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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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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 홀먼, '도둑 맞은 혀'

 

인문학은 결코 이론으로만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을 그 대상으로 하기에 어떤 형식으로든 사람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을 알지 못하면 공허한 말장난이 되기 쉽다. 서양 고중세 철학을 공부하는 내가 늘 부딪히는 한계는 바로 이 것이었다.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을 공부하면서도 그들의 삶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 문화사(文化史)나 이론서들은 그들의 삶을 서술하고 있을 뿐 생생하게 느끼게 해 주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잘 쓰여진 한 편의 소설은 수 백 권의 이론서보다 가치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푸코의 '장미의 이름'인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수년간 고심하며 공부했던 중세의 잡다했던 철학적 논증들이 왜 그토록 그 시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가슴으로 알 수 있었다. 수년간의 공부로도 넘지 못했던 시대의 간격을 소설 한 권이 넘게 해 준 셈이다. 세리 홀먼의 소설 '도둑 맞은 혀'도 이런 깨달음을 주는 '인문학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이 소설은 배경은 15세기말의 중세 유럽.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는 유럽의 성지 순례단이다. 책을 펴는 순간부터 이미 나는 떠나는 성지 순례단 속에 묻어 있다. 순례선(巡禮船) 속에서 죽은 자의 장례식, 배를 탔을 때 지켜야 할 사항들, 음식 저장 방법,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화제, 모든 것이 영화를 보듯이 시각적으로 펼쳐진다. '장미의 이름'보다 이 소설이 나은 점은 바로 이 것이다. '장미의 이름'이 무수한 기호와 어려운 철학적 암시로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면, '도둑 맞은 혀'에서는 일상의 일들을 자연스럽게 펼치며 그 시대 그 상황 속으로 자연스럽게 독자를 빨아드린다. 어려운 지적 탐험이라는 느낌을 가질 틈도 없이 어느덧 중세 말 어느 장소에 독자가 서 있게 만드는 것이다.

 

, 이 소설의 재미는 '성인(聖人)'의 유해라는 중세 특유의 소제에도 있다. 성인의 유해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기 위해' 각지에 흩어져 있다.

 

발가락은 이태리 어느 성당에, 혀는 로도스 섬 성당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소설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성 카타리나의 유해들의 도난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화자인 펠릭스 수사는 어린 시절 떠돌이 수도자가 보여준 성 카타리나의 유해를 보고 천 년 전에 죽은 그녀를 자신의 영적 아내로 여기고 수행하는 사람이다. 천사들에 의해 그녀가 묻혀 있었다는 시나이 산에 가보는 것이 그의 일생 일대의 목표였다. 그러던 중 부유한 투허 경의 후원을 받아 마침내 성지 순례를 떠나게 된다. 그런데, 성지로 가는 길 곳곳에 있는 성 카타리나의 유해를 받든 성당을 갈 때마다 그녀의 유해가 없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카타리나의 혀'라고 불리는 아르시노에란 여인이 이 도난 사건과 관련이 있음이 서서히 드러나고, 계속해서 카타리나의 유해를 훔쳐서 시나이로 향하는 이 여인과 이를 추격하는 그녀의 오빠 번역자 니콜로 사이의 쫓고 쫓기는 상황과 이들과 펠릭스 수사와의 관계가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런 행동을 하는 두 사람의 '중세적' 동기이다. 아르시노에는 각지에 흩어진 카타리나의 유해를 모아 원래의 무덤에 갖다 놓음으로써 그녀에게 휴식을 주려는 사명을 갖고 필사적으로 유해를 모아 도주한다. 반면에 니콜로는 아르시노에를 이용하여 신의 뜻을 자신이 직접 번역하는 작업-즉 성 카타리나를 그녀의 육체로 대치하는 작업을 하려 한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의 행동은 정신 질환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들의 행동을 우리 현대인의 것이 아닌 중세인의 것으로 보게 만든다. 절실한 믿음과 신께 다가가려는 욕구, 이런 것들이 15세기 성지의 분위기와 함께 치밀하게 구성되어 무언가 강렬한 메시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나로서는 이 글이 주려는 함축이 무엇인지 잡아내기 힘들었다. 이 점이 '장미의 이름'보다 못한 점이다. '장미의 이름'이 오르게 노인을 통해 시대적 오류와 아집을 드러내고 이를 비판했다면, '도둑 맞은 혀'에서는 이 만한 비중을 가지고 강한 정신적 무게를 느끼게 하는 인물이 없다. 선악의 명확한 인물 성격 대비와 수 없는 극적 반전들은 할리우드 영화 같은 재미를 주지만 정작 던지고 싶은 작가의 메시지에는 '장미의 이름'같은 호소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번역자의 말대로 '인문학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지루하고 무미건조해 보이는 역사책의 중세의 모습을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로 맛깔스럽게 살려내고 경험하게 해준다는 점. 모처럼 느끼는 생생한 감동이었다.

 

교사 안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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