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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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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H.W & DJ 잰슨

인간은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꿈을 꾼다. 동물도 꿈을 꾼다.고양이는 잠을 자면서 가끔 귀를 씰룩거리거나 꼬리를 잡아채거나 한다. 또한, 개는 마치 싸움이라도 하듯이 으르렁거리거나 낑낑거리며 허공에 앞발질을 하기도 한다. 또 동물들은 깨어 있을때면 '사물을 본다'. 그래서 고양이는 컴컴한 찬장 속을 들여다볼 때면 별다른 이유 없이도 등의 톨을 곤두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흠칫 놀라게 되면 몸에 소름이 돋는다.

이런 사실들은 상상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은 상상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서로 말로써 주고받는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셈이며, 그것을 연필로써 그려낸다면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상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거나 그려 내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력이 작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몸이 아파 꼼짝할 수 없이 누워있을 때, 천장에 금이 간 것을 오랫동안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돌연 동물처럼도 보이고 나무같이도 보인다. 우리의 상상력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선으로 메워져 있다. 때로는 접힌 종이 위의 잉크 얼룩([그림1])조차도, 설령 그것이 분명 우연히 생긴 것 일지라도 우리에게 뭔가 다른 여러 가지 사물을 생각하게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찾아 내는 데 잉크 얼룩 테스트를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우리 자신의 성질에 따라 같은 알룩을 놓고도 다른 그림으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 또한 자신의 상상력을 촉발시키기 위하여 잉크얼룩을 사용하기도 한다. 살바도르 달리의 <인물이 있는 풍경>([그림2])을 주의 깊게 바라보노라면, 거기에 나타난 바위∙해변바위∙구름 등 주요한 형체들은 실제로 우연하게 이루어진 잉크 얼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달리가 의도한 것은 다만 이 얼룩을 '통하여'그림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또한 그것을 볼 수 있도록 거기에 없는 선들을 채워넣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가 잉크 얼룩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예술 작품에서 그린다는 것의 의미가 감소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보통 '만든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흔히 '만든다'고 하면, 기술자나 제작자가 처음부터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제작해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창조적인 과정은 이와 반대로 일련의 상상력으로 구성되며, 미술가들은 자신의 재료에 형태를 부여해 가면서 상상력을 하나의 작품으로 실현해 낸다. 제작자 자신조차도 그것이 실제로 완성될 때까지는 그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은, 확실히 신기하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무언가를 찾아 낼 때까지는 찾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숨바꼭질 같은 것이다.

상상력이 작용하는 방법은 모든 사람이 비슷하다. 그것은 또한 일찍이 동굴 속에 살던 원시인들이 동굴 벽에 처음 그림을 그렸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오늘날 우리들이 상상하는 대상, 그리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는 방법이 달라졌을 따름이다. 바로 이 변화가 회화의 역사인 것이다.

동굴인의 마술적인 그림

약 3만 5천 년 전의 구석기 시대에,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최초의 그림이 그려졌을 때 인간은 동굴 속에서 살았고,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충분한 먹을 것을 찾는 일이었다. 그들은 아직 가축 기르는 법을 몰랐고, 농사짓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음식 공급은 주로 사냥에 의존하였다. 사냥이 잘 되지 않으면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잡기 쉬운 새나 물고기, 작은 동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는 먹고 살기에 충분치 못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한번만 잡으면 몇주일씩 충분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슴, 들소 같은 큰 짐승들을 잡기를 바랐다. 그들은 이러한 큰 짐승을 잡기를 몹시도 갈고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왜냐 하면, 그들은 아직 가장 간단한 무기밖에 사용할줄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들은 금속 재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그들이 가진 도구란 모두 나무∙돌∙ 뼈 등으로 만들어진 것들뿐이었다. 게다가 말을 탈 줄 몰랐기 때문에 걸어서 사냥을 다녀야만 했다.

따라서, 동굴인들의 마음 속이 언제나 음식물이 되는 큰 짐승 사냥과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들이 이 들짐승들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동굴인들의 그림은 거의 모두 이 짐승들 그림이었고, 그것이 모두 아주 힘세고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을 보여 준다는 사실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동굴인들은 어떻게 이런 능숙한 솜씨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엇을까? 아직 우리는 그 이유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그림들이 거칠고 울퉁불퉁한 동굴의 벽에 그려졌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이 그림을 그리는 발상은 치 잉크 얼룩이 우리에게 뭔가 아이디어를 제공하듯, 벽면의 울퉁불퉁한 면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서이 크다. 어떤 굶주린 동굴인이 동굴 벽을 쳐다보다가 어딘가의 울퉁불퉁한 부분이 짐승처럼 보인다고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불더미 속에서 숯을 꺼내 윤곽선을 그렸을 것이다. 그는 돌출부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짐승의 부분들을 마저 그려넣으면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동굴 벽면의 돌출 부분 없이도, 이러한 그림을 혼자 힘으로 그리는 법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3]과 같이 자신감 넘치고 세련된 들소를 그릴 수 있기까지에는, 모르긴 해도 수천 년에 걸쳐서 서서히 발저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림 3]에서 여러분은 동굴 벽면에 짐승들이 모두 질서 없이 무리지어 있는 긴 행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하나하나씩 떼어서 보면, 서로 다른 그림들이 엉겨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왜 동굴인들은 한 그림 위에 또다른 그림을 겹쳐 그려서 작품을 망쳐 놓은 것처럼 그린 것일까? 그들은 이 그림이 하나의 장식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굴 벽화들이 비록 이처럼 뒤죽박죽으로 그려져 있지 않은 영우에도, 그림들이 그려진 동굴은 한결같이 그 속이 아주 어둡거나 들어가기 힘든 곳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이런 점이 확인된다.

만약 동굴인 예술가들이 단지 기쁨을 위해서만 동물화를 그린 것이었다면,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동굴 입구 가까이에 그림을 그려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 그림은 동굴 깊숙이 보이지 않는 곳에 그려졌기 때문에, 이 동굴 벽화들은 최근에 와서야, 그것도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사실상[그림 3]의 동굴은 1940년에, 개를 끌고 소풍 갔던 몇챁몇 소년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갑자기 개가 없어져 버렸는데, 땅 밑 어디에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보이질 않았다. 한참 후에야 소년들은 무성한 잡초와 가시 덩굴로 덮여 있던 구멍으로 개가 빠져 동굴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 그림은 무엇을 위해서 그려진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사냥 마술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어떤 동물에는 화살이나 창이 꽃혀 있기 때문이다. 동굴인들은, 짐승 그림을 '죽임'으로써 짐승의 살아 있는 영혼을 죽였고, 그렇게 해서 짐승 그 자체를 죽인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그들은 그림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창으로 찔렀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더 강해지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제 그드은 사냥을 나갈 경우에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들소사냥에 나가서도 더 나은 성과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한번 그림을 '죽이기'만 하면 그들은 더 이상 그 그림에 유념하지 않았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물을 두 번 죽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그림에 그려진 동물도 두 번 죽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 번 사냥 나갈 때에는, 그들은 우선 '죽이기'위한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야만 했다.

동굴인들이 그들의 동물 그림에 그토록 고심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결국 그들은 그림을 단 한 번만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실제 모습과 똑같이 닮게 그릴수록, 이 마술의 효력이 잘 나타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그림의 주요 목적은 '죽인다'는 것보다 동물을 '제작한다'는 점에 있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계절제를 통해 그들의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면서 동물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게다가 유럽 중부의 기온이 점차 따뜻해지면서 큰 무리의 사냥감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어쨋든 그러한 확신감을 주는 그림을 제작하는 데는 상당한 숙련이 필요했다. 동굴인 중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방면, 즉 예술적 재능이 탁월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얼마 후, 이런 사람들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사냥하러 나간 동안에도, 동굴에 남아서 그림을 그리도록 허락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3만 5천 년 전에도 화가는 비록 마술사와 같이 생각되었지만, 특수한 유(類)의 인간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제 이런 식의 마술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 있는 실물과 그것을 그린 그림과를 혼동할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우리의 이성이야 어떻든 때때로 우리의 감정이 어지럽게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갑자기 말다툼하고 나서는, 평소에 사랑하던 사람의 사진을 찢어 버리거나 하는 일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지만, 그로부터 커다란 감정적인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고와 감정의 차이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아는 바가 적었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그림과 실물을 혼동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술은 언제나 실제 사물의 본연의 상태뿐만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인간의 느낌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흔히 안다는 것과 느낀다는 것,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작품을 결정해 왔다. 그래서 그림은, 예술가가 보거나 알거나 했던 것에 관심을 갖고 이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느낀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인지에 따라 서로 다른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또한 그가 '얼마만큼'이나 보았고, 알고 있고, 또 느꼈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차이를 보여 주게 되는 것이다.

죽은 이를 위한 그림 - 이집트

동굴 벽화로써 우리는 석기 시대의 생활에 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상상력이 작용하는 방식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의'상상력이라고 말한 것은 동굴인과 우리들 자신의 마음이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들의 그림을 그렇듯 잘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동굴인과 우리들 사이의 차이점은 어떤 정신적인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사물에 있다. 인간이 어떻게 해서 석기 시대를 보내고 또 몇천 년을 거쳐오면서, 오늘날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서서히 변해 왔는가를 이해하는 데도 그림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가리켜 우리는 바로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를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석기 시대의 인간과 오늘날 우리들과의 주요한 차이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동굴인들은 육체적인 힘은 우리보다 훨씬 강했겠지만, 그들의 생활은 우리의 생활보다 훨씬 위험했고 또 재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사냥하던 큰 짐승들은 실제로 그들의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왜냐 하면, 인간은 거의 완전히 동물들에 의존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이 이동하면 그들 또한 이동해야 했다. 따라서, 인간은 집을 지을 수도 없어서 겨우 조잡한 대피소만을 만들 정도였다. 사냥할때만 공동으로 일했다(당시 화가들도 그 마술로써 이 일을 도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수천 가지 복잡한 방식으로 일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동굴인보다도 훨씬 서로 의존하는 경향이 짙다.

그런데 이런 현대적인 삶의 방식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석기 시대 사람들보다 '질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생각하고 나서 '무엇을' 계획한다. 그러나 동굴인들의 생활이란 그들의 그림만큼이나 어지럽고 무질서한 것이었다. 어째서 인간은 질서의 필요를 깨닫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이것이 먹을 것에 의해 통제되던 단계에서 해방되어 오히려 그들이 먹을 것의 공급을 조절하는 방식을 발견하고 나서부터였다. 우선 그들은 이전에 사냥하던 어떤 짐승들을 길들이고 키우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양·염소·소·낙타 따위를 이끌고 이리저리 풀밭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이 되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더 효과적인 음식을 공급하는 법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다스려 씨앗을 거둬 곡물을 재배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따뜻한 기후와 물 공급이 수월한 곳이 필요했다. 때문에 최초의 농사꾼들이 이집트의 나일강과 같은 큰 강의 연안을 따라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고대 이집트인들을 우리는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유럽과 아메리카의 역사는 사실상 이집트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곡식의 씨를 뿌릴 때, 그들은 또한 생활 방식이라는 씨도 뿌려 오늘날 우리의 생활과 같은 양식으로 자라온 것이다.

[그림4]는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그림의 일부분이다. 5천여 년 전, 나일강변의 히에라콘폴리스라 불리는 곳에 있는 사원인지 무덤인지의 벽면에 그려진 것이다. 여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몇몇 동물과 그리고 동물과 싸우는 사람, 자기들끼리 서로 다투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커다랗게 그어진 흰 줄은 배를 그린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집트인들은 사냥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굴인과는 달리 그것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갖가지 연장을 사용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벽돌과 돌로써 매끈한 벽을 가진 견고한 집을 지을 수 있었고, 또한 강을 오르내리는 배도 만들 줄 알았다. 나일강 계곡 곳곳에는 독립한 종족들과 나라들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림 오른쪽의 아래 구석에 있는 두 사람을 주의해 보자. 점이 있는 흰 사람이 아마도 다른 종족인 듯한 검은 사람을 쳐서 넘어뜨리고 있다.

이 그림을 동굴 벽화와 비교해 보면, 인물의 표현에서 조금도 현실감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들소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음영(陰影)도 없다. 마치 벽에 붙여 놓은 듯 평면적이며, 화가는 많은 세부를 생략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의 연재 만화에서 흔히 쓰이는 듯한 일종의 속필법(速筆法)을 쓰고 있다. 따라서 점을 찍은 동그라미는 얼굴, 굽은 선은 팔을 상징하는 식이다.

사실상, 히에라콘폴리스의 그림은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연재 만화에서처럼 뭔가 이야기를 해 주려는 것이다. 이 그림이 그려질 바로 그 무렵 이집트 사람들은 바야흐로 상형 문자라고 일컫는, 그림을 본따서 만든 문자를 발명하였다. 이제 화가는 곧 문필가이기도 했다. 하나의 이야기를 서술할 때 그들은 이와 같이 간단한 도상(圖像)으로 이야기했으며, 그 형상이 사실상 사물이나 언어를 상징하는 '문자' 또는 '부호'였던 것이다. 그 도상이 몇 번인가 되풀이해 사용됨으로써, 그것은 날이 갈수록 실제 모습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이른바 '상투화' 또는 '형식화'되었으며, 마침내는 오늘날 우리가 전혀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알파벳 문자로 변하게 된 것이다.

히헤라콘폴리스의 그림에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또다른 면이 있다. 이 그림에는 아무런 '배경' 설정도 없고 풍경이나 심지어는 인물들이 서 있는 대지조차도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인물들이 서로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에는 어지럽게 겹쳐진 부분은 없으며 벽면 전체에 걸쳐 고르게 전개시켜 놓고 있다. 동물들은 사냥의 마술을 위해 '죽일' 목적으로 그려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남기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그림은 더 복잡한 마술과 연관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집트의 신앙, 특히 삶과 죽음에 관한 그들의 사상을 어느 정도 알아 두어야 한다.

이집트인들이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 되면서부터, 질서와 계획이라는 것은 그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언제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뒤들여야 하는가를 알아야만 했다. 그래서 해와 달과 별의 규칙적인 운행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것과 거의 같은 훌륭한 달력을 발명해 내었다. 그들은 또한 기록을 보존하여 두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농사가, 일 년이라는 사계절 이외에도 많은 조건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만일 날씨가 나쁘거나 무언가 잘못됐을 경우에는 겨울을 보낼 충분한 식량을 마련할 수 없었다.

왜 어느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또 어떤 때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려 나가는가를 이집트인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해석이란, 이를테면 해·달·구름·물·동물·식물, 심지어는 대지조차도 모두 강력한 영혼이 깃들어 있으며, 그 영혼이 인간을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유익하게 작용할 수도 있고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자연의 영혼'중에서 (태양처럼) 더 중요한 것은 신으로서 숭배되기에 이르렀다. 이집트인은 이러한 신들을 그들의 왕만큼이나 위대한 통치자로서 생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들은 왕보다도 더 현명하고 영원한 살아 있는 존재였다.

'영원'이라는 것은 이집트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파라오라고 부른 왕들이나, 그 밖에 다른 중요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살아 있는 영혼을 몸안에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인간이 죽으면 그 영혼은 육체를 떠나서 따로 살아 남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후'에 영혼이 다시 돌아가 살 육체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육체를 썩지 않게 말리고 그것을 잘 싸서 미라를 만들어, 아무도 이를 해치지 못하도록 돌로 만든 거대한 무덤 속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 육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안치물(安置物)'로서 무덤안에 초상 조각을 만들어 두었다.

그들은 또한 죽은 사람의 영혼은 살아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도구를 필요로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만들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무덤을 실제 가정과 같이 꾸몄다. 그러나 물론 아무리 부자라도 무덤 속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땅·짐승·노비 등 모든 것을 넣을 수는 없었다. 그 대신, 그들의 그림을 무덤 벽에 그려 두어 그들의 영혼이 자신들을 찾아볼 수 있게끔 하였다.

[그림5]는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테베에 있는 한 무덤의 벽화로서, 히에라콘폴리스의 벽화보다 약 1800년 정도 후에 만들어진 무덤의 그림이다. 이 벽화는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전, 거의 정확하게 기원전 1400년에 그려졌는데, 이 무렵은 이집트 역사상 제국 시대로 알려져 있으며, 파라오의 힘이 나일강 계곡을 훨씬 넘어서 동쪽과 남쪽의 인접한 지역에까지 뻗쳐 있던 시기이다. 벽화의 맨 윗단에는 죽은 이의 노비들이 줄로 밀밭을 재고 있다. 맨 아랫단에는 노비들이 낫으로 밀을 베고 있는데, 무덤의 주인은 해를 가리는 닫집에 앉아 있다. 가운데 단에는 그가 사용하던 이륜 마차와 곡식더미를 계산하고 있는 몇몇 노예들이 그려져 있다. 이 추수 장면은 놀라우리만큼 아주 질서 정연하고 세심하게 그려져 있다. 인물들은 이제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림속에서 땅은 가는 직선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지만 그들은 발을 땅 위에 굳게 딛고 서 있다. 또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 그림에서는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예로, 모든 인물들이 기묘하리만큼 똑같은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인물들의 머리·팔·다리 등은 모두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지만, 몸체와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 화가는 실제 생활에서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단 한 번만 보고 물체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물체들은 평평하기보다 둥글기 때문에, 한 번에 여러 면을 다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별로 신경을 쓰며 살고 있지는 않다. 만약 어떤 물체의 모서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으면, 물체 가까이로 다가가서 다시 한번 보면 되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가 어떤 사람의 뒷모습이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으면, 그가 뒤돌아설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따라가 볼 수도 없고, 그 속의 인물들이 돌아설 리도 없다. 그래서 이집트의 화가들은 신체의 중요한 부분들을 동시에 한눈으로 똑같이 볼 수 있는 독특한 인물상을 발명하여 이와 같이 그렸던 것이다. 본래 이 형식은 파라오의 존엄한 분위기를 전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집트 미술가는 다른 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활동을 보여 주는 데서는 이러한 방법을 주저 없이 버렸다. 또한 그들은 실생활에서, 추수는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서로 다른 일을 해야 하는 복잡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우리들이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으면,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지켜 보아야만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공간도 움직임도 없는 하나의 그림 속에서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었겠는가?

이집트 예술가는 동굴인들이 그렸던 것과 같은 실물처럼 활기찬 그림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수를, 하나의 특정한 순간을 보여 주는 방편일 따름이지 결코 추수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벽화의 장면들은 사계절의 한 부분으로, 실제 일어난 일들로 엮어서 영혼이 한 해가 시작되고 끝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만세력(萬歲曆)인 것이다. 그래서 화가는 모든 것을 실생활에 있었던 모습보다 더욱 더 분명하고 질서 있게 만들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벽면 위에 펼쳐져 있고, 다만 몇몇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부분에서만 다소 겹쳐져 있을 따름이다. 어떤 인물은 유난히 크게 그려져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중요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물체가 멀리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을 때는, 마치 맨 윗단의 세 그루 나무처럼, 인물의 뒤쪽이 아니라 위쪽에 그렸다.

이 화가는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집트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이집트 '양식'이라는 하나의 엄격한 법칙을 따르고 있다. 이 법칙은 처음에는 묘한 느낌을 주지만 잠시 후에 우리는 그것이 사실상 매우 현명한 방법이고 훌륭하게 생각해 낸 것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때때로 이 법칙은 무시될 수도 있다. 가운데 단의 말을 보자. 얼룩점이나 껑충껑충 뛰는 움직임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활기있고 즐거운 표정을 보여 준다. 왜 그랬을까? 이집트에서 이런 그림의 법칙이 만들어질 무렵, 말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물이었다. 말이 나일강 계곡에 전해진 것은 이집트인들에게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어서, 이 그림이 제작되기 불과 2백 년 전의 일이었다. 따라서 화가들은 이 경우, 다른 형상에 사용했던 이 엄격한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이 말이 다른 인물들보다 휠씬 '딱딱하지' 않게 보이는 이유인 것이다.

살아 있는 이를 위한 그림 ― 크레타

만약 여러분이 나일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북북서로 향해 지중해를 나아가면, 크레타라고 하는 바위가 많은 긴 섬에 다다르게 될 것이며, 거기서 더 가면 그리이스 남쪽 끝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기원전 2200년부터 1100년에 걸쳐 이집트인들과는 전혀 다른 놀랄 만한 항해 민족이 있었다. 이집트의 풍요는 주로 나일강의 계곡으로부터 나왔지만, 크레타인들은 그들의 본토가 황량한 땅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한 음식이나 다른 많은 중요한 물건들을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조달하는, 대담한 상인이었고 해적이었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문자를 최근에 와서 해독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들에 관해 다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이미 파헤쳐지기도 하고 일부는 다시 지어지기도 한 그들의 폐허가 된 궁전이나. 그들이 그린 그림들을 보면, 우리는 크레타 사람들이 초기 서방 민족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행복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어떤 궁궐에는 우리가 백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들어 보지도 못했던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림6]의 <멧돼지 사냥>은 남부 그리스에 있는 티린스 궁궐 벽에 그려진 크레타 벽화로, 기원전 1200년경의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벽화는 일부분만 남아 있어서, 그림 오른쪽에 창으로 돼지를 찌르고 있는 사람의 손만 볼 수 있고, 사냥꾼의 모습은 알아볼길이 없다. 그러나 사냥개들의 달려가는 모습과 사납게 질주하는 멧돼지 등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딱딱한' 이집트의 양식보다는 박진감 있고 현실감이 넘치는 동물들을 그린 동굴 벽화를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크레타의 화가들은 이집트로부터 다소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이 그림만 보아도 짐승들은 빠른 움직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엉켜 있지 않고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집트 그림처럼 이 화가도 그 형태를 벽면에 고정시키면서 엄격한 법칙을 따르고 있다. 예를 들면, 세 마리의 개들은 얼룩점만 제외하고는 모두 똑같은 형태로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사냥의 마술 같은 것은 보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죽은 자를 위한 봉사도 아니다. 크레타인에게 멧돼지 사냥은 하나의 스포츠였으며, 이 그림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을 나타내기 위해 그렸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냥의 긴장감이나, 우리가 모든 크레타 미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연의 즐거움을 이야기해 준다. 명쾌하고 우아한 형태들, 밝은 색채 등은 궁궐 벽면의 찬란한 장식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크레타인들은 기원전 1100년경에 북쪽으로부터 그리스로 침입한 호전적인 민족에게 정복당했고, 그들의 궁전은 파괴되었다. 이들 그리스 민족은 또한 크레타인들에게 많은 것을 배워 갔고,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명이었다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인의 독자적인 위대한 문명을 창조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들은 곧 정착하였고, 각기 그 주요 도시의 이름을 따서 독립된 국가를 형성했다. 아티카라고 불리는 지역에 위치한 아테네는 가장 중요한 도시 국가가 되었고,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에 걸쳐 그리스에서는 가장 예리한 사상가들과 훌륭한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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