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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와 윤봉춘 (통곡하는 무성영화 )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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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와 윤봉춘 (통곡하는 무성영화 )

 

변 인 식

 

 

나운규와 윤봉춘은 한국 영화 개척기의 일꾼이자 실과 바늘과 같은 처지의 참벗이었다. 그들은 가장 불우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에 회령의 신흥 보통 학교 고등과에서 서로 만났다. 그때부터 그들은 소년기와 청년기를 함께 보내면서 독립 운동의 동지가 되어 일제에 항거했고, 설움 많은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에는 늘 서로를 부추기면서 어려운 현실의 벽을 뚫고 나갔다.

나운규와 윤봉춘이 영화계에 뛰어든 때는 우리 나라 영화의 초창기인 1919년부터 1927년까지의 사이였다. 이때는 사진이 팔딱팔딱 움직인다고 하여 영화는 팔딱 사진이라고 불렀고 배우는 광대라고 불렀다. 더구나 영화 배우의 경우에는 영화가 서양에서 들어 왔다고 해서 '양광대' 라고 불렀다.

나운규는 1900년에 태어났고 윤봉춘은 1902년에 태어났다. 이처럼 거의 같은 시대 배경 아래에서 태어난 그들은 한결같이 일제에 저항하는 이른바 반골의 기질이 짙었다. 게다가 그들의 집안 형편도 또한 그들로 하여금 일제와 맞서 싸우도록 했다.

나운규의 아버지 나형권은 구한말의 군인으로서 오늘날의 중위쯤 되는 부교였는데 보급을 맡았다. 그는 슬하에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나운규는 셋째 아들이었다. 본디부터 의협심이 강한 나형권은 이 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자 울분을 참지 못한 채로 고향인 회령으로 내려가서 한약방을 보는 한편으로 뜻이 맞는 동지들을 모아서 독립 투사를 기르는 사민 학교를 차렸다. 이 학교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고 끝내 강제로 문을 닫기에 이르렀는데 나운규는 이 사민 학교에서 보통과를 마치고 신흥 보통 학교 고등과로 적을 옮겨 진학하였다.

한편으로 윤봉춘의 아버지 윤득주는 평양에서 주전을 만드는 기술자였다. 그는 전봉준이 이끄는 갑오년의 동학 혁명에 가담한 것을 계기로 삼아 평양을 버리고 함경 북도 정평으로 옮겨왔다. 뒤이어 전봉준이 관군에 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동학군의 대열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되었고, 따라서 윤득주도 이곳저곳을 방랑하던 끝에 정평땅에 눌러 앉아 버렸던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피를 받았기 때문인지 뒷날 나운규는 그토록 아버지의 가슴에 한을 맺히게 했던 일본 사람들을 통렬히 비판하는 영화 <아리랑>을 만들게 되었고 윤봉춘도 세상을 떠 날 때까지 온 정성을 바쳐 아버지가 가담했던 '동학란'을 주제로 하여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따라서 나운규와 윤봉춘은 흔히 얘기하는 광대로서의 예술인이라기보다 민족애에 사로잡힌 뼈대있는 예술가로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걸었으면서도 여러 가지로 대조되는 삶을 살다가 갔다. 우선 나운규는 천부적인 영화인으로서의 재능과 더불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여성 편력 따위로 허랑된 살다가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로 죽었지만 윤봉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일흔세 해 동안 건강한 삶을 누리면서 이 나라 영화 역사의 산 증인 노릇을 했다.

나운규와 윤봉춘은 거의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더구나 신흥 학교 고등과 시절에는 애국 지사들에게서 민족적인 자각을 할 기회를 얻음으로써 뒷날에 그들이 독립 운동에 직접 뛰어드는 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나운규는 회령에서 일본 헌병과 어떤 연애 사건에 얽히게 되어 화를 입을까봐 신흥 학교를 그만두고 북간도로 달아나게 되었고 윤봉춘도 얼마 뒤에 그곳으로 건너갔다.

북간도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간도 명동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때에 육십만 교포가 살고 있던 간도에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학교라는 명동 중학교밖에 없었다. 그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교과서 공부보다는 군사 훈련을 더 많이 시켰다. 나운규와 윤봉춘은이 학교에 다니면서 북간도 국민회 소속의 독립군에 입단해서 도판부 사건에 전위대로 임명받게까지 되었다.도판부 사건이라는 것은 북간도에 있던 독립군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회령에 있던 경찰서와 수비대를 친 사건이다. 그때에 나운규와 윤봉춘은 재빨리 회령과 청진 사이에 있는 무산령 터널을 폭파하고 전신·전화 시설을 끊는 일을 맡게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소년 시절에 이미 절박한 상황 아래에서 몸과 마음을 닦은 바가 있었으므로 그들이 만든 영화 속에도 그런 상황을 자주 등장시켰다. 이 점에 대하여 윤봉춘은 다음과 같이 나운규를 회고하고 있다.

"운규의 작품은 거의가 박진감이 있다. 아마 그건 백두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두만강의 급류를 보고 자랐고, 또 시베리아의 매섭고 빠른 찬 바람속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윤봉춘의 말마따나 그의 성장 과정 탓인지 실제로 그의 작품 세계는 스케일이 크고 박진감이 있다. 그빡에도 그는 권력이나 금력에 타협하지 않았고 이른바 대가들의 세에도 곁눈질하지 않았다.

나운규는 북간도의 장재촌에서 명동 중학교를 다닐 무렵에 모험을 계속하였다. 곧 교내에서 발간하는 「독립 신문」을 고향인 회령으로 배달하는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한 달에 한두 번씩은 두만강을 은밀히 건너곤 했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 모국에서 터진 만세의 불꽃은 이곳에까지 튀어 와서 명동 중학교에도 검거 선풍이 불었다. 끝내 학교는 문을 닫고 말았고 올데가데 없어진 나운규와 윤봉춘과 김용국 같은 이들은 만주 일대를 방황하다가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때에 나운규는 러시아로 들어가 볼셰비키와 맞서서 싸우는 멘셰비키의 용병이 되어 전투에 참가했는데 뒷날에 그가 내놓은 영화 <풍운아>속에 그 소재가 담겨져 있다.

나운규와 윤봉춘은 다시 서울에서 만나 연희 전문 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이 되었는데 그 해 정월에 고향에서 파견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서 압송당하는 최악의 불운을 당하게 된다. 죄목은 간도 시절에 명동 학교에 다니면서 독립군과 내통해서 앞서 말한 도판부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것이었다. 법정에서 나운규는 징역 2년을, 윤봉춘은 징역 1년 반을 선고받고 청진 감옥에 수감되었다.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른 뒤에 나운규는 고행인 회령으로 갔다. 소년 시절에 고향을 등지고 정처없이 북간도를 떠난 지 거의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나운규의 아버지 나형곤은 아들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윤봉춘도 감옥에서 나와 한동안 중병으로 몸져 누워 생명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북간도 시절에 알던 사람을 만나 그의 소개로 북간도로 건너가 백계 러시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회복하게 되었다. 윤봉춘은 러시아 처녀 마르샤를 알게 되었다. 본디 열정적인 성격인 윤봉춘은 러시아에서 망명해 온 소녀에게 깊이 빠져서 서로 미래를 언약하는 처지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비련으로 애틋하게 끝나고 말았다. 마르샤에게 조선 땅으로 들어갈 만한 입국 지참금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운규는 스물두 살 때에 마침 회령에서 지방 순회 공연을 하고 있던 「예림회」의 안종화와 알게 되었던, 그것이 인연이 되어 뒷날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다음해 가을에 그는 안종화가 있던 부산의 조선 키네마 주식 회사로 찾아 갔다. 처음의 연기 시험에서 떨어졌으나 안종화가 우겨서 입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나운규는 이경손, 주인규, 주상손 같은 이들과 함께 윤백남 감독 집에 묵으며 영화 연구생이 되었다. <아리랑>을 만들기 전까지 나운규는 <운영전>에서 단역인 교군으로, 그리고 <심청전>과 <농중조>에서 시답잖은 역으로 출연했을 뿐이다. 나운규가 <운영전>에 처음으로 출연해서 맡은 역은 대사 한 마디 없는 대역이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기뻐서 고향 친구 윤봉춘에게 벚꽃 잎과 함께 자신의 분장한 사진 한 장을 넣어 그 사연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1929년은 우리 나라의 영화 역사에 길이 빛날 작품인 <아리랑>이 만들어진 해이다, <아리랑>은 나운규가 쓴 첫 시나리오이며 첫 감독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일본인 요도가 세운 조선키네마 회사가 두 번째로 내놓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박해받는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이 담긴 작품이었다. 더구나 이 영화의 주제가인 <아리랑>을 부른 가수 이정숙은 이 노래로써 하루아침에 유명해졌고 '아리랑'이라는 민요는 이때부터 온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다. 나운규는 이 영화의 각본을 이경손이라는 사람이 공책에 낙서해 놓은 '민요가사'에서 암시를 얻어서 만들었다고도 한다.

<아리랑>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국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어느 마을에 영진이란 청년이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가 미친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영진은 동네 사람들의 놀림감이다. 영진을 찾아온 친구 현구는 영진의 누이 동생 영희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못된 지주의 아들이자 일본 경찰의 앞잡이인 기호가 영희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지분거린다. 사람을 분간하지 못하는 영진은 동네 사람들의 따귀를 마구 때리고 다니다가 마침내 지주와 일본 순사까지 때려서 마을 사람들의 소리없는 갈채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에 잔치가 벌어져서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즐기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기호는 아무도 없는 영희네 집에 들어가 그를 덮쳤다. 그 모습을 본 미친 영진은 애인들끼리 희롱하는 것으로 여기고 낄낄대며 박수까지 친다. 이때 마침 현구가 달려와 기호와 혈투를 벌인다. 싸우는 두 사람 사이에 쓰러진 누이 동생과 흥겨운 농악 소리는 영진에게 하나의 환각을 불려 일으킨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사막을 가는데 목이 말라서 쓰러질 것 같다. 마침 그때에 그곳을 지나던 대상들이 그들 앞에서 물을 마신다. 물을 먹고 싶어하는 두 사람에게 대상은 물을 줄 터이니 그 대가로 여자를 달라고 한다. 여자는 사랑을 버리고 대상의 품에 안긴다. 이런 환각을 좇고 있던 영진은 물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환각 속의 남녀에게 분노하며 실제로 낫을 들어 휘두른다. 기호는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피를 본 영진은 제 정신을 찾는다. 그는 현구와 영흰가 행복해지기를 빌며 포승에 묶여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바로 이 대목에서 동네 사람들이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가수 이정숙은 울먹이며 아리랑을 불렀고 그때마다 관객도 울음을 섞어가며 따라 불렀다. 극장 안에 이 노래가 울려퍼질 때에 놀라 자빠질 뻔한 임검순경이 호각을 불어 상영을 중지시켰지만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운규와 단성사의 선전 부장 이구영이 경시청에 불려 가서 '아리랑'이란 무슨 뜻이냐, 가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따위의 심문을 받아야 했고 마침내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금지당했다. 이것을 빌미로 해서 일본 사람들은 영화의 검열 제도를 더욱 강화했다. 2회 공연 때에는 가수가 아리랑을 부르지 않았는데도 관객들이 합창을 해 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민족의 영화 <아리랑>은 서울뿐만이 아니라 이 땅 구석구석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상영되었다.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리랑>의 전국 흥행권을 샀던 임수호는 그때의 흥행수입에 힘입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해방 전까지 흥행계의 왕자로 이름을 들날렸다. 그것만 보아도 그때에 <아리랑>이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이 아니라 영화 기법에서도 이땅의 영화계에 새로운 성과를 가져다 주었다. 세계 영화계에서 몽타주 이론을 개발한 지 얼마 안 되는 때였는데도 나운규는 <아리랑>에 이 수법을 써서 환상적인 심리를 묘사했다. 더구나 절묘한 장면 전환의 수법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애인들이 사막의 대상들에게서 물을 구하는 환상 장면은 침략자인 일제의 그림자를 상징한 것으로서 뛰어난 착상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고양이와 개'로 시작되는 서막은 속박당한 민족과 속박하는 민족의 대립을 암시하고 있으며 주인공 영진을 미친 사람으로 설정한 것도 왜곡된 현실에 대한 철저한 반항 심리의 간접 표현이었다고 볼 수가 있겠다. 따라서 <아리랑>은 말살의 위기에 놓인 한민족의 철저한 저항 정신이 표출된 작품이다. 각본과 감독을 나운규가 맡았고 주연도 나운규였으며 신일선, 남궁 운 같은 이들이 그와 함께 출연했다.

<아리랑>의 성공으로 조선 키네마의 요도는 계속하여 나운규에게 각색과 감독과 주연을 아울러 맡겨서 1926년에는 <풍운아>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영화도 또한 조선 극장에서 13일 동안이나 공연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에는 나운규, 남궁 운, 주인규, 김정숙, 주삼손, 임운학 들이 출연했는데 이로써 나운규의 영화 재능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이 영화에서 나운규는 <아리랑>에 이어 다시 '방랑하는 넋'을 가진 사나이인 '니콜라이 박'이라는 청년을 부각시켰다. 나운규 스스로가 시베리아를 방랑하며 겪었던 체험을 토대로 하여 쓰여진 작품이었다. 물론 권선 징악의 소재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풍운 속에 사는 한 사나이의 굵직한 삶을 솔직하게 그려 준 작품이었다.

1926년 말에 나운규는 <아리랑>과 <풍운아>의 필름을 가지고 고행 회령으로 떳떳이 돌아갔다. 밴드와 변사를 이끌고 회령에 도착하자 윤봉춘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를 맞았다. 윤봉춘은 나운규를 위해 환영간판을 만들었고, 감격에 목메인 환영사도 했다. 그가 도착한 첫날엔 <풍운아>가, 둘째날엔 <아리랑>이 상영되었다. 윤봉춘은 <아리랑>을 본 뒤에 말을 잊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뭉클한 감동의 응어리가 가슴을 답답할 정도로 짓눌렀기 때문이다.

윤봉춘은 나운규의 <아리랑>을 가리켜서 제2의 삼일 운동이라고 불렀다.

"그 형태만 다를 뿐이지 조국을 찾으려는 그 정신은 <아리랑>의 관객에서도 충분히 볼 수가 있었다. 삼일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210만 명에 가깝다고 하는데 <아리랑>을 본 관객은 그보다 더 많다. 재상영을 본 사람까지 치면 우리 나라 전 인구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숭고하고 장엄한 삼일 운동의 가치를 한편의 영화와 비교한다는 것은 망발인 듯도 하나<아리랑>이 삼일 운동의 한 변형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윤봉춘의 이 말 속에는 <아리랑>에 대한 그의 애정이 담뿍 서려있다.

알고보면 나운규의 귀성은 윤봉춘을 영화계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고향 회령에서 교회 일을 보고있던 윤봉춘은 어느 날 나운규로부터 곧 상경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1927년 4월초의 일이다. 나운규는 윤봉춘에게 영화에 출연하라면서 <들쥐>라는시나리오를 주었다. <들쥐>는 부랑들이 못된 부자 영감을 골탕먹이고 영감의 품속에 들어갈 뻔한 소녀를 빼내어 그의 애인에게 돌려주는 얘기이다. 이 영화에서 윤봉춘은 심술 사나운 부자 영감으로 분장하게 되었다. 나운규가 내일 당장 출연해야 한다면서 분장과 표정연습을 해두라고 화장품까지 갖다 주어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촬영은 다음날 아침에 남산 약수터에서 시작되었다. 여한생 신일선과 남학생 주삼손이 눈싸움을 하는 장면부터 촬영되었다. 윤봉춘이 출연하는 장면은 오후에나 촬영할 예정이었지만 영화 찍는 현장을 처음 보는 그로서는 견학삼아 아침부터 열심히 따라다녔다. 윤봉춘의 첫 연기는 중절모를 쓰고 흐니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거닐다가 거지떼와 시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촬영이 끝나자 등허리의 식은 땀을 닦아야 했을 정도로 긴장했다. 그러나 고생 끝에 만들어진<들쥐>는 그런대로 흥행에 성공했고 특히 신인 윤봉춘은 호연했다는 평을 듣게 되어 어깨가 으쓱해졌다.

윤봉춘은 그 뒤부터 나운규와 더불어 <금붕어>, <사랑을 찾아서>, <사나이>, <벙어리 삼룡> 따위에 출연함으로써 영화계에서 기반을 닦았고 1930년에는 <도적놈>이 라는 작품으로 감독까지 겸하게 되었다. <도적놈>은 구두쇠 아버지와 외국유학을 절실히 갈망하는 아들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그린 작품으로서 별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1931년에 윤봉춘은 다시<큰 무덤>을 담독하고 그것의 주연도 맡았다. 그가 나운규와 더불어 북간도에서 유랑하던 때에 직접 눈으로 본 체험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큰무덤>은 일본경찰들이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하여 큰 구멍 속에 묻는 것을 상징하고 있었으나 그때에는 별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넘어갔다.

그 무렵에 나운규는 영화인들뿐만 아니라 그를 아끼는 관객들에게조차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일본 사람 도야마가 제작한 <금강한>이나 <남편은 경비대로>따위에서 악역을 맡아서 출연했기 때문이다. 그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윤봉춘마저도 이 일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로 여기고 냉혹한 비판을 했다. 그것은 윤봉춘이 나운규를 너무나 아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실이 어렵게 되었다 하여도 그토록 빨리 나운규가 일제에 꺾이리라고는 생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운규는 <아리랑>은 말할 것도 없고<벙어리 삼룡>과 <오몽녀>와 같은 작품을 아꼈다고 한다. <오몽녀>는 나운규가 실의에 빠졌다가 재기했던 작품으로서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벙어리 삼룡>은 흥행에 참패해서 늘 그의 마음을 언짢게 했던 모양이다. 나운규는 <오몽녀>를 끝으로 해서 다시는 작품 활동을 못했으며 1937년에 평생의 친구인 윤봉춘을 곁에 둔 채로 서른 일곱 해의 짧은 삶을 끝내고 말았다. 이처럼 비록 그의 삶은 짧았으나 그가 남긴 예술은 오래도록 우리들 가슴에 넓고 깊은 감동의 우물을 만들었다.

1940년에 조선 총독부는 조선 영화령과 조선 영화 주식 회사 및 조선 영화인 협회를 만들어 이 땅의 영화인의 영화 제작 행위를 마비시켰고 따라서 많은 영화인들은 생존을 위해서 일제의 어용 단체에 협조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윤봉춘이나 이규환 같은 몇몇 영화인들은 끝끝내 그들의 유혹에 말려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긍지와 예술가적인 양심을 지킨 채로 해방을 맞았다. 윤봉춘은 일제 말기에 일본 관헌의 주목을 받게 되자 경기도 양주군에 은둔하며 아내와 함께 산곡 학원을 경영하였다. 그는 그 어려운 시절에도 남몰래 학생들에게 우리글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양주 경찰서에 불려가서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한글을 못 가르칠 만큼 분위기가 악화되었을 때에 곧 일본이 망하게 되어 일본말만 가르치는 굴욕은 면할 수가 있었다.

해방이 된 뒤에 윤봉춘은 최인규의 <자유 만세>에 출연한 것을 비롯하여 <삼일 혁명기>, <윤봉길 의사>, <애국자의 아들>, <유관순>따위를 잇달아 만들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성불사>, <처녀별>, <논개>, <다정도 병이던가> 같은 작품을 발표했다. 더구나 윤봉춘은 <유관순>을 세 번이나 영화화했으며, 일생을 통해 그 주제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 때문에 <유관순>에는 제 아내와 자식들까지 몽땅 출연시켰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운규와 윤봉춘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참벗이었다. 다만 한 가지의 한스러움은 짧은 삶을 섬광처럼 살다 스러진 나운규가 변절함이 없이 오래 살아 남아 윤봉춘과 더불어 늘그막까지 한국 영화를 밀고 나가는 수레바퀴가 되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변인식/ 신일고등학교 교사이며, 저서로는 '영상미의 반란', '한국영화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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