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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하는 인간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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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호이징가,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

 

 

인간을 특징 지워주는 고유한 속성은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유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이징가는 이 둘의 개념을 포괄하는 더 큰 개념 틀을 제시한다. 그것은 '놀이'이다.

 

호이징가는 우리가 오랫동안 문화에 있어서 놀이가 갖는 중요성을 간과해 왔다고 말한다. 사실, '놀 수 있다'는 것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생존을 위한 움직임은 기계적 물리법칙을 따르는 것일 뿐이지만, '놀이'를 한다는 것은 물리법칙을 벗어난 그 이상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삶의 의미는 '놀이함'에서 나온다. 생존을 쫓아서 살아 간다는 점에 있어서 인간은 여타의 다른 생물들과 다를 바 없다. 생존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여가를 갖고 놀이할 때, 비로소 인간 삶의 독특한 의미가 생겨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문화는 놀이로부터 나왔으며, 또한 '놀아지는' 것이다.

 

그는 철학적인 논변을 통하여 놀이에 접근하지 않는다. 문화 속에서의 놀이가 가진 생동적인 측면을 도식화시키고 박제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사적이고 어원학적인 접근을 통하여 문화 속에 녹아 있는 놀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이렇게 놀이에 접근함에 앞서, 그는 놀이의 형식적 측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로, 놀이는 현실적인 다른 목표를 의도하지 않고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하여 행해지는 활동이다. 두번째로, 놀이는 일상과 분리된 특정한 시간, 공간 하에서만 행해진다. 예컨대, 술래잡기 놀이는 놀이 성원들이 약속한 공간, 시간 하에서만 행해진다. , 놀이 참여자들은 ;이 전봇대에서 저 전봇대까지만 움직일 수 있다', '점심 먹을 때까지만 한다' 등등의 언명으로 놀이하는 시공을 규정한다. 또한 이 놀이 공간 안에서는 일상과는 다른 규칙들이 통용된다. '술레는 쫓는 자이고 나머지는 술레를 피해 도망가야 한다'와 같은 일상에 없는 규칙들이 시행되는 것이다. 이 규칙들을 놀이 성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놀이는 더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서 놀이의 세 번째 특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엄격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으로 보았을 때, '경합', 경쟁도 놀이에 포함된다. 우리가 제의적인 고대의 경기들을 살펴 볼 때, 이 점은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경기의 참여자들이 신을 위한다는 경건함 때문에 여타의 다른 목적을 위해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경기장이라는 특정한 시공 안에서 경기가 행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경기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행해진다는 점에서 경긱는 놀이의 형식적 측면에 따라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종교의 제의적 요소들도 놀이 개념 속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제의는 일상 생활과는 다른 성스러움을 위해 행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제의는 성소와 축일과 같은 특정한 장소와 시간 하에서, 특정한 형식에 따라 행해진다. 이것은 놀이의 세 측면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놀이가 제의적 영역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놀이'는 유희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진지함'의 개념을 포함하는 더 넓은 것이다. 놀이가 진지한 것일 때, 형식적 측면에서 문화의 모든 현상은 놀이 안에 포함될 수 있다. 예컨대, 재판이란 재판정이라는 '특수한 장소' 재판 시간이라는 '특수한 시간' 안에서, 법률이라는 '특수한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놀이'이다.

 

이처럼 문화는 곧 놀이일 뿐만 아니라, 놀이는 문화를 창조한다. 호이징가는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을 철저하게 놀이 안에서 찾는다. 예컨대, 그는 신학적, 철학적 지식의 기원을 '수수께끼 놀이'에서 찾는다. 그는 지식의 기원을 이에서 찾을 때, '베다'와 같은 고대 경전의 내용의 다양성과 불일치성을 해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 경전의 지식 하나하나가 삶의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수수께끼 물음의 답변이기 때문에, 내용이 재각각으로 다양해 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보여주듯이, 원천에 있어서 철학적 지식은 논쟁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논쟁은 삶의 다양한 현상들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는 수수께끼적 성격과 쟁의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처럼 놀이는 '놀아짐으로써' 다양한 지식을 파생시켰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 방면의 예술도 그 형식에 있어서 놀이의 영역에 포함되며, 놀아지면서 발전한 것이다.

 

이어 호이징가는 자신의 박학한 지식을 동원하여, 인류 문화가 놀이로서 '놀아지며' 발전해온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놀이로서의 문화'라는 양상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노동과 생산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게 됨에 따라 문화와 놀이가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성과물을 가져다주지 않는 놀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단순히 놀기 위한 놀이는 퇴폐적인 것으로 죄악시되기 시작한다.

 

호이징가는 이후 현대에 있어서도 문명은 놀이적 요소를 점점 상실해 가고 있다고 말한다 .현상적으로 볼 때 그의 견해는 이상하게 들인다. 현대 문명처럼 놀이로 충만한 문명이 어디 있느가? 날로 번창하는 스포츠만 하더라도 그렇다. 스포츠는 완벽한 놀이가 아닌가?

 

그러나 스포츠는 더 이상 고대의 올림피아 제전처럼 싱싱한 '놀이'가 아니다. 현대의 상업화 한 스포츠는 그 자체를 위해서 행해지지 않는다. 프로 스포츠가 보여주듯이, 이제 놀이는 생계를 위한 하나의 직업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들이 즐기는 스포츠도 진정한 놀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놀이'였던 고대의 제의적 경기들은 인간의 삶과 유대 되어 있어, 사회의 여러 가지 문화 현상들을 파생시켰던 반면, 현대의 스포츠는 삶과는 완전히 유리된 순수한 형식 속에서 이루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의 문화, 윤리와는 전혀 다른 축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그것은 문화를 산출하지 못한다. , 스포츠는 형식상 놀이이되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그릇된 놀이'로서 놀아지고 있을 뿐이다.

 

호이징가는 현대 문명의 놀이의 상실을 문명비판으로 연결시킨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놀이 위에 기초한다. 전쟁을 생각해 볼 때, 이 점은 명확해 진다. 전쟁이 놀이일 경우, 전쟁은 특정한 시공 안으로 한정된다. 또한, 전쟁이 놀이인 한, '반드시' 지켜져야 할 규칙들이 생겨나게 된다. 민간인 살상 금지, 포로의 보호 등이 그것이다. 놀이의 성격을 지닐 경우에만 전쟁은 '인간적'으로 행해질 수 있다. 반면, 전쟁이 놀이가 아닐 경우, 규칙은 무시된다. 이제 이기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무자비한 살상은 공공연하게 행해진다.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울타리 쳐 질 수 있는 것들은 더이상 존중되지 않는다. 현대의 문명은 그 페어플레이를 모르는 '미숙성'으로 말미암아, 문화가 지닌 놀이적 측면을 망가뜨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존엄성이라는 문명의 기초까지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인류의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고대의 신성한 놀이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과 같이 물질의 가치를 좇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생존을 위한 짐승들의 투쟁으로 점점 몰아가게 될 것이다. 문명은 우리에게, 놀이 정신 속에서 상대방을 인정하고, 규칙을 준수하는 페어플레이 정신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호이징가가 이 책을 저술한 때는 2차 대전이 한참 진행되던 때였다. 그는 네덜란드를 침략한 독일군에 의해서 가족의 면회조차 금지당한채 가택에 연금된 상태였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그의 문명 비판이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것임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물론, 그가 처해 있던 시대 상황과는 달리, 현대 문명은 이제 놀이적 요소를 다시 획득해 가고 있는 듯하다. 물질 문명의 발달은 인간을 물질로부터 오히려 해방시키고 있다. 생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인간들은, 물질적 풍요보다는 정신적 풍요를 더 중시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여가의 증가는 놀이적 활동을 활성화시켰고, 그에 따라 삶의 가치는 더 증가하고 있다. 그가 비판했던 전체주의는 이제 쇠퇴하고 다원적 철학이 성행하고 있다. 그러나 변화한 시대 상황이 이 책의 가치를 희석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의 가치를 더 높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비로소 물질 추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우리 문명에게 새로운 페러다임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같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당연시 되었던 물질에 대한 무한한 추구는 환경 파괴,인간 소외 등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그것은 '미숙한' 인류가 행하는 '거짓된 놀이'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 것은 비인간화의 깊은 수렁으로 인류를 몰아넣고 말았다. 물질적 가치 추구가 공허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론을 정립하는 것이 매우 시급하다. 물질에 묻혀 있던 순수 인문학의 역할이 다시 중요시되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교사 안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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