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어머니의 죽음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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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햇살 너무 따사롭지 말거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92. 가난과 고난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어머니의 고향은 황해도 송화이다. 어머니는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21살에 황해도 은율에 살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함지박에서 숟가락이 한 움큼 잡히는 곳으로 시집을 가야 한다는 외조부의 기이한 결혼관 때문에 어머니의 결혼생활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만 아홉인 집안의 장남이었다. 어머니는 2살이던 막내 시동생에게 젖을 물려야 했다. 그 많던 빨래들, 세 끼 해대던 식사, 그리고 먼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던 어머니. 어머니는 어쩌다 친정에 오면 시댁으로 돌아가는 하루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왔다. 냄비 한 두 개로 시작된 피난생활. 너무 먹고 살기가 어려워 외조부와 외조모, 그리고 7년 만에 낳은 외삼촌(어머니의 남동생)은 안면도로 갈 계획을 세웠다. 안면도에는 소나무가 많아 그 껍질이라도 벗겨먹고 살겠다는 의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을 태운 배는 장항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파산했고 모두 사망했다. 그리고 장항의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후 어머니는 몇 해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고 방안을 기어 다니셨다 한다.

 

아버지는 마흔 아홉 살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그리고 예순 셋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두 번이나 더 쓰러지셨다. 처음에는 반신불수로, 두 번째는 안면 마비로, 세 번째는 다시 반신불수로 온몸에 타격을 입었다. 한국전쟁 이후의 어수선하던 시절, 군산 미군부대를 무대로 장사를 했던 부친은 가마니에 돈을 쓸어 담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전해져 오지만, 그때 벌었던 돈은 당신이 몸져누웠던 14년 동안 한 푼도 남김없이 고스란히 쓰고 돌아가셨다. 물론 그 돈의 힘으로 3 2녀의 자식들은 성장할 수 있었다.

 

부친이 자리에 눕자 어머니가 생활전선에 나섰다. 배움도 자본도 없는, 그리고 가세가 거의 기울어가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선택할 수 있는 돈벌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머니는 동네 쓰레기를 수거하셨다. 지금처럼 환경미화원이 없던 시절, 집집마다 나오는 쓰레기를 동네에서 해결해야 했다. 양색시들이 주로 살았던 그 동네에서 어머니는 연탄재와 생활 쓰레기를 순전히 두 손으로 치워내셨다. 쓰레기를 치우고 받는 돈은 호당 3백원이었다. 겨울에는 연탄재가 많아 더욱 힘들어 하셨다.

 

 

어머니는 냉동 공장에서 해산물을 손질하는 일을 하시기도 했다. 일본 수출을 주로 했던 그 냉동 공장에서 어머니는 새우며 조개 등을 손질했다. 새우 가시에 찔려 저녁이면 생손을 앓았다. 수산물이 도착하는 시간이 일정치 않아 어머니는 밤 11시에도, 새벽2시에도, 새벽 3시에도 냉동 공장으로 달려갔다. 늦으면 다른 사람들이 일감을 다 가져가버리기 때문에 빨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자정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찾아 냉동 공장에 가곤 했다. 어머니는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유령처럼 걸어 나오곤 했다. 나는 창백한 달빛 아래서 어머니의 등을 밀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동네 양색시의 집에서 가정부 노릇을 하기도 했다. 양색시들은 아침이면 모닝커피를 마셨다. 커피에 계란의 노른자를 넣어 마시는 커피, 모닝커피. 어머니는 노른자를 사용하고 남은 계란 흰자위 그릇을 몰래 나에게 쥐어주곤 했다. 흰자위만 가득하던 그릇의 낯설음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머니는 쥐포 말리는 곳에 가기도 했고 보리 수확이 끝난 논으로 이삭을 주우러 가시기도 했다. 망치에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생선궤짝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추운 겨울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미나리꽝에서 미나리를 채취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근처 목재 공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목재공장 마당엔 나왕나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머니는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나왕나무의 껍질을 벗겼다. 지금처럼 석유나 가스가 드물던 시절, 특별히 제조된 쇠붙이로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이 깊도록 나무껍질을 벗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 위험한 작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네에서 주운 깡통은 양은과 고철로 분류했다. 우유팩은 따로 모아 고물상에 넘겼고 주변의 뱃사람들과 함께 그물을 짜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어머니의 삶을 다 기록할 순 없다. 어머니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은 기도와 성경, 그리고 교회였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내 몸에 회초리를 댄 적이 없지만 늘 기도로 가르치고 기도로 나무라셨다. 내 행동이 맘에 들지 않을 때마다 그게 새벽이든 한밤중이든 무릎을 꿇었다. 그나마 철없는 내 삶이 이만큼이나 유지되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택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크리스천이었던 어머니는 늘 영원한 세상을 소망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영원한 세상의 안식에 들어가셨다고 믿는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런 소망마저 없다면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조건 없는 사랑을 잃은 슬픔을 견디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난다. 죽음이 영원한 끝이 아니고,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난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 죽음이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 슬픔이 조금 덜할 것도 같다. 그래서 충담사도 애절한 마음으로 제망매가를 읊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이승에서의 그 얼굴에 대한 그리움을 쉬이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 이 가을, 햇살 너무 따사롭지 말거라. 억새풀, 너무 하늘거리지 말거라. 내장산의 단풍, 너무 호화롭지 말거라. 올 겨울에는 눈도 내리지 말거라. 어머니가 없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일이, 아 얼마동안은, 많이 힘들 것 같다.

 

- 몇 해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쓴 글. 초가을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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