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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근대극의 흐름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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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근대극의 흐름

 

이 미 원

서론

희곡과 연극은 서로 다르면서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희곡이 문학적 영역에 있 는 반면 연극은 이 희극의 공연이면서도 스스로 독특한 생명을 갖는다. 한편 공연 경향은 희곡의 창작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희곡사와 연극사는 똑같지는 않으나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니, 이 글에서는 가능한 한 이들의 공통 분모를 간단히 이야기하겠다.

한국 연극사 서술에서 연극의 개념을 서구 근대극 이후의 개념만으로 속단하여 한국 에는 과거에 연극다운 연극이 없었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연극사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초창기 연극사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 단절론은 오늘날 극복 지양되어서 고대로부터 연극사를 정립하는 게 정설로 되고 있다.

 

그러나 근대극의 기점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한국 문화사가 그러하듯이 논란의 여지 가있다. 한국문화사에서 근대의 기점에 관한 학설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연극사에도 적용된다. 즉, 근대의 기점을 서구적 문학 개념으로 보아서 이광수의 『무정』이 나타난 1917년으로 보는 의견과, 실학자 자아 의식이 눈 뜬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의견 및 두 개의 절충안으로 갑오경장 전후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 사고는 연극사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근대극을 서구적 의미의 연극의 시작으로 볼 수도, 혹은 서민 의식과 자아 의식이 대두한 본격적인 민속극인 18세기의 가면극으로 간주할 수도 있으며, 이 양자의 절충안으로 창극을 근대극의 기점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는 앞으로 더욱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희곡의 존재는 한국연극이 서구적 개념의 극을 받아들이면서 확실하게 되므로, 편의상 서구식 연극의 태동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최초의 서구식 극장과 <은세계>

1920년 12월에 최초로「협률사(協律社)라는 서구식 극장에서〈소춘대 유희(笑春臺游戱)〉라는 연희가 상연되었다.「협률사는 궁내부에 설치되었으니 오늘날 국립 극장격이라 하겠다. 이는 본래 고종 황제의 칭경 예식(稱慶禮式)을 위해 건축된 것이나 콜레라의 유행, 영친왕의 변환 및 흉년이 잇달아 칭경 예식은 계속 연기되었다. 그 동안 여기서 판소리와 광대와 기생들이 각종 연희가 상연되어 풍속을 해친다는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1906년 4월 이필화의「협률사」폐지 상소문을 계기로「협률사」는 없어지고 만다. 연희 단체로서의「협률사」는 사사로이 존속되었는데, 1906년「원각사」발족 이후에도 그 잔여파들이「협률사」라는 이름으로 가끔 공연을 갖고 나중에는 지방 흥행을 떠나서 1913년경까지 근근히 연명하였다고 한다.

 

공식적인 「협률사」의 폐지 이유에도 같은 장소(급장)에서 사사로운 영리적 공연이 계속 되다가 1907년 2월 그곳에「관인 구락부(官人俱樂部)」가「협률사」자리에서 남대문쪽으로 이전하고 7월 하순에 이인직(李人稙)이 알선하여 그 자리에서「원각사」(圓覺寺)를 시작하게 된다. 신연극 〈은세계〉는 1908년 11월에「원각사」에서 공연되었다. 이〈은세계〉공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해서, 그것이 초기 신파극적인 상연이었느냐 혹은 대화창을 조금 넘어선 분창 형태의 초창기형 창극이었느냐는 아직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인직의 관여 없이 구식 광대들이 어떻게 '최병두 타령'을〈은세계〉란 신극적인 명칭으로 개명하여 명명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시되며, 설사〈은세계〉가 초창기형 창극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통적인 판소리가 아니라 당대의 시사적 문제에서 취재한 창작 창극이며 서구식 극장무대에서 공연되었다는 점에서 신극의 기점으로 충분히 검토 되어야겠다.〈은세계〉가 창극이란 확증을 잡을 수 있다면 오히려 전통 단절론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즉, 서구 문물의 도래가 시대적 요청에 따라 자생적인 연극 형태를 이루어 교량적 역할을 하고 신파극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은세계〉의 공연 형태가 어떠하였건 우리 연극사에 새 장을 열었음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신파극 시대

1910년대는 신파극으로 시종 일관한 시기라고 하겠다. 신파(新派)란 원래 일본어의 전통극인 구파(舊派) 가부키에 대립하여 새로운 연극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본의 신파극은 처음 정치극에서 출발하여 가정 비극, 애정 비극으로 발전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연극〈은세계〉도 역시 갑오경장 후의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정치극이라고 볼 수 있고, 임성구의〈육혈포 강도〉도 사회극으로 일종의 정치극 범주에 든다. 이렇듯이 정치 사회극에서 가정 비극으로 넘어감은 우리 신파극에도 적용된다. 임성구(林聖九)의「혁신단(革新團)」은 최초의 신파 극단이자 가정 대표적인 신파 극단으로 꼽을 수 있는데, 1911년 창단하여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인기 있었던 작품의 예로〈육혈포 강도〉를 살펴보면, 육혈포를 든 강도의 악행을 근심하여 한 순사가 목숨을 걸고 잡는다는 이야기로 그 구성상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적 기법을 쓰고 있다.

즉 선악의 흑백 논리가 분명하여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된 극적인 결말(순사의 죽음)로 끝나고 있다. 「혁신단」극단장 임성구의 연극 수학 과정을 살펴보면 일본의 신파극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청일·노일 전쟁 승리 후에 자연히 일본인들이 서울에 많이 거주하던 시기여서 일본에서 온 위문 공연단의 공연의 잦았으며, 일본인 극장이 1908년에서 1910년까지 서울에만도 십여 개에 가까웠다. 임성구는 그 중 한 극장에서 일을 거들어 주면서 연극을 배웠다.

「혁신단」이외에도 윤백남·조일제의「문수성(文秀星)」, 이기세의 「유일단(唯一 團)」, 이기세·윤백남의「예성좌(欆星座)」,「신극좌(新劇座)」, 김소량의「취성자(聚星座)」등을 대표적인 1910년대의 신파 극단으로 꼽을 수 있다. 이들 극단들은 일본 신파극의 번안극을 주로 하였으니 군사극, 탐정극, 가정 비극의 그 주류를 이룬다.

공연은 일정한 각본이 없이 대강의 내용과 배역의 성격을 알아 가지고 각자 요령껏 상대방에 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1910년대에 상연된 수백 개의 레퍼토리 중에서 줄거리나마 전에 오는 것은 20 여 개에 불과하다. 또한 유명한 배우를 중심으로 공연되는 스타 시스템을 가졌으니, 일례로 임성구는 인력거꾼으로 나와도 비단옷을 입었다 한다. 연기도 일본의 가부키식 연출과 유사한 변사조로 했고, 억양이나 표현은 과장이 심하였다.

신파 무대는「원각사」,「광무대」,「단성사」를 미루어 생각하면 매표소와 신발방을 위시하여 무대화 관객성 및 복도와 객석을 통하는 미닫이문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일본의 신파극 무대와 그 형태가 유사하다. 무대 배경으로는 한두 폭의 고정된 배경화를 사용한 듯하여 무대 뒤 백포장에 활동 사진을 비추기도 했다 한다. 한편 1910년대에 지상에 발표된 희곡으로는 조일제의 〈병자 3인〉(1912), 이광수 의〈규한〉(1917), 윤백남의〈국경〉과〈운명〉 및 최승만의〈황혼〉(1919) 등이 있다. 이들 중〈병자 3인〉과〈국경〉은 그릇된 남녀 평등 사상이나 가정 개량이 빚어내는 촌극을 그렸다.〈규한〉,〈운명〉,〈황혼〉등은 모두 당시 결혼의 문제점을 극화한 것이다.〈규한〉은 구식 여성의 입장에서〈황혼〉은 신청년의 입장에서 결혼 제도의 모순을 그렸으며,〈운명〉은 사진 결혼의 병폐를 작품화했다.

이들 희곡을 당대 신파극과 비교하여 보면 우선 선사를 갖춘 대본이라는 점이 다르나 극작술이라는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오히려 어떤 신파극은 흥미를 유발시키는 극적 구성의 이들보다 더 나은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서양 근대극의 그러하듯이 당대의 절실한 사회 문제를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이들 희곡의 근대성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리얼리즘 연극의 태동

1920 년에의 연극은 대략 세 가지 흐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가 신파를 탈피하려는 사실주의 연극 운동으로 이 흐름은 학생극 운동 단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둘째가 10 년대의 신파극을 개량한 소위 개량 신파극을 들겠고, 셋째가 20년대 후반에 나타난 경향극이다. 우선 사실주의 연극 운동은 20년대 초반에 동경의 각 대학에 연극 연구 학생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극예술 협회」는 1920년 김우진을 중심으로 모여 외국의 고전 및 근대극 작품을 연구하던 중, 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에서 회관 건립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여름 순회 공연을 요청해 오자 이에 응한다. 1921년 이들은 모국 방문 순회 공연을 가졌는데 레퍼토리 중 조명희의〈김영일(金英一)의 사 (死)〉가 가장 많은 호응을 얻었다. 무대장치와 조명이 새롭고 인상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아직 여자 배우가 아닌 여장 배우를 섰다는 사실에서도 그 과도적인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송경 학우회(松京學友會)」도 유사한 단체로 여름 공연을 가졌다.

이들의 공연은 개성에서만 이루어졌으니「갈돕회」,「반도 고학생 친목회」등을 들 수 있으며, 신극사에 한 전기를 이룬「토월회」도 이 중의 하나이다. 「토월회」는 동경 유학생들의 순수한 문학·예술 동인회로 시작되었다가 당시의 분위기도 있고 해서 1923년 여름 방학 귀경 선물로 연극을 준비하게 된다. 제일 1·2회 공연과 그 후의「토월회」는 구성 인원의 성격이 다르다. 1·2회는 학생들을 계몽하겠다는 아마추어 정신으로 공연 하였으며, 그러나 이에 공연까지 간 것은 1회 때 진 부채를 각기 의한 방편이었다. 이들은 젊은이들답게 사실적인 무대 장치와 자연스러운 대사로 종래의 신파 티를 벗어났으나, "은그릇에 설렁탕을 담은 것 같다."는 비평이 있을 정도로 연기력에서는 뒤진 듯하나. 그러나 작품 내용을 고증하여 사실적으로 연출함으로써 서구 리얼리즘 연극의 씨앗을 뿌렸다는 공로는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

1·2회 공연 이후,「토월회」의 성격은 변한다.「토월회」는 박승희를 중심으로 재정비되고 1925년 3월 광무대를 1년간 전속 극장으로 계약한다. 이로써 1년 무휴로 3 일 만에 한번씩 레퍼토리를 바꾸어 공연하게 된다.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 극장으로서의 출발은 영리성이 문제가 되었고 결국「토월회」는 점차 상업 극단화된다. 그러나 기성 극단으로써의「토월회」의 활동은 일단 다른 기성 극단에 자극제가 되었으며 박승희의 현실적인 극단 활동과 창작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야겠다. 다만 그 많은 작품은 아쉽게 도 대부분 유실되었다. 한편 신파극의 새로운 움직임을 살펴보면, 1921년 이기세가「예술 협회」를 조직하여 신파극의 탈피를 시도했으며, 1922년 윤백남은 타락된 신파극을 개량하여 예술적 지위로 향상시키겠다고 선언하며「민중 극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개량은 결국 신파 개량에 그치고, 근대적인 신극 운동으로 확신되지 못한다.

경향극 단체는 당시 문단의 풍조의 힘입어 20년대 후반에 나타나게 된다. 1923년에 「염군(捻軍)」이, 1927년에「불개미」극단이 조직되었으나, 공연도 한 번 못하고 유산되었다. 1927년에는「종합 예술 협회」가 조직되어 상연하였으나 3일 만에 경찰 중지로 해산되었다. 이러한 경향극은 1930년 초반에 들어서야 활기를 띠게 된다. 극작가로는 김우진을 선두로 김운정, 박승희, 김영보, 김영팔, 조명희 등은 들 수 있다. 이들의 주제는 자유, 평등, 남녀 평등 사상 및 유교적 봉건 사상 비파과, 자유 연애 사상, 나아가 세태 풍자와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까지 다양하다. 그 형식에 있어서도 단편적이긴 하지만 환경의 묘사에 주의를 기울이고 신파투의 과장된 언어에서 벗어나 자연스런 일상 대화를 사용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등 사실주의 기법이 보이며, 신파극적인 안일한 해피 엔딩이나 눈물을 강요하는 결말을 배제하였다. 즉 20년대를 사실주의 연극의 태동기로 몰 수 있으니, 사회적 환경·인습과 개인 k이의 갈등을 나름대로 재현하였으며, 사실적인 대사로 시대고와 생활난의 묘사에 성공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기적 불 때〉(1924, 김우진), 〈복어알〉(1925, 임영빈)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비사실주의 작품도 역시 이 시기에 태동되었는데, 특히 표현주의는 김우진의 〈난파〉, 〈산돼지〉 등에 잘 수용되어 있다. 김우진이 서구와 거의 동시대에 서구 사조를 수용하여 작품화에 선공한 것은 희곡사상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다. 도한 김운정의 〈15분간〉도 비사실주의극의 한 기점을 이룬다.

 

연극 이론 및 비평의 분야도 새로이 개척되어 윤백남, 현철, 김우진 및 김운정 등은 근대극이론을 소개하고 당시 연극을 비평하며 연극 부진의 이유를 파악하려 했다. 한 마디로 1920년대는 신파와 근대적 신극의 교량적 역할에 분투하던 시대였다.

 

근대적 신극의 정착기

1930년대의 연극은 「극예술 연구회」를 주축으로 한 연구극과, 「동양 극장」으로 대표되는 흥행극을 두 기둥으로 전개되었으며, 처음으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공유하겠다는 중간 연극의 선언도 주목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20년대에 싹터 오던 근대적 신극이 연구극에 의해 정착되었다는 것을 가장 큰 의외로 꼽겠다.

 

20년대 말 침체되었던 연극계에 「극예술 연구회」(이하「극연」)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30년대를 시작한다. 이들은 스스로 내건 창립 취지대로 '조선의 진정한 극문화를 수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 「극연」의 활동기를 대략 제 3기로 나눌수 있는데 제 1기는 홍해성이 주축이 되었던 초창기(1932∼1934)이며, 제 2기는 홍해성이 동양극장 전속으로 옮긴 뒤 유치진이 주도햇던 시기 (1935∼1938)이고, 제 3기는 「극연좌」로 개칭한 후 해산되기까지이다. 제 1기에는 동인들이 해외 문학을 전공한 문학도들인 만큼 유럽의 근대극 운동 및 소극장 운동이 많이 소개되었고 번역극 공연이 주류였다. 당시 극평을 종합해 보면 바야흐로 서구의 근대극을 정착시켰다 하겠다. 20년대 「토월회」를 위시한 일련의 학생 순회 공연이 극대극 수립의 징검다리였다면 「극연」은 그 초석을 확고히 했다. 동인제를 채택했던 「극연」의 아마추어적인 입장이 신극 운동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극연」제 2기의 창작극 발굴은 우선 큰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폐쇄적인 아마추어성을 어느 정도 탈피하여 연극 전문 극단으로 알려진다. 곤연도 대극장으로 진출하려 부민관에서 주로 공연하였다..유치진의 〈소〉(1934)를 계기로 일본 경찰의 「극연」에 대한 탄압은 노골화되고 「극연」의 성격은 바뀌게 된다. 즉 리얼리즘 계종의 근대극 전통은 흔들리고 점차 흥행 극단의 길로 나선다. 더욱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하에 결국 말기에는 상업극과 다를 바 없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1930년대에 신극 운동을 주도하여 리얼리즘의 근대극을 우리 연극계에 정착시킨 공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상업극은, 1935년 11월에 문을 연 「동양 극장」에 의해 새 전기를 맞는다. 우선 '600여 객석에 회전 무대, 호리촌트 들을 갖춘 국내 유일의 연극 전문 극장'이며 월급제를 실시하여 전속 극단 「청춘좌」,「호화선」들을 결성하였다. 「동양 극장」은 신극 운동龁 깃였던 홍해성 같은 인텔리 연출가를 흡수하는 한편 흥행성도 고려하여 '신파로는 좀 청신하고 매력적인 것'을 할 목적으로 20년대의 개량 신파에서 발전된 고등 신파를 만들어 냈다. 대표작으로〈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어머니의 힘〉,〈춘향전〉등을 들 수 있다. 광복직전까지 상업극단의 주축이었던 「동양 극장」은 결국 신파로만 끝났다는 아쉬움 남겼으나, 많은 신인을 양성하여 오늘날까지 활동하는 연극·영화인을 배출한 것과, 직업적 연극 전문 극장의 존립 가능성을 입증했다는 공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920년대 초기에 순회 공연으로 시작된 학생극은, 30년대에 들어서는 대학별로 연극부가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공연되었다. 동경에서도 「동경 학생 예술좌」가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공연했을 뿐만 아니라 기관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들 학생극은 「극예술 연구회」와 함께 근대극의 정착을 확실히 했을 뿐만 아니라 기관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들 학생극은 「극 예술 연구회」와 함께 근대극의 정착을 확실히 했을 뿐만 아니라 연극 전문인을 배출하고 관객 양성에 기여했다.

20년대 후반에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경향극은 30년대 초반에 가장 성행했다. 1925년에 결성된 「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 동맹」은 1930년「카프(KAPF)」로 명명되었으며, 1931년에는 산하에 극단 「이동식 소형 극장」과「메가폰」이 창립되었다. 1932년에는 극단「신건설」을 만들었으나,1934년 8월에 있은 신건설사 사건의 검거로 카프와 더불어 해산된다.

경향극의 지지자들은 「토월회」와「극예술 연구회」의 연극을 소위 예술 지상주의의 반동적 소부르조아 연극으로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고 심미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당대의 상업극은 '연극이라는 신성한 이름을 빌어서 저속한 관능주의와 퇴폐주의의 독소를 퍼드리는 신파극'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경향극은 구호만 요란했지 내부적으로도 '정치주의적 기계주의적 편향'으로 그 한계가 분명했던 까닭이라 하겠다.

이 시기의 극작가로는 유치진을 우선 꼽아야 하겠으며, 그의 〈토막〉과〈소〉는 명실공히 30년대의 대표작이다. 이밖에도 이광래, 채만식, 이무영, 김영수, 김진수 등을 들 수 있다.

해방 이후의 연극

8·15광복과 함께 전개된 좌우익 대립은 연극계 도한 두 조각으로 갈라 놓았다. 1948년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좌우익 투쟁의 혼란기도 서서히 끝나고 틀이 잡혀가던 연극 운동은 6·25사변으로 다시 주춤해진다.

휴전 이후 연극계의 불화로 저문 극단이 침체되는 반면 연구극 성격의 「제작극회」가 창립된다. 젊은 대학극회 출신들이 참된 현대극 양식을 제작하려고 목적으로 모엿는데 차범석, 김자림, 박현숙 등의 극작가를 비롯하여 오사량, 허규 등의 연출가와 이두현등의 연극학자를 배출했다. 이들은 어수선했던 전후의 연극 침체기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드라마 센터」가 문을 열어 연극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는다. 한편「산하」,「실험 극장」,「가교」,「자유 극장」,「광장」,「민중극장」,「여인 극장」등 새로운 극단들이 생기는데, 이 신진 극단들은 60년대 후반에 와서는 이제껏 연극사를 움직였던 기존의 극단들, 즉「신협」이나「제작극회」를 제치고,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극단들이 늘어나면서 공연장의 부족이 심각해졌다. 「국립 극장」을 제외하면 공연장이 전무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드라마 센터」는 학교 강당처럼 되어 버렸고 어쩌다가 호텔 방을 비는 정도였다. 연극인들의 소극장에 대한 염원은 미흡하나마 1969년 「카페 떼아뜨르」로 나타난다. 이는 다방 겸 소극장이 개설되기 시작하여 70년대 초반까지는 「어제또 소극장」,「창고 극장」,「실험 소극장」,「중앙 소극장」등이 개설되어 연극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러한 소극장 운동은, 공간의 제약성이 적은 새로운 반사실주의 연극의 출범과도 관련이 깊다. 1969년 유덕형의 '귀국 공연 연출 작품 발표회'는 이러한 반사실주의 연극의 첫 출발을 알렸다. 이러한 새로운 실험적 작업은 70년대의 연출과 창작에 새 지표를 마련햇으니, 그 대표적인 두 줄기를 꼽으면 「드라마 센터」의 실험극과 「민예 극장」의 전통극 현대화 작업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당시의 연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전통극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는 것도 70년대에 와서이다. 특히 우리 뿌리를 찾자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가면극과 판소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고, 여기서 나아가 전통극의 형식을 빈 마당극이 유행하기도 했다. 마당극의 즉흥적이고 시사적인 풍자는 젊은이들의 호감을 샀다. 이러한 대학가의 마당극은 발전하여 「연우 무대」라는 전문 극단을 낳기에 이른다.

70년대 후반은 연극이 처음으로 흥행상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던 시기로 기억되는 반면, 상업주의의 오염을 염려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졸속한 상업주의는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에 온 경제적 불황 등으로 일단 주춤하기는 했으나 앞으로도 경계되어야 할 것이다. 짧은 서구극 수용의 역사를 감안할 때 한국 현대극이 다양해지고 발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감동적인 공연을 대할 기회는 드문 반면, 타성적이거나 흥행 위주의 얄팍한 공연이 범람하는데,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이미원/서울 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연극학 박사를 받았다. 지금은 경희 대학교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근대극의 기점 문제」,『문학 개론』(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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