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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음악의 모습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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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음악의 모습

 

백 병동

제 2 차 대전 이후 현대 음악은 이제까지의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변모와 혼돈을 보이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종래의 음악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는 듯한 전위적인 음악, 그리고 실험적인 시도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전후의 이러한 음악 창작 활동은 그 다양성만으로 보면 과거의 음악사 전체에 필적한 만하거나 이를 능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후의 이러한 다양한 변모는 결코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서 전후의 변모를 예고하고, 이를 선취하려는 듯한 시도가 유럽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제 2 차 대전 이후의 음악을 현대 음악이라 자칭하고 이에 앞선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두에 걸친 음악을 근대 음악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도 이에 따르기로 한다.

근대 음악은 제 1 단계는 연대적으로 보면 1890년에서 제 1 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1918년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은 낭만주의 음악의 해체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음악 어법에의 탐구가 적극적으로 진척되었다.

 

낭만파 음악은 기법적으로는 실제로 고전파에서 완성된 선율법이나 화성법, 주제 작법, 형식, 악장 배치, 악기법 등을 거의 전면적으로 답습하고 있었지만 초이성적인 것이나 반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낭만주의 정신으로 그 통일성이나 질서를 서서히 붕괴시켜 나갔다.

특히 17세기 이후 거의 모든 서양 음악의 어법상의 전제로 되어 있던 조성과 기능 화성법은 이미 바그너 음악에서 과도한 반음 용법을 사용함으로써 붕괴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어법을 탐구, 확보하는가가 새로운 이 시대의 과제였던 것이다.

이 시대에 자신의 어법을 발견한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드뷔시, 스크리아빈, 쇤베르크를 들 수 있다.

드뷔시의 음악은 본래 회화의 양식에서 유래한 인상주의라고 불리는데,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점으로는 시의 상징주의와도 관계가 있다. 그는 색체로서의 음향 유동이야말로 순수한 음악 세계라고 생각했고 풍부한 색채감을 추구하기 위해 기능 화성법을 버리고 화음을 개개의 독립된 음향으로 쓰는 데 주력했다. 또한 장․단조의 조성 이외에도 중세의 선법이나 이국적인 5음 음계, 온음 음계 등을 활용했다. 이 양식은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서 확립되는데, 이 곡은 문자 그대로 현대 음악의 전주곡이 된 셈이었다.

스크리아빈은 신지학에 접한 종교 체험과 예술과의 합일점을 꾀했고, <법열의 시>, <프로메테우스> 등의 작품을 통해 매우 독특한 어법을 창시했다. 이들 곡에서는 신비화음을 비롯해서 새로운 구성의 화음과 음계가 악곡의 기초로서 활용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기법은 후에 메시앙의 한정된 이조의 선법이나 쇤베르크의 음열 작법에 앞서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쇤베르크는 빈의 작곡가로서 당초 바그너와 브람스의 어법의 융합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그너의 음악에서 나온 후기 낭만파의 반음계 어법을 구극점까지 밀고나갔고 동시에 브람스의 음악에서 유래하는 청저한 음정 동기의 전개, 변주와 대위법적 주제를 활용한 결과, 조성과의 유대를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08년경 무조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무조 음악은 당시 독일에서 일어났던 자아 영혼의 주관적 표현을 희구한 반자연주의, 반인상주의의 예술 운동과는 다른 의미에서 표현주의 음악이라고 불리었다.

 

이밖에 일찍부터 반 독일 음악의 자세로 독자의 경지를 개척한 사티(사티는 드뷔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와 드뷔시 영향에서 출발한 라벨 또는 스트라빈스키 등이 있다. 특히 러시아의 스트라빈스키는 초기의 3대 발레 음악에서 포비즘이라고 할 수 있는 원시적인 리듬과 색채가 밀착한 춤곡을 만들었다.

 

근대 음악의 제 2 단계는 1918년에서 제 2 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앞 시대에 대한 반동이면서 동시에 앞 시대에서 획득했던 음악 어법을 정리, 질서화한 시대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양대전 사이의 짧은 휴식 시대라고 할 수 있고, 음악 표현에서도 역사주의적인 현대를 주장하기보다는 동시대적인 의식을 구가한 것이 적지 않다. 그러나 30년대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소련의 스탈리니즘 등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무엇인가 형상만 남아 있는 듯한 신고전주의적 경향이 조장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역사주의적인 현대를 주장한 것은 쇤베르크의 음열주의(12음 음악)였다. 조성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무조에 도달한 쇤베르크는 1921년 무조를 관리하는 방법으로서 한 옥타브 안에 있는 12개의 음을 일정한 순서로 나열하여 이 음열을 기초로 하여 악곡을 구성하는 방법을 만들어 냈다. 이 방법은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고전적인 미적 원리에 힘입었고 또한 음악적으로 바하의 평균을 채용 이래의 독일, 오스트리아의 음악적 전통을 총괄했다고 볼 수 있다.

쇤베르크는 이 기법에 의해서 18∼19세기의 대표적인 악곡의 종류를 차례로 작곡하였다. 또한 그의 뛰어난 두 사람의 제자 베르크와 베베른은 다시금 이 기법을 개성적으로 응용하였다. 특히 베르크는 극적 표현의 강화를 위해서 그것을 활용하였고 베베른은 이 어법에 추상적이고 엄격한 새로운 궁성주의적 음악을 개척하였다.

마찬가지로 진지한 역사 의식을 가지고 독자적인 음악 어법을 체계화한 대표적인 작곡가로 바르톡이 있다. 그는 음악의 보편성을 재획득하기 위해 조성 체제의 전제에서 해방된 민속 음악의 어법을 기초로 해서 다시 전통적인 미적 원리인 황금 분할 형식 구분 등을 채용했다.

그밖에 음악의 보편성을 강하게 지향한 사람으로서는 창작의 근원에 가톨리시즘을 놓고 출발한 메시앙을 들 수 있다. 그는 유럽 음악의 어법뿐 아니라 인도의 리듬법, 가멜란 음악(동남아 음악)의 악기법이나 새의 노래까지 자신의 음악 어법 속에 도입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한편 동시대적인 의식에서는 스트라빈스키나 프랑스의 6인조(오릭, 뒤레, 오네게르, 미요, 폴랭, 타이유페르)의 재기에 넘친 신선한 음악이나 힌데미트, 바일 등의 실용 음악을 전제로 한 음악이 탄생했다.

이들은 신고전주의 음악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진지한 역사 의식은 빈약했고 오히려 19세기적인 과중한 역사주의를 거부하여 18세기의 음악에서 볼 수 있는 현실적인 음악의 효력을 부흥시키려는 점에 특색이 있었다. 그러므로 반드시 고전파의 양식에 구애되지 않고 이 시대 초기에 유향한 재즈나 팝송 등의 양식에도 관련을 보인 것이다. 특히 이러한 여러 가지 음악 양식들을 오브제처럼 취급한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역사주의의 색채가 짙은 쇤베르크와 날카로운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음악관의 성격을 학문적으로는 쇤베르크는 통시적(diachronic)이며 스트라빈스키는 공시적(synchronic)이라고 평가한다.

동시대적 발상을 중요시한 이들 작곡가의 어법은 범 전음계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반음계법을 피하고 있다. 체계화에의 의욕은 힌데미트 이후에 별로 볼 수 없고 매우 직관적인 비그능적 화성법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이들의 음악은 작품으로서 객관적으로 정착, 기보되어 있지만 결함임과 동시에 작곡가의 재기가 솔직하게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이기도 하다.

그밖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약은 음악적으로는 유럽적 모더니즘을 일소하고 고전적 질서의 회복을 꾀할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도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는 국가의 지시대로 19세기의 음악 양식을 기본선으로 두면서 슬라브 음악 고유의 음계법과 박자법 또는 대위법의 원시적 형태인 헤터로포니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개성적인 작품을 낳았다.

또한 뛰어난 음악 작품으로 결실을 맺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타악기주의의 음악이나 미분음 음악, 전기 악기 등의 개발 등 제 2 차 세계 대전 후의 현대 음악의 동향에 직결되는 선구적인 시도도 이 시기에 때때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타악기주의 음악이 음향 세계의 확장을 희망한 바레즈, 동양에 관심을 기울인 케이지, 또는 고대 음악의 생명력을 제창한 올프 등 다체로운 성격의 음악과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제 2 차 대전 이후의 현대 음악도 단계적으로는 1950년대까지와 그 이후의 2기로 나누어진다. 제 1 기의 음악은 역사 의식을 갖지 않았던 음악, 다시 말해 신고전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을 배격하고, 보다 체계화되고 분명한 역사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음열 음악을 출발점으로 하여 근대주의 음악 사조를 뿌리부터 뒤집어 놓은 사상이 등장한 시대이다.

제 2 차 대전이 끝난 이듬해 여름, 다름쉬타트에 젊은 작곡가들은 먼저 전시대에 가장 선명하게 활동하고 있던 힌데미트나 스트라빈스키를 연구의 주제로 삼았지만 마침내 12 음악의 전도시라고 볼 수 있는 레이보비츠의 지도 아래서 전시대에는 하나의 악파의 어법에 지나지 않았던 12음 악파 음악에 적극성을 표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12음악 악파 음악 중에서도 가장 순수주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베베른의 음악 이념에 대한 철저한 탐구야말로 새로운 세대의 사명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전위의 3총사라고 불리고 있던 노노, 불레즈, 쉬톡하우젠은 12음 음악의 음열 어법을 다시 확대해 나갔다. 그 중에 쇤베르크의 사위로서 쇤베르크가 만년에 보여준 사회 참가 음악에 강한 의욕을 보였던 노노는 별개로 하더라도 이지적이고 순수한 음악 사고를 중요시하던 불레즈와 쉬톡하우젠은 음높이의 음열뿐 아니라 음의 길이, 강도, 색채에까지 음열적인 관계를 철저히 관철시킨 전 음열주의(total serialism)라고 하는 전면적 음열의 음악으로까지 나아갔다. 불레즈의 1951년 작품 <구조 structure>나 쉬톡하우젠의 같은 해의 <크로이츠슈필 Kreuszpiel> 등은 이 극점을 이루는 작품이다.

이러한 작곡 기법의 진보를 꾀한, 근대주의적인 그들의 시도와 함께 현대 과학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서양 음악의 미디어(media)상에서의 진보를 꾀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1952년에 공개된 무직 콩크레트(Music Concrere)와 1950년에 설립된 쾰른의 전자 음악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다.

뮤직 콩크레트, 즉 구체 음악은 여러 가지 음향을 테이프로 녹음하여 이를 변질시켜 섞어서 하나의 음악 작품으로 다듬어 올리는 방법이다. 악음에 의한 추상적인 구상에서 연주라고 하는 구체적인 행위로 나아가는 기존의 방법이 아니고 현실음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소재에서 추상적인 순수 음악을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 발상의 역전의 이룬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이는 차츰 전자 음악으로 흡수되었다.

초기의 전자 음악은 전자적 음의 원천에 의존하는, 바로크 이래의 독일 음악의 정신 아래서 만들어진 음악이었지만, 차츰 구체적 음향도 전자음과 혼합해서 사용되게 되었다.

구체 음악이나 전자 음악은 작곡의 전면화․절대화를 전제로, 말하자면 작곡의 소재인 음과 음향의 범위를 넓혀 나가고 또 한편으로는 소재로서의 음의 패러미터(paramerer)에 분할되어 나가는 것이다.

음향으로서의 음악의 진전을 꾀하는 시도는 발상을 바꾸면서 펜데레츠키나 리게티의 톤 클러스터(tone cluster)의 음악, 또는 크제나키스의 뮤직 스토캐스틱(music stochastic)으로 마지막 모습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적인 '작곡가를 위한 음악'을 부정하면서 음악 작품의 전통적 개념으로 돌아 가려는 움직임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음향을 디자인화한게 음악일 수 없다는 것이며, 예술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 즉 사고의 과정을 제 1 의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음악 예술의 예술로서의 개념에 중점을 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동양 사상을 연구한 케이지(그는 또한 사티의 반골 정신, 우상 파괴자의 자세를 계승하고 있다.)가 1951년의 <Imagenary Landscape 제 4번)과 1952년 유명한, 악음의 기보가 없는 <4분 33초>의 공연에서 명백하였다. 전자는 역에 의해서 연주가 정해진다는 것이고 후자는 피아니스트가 무대상의 피아노를 향하고 있는 시간 동안, 청중은 일상음을 음악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는 아이디어였다.

케이지 아이디어는 그 주변의 작가 휄트만, 브라운 등에 의해서 하나의 유파를 만들었다. 이 악파는 소재가 아니라 새로운 작법(우연성)에 의해서 유럽의 전위 음악가에게도 차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전후의 제 2 단계는 유럽에서 출발하는 전위 사고와 아메리카의 실험적 사고가 혼합해서 후반부터 통일되기 시작하였고, 비교적 안정된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에는 음향 음악으로서 청중으로 하여금 청각적 환상을 일으키게 하는 톤 클러스터(음군) 음악과 뮤직 스토캐스틱이 등장한다.

토 클러스터는 밀집된 음군의 변화에 의한 음악으로 정통적인 미디어에서 전자 음악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음향을 만들어 내서 매우 인기있는 어법이 되었다. 연대적으로는 펜데레츠키의 1960년대 작품 <히로시마의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와 리게티의 1961년 작품<atmosphere>가 이 양식의 최초의 중요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뒤 이러한 경향은 음향층의 유동에 위한 음층(kalnangiache) 음악으로 발전한다.

뮤직 스토캐스틱은 악곡 구성에서 구체적인 음향 형태를 만들어 내는 개개 음의 분포나 성질을 수학적으로 산출하여 정한다는 것으로 1956년 이래 크제나키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이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 많은 성과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전위 음악 계열의 새로운 어법 이외에 케이지의 우연성의 작법을 자신의 전위 어법과 결부한 쉬톡하우젠이나 불레즈의 작업도 ꣁ놓을 수 없고, 계열로 정리 한다면 순수한 음향이지만 컨스트럭션의 아이디어에 절대적 우위를 놓는 미니멀 음악도 등장했다. 한편 케이지는 우연성 음악의 대표적인 작법인 해프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였다. 이것은 간단한 지시에 의해서 행위를 매 순간마다 자발적 창조에 의해서 선택해 나가는 표현 형태로 앞에서 예로 든 <4분 33초>도 이에 속한다.

이러한 해프닝은 1960년대에는 인터 미디어, 멀티 미디어 등으로 불리었고, 음악·미술·무용·영화 등 예술의 각 장르의 경계를 허물어뜨려 융합한 종합 예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또 여기에는 전자 테크닉과 결부된 생 연주의 전자 음악(live electronic music)도 탄생했다. 또 격동기였던 1960년대 정치와 관련해서 전위 음악, 실험 음악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사회 참여의 문제도 다시 제기되었다.

드뷔시, 베베른 이후의 음악 순수주의와 케이지 이후의 사고 과정 우위주의의 양자를 합병하고 다시금 쇤베르크의 '표현으로서의 음악'과 중기 스트라빈스키 '취향으로서의 음악'을 촉매로 하여 이른바 전, 근현대 음악 양식을 절충화하는 움직임이 1970년대 후반에 일어나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근대, 현대 음악을 이전의 음악사처럼 일정한 양식이나 음악관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바로크 음악이나 고전주의, 낭만주의 음악에서와 같은 음악사적 정리가 적절히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시 이외에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창작·연주에 한정되지 않고, 음악의 향수까지를 포함해서 근대, 현대 음악은 음악 행위의 주체성 확립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서양 음악의 척도, 가치 기준은 붕괴될 정도로 다양해졌고, 그러한 결과 이를 비평, 평가하는 것은 결국 실존적인 자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주체성을 전제로 한 음악은 정신사적으로 보면 고도로 조직화, 편리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 해방과 자유를 희구하는 데서 생선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낭만주의 정신에서 해방, 자유에의 희구에서 볼 수 있는 자아 숭배나, 자연 신비주의, 형이상학적 도취, 국민적 메시아니즘이라고 하는 공상적 도피적 정신을 단절한 날카로운 주장이었다는 점에 특색이 있고, 그 때문에 듣는 편에서도 낭만주의 음악과 같은 유사 종교적인 수용 방법은 용인되지 않는 것이다.

또 우리 나라의 작곡계의 경우 전문적인 창작 활동은 대개가 6·25전쟁 이후의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의 창작 활동은 다름쉬타트 시대부터 이미 세계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만일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현대 음악을 든다면 1970년대 이후의 모든 어법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백병동/서울대학교 작곡과 교수이며, 저서로는 '화성학','교양의 음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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