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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소리로 풀어내는 한바탕의 이야기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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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소리로 풀어내는 한바탕의 이야기

 

임 진 택

 

판소리라는 예술 양식

판소리라는 예술 양식을 음악으로 보느냐 연극으로 보느냐 아니면 문학으로 보느냐를 놓고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어떤 이는 "판소리는 소설이다."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판소리는 서사시다."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판소리는 희곡이다."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이는"판소리는 극가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들은 다 일면적으로는 타당하지만 판소리의 특성을 전체적으로 정확하게 잡아 내지는 못한다고 보여진다. 그 중 얻어낸 가장 합당한 결론이 '판소리는 서사적 장으릐 독자적인 양식'이라는 다소 애매한 규정이었는데 이는 '판소리는 판소리다' 라는 말을 좀 어렵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어떻든 판소리는 그 안에 문학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 및 연극적 요소를 주루 다 갖추고 있는 독특한 양식임에는 틀림이 없고, 그런 만큼 문학적, 연극적, 음악적 측면에서 판소리의 특성을 살피려는 노력이 전문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아직까지 확연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막연하게나마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은, 판소리는 음악만도 연극만도 문학만도 아니면서 결국은 음악이면서 연극이면서 문학이라는 사실이다.

 

판소리와 판놀음과 이야기

그런데 판소리는 원래 판소리이기 이전에 '판놀음'의 한 부분이었고 또 판놀음이기 이전에 '이야기'의 한 형태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판소리에 관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송만재의 『관우희』라는 글을 보면 판소리는 예전에 음률·별곡·줄타기·땅재주·무동춤·소학지희 등 다양하던 광대들의 판놀음에 끼어서 그중 한 종목으로 연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판소리는 그러한 판놀음 가운데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었고 나중에 경제적인 여건 등으로 해서 판놀음이 축소되거나 해체될 때 가장 기동성 있는 형태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립해 왔다고 한다. 그러면 후대의 판소리는 예전 판놀음에서의 판소리와 어떤 점이 달랐을까? 그것은 아마 결정적으로 음악성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이전에는 이름없는 광대들의 예능에 지나지 않았다가 후에 기라성같은 명창들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러한 추측은 가능하다. 말하자면 판놀음에서의 판소리는 음악성보다는 연극성에 더 치중하여 관중의 흥미를 끌었음에 비해 후대의 판소리는 예전에 비해 음악적으로 고도의 발전을 한 것이다. 판소리를 판소리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바로 음악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볼 수 있다.

그런데 앞서 판놀음 속에 끼어든 판소리는 12마당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항간에 떠돌아다니던 옛날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 타령, 화용도 타령, 가로지기 타령, 배비장 타령, 강릉 매화 타령, 옹고집 타령, 장끼 타령, 왈자 타령, 가짜 신선 타령 등은 모두 그 당시 이야기꾼들에 의해 유포되고 있던 옛날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또한 흥겹게 타령조로 엮어 갈 수 있는 이야깃거리들이 선택되어 판놀음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들이다. 판놀음 속에서의 판소리가 그 이전에 이야기판보다 재미있는 요소가 있었다면 아마 광대의 다양한 표현 방법에서였을 것이다. 즉 골계적인 재담과 몸짓으로 한층 익살을 떨며 직접 극중 인물이 되어 이 시늉 저 흉내를 다 내어 관객을 한껏 웃기고 울리고 했으리라 짐작된다(이러한 광대의 연기를 판소리에서 '발림'이라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판소리는 연극적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았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판소리가 판놀음이기 이전에 이야기의 한 형태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을 현재의 판소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판소리는 광대가 혼자서 말과 노래로 춘향 이야기나 심청 이야기 같은 긴 이야기를 엮어 나가면 고수가 북으로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부분은 광대가 그냥 말로 아야기를 끌어 나가는 대목들이다. 창을 하지 않고 말로 전개해 가는 부분을 일컬어 '아니리'라고 하는데, 모든 판소리는 아니리→창→아니리→창……으로 반복 진행된다. 혹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창을 하다가 숨이 차서 아니리를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애초에 아니리로 이야기를 해 나가다가 아니리로는 그 흥이나 한을 표출하기 어려울때 비로소 장단에 얹어 창을 시작해 나가는 것이라 해석함이 옳다고 본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의 정서를 다 표현한 후에는 다시 아니리로 다음 장면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때 판소리는 평면적인 이야기에 연극적 요소를 가미하고 다시 음악적 요소를 보강해 나가는 방식, 다시 말해 '이야기의 입체화'라 정의할 수 있다.

문학으로서의 판소리

판소리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문학을 구비 문학이라고 한다. 구비 문학은 다른 문학 작품과는 달리 고정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변모하고 유동하는 특성을 갖는다. 시나 소설 같은 것은 특정한 작가 혼자서 창작해 내면 되지만 판소리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광대들에 의해 조금씩 축적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소리가 어떠한 이야기로부터 파생·발전하였다고 할 때 그 이야기 중에서고 쪼갤래야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의 이야기를 가리켜 '근원 설화'하고 한다. 모든 판소리는 하나 또는 둘 이상의 근원 설화들이 모여 '기본 줄거리'를 이루고, 이 기본 줄거리에 또다른 '첨가 줄거리'들이 덧붙어서 점차 확장되어 온 것이다. 덧붙여진 첨가 줄거리들은 늘 유동적이어서 들어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지만, 근원 설화로 이루어진 기본 줄거리만큼은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고 또 변할 수도 없는 핵심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판소리가 각 시대의 생활상과 사회적 배경을 작품 안에 담고자 할때 정작 중요한 쪽은 기본 줄거리가 아니라 첨가 줄거리라는 점이다. 왜냐 하면, 여러 사람들의 개성있는 생각과 능력을 그때 그때 덧붙이자면 첨가 줄거리의 유동적 성격을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흥보가〉를 한번 예로 들어 보자. 〈흥보가〉의 기본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수 있다.

옛날에 흥보라는 착한 사람과 놀보라는 악한 사람이 살았는데, 흥보는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그 보은으로 박을 타서 보물을 얻어 부자가 되고, 놀보는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 뜨려서 고쳐 주고 박씨를 얻어 심었다가 온갖 화를 당한다.

이 기본 죽거리는 대체로 두 개의 근원 설화로 결합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옛날 이야기 유형이다. 이러한 권선 징악 적인 주제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나 '혹 떼러 갔다 혹 붙인 이야기' 같은 옛날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짐승 보은 설화, 즉 짐승이 사람에게 은혜를 갚거나 혹은 원수를 갚는 또 하나의 옛날 이야기 유형이 결합되면서 흥보 놀보 이야기의 기본 줄거리가 성립된 것이다. 그 외의 다른 줄거리들은 모두 첨가된 줄거리일 뿐이다. 예를 들어 흥보가 매품을 팔러 간다든지, 놀보집에서 밥주걱으로 맞는다든지 하는 것은 다른 내용으로 바뀌어도 괜찮은 줄거리이다. 흥보의 박 속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보물들이나 놀보의 박 속에서 나오는 여러 재앙의 종류들도 그때그때 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춘향가는 '기생과 관련된 사랑 이야기'와 '암행 어사가 여인을 구한 이야기'가 결합되어 기본 줄거리가 성립된 것이며, 심청가는 '사람을 희생물로 바치는 이야기'에 '효녀 이야기'가 결합됨으로써 기본 줄거리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마당들은 대개 단순한 하나의 근원 설화들로부터 확장되어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연극으로서의 판소리

판소리 광대는 춘향가나 심청가 등 그 긴 이야기를 혼자서 말과 노래와 몸짓으로서 끌어 가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표현 원리들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결과 일인 배역이라는 놀라운 연기술을 갖추게 되었다. 즉 광대 혼자서 판소리에 등장하는 극중 인물 모두의 역할을 도맡아 연기해 내는 것이ㅏㄷ. 예를 들어 춘향가에 등장하는 인물은 춘향이와 이몽룡, 방자와 향단, 월매, 이몽룡의 부모, 그리고 변학도와 사령들, 기생들, 농부들, 각 고을 수령들 또 암행 어사를 수행한 서리 역졸들 등등 수십 명이 넘지만 이 많은 역할들을 고수의 도움만으로 광대 혼자서 다 처리해 내는 것이다.

광대는 처음 판에 나설 때 제 3자적인 객관적 서술자로서 즉 광대 자신으로서 등장한다. 서양 연극 같으면 배우가 무대에 나설 때 처음부터 이미 극중 인물로 분장해서 등장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판소리 광대는 어디까지나 광대 자신으로 등장하여 관중과 직접 만나고 남의 이야기를 객관적인 위치에서 전달하는 제 3자적 입장을 결코 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데 만일 광대가 처음부터 끝까지 제 3자적인 입장으로만 관중을 만나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야기 차원에 머무르게 될 것이므로, 소리판이 전개되면서 광대는 점차 제 3자적 입장을 벗어나, 극중 등장 인물의 세계로 몰입해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등장 인물의 대화를 간접 화법으로 전달했지만 나중에는 직접 화법으로 더욱 여실히 묘사하게 되고 드디어는 광대 자신이 그 등장 인물 속으로 완전히 몰입되어 광대가 따로 없고 극중 인물이 따로 없는 일치된 연기를 보여 주게 되는 것이다.

직접 화법과 간접 화법을 비교해 보기 위해 심청가를 한 대목 예로 들어 보자. 심봉사와 뻉덕이네와의 대화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심봉사 하로난 돈괴를 만져 보니 엽전 한푼이 없것다. "여, 뺑파, 돈괴에 엽전 한 푼이 없으니 이게 웬일이여" "아이고! 그러니 외정은 살림 속을 저렇게 모른다니까. 아 영감 드린다고 술 사오고 고기 사오고 떡 사오고 한 둔이 모두 그 돈 아니오?"

이 대목에서 맨 첫 구절은 광대의 제 3자적인 서술 부분이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 부분에서는 광대의 객관적인 서술은 일체 생략되고 등장 인물 간의 직접적인 대화로만 맞붙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광대는 심봉사 역과 뺑덕이네 역을 순식간에 바꾸어 가며 묘사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만일 이 대화 부분에서 광대가 제 3자적인 입장을 계속 잃지 않고 전개해 나가고자 했다면 그곳의 사설은 아마 다음과 같은 식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

 

심봉사 뺑파를 불러 '돈괴에 엽전 한 푼이 없으니 웬일이냐'고 물으니 뺑파 시치미를 뚝 떼고는 '외정은 살림 속을 모른다'는 등 '영감 드린다고 술 사오고 고기 사오고 떡 사오고 한 돈이 모두 그 돈 아니냐'는 등 변명을 늘어놓것다……

이렇듯 극중 등장 인물의 감정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동화시키지 않고 다만 뺑덕이네가 새침을 떨거나 심봉사가 퉁명스럽게 대하는 그러한 분위기를 약간 풍겨 주기만 하고 넘어가는 반면, 이를 보충하기 위해 대화 앞뒤에 이러 저러한 군더더기 설명이 붙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화법을 쓰면 그러한 번거로움을 훨씬 줄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심봉사가 너무 좋아서 입이 크게 벌어졌다'는 설명 대신에 "파아!"하는 직접적인 감탄사 한 마디로 다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판소리가 연극적 차원에서 발전을 해 왔다고 하는 것은 이같이 광대의 제 3자적 서술 및 간접 화법이 차츰 줄어들고 극중 인물에의 주관적 몰입 및 직접 화법의 사용이 점차 늘어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음악으로서의 판소리

판소리 창의 음악적 구성 요소는 첫째는 장단이요, 둘때는 성음이며, 셋째는 선율이다. 장단은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여 말의 율격과 속도를 조절하는 동시에 정서 체험의 기반을 통일시키는 기능을 갖는데, 갖가지 장단 속에서 펼쳐지는 변화 무쌍한 부침새에 따라 산문적 운문과 운문적 산문이 교묘히 교차되는 판소리 특유의 운율이 생겨난다.

이 운율에 성음과 선율이 배합되어 판소리는 이야기에 내재한 이면을 표출하게 되는데, 이때 성음은 소리의 성질이요 기운이며 선율은 소리의 흐름이요 파동이다. 명창들이 피나는 수련을 거쳐 득음했다는 말은 곧 자유 자재의 성음을 체득함으로써 이면에 따라 마음대로 선율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음을 어떻게 내는가 하는 문제 즉 발성의 문제는 판소리에서 가장 오묘한 비밀을 간직한 영역이다. 서양 음악에서의 발성법과 우리 전통 음악에서 판소리나 가곡 또는 범패의 발성법은 사뭇 다르다. 서양 음악에서의 발성법은 이른바 벨칸토 창법이라 하여 목을 둥글게 열고 머리와 가슴을 울리게 하며 맑은 소리를 으뜸으로 치지만, 판소리의 발성법은 통성이라 하여 배 아래쪽에서부터 숨을 올려 내지르는데 목을 다스려서 약간 거칠고 텁텁한 소리를 내게 된다. 판소리에서 좋게 치는 음질은 껄껄한 수리성, 단단한 철성, 튀어나오는 천구성 등이다. 각고의 수련을 통해 그러한 목을 얻음으로써 상성, 하성을 마음대로 구사하여 폭포성, 쇠옥성, 애원성, 귀곡성 등 어떤 성음이든 자유 자재로 낼 수 있을 때 가히 명창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판소리하는 사람들은 목이 많이 쉬는데 흔히 목이 쉬면 소리에 지장이 있을 줄로 생각들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판소리를 하자면 반드시 목이 쉬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판소리에서 최고로 치는 수리성이란 것이 결국 목이 쉬었다 풀렸다 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얻어낸 성음인 것이다. 목이 그처럼 갈고 닦아져야만 뱃속에서부터 끌어낸 소리가 거침없이 목을 통과하게 되고 또한 듣는 사람에서 깊은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명창들은 산중에 들어가 폭포 밑에서 혹은 땅굴 속에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수련을 하곤 했다. 옛날 명창들이 수련 과정에서 목구멍으로 피를 쏟았다거나 몸이 들떠 똥물을 몇 사발이나 마시고 나았다는 일화들이 전해 오는데, 이같이 뼈를 깎는 공력을 들여야만 자연의 기를 체득하고 인간이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자유 자재로 뽑아내는 득음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목이 쉰다는 것은 곧 대자연의 기를 먹는다는 것을 뜻한다.

판소리는 사설의 극적 상황에 따라 장단과 조를 먼저 선택하고 그 다음에 성음과 선율을 걸맞게 적용함으로써 음악성을 발휘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다 장단에 말을 놓아가는 갖가지 부침새와 소리에 맛을 내는 정교한 시김새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더욱 완숙된 음악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광대와 청중의 호흡 관계

판소리는 '판의 소리'이다. 그리고 '판'의 특성은 한 마디로 '살아 숨쉬는'데 있다. 대저 어떠한 사물에서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구별은 결정적으로 호흡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쉬고 있다는 의미요, 죽었다는 것은 숨쉬기를 멈추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숨을 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현상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의 생명체가 자신의 존립 근거인 또 다른 생명체와 교섭하여 신진 대사를 하는 행위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소리판의 생명은 광대와 청중이 서로 주고 받는 데, 서로 호흡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리판의 특성은 판소리의 본질이 다름아닌 '이야기'그 자체라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옛 이야기 구연 방식은 모두가 '대거리'형식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들려만 주는 것이 아니고, 듣는 사람이 끼어들어 묻고 따지고 조르고 말리고 추어 주고 하는 데서 이야기는 길을 잡아 나간다. 이처럼 듣는 사람이 끼어드는 방식은 애초의 이야기판에서는 더 적극적인 '대거리'형태이었으나 오늘날 소리판에서는 훨씬 소극적인 '추임새'형태만 형식적으로 남아 있다. 더구나 '대거리'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개입이지만 요즈음 '추임새'는 기량이나 기교에 대한 상찬으로 치우치는 감이 없지 않다.

어떻든 소리판에서 광대와 고수 사이는 몰론이요 광대와 청중 간에도 호흡이 잘 맞아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건이라 할 수 있다.(고수는 묵으로 장단을 맞추어 주는 반주자이면서 아울러 광대를 향해 대거리와 추임새를 하는 광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광대가 숨을 내쉬면 고수와 청중은 숨을 들이쉬고, 광대가 숨을 들이쉬면 고수와 청중은 숨을 내뱉는다. 바로 숨을 내뱉을 때 대거리와 추임새를 넣으면 대체로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서양 음악 연주회장 같은 데서는 이러한 상호 교류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마어마한 건축물 구조가 청중들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고 강요한다. 이는 '호흡'이 아니라 '질곡'이다.). 이렇듯 관대가 아니리와 소리를 하면 고수와 청중이 대거리와 추임새를 넣는 상호 교류, 신진 대사가 활발하면 할수록 소리판은 살아 숨쉬는, 생동하는 판이 된다.

판소리는 그림이다

이제 판소리를 어떻게 보고 들을 것인가에 관해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구경꾼의 입장에서 볼 때 판소리는 일단 '보면서 듣는'예술 양식이다. 관중은 일차적으로 광대의 너름새와 발림을 보면서 그의 아니리와 소리를 듣는다. 그럼 판소리는 '보면서 듣는'차원에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판소리는 이제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다시 '들으면서 보는'예술 양식이다. 이때 관중이 듣는 것은 물론 광대의 소리이지만 그와 함께 관중은 그 소리가 빚어 내는 어떤 장면, 어떤 사실, 어떤 정황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그려 보게'된다.

예부터 판소리는 이면을 잘 그려야 훌륭한 소리라고 했다. 광대가 고도의 성음과 선율로 그려낸 어떤 '사실'은 관중의 청각을 자극하고, 관중은 자신의 미의식 속에서 그 청각적 인식을 시각적 상상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관중의 입장에서 볼 때 판소리는 문학만도 아니요, 연극만도 아니요, 음악만도 아니요, 판소리는 차라리 '그림'인 것이다. 아니, 연속된 그림이니까 한 편의 영화라고나 할까? 이처럼 '보면서 듣고'다시'들으면서 보는'총체적 감흥이야 말로 판소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가장 독특한 미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전공과는 거리가 있는 판소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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