간의 2차원성 -이야말로 영화 본연의 세계이며 영화적 사물관의 기본 범주를 이루는 것이다.

두 가지 사건의 동시성을 묘사하는 것이 영화 형식의 기본 특기의 하나라는 점은 영화 발달사상 비교적 일찍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소박한 형식에 머물러, 같은 시각을 가리키는 시계나 그 비슷한 표지법을 통해 기계적으로 관중에게 전달되었다. 두 가지 이야기를 간헐적으로 번갈아 가며 끌고 간다거나 한 가지 이야기의 여러 국면을 교대적으로 중첩시키는 예술적 기법은 애초에는 극히 단계적으로만 발전되었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면 이 기법의 예가 이곳저곳에서 나타남을 본다. 우리는 어떤 때는 두 개의 적대적 집단 사이에, 어떤 때는 두 명의 라이벌 틈에, 또 어떤 때는 한 이중 성격자의 두 가지 다른 면 한가운데 놓여 있게 되는데, 여하튼 영화의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언제나 그 두 선의 교차와 사건 전개의 이중성, 그리고 대립된 행동들의 동시성이다. 오늘날 이미 고전이 된, 영화 초기의 그리피스가 만든 작품의 마지막 장면들은 너무나 유명하다. 스릴에 찬 이야기 마지막판에 기치와 자동차, 또는 음모자와 '말 타고 달리는 왕의 사자', 또는 살인자와 구원자 둘 중 누가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주를 벌여놓고(당시로는 혁명적 테크닉이었던), 계속해서 화면을 번개처럼 바꾸는 수법을 사용한 그의 마지막 장면들은. 그 후로, 대부분의 영화가 비슷한 상황의 결말을 만들 때 뒤따른 규범이 되었다.

동시성의 체험

현대의 시간 경험은 무엇보다 우리가 그 속에 던져져 있는 순간의 의식, 즉 현재의 의식이다. 오늘의 인간에는 모든 시사적인 것, 현시점에 함께 얽혀 있는 것들이 특별한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에 차 있는 까닭에 동시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의 눈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중세의 정신 세계가 내세 지향의 기분으로 찼었고 18 세기 계몽 운동기의 지적 풍토가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차 있었던 것처럼, 현대인의 정신 세계는 직접적 현재와 동시성의 느낌에 젖어 있다. 그는 갖가지 사물 및 사건의 끊임없는 접촉과 상호 작용에서 현대 도시의 거대함과 현대 기술 문명의 기적을, 그리고 그의 사상 세계의 복잡성과 그의 심리의 애매성을 체험하고 있다. '동시적인 것'의 매혹 -한편으로는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각에 상이하고 상호 무관하고 모순된 것을 수없이 많이 체험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다른 곳에 있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것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지구상의 서로 동떨어진 여러 곳에서 같은 일이 같은 시각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매혹적 발견과 그에 따른 세계주의를 현대의 기술 문명이 현대인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이러한 세계주의야말로 새로운 시간 개념의 근원이며 현대 예술이 삶을 경련적으로 그리는 원인일 것이다. 이런 광시곡 같은 요소가 현대 소설을 종전의 소설과 가장 날카롭게 구별해 주는 동시에 현대 소설에서 가장 영화적인 효과를 이루는 특징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와 조이스, 도스파쏘스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에서의 플롯과 장면 전개의 불연속성. 사상과 감정의 직접성. 시간을 재는 기준의 상대성과 모순성 등은 영화의 커팅과 페이드 인, 화면 삽입 등의 수법을 연상시키는 요소이다. 프루스트가 30 년은 좋이 떨어져 있음직한 두 사건을 마치 단 두 시간의 간격도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해 주는 것도 바로 영화의 마술을 재현한 것이다. 프루스트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 꿈과 명상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손잡는 것이나, 항상 새로운 대상을 찾고 있는 감수성이 시간과 공간 속을 마음대로 방황하는 것, 또는 이러한 끝없고 가없는 상호연관의 흐름 속에서 공간과 시간의 경계선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모두, 영화의 생명을 이루는 4 차원적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한 번도 날짜나 연령을 명시하는 법이 없다.

우리는 주인공이 정확히 몇 살인지 알고 있는 적이 없고 시간의 순서조차 끝내 모호할 정도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경험과 사건들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시간적인 인접 관계가 아니다. 더구나 이러한 경험이나 사건을 연대적으로 정리하고 구분하려는 노력이 프루스트의 관점에서 더욱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견해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그 사람의 특유의 전형적 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다시 성인이 되더라도 항상 근본적으로 동일한 체험을 한다. 어떤 사건의 의미는 그 사건을 겪고 견뎌낸 여러 해 후에야 비로소 머리에 떠오르기가 일쑤다. 그리고 지나간 세월의 경험에서 가라앉은 것들을 현재 시간의 경험과 구별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그는 일생 내내, 언제나 민감하고 불안한 신경을 가진 동일한 아이, 동일한 병자, 동일한 외로운 이방인이 아닌가? 인생의 어떠한 처지에서도 항상 이러저러한 것을 경험할 수 있고, 따라서 세월의 흐름에 대한 유일한 방어를 자기체험의 고정된 유형성에서 찾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모든 체험들은 말하자면 한꺼번에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동시성은 결국 시간의 부정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부정을 물질 세계의 시간과 공간이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저 내면성을 되찾으려는 투쟁이 아니겠는가?

조이스가 프루스트처럼 질서 정연하고 일정한 순서를 가진 시간을 해체하여 자기 마음대로 뜯어맞추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내면성과 경험의 직접성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도 경험의 시간적 질서 대신 의식 내용이 서로 맞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이 등장한다. 조이스에게도 시간이란 인간이 그 위를 오락가락하는 방향 없는 길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간의 공간화를 프루스트보다도 더 극단에까지 밀고 나가서 내면적 사건을 '시간적으로 이어내려가는 그림'뿐 아니라 '옆으로 펼쳐낸 그림'도 그려낸다. 그의 작품에서는 갖가지 이미지와 상념과 착상과 기억들이 전혀 연관성 없이 울뚝불둑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 이들의 출처는 거의 고려되지 않고 그들의 병존성과 동시성이 강조된 따름이다. 조이스에게 시간의 공간화는 어찌나 철저히 진행되었는지, 우리는 '율리시즈'를 그 전후 관계를 대강만 알면 아무 곳에서부터나 읽기 시작할 수 있을 정도다. 누구 말처럼 두 번째 읽을 때부터나 그런 것도 아니고, 읽는 순서 역시 앞뒤로 아무렇게나 읽어도 된다. 독자가 체험하는 작품 세계는 실상 철두 철미 공간적이다. 왜냐 하면, 이 소설은 더블린이라는 대도시를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 도시의 구조를 작품의 구조로 채택하기조차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서성거리고 걸어다니고 언제 어디서든 마음대로 멈춰서기도 하는 거리와 광장들의 얽힌 조직을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수법의 영화적 성격을 가장 잘 말해 주는 것은, 조이스가 이 소설의 각 장을 순서대로 쓰지 않고 영화 제작에서 늘 그러듯이 플롯의 전후 순서를 떠나 여러 장을 한꺼번에 쓰곤 했다는 사살이다.

영화와 현대 소설에 나타나는 베르그송적인 시간 개념을 우리는 -영화와 소설에서처럼 뚜렷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현대 예술의 모든 장르와 경향을 연결시켜 주는 기본체험으로써, 이태리의 미래파에서도 샤갈의 표현주위에, 피카소의 입체주의에서 조르지오 데 키리꼬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의 움직임에 일관된 것이다. 정신 활동 과정의 대위법과 그 내면적 상호 연관의 음악적 구조를 발견한 것은 베르그송이었다. 마치 우리가 한 음악 작품을 제대로 듣는 경우 지금 울려나오는 음정 하나하나와 그 전에 난 모든 음정들과의 상호 관계를 귀에 담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가장 깊고 중요한 경험에서는 우리가 과거에 체험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었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충분히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 영혼을 마치 하나의 악보처럼 읽게 된다. 그리하여 두서없이 뒤섞인 소리들의 혼돈 상태를 지양하고 여러 음정의 예술적 합창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혼돈과의 유희요 혼돈에 대한 싸움이다. 예술은 언제나 혼돈을 향해 점점 더 위태롭게 다가가서 더욱 더 넓은 정신의 영토를 그로부터 건져오는 작업이다. 예술사에 어떤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탈환해 온 이러한 영토의 끊임없는 확대를 말하는 것일 게다. 영화는 시간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발전을 또 한 걸음 밀고 나갔다. 전에는 음악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던 경험을 시각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끔 해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 가능성, 아직 비어 있는 이 새로운 형식을 참다운 삶으로 가득 채워줄 예술가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놀드 하우저/ 헝가리 태생으로 저서로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예술사의 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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