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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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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

 

정신병자는 자신이 미친 사람이란 것을 모른다. 자신이 정상이 아님을 깨달아야 비로소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산업 사회도 마찬가지다. 현대 산업 사회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를 병들게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 설사 깨달았다고 해도 나타난 몇몇 증상에만 집착할 뿐 병의 원인을 보지 못한다.

 

특정 증상만을 없애는 대증요법(對症療法)이 병을 고치는 것은 아니다. 근본원인을 찾아 없애야 병을 치료할 수 있다. E.프롬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사회 문제 해결에까지 적용한 후기 프로이드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현대 산업 사회의 문제를 그 심리적 기초에서부터 접근하여 진단하고 치료하고자 한다.

 

프롬에 의하면 현대 산업 사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에 있다. 산업 사회는 사람들을 '그가 갖고 있는 것'에 의해 평가한다. 어떤 경력과 능력을 '갖고 있는지', 어떤 배경과 성장 환경을 '갖고 있는지', 자동차는 어떤 것을 타고, 몇 평 짜리 집을 '갖고 있는지' 등등으로 말이다. 이런 '소유란 삶의 방식'에서는 더 많이 갖는 것이 더 나은 인간으로 평가받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한다.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정받기 위해서 말이다. '과시적 소비'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필요해서라기보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임을 보이기 위해 BMW를 몬다.

 

그러나 많이 소유할수록 반드시 더욱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불행해 질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는 미친 듯이 달려가 성공을 거머쥔 후에 오히려 불행해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해도 그것이 곧 자기자신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갖고 있던 모든 것은 언제든지 잃을 수 있기에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 성취한 사회적 지위가 곧 자기 자신인 것도 아니다. 지위란 언제든지 뺐길 수있다. 따라서, 애써 얻은 사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일 중독자(workaholic)가 되어 자신의 생활을 빼앗기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유란 삶의 방식'에 집착하는 한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 프롬은 진정 행복해 지려면 오히려 소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에 집착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롬에 따르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소유' 개념은 인류 역사 전체로 보았을 때는 오히려 낯선 개념이라고 말한다. 소유란 삶의 방식은 서구 산업 사회의 생존방식일 뿐이다. 예수, 석가모니 등 이전에 거의 모든 '인류의 스승'들은 '존재의 삶의 방식'을 강조했었다.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갖고 있으면 된다. 우리가 불행해지는 것은 생존의 필요성을 넘어서서 더 많은 물질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의 스승'들은 행복한 삶의 조건으로 '무소유의 삶', '존재의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존재의 삶의 방식이란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게 살아가는 방식'이다. 소유에 집착한 사람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일한다. 그러나 자기 존재에 충실한 사람은 그 일이 자신의 삶을 더욱더 충실하게 해주기 때문에 일에 열중한다. , 소유에 집착한 사람은 자기 것을 빼앗아 갈까봐 다른 이들에게 적대적이지만 존재에 충실한 사람은 빼앗길 게 없기에 다른 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지식에 있어서도 소유에 집착한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이 파괴될까봐 자기 정당화에 급급한 반면에, 존재에 충실한 사람은 더 나은 완성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자기 지식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인류가 산업화가 가져온 불행과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산업 사회의 '소유란 삶의 방식''존재란 삶의 방식'으로 바꿔야 하는 것이다.

 

프롬은 '존재란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새로운 사회를 다음과 같이 그린다. 첫째, 새로운 사회는 무한 성장보다는 필요에 의한 선택적 성장을 지향한다. 둘째, 물질적 이익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한다. 쾌락이나 다른 사람의 인정(認定)이 아닌 진정한 내면적 깨달음에 삶의 중심이 있다는 뜻이다. 셋째, 사람들은 기본적인 삶의 안정을 보장받으며 관료제에 얽메이지 않고 주체적인 결단에 의한 삶을 살아간다.

 

나아가 프롬은 존재가 지배하는 새로운 삶을 이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까지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소비자 운동을 통한 건전한 소비를, 노동자가 단순히 월급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의 주체로서 일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산업 민주주의', 그리고 관료제가 아닌 인도주의적 조직 운영을, 나아가 능동적 참여를 위한 최대한의 분권화를 그 실현 방법으로 제시한다.

 

[소유냐 존재냐]는 산업 사회 페러다임이 지배하던 1976년에 출간되었다. 후기 산업 사회에 접어든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 책에서 제기한 방법들은 이미 현실화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이 점은 '존재란 삶의 방식'이 다소 생소하고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설득력 있고 실현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프롬은 더 나아가 중세적인 기이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소유''존재'를 구별하는 '최고 문화회의'를 구성한다든지(우리나라로 친다면 간행물 심의위원회가 확대된 형식일 듯하다), 전 국민을 300인 단위로 논의 집단으로 묶는다든지 말이다. 그러나 이 것은 프롬이 살았던 시대 상황 때문일 듯하다. 아마도 프롬이 현대의 인터넷을 통한 쌍방향 의사 소통 방법을 보았다면 다른 식으로 주장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이미 현대의 고전(古典) 반열에 오른 책이다. 프롬은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쓸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학자이다. [소유냐 존재냐]에서도 프롬의 능력은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다. 각 장과 장이 다소 일관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주는 메시지는 쉽고 명료하다. [고전][고전]이라 불리는 대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소유냐 존재냐]는 고전이라 불릴 만한 깊이와 가치가 있는 책이다.

 

교사 안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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