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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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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태 주

 

연극은 우리 사회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 연극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극적 고찰이요,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인식의 수단이요, 그 표현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이러한 연극은 과연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고뇌하고 있다. 연극은 고뇌하고 있는가? 우리는 숨가쁜 삶의 드라마 속에 휘말리고 있다. 연극은 이 같은 격류에 몸을 담고 있는가? 우리는 피 흘리고 있다. 연극은 피를 흘리고 있는가? 우리는 혁신의 몸부림 속에 아우성치고 있다. 연극은 과연 이 몸부림과 아우성 소리를 담고 있는가? 우리는 조화와 질서를 잃고 있다. 연극은 이 혼란의 어두운 밤을 비치고 있는가?

우리의 연극이 이토록 다급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연극은 과연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 하는가? 연극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극이 과거에 있어서, 그리고 혼돈의 역사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2차 세게 대전 후 수백만의 인간들이 가스실과 집단 수용소와 전쟁터에서 고문당하고 학살당했을 때, 문명의 폐허 속에서 유럽의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새롭게 성찰해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르트르, 까뮈, 베케트, 브레히트 등은 이 엄청나고도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해서 연극적 인식의 새 길을 연 예술가요, 사상가였다. 1953년 1월 5일 파리의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서 인간의 갈망과 그 조건 사이에는 단절의 심연이 놓여 있음을 보여 준 연극이었다. 이 연극의 가치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면밀하게 짜여진 복합적인 이미지를 조립하여 다의적이며 연상적인 시적 상태를 무 대에 형상화했다는 반연극적 수법에도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연극이 역사적 도전에 대한 성실하고도 진지한 연극적 해답이었다는 사실이다.

폐허가 된 베를린에서 브레히트는 「베를리너 앙상블」을 이끌고 현대 세계의 실제적인 사회 문제와 대결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을 전제로 한 연극 혁신의 필요성을 미학적이며 기술적인 면에서 철저하게 규명했다. 그의 글 <진실을 쓰는 경우에 부딪치는 다섯 가지의 어려움>은 히틀러의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그가 높이 치켜올린 양심의 깃발이었다.

현재 허위와 무지와 싸우면서 진실을 쓰고자 하는 이들은 적어도 다섯 가지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이 도처에서 억제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쓰는 '용기' 와, 진실이 도처에서 억제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인식하는 '현명'함을, 진실을 무 기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을, 진실의 힘이 발휘될 수 잇도록 사람들을 올바르게 선택할 수 있는 '판단력'을, 그리고 진실을 널리 펼칠 수 있는 책략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브레이트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리들 세대의 위대한 진실은 그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지만 인식의 과정이 없으면 다른 중요한 진실을 발견할 수도 없는 것이다. 폴란드 실험 극단을 창립한 연출가 그로토우스키는 연극의 주제를 '결백성의 살해'에 두고 있었다. 그의 조국 폴란드를 나치스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을 때 그는 여섯 살 난 소년이었다. 그는 집단 수용소의 고문과 학살을 어릴 때부터 뼈 속 깊이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히 인가의 신음 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화된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들이 보는 것은 인간의 수난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똑같이 공포의 거미줄에 얽혀 있는 역사적 수난이다. 그로토우스키가 보여 주는 연극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극한적인 잔인성을 본다. 그로토우스키의 지옥은 모든 인간이 결백하기도 하고, 죄를 짓고 잇기도 한 지옥인 것이다. 그의 무대는 교훈이나 설교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그의 연극 창조 행위는 곧 생명의 긍정이요, 잔인성에 대한 항거이다.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사랑의 확인인 것이다. 도덕의 붕괴와 시대적 고뇌에 대한 상징적 인식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전위 연극 집단 이었던「리빙 디어터」의 출발은 시대의 병폐에 대한 진단과 항거였다. 50년대 미국의 생활 속에서 유배된 인간 존엄성의 회복 운동을 그들의 지표로 삼고 있었다. 이들이 공연한 브라운의<영창>, 겔버의<접선>, 메어리 셰리의<프랑켄 시타인>, <안티고네>, <파라다이스 나우> 등은 50 연대 미국 사회에 비친 여러 가지 정신 장애 징후를 보여 주고 있다. 그 징후는 일상 생활의 침울한 현실로부터의 도피, 공포와 혐오 속의 인간 확대, 적의에 찬 폭동과 잔학 행위 속에서 무대적 표현을 얻었다. 「리빙 디어터」는 역사적 상황의 생생한 표현에 극성스러울 정도의 열성을 보였다.

이들의 열성은 누구의 눈에도 뚜렷이 비쳤다. 이들은 연극을 통해서 연극을 넘어선 그 무엇에 공헌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이 정신적인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미국이 자기 만족의 위선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하는 어떤 강렬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오픈 디어터」의 <뱀>공연도 「리빙 디어터」의 명백을 유지하면서 미국 사회에 퍼져 있는 폭력의 잔인성을 폭로하고 고발한 작품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연극을 통해서 사회에 대하여 무엇인가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1930년대 미국 산업 사회가 스스로 파탄의 길을 걸으면서 개인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을 때, 미국 연극은 이에 대항하는 예술적 노력을 기울였다. 번영의 대행진을 구가하던 미국의 경제계가 하루아침에 붕괴되면서, 실업게의 숱한 인사들이 거지가 되고, 실업자가 속출해서 빵을 배급 받으려는 긴 행렬이 도시마다 목격되고, 노동 게급의 조직화에 따르는 파업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잇던 사회적 격동기에 이같은 불안한 사회의 모습을 충실하게 작품속에 반영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비판하며 사회 개혁의 의지를 표명한 극작가들----시드니 킹슬리, 클리포드 오데츠, 릴리안 헬만----은 이윽고 아더 밀러의 사회극으로 그 전통이 이어륵다. 이들은 삶의 현장과 극장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단절을 극복하여 그 유대감을 확고히 하는 데 공헌했다. 그러기 때문에 극장은 정신이 마취당하는 오락의 장소가 아니라 정신이 눈을 뜨는 각성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극장이 머나먼 환상의 나라가 아니라 일상적 생활 자체가 날카롭게 관찰되고 토의 되는 현실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하루하루의 일들이 충격적인 드라마가 되어 소용돌이치는 물결속에 몸을 담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드라마에 대한 연극적 인식은 브레히트가 말한 대로 진실의 발견에 공헌하는 일이기 때문에 연극을 지켜보는 우리의 눈운 그 어느 때보다도 숨가쁜 열기에 차있다. 또한 연극은 한 시대의 은유이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연극의 반응에 대해서 우리는 더욱 민감해진다고 할 수 있다.

연극은 우리 사회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 우리를 변혁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치 사회적 변혁의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 사회적 변혁에 티끌만큼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변혁이라야 한다. 연극은 적어도 오늘의 세계를 재현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재현은 이 세계의 창조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연극으로 삶을 재현하면서 삶의 방법을 뒤엎어 버리기를 갈망한다. 우리의 연극은 우리를 전환시키고, 우리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며, 인간의 가치와 문화의 가치를 드높이는 일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연극은 역사에 등을 돌리고 잠들어 있는 우리들 의식의 타락에 심한 매질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실의와 고뇌가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뚜렷한 의미로 부각되는 감동을 우리의 연극에서 맛보고 싶다. 현실의 드라마는 강바닥의 조약돌처럼 무수히 널려져 있다. 미국의 극작가 아더 밀러가 보았을 때, 그것은 마치 미국 사회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세일즈맨과도 같았다. 아더 밀러는 그 조약돌 밭에 연극적 인식의 눈길을 돌렸다. 그는 한 사람의 세일즈맨 윌리 로먼(<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을 창조해 냈다. 그의 창조에 의해서 한 개의 조약돌 윌리 로먼은 세일즈맨의 진실이 되고, 미국 사회의 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인간의 진실이기도 하다. 우리의 도시, 탄광, 농촌의 조약돌 밭 후미진 곳의 어떠한 암흑도 연극은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은 이같은 창조적 상상력이 있음으로 해서 예술적으로 '역사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태주/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이며, 저서로는 '연극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브로드웨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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