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도 숙제도 없는 학교, 섬머힐
by 처사21시험도 숙제도 없는 학교, 섬머힐
A. S. 니일
하나의 실험, 섬머힐
섬머힐은 1921년에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런던에서 약 150km 떨어진 서포크 백작령의 레이스턴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먼저 섬머힐 학생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다. 빠른 어린이들은 이미 다섯 살 때 섬머힐에 오며 어떤 어린이들은 열 다섯 살 때에 오기도 한다. 보통 학생들은 열 다섯 살까지 이곳에 있게 된다. 우리 학교에서는 평균 25명의 남학생과 20명의 여학생이 있다.
어린이들은 연령에 따라 세 집단으로 분류되는데, 다섯 살에서 일곱 살까지, 여덟 살에서 열 살까지, 그리고 열 한 살에서 열 다섯 살까지로 나누어진다.
학생들은 연령별 집단에 따라 함께 생활하며, 각 집단에는 한 명씩의 보모(엄마 역할을 대신함)가 있어 그들을 보살핀다. 중간 집단의 어린이들은 돌집에서 살며, 제일 나이가 많은 남자 어린이들은 세 명이나 네 명이 한 방에 자는데 여자어린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이들은 일체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그들이 무슨 옷을 입건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섬머힐에 관해서 소개한 신문들은 여기서는 마치 모든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일은 무엇이나 할 수 있고 또 허용되어 있는 것처럼 보도하였고 또 학생들은 법칙이나 예절을 모르는 무뢰한들이라고 보도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진실 된 입장에서, 섬머힐에 관한 것들은 서술하려고 노력해야만 하겠다. 이때 내가 편견에 빠지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섬머힐의 장점들뿐만 아니라 단점들도 모두 내 보이려고 한다. 섬머힐의 장점은 어린이들이 겁이나 증오에 물들지 않고 건전하고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놀고 싶어하는 아이를 책상에 붙들어 놓고 대개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나쁜 학교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자녀가 항상 다소곳하고 비창조적으로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사회, 그러므로 성공 여부가 돈으로 평가되는 그런 사회에 적응해야만 하는 비창조적인 시민들은 섬머힐을 옳지 않은 곳이라고 단정할 것이다.
섬머힐은 하나의 실험으로 시작되어 그 동안 실험 이상의 것이 되었으며 이제 다른 학교들에게 모범이 되는 그런 학교로 변했다. 왜냐 하면, 섬머힐은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본성은 선하다.
나의 아내와 나는 하나의 기본적인 사상을 가지고 학교를 설립했다. 즉 학교를 어린이들에게 알맞게 해야지 어린이들을 학교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때 이미 오랫동안 일반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학교의 모순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반 학교들은 어른들의 생각에서 출발하여 어린이가 무엇이 되어야 하고 또 어떻게 배워야 한다는 등의 교육이 강요되기 때문에 엉터리다. 이런 방법은 심리학이 아직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이들이 '자기 자신이 되 수 있는', 그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모험에 착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서 모든 교육과정에서 훈육과 암시적인 영향, 그리고 윤리적·종교적인 지도를 일체 철폐해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들을 용감하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용기가 아니라 어린이들의 본성이 선한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었다.
거의40년 동안이나 인해 오면서도 우리들의 이런 신념이 흔들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이 신념은 거의 절대적이 확신으로 변하기에 이르렀다.
내 생각으로는 어린이들은 본성적으로 이해력을 가지고 있고 또 현실적이다. 그냥 그대로 스스로에게 맡겨 두고, 어른들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 어린이는 자기의 능력에 맞게 발전한다. 섬머힐은 어떤 어린이가 학자가 될 재질을 타고나서 학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분명히 학자가 되는 그런 학교이고, 반면에 전차 운전사에 알맞게 태어난 사람들은 전차 운전사가 되는 그런 학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학교에서 버스 운전사가 되어 나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교가 노이로제에 걸린 한 사람의 학자를 배출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사람의 행복한 청소부를 배출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섬머힐의 수업
그런 섬머힐의 생활은 어떠한가, 어린이들은 수업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아도 된다(특히 그들이 원한다면 일 년 내내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된다.). 시간표가 있지만 오직 교사를 위해 있는 것일 따름이다.
수업은 보통 어린이들의 연령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더러는 그들의 특별한 흥미에 따라 이루어지기도 한다.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새로운 교수법(敎授法)도 없다. 우리는 수업 자체가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 학교가 어린이들에게 정확하게 나눗셈을 다 가르치는 특별한 방법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눗셈 자체가(그것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배우고자 하는 어린이는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배우고 만다.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배우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어 섬머힐에 온 학생들은 처음부터 수업에 참가한다. 그러나 다른 학교에 다니다가 온 어린이들은 다시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들은 졸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공부하는 다른 어린이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공부만은 멀리한다. 몇몇의 경우는 이런 일이 몇 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치료'되는 시간은 그들이 이전에 다니던 학교가 그들에게 심어준 미움의 크기와 비례한다. 이런 점에서 기록을 세운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수녀원 학교에 다니다가 우리 학교로 왔으며 삼 년 동안을 꼬박 게으름만 피웠다. 보통 한 어린이가 수업에 참가할 자세를 갖추기까지에는 평균 삼 개월쯤 걸린다.
자유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여기는 어린이들이 하루종일 제 마음대로 놀기만 하는 도깨비 소굴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많은 어른들은"내가 이런 학교에 다녔더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거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어린이들은 열심히 공부한 다른 어린이들과 경쟁을 해야 할 때에는 큰 손해를 보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열 일곱 살 때에 어떤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우리 학교를 떠난 잭이 떠오른다.
어느 날 공장장이 잭을 불렀다.
"당신은 섬머힐 출신이죠?"
하고 공장장이 물었다.
"나는 당신이 다른 학교 출신들과 함께 있는 지금, 당신이 받은 학교 교육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소. 당신이 한번 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튼으로 가겠소, 섬머힐로 가겠소?"
"물론 섬머힐로 가지요."
"그럼 섬머힐이 다른 학교보다 나은 게 무엇이요?"
잭은 머리를 긁으며
"모르겠습니다."
하고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섬머힐 에서는 사람들이 완전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공장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나는 그런 것을 이미 당신이 여기에 들어올 때 눈치챘소."
"아이고 이를 어쩐담."
하고 잭은 웃었다.
"내가 그런 인상을 준 것을 용서하십시오."
"아니오. 그런 점이 내 마음에 들었소. 나는 사람들이 대개 내 방에 들어오면 어쩐지 초조해하고 편치 않아 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소, 당신은 마치 나와 대등한 사람인 것처럼 당당하게 들어왔소."
이 이야기는 교육이 성격이나 인격만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잭은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대학 입학 시험에는 떨어졌다. 그러나 찰스 램의 수필이나 프랑스어를 모른다고 해서 그가 살아가는 대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은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섬머힐에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우린 학교의 열두 살 짜리 집단은 바로 쓰기·손으로 글씨 쓰기·분수 계산 등에 있어서는 다른 학교의 같은 또래의 학급들과 경쟁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창의력이 좌우하는 시험을 치르게 되면 다른 학교의 어린이들을 충분히 이겨 낼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필기 고사가 없으나 나는 재미 삼아 간단한 시험을 치러 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한번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내어 보았다.
1.마드리드·목요일 섬(Thursday Island)·어제·사랑·민주주의·미움·나의 휴대용 드라이버 등등은 어디 있는가?(유감스럽게도 나의 휴대용 드라이버에 대한 마지막 물음에 대해서는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해답을 얻지 못했다.)
2. 다음 단어들의 뜻을 말해 보시오(괄호 안의 부호는 그 단어가 지닌 뜻의 가짓수다.).
Hand(3) :두 학생만 세 번째의 뜻, 즉 '말의 크기를 재는 척도'하는 뜻을 바르게 대답했다.
Brass(4) :광물, 뺨, 육군의 고급 장교, 오케스트라 안에 있는 한 집단.
3. 햄릿의 독백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등등을 섬머힐에 알맞게 해설해 보시오.
물론 이런 문제들은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아니나 어린이들은 이런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새로 온 어린이들은 대체로 이미 섬머힐에 적응해있는 학생들만큼 이 문제들을 잘 풀지 못했다. 이것은 그들이 덜 총명해서가 아니라 너무 심각한 문제들에만 버릇이 되어 있어 쉬운 문제에는 당황했기 때문이다.
어느 시간이고 공부는 많이 한다. 만약에 어떤 선생님이 무슨 이유로 한 시간을 빼먹게 되면 학생들은 대개 크게 실망한다.
아홉 살 난 데이비드가 백일해 때문에 격리 수용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럼 나는 로지 선생님의 지학 시간을 빠져야 한단 말이야?" 하고 항의했다. 데이비드는 사실 출생한 이래 줄곧 섬머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수업 시간이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그는 지금 런던 대학의 수학 강사이다.
몇 해 전에 학교 총회(여기서 학교의 모든 규칙이 공포되며, 투표권은 학생과 선생이 다 같이 한 표이다.)에서 어떤 잘못을 저지른 학생은 벌로써 한 주일 동안 수업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이런 벌은 너무 가혹하다고 반대했다.
우리 섬머힐 선생님들은 시험이라는 시험은 다 싫어한다. 대개는 정말로 고통스런 십자가이다. 물론, 우리들은 이런 시험에 끼어 있는 과목들을 수업하지 않으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험 규칙이 적용되는 한에 있어서는 우리들도 그것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래서 섬머힐의 교사들은 이 시험에 필요한 수업을 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물론 많은 학생들이 이 시험을 치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 가려고 하는 학생들만 이 시험을 치르려고 한다. 그리고 이 학생들에게는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 같지는 않다. 이런 학생들은 대개 열 네 살 때에 시험에 대한 준비를 열심히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약 삼 년만에 모든 공부를 해낸다. 물론 이들이 항상 한번의 시험으로 합격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패한 뒤에 시험을 한 번 더 친다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학생들
아마 섬머힐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학생들을 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섬머힐에는 빈둥거리는 사람이 없고 향수병이 생기는 일도 매우 드물다. 치고 받는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만 다투는 일들은 가끔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젊은이들에게는 있을 법 한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소위 합법적으로 치유 받고 싸우는 일들은 본 일이 거의 없다. 또한 어린이가 우는 것을 본 일도 드물다. 자유로운 어린이들에게는 억눌려 있는 어린이들에게서처럼 미움이 많이 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사랑을 받는 어린이는 인정 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어느 학교에서나 다 중요한 것이다. 어린이들은 벌하고 욕하면 어린이들 편에 설 수가 없다. 섬머힐은 어린이들이 스스로가 인정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학교다.
물론 이것은 우리들이 인간적인 약점을 초월했다고 하는 뜻은 아니다. 나는 어느 해 봄에 몇 주일을 감자를 심으며 지낸 일이 있다. 그 뒤 유월에 감자 싹 여덟 포기가 뽑혀 있는 것을 보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그러나 내 행동은 어떤 권위적인 교육자가 한 행동과는 매우 달랐다. 나에게는 감자만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권위를 내세우는 교사는 이런 사건에서 선악의 문제를 제기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짓을 한 학생도 나에게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하는 따위의 설교를 듣지는 않는다. 나에게는 나의 감자만 문제이고 이 감자들이 그대로 있기만 하면 그걸로 족하다. 나는 이런 구별이 명확하길 바랄 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어린이들에게 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런 권위 기관이 아니다. 나는 어린이들과 같은 위치에 있으며 내가 감자 때문에 야단법석을 떨었을 때 학생들은 어떤 학생이 자전거의 튜브가 빵구 났다고 흥분하는 것 이상의 느낌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린이들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되면 어린이들과 다투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잔소리 마! 평등이란 없어. 니일은 자기가 더 힘세고 똑똑하다고 말해야만 하는 거야!"
물론 이런 말도 옳다. 나는 집안의 주인이다. 만약에 불이 난다면 어린이들이 나에게 달려올 것이다. 그들은 내가 힘이 더 세고,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어린이들을 그들의 세계에서 만날 때는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다섯 살 난 빌이 초대를 받지도 않고 자기의 생일 파티에 왔다고 나에게 가라고 명령했을 때 나는 즉시 나왔다. 빌은 내가 내 방에서 자기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선생과 학생간의 이런 관계를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섬머힐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이런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설명해 주면 나의 생각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교사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으로 이런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화학 선생 루드는 모두가 데레크라고 그 이름(성이 아님)을 부른다. 그리고 또 다른 선생들도 해리나 울라나 팸으로 부르게 내버려 둔다. 학생들은 나를 니일이라고 부르고 보모는 에스터라고 한다.
섬머힐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아무도 그랜드 피아노 위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 나도 어린이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어린이의 자전거를 탈수가 없다. 학교 총회에서는 여섯 살 짜리 의 한 표가 나의 한 표와 똑같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도 실제로는 어른들의 표만 계산하겠지 하고 말할지는 모른다. 물론 여섯 살 짜리 가 손을 들기 전에 그래도 당신과 같은 표를 던져 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나도 그랬었다. 왜냐 하면, 내가 제안했던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부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들이 어린이들에게 바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이다.
우리 학교의 어린이들은 선생에 대해서 아무런 불안감도 품고 있지 않다. 우리 학교의 교칙 중에는 밤 열 시 이후에는 이층 복도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있다. 어느 날 밤 열 한 시경에 나는 이층에서 베개 싸움을 하며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써야 할 글이 있어서 항의를 하기 위해 이층으로 갔다. 내가 아직 계단도 채 다 올라가기 전에 저쪽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복도에는 아무도 없고 텅텅 비어 있었다. 다시 조용해졌다. 갑자기 한 볼펜 목소리가 조용히 "에이, 니일인데 뭐."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그리곤 또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글쓰는 일로 바쁘다."고 말하자 어린이들은 수긍했는지 조용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망보는 학생이 그들을 뒤쫓는다고 생각해서인지 복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처럼 어린이들이 어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아홉 살 난 한 어린이가 스스럼없이 나에게 와서 유리창 하나 깨뜨렸다고 이야기한다. 그 아이는 내가 화를 내거나 도덕적인 설교를 하리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온 것이다. 그런 아이의 경우에 따라서 창문을 변상해야 한다.
몇 년 전에 한 번은 학생 자치회가 총 사퇴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입후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걸었다. 즉, "정부가 없어졌기에 이제 내가 교장임을 선포하노라. 니일 만세!" 소문은 당장에 퍼져 나가 바로 그날 오후에 여섯 살 짜리 비비엔이 내게 와서 "니일, 체육관의 유리창을 한 장 깨뜨렸어요." 하고 말했다.
나는 윙크를 하며 "그런 시시한 일로 날 괴롭히지 마!" 했더니 가버렸다. 그러자 얼마 안되어 비비엔이 되돌아와서는 이번엔 유리창을 두 장 깼노라고 했다. 이번에는 나도 호기심이 나서 물어보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나는 교장을 좋아하지 않아. 난 뭘 좀 먹고 싶단 말야."(그 뒤에 나는 독재를 반대하는 이런 태도가, 이 애가 이야기하는 동안에 부엌문을 닫고 집으로 가버린 식모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지?"
"더 많은 유리창을 깨버릴 꺼야."
아이는 흥분하여 대답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보렴."
그는 정말 그렇게 했다. 그 동안에 열 일곱 장의 유리창을 깨뜨렸다고 내게 보고했다.
"하지만……."
하고 아이는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변상하겠어요."
"무엇으로?"
"내 용돈으로. 얼마나 오래 결릴 것 같아요?"
나는 머리 속에서 대강 계산해 보고
"약 십 년."
하고 대답했다.
그는 한참 동안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나는 이 유리창들을 보상해 줄 필요가 조금도 없어!"
"그럼 사유 재산에 관한 법률에 비춰 어떻게 되지?"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창문들은 나의 사유 재산이란 말이야."
"알고 있어. 그러나 이제 사유 재산에 관한 규정은 없어져 버렸어. 법률은 정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건데, 이제 그 정부가 없어져 버리지 않았어?"
그는 이것을 변상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 하면, 얼마 후 내가 런던에서 강연을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강연이 끝난 후 한 청년이 내 손에다 돈을 쥐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어린 악당이 깨뜨린 유리창 값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2년 후에 나는 비비엔에게 자기가 깨뜨린 유리창과 그것을 변상해 준 청년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아이들의 삶
어린이들은 두려움을 알지 못할 때에는 낯선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진다. 영국인들의 특징으로 지적되는 대체적으로 속을 터놓지 않는 성질이란 근본적으로 불안감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또 그래서 부유한 사람일수록 말이 적다. 섬머힐의 학생들이 낯선 방문객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다고 하는 것은 나의 동료들과 나에게는 큰 자랑거리이다.
물론 우리들은 우리들을 찾아 주는 많은 방문객들이 어린이들에게 흥미롭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제일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들은 선생님들인데 특히 학생들이 써 놓은 글이나 그려 놓은 그림 같은 것을 보려고 하는 선생님들이다.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문객이 가장 환영받는다. 가령 모험담이나 여행담이라든지 혹은 비행기 이야기 같은 것을 제일 좋아한다. 또 복싱 선수나 테니스 선수가 섬머힐에서는 인기를 끈다. 이와 반대로 큰 소리를 치며 이론적으로만 떠드는 방문객들의 이야기는 아무도 듣지 않는다.
방문객들은 항상 섬머힐에서는 학생과 교사를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관찰은 정확하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이 인정을 받고 있는 그런 학교에서는 선생과 학생이 언제나 한 덩어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에 대한 공경이란 있을 수 없다. 선생과 학생이 똑같은 식사를 하며, 선생들에게도 이 공동체의 똑같은 규칙이 적용된다. 선생들이 우선권을 가지면 어린이들이 화를 낸다.
나는 다른 선생님들을 위해 심리학 강의를 한 일이 있다. 어린이들은 이에 대해서 불평을 했다. 그래서 나는 계획을 변경시켜 열두 살 이상의 어린이들은 누구나 심리학 강의를 듣는 것을 허락했다. 화요일 저녁마다 내 방은 열성적인 어린이 청강생들로 꽉 메워졌는데 이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그들의 의견을 토로했다. 이 어린이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에 관해서 말해 달라고 했다. 몇 가지만 예로 들면, 열등의식ㆍ도둑질을 하는 심리ㆍ깡패의 심리ㆍ유머의 심리 및 인간은 왜 도덕 군자가 외어야 하는가? 또 자위 행위ㆍ군중 심리 등등이 그들의 문젯거리였다. 이런 어린이들은 자기 자신과 남들에 관한 보다 폭이 넓은 지식을 가지고서 인생을 살아간다.
방문객들은 "어린이들이 나중에 가서 학교에서 음악과 수학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학교를 역하지 않을까요?" 하고 묻는 일이 자주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어린 프레디가 베토벤을 혹은 토미가 아인슈타인을 그들의 전공 분야로서 찾아내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고 하는 것이다.
어린이의 생활 목적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들에 의해 끌려가는 삶이나, 어린이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교육자들의 의견에 알맞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들의 삶 속에 어른들이 끼어 들고 조종하는 것은 로봇 세대를 낳을 뿐이다.
어린이들을 웬만큼 아무런 의지도 없는 어른으로 만들어 놓지 않고서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또는 그 어떤 식을 배우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린이들을 영국 교회의 확실한 신자로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매일 아침 여덟 시 반 출근 기차로 도시에 와서, 답답한 책상머리나 가게의 카운터를 지킬 굽 신 거리는 하인을 필요로 하는 사회. 즉 겁에 질려 있는 조그마한 사람들의 어깨 위-완전히 위축된 성공회 신자들의 어깨 위-에 걸머져 있는 사회를 위해서는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이 원하는 아이들의 삶이 아니다.
A.S.니힐/ 영국의 아동 심리학자이며, 급진적인 자유주의 교육의 실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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