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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의 그림과 삶 - 내일은 그림을 그려야겠다.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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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의 그림과 삶 - 내일은 그림을 그려야겠다.

 

최 종 태

장욱진 선생에 관한 이야기는 시작도 막연하고 끝맺음 또한 막연할 것 같다. 그와 마주하고 앉으면, 서론을 접어놓고 말이 시작되고,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도중에 끝나 버리고 만다. 삼십 년 전 그림에서 이미 끝나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팔십을 바라보는 지금 그는 시작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는 장욱진 선생의 젊은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노상 만나 왔기 때문인지 현재의 얼굴만이 보이고 있다. 현재의 기상이나를 사로잡고 있어서 과거에로 생각을 진행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얼마 전 성모 병원에서 그를 만났을 때 늙었구나 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그는 옛날에도 늙어 있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십 일 동안에 청하를 마흔 병이나 드셨다니 그건 또 젊은 사람들의 행장이 아닌가. 장욱진 선생하고 만나면 시간이라는 개념이 날아가 버리고 만다. 이야기는 결론부터 시작되고 그게 또한 시작이다.

이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오래간만에 몇몇 친구들이 장 선생을 모시고 혜화동 로터리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나사다 보니 너무 시간이 일러서 나는 선생 댁으로 먼저 들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묘하게도 살림살이 문제가 얘기되었다. 무심코 월급의 높낮음에 대한 말을 한 것 같다. 그럭저럭 시간이 되어 술상 앞에 여럿이 앉게 되었다. 한 잔을 드시더니 "비교하지 말라!" 하고 벽력같이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무슨 영문인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혼자만이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장장 서너 시간을 계속하였는데, 그러는 가운데 모두가 대취하고 말았다.

듣다 듣다 나중에는 화가 단단히 났지만 틀린 말씀이 한 마디도 없어 어떻게 항거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로서 족한 것이지 왜 남하고 비교하는가.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열등 의식이 생기고 자아가 망가진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결국 자아의 순수한 발현이어야 하지 않는가. 비교하다 보면 절충이 될 뿐이다. 누구의 그림이 좋다 하여 그것을 부러워하여 내가 그렇게 그리고자 한다면 그게 어디 그림인가. 자존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남에 대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자기는 자기로서 독립할 수가 있어야 한다. 예속된다는 것은 자아의 상실이다. 너를 찾고 너를 지켜라. 자유에로 가는 길이 거기에 있다.

물론 장욱진 선생은 그런 스타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선 문답하듯이 단편적인 외마디 소리뿐이었지만 그것을 지금 풀어 보자면 위와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비교하지 말라. 그는 비교라는 말조차 싫어했다. 그것은 그의 그림을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일찍이 서구의 미술 사조에서 이탈하였다. 아마도 장 선생은 그 무렵 대단한 결심을 하였을 것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하였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었는데, 동경 시절에 학교에서는 학교 그림을 그리고 하숙집에 와서는 자기 생각을 그렸다고 하였다. 남북 전쟁의 끝 무렵 <장독과 까치>란 그림이 있었는데 사십 연대 말쯤 이미 소위 장욱진의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 선각자였으니 오죽이나 많은 고뇌를 하였으랴. 그래서 그런 내심의 사정이 돌출구를 만나서 총알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화살을 하필이면 내가 맞게 된 것이다.

내가 미술 대학 재학시 어느 여름 방학 때가 아니었던가 싶은데, 선생이 반도 화랑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와서 전시장엘 들렀더니 마침 계셔서 만날 수가 있었다. 보자마자 나가자 하는 것이었다. 골목 대폿집으로 갔다. 일본 사람이 자꾸 졸라서 한 장 팔았는데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장욱진 선생을 만날 때는 술상 없는 날이 드물었다. 혜화동 시절에는 으레 공주 집으로 달려간다. 그냥 뵙고 싶어서 발길이 가는 것이지만 나는 항상 무슨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로 있었다. 선생도 그렇고 또 나도 그런데 인사라는 게 없다.

장욱진 선생은 한 모금 들고서야 말을 시작한다. 인사 대신에 첫 마디부터 공격이다. 죄다 기억하리라 마음먹어도 듣다 보면 어느새 나도 취해 버려서 다음날 생각해 보면 무슨 말씀이었는지 하나도 기억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나처럼 많이 혼나 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나는 늘 혼자서 찾아다녔기 때문에 공격의 화살을 혼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화살을 나누어 받을텐데,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당황해서 저런 사람도 있나 하고들 생각한다. 나는 오랜 기간 단련이 되다 보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그래서 밖에서 엔간한 욕쯤 들어도 괜찮은데 선생으로부터 워낙 단련이 되어서 그런 것이다.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장욱진 선생을 수없이 만났지만 무슨 용건을 가지고 뵌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시작이 없고 항상 끝 또한 없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선생이 한창 매직 그림을 그릴 때였다. 한 뭉치를 그려 놓고 보라 하시면서 한 장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동학사엘 몇 번 갔었는데 갈 때마다 비가 온다. 그런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어찌나 우스웠던지 체면 불구하고 배를 쥐고 웃었다. 구름이 몰리다 보면 비가 되는데, 용은 구름을 몰고 다닌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자기가 용과 같다는 말씀이 아닌가. 장욱진 선생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알 수가 없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나를 혼내는 것인지 종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부분 자기 독백이었을 것 같다. 자기 얘기를 하기에도 창창한 것인데 어찌 남의 얘기까지 생각해서 하랴. 장욱진 선생은 남의 얘기하는 법이 별로 없다. 부득이 필요한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얼른 끝내고 먼지 털 듯이 이내 황당 무계한 세계로 도망친다.

 

전원이 그리워 선생은 항상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시가 시끄러워서 견디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덕소로 갔다가 거기가 번화해지니까 돌아오고 수안보 깊은 마을로 갔다가 또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신갈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19세기의 프랑스였더라면 고갱처럼 타이티로 도망쳤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욱진 선생은 숙명적으로 한국을 떠날 수 없는 조건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문제를 떠나서 선생의 세계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과거 그리고 한국의 자연이 그의 고향인 것이다. 돼지, 강아지 그리고 까치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충청도 들판의 풍경들일 것이다. 그는 아마도 개량종 짐승들을 그리지 못할 것이다. 그가 만약에 세퍼트를 그린다면, 그가 만약에 잉꼬 새를 그린다면...... 그것은 아마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다. 그는 참새를 그린다. 참새는 우리 조상 대대로 민중의 삶 속에서 같이 놀던 짐승이다.

덕소 시절에는 강이 그림 속으로 많이 들어왔다. 강이 있고 뒤에 산이 있고 하늘에는 새가 자주 날아갔다. 한번은 매직으로 된 그림이었는데 하이얀 하늘에 다섯 마리의 새가 줄지어 서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장난 삼아 "선생님 저게 무슨 새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참새지."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을 받아서 "참새는 저렇게 열 지어 날지 않던데요."라고 하였더니 선생은 "내가 시켰지."하였다.

 

내가 시켰지! 나는 그 말씀이 두고두고 잊혀지지가 않는다. 내 그림 속에서는 무엇이든지 내가 시키는 대로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브랑쿠시의 유명한 절구가 생각난다. "제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한다."내 화면 속에서는 무엇이든지 내가 명령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내 화폭 앞에서는 내가 제왕인 것이다.

어쩐 일일까. 그는 꽃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잎이 무성한 여름 나무를 그린다. 박수근은 이른 봄 몽우리 지는 과수원의 꽃을 그렸다. 늦은 가을, 추운 겨울의 잎이 다 떨어진 나무를 그렸다.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았으면서도 장욱진 선생은 봄 풍경이 없고 가을, 겨울 풍경이 없다. 여름 풍경뿐이었다. 무더운 여름, 그 나뭇잎들 속에서 새들이 놀고 원두막 안에는 윗통을 벗어제친 촌부가 앉아 있다. 생명이 활활 타오르는 찬란한 여름, 그리고 여름밤의 풍경들.

그것은 낭만이라고 쉽게 넘겨짚을 일이 아닐 것 같다. 그가 말로 하지 않으려 하는 무언가 심오한 장욱진 나름의 사상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하늘에는 해가 많다. 가끔은 그 하늘에 달도 함께 있고 어린 시절의 세계가 현재와 분리되지 않은 채 동시적으로 살아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이라는 개념은 현실을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이 잃어버린 원초적 꿈의 세계를 그는 지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일생을 그곳에서 고독하게 싸워서 이겨낸 승리자로서의 장욱진이 되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가치가 혼돈된 세계에서는 정말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장욱진 선생의 그림은 한국 사람이어야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요즈음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지역적인 특수 요인을 갖고 있다는 것이 후진적인 형태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시대일수록 특수 요인을 찾아서 지킨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본원(本源)으로의 회귀, 그래서 장욱진 선생은 고독하다. 한국 사람이 아니면 그릴 수 없는 그림, 장욱진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그림, 그것이 장욱진의 그림이다. 어찌나 외곬이었던지 유사한 장욱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이즈음 더더욱 고독해졌다. 철저하게 회화이면서도 세계 미술사의 어디에다 비교해도 분석하기가 어렵게 되어 간다. 치열한 전투가 그의 내부에서 끊일 사이 없이 일고 있다. 치열한 정신력으로 하여 그것을 지탱한다. 화면의 긴장감이 조금도 늦춰지지 않고 있다. 얼마나 장한 일인가.

캔버스에는 물감이 최소한도로 발라진다. 그 인색함이 회화성의 아주 가장자리까지 다다르고 있다. 화면 구성의 기준선에서는 벌써 떠났다. 그가 늘상 그리고 있는 나무는 나무라는 상식을 벌써 떠났다. 모든 것이 상징적으로만 남아 있다. 앞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 그러나 장욱진 선생의 숙명은 캔버스에서 떠날 수가 없는 데에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캔버스의 가장자리에서 떠날까 말까 하는 형국으로 앉아 있다. 근년에 않던 술바람이 그를 찾아왔다. 그림이 안 풀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몸을 다치고 병상에서 "이제 그림이 좀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 그는 '그림 그린다는 것이 정신과 육체를 소모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 면에서도 장욱진 선생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그 긴장감, 그 매력, 그 위트, 그 여유...... 고향 산천이 지금 그대로 있는 것처럼 장욱진 선생도 그대로이다.

장욱진 선생은 수리적인 계산을 하지 않는다. 상념이 있고 거기에 회화를 접근시키려 한다. 상념은 변화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거기에 따라가지를 못한다. 그림이 그의 상념을 따라잡았는가 했은 때 벌써 그것은 다른 데로 움직여 가고 있었다. 또 거기에 접근했는가 했을 때 그의 상념은 다른 데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욱진 선생은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사실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길을 또 밟아서 한 발자국 다른 세계호 이주하는 것이다. 그는 계속 반복하면서 조금씩 보다 깃은 세계를 향하여 들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욱진 선생의 그림을 양식의 변화를 통해서 규명하려고 하면 무리가 생길는지도 모른다. 십 년쯤 지나고 보면 진행이 보인다. 매일 같이 실로 눈에 안 뜨일 만큼 움직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일로 땀을 흘린다.

그는 직관을 우선한다. 수리적인 계산이라든지 논증이라든지 하는 문제를 뒷전으로 접어 둔다. 직관으로써의 도전이다. 그는 처음부터 뛰어가서 끝 지점에 이르러 그 벽을 일 밀리미터 깨고 들어가는 것이다. 온 힘을 가다듬고 총계 적으로 몰고 가서 벽에 부딪치고 그 벽을 허물어 내는 것이다. 마치 망치로 암벽을 깨어 들어가는 형국과 같다 할까. 그것을 계속 반복한다. 그리하여 십 년쯤의 간격을 두고 보면 그가 얼마나 진행하고 있었나 하는 것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장욱진 선생의 그림을 초기부터 시작해서 한 줄로 늘어놓고 보면 그의 아픈 나날이 역력히 보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여 한결같은 일생을 살았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장욱진 선생이 존경하던 노수현 선생의 일이 생각난다. 일제 말기 때의 일인데, 술먹기 대회가 있었다 한다. 노 선생이 이등을 했는데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방이 늦었는데 어떤 조그마한 사람이 남재문을 향하여 뛰어갔다가 우뚝 서고, 물러났다가 또 남대문을 향해서 달려갔다가 문 앞에 이르러 우뚝 서기를 계속하더라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파출소 순경이 불러다가 물어 보니 남대문을 뛰어넘으려 한 것인데 앞에 가서 보면 너무 높고 멀리로 물러나서 바라보면 문제없을 것 같아서 그러고 있노라는 이야기였다. 그분이 바로 노수현 선생이었다.

장욱진 선생의 도전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사다리를 만들던가 하는 것이 서양적인 범례일텐데 장욱진 선생은 정신력으로 정복하려 한다. 언뜻 무모한 것 같지만 계산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뛰어넘는 정신의 차원이 또 있다고 믿어야 할 것 같다.

장욱진 선생은 비교적 초년 기부터 자기의 어떤 특수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계속 고집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십 년간을 자기 심화의 사업에 전적으로 매진하였다. 그가 그 자리에서 끄덕 않고 앉아 있는 동안 서울의 화단에는 여러 개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액션 바람이 있었다. 한일 국교가 수립 된 뒤에 일본 바람이 있었다. 내부로부터는 민족적 민속 바람이 있었다. 미니멀 바람, 극사실 바람, 추상 표현주의 바람, 미중 미술 바람 등이 몰려오고 밀려가고 하는데, 그 속에서 그는 애초의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바람이 몰려올 적마다 그는 고독했다. 그럴 적마다 그는 옷깃을 여미고 보다 강해졌다. 바람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고 그로 해서 오히려 단단해지는 것이었다.

덕소 시절 한때 그는 시로 필사의 노력으로 어떤 바람을 견디어 냈다. 많은 바람을 이겨내면서 내부의 충실도가 짙어졌고 마침내 여유를 얻었다. 그는 당당하다. 그는 지금 자기 세계의 넓은 영토를 여기저기 거닐면서 유유히 소요하고 있다. 그는 아마 반쯤 신선이 되었다고 자만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장욱진 선생은 노년으로 갈수록 만만한 패기로 하여 스스로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서구 미술사 앞에서 정면으로 항거할 수 있었던 장욱진, 그 그림이 어찌되었든 지간에, 제삼 세계 권에서는 단연코 두드러진 기념비적인 존재가 장욱진 선생이다. 그의 끈질긴 정선력과 만만한 기백은 높이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서구 미술의 여러 가지 문제를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기에 거기에 항거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을 형태로써 해낸 장쾌함이 있다. 화면 구성하는 것이라든지, 물감 바르는 방법이라든지, 형태를 파악하는 소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장욱진 선생의 경우 전혀 엉뚱하게 처리되고 있다. 서구권의 방법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동양화의 방법에 더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명암도 없고 면(面)도 없고 투시법도 없고 화면 분할도 없고, 그리하여 마치 어린이가 사물을 파악하는 것과 유사하게 보인다. 비례 감각과 공간 감각 등이, 굳이 미술사에 접목시켜 보고자 한다면, 원시 미술이나 한국의 민화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모든 것을 장욱진 선생은 참으로 오묘하게 특이한 방법으로 성공하였다. 그러노라고 장욱진 선생은 많은 까다로운 생각을 했고 또 그것을 추진하느라 오늘도 땀을 흘리고 있다.

장욱진 선생의 그림은 아이들도 보고 즐겁다고 한다. 생각할 시간을 갖기에 앞서 우선 즐겁게 전달되는 것이다.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나도 저렇게 생각했다던가 내가 그린 것 같다는 이상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 그림을 그리는 장욱진 선생은 까다롭고 까다로운 생각으로 진땀을 빼는데, 보는 사람은 너무도 쉽게 독해해 버리고 만다. 누구든지 장욱진 선생의 그림을 보는 순간 저 그림은 나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선생의 그림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진기한 면인 것이다. 현대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함정, 즉 난해한 문제에서 그는 제외되고 있다. 그것 또한 매우 중요한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 그림은 그렇게 까다롭고 많은 것을 겪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림 자체는 쉬워야 할 것 같다. 진리는 간단하다. 그것을 터득하기까지는 한없이 어렵다. 하나, 알고 보면 간단한 것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쉬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자 할수록 그림은 간단해지는 것 같다. 그것이 사람들의 감정에 쉽게 유통한다. 마치 가족들을 보는 것처럼. 이웃 사람들을 만나는 것처럼. 그리고 늘 보는 풍경들이 펼쳐진 것처럼 거리감이 없고 부담감이 없다. 그림이란 것은 그 양태가 어떤 모습으로 되었든 지간에 결국 자연과 동질의 것이 아닐까. 자연은 모든 것이 신비하고 경이로우며, 결코 요란스럽지 않고 당연하게 보인다. 그림은 인위적인 것이면서도 그것이 자연의 핵에 연결되면 새로운 자연으로서의 힘을 얻는다. 그것은 요란스러울 수가 없다.

장욱진 선생의 경우 그의 예술은 종교와 매우 인접해 있다. 회화를 종교를 여기며 생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갈수록 자유롭고 깊어지며 평화로워진다. 근원을 향해서 계속 진행하고 있는 듯싶다. 그래서 그는 정지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진서 고단하면서도 가산되는 즐거움으로 해서 하루를 유지한다. 그는 종국의 어떤 것을 믿을 필요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하루의 진행으로 족하다 생각할 것이다.

요즈음의 예술은 종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장욱진 선생은 분리되기 이전의 세계를 살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분리된 다음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분리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역행의 고통을 딛고서 그는 자유롭다. 역행이야말로 근원을 찾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장욱진 선생의 예술 세계는 선(善)의 문제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예술이 종교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 미(美)도 선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는 선생이 어찌해서 미와 선을 합치는 고전적인 예술관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그의 체질과 우선 상관되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옛날의 미학은 동서를 막론하고 미 속에 선이 있고 선 속에는 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믿었다. 근대의 서구 미술은 미 속에서 선을 지워 버렸는데, 공도 있지만 과도 있다고 보여진다. 장욱진 선생의 그림에는 착한 짐승들, 착한 사람들만 등장하고 있다. 아주 초기의 그림들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맥을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순진 무구한 사람들의 얼굴이던 것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속이 밝은 얼굴로 변모하고 있다. 밀레도 반 고호도 좋은 사람을 그리고자 했는데 그래서 농사하는 사람이 되었고 일하는 촌부가 되었다. 장욱진 선생의 화면에 나타나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법이 없어도 잘 살 사람들이다. 그 표정들을 단순한 필법으로 용케도 찾아 표현한다. 약고 교활하며 어깨에 힘주는 사람들을 그는 그리지 않는다. 지위가 높은 사람, 교만스러운 사람들을 그는 그리지 않는다. 미와 선을 한 통으로 보는 고전적 예술관으로 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그가 일생 동안 추구한 삶의 형태, 그 자체이기도 하였다.

장욱진 선생은 기행 기담들을 많이도 만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여서 한번 얘기가 시작되면 할 얘기들이 많아서 차례 기다리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는 그렇게 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는 이제 큰 나무가 되었다. 수많은 가지에 갖가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 풍경은 참으로 보기에 좋다. "나는 심플하다." 한 잔 술이 들어가면 수도 없이 외쳐 댔던 그 말들을 이제는 잊으셨나, 아니면 심플마저 졸업을 하셨나, 장욱진 선생은 요즘 적당히 웃는 것으로 말을 대신한다. 그와 마주앉으면 나도 속으로 말을 한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하였다.

나의 제작 과정에서 그리는 행위는 즐겁다. 그러나 정리하여 가는 데는 큰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역설적인 말 같기도 하나 이러한 과정이 나에게 또한 무한히 즐거운 순간 순간을 마련해 준다.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기를 한곳에 몰아 세워 놓고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 뒷산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강바람이 나의 전신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석양의 정적이 저 멀리 산기슭을 타고 내려와 수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저 멀리 노을이 지고 머지 않아 달 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적막한 자연과 누릴 수 있게 마련해 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최종태/ 서울대 미대 조소과 교수이며, 저서로는 '예술까와 역사 의식',' 형태를 찾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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