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추의 역사 | 원제 UmbStoria Della Bruttezza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추의 역사 | 원제 UmbStoria Della Bruttezza    
움베르토 에코 (지은이), 오숙은 (옮긴이)

이탈리아 주간지 '오지Oggi'와의 인터뷰 (2007년 10월 24일)

진행자: 추의 역사를 쓰게 된 이유는?

에코: 진부한 대답일 수 있지만 저는 졸업 논문에서 미학을 다루었고, 대학에서 미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름다움과 추함은 내 직업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직접적인 이유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1961년에 봄피아니 출판사와 일하고 있었는데, 그때 <미의 역사>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산 등의 문제로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는데, 모든 자료들을 서랍 속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한번 시작한 일을 끝마치지 못할 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조금 실망스러웠죠.

그러다가 40년이 흐른 뒤에 CD로 만들 만한 주제를 찾아 달라는 요청받고, 비록 새로운 기술들로 예전의 화보들이 더 이상 쓸모없게 되기는 하였지만, 그때 생각했던 것을 다시 시도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CD에 담긴 <미의 역사>가 나오게 되었고 뒤에 책으로도 나오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미의 역사』가 27개국에서 번역되자 출판사가 그것과 유사한 책의 출판을 요청하였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추의 역사>입니다.

진행자: <추함은 아름다움의 반대말이다>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에코: 아니지요. 무엇보다 아름답지 못한 것이나 사람이 반드시 추한 것은 아니니까요. 삶은 <그렇고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추함은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다양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 또한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루벤스의 그림 속의 한 여인이 오늘날 패션모델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항상 몇 가지 기준을 따라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아름다운 코(비록 브리지트 바르도의 코와 그레타 가르보의 코가 다르기는 하지만)는 일정한 길이를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거든요. 반면 추한 코에 대해서는 피노키오의 코에서부터 넓적코, 콧구멍이 셋인 코, 종기가 많이 난 코, 술주정뱅이의 붉은 코 등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상이 가능하지요. 따라서 추함의 이미지는 아름다움보다 어마어마하게 풍부합니다. 이 책을 펼쳐 보면 그것을 알게 될 겁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추함의 유형은 얼마나 되나요?

에코: 비슷한 말을 사전에서 한번 살펴보세요. <추하다>라는 단어의 비슷한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불쾌하다>, <끔찍하다>, <역겹다>, <비위에 거슬리다>, <그로테스크하다>, <징그럽다>, <혐오스럽다>, <밉살스럽다>, <추잡하다>, <더럽다>, <역겹다>, <거부감 들다>, <음란하다>, <흉측하다>, <욕지기나다>, <구역질나다>, <구리다>, <기분 나쁘다>, <무시무시하다>, <천하다>, <천박하다>, <비열하다>, <공포스럽다>, <나쁘다>, <볼품없다>, <흉하다>, <몰골사납다>, <색다르다>, <찌그러지다>, <일그러지다> 등등이 있습니다. 혐오감을 불러오는 추함이 있는가 하면 연민을 불러오는 또 다른 추함이 있는 것입니다.

진행자: 그런데 당신의 책에 있는 추한 사람이나 상황들에 대한 수많은 묘사들이 실상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던데요.

에코: 우리는 추함 자체의 표명(똥, 썩은 시체, 악취를 풍기는 주름투성이의 생명체)과 형식상의 추함이라 부르는 것, 예를 들면 추하지는 않지만 이가 빠진 모습의 얼굴과 같은 불균형에서 빚어진 추함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종류의 추함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있지요. 이미 옛날 사람들은 <악마도 잘만 묘사된다면 아름다울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떠한 형태의 추함이라도 그것에 대한 충실하고 효과적인 예술적 묘사에 의해서 만회될 수 있습니다. 중세에 (이 시기는 고통과 괴로움, 죽음, 악마의 묘사가 매우 중요하였던 때였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악마의 추함이 잘만 묘사가 된다면 그 이미지는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이 책이 일종의 예술사를 다룬 것이라고 보아도 되나요?

에코: 그것은 아닙니다, 이 책은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추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의 역사입니다. 다만 과거에는 이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록들이 사람들이 추하다고 여기던 것을 묘사하였던 예술 작품이었던 반면에 현대에 이르러서는 사진 등과 같은 다른 소재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진행자: 왜 추함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서양 문명에만 국한시켜 분석하게 되었나요?

에코: 이 문제는 미의 역사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고대 문명과 미개인들에게서도 예술적인 유물들을 발견하였지만 이러한 것들이 미적인 즐거움을 유발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종교와 관련된 두려움 또는 환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인지를 말해 주는 이론적인 문서들을 이용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괴물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벽화나 가면, 조각들이 원래의 이용자들에게 같은 의도나 효과를 보여 주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시적이고 철학적인 문헌들이 풍부한 다른 문화들(인도나 중국, 일본 문화와 같은)에서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들과 형태들을 볼 수는 있지만, 문학이나 철학 서적들을 번역함에 있어서 비록 어떤 개념들을 <아름답다> <추하다>와 같은 서양의 어휘로 번역을 하는 데 익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념들이 얼마만큼 우리 것들하고 같은 것인지를 확립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미개하거나 원시적인 이미지가 서양인에게 무섭게 비칠 수 있지만 원주민에게는 자비로운 신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채찍질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예수의 굴욕적인 모습이 기독교인에게는 호감이나 연민,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반면에 이러한 끔찍한 모습이 비유럽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흉측하게만 비칠 수 있습니다.

진행자: 책을 보면 아름다움과 추함은 결국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요.

에코: 그렇습니다, 이 책은 추함과 아름다움의 이론이 아니라 이러한 개념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분명 아름다움과 추함의 개념은 문화와 시대를 통하여 변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크세노파네스는 <황소나 말과 사자 등이 손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인간처럼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말은 말과 비슷하게, 황소는 황소 비슷하게 신을 그려 낼 것이다. 그리고 신들에게도 자신들과 똑같은 몸을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볼테르는 <두꺼비에게 미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 두꺼비는 작은 머리에서 튀어나온 왕방울처럼 아름답고 둥근 두 눈, 넓고 납작한 목, 노란 배와 갈색 등을 가진 암컷 두꺼비가 아름답다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미의 인식에 대한 시대를 초월하는 변하지 않는 기준들은 없는 것인가요?

에코: 우리는 아름다움과 관련하여 늘 비율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율에 대한 생각은 바뀌어 왔죠. 비율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중세의 철학자는 고딕 성당의 형태와 면적을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이론가는 1500년대의 교회를 생각하였습니다. 중세의 인물에게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는 적절한 비율을 벗어난 것이었던 반면,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고딕 성당의 비율이 부조화스럽고 야만적으로 비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름다움의 정의 속에서 아름다움의 즐거움이 소유욕(비너스와 사랑에 대한 욕구가 없을 때 밀로의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을 배제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거의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함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상황이 보다 복잡해집니다. 감정적인 동조 없이 평온하게 감상할 수 있는 추함이 있기는 하지만 추함은 종종 역겨움이나 거부감 같은 감정의 반발을 불러옵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때문에 추의 역사는 보다 흥미롭고 다양합니다.

진행자: 예술과 일상생활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에코: 우리는 상반되는 모습을 한 모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도처에서 듣게 됩니다. 이제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대립이 더 이상 미학적인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이죠. 영화와 텔레비전, 잡지, 광고, 패션은 고대의 모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아름다움의 모델들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한 화가에 의해서 그려진 브레드 피트나 샤론 스톤, 조지 클루니, 니콜 키드만의 얼굴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미학적, 성적) 이상들과 일체감을 보여 주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을 행동을 하는 록 가수들에게 열광하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매릴린 먼로보다는 매릴린 맨슨의 모습과 닮게끔 화장을 하고 문신을 새기며, 자기 살에 피어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대중매체들에 의해서 과장된) 이러한 행동들이 (전 세계 인구 전체와 비교할 때) 소수에 의해 행해진 그렇고 그런 현상들이 아닌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피상적인 모습들을 통하여 우리를 엄습해 오는, 알고 싶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 추함을 떨쳐 버리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끔찍한 장면들을 늘 접하게 됩니다. 우리는 부풀어 오른 배에 해골 같은 모습의 아이들이 배고픔으로 죽어 가는 이미지들과 침략자들에 의해서 강간을 당하는 여인들의 이미지, 가스실을 향하는 뼈만 앙상한 사람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연상시키는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 각자는 이러한 것들이 역겨움과 두려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단지 도덕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들은 주저 없이 추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 이것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꾸어 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예술이 일그러진 얼굴들과 흉측해진 신체들을 묘사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들을 위협하는 추함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