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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의 사회사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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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의 사회사

 

이장직

 

'춤추다'라는 뜻의 희랍어에서 유래

'오케스트라'는 '춤추다'라는 뜻의 희랍어 '오케스타이'에서 나온 말이다. 그대 희랍에서 오케스트라는 극장 무대 앞의 반원형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 합창단이 노래뿐만 아니라 춤도 공연했다. 로마 시대에는, 오케스트라가 원로원에 배정되어 극장 맨 앞쪽에 위치한 특별석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로마의 철학자·정치가·비극 작가인 세네카는 당시 극장에서 배우들보다 합청단과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는 데 대해 불평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오케스트라는 이처럼 극장의 무대 앞 공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조합의 기악 앙상블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케스트라의 공간적 개념은 오페라를 공연할 때 무대 앞쪽의 아랫부분에서 반원형으로 연주하는 오페라 관현악단에 남아 있는 셈이다. 기악 앙상블이라는 의미에서의 오케스트라는 이미 고대 희랍이나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개 현악기, 광악기, 타악기로 구성된 앙상블은 오케스트라라고 하며 순전히 관악기로만 구성된 기악 앙상블은 밴드라고 부른다.

고대 이집트·바빌론·이스라엘 등지에서의 궁정악단과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된 오케스트라는 당시 매우 높은 수준의 음악 교육과 사회적 신분 보장을 받았다. 고대 중국의 오케스트라는 매우 다양하고 큰 규모였다. 중국은 변방의 나라들을 정복하면, 그 나라의 악사들을 데려다가 궁정악단에 편입시키는 관습이 있었다. 말하자면, 중국의 궁정악단에는 지방의 토속 음악을 연주하는 여러 개의 작은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7세기경에는 이 악단이 모두 9개로 늘었다. 중국이 정복 국가로서의 힘이 강해 질수록 궁정악단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고대 사회에서 궁정악단은 군주의 권력과 위엄ㆍ영광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궁정악단의 조율 체계나 악사의 숫자를 엄격히 제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예악(禮樂)사상의 기원도 따지고 보면 음악으로 나라를 통치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고대 중국의 궁정악단에서 악사들의 숫자와 배열법은 그 악단을 소유한 통치자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 정방형의 배열은 황제가, 3열 종대의 배열은 고관 대작이 사용한 편성법이다.

최초의 프로 음악가는 떠돌이 악사

근대적 오케스트라의 기원은 오페라 관현악단, 궁정악단, 실내악단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오케스트라가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적 기초를 살펴보려면 중세 시대의 기악 연주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중세 기독교 사회는 기악 연주자들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기악 연주자들이 누렸던 사회적 지위도 음악 이론가나 성악가에 비해 낮은 것이었다. 기악 음악은 처음부터 춤ㆍ축제ㆍ전쟁 등의 신체 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세속적인 여흥에 종사했을 뿐 교회 음악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따라서 기악 연주자들은 주로 영주의 궁정이나, 마을의 축제ㆍ결혼식ㆍ장례식 등의 행사에서 음악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보통 우리가 '음유 시인'이라고 말하는 종글레는 말하자면 떠돌이 악사였다.

그들은 일정한 거처나 소속이 없이 음악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음악을 연주하고 여기에 곁들여 원맨쇼나 줄타기ㆍ공던지기와 같은 재주와 마술을 부리기도 했다. 이들은 여행의 자유가 있는 대신에, 죽고 나면 마을 공동 묘지에 묻어 주지도 않는 천민의 대접을 받았다. 중세 교회는 이들을 가리켜 '악마'라고 비난했으며, 이들은 중세 교회의 부조리를 노래와 연주로 고발했다.

방랑자는 정착할 곳을 찾게 마련이다. 떠돌이 악사는 드디어 민스트렐, 또는 메네스트렐이라는 이름으로 궁정 소속의 악사가 된다. 영주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악사의 사회적ㆍ경제적 신분을 보장해 주는 대신,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음악가는 가신 (家臣)으로서 군주의 음악적 수요에 봉사하는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권력의 주변부에서 맴돌던 EJ돌이 악사가 권력의 중심부에서 권력의 부속물이 된 것이다. 사실상 당시 음악가들은 군주들이 팔고 사는 '물건'과도 같은 존재였다. 악보나 레코드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가를 구입하여 언제나 '살아있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궁정에 소속되지 않은 음악가들은 스스로 길드를 조직하여 체계적인 도제 수업을 통해 전문 은악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음악가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이 마을의 음악 행사에서 연주할 수 없도록 독점권을 행사했다. 이때부터 음악가들은 정치적ㆍ 상업적 권력의 부속물이 되어 음악의 주문 생산자가 되고 말았다. 마을의 악사로 베이스 비올을 어깨에 메고 다니던 요한 요아힘 퀀츠가 폴란드 궁정 교회의 오보에 주자를 거쳐, 드레스렌 궁정악단의 플루트 주자로 임명되었다. 드레스덴 궁정을 방문하여 퀀츠의 플루트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았던 베를린 르로이센 공국의 프리드리히 대제는 이미 계약 기간이 만효된 퀀츠를 플루트 연주자로 기용한다. 퀀츠가 드레스덴에 있었을 때는 연봉 250달러에 불과했으나, 메를린에서 그는 연봉 2천 달러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궁정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인 지오반나 아스투라의 연봉 6천 달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시 프로이센 공국의 국무 대신의葡 급료가 연봉 6 천 달러였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궁정악단과 오페라단의 후원을 통해 문화적 수준의 향상에 힘을 쏟았던 것과 당시 영토의 확장과는 무관하지 않다. 궁정악단의 규모가 크고 일급 연주가들을 고용할 수 있는 경제력은 정치적 권력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떠돌이 악사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북부 독일의 경우 마을의 악대 영국의 경우 웨이트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음악가 단체는 런던이나 쾰른 같은 자치시의 시청 소속 공무원 신분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근대적 의미에서의 교향악단이 시립 또는 국립이라는 이름으로 공부원적 성격을 띠는 것과 유사하다.

권력과 부에 복종했던 바로크 시대

장 밥티스트 륄 리가 지휘하던 루이 14세 궁정악단은 '왕의 24바이올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사실 여기서 '24대의 바이올린'이라고 함은 실제로 6대의 바이올린, 6 대의 베이스, 12대의 비올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현악 실내 오케스트라였다. 이 악단은 주로 루이 14세에게 실내에서의 음악적 여흥을 제공했다. 이 밖에도 사냥이나 행렬ㆍ국빈 영접 때에는 광악기가 상당수 첨가된 앙상블이 음악을 연주했다. 현악기는 주로 무도회나, 연회를 위한 음악을 담당했으며, 특별한 사회적 상징을 갖는 관악기는 특정한 행사를 위해 연주되었다.

가령 트럼펫이 가는 곳엔 드럼이 있었다. 트럼펫과 드럼으로 구성된 팡파르단은 국빈 영접 때나 사냥놀이에 안성맞춤이었다. 국빈 영접 때에 연주되는 트렘펫과 드럼의 수효로서 국빈의 정치적 지위를 상징했다. 헨델이 작곡한 '왕궁의 불꽃놀이'는 런던 템즈강에서의 불꽃놀이를 위한 트럼펫과 드럼의 앙상블 음악이다. 바로크 시대의 오케스트라는 주로 궁정의 오페라 관현악단이나 교회에서의 칸타타ㆍ 오라토리오를 반주하는 악단의 형태로 존속되었다. 궁정과 교회하는 테두리를 벗어난 경우는 아직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마을의 악대 정도였다.

마을 악대의 원래의 임무는 치안 유지와 성문 경비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요즘의 시경 악대와도 같은 것인데, 평소에는 경찰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틈틈이 악기를 연습하여, 마을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연주하고, 공휴일에는 광장에서 시민을 위한 무료 음악회도 개최했다. 그러므로 전문적인 연주 단체로 가는 과도기적 현상인 것이다.

양적 팽창의 주역,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곧 관현악 편성이 확대되어 가는 역사이며, 음악의 후원자가 정치ㆍ종교적 권력으로부터 상업적 권력으로 옮겨가는 이행 과정이다. 뿐만 아니라 오페라 하우스의 오케스트라 박스와 폐쇄적인 궁정 거실의 코너를 벗어나 대규모 연주회장의 넓은 무대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곧 청중의 확대 형상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곧 청중 확대의 역사이기도 하다. 관현악 음악적 증거이다. 베토벤이 자신의 교향곡에 트럼본을 첨가한 것은 늘어난 천중과 확대된 연주회장의 규모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극단적이 모습은 산업 혁명 이후 급격히 팽창하는 신흥 부르주아의 음악적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대도시의 교외에 천막을 치고 음악회를 개최한 야외 음악회이다.

18세기 영국은 대륙의 음악가들에겐 훌륭한 음악 시장이었다. 퍼셀 이후 특별한 세계적인 작곡가를 배출해 내지 못한 영국은 헨델을 '수입'하여 궁정 음악을 만들게 했다. 식민지 경제를 주름잡던 영국은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여 대륙의 '가난한'음악가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하이든, 베토벤, 모차르트로서는 영국이 악보를 구매해 주고 공하찌 공의 느슨한 통제를 틈타, 영국의 임프레사리오 잘로몬의 제의로 새로 만든 교향곡을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연주 여행을 떠난다. 당시 하이든이 영국에서 지휘했던 관현악단의 규모는 40명 정도였는데, 하노버 스퀘어 룸에서 열린 이 연주회의 악단은 제명, 오보에 2명, 클라리넷 2명, 바순 2명, 트럼펫 2명, 호른 2명, 팀파니 1 명으로 구성되었다. 참고로 에스테르하찌 공의 궁정악단의 규모는 바이올린 10명, 비올라 2 명, 첼로 2명, 오보에 2명, 바순 2명, 호른 2명, 건반 악기 1명(하이든 자신)으로 되어있었다.

이에 비해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관현악 편성을 보면, 엄청나게 팽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을 연주했던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00년경에 104명 가량의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1바이올린 17 명, 제 2바이올린 16명, 비올라 11명, 첼로 10명, 베이스 10명, 플루트 4명, 클라리넷 4명, 바순 4명, 호른 8명, 트럼펫 4명, 트럼본 5명, 튜바 1명, 팀파니 2 명, 타악기 3명, 하프 1명으로, 당시로선 가장 규모는 큰 편성이었다. 말러의 '천인 교향곡'이 작곡되어 연주된 걱도 이 무렵의 일이다.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꿈꾸었던 관현악단의 규모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대대적인 사회적 격변기를 체험했던 베를리오즈는 그의 '관현악법'에서 1858년 자신의 '이상적인 오케스트라'를 계획했다. 그는 이 악단이 가장 완벽하고, 가장 풍부하고, 가장 웅장하고,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부드럽고 유연한 오케스트라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내놓은 관현악 편성안을 살펴보면, 모두 119명의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악 부분에 많은 비율이 할애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베를리오즈의 관현악법은, 잉글리쉬 호른ㆍ베이스 클라리넷ㆍ하프 등 특수 악기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엄청나게 박력있는 웅장한 사운드를 설정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매우 부드러운 피아니시모의 극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베를리오즈는 스스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 467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계획했다. 여기에는 예를 들어 120명의 바이올린, 12명의 바순, 30명의 하프, 12명의 '각기 다른 조율된 고대 심벌즈' 연주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처럼 관현악 편성이 팽창하게 된 것은, 연주회장의 규모나 청중의 확대뿐만 아니라, 산업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겪는 동안의 소용돌이가 음악에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관현악 편성의 확대로 필수 불가결하게 독재적인 지휘자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근대 산업 혁명으로 만들어진 사회 구조는 오케스트라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또한 산업 혁명으로 상업 자본은 축적했지만 교양 없는 부르주아들이 봉건 시대의 귀족의 문화 생활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필요 이상의 '과장'과 '장식'을 강조하는 화려하고 변화 무쌍한 관현악법이 이들의 허위 의식을 충족해 줄 수 있었다. 교향곡은 실내악에 비해 규모는 크지만 음악적 수준은 비교적 낮다. 교향곡과 이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수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그들의 교향곡에 민요 선율을 삽입했으며, 관현악으로 민요를 편곡하여 이들의 음악적 수요에 부응했다.

지금까지 음악사상 가장 큰 규모의 관현악 편성은 누구의 오케스트라였을까? 1872 년 6월 17일, 보스턴에서 열린 세계 평화 축제에서 요한 쉬트라우스가 지휘했던 오케스트라이다. 이때 모인 연주자들의 숫자는 약 987명으로 추산되었다. 이때 연주된 곡목은 물론 자신의 왈츠ㆍ폴카ㆍ행진곡 등으로 '대중적인 클래식'이라는 용어가 적용될수 있는 번주였을 것이다. 따라서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의 역사적 전통은 이미 요한 쉬트라우스가 심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는 궁정과 교회의 귀족적인 분위기에서 탈피하여 과감히 음악 청중들 속에 파고드는 시도를 해왔다. 입장료를 대폭 인하하고, 대규모 스타디움이나 공원같은 야외에서 연주회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청중들에게 접근하려고 했던 '프롬나드 콘서트' 와 같은 시도는 대중화로 치닫는 음악에 도화선이 되어 주었다.

산업화 이후 시민의 공유물이 된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의 확대 현상은 개인 후원자에서 집단 후원자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만큼 청중들의 경제력이 강화되었는 말이다. 몰락해 가는 궁정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오페라 공연이 없는 사순절 기간 동안 궁정 바깥으로 나와 시민들로 구성된 음악 애호가 집단을 위해 연주한 것이 초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발생 배경이었다. 원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는 음악을 좋아하는 시민 연합 같은 성격의 단체이다. 순수 민간 단체로 출발한 오케스트라의 운영 위원회는 시민들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다분히 공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19년 미국에서는 경제 공황으로 거의 모든 오케스트라가 해산의 위시에 직면하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거리에는 '오케스트라를 구하자'라는 내용의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왜냐 하면, 오케스트라는 이제 어느 특정인의 것도 아니고 시민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는 시민의 문화적 공간이요, 모든 음악적 역량이 총결집되는 종착점이다. 미국에서 정부 차원에서 오케스트라에 대대적인 재정 지원을 실시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국립 예술 지원금의 항목 중에서 가장 먼저 손꼽히는 지원 대상은 오케스트라이다. 이것은 많은 연주자와 청중을 연결해 주는 제도이므로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할 당위성이 확보된다. 그러므로 오케스트라는 서구에서처럼 오랜 전통에 의해 만들어진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소속이든, 아니면 우리 나라와 같이 시청이나 방송국 소속이건 간에,그것은 어디까지나 시민들의 공유물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오케스트라가 청중의 입장료만으로 운영될 수 없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은 서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정적 지원과 책임을 맡고 있는 정부 당국이나 시 당국에서 오케스트라를 단지 음악 박물관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를 케케묵은 음악관을 가지고 운영한다면, 오케스트라의 원래 취지와는 무관하게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케스트라가 되고 말 것이다.

요한 쉬트라우스가 지휘하는 비엔나 왈츠를 들으러 보스턴의 교외로 모여들었던 그 많던 청중들은 이제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TV나 영화에 '볼거리'를 넘겨 주고 난 오케스트라는 더 이상 낭만주의 시대의 오케스트라가 아니다. 음악회가 TV로 생중계되는 오늘날의 상황에 맞는 자기 개혁이 수반되지 않으면 오케스트라는 청중들로부터 외면 당할 지도 모른다. 오케스트라의 존재 이유는 대규모 청중에 있기 때문이다.


이장직/ 서울대학교 강사이며, 저서로는 '음악의 사회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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