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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사자성어 사전 - 마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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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작침(磨斧作針)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 아무리 이루기 힘든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 있는 인내만 있으면 성공하고야 만다는 뜻이다. 磨斧爲針(마부위침) 곧 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참고 계속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함의 비유. ② 노력을 거듭해서 목적을 달성함의 비유. ③ 끈기 있게 학문이나 일에 힘씀의 비유.

[동의어] 철저성침[鐵杵成針(鍼)]. 마저작침[磨杵作針(鍼)]. [유사어] 우공이산(愚公移山). 수적천석(水滴穿石). [유사어]《唐書》〈文藝(苑)傳〉.《方與勝覽(방여승람)》 시선(詩仙)으로 불리던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자는 태백(太白), 701∼762]의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백은 아버지의 임지인 촉(蜀) 땅의 성도(成都)에서 자랐다. 그때 훌륭한 스승을 찾아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가 수학(修學)했는데 어느 날 공부에 싫증이 나자 그는 스승에게 말도 없이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집을 항해 걷고 있던 이백이 계곡을 흐르는 냇가에 이르자 한 노파가 바위에 열심히 도끼(일설에는 쇠공이[鐵杵])를 갈고 있었다. "할머니, 지금 뭘 하고 계세요?" "바늘을 만들려고 도끼를 갈고 있다[磨斧作針]." "그렇게 큰 도끼가 간다고 바늘이 될까요?" "그럼, 되고 말고.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이백은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생각을 바꾼 그는 노파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 후 이백은 마음이 해이해지면 바늘을 만들려고 열심히 도끼를 갈고 있던 그 노파의 모습을 떠올리곤 분발했다고 한다.

​마이동풍(馬耳東風)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 버리는 것을 말함.

《出典》' 李太白集' 券十八 이것은 李白의 <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라는 장편의 詩 가운데 있는 말이다.

"푸른 산을 둘러싸고 뜬구름이 하염없이 이어져 있고,

그 하늘 가운데 외로운 달이 흐르고 있다.

외로운 달은 추위에 못 이겨 빛나고,

은하수는 맑고 북두칠성은 흩어져 깔려 있는데,

밤의 많은 별들이 밝게 빛난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밤 그늘 서리의 하얀 것을 생각하고,

자네의 집 우물의 구슬 난간에 얼음이 얼어붙은 모양을 생각하고,

얼어붙은 자네의 마음을 생각했다.

인생은 아차 하는 사이에 백년도 채우지 못한다.

자, 술이나 마셔 한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햇볕이 쪼이지 않는 북쪽 창문 속에서,

시를 읊거나 부(賦)를 짓는 정도의 일일세.

일 만 마디를 지어도 고작 술 한 잔의 가치도 없네."

그리고 나서 李白은 이렇게 읊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다 머리를 흔들 걸세.

동풍(東風)이 말의 귀를 쏘는 것 같음이 있네.

世人聞此皆掉頭 有如東風射馬耳

[주] 동풍은 봄바람의 뜻. 그 동풍이 말의 귀를 쏘아(스쳐) 봤자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을 것임. 즉 세인들이 시인의 말이나 걸작에 기울이는 관심도가 그 정도로 낮다 - 무관심하다고 이백은 비분(悲憤)하고 있는 것임.

마중지봉(麻中之蓬) 삼 가운데 자라는 쑥. 좋은 환경의 감화를 받아 자연히 품행이 바르고 곧게 된다는 비유.

 

​마철저(磨鐵杵) (磨鐵杵欲作針) 쇠로 만든 다듬이 방망이를 갈아서 침을 만들려 한다. 노력하면 아무리 힘든 목표라도 달성할 수 있음을 뜻한다.

 

마행처우역거(馬行處牛亦去) 말 가는데 소도 간다. 곧, 일정한 차이는 있을 수 있 으나 한 사 람이 하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도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다는 뜻. 남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뜻.

 

馬革 屍(마혁리시) 말의 가죽으로 자기 시체를 싼다. 옛날에는 전사한 장수의 시체는 말가죽으로 쌌으므로 전쟁에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 다는 뜻을 말한다.

 

​막상막하(莫上莫下) 실력에 있어 낫고 못함이 없이 비슷함

 

막역지우(莫逆之友) 매우 친한 벗.=죽마고우(竹馬故友).

《出典》'莊子' 大宗師篇 <莊子>에 똑같은 형식으로 이야기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자사(子祀)와 자여(子輿)와 자리(子犁)와 자래(子來) 이렇게 네 사람은 서로 함께 말하기를, "누가 능히 無로써 머리를 삼으며, 삶으로써 등을 삼고, 죽음으로써 엉덩이를 삼을까? 누가 사생존망(死生存亡)이 한 몸인 것을 알랴! 우리는 더불어 벗이 되자." 네 사람은 서로 보고 웃었다.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벗이 되었다.

子祀 子輿 子犁 子來 四人相與語曰 孰能以無爲者 以生爲背 以死爲尻 孰知死生存亡之一體者 吾與之友矣 四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爲友.

자상호(子桑戶)와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 이렇게 세 사람은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누가 능히 서로 더불어 함이 없는데 서로 더불어 하며, 서로 도움이 없는데 서로 도우랴. 능히 하늘에 올라가 안개와 놀며, 끝이 없음에 날아 올라가며, 서로 잊음을 삶으로써 하고, 마침내 다하는 바가 없으랴"하고 말했다. 세 사람은 서로 보고 웃으며, 서로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더불어 벗이 되었다. 子桑戶 孟子反 子琴張 三人相與語曰 孰能相與於無相與 相爲於無相爲. 孰能登天遊霧 撓撓無極 相忘以生 無所終窮 三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友.

​만가(輓歌) 상여를 메고 갈 때 부르는 노래.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노래.

[출전]《古今毘》〈音樂篇〉,《晉書》〈禮志篇〉,《古詩源》 〈?露歌〉〈蒿里曲〉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이 즉위하기 직전의 일이다. 한나라 창업 삼걸(三傑) 중 한 사람인 한신(韓信)에게 급습 당한 제왕(齊王) 전횡(田橫)은 그 분풀이로 유방이 보낸 세객(說客) 역이기(?食其)를 삶아 죽여 버렸다. 이윽고 고조가 즉위하자 보복을 두려워한 전횡은 500여 명의 부하와 함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지금의 전횡도(田橫島)로 도망갔다. 그 후 고조는 전횡이 반란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그를 용서하고 불렸다. 전횡은 일단 부름에 응했으나 낙양을 30여리 앞두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포로가 되어 고조를 섬기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전횡의 목을 고조에게 전한 고조에게 전한 두 부하를 비롯해서 섬에 남아있던 500여 명도 전횡의 절개를 경모하여 모두 순사(殉死)했다. 그 무렵, 전횡의 문인(門人)이 해로가(?露歌)ㅗ호리곡(蒿里曲)이라는 두 장(章)의 상가(喪歌)를 지었는데 전횡이 자결하자 그 죽음을 애도하여 노래했다.

부추 잎의 이슬은 어찌 그리 쉬이 마르는가 [?上朝露何易晞(해상조로하이희)]

이슬은 말라도 내일 아침 다시 내리지만 [露晞明朝更復落(노희명조갱부락)]

사람은 죽어 한 번 가면 언제 다기 돌아오나 [人死一去何時歸(인사일거하시귀)] -해로가- 호리는 뉘 집터인고 [蒿里誰家地(호리수가지)] 혼백을 거둘 땐 현ㅗ우가 없네 [聚斂魂魄無賢愚(취렴혼백무현우)] 귀백은 어찌 그리 재촉하는고 [鬼伯一何相催促(귀백일하상최촉)] 인명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못하네 [人命不得少王?(인명부득소지주)] -호리곡- 이 두 상가는 그 후 7대 황제인 무제(武帝:B.C.141∼87) 때에 악부(樂府) 총재인 이연년(李延年)에 의해 작곡되어 해로가는 공경귀인(公卿貴人), 호리곡은 사부서인(士夫庶人)의 장례 시에 상여꾼이 부르는 '만가'로 정해졌다고 한다. [주] 해로가 : 인생은 부추 잎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음을 노래한 것. 호리 : 산동성(山東省)의 태산(泰山) 남쪽에 있는 산 이름. 옛 중국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넋이 이곳으로 온다고 믿어 왔음.

만경창파(萬頃蒼波)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

만고풍상(萬古風霜) 사는 동안에 겪은 온갖가지 많은 고생

​만록총중홍일점(萬綠叢中紅一點) 푸른 물 가운데 한떨기 꽃이 피어 있음. 좌중( 座中)에 한 사람의 예기(藝妓)가 있음. 많은 남자 가운데 오직 한 명의 여자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만사형통(萬事亨通)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됨. 만사휴의(萬事休矣) 모든 일이 헛수고로 돌아감을 이름.

[유사어] 능사필의(能事畢矣). [출전]《宋史》〈荊南高氏世家〉 모든 일이 끝장났다(가망 없다)는 뜻으로, 어떻게 달리 해볼 도리가 없다는 말. 당나라가 망하고 송(宋:北宋, 960∼1127) 나라가 일어날 때까지 53년 동안에 중원에는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의 다섯 왕조가 일어났다가 쓰러지곤 했는데 이 시대를 오대[五代:후오대(後五代)의 준말]라 일컫는다. 또 다시 중원을 벗어난 각 지방에는 전촉(前蜀)오(吳)남한(南漢)형남(荊南)오월(吳越)초(楚)민(?)남당(南唐)후촉(後蜀)북한(北漢)등 열 나라가 있었는데 역사가는 이를 오대 십국(五代十國)이라 일컫고 있다. 이들 열 나라 중에는 형남과 같은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도 있었는데 이 나라의 왕인 고종회(高從誨)는 아들 고보욱(高保勖)을 분별없이 귀여워했다. 그래서 고보욱은 남이 아무리 노한 눈으로 쏘아보아도 싱글벙글 웃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일이 끝장났다[萬事休矣].' 과연 고보욱의 대(代)에 이르러 형남은 멸망하고 말았다.

만승지국(萬乘之國) 乘은 군사용 수레. 일만 대의 乘을 낼 수 있는 나라. 큰 나라의 제후 혹은 천자를 뜻한다.

 

만시지탄(晩時之歎) 기회를 잃고 때가 지났음을 한탄함.

 

만식당육(晩食當肉) 때늦게 먹으면 고기맛 같다. 배고플 때는 무엇을 먹든지 고기를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만신창이(滿身瘡痍)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됨. 사물이 성한 데가 없을 만큼 결함이 많음.

 

만전지책(萬全之策) 조금도 허술함이 없는 완전한 계책

 

만휘군상(萬彙群象) 우주의 온갖 수많은 형상

 

만화방차(萬化方暢) 따뜻한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한창 자람.

 

말마이병( 馬利兵) 말에 먹이를 먹이고 칼을 갈아 출병 준비를 한다.

 

망국지음(亡國之音) 나라를 망치는 음악이란 뜻. 곧 ① 음란하고 사치한 음악. ②망한 나라의 음악. ③ 애조(哀調)를 띤 음악.

[동의어] 망국지성(亡國之聲). [유사어] 정위지음(鄭衛之音). [출전]《韓非子》〈十過篇〉.《禮記》〈樂記〉 ① 춘추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던 도중 복수[?水:산동성(山東省) 내] 강변에 이르자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멋진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영공은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서서 잠시 넋을 잃고 듣다가 수행중인 사연(師涓)이란 악사(樂師)에게 그 음악을 잘 기억해두라고 했다. 이윽고 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진나라 평공(平公) 앞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들은 새로운 음악'이라고 자랑했다. 당시 진나라에는 사광(師曠)이라는 유명한 악사가 있었는데 그가 음악을 연주하면 학이 춤을 추고 흰 구름이 몰려든다는 명인이었다. 위나라 영공이 새로운 음악을 들려준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입궐한 사광은 그 음악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급히 사연의 손을 잡고 연주를 중지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새로운 음악이 아니라 '망국의 음악[亡國之音]'이오." 이 말에 깜짝 놀란 영공과 평공에게 사광은 그 내력을 말해 주었다. "그 옛날 은(殷)나라 주왕(紂王)에게는 사연(師延)이란 악사가 있었사옵니다. 당기 폭군 주왕은 사연이 만든 신성백리(新聲百里)라는 음미(淫?:음란하고 사치함)한 음악에 도취하여 주지육림(酒池肉林)속에서 음일(淫佚)에 빠졌다가 결국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주벌(誅伐)당하고 말았나이다. 그러자 사연은 악기를 안고 복수에 투신 자살했는데, 그 후 복수에서는 누구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사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국의 음악'이라고 무서워하며 그곳을 지날 땐 귀를 막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사옵니다." ②《예기(禮記)》〈악기(樂記)〉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복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망국지음'이다."

망국지탄(亡國之歎) 망국에 대한 한탄. =망국지한(亡國之恨)

 

망년지교(忘年之交) 나이의 차이를 잊고 사귀는 친한 벗. 늙으막에 얻은 어린 친구와의 사귐을 일컫기도 한다.

 

망루탄주(網漏呑舟) 그물이 세면 배도 그 사이로 지나갈 수 있다. 법령이 관대하여 큰 죄를 짓고도 피할 수 있게 됨을 비유.

 

망매해갈(望梅解渴) 조조(曹操)가 목이 마른 병사에게 살구 이야기를 하여 자연히 입안에 침이 생겨서 목마름을 풀게 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

 

망양보뢰(亡羊補牢) 어떤 일이 있고 나서야 뒤늦게 대비함.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망양지탄(亡羊之歎) 갈림길이 많아 찾는 양을 결국 잃고 말았다는 뜻. 학문의 길이 여러 갈래이므로 진리를 찾기는 어려움. =다기망양(多岐亡羊)

 [출전]《莊子》〈秋水篇〉 넓은 바다를 보고 감탄한다는 뜻. 곧 ① 남의 원대함에 감탄하고, 나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 ② 제 힘이 미치지 못할 때 하는 탄식. 먼 옛날 황하 중류의 맹진(孟津:하남성 내)에 하백(河伯)이라는 하신(河神)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금빛 찬란히 빛나는 강물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이런 큰 강은 달리 또 없을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럼, 황하보다 더 큰 물이 있단 말인고?" "그렇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해 뜨는 쪽에 북해(北海)가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강이 사시 장철 그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그 넓이는 실로 황하의 몇 갑절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 큰 강이 있을까? 어쨌든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못 믿겠네." 황하 중류의 맹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하백은 늙은 자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가을이 오자 황하는 연일 쏟아지는 비로 몇 갑절이나 넓어졌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지난날 늙은 자라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에 강 하류로 내려가 북해를 한번 보기로 했다. 하백이 북해에 이르자 그곳의 해신(海神)인 약(若)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잘 왔소. 진심으로 환영하오." 북해의 해신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는 가라앉고 눈앞에 거울 같은 바다가 펼쳐졌다. '세상에는 황하 말고도 이처럼 큰 강이 있었단 말인가‥….' 하백은 이제까지 세상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다. "나는 북해가 크다는 말을 듣고도 이제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서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의 단견(短見)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북해의 신은 웃으며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였구려. 대해(大海)를 모르면 그대는 식견이 낮은 신으로 끝나 버려 사물의 도리도 모를 뻔했소. 그러나 이제 그대는 거기서 벗어난 것이오."

망운지정(望雲之情) 자식이 부모를 그리는 정.

 

망자재배(芒刺在背) 망자(芒刺)는 가시. 가시를 등에 지고 있다. 즉, 등 뒤에 자기가 꺼리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편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망자존대(妄自尊大) 아주 건방지게 자기만 잘났다고 뽐내어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김. 종작없이 함부로 제가 잘난 체함.

 

맥수지탄(麥秀之歎) 고국의 멸망을 한탄함.

《出典》'史記' / '詩經 중국 고대 3왕조의 하나인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이 음락(淫樂)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이를 지성으로 간(諫)한 신하 중 삼인(三人)으로 불리던 세 왕족이 있었다.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이 그들이다. 미자는 주왕의 형으로서 누차 간(諫)했으나 듣지 않자 국외로 망명했다. 기자(箕子)도 망명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짓 미치광이가 되고 또 노예로까지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 비간은 끝까지 간하다가 결국 가슴을 찢기는 극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주왕은 삼공(三公)의 한 사람이었던 서백(西伯)의 아들 발(發)에게 주살(誅殺) 당하고 천하는 주왕조(周王朝)로 바뀌었다. 주나라의 시조가 된 무왕(武王) 발(發)은 은왕조(殷王朝)의 봉제사(奉祭祀)를 위해 미자를 송왕(宋王)으로 봉(封)했다. 그리고 기자도 무왕을 보좌하다가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기자가 망명지에서 무왕의 부름을 받고 주나라의 도읍으로 가던 도중 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지나게 되었다. 번화하던 옛 모습은 간데없고 궁궐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했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치 못한 기자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麥秀漸漸兮(맥수점점혜)]

벼와 기장도 윤기가 흐르는구나 [禾黍油油兮(화서유유혜)]

교활한 저 철부지(주왕)가 [彼狡童兮(피교동해)]

내 말을 듣지 않았음이 슬프구나 [不與我好兮(불여아호혜)]

[주] 기자 동래설(箕子東來說) : 기자는 주왕의 횡포를 피하여, 혹은 주나라 무왕이 조선왕으로 책봉함에 따라 조선에 들어와 예의ㅗ밭갈이ㅗ누에치기ㅗ베짜기와 사회 교화(敎化)를 위한 팔조지교(八條之敎)를 가르쳤다고 하나 이는 후세 사람들에 의한 조작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라고 함. 왜냐하면 진(晉)나라의 무장(武將)ㅗ정치가ㅗ학자인 두예(杜預:222∼284)가 그의 저서《춘추석례(春秋釋例)》의 주(註)에서 "기자의 무덤이 양(梁)나라의 몽현(夢縣)에 있다"고 적고 있는 만큼 '기자 동래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임. 【동의어】맥수서유(麥秀黍油), 맥수지시(麥秀之詩)

맹모단기(孟母斷機)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왔을 때, 짜던 베를 칼로 잘라서 훈계한 고사로 '어머니의 엄격한 자녀 교육'을 이름.

《出典》列女傳 蒙求 孟子는 孔子의 손자인 子思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거니와, 이보다 앞서 소년시절에 유학에 나가 있던 孟子가 어느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어머니는 베를 짜고 있다가 孟子에게 물었다. "네 공부는 어느 정도 나아갔느냐?" "아직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를 옆에 있던 칼로 끊어버렸다. 孟子가 섬뜩하여 물었다. "어머니, 그 베는 왜 끊어버리시나이까?"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학문을 그만둔다는 것은, 내가 짜던 베를 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君子란 모름지기 학문을 배워 이름을 날리고, 모르는 것은 물어서 앎을 넓혀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평소에 마음과 몸을 편안히 하고, 세상에 나가서도 위험을 저지르지 않는다. 지금 너는 학문을 그만두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심부름꾼으로 뛰어다녀야 하고, 재앙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생계를 위하여 베를 짜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차라리 그 夫子에게 옷은 해 입힐지라도, 오래도록 양식이 부족하지 않겠느냐? 여자 가 그 생계의 방편인 베짜기를 그만두고, 남자가 덕을 닦는 것에 멀어지면, 도둑이 되지 않는다면 심부름꾼이 될 뿐이다." 孟子가 두려워하여 아침 저녁으로 쉬지 않고서 배움에 힘써, 子思를 스승으로 섬겨, 드디어 천하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이것을 소위 '斷機之敎'라고 일컫는다.【동의어】단기지계(斷機之戒), 단기계(斷機戒) 【유사어】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맹모삼천(孟母三遷) 맹모가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했다는 고사. 묘지에서 시장, 시장에서 학교

[출전]《列女傳》〈母儀傳(모의전)〉전국 시대, 유학자(儒學者)의 중심 인물로서 성인(聖人)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 맹자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처음 묘지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흉내만 내며 놀았다. 그래서 교육상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이곳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맹자는 제구(祭具)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냈다. 서당에서는 유교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예절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런 곳이야말로 자식을 기르는데 더할 나위 없이 놓은 곳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맹완단청(盲玩丹靑) 장님 단청 구경하기.

 

맹자정문(盲者正門) 장님이 문을 바로 들어갔다. 우연히 요행수로 성공을 거두었음을 뜻한다.(=盲者直門)

 

맹자직문(盲者直門) 장님이 문을 바로 들어갔다. 우연히 요행수로 성공을 거두었음을 뜻한다.(=盲者正門)

 

면종복배(面從腹背) 눈 앞에서는 복종하나 등 뒤에서는 배반함.

 

면종후언(面從後言) 그 사람 앞에서는 복종하고 돌아가서는 욕함.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말로 형상화된 이름은 늘 그러한 실제의 이름이 아니다.

 

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처럼 정지되어 있는 물, 잡념이 없는 아주 깨끗한 마음

《出典》'莊子' 德充符篇 《莊子》'德充符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노(魯)나라에 왕태라는 올자(兀者)가 있었는데, 그의 주위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孔子의 제자 상계(相季)가 특출한 면도 없는 왕태에게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孔子는 "사람은 흐르는 물로 거울을 삼는 일이 없이 그쳐 있는 물로 거울을 삼는다. 왕태의 마음은 그쳐 있는 물처럼 조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거울삼아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또 같은 '德充符篇'에는 이런 글도 실려 있다.

"이런 말을 들었는가? '거울이 밝으면 티끌과 먼지가 앉지 않으며, 티끌과 먼지가 앉으면 밝지 못하다. 오래도록 현자(賢者)와 함께 있으면 허물이 없다.' 이제 자네가 큰 것을 취하는 것은 선생님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말을 함이 이와 같으니, 또한 허물이 아니겠는가?" 聞之曰 鑑明則塵垢不止 止則不明也 久與賢者處 則無過 今子之所取大者先生也 而猶出言若是 不亦過乎. [주] 올자 : 형벌(刑罰)에 의해 발뒤꿈치를 잘린 불구자.

명모호치(明眸皓齒) 맑은 눈동자와 흰 이. 미인의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말.

《出典》杜甫의 詩 '哀江頭' 안록산(安祿山)이 난리를 일으켜 낙양(洛陽)이 함락된 것이 755년, 두보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다. 그해에 두보는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것을 처자에게 통고하기 위하여, 당시 소개(疏開)되어 있는 長安 근처의 봉선(奉先)으로 갔다. 도적들의 수중에 있는 長安에서 봄을 맞이한 杜甫는 남몰래 江頭를 찾아가, 옛날의 영화를 그리워하고 이 江頭를 슬퍼하며, 목소리를 삼키고 울면서 이 <哀江頭>란 시를 지었던 것이다.

밝은 눈동자 흰 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

피로 더러워진 떠도는 혼은 돌아가지를 못하네.

맑은 위수는 동쪽으로 흐르고 검각은 깊은데,

蜀나라로 끌려가 사니 피차간 소식이 없네.

인생은 情이 있어 눈물이 가슴을 적시니,

강물에는 강꽃이 피니 어찌 마침내 다함이 있으랴.

황혼에 오랑캐 기마들은 티끌로 城을 채우는데,

城 남쪽으로 가고자 하여 城 북쪽을 바라보네.

明眸皓齒今何在血汗遊魂歸不得

淸渭東流劍閣深去住彼此無消息

人生有情淚沾臆江水江花豈終極

黃昏胡騎塵滿城浴往城南望城北

여기에서 '明眸皓齒'라고 한 것은 楊貴妃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명모호치(明眸皓齒) 밝은 눈동자와 흰 새하얀 이의 미인을 형용하는 말. (杜甫의 詩 [哀江頭])

 

명실상부(名實相符)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함

 

명주암투(明珠闇投) 밤에 빛나는 구슬인 야광주(夜光珠)를 어두운 밤중에 집어 던진다. 지극히 귀한 보물도 남에게 예(禮)를 갖추어서 주지 않으면 도리어 원한을 사게 됨을 뜻한다. 明珠暗投로도 쓴다.

 

명약관화(明若觀火) 불빛을 보는 것처럼 밝음. 곧,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함.

 

명재경각(命在傾刻) 목숨이 경각에 있음. 곧 목숨이 끊어질 지경임.

 

명철보신(明哲保身) 난세에 처신함에 있어 안전을 제일로 삼아 요령 있게 처세하는 사람.

 

모수자천(毛遂自薦) 진(秦)나라가 조(趙)나라를 치자 조나라는 초나라와 반진(反秦) 연합군을 결성하고자 했다. 좋은 수가 없던 상황에서 모수(毛遂)가 스스로를 천거하여 평원군(平原君)을 따라 초(楚)나라에 가 망설이는 초왕을 칼자루로 위협하고 논리적으로 구슬리어 합종(合從)의 협약을 맺게 한 고사.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유래된 고사이기도 하다.

모순지설(矛盾之說) 말의 앞뒤가 맞지 않음. '모순'이라고도 함.

《出典》'韓非子' 難勢篇 어느날 초나라 장사꾼이 저잣거리에 방패[盾]와 창[矛]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자, 여기 이 방패를 보십시오. 이 방패는 어찌나 견고한지 제아무리 날카로운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랑한 다음 이번에는 창을 집어들고 외쳐댔다. "자, 이 창을 보십시오. 이 창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 때, 구경꾼들 속에서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어떻게 되는 거요?" 그러자, 장사꾼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楚人有?楯與矛者 譽之曰 吾楯之堅 莫能陷也 又譽其矛曰 吾矛之利 於物無不陷也 或曰 以子之矛 陷子之楯何如 其人不能應也.

【유사어】자가당착(自家撞着

목민(牧民) 백성을 기름.

 

목불식정(目不識丁) 아주 무식함. 일자무식(一字無識).

 

목불인견(目不忍見)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

 

목식이시(目食耳視) 음식물을 보기 좋게 차려서 맛은 상관없이 눈에만 들게 하고, 옷을 맞고 안맞고는 신경쓰지 않고 보기 좋게 입어서 칭찬하는 말을 들어 귀만 만족하려 한다. 겉치레만을 취하여 생활이 헛된 사치에 흐름을 한탄하는 말이다.

 

목탁(木鐸) 하늘이 공자를 문교의 목탁으로 삼는다.

 

목후이관(沐 而冠) 원숭이에 목욕시켜 관을 씌우는 것과 같다. 겉차림은 사람 모양을 갖추었으나 속과 행동은 사람답지 못한 사람.

 

몽매지간(夢寐之間) 자는 동안, 꿈을 꾸는 동안. 즉, 자나깨나.

 

몽진(蒙塵)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나라에 난리가 있어 임금이 나라 밖으로 도주함을 말한다.

 

묘두현령(猫頭縣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는 뜻으로 실행할 수 없는 헛 이론을 일컬는다.

 

묘호류견(描虎類犬) 호랑이를 그리려다 실패하여 개와 비슷하게 되었다. 높은 뜻을 갖고 어떤 일을 성취하려다가 중도에 그쳐 다른 사람의 조소를 받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무릉도원(武陵桃源)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적인 중국의 명승지를 일컫는 말로 곧 속세를 떠난 별천지를 뜻함

 

무망지복(無望之福) 바라지 않아도 자연히 들어오게 되는 행복.

 

무불간섭(無不干涉)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함부로 남의 일에 간섭함을 말한다.

 

무불통지(無不通知) 무슨 일이든 모르는 것이 없음

 

무산지몽(巫山之夢) 무산에서 꾼 꿈 남녀의 밀회정사 雲雨之樂(운우지락)

 

[동의어] 조운모우(朝雲暮雨). 천침석(薦枕席). [유사어] 무산지운(巫山之雲). 무산지우(巫山之雨). [출전]《文選》〈宋玉 高唐賦〉무산(巫山)의 꿈이란 뜻으로, 남녀간의 밀회(密會)나 정교(情交)를 이르는 말. 전국 시대, 초나라 양왕(襄王)의 선왕(先王)이 어느 날 고당관(高唐館)에서 노닐다가 피곤하여 낮잠을 잤다. 그러자 꿈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첩(小妾)은 무산에 사는 여인이온데 전하께오서 고당에 납시었다는 말씀을 듣자옵고 침석(枕席:잠자리)을 받들고자 왔나이다." 왕은 기꺼이 그 여인과 운우지정(雲雨之情: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 이윽고 그 여인은 이별을 고했다. "소첩은 앞으로도 무산 남쪽의 한 봉우리에 살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양대(陽臺) 아래 머물러 있을 것이옵니다." 여인이 홀연히 사라지자 왕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아침, 왕이 무산을 바라보니 과연 여인의 말대로 높은 봉우리에는 아침 햇살에 빛나는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었다. 왕은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조운묘(朝雲廟)라고 이름지었다.

무소불위(無所不爲)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음

 

무양(無恙) 모든 일이 평산. 탈이 없다.

 

무용지용(無用之用)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것리 때로는 무엇보다도 더 유용하게 쓰인다.

 

무위이민자화(無爲而民自化) 위정자(爲政者)가 덕(德)을 지니고 있다면, 함이 없어도 백성들이 스스로 그 덕에 교화된다.

 

무위이치(無爲而治) 인위적으로 뭔가를 할려고 꾀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잘 다스림.

 

무위이화(無爲而化) 뚜렷한 행위 없이 감화에 의해서 이룩된다. 성인의 덕이 크면 클수록 백성들이 스스로 따라나서 잘 감화됨.

《出典》'老子' 五十七章 《老子》의 '道德經'에는, 천하에는 행해서는 안 된다고 정해진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은 가난해진다. 백성들에게 편리한 문명의 도구가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나라는 혼란해진다. 인간은 지혜나 기술이 향상되면 될수록 괴상한 것들이 나타나고 법률이 정밀해지면 해질수록 죄인은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말한다. "내가 하는 것이 없으면 백성은 스스로 和하고, 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백성은 스스로 바르게 된다. 내가 일 없이 있으면 백성은 저절로 잘 살게 되고, 내가 욕심이 없으면 백성은 저절로 소박해진다."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또 老子는 말한다. "'道'는 언제나 無爲이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일체를 하고 있다.(道常無爲 而無不爲)"고.

老子의 말은 계속된다. "후왕(侯王)이 만약 능히 이 '道'를 잘 지키면 만물은 자연히 화(化)하려 한다.(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고.

무의무탁(無依無托) 의지하고 의탁할 곳이 없음

 

무족지언비우천리(無足之言飛于千里)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

 

무편무당(無偏無黨)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고 중정(中正), 공평(公平)함.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먹고 살만한 살림이 없으면 떳떳한 마음이 없어진다

 

무호동중리작호(無虎洞中狸作虎) 범없는 골짜기에 너구리가 범 노릇한다.

 

묵적지수(墨翟之守) 묵수(墨守) 의견,주장,소신 등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지키다.

[동의어] 묵자수성(墨子守城) [출전]《墨子》〈公輸盤篇〉 '묵적의 지킴'이란 뜻. 곧 ①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킴. ② 융통성이 없음의 비유. 춘추 시대의 사상가로서 '자타 차별 없이 서로 똑같이 사랑하고 이롭게 하자'는 겸애교리설(兼愛交利說:兼愛說)과 비전론(非戰論)을 주창한 묵자[墨子:이름은 적(翟), B.C. 480∼390]의 이야기이다. 초(楚)나라의 도읍 영[?:호북성(湖北省) 내]에 도착한 묵자는 공수반(公輸盤)을 찾아갔다. 그가 초왕을 위해 운제계(雲梯械)라는 새로운 공성기(攻城機: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만들어 송(宋)나라를 치려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북방에 나를 모욕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대가 나를 위해 죽여 줄 수 없겠소?" 그러자 공수반은 불쾌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의(義)를 중히 여기는 만큼 살인은 안하오." "사람 하나 죽이지 않는 게 '의'라면 왜 죄 없는 송나라 백성을 죽이려 하시오?" 답변에 궁한 공수반은 묵자를 초왕 앞으로 안내했다. "전하, 새 수레를 소유한 사람이 이웃집 헌 수레를 훔치려 하고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이웃집 누더기를 훔치려 한다면 전하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겠나이까?" "그건 도벽이 있어서 그럴 것이오." "하오면, 사방 5000리 넓은 국토에다 온갖 짐승과 초목까지 풍성한 초나라가 사방 500리밖에 안되는 가난한 송나라를 치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옵니까?" "과인은 단지 공수반의 운제계를 한번 실험해 보려 했을 뿐이오?" "하오면, 외신(外臣)이 여기서 그 운제계에 의한 공격을 막아 보이겠나이다." 이리하여 초왕 앞에서 기묘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묵자는 허리띠를 풀어 성 모양으로 사려 놓고 나뭇조각으로 방패를 만들었다. 공수반은 모형 운제계로 아홉 번 공격했다. 그러나 묵자는 아홉 번 다 굳게 지켜냈다. 이것을 본 초왕은 묵자에게 송나라를 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문경지교(刎頸之交)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사귀는 친한 사이.= 막역지우(莫逆之友). [유사어] 관포지교(管鮑之交). 금란지계(金蘭之契). 단금지계(斷金之契). [참조] 완벽(完璧). [출전]《史記》〈廉頗藺相如列傳〉

목을 베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귐. 또 그런 벗. 전국 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하 목현(繆賢)의 식객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원상태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됐다. 그리고 3년 후(B.C. 280), 소양왕과 혜문왕을 욕보이려는 소양왕을 가로막고 나서서 오히려 그에게 망신을 주었다. 인상여는 그 공으로 종일품(從一品)의 상경(上卿)에 올랐다. 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廉頗)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城)을 쳐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 테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 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 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로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로 소양왕이지요." "나는 그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염파장군과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위기를 생각하고 염파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윗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荊杖)을 짊어지고[肉粗負荊:사죄의 뜻을 나타내는 행위]'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끓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문경지교'를 맺었다고 한다.

문경지우(刎頸之友) 생사를 같이할 썩 친한 친구 [동의어] 문경지계(刎頸之契).

《出典》'史記' 廉頗 藺相如列傳 전국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하 유현(劉賢)의 식객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원상(原狀)대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廉頗)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城)을 쳐서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테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론 소양왕이지요." "나는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소양왕을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 장군 따위를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 오지 않는 것은 염파 장군과 내가 버티어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고 염파 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웃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荊杖)을 짊어지고[肉袒負荊]'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꿇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하고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刎頸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동의어】문경지계(刎頸之契) 【유사어】관포지교(管鮑之交), 금란지계(金蘭之契), 단금지계(斷金之契)

문방사우(文房四友) 서재에 있어야 할 네 벗. 종이, 붓, 먹, 벼루의 네 가지 문방구.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문전성시(門前成市)와는 반대로 손님의 발길이 끊겨 새그믈도 칠수 있다.

 

문외한(門外漢) 그 일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

 

문일지십(聞一知十)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미루어 앎.

《出典》'論語' 公冶長篇 공자의 제자는 삼천 명이나 되었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제자가 72명이나 되었으며 철인(哲人)으로 꼽힌 사람도 10명이나 되었다. 제자 중에 자공(子貢)은 재산을 모으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어 공자가 주유천하(周遊天下)할 때의 경비 대부분을 대었고 학문의 재주와 재치도 뛰어났다. 그러나 말없이 묵묵히 스승의 뒤를 따르는 안회(顔回)는 매우 가난했으나 삼 개월 동안 어질었다고 인(仁)을 허여(許與)받은 유일한 제자였다. 안회와 자공의 길고 짧음에 대하여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자공은 "사(賜)가 어찌 감히 회(回)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회(回)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사(賜)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는 자공의 대답에 만족했다. 역시 자공은 스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자신을 알고 있었다. "네가 안회만 못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이는 스승인 공자의 가슴에서 기뻐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子謂子貢曰 女與回也 孰愈對曰 賜也 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 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 弗如也.

문전성시(門前成市) 방문객이 많음을 비유한 말.

《出典》'漢書' 孫寶傳 鄭崇傳 전한(前漢) 말, 11대 황제인 애제(哀帝 : B.C 6-7) 때의 일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조저의 실권은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을 포함한 왕씨 일족으로부터 역시 외척인 부씨(傅氏), 정씨(丁氏) 두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인 애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동(美童)과 동성연애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중신들이 간(諫)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그 중 상서 복야(尙書僕射) 정숭(鄭崇)은 거듭 간하다가 애제에게 미움만 사고 말았다. 그 무렵, 조창(趙昌)이라는 상서령(尙書令)이 있었는데 그는 전형적인 아첨배로 왕실과 인척간인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어느날 조창은 애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숭(鄭崇)의 집 문 앞이 저자를 이루고 있습니다.[門前成市]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오니 엄중히 문초하시옵소서." 애제는 그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문전은 저자와 같다[君門如市]'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예, 폐하. '신의 문전은 저자와 같사오나[臣門如市]' 신의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옵니다. 황공하오나 한 번 더 조사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애제는 정숭(鄭崇)의 소청을 묵살한 채 옥에 가뒀다. 그러자 사예(司隸)인 손보(孫寶)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讒言)을 공박하고 서인(庶人)으로 내쳤다. 그리고 정숭(鄭崇)은 그 후 옥에서 죽고 말았다.

[주] 삭탈 관직 : 죄 지은 벼슬아치의 벼슬과 품계[品階:직품(職品)과 관계(官階)]를 빼앗고 사판(仕版: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깎아 버림.

尙書令趙昌?諂 素害崇 知其見疏 因奏崇 與宗族通 疑有姦 請治 上責崇曰 君門如市人 何以欲禁切主上 崇對曰 臣門如市 而臣心如水 願得考覆 上怒下崇獄窮治 死獄中.【유사어】문전여시(門前如市), 문정여시(門庭如市) 【반의어】문전작라(門前雀羅),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문전옥답(門前沃畓) 집 앞 가까이에 있는 좋은 논, 곧 많은 재산을 일컫는 말

 

문전작라(門前雀羅) 문 앞에 새그물을 친다는 뜻으로, 권세를 잃거나 빈천(貧賤)해지면 문 앞(밖)에 새그물을 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방문객의 발길이 끊어진다는 말.

[원말]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반의어] 문전성시(門前成市). [출전]《史記》〈汲鄭列傳〉. 백거이(白居易)의〈寓意詩〉 전한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급암(汲?)과 정당시(鄭當詩)라는 두 현신(賢臣)이 있었다. 그들은 한때 각기 구경(九卿:9개 부처의 각 으뜸 벼슬)의 지위에까지 오른 적도 있었지만 둘 다 개성이 강한 탓에 좌천ㅗ면직ㅗ재등용을 되풀이하다가 급암은 회양 태수(淮陽太守)를 끝으로 벼슬을 마쳤다. 이들이 각기 현직에 있을 때에는 방문객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나 면직되자 방문객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고 한다. 이어 사마천(司馬遷)은《사기(史記)》〈급정열전(汲鄭列傳)〉에서 이렇게 덧붙여 쓰고 있다. "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賓客)이 열 배로 늘어나지만 세력이 없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또 적공(翟公)의 경우는 이렇다.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자 빈객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붐볐다. 그러나 그가 면직되자 빈객은 금새 발길을 끊었다. 집 안팎이 어찌나 한산한지 '문 앞(밖)에 새그물을 쳐 놓을 수 있을 정도[門外可設雀羅]'였다. 얼마 후 적공은 다시 정위가 되었다. 빈객들이 몰려들자 적공은 대문에 이렇게 써 붙였다.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곧 사귐의 정을 알고

[一死一生 卽知交情(일사일생 즉지교정)]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貧一富 卽知交態(일빈일부 즉지교태)]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은 나타나네

[一貴一賤 卽見交情(일귀일천 즉현교정)]

물각유주(物各有主) 물건에는 제각기 임자가 있음.

 

물경소사(勿輕小事) 조그만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라.

 

물경지교(勿頸之交)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마음을 변치 않고 사귀는 친한 사이( =刎頸之交)

 

물실호기(勿失好機) 모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음.

 

물심일여(物心一如) 마음과 형체가 구분됨이 없이 하나로 일치한 상태

 

물아일체(物我一體) 주관과 객관이 혼연이 한덩이가 됨.

 

물외한인(物外閒人) 물질에 관심없이 한가로이 자연 속에 노니는 사람.

 

미대부도(尾大不掉) 동물의 꼬리가 너무 커지면 흔들지 못함. 신하의 세력이 너무 커서 임금 이 자유로이 하지 못함을 말함.

 

미도불원(迷道不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길을 헤맨다. 멀지 않다는 뜻. 즉, 곧 본길을 찾게 됨을 의미.

 

미망인(未亡人)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할 것을, 아직 죽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과부가 스스로를 겸손하며 일컫는 말.남편이 죽고 홀몸이 된 여자.

 

미봉(彌縫) 임시변통으로 순간을 모면하다.

[유사어] 고식(姑息). 임시변통(臨時變通). [출전]《春秋左氏傳》〈桓公五年條〉 빈 구석이나 잘못된 것을 그때 그때 임시 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해서 꾸며 댐.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환왕(桓王) 13년(B.C. 707)의 일이다. 환왕은 명목상의 천자국(天子國)으로 전락한 주나라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정(鄭)나라를 치기로 했다. 당시 정나라 장공(莊公)은 날로 강성해지는 국력을 배경으로 천자인 환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환왕은 우선 장공으로부터 왕실 경사(卿士)로서의 정치상 실권을 박탈했다. 이 조치에 분개한 장공이 조현(朝見:신하가 임금을 뵙는 일)을 중단하자 환왕은 이를 구실로 징벌군을 일으키고 제후(諸侯)들에게 참전을 명했다. 왕명을 받고 괵(?)채(蔡)위(衛)진(陳)나라 군사가 모이자 환왕은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 정나라를 징벌하러 나섰다. 이런 일이 곧 천자(天子)의 자장 격지(自將擊之)는 춘추 시대 240여년 동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윽고 정나라의 수갈(繡葛:하남성 내)에 도착한 왕군(王軍)은 장공의 군사와 대치했다. 공자(公子)인 원(元)은 장공에게 진언했다. "지금 좌군(左軍)에 속해 있는 진나라 군사는 국내 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전의(戰意)를 잃고 있습니다. 하오니 먼저 진나라 군사부터 공격하면 반드시 패주할 것입니다. 그러면 환왕이 지휘하는 중군(中軍)을 혼란에 빠질 것이며 경사(卿士)인 괵공(?公)이 이끄는 채ㅗ위나라의 우군(右軍)도 지탱하지 못하고 퇴각할 것입니다. 이 때 중군을 치면 승리는 틀림없습니다." 장공의 원의 진언에 따라 원형(圓形)의 진(陣)을 쳤는데 이는 병거(兵車:군사를 실은 수레)를 앞세우고 보병(步兵)을 뒤따르게 하는 군진(軍陣)으로서 병거와 병거 사이에는 보병으로 '미봉'했다. 원이 진언한 전략은 적중하여 왕군은 대패하고 환왕은 어깨에 화살을 맞은 채 물러가고 말았다. [주] 자장격지(自將擊之) : 남을 시키지 않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움.

미생지신(尾生之信) 굳게 신의를 지킨다는 뜻. 또는 어리석고 지나치게 정직함을 이르는 말.

《出典》史記 蘇秦列傳 《出典》莊子 盜甁篇 춘추시대, 노(魯)나라에 미생(尾生 : 尾生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사나이였다. 어느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定時)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이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교각(橋脚)을 끌어안은 채 익사(溺死)하고 말았다. "尾生은 믿음으로써 여자와 더불어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기약하고, 여자가 오지 않자, 물이 밀려와도 떠나지 않아, 기둥을 끌어안고서 죽었다." 信如尾生 與女子期於梁下 女子不來 水至不去 抱柱而死. ① 전국시대, 종횡가로 유명한 소진(蘇秦)은 연(燕)나라 소왕(昭王)을 설파(說破)할 때, <신의있는 사람의 본보기>로 앞에 소개한 미생의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② 그러나 같은 전국시대를 살다간 莊子의 견해는 그와 반대로 부정적이었다. 莊子는 그의 우언(寓言)이 실려 있는《莊子》'盜甁篇'에서 근엄 그 자체인 孔子와 대화를 나누는 유명한 도둑 도척(盜甁)의 입을 통해서 미생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인간은 책형(?刑)당한 개나 물에 떠내려간 돼지 아니면 쪽박을 들고 빌어먹는 거지와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명목(名目)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 【동의어】포주지신(抱柱之信)

밀운불우(密雲不雨) 짙은 구름이 끼어 있으나 비가 오지 않음. 어떤 일의 징조만 있고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비유. 위에서 내리는 은택이 아래가지 고루 내려지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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