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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과 예술에 관한 명상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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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과 예술에 관한 명상

 

김흥규

 

 

예술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생활 주변에는 여러 가지 예술작품들이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감명 깊게 읽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은 문학이면서 예술이다.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 조각품, 도자기도, 연극, 영화, 무용도,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장엄한 교향악, 구성진 민요, 그리고 변진섭, 영수경의 노래도 모두 예술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기는 예술이 있는 한편, 많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예술이 있다. 수천 년 전부터 전해오는 예술이 있는가 하면 기발한 착상을 발휘하여 길거리에서 즉흥적으로 벌이는 실험적 전위 예술도 있다.

그러면 이 여러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예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그것은 또 어떤 성질과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갖가지 예술 작품을 만들어 왔으며, 예술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얻는 것일까?

이 질문들은 모두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자칫하면 우리를 난해한 개념들의 수렁으로 몰아넣게 된다.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불꽃'이라는 비유를 통해 예술의 성질과 작용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럼 뜻에서 우선 이렇게 말해 본다.

'예술은 불꽃이다. 그것은 여러 모로 불꽃과 닮았다.' 밝은 전등이 있는데도 우리는 가끔 촛불이 겨고 싶어진다. 방과 마루의 전등을 모두 끄고 식탁위에, 혹은 책상머리에 촛불 한 자루를 켜 놓고 가족, 친구들과 마주 앉으면 무엇인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이루어진다, 함께 앉은 사람들의 얼굴은 어둠을 배경으로 떠올라서 좀더 다정하다, 촛불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물들은 모두 어둠에 묻히고, 함께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촛불의 불꽃이 만들어 주는 동그란 빛의 공간으로 모여든다. 그 동그란 공간이 세계의 중심이고, 함께 앉은 사람들이 서로를 더 정답게 느끼도록 하는 만남의 자리가 된다. 그래서 뜻밖의 정전이 있는 날이면 가족이나 친구가 더 가까워진다.

모닥불과 횃불은 더 큰 불꽃이다. 그럼 만큼 그것들은 촛불과는 또 다를 분위기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두운 마당이나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은 밝은 조명 아래서보다 깊은 공동체적 연대 의식을 느낀다. 촛불이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 주는 데 비해 횃불은 마음을 뒤흔들어서 정서적으로 들뜨게 만든다. 장작 더미 위에서 일렁거리는 불꽃은 그 어떤 화려한 춤보다 아름답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밤 하늘에 화려하게 터지는 폭죽의 불꽃이 있다. 섬광의 꼬리를 끌며 솟구쳐 올라 갖가지 빛깔과 크기로 터지는 불꽃을 보며 사람들은 탄성을 지른다, 어떤 폭죽은 한 번 터져 나간 알맹이들이 다시 터져서 찬란한 불꽃의 동심원들을 허공에 겹쳐 놓는다. 그 휘황한 빛들이 주는 실용적 소득은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불꽃놀이 보기를 좋아한다. 아름답게 타오르고 터지는 불꽃들을 보노라면 마음이 후련해지기도 한다.

이 세 종류의 불꽃들이 제각기 다름 느낌을 주는 것처럼 예술도 분야와 종류 및 경향에 따라 저마다의 특징이 다르다. 하지만 그 여러 가지 예술이 공통적으로 지닌 속성이 있다. 그것을 '실용적 가치를 넘어선 즐거움과 아름다움' 이라고 일단 요약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촛불, 횃불과 폭죽의 불꽃은 예술과 비슷하다. 단지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촛불과 횃불보다 전등, 플래시 따위가 더 실용적이다. 폭죽은 조명을 위해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밝은 형광등이 주지 못하는 특별한 느낌, 분위기, 감정, 멋과 아름다움이 이들 불꽃에 있음을 안다.

실용적 가치를 넘어선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원하는 것은 아마도 사람만이 가진 특징인 듯하다, 생선 구이를 식탁에 내놓더라도 아무 접시에나 되는 대로 올려 놓은 것보다는 알맞은 크기의 깨끗한 접시에 구운 생선을 단정하게 놓고 그 위에 잘 어울리는 빛깔의 양념과 고명을 얹어 놓은 것이 훨씬 보기에 좋고 먹음직스럽다. 솜씨 있는 목수가 만든 장롱은 튼튼할뿐 아니라 집안의 분위기를 한결 아늑하게 한다. 이런 현상들 속에 사람의 예술적 욕구가 이미 깃들어 있다.

예술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모두 '솜씨, 기술'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한자어 '예술'의 '예'와 '술'은 모두 솜씨, 재주, 숙련된 방법 등을 뜻한다. 그리스 말의 '테크네'. 라틴어의 '아르스(ars)',영어의 '아트(art)', 독일어의 '쿤스트(kunst)'도 좋은 솜씨와 기술을 뜻하는 말이었고, 아직 그런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의 또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로서, '사람의 솜씨에 의해 훌륭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특질을 발견하게 된다. 좋은 경치를 가리켜 '신의 예술' 이라고 말하는 수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다. 예술이란 사람의 창조력에 의해 잘 만들어진 물건이나 행위를 가리키며, 그런 뜻에서 자연과 구별된다.

예술은 또한 학문적 지식이나 이론과도 구별되는 속성을 지닌다, 지식, 이론은 세상의 여러 현상들을 개념과 논리의 체계로써 설명하고자 한다. 학자들은 하나하나의 사물 자체보다는 그것들을 규정하는 원리라든가 법칙을 발견하는 데 관심을 둔다. 다시 말해서, 지식, 이론은 사물과 경험을 추상화하는 경향이 많다. 반면에 예술은 구체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만들거나 전달하는 활동이다. 예술은 이런저런 원리의 체계 를 세우기보다 생생한 경험을 제시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함께 느끼고 상상하며 생각하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둔다.

위의 설명을 간추리면 예술의 기본적 특질이 드러난다. 예술이란 (1)실용적 가치를 넘어선 즐거움과 미적 효과를 주요 목표로 삼아, (2)사람의 상상력과 솜씨에 의해 훌륭하게 만들어진 것으로서, (3)구체적인 경험, 느낌, 상상, 감정에 주로 호소하는 창조물 및 창조 행위라 할 수 있다.

예술적 가치와 실용적 가치

예술이 실용적 가치를 넘어선 즐거움과 미적 효과를 추구한다면, 실용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예술적 가치와 실용적 가치가 아주 대립적인 것처럼 생각하다, 그런 방향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아가면 예술 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론까지도 나오게 된다. 이들에 따르면 예술은 일체의 실용적 관심을 떠나야 하며, 실용적 가치에 치우친 예술은 좋은 예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론은 잘못된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 보면, 원초적인 단계의 예술의 모두 생활상의 실제적 관심과 필요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고대인들이 그린 동굴 벽화는 사냥의 성공적인 수확을 기원하거나,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등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집단적인 노동을 한다든가 축제를 벌일 때에는 함께 힘을 모으고 신명을 돋구는 노래를 불렀으며, 신을 예찬하기 위해서 춤을 추었다. 고대인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향로라든가 인형은 대개가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연극은 농업 생산을 주관하는 신이나 위대한 조상의 업적을 행동으로 모방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확인된다. 예술이 실용적 가치 이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실용적 가치를 감싸안으면서 그 이상의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이루고자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예술의 종류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예술의 종류는 나누는 기준을 무엇으로 삼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 분류가 있으나, 기능상의 특징을 을 중심으로 보면 응용 예술(실용 예술)과 순수 예술로 구분된다. 건축,공예,장식, 예술, 디자인은 전자에 속하고, 음악ㅗ무용ㅗ문학ㅗ그림ㅗ연극 등 나머지는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인류 문명이 상당히 발달한 시대에 와서의 일이고, 원초적인 단계의 예술은 대부분이 어떤 다른 목적에 종속된 응용 예술이었다.

그러던 것이 문화가 발달하면서 실용적 가치에 부수적으로 덧붙어 있던 예술적 요소가 점점 성장하면서 예술의 독자적 영역이 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가들은 사냥이나 종교적 목적을 떠나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고, 신과 영웅을 예찬하기 위해 시를 읊던 시인들은 좀더 다양한 경험, 생각, 감정들을 노래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이 여러 부문에서 진행된 결과 18세기 무렵의 유럽에서는 종래의 예술(art)이라는 말에서 기술이라는 뜻을 제외한 새로운 개념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 (fine arts)'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응용 예술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순수 예술이다.

하지만 실용적 가치를 떠난 예술이라 해도 그것이 사람의 체험, 상상과 욕망, 감정, 느낌을 표현함으로써 삶에 이바지한다는 기본적 기치마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목적에 매이지 않고 사람의 절실한 표현 욕구나 심원한 정신 세계를 작품에 담음으로써 예술은 더욱 소중한 삶의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의 이러한 성질을 가리켜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무관심의 만족(das interesselose Wohlegefallen)'이라 했다. 이때의 무관심이란 특정한 실용적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만족이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넉넉하게, 새롭게 하는 심미적 효과를 이룬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칸트가 말한 무관심이란 인간의 삶과 이 세계를 폭넓게 바라보고 깊이 느끼는 '더 큰 관심'에 해당한다고 해석해야 마땅하다.

예술의 갈래

위에서 순수 예술과 응용 예술이라는 분류를 잠시 언급했지만, 예술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런저런 분류를 다 늘어놓을 필요는 없으나, 다음의 몇 가지 분류는 예술의 성질과 올바른 감상을 위해 참고할 만하다, 예술은 우선 공간 예술과 시간 예술로 나눌 수 있다. 회화, 조각, 건축, 공예는 공간 예술이고, 음악,무용, 문학,연극,영화 같은 것들은 시간 예술에 속한다. 공간 예술은 작품이 일정한 공간을 통해 표현되어 정지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들이고, 시간 예술은 시간적 흐름 속에서 앞부분이 사라지고 뒷부분이 나타나는 연속적 흐름으로 실현 되는 것이다. 가령 연극의 경우 제 3막을 보고 있는 관중에게 이미 지나간 제1,2막은 기억 속의 사실로만 존재하며, 제 4막은 미지의 사실로 불확실성 속에 놓여있다.

음악을 듣거나, 소설ㅗ영화를 감상할 때에도 우리는 작품 전체를 동시에 접할 수 없고 오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체험을 엮어 가게 된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중간이나 끝에서부터 보면 별로 재미가 없다. 그 이유는 결말을 이미 알아서 김이 빠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더 근원적으로 따져 보면 작가가 설계한 '예술 체험의 시간적 흐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시각 예술, 청각 예술, 언어 예술이라는 분류도 있다. 공간 예술은 모두 시각 예술이며, 음악은 청각 예술, 문학은 언어 예술에 속한다. 그러면 무용, 연극, 영화, 비디오 예술은 어디에 속하는가? 무용의 몸짓은 시각적이지만, 그것과 어울린 음악은 청각적 요소이다. 연극, 영화의 경우에는 이 두 요소와 함께 등장 인물의 대사라는 언어적 요소까지 포함된다. 비디오 예술 역시 시각, 청각, 언어를 다양하게 쓸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종합 예술 또는 혼합예술이라는 네 번째 부류를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음악 중에서도 노랫말이 있는 성악은 문학적 요소가 포함된 혼합성을 지니며, 판소리와 오페라는 여기에 연극적 요소가 덧붙여진 것이다.

위의 분류들보다 좀더 널리 통용되는 일반적 구분은 매재, 즉 표현의 재료에 따라 예술 갈래를 나누는 것이다. 음악, 미술, 문학, 연극, 영화, 무용이라는 낯익은 이름들이 이에 속한다. 이 여러 예술 부문은 물론 더 잘게 나누어 볼 수도 있다. 음악은 성악, 기악으로, 미술은 그림,서예,조각,건축,공예,디자인 등으로, 문학은 시,소설,희곡,수필로 세분하는 등의 분류가 그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분류는 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유익한 도움을 줄 수도 있으나, 그 복잡한 이름과 분류 체계를 반드시 다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잡다하게 나열되는 명칭에만 관심을 쏟다 보면 정작 중요한 예술 작품의 체험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다.

예술갈래의 기계적 구분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이유는 현대 예술에 있어서의 장르 혼합 및 다양한 실험에서도 확인된다. 예술의 종류 구분에 대한 태도는 시대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대체로 고대, 중세에는 예술의 여러 갈래들이 저마다의 고유한 원리와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을 한데 섞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예컨데, 음악과 미술은 서로 다른 감각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결합이 불가능하며, 비극과 희극은 같은 연극에 속하지만 지향하는 바와 성질이 판이해서 이들을 혼합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이 동물과 식물을 만들고, 동물은 다시 들짐승, 날짐승 등으로 나누어 만든 것처럼, 예술 갈래는 자연의 원리가 규정해 준 일정한 질서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정 관념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무너지게 되었다. 예컨데, 근대인들은 인생의 참모습 속에 비극적인 것과 희극적인 것이 공존하므로 이를 반영한 '비희극(悲喜劇, tragic-comedy)'도 당연히 존재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20세기에 와서는 갈래 사이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실험이 더욱 많아졌고, 전위적 실험 예술에서는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시각 영상과 음악 및 연극적, 문학적 요소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 같은 것이 그 좋은 본보기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술의 갈래란 결국 길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태초부터 길과 길 아닌 것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서 그 발자국이 겹쳐진 자리가 길이 괸다. 이미 길이 만들어져 있어서 그 위로 가는 것이 좋을 때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쪽을 선택한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이미 나 있는 길을 통해서 갈 수 없는 곳을 가보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고, 그래서 황무지나 가파른 언덕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 결과 그들이 무엇인가 새롭고도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 자취가 또 새로운 길이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예전부터 있던 길이냐 아니냐 하는 시비가 아니라, 그 길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의 문제라 하겠다.

영혼의 여러 가지 불꽃

예술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가장 손쉬운 해답은 '미(美)'또는 '미적 쾌감'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모든 예술이 추구한다는 그 미란 어떤 것일까? 가령 미술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아름다운 여인이나 예쁜 꽃을 그린 그림은 늙은 어부나 부서진 건물의 그림보다 더 예술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씨 고운 사람들만이 등장하여 마음 흐뭇한 사건이 벌어지는 연극은 악한, 사기꾼, 정신 병자가 많이 나오는 시끄러운 연극보다 예술적으로 더 아름답다고 해야 할 것인가? 실로폰은 소리가 꽹과리 보다 고와서 듣기에 쾌적하므로 더 예술적인 악기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예술이 추구하는 미적 쾌감이란, 곱고 예쁜 것에서 느끼는 쾌적함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예쁜 소녀의 그림보다는 주름살이 깊이 패인 늙은 어부가 낡은 그물을 깁고 있는 그림이 더 감동적일 수 있다. 선과 악을 간단히 구별할 수 없는 여러 인물들이 뒤얽혀서 격심한 갈등이 전개되는 영화가 동화처럼 고운 이야기를 담은 영화보다 더 큰 감명을 주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런 사실들은 예술의 미라는 것이 '단순히 보고 듣기에 쾌적한 것'이 아닌, '우리의 삶과 이 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 체험'을 생생하고 도 감동적인 방법으로 전해 주는 데서 우러나는 특질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의 미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 자연, 사회에 대한 통찰과 그 표현의 탁월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불꽃의 비유를 더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다시금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의 미적 효과는 촛불과 같은 경우도 있고, 횃불이나 폭죽 같은 경우도 있다.

어떤 종류의 예술은 촛불처럼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자기 자신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게 한다. 때로는 세상의 일들로부터 잠시 떠나 혼자만의 내면 세계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도록 해 주기도 한다. 음악에 견주자면 조용한 실내악이요, 그림이라면 정물화나 고요한 산수화, 문학으로는 명상적 분위기의 서정시 같은 예술들이다. 또 어떤 예술은 횃불이나 모닥불처럼 더 넓은 범위를 비추면서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모으고 그들의 집단적 공감과 움직임을 북돋운다. 시골 마당에서 흥겹게 울리는 농악 소리, 사회적 갈등을 무대 위에 포착한 연극, 우리 나라 근대사의 흐름을 웅대한 규모의 이야기로 엮어낸 박경리의 장편 소설 『토지』같은 작품들을 그 예로 들 만하다.

그런가 하면 밤 하늘에 터지는 폭죽의 불꽃처럼 꼭 무엇을 비추기보다 그 불꽃의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예술도 있다. 이런 예술 작품은 인생의 어떤 모습이나 문제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불꽃의 다채로운 어울림처럼 빛깔, 소리의 균형,조화,긴장을 통해 새로운 감각과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추상미술이 그러하고, 기악이 또한 그러하다.

세상에 있는 갖가지 불꽃들이 다 제 나름의 쓸모와 아름다움을 지니듯이, 예술의 미적 효과 또한 어느 한 가지만을 절대화할 수는 없다. 예술가와 예술 감상자는 물론 저마다의 예술적 개성과 취미를 가지기 마련이다. 시대 상황이나 관심에 따라 예술의 어떤 속성이 더 강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의 본래적 성질은 그러한 개인적,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그 이상의 것을 지향하는 넉넉함을 필요로 한다.

수많은 종류 불꽃들이 인류의 삶과 함께 새로 생겨나고, 퍼지고, 이어져 왔다. 예술 역시 그와 비슷하게 여러 가지 몫을 담당해 온 '삶의 불꽃'이다. 그것은 사람의 내면 세계를 비추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공동체로 묶기도 하며, 때로는 사회적 모순을 밝히는 횃불이 되고, 감격과 환희를 터뜨리는 눈부신 무늬가 되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불씨를 훔쳐다가 인류에게 주면서부터 세상에 불이 생겨 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술의 불꽃을 신의 세계로부터 가져 온 사람은 누구일까?


김흥규/고려 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고려 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문학과 역사적 인간』,『한국 문학의 이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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