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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습사전 / 문인( ㅈ ~ ㅎ)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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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순(張德順, 1921-1996, 성산)

- 구비문학의 대가 장덕순교수 별세

- 한국고전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성산 장덕순 서울대 명예교수가 20일 새벽 4시20분 서울 대신동 134-2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5세.

- 학술원 회원이기도 한 장교수는 1921년 간도 용정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 문과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이후 공주사범학교와 연세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다 86년 정년 퇴임했다.

-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한 장교수는 특히 구비문학 연구에 힘을 기울여 이 분야에서 유명한 연구서로 꼽히는 <한국설화문학연구>(1970)를 남겼으며 그밖에 <국문학통론>, <한국고전문학의 이해>, <한국문학사>, <한국문학의 연원과 현장> 등의 저서를냈다.

- 또 그는 입문자들을 위한 개설서를 내는 일도 중요하게 여겼으며 수필에도 취미가 있어 지난해에는 연구논저와 수필을 모은 <성산 장덕순선생 저작집> 10권이 출간되기도 했다. 그의 수많은 제자들은 전국 각 대학에서 한국고전문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 한편 조동일교수(서울대) 등 문하생들은 장교수가 생전에 출연한 기금으로 '성산학술상'을 제정, 올해부터 시상할 계획이다. 유족으로는 도예가인 부인 김석환교수(단국대)와 1남1녀가 있다

 

장만영(張萬榮, 1914-1975)

· 황해도 연백생. 동경 미자끼 영어학교 졸.

· 광복 후 [신천지] 주재, 출판사 경영.

· 1930년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고 등단.

· 1936년 [시건설] 창간호에 <달·포도·잎사귀>에서 아름다운 달밤의 서정을 감각적으로 그림.

---  시 <달·포도·잎사귀>, 어휘 <달을 소재로 한 작품>, < 김현승>

 

장사언 : --- 󰃫 시 <고화병>

 

장순하(張諄河, 1928- 사봉)

· 전북 정읍 생

· <어머님 상사리>을 [새교육]에 발표 후 1957년 개천절 행사 때 <통일대한>으로 장원함

· 1958년 [현대문학]에 <울타리> 발표

· 작품세계

- 여러 시조를 골고루 시험, 평시조를 사설시조로 섞어 짓거나, 엇시조를 섞어 짓기도 함

- 모더니즘의 특색인 시각적 효과를 시조에 도입

· 의의 : 현대시조의 기법상 새로운 시도

---  시조 <고무신>

 

장용학(張龍鶴, 1921- )

· 함북 부령 생.

· 1940년 경성공립중학교, 42년 와세다 대학 상과 입학, 그후 2년 중퇴

· 1949년 [연합신문]에 소설 <회화>로 등단

· 1950년 <지동설>이 [문예]지 추천

· 1955년 전통적 서사성의 요건인 방법, 구조를 혁신하고 대담하게 관념의 단편을 도입한 <요 한시집> 발표.

· 이상과 함께 한국문학사상 난해한 작가로 알려져 있음

- 이상 : 일제하 억압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

- 장용학 : 광복 후, 6·25로 인한 의식의 상처

· [경향신문], [동아일보] 논설위원 역임

---  소설 <요한 시집>

 

장자(莊子, 기원전 365-270?)

·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이름은 주(周). 송나라의 몽읍(하남성부근) 출신

·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맹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관영 (官營)의 칠원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길에 들어서지 않았으며, 10여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했다.

· 초나라의 위왕이 그를 후히 대접해 맞아들이려 했으나, 왕을 받들어 경상(卿相)이 되는 것은 처음에 소중히 다루어지고 뒤에는 죽임을 당하는 소의 신세와 같다고 일축한 일화가 있다.

· 저서인 [장자]는 원래 52편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진(晋)대의 곽상이 산수(刪修)한 33편(내편 7, 외편 15, 잡편 11)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에서 내편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 장자의 사상은 대부분 우언(寓言)으로 풀이되어 있으며, 그 근본은 노자의 무위사상을 계승 하는 것이지만, 현세와의 타협을 배제하는 점에서는 더욱 철저하여, 바로 그와 같은 면에서 장 자의 분방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당(唐)대에 이르러 도교가 융성해지자 현종은 그에게 남화 진인(南華眞人)이라는 호를 추증하였으므로 [장자]는 [남화진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읽혔 다.

 

장주(莊周, 장자·莊子)

--- < 장자>

--- <장주지몽(莊周之夢)>, <호접지몽>(호접몽·蝴蝶夢)

 

장지연(張志淵, 1864-1921, 위암·韋庵)

· 인동 장씨. 경북 상주생

· 조선 고종 때 언론인. 皇城新聞 사장

· 을사조약(乙巳條約) 때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을 쓰고 비분강개함

· 1906년 윤효정과 함께 ‘대한자강회’ 조직, 시베리아, 중국 방랑하다 귀국

· 1909년 진주 [경남일보] 주필,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하여 신문이 폐간되자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남

· 저서 [대한강역고(大韓彊域考)] 등

---  <시일야방성대곡>

 

전광용(全光鏞, 1919-1988, 백사·白史)

· 소설가. 함남 북청 생. 6남매의 장남

· 1951년 서울대 국문과 졸. 서울대 교수 역임

· 1939년 [동아일보]에 <별나라 공주와 토끼>로 입선.

· 1955년 단편 <흑산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1962년 세속적 출세주의자를 날카롭게 풍자한 단편 <꺼삐딴 리>로 제 7회동인문학상 수상.

· 작품 : 단편 <충매화>(1960), <목단 강행열차>(1974), 장편 <창과 벽>(1967) 등

· 저서 : [신소설연구](1986), [한국현대문학논고]

---  소설 <꺼삐딴 리>

 

전상국(全商國, 1940- )

· 강원도 총천군 내촌면 생.

· 홍천중 졸업, 1957년 춘천고 입학, 1960년 경희대 국문과 입학

·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동행> 당선

· 1980년 단편 <우리들의 날개>로 동인문학상 수상

· 1985년 강원대 국문과 교수 취임

· 1988년 중편 <투석>으로 윤동주문학상 수상

· 작품 경향 : 분단 문학

 

전영택(田榮澤, 1894-1967, 아호 늘봄) : 소설가. 종교인

· 1919년 김동인, 주요한 등과 함께 [창조] 발간,신문학 운동의 횃불.

· [창조]에 <천치(天痴)냐 천재(天才)냐> 등 발표,

· 이어서 <화수분>, <생명의 봄>, <운명> 등

· 1930년 미국 버어클리 신학교를 졸업, 귀국 후 협성여자신학교 교원 역임.

· <소>,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 <새봄의 노래> 등

· 교통사고로 사망.

---  소설 <화수분>

---  어휘 <창조>(‘천치냐 천재냐’ 수록)

 

전혜린(1934-1965)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전혜린과 뮌헨

시인도 아니었다. 소설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론가도 아니었다. 굳이 딱지를 붙이자면 `번역문학가'라고나 할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그 이름을 뒷받침하는 번역서 목록의 일부다. 번역이 아닌 그 자신의 글이라고는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하인리히 뵐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산문집, 그리고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라는 제목으로 묶인 일기가 전부인 여자.

 

근엄한 문학사에서는 그 여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자의 글들은 이른바 문학적 가치나 문학사적 의미와는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차라리 <사회사적․정신사적 범주>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 여자를 형성시킨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상처와 폐허였으며, 그 여자가 형성에 기여한 것은 60년대 한국의 미숙한 <실존주의적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50년대 후반 4년간의 독일 체험이 놓인다. 인간 실존의 근본적 조건에 절망하고 삶의 구체적 세목이 보이는 평범과 비속을 혐오했던,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여자. 한국이라는 박토에 뿌리내리기보다는 뮌헨의 자유를 호흡하고자 했으며, 여자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보편적 성을 지향했던 여자. 인간이라는 육체적 현존이 아닌 정신과 관념만의 그 어떤 추상적 존재를 열망했던,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마침내는, 좌초했던 여자. 그 여자의 이름 전혜린.

 

전혜린(1934~65)이 단신으로 독일의 뮌헨에 내린 것은 1955년 가을이었다. 그가 태어난 황해도 해주와 그가 학교를 다닌 서울은 각각 북조선과 한국으로 갈라져 한바탕 피의 제의를 치른 뒤끝이었다. 분단 한국의 딸 혜린은 또다른 분단국 서독의 남부 도시 뮌헨을 찾았고 대학 근처의 동네 슈바빙에 짐을 풀었다.

 

󰡒슈바빙은(…) 발전해가는 기계문명 속에 아직도 한 군데 남아 있는 낭만과 꿈과 자유의 여지가 있는 지대(…). 그 속에 한번 들어가서 그것을 숨쉬고 그것에 익고 나면 다른 풍토는 권태롭고 위선적이고 딱딱하고 숨막혀서 도저히 못 참게 되는 곳인 것 같다.(…)슈바빙은 한마디로 청춘의 축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희생도 적지 않게 바쳐지는, 그러나 젊은 목숨이 황금빛 술처럼 잔에 넘쳐 흐르고 있는 꿈의 마을, 이것이 슈바빙이 아닐까.

 

전혜린에게 있어 4년간의 슈바빙 시절은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본질적 삶의 세례를 받은 시기였으며, 그는 귀국해서 죽기 전까지 `복음'의 전파에 주력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쉽게 인간의 의욕을 꺾는가󰡓를 절감한 그가 언제나 그리워한 그의 도시는 뮌헨이요 슈바빙이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한국에 대한 혐오와 뮌헨을 향한 향수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뿌리뽑힌 사대주의적 지식인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의 전도된 향수에는 그 나름의 내력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조건에 대해 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전혜린은 그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삶의 일회성이라는 치명적인 화두를 붙잡고 싸움을 벌였다. 죽음을 씨로서 속에 지닌 과실로의 삶󰡓이라고 그가 말했을 때 그것은 전혀 새로운 발견이나 독창적인 수사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도 소박하고 치기만만해 실없는 웃음마저 깨물게 만드는 성질의 발언이다. 그럼에도 그의 발언이 60년대 한국 사회와, 그 뒤 90년대에 이르도록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복음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절한 천재'의 신화가 그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등생으로 성장해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가 독일 유학을 떠났으며, 오식된 활자, 즉자․대자, 불합리, 자살 따위 실존주의의 용어들을 상용했고, 검정 스커트에 검정 머플러를 즐겨 두르고 다니던 사람. 도저한 페시미스트이자 동시에 순간순간을 미칠 듯이 강렬하게 살고자 했던 생의 찬미자. 평범을 경멸한 귀족주의자인가 하면 무수한 콤플렉스에 시달린 삶의 패배자. 여자라는 옷을 거추장스러워했으면서도 출산과 육아의 경험에서 행복을 느낀 모순의 존재.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광휘처럼 감싸고 있는 것은 서른둘 젊은 나이에 맞은 성급한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전혜린에게 역사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의 차원으로 떨어졌거나 인간 보편의 차원으로 뛰어올랐다. 그 가운데에 놓인 당대의 민족적 현실이라는 차원은 생략돼 있다. 전혜린이 이상의 연인처럼 찬미하고 동경해 마지 않았던 슈바빙은 뮌헨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벋어나간 레오폴트 거리와 유럽 최대의 도시 공원이라는 엥글리셔 가르텐(영국공원)을 끼고 있는 동네다.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시청 광장 주변과 달리 대학촌인 이 동네의 주인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술집을 찾아드는 젊은 학생들이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책을 통해 80년대 한국 대학생들의 기림을 받은 숄 남매의 이름을 딴 광장이 있는 대학본부로부터 북쪽으로 1㎞ 남짓 올라오면 `뮌헨의 자유'라는 근사한 이름의 광장이 나오고 그곳에서 동쪽으로 난 골목을 한동안 들어가다 보면 `제에로제'(연꽃)라는 이름의 카페가 나온다. 제에로제는 뮌헨에 상륙한 전혜린이 처음 음식을 사먹어본 뒤 값싸면서도 양질의 음식, 주인의 친절에 반해 단골로 삼았던 집이다. 지금은 스페인 음식점 겸 술집으로 바뀌었지만 옥호와 외벽만은 전혜린 당시와 다르지 않다. 지난 90년에 이 집을 인수했다는 주인 엘라디오 페르난데스(45)는 󰡒전혜린의 자취를 좇는 한국 유학생과 관광객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면서 <그뿐 아니라 독일과 세계 각국의 작가와 예술가들도 이집을 추억하는 글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가게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고말했다.

 

제에로제와 영국공원 사이에는 자그마한 냇물이 흐르고 그 연변에 아마도 전혜린이 세를 들어 살았을 집들이 서 있다. 전혜린이 `포의 어셔가를 연상시킨다'며 끔찍해했던 그 집들은 그러나 그 사이 새로 단장된 듯 안정된 주택가의 면모를 보인다.

 

주말의 영국공원 호수에는 뱃놀이를 즐기는 이들이 백조니 오리니 하는 물짐승들과 함께 떠 있고, 숲 사이로 난 산책로에는 걷거나 자전거 또는 말을 탄 사람들이 오가며, 모처럼 얼굴을 드러낸 여름 햇볕 아래 젊은 여자들이 벗은 몸을 태우는데, 가까운 교회에서는 정오의 종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온다. 이 평화와 축복의 풍경 속에 녹아들지 못한 채 공원 기슭의 벤치에 홀로 앉아서 유학생 전혜린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조국의 파란 하늘과 맑은 물을 그리워했을까. 그 그리움 한 방울 눈물로 바뀌어 문득 굴러떨어졌을까.

 

정공채

· 경남 하동 출신

· 시집 [해점], 수필집 [지금 청춘], [비에 젖습니다] 등

  아루라지 처녀상 ‘아우라지’ 시(정공채 작) : 강원도 정선군 북면 소재

---  < 필화작가들>

 

정극인(丁克仁, 1401-1481, 불우헌)

· 세종 11년(1429)때 생원시 합격

· 단종 원년(1453)때 식년 문과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이르렀으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보 고 고향인 전북 태인에 은둔, 교육에 전념.

· 성종이 즉위, 상소문을 올려 폐습을 말씀드리니, 이에 벼슬을 내림.

· 작품 : <상춘곡>(최초의 가사)

· 저서 : [불우헌집]

· 사후에 예조판서에 추증(追贈)

 유적지

1) 무성서원(정읍시 원촌마을) : 최치원, 정극인, 송세림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

2) 정극인묘·재실(무성서원 인근)

---  가사 <상춘곡(賞春曲)>

 

정도전(鄭道傳, 1337-1398, 삼봉)

· 단양읍 도전리 출생

· 본관은 봉화. 조선 개국 공신. 이색의 문하생

· 여말에 이성계와 접착 후에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됨

· 성리학을 국시로 삼고 불교를 배척할 것을 주장

· 세자 방석을 옹호하고 정실 소생의 여러 왕자를 죽이려 한다는 혐의로 ‘방원의난’ 때 참수 (斬首)됨

· 문필과 시문이 출중하여 정총 등과 함께 [고려사] 37권을 찬술함.

· 작품 : <궁수분곡(窮獸奔曲)>, <납씨가>,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

 

  유적지

1) 정도전 사당(경기 평택시 진위면 은산2리 소재) : 사당 내에는 정도전의 위패와 영정을 모 셔 놓았으며, 고종이 내린 사액 현판( ‘유종공종·儒宗功宗 )이 걸려 있다. 또한 [삼봉집] 14권 7 책분의 목판본 228매가 판각고에 보관되어 있다.

2) 도담삼봉(충북 단양 소재, ‘단양팔경’ 중 한 곳) : 어린 시절부터 노닐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함

3) 삼봉정도전선생숭덕비(단양읍 상진리 근린공원 내)

---  <회고가> 시조 (2) 선인교 나린 물이 ~

 

정몽주(鄭夢周, 1337-1392, 포은)

· 고려말의 충신, 여말 삼은 중 한 사람

· 공민왕 때 성균관 학감으로 있으면서 오부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 유학 진흥

· 한때 배명친원(排命親元) 정책을 반대하다 이인임에 의해 유배되기도 했음

· 이성계를 따라 왜구 토벌

·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피살 (개성 선죽교)

- 전설 : 조영규에 의해 억울하게 죽자 그 시체는 부근에 가매장되었다. 이윽고 고향인 경상북 도 영천으로 천묘를 하게 되는데 천묘 일행이 능원리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앞에 세운 명정이 날아가 버리는데, 당황한 일행이 찾아가 보니 보기 드문 명당인지라 그냥 그 자리 에 이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적지

1) 문학비, 묘(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 ‘단심가비’(현대어역시조, 한시 번역원문이 나란 히 적혀있음)

2) 고전시비(서울 종로 삼청공원 내) : 시조 두 편(이 몸이 주거주거~, 까마귀 ~>

---  시조 <이 몸이 주거주거 一百番(일백번) 고쳐 주거>,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정비석(鄭飛石, 1911- 1991)

· 1932년 일본의 니혼대학 문화 중퇴

· 1936년 단편 <졸곡제(卒哭祭)>, 이듬해 단편 <성황당(城隍堂)>이 각각 [동아일보], [조선일 보]에 입선, 당선되면서 본격적 문단 활동 시작

· 광복 전까지 1백편 가량의 단편을 발표하며 남녀간의 애정을 주축으로 건강한 토 속적 삶을 형상화함

· 1941년 장편 <청춘의 윤리>에서 애정문제를 세태와 결부시켜 관심을 끔

· 1954년 [서울신문]에 <자유부인>을 연재하면서 유교적 관습에 얽매여 있던 유부녀의 자유분 방한 성모럴 묘사로 장안에 화제를 뿌리며 대중작가로서 확고히 뿌리를 내림

- <자유부인>의 대중적 성공은 단순한 애정이나 통속성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광복 후 서 구 자유주의 물결로 조성된 사치와 허영의 풍속도를 묘파한 세태 풍자에 있었다는 것이 문 단의 평가임.

· 작가의 최고의 영예는 끝까지 글을 쓰는 것이라 밝힌 정씨는 고희를 넘긴 80년대 이후에도 <여수(旅愁)>, <소설 손자병법>, <김삿갓 풍류기>등 단행본으로 따지면 14권 분량이나 되는 작품을 일간지에 연재하며 전업(專業)작가의 한 전범을 보여줌

 

정서(鄭敍, ? - ? , 과정)

· 고려 인종 때 문관. 부산 동래 생

· 벼슬은 내시낭중에 이름. 사람됨이 경박했으나 문재가 출중

· 의종 5년(1151)에 참소를 당해 동래로 귀양감

· 유배지에서 지은 <정과정곡>이 있음

 정서시비·정과정 옛터(부산 동래구) : 현재 부산 망미동에서 연산동으로 넘어가는 간선도로 이름이 ‘과정로’이며, 연산동에 과정초등학교도 있다.

---  <정과정(곡)>(악곡명 삼진작)

 

정약용(丁若鏞, 다산, 여유당, 1762-1836)

· 본관 나주(羅州), 사람 조선 후기 대실학자

· 이승훈의 처남,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

·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 셋째 형 <정약종>

· 유형원, 이익의 실학을 계승, 집대성함.

· 벼슬은 정조 때 동부승지, 병조참의 역임

· 신유박해와 황사영(조카 사위)의 백서(帛書) 사건에 관련,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갔다가 19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남. 이곳에서 500여 권의 저술 활동을 벌인 결과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라는 이름으로 전해짐

· 저서 : [목민심서(牧民心書)], [마과회통(麻科會通)], [흠흠신서],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유적지

1) 정약용 기념관·생가(경기도 남양주시 양수리 못미친 곳)

2) 다산 공적비(전남 강진 만덕리)

3) 다산초당(전남 강진) : 다산유적보존회 재조성

 

유홍준, 남도답사 일번지(2) ‘다산초당’

여기서 잠시 한 호흡을 돌리고 다시 가파른 길을 오르면 이내 다산초당이 보인다. 이름은 초당(草堂)이라고 하였건만,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 지붕으로 툇마루가 넓고 길며 방도 큼직하여 도저히 유배객이 살던 집 같지가 않다. 나도 본 일이 없지만 실제로 이 집은 조그만 초당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무너져 폐가로 된 것을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이처럼 번듯하게 지어 놓은 것이다. 다산을 기리는 마음에서 살아 생전의 오막살이를 헐고 큰 집을 지어드린 것이라고 치부해보고도 싶지만, 도무지 이 좁은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크기여서 그것이 못마땅하다. 더군다나 예비지식이 없이 온 사람들은 유배객 팔자가 늘어졌다는 생각만 갖고 가니 이것은 허구 중의 허구이다.

 

다산초당의 툇마루에 앉아보았자 남향집이건만 동백숲과 잡목이 우거져 한낮인데도 컴컴하고 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 단지 초당 오른쪽 바위에 새겨 놓은 ‘정석(丁石)’과 함께 정약용 유배시절의 진짜 유적인 것이다.

 

정완영(鄭椀永, 1919- , 백수·白水)

· 시조 시인, 경북 금릉생

· 1962년 [조선일보]에 <조국>이 당선되어 등단.

· 전통적인 제재로 전통정서인 한(恨)을 읊은 시인.

· 형식면에서 이영도 시조시인과 같이 구별배행시조를 많이 창작.

· "온겨레시조짓기 추진회" 회장

· 시조집 : [채춘보(採春譜)], [묵로도(墨鷺圖)], [산이 날 따라와서] 등

---  시조 <조국>

---  < 시조 시인들>

 

정인보(鄭寅普, 1893- ? , 위당·爲堂, 담원·薝園)

· 서울생. 한문학자, 사학자.

· 연희전문 교수 역임

· [담원시조집](1948)

· <자모사>는 40수의 연시조,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시조 형식에 담은 작품.

---  시조 <자모사(慈母思)>

---  < 박용철> (정인보의 제자)

 

관련기사(요약) “정인보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회”

- 담원은 일세시대 국학진흥에 온몸을 불살랐던 인물. 그는 실천 위주의 학문 접근법으로 일제하의 현실에서 민족혼을 일깨우는데 주력. [오천년간 조선의 얼], [담원문록]. [조선문학원류고], [양명학연론] 등이 저술은 그의 치열했던 학문 세계를 말해주고 있다.

- 그는 1922년부터 37년까지 연희전문에서 재직, 그러나 중일 전쟁 후 우리말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자 사표를 던짐, 와신상담이란 고사를 원용해 이때부터 호를 담원(薝園)으로 했다는 그는 50년 납북됨으로써 가족과 영영 이별.

- 이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은 송자 총장(연세대), 강신항교수(연세대), 이가원 등 학계에 몸담고 있거나 국학을 전공하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

- 연희전문 시절 담원선생의 제자였던 연세대 민영규 명예교수는 “1천년 세월 동안 땅속으로 복류한 뒤 그제서야 황하가 대륙을 가로질러 콸콸 흘러 내린다는 고사처럼 담원이 있고서 비로소 땅속에 갇혀있던 국학의 기운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고 강연. 또한 “담원 선생님은 평생 비단옷을 입거나 은수저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정지상(鄭知常, ? - 1135)

· 고려 문인. 예종 9년에 문과 급제. 좌정언(左正言)으로서 척준경을 탄핵

· 묘청, 백수한 등에 동조하여 평양 천도(遷都)를 주장함.

· 인종 13년(1135) 묘청의 난 때 김부식에게 처형당함.

---  정지상 7언절구 <송인(送人)>

 

정지용(鄭芝溶, 1903- ?)

· 1927년 [조선지광]에 <향수>발표. KAPF와 대립.

· 향토적인 순수 서정시 발표.

· 이후 도시적인 소재로 시를 써 모더니즘적 경향을 보임.

· 구인회의 일원으로도 활동.

· 작품 : <그의 반>, <유리창1>, <향수> 등

 

· 문학 시기 구분

- 제1기 :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비관적 현실인식에 대한 비애의 정조

( <향수>, <고향>, 그외 동시류의 초기시 )

- 제2기 : 바다의 이미지와 도시의 이미지를 추구한 모더니즘(modernism)

- 제3기 : 카톨리시즘(천주교)의 신앙시와 지성, 극기, 절제의 동양적 세계관의 형이상학적 계열들의 시 ( <산> 등)

---  시 <구성동>, <향수>, <고향>, <그의 반>, <비>, <유리창I>

 

󰏐 정지용 문학 비평

정지용의 문학은 한국 현대시사의 전개에 있어 실로 중대한 의미로 작용해왔다. 이제 광복 43주년이 된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그동안 캄캄한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지용의 시세계를 활짝 개방하여 다시금 독자와 만나게 한 것은 거의 시대적 요청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용은 한낱 시인이 아니다. 우리 현대시가 그 차체다. 1925년에 나온 소월의 [진달래꽃]과 만해의 [님의 침묵]은 전자가 <율조(律調)>로서 한국 현대시의 넓이에 기여하고, 후자가 <어조(語調)>로서 그 깊이에 기여했다면, 지용은 30, 40년대의 암흑과 혼란을 거쳐 민족 분단과 전쟁, 그리고 오늘까지의 시 전개에 있어서 표면적 혹은 이면적으로 한국 현대시의 높이를 <언어의 비유>로서 지탱한 시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935년에 나온 [정지용시집]과 1941년의 [백록담(白鹿潭)]은 다 함께 중대한 문학사적 의의를 띤다. 그는 30년대 모더니즘의 영향권 아래에서 출발했으나 오히려 그 영향의 테두리 밖을 지향하여 동양의 고전과 우리의 전통문학과 만난다. 그의 청신한 이미지는 단순한 서양시의 역어적(譯語的) 차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 보다 동양적인 흐름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같은 성격이 현대시사상 그를 가장 탁월한 시인이게 하는 원인이라고 본다.

 

지용은 초기에서부터 시의 공간성을 확대시켜 나갔다. 즉 시각적인 이미지가 도처에 번득이고 있다. 다만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뿐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감각으로 시를 만들어 냈다. 지용 이후의 시인 또는 동연배의 시인조차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그에 의해 한국시가 비로소 한 장르를 형성하게 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6.25이후 이 땅의 현대시인임을 자임했던 청마, 두진, 목월, 지훈 등의 정신적 배후에서 항상 대부 노릇을 수행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정지용 생가(生家) 완전 복원

한국 시문학의 거장 정지용(鄭芝溶) 시인의 생가가 1996년 8월 8일 완전히 복원됐다. 鄭시인의 생가는 충북 옥천군이 시인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11월부터 2억 5천 7백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의 1 > 부지 6백여평방m에 건물면적 73평방m 규모로 복원했다.

 

복원된 생가는 돌과 흙으로 쌓은 담장이 목조 한옥으로 된 본채와 부속 건물을 감싸고 있으며 북쪽과 서쪽 담장에 싸릿문이 나 있다. 옥천군은 지난해 3월 부지를 매입,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복원했으며 지난 5월18일 '제9회 지용제'에서 상량식을 가졌었다

 

정철(鄭澈, 중종 31-선조 26)

· 본관 연일. 한양 생

· 10세 때 <을사사화(1545)>로 맏형은 죽고, 아버지는 유배

· 16세 때 귀양에서 풀려나오자 조부 산소가 있는 담양 창평면 성산으로 내려가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에게 수학함. 또한 이이, 성혼, 송익필과 같은 선비와 교유함

· 26세 때 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 (벼슬은 지평, 전적, 함경도 암행어사, 수찬, 교리, 집의, 직제학, 승지 등 역임)

· 40세 때 西人이 됨

· 45세 때 처음으로 외직인 강원도 관찰사가 됨 (관동별곡, 훈민가)

· 48세 때 예조참판, 형조, 예조판서

· 50세 때 동인의 논척을 받아 퇴임. 창평으로 내려감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유적지

1) 시비(삼척의 ‘죽서루’)

2) 묘·송강사(松江祠)(지방문화재 제9호,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은골)

3) 송강정철선생시비(송강사 입구소재) : ‘사미인곡’ 일절 새김

4) 송강 3대 유적지(환벽당, 식영정, 송강정)(전남 담양)

---  시조 <소나기 한 줄기미 연잎에 솟드로개>,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오늘도 다 새거다 호미 메고 가쟈스랴>, <장진주사(將進酒辭)>, <이고 진 뎌 늘그니 짐 프러 나를 주오> 갓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 송강 3대 유적지 탐방

어느 날, 김윤제가 환벽당(環碧堂)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조대 앞 물에서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내용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급히 조대로 내려가자 그곳에서 한 소년이 미역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의 용모에 반해서 외손녀를 그 소년에게 시집 보냈는데 바로 그 소년이 정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비가 환벽당 마당에 있지 않고 조대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시비에는 <성산별곡> 중에서 조대와 소(沼), 그리고 환벽당이 나오는 부분을 새겨 놓고 있다. 지금은 수량이 풍부하지 않지만 송강이 살았던 시절에는 배를 띄워 낚시도 하고 미역을 감을 정도로 물이 깊었으며, 갈대가 우거져 강호의 풍경이 아기자기했을 듯싶다. 환벽당은 담양군과 광주 광역시 접경 지역에 있는데 엄밀하게는 광주시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식영정(息影亭)은 환벽당의 맞은 편 300미터쯤 떨어진 성산에 있다. 식영정은 담양군 남편 지곡리 성산이다. ‘식영’을 직역하면 ‘그림자도 쉰다’는 말이지만, 원래의 뜻은 ‘숲에서는 그림자가 없다.’라는 뜻이다. 말하자만 세속을 떠나 자연에 묻혀 사는 삶을 뜻하는 낱말일 것이다. 어쨌든 식영정은 임억령을 위해 김성원이 1560년에 지은 정자인데, 송강은 여기서 머무는 동안 주변의 경관을 관조하면서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한다. 정자 주변에는 목백일홍 꽃이 한창이고 검은 오석의 시비에는 성주본 <성산별곡>이 새겨져 있다. 주위에는 부용당과 송강의 가사가 양각된 목판 일부를 보관하고 있는 각(閣)도 있다. 소쇄원(瀟灑園)은 식영정에서 승용차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보길도의 부용동 원림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원림인 이 정원은 사적 제304호로서 양산보가 은사인 조광조가 남곤 등의 훈구파에 몰리어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자, 자신도 입신 양명의 길을 버리고 하양, 은거했던 곳이다.

 

여기서 다시 송강정으로 가려면 담양군 봉산면 쌍교까지 가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왼쪽으로 꺽으들면 된다. 송강정은 정철이 동인(東人)들에게 몰려 대사헌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하향하여 머물렀던 정자다. 당시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여 ‘죽록정’이라고 불렀으나 후손들이 1770년에 증축을 하면서 송강정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송강은 이곳에서 <사미인곡>을 지었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이곳의 시비에는 <사미인곡>이 새겨져 있다.

 

정한모(鄭漢模, 1923-1991)

· 충남 부여생. 서울대 국문과 졸.

· 광복 전부터 단편적으로 시를 발표하다가, 광복 후 김윤성과 함께 [백맥(白脈)], [시탑(詩塔)] 등 동인지 발간.

· 1958년 첫시집 [카오스의 사족(蛇足)] 발표

· 6.25 후 본격적 작품 발표. 그의 시는 인간의 본질적인 순수 서정을 노래하고 있으며, 대표작 으로 <아가의 방><정상에서> 등

· 제6시집 [원점(原點)에 서서]로 대한 민국 문학상 대상 수상(1990)

· 1966년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재직

· 저서 : [한국현대문학사연구], [한국현대시문학사] 등 집필

· 1984년 문공부장관 취임

· 장관재직기관 중 문단의 오랜 친구이자 소설가인 정한숙(鄭漢淑)씨가 [조선시단]을 통해 <한 잔 먹세>라는 시를 발표하자 곧 [조선시단]에 화답하는 시 <저녁 노을 안주삼아]를 보내 두 사람의 오랜 우정과 멋을 과시, 신선한 노년의 풍경을 보여 주기도 했다.

· [여백을 위한 서정](1959), [아가의 방](1970), [새벽](1975)

· 1991년 2. 23일 타계

 

 유적지

1) 시비 ‘하나될 새날을 열고자’ (동학사 입구 주차장 언저리)

* 내용 : 나눌 수 없는 한 몸 / 나눌 수 없는 한 마음 / 하늘이시여 / 이제는 하나로 이루게 하소서 / 우리의 발돋움 하늘에 닿았나니 / 우리의 마음돋움 하늘에 맞닿았나니 (정한모 시, 이곤순 씀)

2) 생가터(부여 석성면 석성리)

---  시 <가을에>

 

정한숙(鄭漢淑, 1922- )

· 평북 영변 생. 소설가. 국문학자

· 고려대 국문과 졸

· 1948년 [조선일보]에 소설 <배신> 발표 등단

· 1957년 <암흑의 계절>로 제1회 내성문학상 수상

· 단편 : <전황당인보기>(55년), <금당벽화>(55), <산골아이들>(77)

---  < 정한모>

 

정호승(鄭昊昇, 1916- )

· 충북 충주 생. 송강 정철의 13대손

· [자오선], [조선문단]에 시 발표

· 토착적 서정 세계를 지향

· 시집 : [모밀꽃](1939)

· 6.25전쟁 때 충주지역 예술동맹위원장을 맡던 중 월북

- 부인 정정순은 평동에 생존, 장남 정태진 음악인이면서 시집 [몽산포 가는 길]을 펴내기 도 했음)

 

정훈(丁薰, 1911-1992)

· 충남 대전생. 시조 시인. 일본 메이지 대학 문과 중퇴

· 1940년 시조 <머들령>이 [가톨릭 청년]에 추천되어 문단에 나옴

· 광복과 더불어 발간된 대전의 향토문예지 [향토], 1946년 2월에 창간된 [동백]의 동인으로 참 여함 (정훈, 박용래, 이재복, 송석홍 등)

· 경향 : 민족적 서정을 직유적 방법으로 주로 노래

  시비 : 대전과 금산 사이 만인산 머들령 고개 소재

: 이 고개는 시인이 어린 시절에 오르내리던 곳이며, 시비에는 <머들령> 새김

---  시조 <동백(冬柏)>, <시조 시인들>

 

정희성(1945- )

· 경남 창원생. 서울대 국문과 졸

·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

· 경향 :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가 처한 현실과 노동의 문제, 즉 핍박받으며 사는 사 람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슬픔이 밝은 웃음으로 피어날 것임을 확신하는 태도임을 절제된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다.

· 시집 [답청(踏靑)](1974),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 등

 

󰏐 참여시

1960년대에 참여시를 개척한 시인으로는 <풀>, <거대한 뿌리>의 김수영, 장시 <금강>으로 유명한 신동엽 ····· 이들의 참여시의 경향은 후에 김지하, 고은, 이성부, 최하림, 김준태, 정희성 등으로 이어졌다.

---  시 <옹기전에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제자백가(諸子百家)

· 중국 전국시대(기원 5-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 제자란 제선생이라는 뜻이고, 백 가란 수많은 파벌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중에서 옛서적을 분류했을 때의 명칭으로, 그 제자의 파벌은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名家 ; 논리학파), 묵가, 종횡 가(縱橫家 ; 외교술파), 잡가, 농가(農家) 등 9류에다가 또 소설가(小說家)를 부록으로 한 것이다.

· 주왕조의 가족제가 붕괴되어 혈연의 일족에게 수호되어 오던 영주가 농민과 경지를 확보하여 실력을 지니고 있는 신흥지주 계층에게 권력을 빼앗겨 가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대는 도리 어 실력 본위의 자유로운 활력에 넘친 유능한 인재의 등장을 촉구(促求)했다.

· 제자 백가 중 집단을 이루어 전승한 것은 유, 묵가의 2가 뿐이고, 나머지는 한시적이고 개별 적이었다.

 

조만식(曺晩植, 1882-1950, 고당·古堂)

· 평남 강서군 출생

· 1908년 평양 숭실중학교 졸업, 1913년 일본 명치대 법과 졸

· 1913~9년 평북 정주 오산학교 재직

· 1919년 3·1운동때 지방 주동자로 활약

- 운동 직후 상해 망명하려던 중 체포, 평남형무소에서 첫 옥고 치름

· 1920년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창립회장 추대

· 1922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준비회 결성

· 1927년 신간회(27년 창립, 초대회장 이상재) 평양지회장

· 1932년 [조선일보] 사장

· 1945년 조선건국 평남준비위원회 위원장 및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주당 당수

· 1945년 신탁통치 반대로 연금

· 1950년 북한정권에 의해 총살

 

조병화(趙炳華, 1921- 편운·片雲)

· 경기도 안성 생. 도쿄 고등사범 졸업. 인하대 교수

· 한국문인협회이사 역임

· 첫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년)으로 문단 데뷔

· 경향 : 서구풍 감각에 향토적 소재를 주로 다룸

· 시집 : [하루만의 위안](1950), [사랑이 가기 전에](1955), [가숙(假宿)의 램프](1968), [인간고도], [오산 인터체인지], [서울] 등 현대시인 중 ‘가장 많은’ 시집 발간

 

 [문학비] <우리 난실리>

우리 난실리 고향 사람들은 / 잘살자는 꿈을 먹고 삽니다. //

잘살자는 꿈을 먹고 살기 위하여 / 부지런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합니다. //

서로 사랑하며 / 서로 도우며 / 서로 아끼며 //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갈 / 잘사는 고향만들기 //

우리 난실리 고향사람들은 / 아름다운 그 꿈을 먹고 삽니다. //

 

---  시 <의자>, <해마다 봄이되면>, <공존의 이유>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 문화마을

난실리로 가는 서울에서 오산이나 용인을 거쳐 이동(송전)에 이른 다음 계속 외길을 따라가면 곧바로 난실리가 나온다. 용인에서는 45번 국도, 오산에서는 302번 지방도를 타면 된다. 이곳은 안성군과 용인시의 경계선상이다. 고삼에서 오는 길과 양성면 쪽에서 오는 길이 나머지 길이다. 여기 삼거리에서 송전 방향 쪽의 다리를 건너면 양성면 난실1리다. 야트막한 산언덕, 넓은 평야, 그리고 고기도 살찐다는 ‘어비리’ 저수지가 펼쳐져 있는 곳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 길가에 ‘편운재 회관’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가면 조병화의 자택으로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조병화의 도서관 겸 서재인 ‘편운동산’이라는 제하의 건물이 보인다. 바로 옆에는 조병화 송덕비가 있다.

 

이 마을은 국내에 몇 안되는 문화마을 중의 하나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어령 문화부 장관 재직시에 지정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깨끗하고 조용하며 아담할 뿐만 아니라 시인의 생가와 자택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그윽한 분위기가 감돈다. 길건너편에는 조그만 쉼터가 있고, 그 안에는 나이 열 여섯에 먼저 간 신랑을 따라 죽었다는 앳된 부인네를 기리는 ‘전주유씨열녀정문’이 있다. ‘조병화의 시비’는 바로 그 옆에 있는데, 고향 마을 사람들을 찬미하는 그 시 제목은 <우리 난실리>다. 기교와 가식이 없으며 소박하고 평이한 시라는 것을, 읽어본 사람은 금세 알 수 있다.

 

조선왕조 계보

(1) 태조(-1398) (15) 광해군(1623)

(2) 정종(-1400) (16) 인조(-1649)

(3) 태종(-1418) (17) 효종(-1659)

(4) 세종(-1450) (18) 현종(-1674)

(5) 문종(-1452) (19) 숙종(-1720)

(6) 단종(-1455) (20) 경종(-1724)

(7) 세조(-1468) (21) 영조(-1776)

(8) 예종(-1469) (22) 정조(-1800)

(9) 성종(-1494) (23) 순조(-1834)

(10) 연산군(-1506) (24) 헌종(-1849)

(11) 중종(-1544) (25) 철종(-1863)

(12) 인종(-1545) (26) 고종(-1907)

(13) 명종(-1567) (28) 순종(-1910)

(14) 선조(-1608)

 

▲ 난

(1) 1차 - 정도전의 난(1398)

: 이성계가 8남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불만을 품고 방원(태종)이 정도전, 남은을 살해한 후 왕권 장악

(2) 2차 : 4남 ‘방간’과 ‘방원’의 내분, 방원의 승리, 왕위 등극

 

▲ 위화도

(1) 이소역대(以小逆大)

(2) 하월발병(夏月發兵)

(3) 거국원정(擧國遠征), 왜승기허(倭乘其虛) : 나라 전체가 멀리 정벌하러 나가면 왜구가 그 허점을 노린다.

(4) 시방서우노궁(時方 署雨 弩弓), 대군질역(大軍疾疫) : 장마철에 활이 휘고 군사가 병이 든다.

 

▲ 위화도 회군(1388)

· 위화도에 온 이성계는 조민수를 달래어 회군 단행

· 우왕을 폐위, 최영 유폐, 창왕 옹립

· 의의 - 신진 사대부의 정치, 군사 장악, 새 왕조 기초 다짐

 

 

 조세희(趙世熙, 1940- )

· 경기도 가평생. 서라벌 예대 문창과 및 경희대 국문과 졸(황순원 제자)

·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돛대 없는 장선(葬船)> 당선, 데뷔

· 1979년 근대화의 물결에 희생된 난쟁이 일가를 중심으로 소외계층의 문제를 파해친 연작소 설 <난장 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제13회 동인문학상 수상

· 중학교 시절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으로 문학적 감명을 느끼게 되며, 카프카, 까뮈 등의 작가 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 경향 : 근대화의 모순을 폭로

· 작품 <시간여행>, <침묵의 뿌리>

--- 󰃫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  <추천인 / 피추천인>, <서라벌예대와 중앙대 ‘문예창작과’ 출신 문인>

󰏐 <나의 문학실험> 조세희

조세희(趙世熙, 54)씨는 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돛대 없는 장선"이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주요작품으로는 난장이 일가로 대변되는 가난한 소외계층의 삶을 파헤치며 도시 빈민 문제와 노동문제를 제기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연작을 비롯, "철장화", "긴 팽이 모자", "시간 여행", "어린 왕자", "하얀 저고리" 등이 있다. 70년대 최대의 화제작인 "난쏘공"연작으로 79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집은 지난달 1백쇄를 돌파, 우리시대 대표적 스테디셀러가 됐다.

趙씨 소설문법은 기존의 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소설적 긴장과 환상적 공간의 창출을 위해 동화기법을 과감히 도입했는가 하면 우화적, 극도의 은유적 수법도 동원했는데 이는 유신하 검열의 눈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조식(曺植, 1501-1572, 남명·南溟)

· 명종 때 성리학자. 명종의 간곡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고 산야에 은거하 며 학문에만 열중함.

· 저서 : [남명집], [파한잡기] 등

· 작품 :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남명가> 등이 있었으나 부전, 시조 3수만이 전한다.

--- 󰃫 시조 <두류산 양단수를 녜 듣고 이제보니,>

 

󰏐 벼슬 끊고 후학(後學) 밝힌 삶

- 퇴계와 쌍벽 이룬 ‘영남 거유(巨儒)’ 조식

···············[이달의 문화인물] 계기 재조명··················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남명 조식 선생이 문화체육부에 의해 2월의 문화인물(95년)로 선정됐다. 남명 선생은 실천 유학을 역설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써 퇴계와 함께 영남 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인물로 그의 문하에서는 특히 명유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절의지사가 많이 배출됐다.

부친에게 어릴 적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스무 살에 생원·진사 양과에 급제했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죽고 숙부의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자 시국을 한탄하며 벼슬을 단념했다. 이후 그는 산사를 떠돌며 학문을 연마하다 30세 때 처가인 김해로 가서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당시 내노라하는 명유들과 교유하며 학자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48세 되던 해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온 그는 벼슬과는 인연을 끊은 처사로 일관하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등 선비의 고고한 자세를 꺾지 않았다. 61세 때 다시 진주로 이사해 많은 영재들을 가르쳤는데 이들 중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등은 선생의 고매한 가르침에 따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 서기도 했다.

남명이 72세로 영면(永眠)하자 조정에서는 제물과 제관을 보내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했고 사람은 모두 곡하여 만장과 제문을 올렸다. 또 조정에서는 후일 그의 학문을 기려 영의정에 추증하기도 했다. 진주 덕천서원, 김해 신산서원, 합천 용암서원에 배향됐으며, 저서로는 [남명집(南溟集)], [남명학기], [파한잡기] 등을 남겼다.

 

조신몽(調信夢) : ---  <조신몽설화>

 

조위(1454-1503, 호 매계) ---  조위 가사 ‘만분가’ <유배가사>

· 조선 전기 문인. 창녕 사람

· 성종 때(1481) 유윤겸과 함께 초간본 <두시언해> 간행에 참여

·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실록> 편찬할 때 함께 일한 김일손이 그들의 스승인 김종직의 <弔 義帝文(조의제문)>을 수록, 결국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순천에서 죽음

· 유배가사인 <만분가>가 전해옴

 

조정래(趙廷來, 1943- )

 

󰏐 대하소설 [태백산맥(太白山脈)](전 10권)

- 분단문학의 최고봉으로 83년 월간 [현대문학]에 첫선을 보인 [태백산맥]은 1986년 한길사에서 제 1부 한의 모닥불이 3권의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문단 및 독서계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작품

 

- 88년 원고지 1만 6천장으로 완결된 이 작품은

① “지금까지 쌓아온 분단 주제의 특수사 소재 추구 작품 가운데 단연 역사적인 한 획을 긋는 작품”( 문학평론가 임헌영)

② <태백산맥의 소설적 성과와 통일문학의 전망> [문학과 역사와 인간](한길사, 1991)

 

(1) 고은, ‘문학과 역사에 대한 한 고찰’

⇨ 소설 제목인 태백 산맥이 소설의 주무대인 보성 벌교 지리산과는 약간 동떨어진 점을 지적, 소백산맥이라 해도 될 이 작품을 태백산맥이라 한 것은 태백산맥을 국토의 남북을 있는 통일 의 산맥으로 설정, 통일을 위한 민중의 건설적인 고민과 확신을 확연하게 표상하기 위한 것임

 

(2) 박명림(고려대 정치학) ‘태백산맥과 80년대 그리고 문학과 역사’

⇨ 우리 문학에서 이 소설처럼 전형 창출에 성공하고 있는 소설도 드물다면서 민중적 관점에 서 씌어진 역사소설의 최고봉

 

(3) 김윤식(서울대) ‘벌교의 사상과 내가 보아온 태백산맥’

⇨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으로 벌교란 지역의 특수성이 작가의 기억 속에 철저히 용해되어 형상화되었다며 작가가 자신의 기억을 묘사하는 방법론의 독창성을 높게 평가

 

󰏐 [문학] 조정래씨 아리랑 전12권 탈고

 

<해방 50주년이란 곧 분단 50년이며, 그 말은 지금쯤은 분단 극복을 위한 전민족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남북 어디를 둘러 보아도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시점에서 <아리랑>을 끝내는 감회는 당혹스럽고서운하며 안타깝기만 합니다.>

 

작가 조정래(52)씨가 대하소설 <아리랑> 전12권을 모두 탈고했다. 25일 새벽 2백자 원고지로 2만장에 이르는 `대장정'을 끝마친 그는 26일 새벽까지 내쳐 쓴 후기에서 `글 감옥에서 가출옥'이라는 말로 현재의 심경을 대변했다. 80년대 한국소설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는 <태백산맥>을 집필 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치면 무려 10년 8개월 동안 그는 3만6천여장의 원고지 칸을 메꾸는 초인적인 끈기와 인내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 10년 8개월은 조정래씨 개인으로서는 소설 쓰기를 제외한 삶의 아기자기한 즐거움 모두를 희생해야 했던 인고의 세월이었지만, 한국문학으로서는 민족사의 가장 서럽고도 장렬했던 시기가 소설 속에서 되살아나는 창조의 용광로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민족사의 소설적 재구라는 거룩한 사업에 자신의 장년을 아낌없이 바치고도 그가 보람에 앞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아리랑>이 다루었던 겨레의 고난과 싸움이 끝나기는커녕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착잡한 현실 인식에 기인하고 있다.

 

일제 말기에 지식인들이 보였던 훼절과 변신의 행태가 해방 후 민족사의 왜곡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승만 이후 역대 정권이 친일분자들을 중용하고 독립투사들을 무시한 결과가 오늘날 민족정기의 말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반민족행위자 처단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제가 정신이 나간 것일까요?

 

조씨의 어조는 일제 말기 춘원 이광수를 필두로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빠져든 기회주의적 친일 행각을 높은 톤으로 공박하는 <아리랑> 마지막 부분의 그것을 닮아 있다. 그는 아직도 소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설을 끝내고 이틀째인데도 끝났다는 실감은 나지 않고 대신 소설 속 인물들과 상황이 머릿속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일제 36년 동안 숨져간 원혼들, 그리고 만주와 러시아, 하와이 등지로 취재를 다니면서 만난 동포들을 생각하면 12권짜리 대하소설로도 한없이 미진하기만 하다는 느낌입니다.

 

<아리랑>이 일제 통치의 전 기간과 공간을 포괄하면서 민족의 수난과 투쟁을함께 담고자 한 만큼 그에 들인 작가의 공력 역시 가상하기 그지 없다. 작가는 한반도 내의 주무대인 군산과 김제, 만경 등지를 꼼꼼히 살펴본 것은 물론 겨레의 삶터를 좇아 지구를 세바퀴 반이나 돌 정도로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특히 역사적 사실에 관한 소설을 쓰려 할 경우 작가는 반드시 현장 취재를 해야 합니다. 현장에 가 보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자료와 상상력만으로는 도저히 채워넣을 수 없는 것입니다.

 

10년 8개월이라는 `글쓰기의 감옥'에서 가출옥한 조정래씨는 당분간은 취약해진 건강도 추스를 겸 휴식 시간을 갖고는 곧바로 다음 소설로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태백산맥>을 끝마쳤을 때부터 `그 다음 얘기는 언제 쓸 거냐'라는 질문을 받아왔던 그는 산업화와 계층간 갈등이 날카롭게 드러난 70, 80년대와 이념적 혼란에 빠져 있는 듯한 90년대의 현실까지도 자신의 소설 속에 끌어넣겠지만, 󰡒<아리랑> 이전 시기로는 절대로 복귀하지않겠다󰡓고 단언했다.

 

󰏐 검찰, 조정래씨 기소유예(起訴猶豫) 처분

[태백산맥]의 국가보안법위반 여부를 수사중인 서울지검 공안 1부는 소설 내용 중 일부의 이적성(利敵性)이 인정되지만 베스트셀러로 국민의 심판을 받은 점을 감안, 작가 조정래(52세, 95년)씨와 발행사인 한길사 대표 김언호(50)씨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키로 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95.8.19일 “이 소설이 ▸이승만(李承晩) 정권을 친일 및 친미괴뢰정부로 묘사하고, ▸빨치산을 인민해방전사로 표현했으며, ▸6.25전쟁을 조국 해방전쟁으로 표현하는 등 북한전문가들로부터도 이적성 판단을 받은 바 있다.”면서 “따라서 문제된 부분이 ‘문학상 허구’에 해당한다는 문학계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이 소설이 86년 출간된 후 350만부 이상 팔리는 등 베스트셀러로 국민적 심판을 받은데다 성공한 문학 작품 내용 중 일부만을 문제삼아 처벌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 따라 혐의를 인정하되 기소는 유예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94년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명지대 교수)씨와 한국전쟁참전 총연맹 등 8개 단체가 조씨 등 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 고발해 불구속 입건했었다.

 

󰏐 [문학] 감동적 장면 모은 `조정래의 문학세계' 출간

문학평론가 황광수씨가 소설가 조정래씨의 작품중 감동적인 장면을 모은 [땅과 사람의 역사](실천문학사)를 펴냈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전10권)과 [아리랑](전12권), 다섯권의 작품집과 세권의 장편소설에 서 작가의 문학정신이 집약되어있는 부분과 묘사가 돋보이는 부분, 그 리고 의미와 구성상의 완결성이 돋보이는 부분을 뽑아 조정래의 문학 세계를 한눈에 알아 볼 수있도록 구성했다. [땅의 역사] [여인들의 세계] [달라지는 세상] [박토에 남은 사람 들] 등 4개부분으로 나누어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 된 국토의 아름 다움과 고유풍습,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않는 여인들,일제시대부터 해방전후까지의 이데올로기 갈등, 현대사의 아픔을 온몸으 로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드러난 부분을 골랐다. [조선일보] 96. 12. 30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

· 본명 : 에릭 오더 브라이어(Eric Arthur Blair)

· 1903년 부친의 임지(臨地)인 인도에서 출생

· 1907년 명문교 이튼교를 졸업하지만, 대학진학은 포기하고 경찰관이 되어 미얀마 에 부임

· 영국의 제국주의 첨병인 식민지 경찰관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1927년 귀국하여 작가의 길 을 걸음

· 사회주의자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

· 구소련이 후원한 공산당의 타당파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목격하고 반공주의자 및 반전체주의 자가 된다.

· 1950년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뜸

 

조지훈(趙芝薰, 1920-1968, 본성명 조동탁·東卓)

· 경북 영양생. 고대 국어국문과 교수 역임

· 1939년 [문장(文章)]지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고풍의상><승무>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 박목월, 박두진과 공동시집인 <청록집>을 발간(1946)한 이후 ‘청록파’라 불림.

· 광복 이전의 작품은 <청록집>과 <풀잎단장(斷章)>(1952)에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일제 말기의 암담한 상황에서 고전적 감성을 바탕으로 한 옛것에의 향수와 선적(禪的)인 관조의 감 각이 주조를 이룸.

· [문장]지

- 1회 추천작 : 고풍의상 (1939)

- 2회 〃 : 승무 (1939)

- 완료추천작 : 봉황수 (1940)

---  시 <승무>, <완화삼>, <고풍의상>, <마음의 태양>, <풀잎단장>

---󰃫 논설문 <지조론>

 

조태일(1941- )

· 전남 곡성생

·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아침선박>으로 등단

· 초기시의 경향은 모더니즘적 경향이었으나, 연작시 <나의 처녀막> 이후 현실의 문제에 관심 을 둠. <식칼>, <국토>에서 이런 자각은 더욱 세련되고 발전하여, 60년대 이후의 어두운 사회 현실과 과감하게 대결함

· 시집 : [식칼론](1970) 등

조해일(趙海一, 1942- )

· 현 경희대 교수(81년~)

·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단편 [매일 죽는 사람]) 후 등단

· [임꺽정] 연작, [통일절 소묘], [뿔], [아메리카]

· 1975년 [중앙일보] 연재 [겨울여자] 수십만부 판매 기록, 영화화

 

· 70년대 초까지는 작가의 상상적 세계였던 가정파괴범에 의해 순박한 신혼생활이 산산조각난 [무쇠탈] 연작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시대에 만연된 폭력의 정체를 우회적으로 밝히려 했음

 

· 80년대에는 눈에 보이는 뻔한 폭압적 상황에서 감추면서 이야기하는 우화적 수법 에 염증을 끼고 글쓰기의 중노동에서 벗어나 문단과 담을 쌓고 교수생활로 들어가기도 했음

 

“자신을 포함, 중산층들이 도덕적 무정부 상태에 빠져 사회가 중병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 로 우리 일상적 삶의 부도덕에 대한 수치심(羞恥心)을 일깨울 수 있는 작품을 쓰겠다.”

 

· 작품 경향 : 그의 시는 민족 의식과 역사 의식, 생명 의식과 미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초기에는 서정성을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섬세한 응시를, 민족적 정서와 고전적 시세계 를 애조 띤 가락으로 노래하고 종교적 선(禪) 등을 표현하고 있다.

- 후기에는 회고적 취향과 동양적 자연관에서 벗어나, 당시대의 부정 부패를 고발하는 역 사의식을 반영하여 역사와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응전력을 보이고 있 다.

---  < 추천인 / 피추천인>(황순원 제자)

---  소설 <아메리카>

 

조헌(趙憲, 1544~1592, 중종39~선조25, 호. 중봉, 도원, 후율)

· 경기 김포 생

· 조선 시대의 문신, 의병장. 명종22년 식년문과에 병과(兵科)로 급제

· 1572년 정자(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삭직된 후 곧 저작에 기 용

·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옴

· 임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명을 모아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 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여명의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서 분전하다 전사했다.

·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 문을 계승 발전시킴

· 1754년(영조30) 영의정에 추증,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 배천의 문회서원, 금산의 성 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 등에 제향됨.

· 저서 : [중봉집(重峯集)], [중봉동환봉사]

  묘소, 신도비(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소재)

---  시조 <지당에 비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 제>

 

주시경(周時經, 1876-1914, 37세, 호·한힌샘)---  (어학) <국문연구소>

· 본관 상주(尙州).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진석리 부친 주면석의 4남 2녀 중 둘째생

· 배재학당(培材學堂)을 나와, 독립신문사 교정원으로 재직시 여러 강습소에서 한글을 가르침

· 1907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어 우리말 연구에 헌신적 노력을 함

· 음소(音素)에 대조될 ‘고나’를 어소(語素)에 대비될 ‘늣씨’를 국제적으로 20년 앞선 1914년에 창안,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틀을 마련함

· 국어분석에서는 현행 맞춤법의 원리인 새받침을 제안하여 <형태주의적 표기법>을 세움

· 저서 : [국어문전음학], [조선어문법], [말의 소리] 등

· <주시경학보>(주시경연구소) 발간 (1988년 7월 1호 발행)

 

▲ <슬픈 노래> / 최남선 시

 

아름답고 가진 소리 늘 힌뫼를 에둘러서

한대 모아 감추시니 환의 뜻을 어이 알리 //

 

임의 손에 광이 들매 무첫던 것 드러나고

임의 손에 나발 물매 잠잠턴 것 울려 낫네 //

 

배달말의 환한 빛이 해와 가치 번쩌길 때

사람들의 엉긴 힘이 새 검얼을 얻었도다 //

 

샘이 되어 솟아나매 큰 목숨이 게흐르고

이 말의 꽃 여름 되매 새 밝음이 비롯도다 //

 

맡으심이 크도 클사 지으심도 거룩도다

간열피고 어린 무리 힘입으렴 더 많더니 //

 

누리 떠나 돌아가심 슬픔이야 끝 있을가

다만 트신 바른 길로 속누기며 힘써 옐가 //

 

힘올리신 이 팔뚝은 지신 집을 더 늘이며

만들리신 기름으론 켜신 홰를 더 밝힐 뿐 //

 

아득하나 환한 앞길 가다듬어 나가리다

더 가까이 잡으실 줄 임의 검을 믿노이다. //

 

* <주시경선생유고>(1933, 1945, 1946)의 앞머리에 실려 있는 육당의 애사(哀辭)이다. 맞춤법 은 본디글대로 하였으며, 띄어쓰기는 현대에 맞게 하였음

* <한글새소식> 292호(1996. 12) 수록

 

주요섭(朱耀燮, 1902-1972, 여심·餘心)

· 평양 생(주요한의 동생). 영문학자. 소설가

· 삼일운동 후 귀국, 지하신문을 제작하다 발각, 옥고를 치름

· 1927년 상해 호강 대학 졸. 미국 스탠포드 대학 유학

· 1921년 <추운 밤>, 1925년 <인력거꾼> 등 발표하여 문단 등단.

· 초기에는 주로 하층 계급의 생활을 다루어 신경향파에 속해 있었음

· 1930년 장편 <구름을 잡으려고> [동아일보] 연재

· 한때 [신동아] 주간

· 1934년부터 북경 보인 대학 교수 역임

· 8.15후 귀국 <눈은 눈으로>, <대학 교수와 모리배> 등 발표

· 30년대 <아네모네 마담>, <사랑 손님과 어머니> 등

· 경희대 교수로 후학 양성, 근대적 리얼리즘 기법으로 작품 창작

  관련유적지 - 문학비, 묘(경기 파주군 탄현면 법흥리 기독교 묘지)

---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

 

주요한(朱耀翰, 1900-1979, 송아·頌兒)

· 평양생(주요섭의 형). 시인. 언론인.

· 1919.1.1. <샘물이 혼자서>를 [학우] 창간호에 발표.

· 1919년 2월 [창조] 창간호 동인으로 <불놀이>발표.

· 시집 [아름다운 새벽](1924), [3인시가집](1929), 시조집 [봉사꽃](1930)

· 계몽성, 교술성을 극복하고 시 자체의 예술적 미의식을 부여한 감각적인 시를 선보여 한국 근대 자유시 발전의 계기를 만들었음.

· 시 세계의 구분

- 전기 : 자유시형 추구

- 후기 : 정형시형 추구

· 신시(新詩)운동의 전개 :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찾아 내어 민족적 정서와 사상을 바르게 표현 하자는 운동을 전개함

---  시 <불놀이>, <샘물이 혼자서>

 

차범석(車凡錫, 1924- )

· 극작가. 전남 목포 생. 연희대 영문과 수료

· 1954년 단막극 <밀주(密酒)>가 [조선일보]에 입선,

· 이듬해 <귀향> 당선 문단 등단.

 

채만식(蔡萬植, 1902-1950, 백릉·白陵)

· 전북 군산 출생, 와세다 대학 영문과 중퇴

· [조선일보], [동아일보], [개벽]사 기자 역임

· 1924년 <새 길로>-[조선문단] 12월호 발표 후 등단

· 한 때 동반자 작가(유진오, 이효석)로 불려짐

- <사라지는 그림자>, <부촌(富村)>

· 장편 <탁류>(1937), <태평천하>

· <레디 메이드 인생>(1933), <치숙(痴叔)>, <쑥국새>

· 반어(아이러니)의 기법을 통한 풍자소설

· 1935년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한때 금광업에도 손을 대었으나 주로 창작에 전념.

· 1950년 폐결핵으로 사망

 

 유적지

1) 채만식문학비(군산시 월명동)

2) 생가터(군산시 임피면 읍내리)

 

천상병(千祥炳, 1930-1993)

· 일본 희로(姬路) 시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 간산시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2 년 재학 중 해방을 맞음

· 1945년 귀국, 마산에 정착

· 마산 중학 5년 재학중, 당시 담임(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됨

· 1950년 통역관으로 6개월간 근무

· 전시중 부산에서 서울대 상과대 입학, 송영택, 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 [문 예]지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를 전재함으로써 시와 평론 활동을 함께 시작함

· 1952년 시 <갈매기>가 [문예]지에 게재되어 추천이 완료됨

· 1954년 서울대 상대 수료

· 1956년 [현대문학]지에 월평 집필, 이후 외국서적 다수 번역

· 1964년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약 2년간 재직

· 1952년 [문예]지에 <강물> 추천 등단

· 어렵고 불행한 생활로 이어지는 생애를 보내면서 삶의 어두움, 외로움, 죽음 등의 문제를 다 루는 시를 많이 지음.

- 이러한 시를 쓰면서도 맑은 눈과 청순한 시정신을 구현.

· 시집 : [새](1971), [주막에서](1979)

---  < 괴짜 문인들>

 

청담파(淸談派)

·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세상을 비웃고 노장(老壯)의 풍을 따라 속세를 벗어나 청담, 풍류를 즐긴 인물들

· 남효온, 홍유손, 조자지, 한경기, 이정은, 우선언

 

청록파(靑鹿派)

·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세 사람이 광복 직후 발간한 공동 시집 [청록집]에서 연유하여 이름 붙인 유파.

· 모두 ‘자연’을 대상으로 우리말로 자연에의 귀의와 친화를 노래했음.

· 경향파의 목적의식성, 순수시파의 지나친 음악성, 주지시파의 회화성을 통합하여 독특한 시세 계를이룸.

· 일제 말기 우리 문학의 수준을 한층 높이는 결과를 낳았음

- [문장]지를 통해 추천 받는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피추천자의 시 수준이 한층 높아짐

 

※ 세 시인의 차이점

① 박두진 : 기독교적 염원에 기반, 신을 중심으로 자연과 인간과 사회의 조화를 노래.

② 조지훈 : 회고적 민속적인 것을 제재로 민족적 정서와 전통에 대한 향수 및 불교적 선미(禪 美)를 그림.

③ 박목월 : 향토성이 짙은 토속어의 표현, 정형적인 율조 중시, 간결한 이미지로 섬세한 서정 을 노래.

 

최경창(崔慶昌, 1539-1583, 고죽·孤竹)

· 본관은 해주. 전라도 영암 생.

· 조선 중기 선조 때 낭만적 시풍의 시인으로 ‘삼당시인’(백광훈, 이달 포함) 중 1인

· 인품이 호탕하고 진취적이었으며 선조 때 종성의 부사를 지냄

· 묘 : 경기도 파주군 교하 영태리

  문과에 급제하여 북도평사(병사의 문관)를 지냈는데 이 때 홍원 기생 홍랑이 따라가 막중에 같이 있으면서 정이 깊어졌으며 헤어질 때 시조(묏버들 가려 ~)를 전해 주었다 함. 이후 최경 창이 병이 나서 거의 죽기 직전 홍랑이 일주일을 달려 한양에 도착했는데, 이 일로 인해 결국 최경창은 파면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짐. 최경창이 죽고 난 뒤 홍랑은 3년간 시묘했다 하며 근년 에 고죽의 후손들이 고죽의 묘를 영태리로부터 다율리의 홍랑 묘 곁으로 이장했다 함

---  홍랑 시조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육당)

· 사학자, 시인. 언론인. 일본 와세다 대학 수료

· 춘원 이광수과 함께 신문학 운동의 선구자.

· 1908년 최초의 월간지 [소년] 발간

- <해에게서 소년에게>, <구작 3편> 등 발표

·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청춘](1914) 등의 잡지 발간

· 시조부흥운동을 벌임.

· 3·1운동시 독립선언문 기초(起草)로 옥고를 치름.

· ‘불함문화론’ 주창자

· 시조집 [백팔번뇌](최초의 개인 시조집, 108수) 등

· 기행 [심춘순례], [백두산 근참기], [금강예찬]

· 역사서 [조선역사]. [삼국유사 해제], [조선독립운동사], [국난극복사] 등

 최남선시비(도봉구 수유동 소원)

---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심춘순례 서>, <경부철도노래(경부철도가)>, <시조부흥운동>,

 

최두석(1955- )

· 전남 담양 생

· 시집 [대꽃](1984), [임진강](1986), [성에꽃](1990)

--- 시 <대꽃> ( 항목 <대> )

 

최만리(崔萬理) : ---  <최만리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

· 조선시대의 문신․학자. 본관 해주(海州). 자 자명(子明). 호 강호산인(江湖散人)

· 1419년(세종 1) 생원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기용되어 집현전박사 (集賢殿博士)를 겸임하였다.

· 27년 교리(校理)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37년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에 승진하고 3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44년 6조목의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 한때 세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 또한 환관(宦官)의 사모착용(紗帽着用)이 고제(古制)에 어긋남을 지적, 중국의 제도에 따르도 록 주장하여 이를 시행하게도 했다.

 

최명길(崔鳴吉, 1586-1647, 호·지천)

· 조선 인조 때 정치가

·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에서 항복문서를 써, 청나라에 항복하고 평화론을 모색함

· 인조 15년 우의정, 그후 영의정 역임

· 시호는 문충

· 저서 : [경서기의]

 

최명익(崔明翊, 1903- ? , 호·송방)

· 평양생, 평양고보 졸

· [백치(白雉)] 발간 동인

· 1930년 [중외일보]에 <붉은 코> 발표, 문단 등단

· 1936년 단편 <비오는 날>을 [조광]에 발표

· 경향 : 30년대 지식인의 무기력과 절망감, 소외의식을 형상화하려 함

 

최세진(崔世珍, 1473?-1542)

· 조선 중종 때 한어(漢語), 이문(吏文) 학자.본관 괴산.

· 중인(中人)으로서 특전을 받아 1503년(연산군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 중국의 제도 문물에 두루 통하여 깨침

· 저서 : [훈몽자회(訓蒙字會)], [운회옥편], [사성통해] 등, [박통사] 역해

· 그의 학문은 실용을 위하는 데 특징이 있었다. [훈몽자회] 범례에서 한글 자모음(子母音)의 이름을 처음으로 정하고, 순서와 받침 등을 정리하여 국어학 발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 주요저서에 [사성통해(四聲通解)], [이문집람(吏文輯覽)], [이문속집집람(吏文續集輯覽)]

역서에 [효경언해(孝經諺解)],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 등이 있다.

 

최영(崔瑩, 1316-1388)

· 고려 우왕 때 장군, 충신.

· 친원파(親元派)로서 우왕 14년에 팔도 도통사가 되어 명(明)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켰 으나 이성 계의 회군으로 실패하고 그에게 피살되었음

  최영장군신(神) : 중부 지방의 무속 신상에서 모시는 신의 하나. 이성계에게 죽은 그의 원혼이 숭배의 되상이 되었음

---  시조 <녹이상제 살지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최익현(崔益鉉, 1833~1906, 면암.勉庵)

· 조선 말 학자, 관리, 애국지사, 경기 포천 출생

· 대원군을 탄핵(彈劾)하여 제주도, 흑산도로 유배(流配).

·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 의병(義兵)을 일으켜 항쟁하다가 왜군에게 체포, 수감 중 대마도에 서 단식사(斷食死)로 순직함.

 

최인호(崔仁浩, 1945- )

· 서울 생

· 서울고교. 고3(1963) 단편 <벽구멍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 입선

· 1964년 연세대 영문과 입학

· 1967년 단편 < 2 ½ >로 [사상계] 신인문학상 수상

· 1971년 단편 <예행연습>, <타인의 방> 발표

· 1972년 단편 <황진이 1> 발표, 장편 <별들의 고향> [조선일보] 연재

· 1973년 <타인의 방>, <처세술개론>으로 현대문학상 신인상 수상. 장편 <내 마음 의 풍차> [중앙일보] 연재

· 1976년 단편 <즐거운 우리들의 천국> 발표

· 1979년 단편 <鎭魂曲> 발표. 장편 <불새>를 [조선일보] 연재

· 1982년 장편 [고래사냥]을 [엘레강스]에 발표. <깊고 푸른 밤>으로 제 6회 이상문 학상 수상.

· 1983년 장편 <겨울 나그네>를 [동아일보] 연재

---  소설 <별들의 고향>

 

󰏐 제6회 이상문학상 수상연설

아주 어렸을 때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내게 무엇이 되고 싶은가 하고 물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발명가가 되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막내누이는 성악가, 내 남동생은 의사가 되겠다고 함께 대답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부터 나는 누구도 네 장래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소설가가 되겠다고 대답하곤 했었습니다. (중략)

 

문학이 개인의 사설 창구가 아니라는 자각이 조금씩 들어가고 있습니다. 문학을 하는 자세는 결코 ‘옆’을 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앞’만 봐야 하는 자세라는 것을 조금쯤 느껴지고 있습니다. 문학하는 사람은 그가 쓰는 글보다 먼저 그 사람이 가진 인간의 성품과 마음씨가 너그럽지 않으면 안 된다는 느낌도 요즈음엔 느끼고 있습니다. 링컨의 말대로 ‘적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없는 법’이라는 사실도 느끼고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보다 먼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증오하는 마음보다 화해의 마음을, 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미음이 있는 곳에 화평을 주며, 또한 주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결국 문학이 추구해야 할 최선의 길이라는 느낌도 갖고 있습니다. (하략)

 

󰏐 [최인호 작품세계] 도시적 감수성 동원 서울변화 포착

작가 최인호씨는 70년대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을 [서울적 감각]으로 표현했다. {서울 사람 눈으로 서울의 변화를 느끼는 작가가 그때까지 전무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때까지 서울은 [피난민 문학]이나 [하숙생문학]의 대상이 었다는 견해다.

그가 [서울적 감각]을 동원해 서울의 변화를 포착해 쓴 소설이 72년 그에게 현대문학상을 안겨준 [타인의 방]이다. 마포아파트를 비롯, 새로운 주거 형태로 떠오른 아파트가 서울이라는 도시를 뿌리부터 바꿀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방에서 생활하는 가족들이 모여 집을 이룬다는전통이 무너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변화가 낯설기만했습니다.} 방이 집의 하위개념에서 방이 곧 집이라는 새로운 등식이 성립한 것이다.

 

뒷날 {아파트 문화를 문학적으로 처음 다룬 소설}로 평가를 받는 이소설을 쓸 때 작가는 아파트에 살지 않았다. 스물 다섯에 결혼한 그가 신접살림을 차린 서울 북아현동 중앙여고 앞 목욕탕 2층, 당시 [독탕]으로 불리던 곳에서 영감을 얻었다. 방하나에 한가구씩 살 수 있도록, 요즘의 원룸처럼 만든 그곳에서 그는 이웃간 교류도 별로 없이 타인처럼 지냈다. {내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자 있을 수 있는 내 방도 아니고뭔가 묘했습니다. 아파트도 마찬가지라 생각했습니다.}.

소설속의 주인공은 아파트에 돌아오지만 전통적으로 가장이 집으로돌아올 때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고, 옆집사람도 몰라보고, [돌아오셨냐]는 따듯한 반김도 없다. 아내와 대화도편지만을 통해 이뤄진다. 내집, 내방이라는 감각이 없는 [철저히 타인의방]인 것이다.

 

아내도 남편을 물건으로 여긴다. 그는 이 부분의 묘사를 환상처럼 묘사했다. {한명쯤은 현실을 환상처럼 보이도록 글을 쓰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고 회고 했다. 그는 {[방도 집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던 아파트를 집으로 받아들이는데는 소설을 쓰고 한참 걸렸다}고 말했다.

 

최인훈(崔仁勳, 1936- )

· 소설가. 함북 회령생. 서울대 법대 중퇴

· 1959년 [자유문학]에 단편 <그레이 구락부전말기(GREY俱樂部顚末記)>, <라울전(傳)>으로 추천받고, 1960년 <가면고(假面考)>로 각광받기 시작

· 현대인의 불안과 고뇌를 꿈, 일기, 독백, 회상 등의 다채로운 기법으로 표현

· 작품

- 장편 <회색인>(1963.6-64.6), <광장>, 중편 <구운몽>, <열하일기>, <서유기(西遊 記)>(1966), <총독(總督)의 소리>(연작 1967, 68),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연작, 1969-70), <웃음소리>로 동인문학상 수상(66),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 등

---  소설 <광장>, <웃음소리>, 어휘 <운명론> 중 <광장> 서문

 

󰏐 이산(怡山)문학상 시상식

제6회 怡山문학상 시상식이 28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열려 장편「화두」의 작가 崔仁勳씨(59)가 수상.

 

이산문학상은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故 金珖燮씨를 기려 제정된 상으로 「문학과 지성사」에서 주관하며 매년 하나의 수상작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시상식에서 崔씨는 수상소감으로

 

“지난 53년 김광섭 선생이 창간한 「자유문학」지를 통해 등단하게 됐는데 이렇듯 이산문학상까지 받게 되니 선생으로부터 다시 추천받은 기분”이라며 “세계와 역사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않고 앞으로도 뼈가 있는 글줄을 쓰기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金珖燮씨의 아들 金在玉 딸 金今玉씨와 평론가 鄭明煥, 金允植, 金炳翼, 金治洙, 金柱演씨등이 참석했다. 「화두」를 출판한 민음사 朴孟浩사장과 소설가 金源一, 朴榮漢, 趙海一씨, 시인 朴燦, 金炯榮, 金혜순씨 등도 자리를 함께했다.

 

최일남(崔一男, 1932- )

· 전북 전주시 다가동 생

· 전주사범학교. 서울대 국문과 재학 중 <쑥 이야기>로 문단 데뷔.

---  < 서울대 출신 문인, 평론가>

 

󰏐 최일남(작가론)

<쑥이야기>(1953)로 데뷔한 그의 초기작은 ‘전후작가적’인 특성을 거의 갖지 못하고, 종래 기성세대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었다. 무척 빈약한 스토리요 지나치게 범속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문단에 받아들여진 것은 세련된 문장 때문이었다.

 

그가 재등장한 것은 7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1964), 황석영의[삼포가는 길](1973)에 이르는 거리가 10년을 요하듯 그는 이제 십 년 만에 매우 지속적으로 의욕에 찬 창작활동을 범임으로써 우리 소설사의 굵은 맥을 이룩했다. 그의 재기작 <가을 나들이>(1972)는 단편이지만 이 작가의 저력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최치원(崔致遠, 857- ? , 고운·孤雲, 해운·海雲)

· 신라 말기 학자. 경주 최씨 시조(始祖)

· 12세에 당나에 가서 유학.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이라는 격문을 써 서 글로써 이름을 날렸으며, 28세(885)에 귀국, 진성왕 8년(894)에 ‘아찬’ 벼슬을 받았으나 곧 사퇴하고 은 퇴.

· 6두품 출신의 신분적 한계로 인해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세상을 마침

· 저서 : [계원필경]

 

 유적지

1) 무성서원(전북 정읍시 원촌마을) : 최치원의 위폐를 모신 사액(賜額) 서원

2) 최치원동상 및 시비(부산 해운대구 동백섬 산정)

---  한시 <추야우중>

 

최하림(崔夏林, 1939- )

· 전남 목포 생

·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꽃], [겨울 깊은 물소리]등

· 역사적 실존체로서의 시인의 고뇌와 그 탈출에의 의지 도출

- 60년대 독재 정권, 권위주의 청산 의지 → 자유의 갈구

- 어디론가 진실된 삶을 갈구하는 이의 모습

(지사적 결의를 품은 강한 정신의 직선적 저항의지)

 

▲ 설야(雪夜)

 

하늬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밤 그이는 하마

취비강을 건넜을까. 보내는 이들이 밤을

설치며 그리는 그 얼굴 그 눈종자라

가슴에 불붙어 타오르는데

그이는 수많은 노두를 건너서 바람과 눈보라를

헤치고 무사히 자유에 발디뎠을까.

 

▲ 철지난 봄노래

 

코란도를 타고 반야봉엘 간다.

산줄기들이 꿈틀꿈틀 흘러가고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구례 쪽 염천에서

은근히 안개비 꽃들을 덮어 가린다.

다투어 피며, 냄새 풍기는 꽃들을

꿀벌이 붕붕거리고, 짝새들이 짹짹거리고 돌틈을

비집고 봄물이 졸졸졸졸 흘러간다 예사롭잖게

날들이 간다 이런 날은 남부군을 쓴 이태(李泰)도

잠시 손을 놓고 잎새에 흘러내리는 빛을

보며 철따라 피는 봄을 애달아했으리

그렇듯 오늘도 봄은 간절히 퍼져가고

땅속 깊이 터져나오기라도 하는 듯이

진달래 산철쭉 며느리밥풀꽃들이 머리들고

머리 숨기며 희고 붉게 깔깔대노니

골짝마다 능선마다 바위 틈마다에서

폭발적으로 솟아오르는 꽃소리!

꽃메아리치는 소리! 깔깔깔깔 깔깔깔깔

 

󰏐 시인 자작시 해설

이 시는 회복되어 가고 있는 사람의 내면심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아프기 전에도 나는 자연을 허술히 하는 편은 아니었다. 자연의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편이었다. 그러나 아프기 전의 시에 나오는 자연 변화는,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려주고 음미하는 소멸의 정서 같은 것으로 기능했었다.

 

그런데 <철지난 봄노래>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자연은 소멸이 아니라 생성이며, 기쁨이다. 산줄기들은 꿈틀거리고 김은 무럭무럭 솟아나고 안개비들은 에로틱 하게 산자락을 애무한다. 그런 사랑의 적극적인 운동형태로 파악되는 자연은 기쁘게 땅 속 깊이에서 폭발적으로 꽃들을 토해내며, 토해내는 일이 고통도 아니고 재생도 아닌, 그것들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그것들과 관계없는, 오로지 기쁜, 성적 충만성과 같은 것이다.

 

최학송(崔鶴松, 1901-1932, 본명 서해·曙海) : 소설가. * 색인 : 최서해

· 함북 성진 생.

· 빈한한 가정, 일찍부터 모를 여의고 북간도 지방을 유랑하며 국수집 종업원, 역부(驛夫), 나무 장수, 중(僧), 물장수, 노동판 등 여러 직업 전전.

· 1925년 <탈출기(脫出記)>를 [조선문단]에 발표, 문단의 주목.

· 그외 <기아와 살육>(1924), <큰물진 뒤>(1925), <박돌의 죽음>(1925), <홍염>

· 신경향파 문학이 유행하던 당시 그의 빈궁문학은 많은 갈채를 받아 중견작가의 위치에 섬 : 자전적(自傳的) 사소설(私小說) 작가

· 1925년 카프에 가입. 노년에 극심한 생활고에 허덕이다가 병사함.

---  소설 <홍염(紅焰)>, 어휘 <모더니즘>

 

최현배(崔鉉培, 1894-1970, 외솔)

· 경남 울산군 하상면 동리 출생(최병수 님의 맏아들)

· 어렸을 때부터 총명, 동네 어른들로부터 칭찬. 산수에 능했으며 12살 때에 동네 서당을 대표 하여 바둑대회에 참가했을 정도로 바둑에도 능했음

· 14살 때 울산 병영에 신설된 일신학교 입학, 신식교육 수학

· 대한 매일신보에서 나라 정사가 글러져 감을 개탄하여 어렸을 때부터 나라 걱정으로 목놓아 울기도 했음을 자신의 글에서 알 수 있음

· 17살 때(1910.4) 경기 중고등학교 전신인 한성고등 보통고등학교 75명 모집에 1,200명이 응모 한 가운데 최우수성적으로 입학 (그 이후 바둑을 일절 두지 않고 학업에 전념)

· 입학하던 해 8월, 교명이 경기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고 일인들에 의해 운영, 실망을 함

· 그리하여 고향 친구 소개로 주시경 선생이 가르치는 조선어(한글)강습원에 나가기 시작하며 주시경 선생의 뜻을 충실히 이어 받음.

· 22세에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에 유학함(한문, 교육학 전공)

· 29-32살 때 교토대학 철학과 입학, 사회학 연구

· 1926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 민족 갱생의 도>를 통해 조선 민족이 살아갈 길을 제시 하기도 함

· 1926년-1938년(33-45살) 연희전문학교 교수 재직

·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겸직(33-38살)

· 연희전문 학교 복직

· 1942.10-1945.8.15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동안 옥중생활

· 중일전쟁이 극심해 갈 적에 서울에 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이 몸(외솔)이 죽기 전에 우리 한 글 동지들이 연구한 결과를 적어, 뒷 세상에 전하기 위해 삼년 동안 노력 [한글갈]을 펴냄

· 연대 부산분교에 있은 학술 강연 뒤 그곳 제자들이 택시로 동래온천장으로 모시려고 했을 때 거절, 전차를 탔으며 연회석상에서 아예 술은 자시지 않았고, 콜라도 외국 상표라하여 드시시 않으셨음

· 광복 직후 군정시, 6·25동란 시 문교부 편수국장 시절, 매일 도시락 지참

· 1946년부터 서울사대 국어말본 강사로 지냄.

· 1949년 한글학회(조선어학회 개칭) 이상장 취임, 상무를 봄

· 1954년(61세) 연희대학교 교수로 다시 취임

· 연세대학교 재직시절 부총장의 보직을 맡았을 때 승용차를 거절, 걸어다니시며 나라 걱정을 한 일화도 유명함(62세)

· 1968년 세종대황 기념사업회 대표 이사 취임

· 1970.3.23(77세) 새벽 3시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

· 사회장으로 엄수, 경기 양주 진접면 장현리에 안장

· 1993년 10월의 문화인물

· 저서로는 [조선민족 갱생의 도], [우리말본], [글자의 혁명],[한글갈], [나라사랑의 길] 등

 

▲ [나라 사랑의 길] ‘머리말’에 실린 최현배 시조 4수

 

임이여 어디갔노 어디메로 갔단 말고

풀나무 봄이 되면 해마다 푸르건만

어찌ㅎ다 우리의 임은 돌아올 줄 모르나. //

 

임이여 못살겠소 임그리워 못살겠소

임떠난 그날부터 겪는 이 설엄이라

임이여 어서 오소서 기다리다 애타오. //

 

봄맞이 반긴 뜻은 임올까 함이려니

임을랑 오지 않고 봄이 그만 저물어서

꽃지고 나비 돌아가니 더욱 서러하노라. //

강물이 아름아름 끝난 데를 모르겠고

버들가지 출렁출렁 물속까지 드리웠다.

이내 한 길고 또 길어 그칠 줄이 없어라. //

 

추천인 / 피추천인

󰏐 [한국예술의 뿌리] 소설의 양대산맥 김동리 · 황순원계보

김동리와 황순원은 우리 소설문단의 큰 계보를 형성한 두 기둥이다.

 

󰊱 김동리(1913~95)는 30대 중반인 49년부터 '문예'지 추천위원으로 후진을 천거하기 시작, 강신재씨를 제1호로 많은 소설가를 문단에 데뷔시켰다. '문예' 추천을받은 작가는 장용학, 손창섭, 서근배, 곽학송씨 등. 또 '현대문학'을 통해서는 박경리, 고(故)이범선, 최일남, 한말숙, 오영석, 손장순, 정을병, 이문구, 김성일, 김지연, 박상지, 백시종, 백인빈, 송숙영, 신석상, 안동림, 이광숙, 이동하, 이문희, 정병우, 정종화, 최창희, 추식씨 등이 그의 추천을 받았다.

 

그가 53년부터 교수로 재직했던 서라벌예대(현 중앙대예대)에서 그로부터 배워 데뷔한 작가도 많다. 천승세, 김원일, 송상옥, 유현종, 오인문, 양문길, 안장환, 오정희씨가 그들이다.

 

또 '월간문학'추천으로는 서종택, 김주영, 서영은씨가, '한국문학'으로는 문순태, 김청, 김태영씨가 등단했다.

 

---  <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

 

󰊲 17세때인 1931년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황순원씨는 65년이나 되는 작가경력과 오랜 교육경력을 통해 많은 문학인을 길러냈다. 그는 장편 '인간접목'을 쓸 무렵인 55년, 41세때 '현대문학'추천위원으로 위촉돼 오유권씨를 소설가로 추천, 후진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의 추천으로 등단한 작가는 이호철, 서기원, 최상규, 승지행, 서승해, 백우암, 안영, 이성원, 김지원, 김채원씨 와 작고한 이욱종, 박승인씨 등이 있다.

 

58년부터 경희대에 재직하면서 배출한 제자문인으로는 소설가에 전상국, 조세희, 조해일, 김용성, 한수산, 김태영, 우선덕, 노수민, 박진숙, 유재주, 고원정, 이유범, 이연철씨, 시나리오작가로 신봉승, 수필가로 서정범, 김태곤, 고경식, 이원복씨등이 있다. <여동은기자>

 

친일문학(親日文學) 문인 * : 항목 참고보기

김동인(東文仁) 김동환(白山靑樹)

김문집(大江龍之介) 김소운(金素雲)

김안서(金億)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박영희(朴英熙)

백철(白鐵) 유진오(兪鎭午)*

이광수(香山光郞) * 이무영(李無影)

이효석(李孝石) 정비석(鄭飛石)

조용만(趙容萬) 주요한(朱耀翰)

채만식(蔡萬植) 최남선(崔南善)

최정희(崔貞熙) 등

 

콰지모도(Quasimodo, Salvatore, 1901-1968)

· 이탈리아 시인. 토목기술자였다가 문학으로 전향

· 1930년 제1시집 [물과 흙] 이후 10여권의 시집을 출간

· 1959년 고전적 정열로써 현대생활을 묘사한 서정시로 노벨문학상을 탐

· 이탈리아의 다른 고답적 시인과는 달리 서정시를 많이 씀

· 시집 [인생은 꿈이 아니다] 등

 

타고르 라빈드라나스

· 노벨 문학상 수상(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받는 노벨상)

- 서방 세계에서 인도의 문화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인도는 흥분하였다.

· 이 시인은 "나는 다시는 평화스러움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함

· 교양이 있고 재능을 갖춘 벵골의 한 집안에서 출생

· 나이 20세에 벵골의 시를 담은 책을 출간하여 명성을 떨침

· 그는 자기의 시를 영어로도 번역하였다.

· 1912년 그는 타계한 자기 부인과 세 아이들에게 바치는 책 '기탄잘리(찬송)'를 출판하였다. 그는 볼퍼르에 있는 샨티니케탄에 인도 문화원을 설립함

 

태조(太祖) : 한 나라의 왕조에서 첫 대(代)의 임금

󰊱 태조(1335-1408, 본성명 이성계) : 함남 영흥 생. 고려의 무장이었으나 1388년 위화도 회군 을 계기로 삼군 도총제사가 되었다가 1392년 군신에게 추대되어 즉위함

---  < 조선왕조 계보>

 태조이성계 시비(이산묘(珥山廟), 전북 진안군 마이산) : ‘마이동천(馬耳洞天)’, ‘주필대’라는 글씨가 음각

 

󰏐 태조

조선의 제1대 왕(재위 1392~98). 본관 전주(全州). 자 중결(仲潔). 호 송헌(松軒). 성 이(李). 휘(諱) 성계(成桂). 시호 지인계운성 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함경도 영흥(永興) 출생. 자춘(子春)의 2남. 즉위 후 휘를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비(妃)는 한경민(韓敬敏)의 딸 신의왕후(神懿王后), 계비는 강윤성(康允成)의 딸 신덕왕후(神德王后).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한 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에 내응(內應)하여 공을 세웠고, 후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61년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토벌하였으며, 같은 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다음해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하여 제1착으로 입성, 전공을 세움으로써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승진되고, 원(元)나라의 나하추[納哈出]가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침입하자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64년 원나라 연경(燕京)에 있던 최유(崔濡)가 충숙왕(忠肅王)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1만 명의 군대로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川江)에서 대파하고, 이어 여진족(女眞族)의 삼선(三善)․삼개(三介)가 함경도 화주(和州)에 침입한 것을 격퇴하였다. 이 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 68년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로 승진, 72년(공민왕 21)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고, 77년(우왕 3) 왜구가 개경을 위협할 때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이를 격퇴하였다. 80년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가 되어 운봉(雲峰)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82년 찬성사(贊成事)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다음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호바투[胡拔都]의 군대를 길주(吉州)에서 대파하였으며, 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고 이듬해 함경도 함주(咸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88년(우왕 14)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최영과 함께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을 처형, 이때 명(明)나라의 철령위(鐵領衛) 설치 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출정을 반대했으나 거절당했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후 창왕(昌王)을 세웠으며,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으로서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였다. 다음해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다. 90년(공양왕 2) 삼사영사(三司領事)로 승진하였고, 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로서 조준(趙浚) 등과 함께 구신(舊臣)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구신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었고, 그의 일파인 신진세력은 경제적인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 그 해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정하고 94년(태조 3)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과(芳果:定宗)에게 선위한 뒤 상왕(上王)이 되고, 1400년 방원(芳遠)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되었다. 1402년 왕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빚어진 심뇌로 동북면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왔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사대주의(事大主義)․배불숭유(排佛崇儒)․농본주의(農本主義)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500년의 근본 정책이 되게 하였고 관제의 정비, 병제(兵制)와 전제(田制)의 재조정 등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묘호(廟號)는 태조, 능은 건원릉(健元陵)이다.

 

󰊲 태조(877-943, 본성명 왕건) : 신라말 군웅(群雄)의 한 사람인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가, 918 년 부하에게 옹립(擁立)되어 송도에 도읍하고 고려 왕조의 첫 임금이 됨 --- 󰃫 < 왕건>

󰊳 태조(371-409, 본성명 탁발규) : 중국 북위 시대 1대 임금. 전진이 동진에게 망함을 기화로 산서(山西) 북부에서 386년에 일어나 황제가 됨. 만년에 둘째 아들에게 죽음

󰊴 태조(852-912, 본성명 주전충) : 중국 후량의 1대 황제. 당나라를 멸하고 위(位)에 올랐다가 즉위 6년만에 아들에게 죽음

󰊵 태조(927-976, 본성명 조광윤) : 중국 송(宋)나라의 1대 황제. 후주의 금군 장군으로 있다가 세종의 사후, 금군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송이라 함. 재위시 중국을 거의 통일함

󰊶 태조(1068-1123, 본명 아골타) : 종주국이었던 요(遙)에 대항하여 독립, 왕위에 오름. 송과 동맹을 맺고 요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확보하기도 했음

󰊷 태조(1328-1398, 본성명 주원장) : 중국 명나라 1대 황제. 원말의 혼란을 틈타 봉기하여 명 을 세움.

󰊸 태조(1559-1626, 본명 누르하치(Nurhachi, 奴兒哈赤·노아합적)) : 청나라 1대 황제. 명을 멸 하고 청을 세워 황제가 됨

󰊹 태조(1155 ?-1227, 징기스칸(Chingiz Khan, 成吉思汗·성길사한) : 몽골제국의 창시자(재위 1206~1227). 묘호(廟號) 태조(太祖). 아명 테무친[鐵木眞]. 바이칼호 근처 출생. 칭기즈란 고대 터키어인 텡기스(바다)의 방언이었다고도 하고, 1206년 즉위하였을 때 5색의 서조(瑞鳥)가 󰡐칭기즈, 칭기즈󰡑 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샤머니즘의 󰡐광명의 신(Hajir Chinggis Tengri)󰡑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태종(太宗)

 태종(太宗, 598~649, 본성명 이세민) : 당(唐)의 제 2대 황제. 아버지는 이연(李淵:초대 황 제). 어머니는 두(竇)씨. 중국 역사상 유수(有數)의 영주(英主)로 알려져 있으며, 북방민족의 피 가 섞인 무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하고 사려가 깊으며, 무술․병법에 뛰어난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소년시절부터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수(隋) 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내란의 양상이 짙어지자, 수나라 타도의 뜻을 품고 타이위안[太原] 방면 군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거병,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수립하였다. 그 뒤 군웅을 평정하고 국내 통일을 실현시킨 것은 20세 안팎인 그의 활동에 의한 것이며, 이를 질투 한 형 황태자 건성(建成) 및 동생 원길(元吉)과 다투어 마침내 그들을 쓰러뜨리고, 626년 아버 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이어서 돌궐(突厥)을 비롯한 사방의 이민족을 제압하고 여러 민 족의 추장들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의 존호를 받았다. 이로써 당나라는 번한(蕃漢)의 양 사회를 포용하는 세계제국이 되었다. 양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명신 위징(魏徵)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심을 누르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극히 공정한 정치를 하기에 힘썼다. 그러므로 그의 치 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칭송받았고,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학문․문화의 애호자이기도 하여 전대의 각 왕조사와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편찬을 명하였고, 사서(史 書)의 일부는 스스로 집필하였다.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특히 사랑하였고, 그 자신도 유려한 필적을 남겼다. 그러나 좋은 후계자를 두지 못하였고, 만년의 고구려 친정 실패 등으로 그가 죽은 뒤에는 정권이 동요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 태종(太宗, 1367~1422, 이방원) : 조선 3대 임금, 태조의 제 5남.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 后) 한씨(韓氏).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밀 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신진정객(新進政客)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88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 (明)나라에 다녀오고, 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登極)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異母弟)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98년(태조 7) 중신(重臣)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방번(芳蕃) 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 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同腹兄)인 방과(芳果:定宗)에게 사양하였다. 1400년(정종 2) 넷 째 형인 방간(芳幹)이 박포(朴苞)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世弟)에 책봉되었다. 방간․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 정된 후 정종의 양위(讓位)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革罷)하고 1402년(태종 2) 문하부(門下府)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議 政府)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郞舍)는 사간원(司諫院)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三司)는 사평부 (司平府)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庶務)를 육조(六曹)에서 분장(分掌)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 하였다. 한편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寺刹)을 폐쇄한 후, 그 사 찰에 소속되었던 토지․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秘記)․도참(圖讖)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양반․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人的資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改嫁)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嫡庶)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毛憐衛) 파아손(把兒孫)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野人: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鑄字所)를 세워 1403년 (태종 3)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으며, 하륜(河崙) 등에게 《동국사략(東國史 略)》《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戶布)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1402년(태종 2) 상하 국민의 남소(濫訴)․월소(越訴)를 엄금하였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 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巡軍制度)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法司)인 의금부(義禁 府)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近衛隊)로서 모역(謀逆)을 방지하는 기관이었 다. 1404년 송도(松都)에서 한성(漢城)으로 천도하였으며, 18년 세자(世子:世宗)에게 선위(禪位) 하고 상왕(上王)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

· 런던 출생. 영국의 역사가․문명평론가. 경제학자 A.토인비의 조카.

· 옥스퍼드대학에서 고전고대사를 전공하고 왕립 국제문제연구소 연구부장, 런던대학 국제사 연구교수, 외무성 조사부장을 역임하고 런던대학 명예교수가 됨

·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거시적 입장에서 집필한 필생의 역작 《역사의 연구》(12권, 1934~ 54, 59, 61)에서 많은 문화유형을 고구(考究)하여 세계사를 포괄적으로 다룬 독자적인 문명사관 (文明史觀)을 제시하였다.

· 그리스 이후 쇠퇴하였던 역사의 반복성에 빛을 부여함으로써 고대와 현대 사이에 철학적 동 시대성(同時代性)을 발견하고 역사의 기초를 󰡐문명󰡑에 두었다. 문명 그 자체를 하나의 유기 체로 포착하고, 그 생멸(生滅)이 역사이며, 그 생멸에 일정한 규칙성, 즉 발생․성장․해체의 과정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 26개의 문명권을 병행적․동시대적으로 나열 하고, 이들 모두가 규칙적인 주기(週期)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구명하였다. 한편, 문명의 추진 력을 고차문명(高次文明)의 저차문명(低次文明)에 대한 󰡐도전󰡑과 󰡐대응(응전)󰡑의 상호작용 에 있다고 보았다.

· 저서로 [Nationality and War](1915), [Greek Historical Thought](1924), [A Survey of International Affairs](1924~38), [Civilization on Trial](1948) 등

 

펄 벅(Pearl S. Buck, 1892-1973)

· 미국 태생, 생후 4개월만에 선교사인 부모의 품에 안겨 중국으로 건너감

· 유년기, 소녀시절을 중국 유모가 들려 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람

· <수호전> 같은 중국 고전에 심취했는데 이는 그의 문학의 자양분(滋養分) 역할을 함

· 대학 공부를 위해 18세에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 졸업 후 다시 중국으로 감

· 1917년 선교사인 존 벅과 결혼한 후에는 남경(난징) 대학 등 몇몇 대학에서 영문학 강의를 하면서 교회에서는 선교활동을 하기도 함

- 훗날 이혼했으며, 유일한 혈육인 딸은 정신박약아였음

· 1923년 무렵 중국에 관한 글을 미국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

· 1925년 장편 <동풍서풍>을 쓰면서 본격 소설가의 길에 들어섬

· 1931년 <대지>를 발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켜 그해 퓰리처상을 수상

· 왕룽의 아들들과 손자들의 이야기인 <아들들>(1932)과 <분열된 일가>(1935)를 <대지>와 함 께 묶어 <대지>라는 이름으로 출판함.

· 1938년 노벨문학상 수상

· 제2차 대전 후 미군병사들이 남긴 아시아의 사생아들과 고아들을 위해 ‘펄 벅 재단’을 세우고 많은 재정적 도움을 줌.

---  소설 <대지>

 

포선(鮑宣)·환소군(桓少君) 부부

· 진한 때의 포선과 그의 아내 환소군을 말함

· 포선이 일찌기 환소군의 아버지에게서 배웠는데, 청빈을 견디어 내는 포선의 지조를 칭찬하 여 그를 사위로 삼았다 함.

· 그런데 환소군이 시집 올 때 가지고 오는 물건이 너무 많으므로 포선이 이를 거절. 환소군도 그의 뜻을 받아들여 물품을 모두 돌려 보내고 검소한 차림으로 시집으로 와서 부도(婦道)를 잘 지켰다 함.

 

폭군(暴君) : 로마의 네로와 같은 폭군들

󰊱 하(夏) - 걸왕(桀王) * 말희(妺喜)라는 여인

--- 󰃫 <주지육림(酒池肉林)>

󰊲 은(殷) - 주왕(紂王) * 달기(妲己)라는 여인

--- 󰃫 <도탄(塗炭)>

󰊳 진시황(秦始皇)과 아들 호해(胡亥)

--- 󰃫 <지록위마(指鹿爲馬)>

 

󰊴 수나라 제 2대 양제(煬帝/569~618)

양(煬)은 악랄한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처음 진왕(晉王)이 되어 남조(南朝) 진(陳)을 토벌 하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간악한 계략에 능하여, 형인 황태자 용(勇)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황 태자가 되었다(600). 권신인 양소(楊素)와 결탁하여 제위에 올랐는데, 그때 아버지 문제(文帝) 를 살해하고 그 비(妃)를 범하였다고도 한다. 즉위한 뒤에는 만리장성을 수축하였고, 뤄양[洛 陽]에 동경(東京)을 조영하였으며,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완성하는 등 대규모의 토목공사 를 자주 벌임으로써 백성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었다.

 

전후 3회에 걸친 고구려 침입에서는 번번히 대패하고 말았다. 특히 612년 제1차 고구려 침 공때는 113만의 대군을 끌고 침입하였다가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살수(薩水)에서 대패 하였다. (--- 󰃫 을지문덕 5언고시 <여수장우중문시>) 613년 제2차 침공 때는 후방에서 양현 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 철수하였다. 2개월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지만, 이후 각지에서 반란 이 일어나 이른바 수나라 말의 반란기에 접어들었다. 이는 양제가 백성을 과중하게 혹사한 데 다 기근․수해까지 겹친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폭군만은 아니었으며, 대업례(大業禮)․대업률령(大業律令)의 정비와 대운하의 완성과 같은 큰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 궁예(?-918) ---  < 태조>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한 왕(재위 901~918). 성은 김.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권다툼에서 회생되어 지방으로 몰 려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 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의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 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菩薩:靑光菩薩․神光菩薩)이라고 칭하는 등, 백성을 괴롭 히고 많은 신하를 희생시키며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폭군으로 전락한 궁예는, 결국 그의 부하인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평강(平康)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

 

󰊶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37-68)

로마의 제5대 황제(재위 54~68). 본명은 Lucius Domitius Ahenobarbus이다. 황제 클라우디 우스의 둘째 아내인 소(小) 아그리피나비(妃)의 전 남편(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54년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고 근위병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을 때 불과 16세였다. 치세의 초기 약 5년 동안은 근위장관 브루투스, 철학자이며 그의 스승인 세네카의 후원으로 해방노예의 중용, 감세, 원로원 존중, 매관매직의 폐단을 시정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점차 잔인․포악한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 어머니, 비 (妃) 옥타비아를 차례로 살해하였다. 특히 브루투스의 병사(病死)와 세네카의 은퇴는 그의 난 행의 도를 심화시켜 치정(治政)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64년에는 로마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전가시켜 대학살을 감행하였으며, 그 폐허 위에 화려한 황금궁전을 세웠다. 또 원로원의원 피소 일파의 음모가 발각되었을 때는 세네카․루카누스를 포함한 고위 측근을 처형하였다. 한편, 그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 예술의 애호자로도 알려져 있다.

 

󰏐 A.N.오스트로프스키(러시아) 희곡 <뇌우(雷雨, Groza>(1859)

전 5막. 볼가강가의 카리노프카라는 조그만 도시를 무대로, 19세기 무렵의 러시아 상인 계급의 폐쇄된 생활의 비극을 그린 작품. 꿈많은 처녀인 카체리나가 애정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 치혼에게로 시집간다. 인습과 완고로 질식할 것 같은 시집에서, 시어머니의 질책과 면박을 견디면서도 남편에게 마음의 기둥을 찾으려 하지만 찾지 못하고 사랑하는 애인 보리스에게 건 한 가닥의 기대마저 배신당한 절망 끝에 볼가강에 몸을 던져 버린다.

작자는 이 여주인공을 자살로 몰아넣은 러시아 사회의 위선․미신․잔학․비정을 가차없이 폭로하고, 그 ‘폭군적 가장제’가 얼마나 젊은 세대를 질식시키고 있는가를 격렬하게 묘사하였다.

 

󰏐 노신(魯迅) <아Q정전(阿Q正傳)> 제4장 ‘연애의 비극’ 中

중국의 남성들은 원래 거의가 성현될 소실을 갖고 있었으나 아깝게도 모두 여자로 해서 망쳐 버렸던 것이다. 은(殷)은 달기 때문에 망했고, 주(周)는 포사(褒姒)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진(秦)은 ······ 역사엔 명문(明文)이 없으나 우리들은 그것도 여자 때문이라고 가정해도 거의가 틀림없을 것 같다. 그리고 한(漢)의 동탁(董卓)은 확실히 초선(貂蟬)에게 살해된 것이다.

󰏐 그외 : 최서해(최학송)의 소설 <폭군>

 

피천득(皮千得, 1910- , 금아·琴兒)

· 시인. 서울 생. 중국 호강대 영문과 졸. 영문학자. 이광수에 사사(師事)

· 서울 사대교수. 동심에서 우러나온 맑은 서정으로 쓴 작품이 많음.

· 시집 [서정시집], 시문집 [금아시문선], [산호와 진주]

· 그외 수필 다수

---  <수필>, <은전 한 닢>

 

󰏐 피천득씨 수필-번역시집 출판기념회

皮千得씨(87)의 수필집 「인연(因緣)」과 번역시집 「셰익스피어 소네트시집」의출판기념회가 30일 저녁 서울 동숭동 샘터화랑에서 열렸다.

이날 기념회는 김재순 샘터사발행인의 인사말과 김우창 고려대영문과교수의 피천득 문학 세계소개, 원로 아동문학가 윤석중씨의 축사와 皮씨의 답사 등으로 진행됐다.

모임에는 시인 김남조 신달자 김초혜 홍윤숙 정두리씨와 수필가 박연구 손광성씨, 소설가 최인호 한명숙씨, 시조시인 유재영씨, 김동성 전공보처장관 심명호 서울대 영어교육과교수 윤형두 범우사 대표 黃베드로수녀 김원숙UA여행사상무 피수영중앙병원 신생학과과장(皮씨의 둘째아들)이 참석, 皮씨의 출판을 축하했다.

 

필화(筆禍)작가

 

󰏐 필화작가들

 

① 유진오(兪鎭午)

"왜놈의 씨를 받아 / 소중히 기르던 무리들이 / 이제 또한 모양만이 달라진 / 새로운 점령자의 손님네들 앞에 / 머리를 숙여 / 생명과 재산과 명예의 / 적선을 빌고 있다 / 누구를 위한 /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45년 해방과 함께 22세의 나이로 우리 시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유진오(兪鎭五)가 46년 9월1일 현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국제청년데이 기념식장에서 낭독한 자작시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한 부분이다.

외국군의 주둔으로 변질된 해방의 의미와 미군정청 아래서 여전히 권세를 부리는 친일파를 성토한 시이다. 이틀 후 유진오는 미군정청에 연행돼 군정정책을 왜곡,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징역1년을 선고받아 해방후 첫 필화(筆禍)문인이 됐다.

외세와 분단 그리고 독재로 우리의 현대사는 왜곡돼 왔다. 그 왜곡된 역사와 현실을 붓을 휘둘러 고발하려다 숫한 식자층들이 화를 당해왔다. 문인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문학작품이 선봉에서 필화를 불렀다.

 

② 정공채 시인, 남정현 소설가

정부 수립후에도 외세를 고발하다 당한 문인으로는 시인 정공채(鄭孔采), 소설가 남정현(南廷賢) 씨를 꼽을 수 있다.

鄭씨는 장시 "미8군의 차"를 "현대문학" 63년 12월호에 발표, 반미주의자로 몰려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가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南씨는 단편소설 "분지(糞地)"를 "현대문학" 65년 3월호에 발표했다. 우화, 풍자적 기법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고발한 이 작품을 북한노동당기관지인 "조국통일"이 65년 7월8일자로 전재했다. 다음날 南씨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1년동안 조사받던 끝에 66년 7월23일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다시 1년 후인 67년 6월28일 "반미적, 반정부적 감동을 일으키게 한다"는 이유로 "징역6월과 자격정지 6월에 처할 것이나 정상을 참작, 선고를 유예한다"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③ 구상 시인

시인 구상(具常)씨는 남북 양체제에서 필화를 경험한 유일한 문인. 46년 具씨는 고향인 원산에서 사화집 "응향"에 시를 발표했다가 부르조아적, 퇴폐주의적, 반역사적, 반인민적인 반동시인으로 몰린다. 그 체제를 못 견뎌 월남한 具씨는 65년 8월 희곡 "수치"를 드라마센터의 무대에 올리려다 당국으로부터 공연보류조치를 당했다.

등장인물중 빨치산 군관의 대사 "우리의 영웅이신 김일성 장군께서" 등이 문제가 되어서다. 북한에서 상투어로 쓰이고 있는 말을 작품에 사실성을 불어넣고 또 그러한 공산당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된 것인데도 탄압을 받은 것.

 

④ 현기영, 조정래 소설가, 이산하, 이기형, 오봉옥 시인

이후 분단된 상황에서 빨치산을 형상화하다 당한 문인들로는 소설가 현기영(玄基榮), 조정래(趙廷來)씨, 시인 이산하, 이기형(李基炯), 오봉옥씨 등을 들 수 있다. 79년 11월 玄씨는 첫 창작집 "순이 삼촌"을 펴냈다. 그 표제작이 문제가 돼 며칠후 그는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돼 2박3일간 모진 고문을 받으며 집필동기를 기술해야만 했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없이는 갈 수 없는 땅 / 발가락을 자를 분노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 민족해방을 위해 장렬히 산화해 가신 전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로 시작된 장시 "한라산"을 87년 3월 무크 "녹두서평1"에 발표한 이산하씨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제주도 출신으로서 아직도 제주도민을 죄고 있는 4·3사건의 원(怨)을 풀려다 玄, 李씨 모두 필화를 겪은 것.

 

한편 빨치산의 최후 거점으로 엄청난 피와 한을 부른 지리산을 무대로 한 작품들도 필화를 부르고 있다. 연작시집 "지리산"을 88년 펴낸 이기형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실천문학" 88년 가을호에 장시 "붉은 산 검은 피"를 발표한 오봉옥씨도 "공비(共匪)를 미화, 찬양한 이적표현"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하근찬(河瑾燦, 1931- )

· 소설가, 경북 영천 생, 전주사범, 동아대학교 수학

·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수난이대>가 당선, 등단

· 초기 : 역사적 상황과 연계된 가난한 농촌을 비극적 현실로 인식하고 그 아픔을 이겨내는 강 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즉 어려운 농촌 현실의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극복해내려는 농민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 단편 <삼각의 집>에서는 도회지 서민의 생활상에 현대의 삶에서 발견되는 부조리를 연결시 켰으며, 단편 <왕릉과 주둔군>에서는 외국군의 주둔과 타락한 윤리를 다루었다.

· 그외 작품, 단편 <흰 종이 수염>, 장편 <야호(夜壺)>, <산에 들에> 등

---  소설 <수난이대>

---  어휘 <농촌소설>

 

한무숙(韓戊淑, 1918-1993)

· 소설가. 서울생. 부산고녀(釜山高女) 졸

· 1940년~1944년까지 남편 직장을 따라 경기도 광주군 곤지암리에서 살면서 창작

· 1942년 <등불 드는 여인>이 [신세대]에, 43년 희곡 <마음>이, 48년 장편 <역사는 흐른다> 가 [국제신문]에 당선 등단

· 1957년 <감정이 있는 심연(深淵)>으로 자유 문학상 수상

· 한국여류문학인회장, 한국소설가협회장 역임

 한무숙문학관(서울 종로구 혜화여고 인근) : 평시에는 비공개, 사전 신청

---  < 박완서>

 

한수산(韓水山, 1946- )

·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4월의 꿈]

· 그 이후 [부초], [해빙기의 아침] 등을 발표하면서 짙은 감성과 화려한 문체로 70년대 독서계 주도

· 1981년 [중앙일보] 연재 장편 [욕망의 거리]의 몇몇 표현이 당시 권부(權府)의 비위를 거슬려 한씨는 시인 박정만씨 및 신문사 관계자들과 함께 기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불리는 그 한을 삭이지 못하고 88년 일본으로 떠났다.

· 1991년 현대문학상 수상 위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음

· 재일 동포의 삶 다룬 소설 준비

---  < 추천인 / 피추천인>

 

󰏐 관련기사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 없이는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작가는 궁극적으로 인간과 인간들이 꾸미는 사회를 따뜻한 애정으로 바라봄으로써, 동물과는 다른 인간성의 훈훈함을 전함으로써 밥 벌어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

 

한승원(韓勝源, 1940- )

· 전남 장흥 대덕 덕도라는 섬에서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남

· 6·25전쟁 시 일가족이 반동으로 낙인, 고초를 당함

· 1957년 장흥고등학교 졸업, 그후 3년간 고향에서 농사와 김 양식에 종사

· 1961년 서라벌예대 문창과 입학, 이문구, 조세희 등을 만나 교우

· 1966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가증스런 바다>로 입선, 장흥의 장동서국민학교로 강사 발령

· 1969년 광주 춘태여고로 교직을 옮김, 그후 동신중학교 근무

 

· 작품

- 단편 <미친 소리>, <거미와 시계와 교사들>, <소설가의 이빨>, <신화 Ⅰ>

- 중편 <신화 Ⅱ>, <지난 일들이야>, <상여소리>

- 장편 <그 바다 끓며 넘치며>(첫장편)

- 장편 `포구' 다시 발간(97. 12)

: 바다와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포구 사람들의 쓰라린 좌절과 극복을 빼어난 묘사로 형상화한 연작 3편으로 구성됐다. 84년 정음사에서 첫출판된 이래 세번째 개정판

---  < 서라벌예대와 중앙대 ‘문예창작과’ 출신 문인>, <이청준>(동향(同鄕)출신 작가)

 

󰏐 한승원 작품세계 ‘억압과 저항’

한승원의 소설들은 그의 고향 부근의 갯가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 대부분의 소설가는 자기의 주거 공간에서 자유스럽지 못하다. 예를 들면 서정인은 남도의 소도시에서, 천금성은 바다에서, 이문구는 충청도의 농촌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갯가에서 자유스럽지 못한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대부분의 소설가가 자기의 주거 공간에서 자유스럽지 못한 것은, 그곳이 그의 체험의 原공간이기 때문이다. 체험 자체가 곧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체험들을 꿰뚫는 어떤 성향은 원공간이 방사하는 색깔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독립적인 체험들이 원공간의 색깔에 의해 어떤 성향을 띠게 될 때, 조금 현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내면화되고 구조화될 때, 그것들은 소설 공간의 밑바닥을 이룬다. 그의 체험들은 원공간스러워지고, 원공간스러워진 체험들은 그의 소설 공간에서 그 작가 특유의 색채를 띠게 된다. 그는 그의 체험이 갯가스러워지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한다.

 

“갯바닥 사람들은 화가 끓으면,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물방울 날리는 물결같이 장쾌한 욕설을 퍼부은 다음에 할 말을 한다. 나는 그 갯가에서 나고 자란 탓으로, 바닷바람이 곰솔 숲을 흔들고, 높은 물결이 모래톱이나 바위 끝을 두드리며 아우성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들의 말법을 익혔다. 말은 곧 생각이요, 생각은 모든 짓거리의 근원이라면, 나는 갯바닥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산도 첩첩하고>에서 ‘작가의 말’

 

󰏐 관련기사

미아리 돌산에 있던 그 서라벌예대에는 당시 이나라에서 가장 호화로운 교수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서정주, 김동리, 안수길, 조연현, 박목월, 김구용 등의 선생님들. 그 때문인지 그 대학 강의실 안에는 허리 잘린 삼천리 절반의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문학청년들의 패기와 용기와 객기와 오기와 치기가 바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입학했을 때(1961) 이미 졸업한 3년 선배들 가운데는 문단에 등단하지 않은 사람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오히려 쉽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었다. (중략)

무엇이 그러한 과를 만들었을까. 사람사는 방법의 세계적인 변천 발전과 해방과 동족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전후의 각박하고 궁핍한 시대와 사회가 만들었을 터이다. 서라벌이 중앙대 예술대로 바뀌면서도 그 파도는 계속되었다. (한승원)

 

󰏐 신간 소개

󰊱 그의 주제 “진정한 인간”이고자 하는 몸부림

- 언제나 인간군상을 무대에 끌어올려 현기증 나는 이 시대와 이 땅에서 가장 진실되게 살아가는 휴머니티(humanity, 인간성)가 무엇인가?

- 생명력 있는 역사와 사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 장편소설 [흥부의 칼(상, 하)](고려원 간)

- 현대 놀부의 정체와 흥부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파헤침

- “오늘날의 놀부는 시장개방 압력을 자행하는 미국일 수도 있고 권력에 유착해 이권을 따먹는 특수집단, 농민의 몫까지 농산물 수입으로 이익을 가로채는 재벌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정체는 거의 노출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지요. 반면 흥부는 부동산 등으로 졸부가 된 오늘의 중산층을 지칭해 그린 것입니다.

이들 졸부들은 한때 못먹고 못살던 때의 가난을 복수하는 집단으로 흥청망청 마시고 놀고 또 배타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지요. 여기에 이 시대의 의적(義賊)을 통해 그들의 가면과 허위의식을 벗겨내고 있습니다.”

 

한용운(韓龍雲, 1879-1944, 卍海, 萬海, 아명 유천, 본명 정옥)

· 부친 한응준은 관아의 하급 임시 관리였으며, 집안은 몹시 가난했음

· 13세(1892)에 2년 연상의 중류 농가 출신 전정숙을 아내로 맞았으나 가정에 소홀

· 16세(1895)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함

· 이듬해 하산하여 더 큰 세상을 배우고자 시베리아행을 결심하지만 블라디보스톡에서 죽을 고 비를 간신히 넘기고 1897년에 귀향하지만 고향집은 완전히 폐가가 되어 있었고, 부모와 형은 을미사변 후 의병 거사에 연루되어 죽은 뒤였음

· 23세 재출가.

· 1904년 설악산 백담사로 입산, 법명 용운(龍雲), 법호 만해(卍海) 명칭을 받음

· 3.1운동때 33인 중. 감옥에서 쓴 <조선독립의 이유서>는 독립의 마땅함과 필연성을 논한 대 문장. 한때 침체한 불교를 비판 개혁하고자 ‘조선불교유신론’씀.

· 시집 [님의 침묵](1926) - 설악산 오세암에서 탈고

· 1991년 문화부 3월의 문화인물 선정

 

  유적지

1) 한용운 시비(설악산 오세암)

2) 시비(홍성읍내 남산공원) : ‘알 수 없어요’ 새김

3) 시비(홍성읍내에서 광천으로 3킬로미터) : 동상, ‘님의 침묵’ 새김

4) 시비(조계종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 교정)

5) 생가(충남 홍성 성곡리 492번지)

6) 심우장(尋牛莊)(서울 성북구) : 만년에 집 한 칸 없는 그를 위해 주위에서 언덕받이 땅을 마 련, 심우장을 지었다 함. 조선 총독부 건물과 마주하기 싫어 일부러 북향집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1944년 67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여생을 보냄

---  시 <님>, <찬송>,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당신을 보았습니다>, <이별은 미의 창조>, <오셔요>, <나룻배와 행인>, <복종>

---󰃫 < 괴짜 문인들> 등

 

▲ 두견새

 

두견새는 실컷 운다.

울다가 못다 울면

피를 흘녀 운다. //

 

리별한 한(恨)이냐 너이랴마는

울내야 울지도 못하는 나는

두견새 못된 한(恨)을 다시 엇지하리 //

 

야속한 두견새는

도러갈 곳도 업는 나를 보고도

불여귀 불여귀(不如歸) //

 

󰏐 “만해 문학작품 과대평가”

- 1970년대 불붙기 시작한 민족주체적 시각과 현실참여적 시각의 민족문학론이 대두하면서 만해를 당대 국내의 지적 풍토와는 무관하게 너무 우상화시켰다는 것(만해연구 300여편 대부분이 70년대 이후)

- 1910년대 국내 지성사를 떠받친 두 개의 제도적 기관은 ‘불교진흥회’와 ‘조선광문회’로 이 두 단체는 고유문화의 가치체계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사상을 식민지 현실의 응전 논리로 채택했다. 구한말이 배출한 지식인 집단인 이 두 단체가 행동하는 지성과 문학적 세계의 토양이 됐다고 주장

- 특히 1918년 만해와 함께 잡지 [유심(唯心)]을 창간한 양건식(1889-1944)이 만해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양건식은 1910년대 근대 지식인의 허위의식과 비참한 식민지 현실을 사실적으로 묫한 [슬픈 모순] 등의 소설, [홍루몽] 등의 중국문학을 현대적 구어체로 번역해 낸 중국문학가이며 소설가)

 

󰏐 [문화] 한용운 어록비 세운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 스님의 어록비가 천안 <독립기념관>에 세워졌다. 어록비 건립추진위원회(총재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는 최근 제작을 마친 만해의 어록비 제막식을 96년 9월8일 오전 11시 독립기념관에서 갖는다.

어록비는 높이 5m, 너비 3m 크기로, 기단은 화강암으로, 비신은 자연 오석으로 만들어졌다. 전면에는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로 시작되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가운데 일부를 새겼다. 이 글은 만해가 1919년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밝히기 위해 쓴 것으로 그의 투철한 독립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어록비 제작은 박주부씨가, 글씨는 신두영씨가, 서각은 이재영씨가 맡았다.

 

한하운(韓何雲, 1919-1975)

· 함경남도 함주생. 중국 북경대 졸

· 문둥병(癩病)으로 방황하며 비통과 저주, 울분을 시화함.

· 나병이 완치된 후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을 노래하기도 했음.

· 시집 : 첫시집 [한하운시초](1949), [보리피리](1955) 등

 

 유적지

1) 한하운시비(전남 고흥군 소록도(小鹿島) 중앙공원) : ‘보리피리’ 새긴 화강암 시비로서 누워 있다.

2) 묘(경기도 김포군 장릉유원지 옆 장릉묘원)

---  시 <파랑새>, <보리피리>, (인물)<괴짜 문인들>

 

한흑구(韓黑鷗, 1909-1979) : 수필가. 소설가.

· 1931년 [동광]에 단편 <황혼의 비가>로 등단

· 이후 수필에 전념

--- 󰃫 수필 <보리>

 

함형수(咸亨洙, 1916-1946)

· 함북 경성생. 시인,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중퇴.

· 서정주,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

· 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음> 당선

· 가난하여 노동자 숙박소를 전전, 만주제국의 소학교 훈도 시험에 합격, 부임했다가, 북한에서 해방 뒤 정신 이상으로 사망.

· 소년적인 애수가 담긴 시를 씀.

---  시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해금문인(解禁文人) : ---  < 월북문인>

 

허균(許筠, 선조2-광해군10, 1569-1618, 교산·蛟山)

· 본관 양천. 화담 서경덕의 고제(高弟) 허엽의 셋째 아들

· 선조 때 문과 급제(형조 판서, 의정부 참판)

· 그의 스승인 이달은 삼당시인 중 한 사람

· 허난설헌은 그의 누이.

· 허균은 자신의 사회 개혁 사상을 바탕으로, 서자 출신인 서양갑, 심우영 등과 실제로 역모(逆 謀-역적 모의)를 꾸민 적이 있음

· 광해군 때 처형당함

· 작품 : <홍길동전> - 부조리한 사회 구조 개혁

  유적지 - 문학비 :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소재

* 허엽의 시비, 허균과 허난설헌의 시비(강원도 교육연수원 입구), 허난설헌 생가 소재

---  소설 <홍길동전>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이름 초희, 호 난설헌)

· 조선조의 여류 시인. 자는 경번. 27세 요절

· 당대 유명한 시인 이달(李達)의 문학에 영향을 받은 바 큼

· 15세때 김성립과 결혼했으나 원만한 가정을 이루지 못함. 그래서 여성적 섬세한 감정으로 애정시를 많이 씀

· 시집 [난설헌집], 가사 <봉선화가>, <규원가>

 

허영자(許英子, 1938- )

· 경남 함양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 ‘청미회(靑眉會)’ 동인

· 부친(허임두, 휴천국민학교장), 어머니(정연엽) 사이의 장녀

· 1962년 [현대문학]에 <사모곡> 추천, 등단

· 여성적인 섬세함과 강령한 생명력이 결합된 시풍

· 현 성신여대 교수

· 제1시집 [가슴엔 듯 눈엔 듯], 제2시집 [친전(親展)], 제3시집 [어여뿜이여, 어찌 꽃뿐이랴], 제 4시집 [빈 들판을 걸어가면은]

---  시 <자수(刺繡)>, <흙>

 

󰏐 허영자론

 

❶ 의의 : 서정시의 한 정형 (서정적 상상력에 기반)

❷ 시사(詩史)

소월 ⇨ 영랑 ⇨ 미당 ⇨ 목월과 접맥

(특유한 지적 서정을 가지고 있음)

❸ 시론

① 김남조(金南祚) <어여쁨>론

· 허영자 제1시집 <가슴엔 듯 눈엔 듯>(1966)에서 스승인 김남조씨가 쓴 <첫 책을 내 는 제자인 英에게>라는 시론이 있음

② 김지향 <수줍은 내연성(內然性)의 에로스>

· 부끄러움 : 사랑의 진실을 찾는 진솔한 삶의 반영

③ 신동욱 <허영자론> [현대시학](현대시학사, 1980)

· 사랑에 가미된 부끄러움, 죄책감, 참회의 요소

⇨ 사랑에 진실함을 보이는 동시에 긍정적 생산적 모습

④ 정한모

· 한국 현대의 정도를 가고 있는 시인

⑤ 김현 <감상과 극기> [한국여류문학전집 6](신세계, 1977)

· 정신적 결여하는 한국시 혹은 여류시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초월

❹ 시의 정신 변모

① 제1기 : 주관성의 특징

· 자기의 시적 체험 비밀노래, 1, 2인칭 용어(서정적 목소리)

· 제1, 2시집이 해당함

② 제2기 : 시점의 이동

· ‘나.너’에서 ‘그, 어느, 누구’로 이동 (제3시집)

③ 제3기 : 개인사 ⇨ 역사적, 사회적 지평

· 자아는 외부의 자극을 수동적 기록자인 동시에 이것을 해석 조직 종합하는 능동적 관 여자

 

󰏐 허영자의 어여쁨에 대하여

그 글에도 어여쁨이 많지만은 보다 더 많이 그 사람 됨됨이에서 어여쁨을 보여줌이 내게 한 엄숙한 기쁨이오. 얼마 가르친 것도 없이 스승이란 이름만이 오히려 부끄러운 십년을 지내왔다.

 

󰏐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착하고 참되게 살려는 삶을 지향해 왔다. 그러나 살고 난 자리엔 항시 부끄러움만 비늘처럼 떨어져 내리곤 하였다. 나의 시는 아프고 쓰라진 그 부끄러움을 쓸어 모은 것이 아닌가고 스스로 자문(自問)한다.

 

헤르더(Herder, Johann Gottfried von, 1744-1803) ---  <언어관>

· 독일의 대사상가

· 언어관 : 인간의 언어는 <이성(理性)>에 의해 생겼고, 이성의 법칙에 그 뿌리가 있으며, <전 달과 교육>이 언어의 본질적 기능이라 봄

· 저서 [언어의 기원에 대하여]는 루소(Rousseau)의 비판을 포함한 것으로, 그 영향은 훔볼트 (W.Humboldt)를 거쳐 촘스키(N.chomsky)에 이어졌다.

󰏐 현대 언어관의 두(2) 기원

󰊱 데카르트 ⇨ 헤르·더(Herder) ⇨ 훔볼트(W.Humboldt)(W.Humboldt) ⇨ 사피어&워프, 바이 스게르버(Weisgerber, 1899~ ), 촘스키(N.Chomsky, 1928~ )

󰊲 다윈(C.Darwin) ⇨ 왓슨(Watson)의 행동주의 ⇨ 브룸필드(Bloomfield)의 기계적 구조주 의

* ‘다윈’ 언어관 : 인간의 말과 동물의 짖음은 정도의 차이 뿐이며, 그 학문은 자극(S)과 반응 (R)에 의한 객관적 측정에 근거하고 있다고 봄

 

현기영 : ---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 <창작과 비평>, <필화사건>

 

현길언(玄吉彦)

· 1980년 등단한 작가는 고향인 제주도의 역사와 삶을 다루면서, 이데올로기의 허황성을 드러 낸 중·단편 발표

· 1987년 6.10민주화 대행진과 6.29선언을 보면서, 더 이상 현실에 밀착하지 않고 소설의 미학 (美學)에 입각,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을 그리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민주화는 커녕 또다른 폭 력의 모습을 띠게 됐고, 그로하여금 다시 역사를 생각케 했다.

---  소설 <흔들리는 성>, <투명한 어둠>

 

󰏐 작가의 말

“역사의 현장을 다루면서도 인간, 세계의 본원적인 문제까지도 짚어야 되는데 작가에게 그런 여유를 주지 못하는 우리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사회를, 인생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각이야말로 작가의 힘이며 미학인데 그런 작가정신을 저버리고 현실로만 뛰쳐나가게 하는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끝날지 답답합니다.”

 

현진건(玄鎭健, 1900-1943, 빙허·憑虛)

· 경북 대구생(대구우체국장으로 아들로 출생)

· 일본 도쿄 독일어 전수 학원 졸업.

· 중국상해 호강대학에 다니다 귀국, 서울에 정착

· 업적

① 근대 문학 형성기의 선구자 역할

② 김동인과 함께 근대 단편 소설을 개척

③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 문학 개척

④ 소설 문학에서 기교의 가치를 보여준 대표 작가

 

󰏐 작품 연보

❶ 제 1기 : 체험소설(주로 1인칭)

· 1920년 <개벽(開闢)>에 단편 <희생화>발표 후 문단 등단

· 1921년 <빈처(貧妻)><술 권하는 사회> 등으로 문명

· 1922년 [백조(白潮)] 동인 <타락자(墮落者)><유린(蹂躪)> 등

· 1923년 <지새는 안개>

❷ 제 2기 : 전형적인 사실주의적 경향

· 1924년 <운수 좋은 날>,

· 1925년 <B사감과 러브레터>

· 1926년 <사립 정신 병원장>

· 1927년 <해 뜨는 지평선> 등 단편 발표,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적 단편문학 개척 선구 자적 업적

❸ 제 3기 : 그 이후 활동 미미

·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년간 복역,신문사(동아일보)를 물러남.

· 1939년 장편 <적도(赤道)>

· 1940년 <무영탑>

-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 양계를 하다가 실패, 불우한 만년(병사함)

---  소설 <고향>, <불>, <빈처>, <사립정신병원장>, <운수좋은 날>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담헌·湛軒)

· 북학파의 한 사람

· 36세에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따라가 3개월간 머물다가 돌아와 북학에 관심을 둠

· 유학보다는 국방, 경제 등에 관한 학문에 전념함

·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를 배움

- 청나라 문물을 접하고 우리 나라 최초로 지구의 자전설(自轉說)을 주장함

· 집권층의 노론(老論)에 속해 있었음

· 저서 : [담헌서], [담헌연기]

---  논설문 <여매헌서(與梅軒書)>(매헌에게 주는 글)

 홍랑(洪娘) : 조선 선조 때 기생, 생몰 연대 미상.

--- 이별가(시조)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손>

 

홍명희(洪命憙, 1888-1968, 벽초·碧初)

· 소설가. 언론인([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역임)

· 충북 괴산군 제월리 풍산 후문(後文)의 종손으로 출생

· 증조 홍효문(이조판서), 조부 홍승목(참판), 부친 홍범식(금산군수)

· 3·1운동을 괴산에서 주도, 옥고를 치름

· 취학전에 이미 한학을 수학할 정도로 총명했음

· 동경 유학 시 육당, 춘원과 더불어 삼재로 명성을 날림

· 일본을 떠나 중국 여러 곳을 유랑, 문일평, 신채호, 정인보, 안재홍과 교유

· 1928년 11월 28일부터 [조선일보]에 <임꺽정> 연재~1940년 폐간과 함께 중단

- [조광]지로 옮겨 연재하다 중단, 끝내 미완성으로 남김

  생가 표지석 :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소재

 

* 표지석 내용 ‘작가 홍명희의 고향’

이곳은 민족의 선각자로서 겨레의 수난기 연전(延專)교수와 시대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고 대하소설 林巨正을 쓴 벽초께서 태어나 자란 옛집이다.

---  소설 <임꺽정>

 

홍사용(洪思容, 1900-1947, 노작·露雀) ---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 시인, 경기도 수원 생(용인군 기흥면). 휘문고보 졸

· 10대 후반에 휘문고보 재학시 박종화, 정백 등과 문학적 교유

· 1921년 [백조] 동인에 참여, 감상적인 서정시 창작

· 신극단체인 ‘토월회’ 동인, 희곡 창작과 연출, 연기를 병행함

· 친일하지 않고 끝내 민족적 정신을 지킨 이로 유명하다.

· 작품 :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 20여편 자유시, 민요시

· 작품론 : 민요시론 <조선은 메나리 나라>

  유적지 - 문학비, 묘 : 경기도 화성군 통탄면

 

홍성원(洪盛原, 1937 - )

· 경남 합천생. 소설사. 고려대 영문과 중퇴

·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빙점지대> 당선

· 장편 <D데이의 병촌(兵村)>을 발표하면서 활동

· 작품 : 단편 <빗돌고개>, <종합병원>, 장편 ,남과 북> 등

· 제2회 반공문학상 대통령상 수상(1977)

· 장편 <마지막 우상>으로 제30회 현대문학상 수상(1985)

---  소설 <폭군(暴君)>

 

홍순학(1842-1892)

· 본관 남양. 조선 철종, 고종 때의 문신

· 16세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正言), 대사헌(大司憲), 대사간, 예조참의, 인천부사, 협판 교섭 통상사무 등 개화의 물결 속에서 여러 벼슬 역임

· 25세에 1866(고종3) 주청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연경)에 다녀온 뒤 근 4천 구에 달하는 <연행가>를 지음

---  기행가사 <연행가>

 

홍윤숙(1925- )

· 평북 정주생. 시인. 수필가

· 경향 : 사물이나 관념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고 애씀

· 시집 : [여사(麗史)](62), [풍차](64)

· 시 <오라, 이 강변으로> - 주제 : 분단극복, 통일염원

 

󰏐 제목 : [문학] 원로시인 홍윤숙씨 9번째 시집 펴내

원로시인 홍윤숙씨가 9번째 시집 [실낙원의 아침](열린)을 펴냈다. [십 자가]를 화두로 절대자 앞에서 유약한 인간존재의 모습을 드러낸 종교적 인 시편을 통해 죽음과 구원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당신을 몰랐던 날의 천둥벌거숭이/자유의 창공이 못내 그리워/잡힌 손 뿌리치고 달아나 보지만/ 모반은 번번이 누설되고/은밀한 포위망 더욱 좁 아지고/그때마다 한 자씩 커지는 당신의 키에/나는 속절없이 무릎 꿇는다 …]([누구이신가-십자가3]중). 절대자를 향한 갈망을 담은 시편들은 번번히 무너지고 꺾이지만 결코 멈출 수 없는 구도의 길을 암시하고 있다. 일상의 도처에서 무거운 짐에 눌려허덕이는 십자가의 고통을 응시하는 시인은 {[산다는 것=십자가]라는 등식이 언제부터인가 나의 감성을 동여매고 있다}고 밝혔다.

 

황금찬(黃錦燦, 1918- )

· 1948년 [새바람], [기독교 가정]에 시 발표

· 1952년 [문예]지에 박목월의 추천 받음

· 1956년 [현대문학]에 박두진이 <여운>추천

· 1965년 처녀시집 <현장>(48세작)

· 1980년대 가장 활발히 활동 (시집 9권, 산문집 7권)

 

󰏐 작품론

󰊱 시적 중심 정서 : 일상적 서정성, 인생에 대한 실존적 허무감

 

 박두진 시 추천 후의 소감 [현대문학] (56.4)

“황금찬씨는 평범한 주제요, 인생을 보는 눈도 일부러 기밀함을 꾀하지 않고 진솔한 것이 좋았습니다. 너무 타당하고 수월스런 당신의 서정이 시로써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당신의 진솔성과 그것을 휩싸주는 생에 대한 허무감 같은 것이었던가 합니다.”

 

󰊲 주제 및 창작 방법

* 시적 주제 : 고독, 허무, 인생, 영원, 실존

* 창작방법론 : 쉬운 시, 일상적인 시

󰊳 미학적 방법론 : 세계와 인간을 조망하는 미학적 낭만주의, 탈정치적 실존

* 창작 당시의 사회 역사적 배경이 거의 등장 않음

--- <이상(理想)>을 노래한 시 中 : 황금찬 시 <문>소개, <촛불>

 

황동규(黃東奎, 1937- )

󰊱 시적 변모 󰆲

 

제1시집 시선집

 

[어떤 개인날](1961) -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1988)

 

다양한 변모

▼ ▼

<엽서(葉書)> <사랑의 뿌리>

 

<어떤 개인 날>수록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꿈을 꾸듯 꿈을 꾸듯 눈이 내린다 󰠝 돌이 허리 굽혀 눈을 헤치고

바흐의 미뉴엩 󰠝 돌을 묻었다

얼굴 환한 이웃집 부인의 󰠝 물린 돌이 환히 웃는다

올겐을 치는 소리 󰠝 주저없이 바람이 멎고

(중략) 󰠝 가득찬 달이 뜨고 있다.

이윽고 눈을 맞는 얼굴을 쳐들 때 󰠝

오고픈 곳에 오게 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닐 건가

 

* 시적 변모 양상

1) <어~> : ‘아닐건가’ - 사랑이 예감(豫感) 정도였음

‘환한’ - 밝음, 빛의 모티프

2) <사랑~ > : ‘물었다, 웃었다.’ - 단정적 서술어

‘아니기’ - 명사형 (사랑의 확신)

 

󰊲 시적 변모 󰆳

초기시집 [어떤 개인 날] - [비가]

󰠝 · 구체적 현실로부터 유리, ‘낭만적 우울과 예감’의 󰠝 세계를 관념적으로 노래

 

[평균율(平均律)](1968년, 공동시집)

: 구체적 사물을 통한 선명한 윤곽의 말들

 

· 70년대 이후 : 비극적 세계관 탈피, 건강한 세계 노래

<나는 바퀴를 보면 ~ >, <풍장>(1984년 연작시 시작), <견딜 수 없이 ~ >,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 시의 구조 : 꿈과 현실 사이의 갈등 구조 (모순형용)

 

창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곳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시월(十月)>

 

* 욕망 : 불빛을 그리워 함 󰠜󰠜󰠜󰌊

현실 : 희미하게 멀어져 감 󰠜󰠜󰌐

 

▲ 모순형용

‘금빛 어둠’ <삐에타> 중 / ‘눈보라처럼 웃고 있었다’ <기도> 중

‘머리 위에 어둡게 해가 오르고’ <비가(悲歌)> 제 10가 중

‘꽃이 어둡게 피고’ <비가 제 12가> 중

‘어둠이 유난이 번쩍인다’ <신초사(新楚辭)> 중

 

󰏐 관련기사

편집위원들의 선정을 거쳐 좋은 시와 소설을 재수록하는 반 년간지 <오늘의 시>와 <오늘의 소설> 95년 하반기호가 현암사에서 나왔다. <오늘의 시>는 황동규 시인 특집을 마련했으며, <오늘의 소설>에는 고종석, 유시춘, 이윤기씨 등의 우수 소설이 실렸다.

 

󰏐 황동규 연작시 `풍장' 마감..전70편 14년 노작

- 9월초쯤 시집 펴내 ······ 브레젤 역으로 독일서도 발간해 -

 

[바람을 이불처럼 덥고/ 화장도 해탈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시인 황동규씨가 14년 동안 써온 연작시 [풍장]을 최근 완결했다. 지난 82년 [풍장 1]부터 시작했던 시인은 [현대문학] 7월호에 [풍장 70]을 발표, 그동안 문단에서 시인의 징표처럼 여겨졌던 연작시를 마감했다.

 

황씨는 9월초쯤 연작시들을 모아 시집 [풍장]을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내며, 이 시집은 독일인 실비아 브레젤씨의 번역으로 독일에서도 출간될 예정이다. 평론가 류종호씨의 표현에 따르면 [풍장] 연작시는 [죽음에 관한 명상이자 희롱이면서 죽음에 대한 길들이기]를 보여준다.

 

[네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라는 시행으로 시작된 [풍장] 연작시는 죽음을 다루되, 삶의 허무를 노래하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폴 발레리의 그 유명한 [해변의 묘지]의 마지막 시행처럼 [풍장] 연작시에는 죽음 이후의 삶을 깨우는 바람 소리가 가득하다. 삶과 죽음을 둘로 나누지 않는 선의 세계도 이 연작시에 스며들어있다.

 

‘내가 보기에 지금도 보길도 같은 데서 남아있다는 풍장은 일정기간 동안 시신을 초분에 안치한 뒤 나중에 땅에 묻음으로써 육신의 죽음 이후 또 하나의 단계를 만들어주는 것 같다’고 이 연작시의 모티브를 설명했다.

 

이 연작시를 쓰는 동안 시인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였던 문학평론가 김현, 변호사 황인철씨의 죽음을 겪었다. 그로 인해 [풍장] 연작시는 한때 죽음의 침묵에 기울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죽음과 삶의 황홀은 한 가지에 핀 꽃이다’면서 ‘죽지 않는 꽃은 가화인 것이다’고 담담하게 지적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집 [몰운대행], [미시령 큰바람] 등을 통해 전국 각지를 자동차로 떠돌면서 여행시편을 주로 내놓았던 틈틈이 시인은 그의 집과 서울대의 연구실에서 [풍장] 연작시를 길어올렸다. ‘초월은 결국 초월을 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14년이 걸렸다’면서 연작시 마감의 소감을 털어놓은 그는 ‘아무리 긴 여행이라도 언젠가는 끝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석영(黃晳暎, 1943- )

· 만주 신경생

· 경복고교 재학 중 <입석부근(立石附近)>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 수상

· 1970년 동국대학 철학과 졸업, 그해 [조선일보]에 단편 <탑(塔)> 당선

· 밑바닥에 전전하는 소외된 인물의 삶을 그린 작가로 유명함

· 작품 : <객지(客地)>, <한씨연대기(韓氏年代記)>, <돼지꿈>, <삼포(森浦)가는 길>(1973), < 어둠의 자식들>, <장길산> 등

· 1989년 방북하여 베를린 경유 체류, 1993년 귀국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

---  소설 <장길산>, <한씨연대기>

 

󰏐 시인 김지하씨, 옥중 황석영씨 만나 ······ 10년만의 대담

시인 김지하씨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공주교도소에 수감중인 소설가 황석영씨를 지난 18일 만났다. 박석무 민주당의원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특별면회를 통해 10년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1시간30분동안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었다. 지난 85년부터 시인 김씨는 해남에 칩거한 뒤 생명사상을 탐구하면서 시작과 저술에 몰두한 반면, 황씨는 민예총 창설과 방북으로 이어지는 창작 외적 활동을 펼치느라 두사람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노선차이]가 생겼다. 특히 김씨는 황씨의 방북을 [미치광이짓]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해왔지만, 최근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법무부에 제출한 황석영 석방탄원서에 서명하면서 94년 7년형을 선고받고 수감중인 작가에게 정부가 관용을 베풀기를 바라고 있다.

 

황씨의 근황에 대해 김씨는 “매일 두시간씩 운동장을 달린 탓인지 무척 건강해 보였고 큰 작품만 대여섯편 구상중이라 하더라”고 전했다. 한국문단에서 입심이 세기로 유명한 두 사람은 이날 [동북아시아]라는 화두를놓고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 대담했고, 동석했던 시인 이시영, 평론가 최원식씨는 말그대로 경청하기만 했다.

 

시인 김씨는 80년대말부터 후천개벽사상과 생명운동에 이어 세기말의 대전환을 맞아 동북아시아의 문화를 새로운 세계관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를 펴왔고, 이를 의식한 황씨는 “형이 동북아 타령하니까 나도 그런 것같고 요즘 우리의 전설과 민담에서 독특하게 등장하는 도깨비를 연구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에 김씨는 “원래 동북아의 원류는 유교가 괴력난신이라고 억압했던 도깨비와 같은 오랑캐문화와 풍류도”라면서 “도깨비를 통해 우리 동이족의 원류를 찾을 수있을 것이고, 북쪽이 아니라 남조선 중심으로 동북아를 생각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러자 황씨는 “내가 한마디 하면 형은 열 걸음 나간다”고 응수했다.

 

황씨는 “젊은 시절 소설 [객지]를 들고 창작과 비평사의 계단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오르던 신선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대빗자루 자국이 선명한 새벽길을 걷고 싶다”면서 “감옥이 세상의 끝인데, 2년반 있어보니 물살에 밀려온 욕망의 찌꺼기들이 보이는 느낌”이라고 털어놓았다.

 

현재 황씨는 구상중인 장편 소설들을 놓고 [오래된 정원], [봇물소리], [병사의 길] [지난 세월] 등의 제목도 붙여놓은 상태. 교도소에서 창작 활동이 허용되지 않고 있는 그는 “나가면 10년 동안 1년에 두편씩 발표하면서 작품을 쓰는 기계가 되겠다고 천지신명께 약속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황씨는 대하소설 [장길산]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교열하는 작업에 매달렸고, 내주쯤 창작과비평사에서 개정판 10권을 출간할 예정이다. 문단에서는 아직 황씨가 형기의 절반 이상을 채우지 않아 현행형법상 가석방되기는 어렵지만, 8․15때 감형이라도 받으면 올 연말쯤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내다보고 있다.

 

󰏐 [황석영 작품세계] 70년대 리얼리즘 선두

황석영씨의 [삼포가는 길]은 전국의 공사판을 찾아다니는 부랑노동자 정씨와 영달이 술집 작부 백화를 눈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하는이야기를그린 단편 소설이다.

 

황씨는 73년 이 작품을 발표, 그 전에 내놓은 [객지] [한씨 연대기]등에 이어 당대 리얼리즘 소설의 대표 주자로 자리를 굳혔다.

 

함박눈이 내리는 신작로, 시골집 굴뚝에서 매캐하게 타오르는 청솔연기 냄새,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으로 사라져가는 기차… 영상적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요소들이 많은 이 소설은 이만희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김홍종 PD에 의해 [TV 문학관]의 첫 작품으로 방영됐다.

 

젊은 작가 서해성씨는 {산업화 과정에서 고향을 떠나 유랑민 신세가 된 풀뿌리 인생들의 투박하면서 진솔한 대화가 일품}이라며 {그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너무나 선명해서 마치 우리들 옆에 있는 듯하다}고 독자로서의 감동을 털어놓았다.

주인공 백화가 산전수전 겪은 자신의 내력을 읊는 모습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으로 꼽힌다.

 

[나 백화는 이래봬두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구. 야야, 내 배 위로 남자들 사단병력이 지나갔어.].

 

황씨의 전부인으로 현재 소설가로 활동 중인 홍희담씨는 당시 기억을 더듬어 {작가가 60년대말 대학생 시절 전국을 무전여행하면서 소설 속의 그런 인생들을 만났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홍씨는 {이 소설은 리얼리즘의 개관적 서술이 아름답게 표현된 작품}이라며 {작가적 감수성과 사회의식이 행복하게 결합된 경우}라고 말했다.

 

[삼포가는 길]의 삼포는 지도 상에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지명이다. 황씨와 친분이 두터운 시인 이시영씨는 {해병대 출신인 작가가 동해안 부근의 감포를 떠올리면서 쓴 지명같다}고 설명했다. 황씨는 현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복역 중이다. 그는 여전히 신작을 구상중이며 90년대 작가들의 작품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 작가를 면회한 문인들에 따르면 그는 {젊은 작가들의 감각주의는산문의 힘이 빠져 있을 때 나온 현상이므로 얼마 안가 퇴조할 것}이라면서 일침을 가했다고 한다.

 

황석우 : ---  상징주의 한계, 항목 <김억>

· 시문학사상 초기 서구의 <상징주의> 수용에 힘씀

· 상징주의 평론인, <시화(詩話)>[매일신보](1919), <조선시단의 발족점과 자유시>([매일신 보](1917) 발표

· <일본시단의 2대 경향>[폐허](1920)에서 일부 상징파 시인 작품 번역

 

황순원(黃順元, 1915- )

· 소설가. 평남 대동군 생.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

· 1929년 평양 숭덕소학교 졸업 후 정주 오산중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중학에서 문학 수업

· 1931년 시 <나의 꿈>을 [동광]에 발표,

· 1934년 동경 와세다 대학 영문과 진학

· 이에 모더니즘 경향의 두 번 째 시집 [골동품] 발간

· 1935년 [삼사문학(三四文學)]의 동인으로 활동.

· 시집 : [방가(放歌)](1934), [골동품](36) 발간 후 소설로 전향

· 1940년 단편집 [늪]을 계기로 소설로 전향.

· 초기작품경향 : 41년 [인문평론]에 발표한 <별>, <그늘> 등에서 현실적 삶의 모습보다는 주 로 동화적인 낙원이나 유년기의 순진한 세계를 담은 환상적이고 심리적 경향의 단편을 발표

· 경희대 교수 재직하면서 <목넘이 마을의 개>, <독 짖는 늙은이>, <과부> 등 단편과, <인간 접목> 등 장편발표

· 후기작품경향 :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분열이 남긴 비극적 상황과 비인간화 경향을 폭로

· 1955년 <카인의 후예>로 자유문학상 수상.

· 1961년 전쟁에 나간 젊은이의 정신적 방황과 좌절을 묘사한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로 예술원상 수상.

 

· 주요 작품 연보

- <별>(1941), <기러기>, <황노인>(1942), <독짓는 늙은이>, <눈>(1944, 광복 후 발표)

- <목넘이 마을의 개>(1948, 단편집), <어둠 속에 찍힌 판화>(1951), <목숨>(1952)

- <소나기>(1953), <카인의 후예>(1954, 장편)

- <학>(1956, 단편집), <인간접목>(1957,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장편)

- <일월>(1964, 장편), [탈](1976, 단편집),

 

· 작품 경향 요약 : 아름다운 문체에서 빚어지는 아늑하고 서정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소 설을 쓰기 전 시집을 두 권(제1시집 [방가], 제2시집 [골동품])을 낼 정도로 시 문장에 능했던 황순원은 등장 인물의 행동 동기와 갈등,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섬 세하고 밀도 있는 그의 시적인 문장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설화와 어울어져서 토속적인 서 정미를 잘 보여 주고 있다.

 

---  소설 <별>, <학(鶴)>, <카인의 후예>, <이리도>, <나무들 비탈에 서다>

---  <황동규(黃東奎)>, <추천인/피추천인>, <조세희>

 

󰏐 황순원의 작품 세계 ‘한국적 인간상·고독의 문제’

 

황순원(黃順元)의 친지인 원응서(元應瑞)는 황순원의 인간을 말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마디로 황형의 성격은 자꾸만 위를 향해 올라가는 대나무와도 같다고 할까, 굽힐 줄 모르고 그냥 곧추 위로 올라가기만 하는 성격이랄까, 또 번거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랄까, 물론 때가 때인 만큼 모래터 시절은 여럿과 어울려 다니는 걸 즐기지 않았다기보다도 꺼려하는 편이었다. 워낙 직설적인 성미여서 눈에 거슬리는 일이 많아서인지 몰랐다. 나는 그의 직설적인 데가 좋았다. 그의 그것은 우격적인 직설이 아니라 사리에 합당한, 언제나 바른 말에 가까웠다. 싫은 것과 좋은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그의 작품에서 ‘불쾌’라는 어휘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한편, 그의 심중은 항상 인간의 정과 깊이를 찾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정과 사랑의 교차를 기원하고 있다. 이 기원은 …… (중략) …… 그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 우리는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 삼중당 [황순원 문학전집] Ⅲ에서

 

그 어려웠던 일제 말기의 고향에서의 일을 회상하면서 쓴 이 구절은 작가 황순원의 인간과 문학을 집약적으로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문학과 그 작자의 인간과는 일단 별개의 것임을 부인할 수 없고, 또 이런 점과 관련하여, ‘글은 곧 사람이다’ 하는 말이 이따금 시비거리의 제재로 되어온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 경구가 지닌 일면의 진실을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황순원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것을 느끼게 한다. 원응서가 증언한 바 황순원의 대나무같이 곧은 성품, 번거로움을 많이 타는 성품, 싫고 좋고가 분명한 성품, 그러면서도 심중에서는 항상 인간의 정과 깊이를 찾는 그의 성품은 이 작가의 문체, 등장인물들(특히 긍정적 인물들)의 생태,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문학적 주제(장편소설에 있어서의)를 통하여 일관성 있게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우선, 그의 문체부터가 번거로움을 많이 타는 문체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문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쇼트 센텐스이다. 가능한 한 군더더기를 제거해 버리려는 이 작가의 유다른 결벽증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이 작가의 고전적이라 할 만큼 엄격한 지적 절제에 의하여 그의 문장들이 통제를 받고 있는 탓이라 할 것이다.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에 있어서도 이런 점은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대상을 부각시킴에 있어서 그는 세부묘사 같은 것은 최소한의 필요 조건을 제외하고는 대담하게 생략해 버린다. 그에 있어서 흥미의 초점이 되는 것은 이런 개개의 형상들이 아니라, 그 대상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풍겨주는 전체적인 인상을 단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그는 화가로 비유하자면 사실파가 아니라 인상파이다.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이 작가의 유다른 결벽증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황지우(黃芝雨, 1952- )

· 전남 해남 생. 서울대 미학과 졸.

·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 [문학과 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 하여> 등으로 문단 데뷔

· 시집

- 제 1시집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제 2시집 : [겨울-나무에서 봄-나무로]

- 제 3시집 : [나는 너다]

⇨ 강렬한 파괴적 힘과 고통스러운 풍자

- 제 4시집 : [게눈 속의 연꽃]

· 현 한국예술 종합학교 연극원교수

 

󰏐 관련기사 1

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혀왔던 무서운 아이들이 최근 시적 변모를 뚜렷이 하고 있다.우상 파괴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그 시대를 새로운 ‘시의 시대’로 명명케 했던 이성복(李晟馥), 최승호의 관심이 최근 도(道)와 선(禪)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들과 어깨를 견주며 독특한 시게계를 구축해 온 황지우의 시들도 바깥으로 향한 열정을 안으로 옮김으로써 내적 변화를 드러내 시단의 초점이 되고 있다. 특히 [게눈 속의 연꽃]은 경(經)을 읽고 그 속에서 우주의 질서와 우리가 처한 사바(娑婆)세계의 혼돈을 잡아내는 혜안(慧眼)이 번득인다. 색깔로 하면 화려한 원색의 겹이었고, 모양으로는 형태 파괴의 혼란과 질서 재편을 내보였던 80년대의 그를 기억하는 독자들에게는 분명히 다른 시 세계로 접어들었다.

 

하늘과 땅을 용접(鎔接)하는 보라색 빛

하늘의 뿌리 잠시 보여준 뒤

환희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제석천(帝釋天)

저 멀리 구름장 밑으로

우뢰 소리 도라무깡처럼 우르르르르 굴러오네

이윽고 비가 빛이 되고

원(願)을 세우니 거짓말이나니

희망은 작용(作用)하는 거짓말이므로

--- <화엄광주(華嚴光州)> 중에서

 

 

󰏐 관련기사 2 [황지우의 작품세계] `일그러진 현실'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

시인 황지우씨(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교수)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83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왔다. 시인이 말하길 새들마저 뜨고 싶은 세상이란, [정의 사회 구현]의 구호 아래 숙정과 통폐합 바람이 부는 가운데 컬러 텔레비전에서 연일 [팔육 팔팔]을 떠들던 80년대초 [국운상승기]였다. 그런 이 땅을 떠나자는 이 불경스러운 시집은 80년대 시의 한 상징으로 남았고, 현재까지 발행 부수는 9만 6천부나 된다.

 

이 시집은 시적으로도 불순했다. 골목벽보, 시사만화, 속칭 [빨간책]의 한 대목, 상업광고 등 시인이 선진조국 서울의 일상 속을 어슬렁거리며 마주치는 [세상돌아가는 꼴]이 시에 원색적으로 삽입된다. 이를두고 당대 평론가들은 시의 형태파괴, 혹은 해체시의 전범이라고 칭송했다. 그런데 정작 시인은 그런 거창한 비평용어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이 일그러지면 시도 일그러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내 나름대로 의미 심장한 형식을 쓰려고 했다. 나는 시를 훼손한다는 비판을 두려워할 여유가 없었다. 그만큼 내가 전하려는 메세지가 급했다. 그게 남들 눈에는 형태파괴로 비쳤던 모양이다.}.

 

이 시집에는 스트레스 해소용의 풍자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학을전공한 시인의 회화적이면서 감각적 이미지들이 현실을 아파하는 시인의 처절한 심정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시들이 도처에 번득인다. 시인이먼 바다를 날아가는 철새떼의 자유와 쌍무지개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 그가 속한 80년대적 현실의 조건은 더욱 더 비극적 색깔을 분명히 한다.

삶이란 저 너머에 아름다움이 있기에 슬프고, 그처럼 슬픈 삶을 지고가는 인간의 초상은 아름답다는 것이 이 시집의 전언이다.

발행일 : 97년 11월 11일

 

 

황진이(黃眞伊)

· 16세기 후반 중종, 선조 때 개성의 명기. 본명은 진(眞),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 아름다운 용모와 재능으로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림.

· 한시 4수와 시조 6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함

· 시비 : 통일로 임진각(1982년 국어국문학 시가비 건립 동호회 건립)

  15세 때 그녀를 짝사랑하다 죽자 기생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송순, 서경덕 등 많은 문인들이 그녀의 시작 솜씨에 감탄, 교유했다 한다. 또한 전라 나주 출신인 임제가 황 해도 어느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던 차에 그녀의 무덤에 찾아 곡을 했다가 중도 파면했다는 일 화도 있다.

---  시조 <冬至(동지)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어져 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던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산은 녯 산이로되 물은 녯 물이 아니로다>

 

황현(黃玹, 1855-1910, 매천(梅泉)

· 전남 광양 생. 대한제국 시기의 대문장가·시인

· 어릴 때부터 한시 창작에 재능이 뛰어남

‘안성초락유인석(雁聲初落遊人席)’

날아가는 기러기가 우짖는 소리는

어디든 다같이 퍼질지라도

일에 열중하는 이들은 듣기 어려우니

한가하게 노는 이들은 그 소리를 먼저 들을 수 있느니.

· 32세 때 구려군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

· 개화기에 구례 지방 곳곳에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씀

· 우국 애족의 정신으로 일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9월 10일 자살함

· 김택영은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매천의 시 8천여 수 중에서 839수를 뽑아 [매천집]을 간행 함

· 저서 : [매천야록]

 용호정(전남 구례 용두리) : 매천의 문하생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

 

황희(黃喜, 1363-1452, 방촌·尨村)

· 본관은 장수, 개성 가조리 생.

· 조선 초 정치가. 여말에 급제(1383)하여 성균관록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 동에 은거, 동료의 추천으로 세상에 나와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는 영의정이 됨

· 시조 3수와 저서 [방촌집]이 전함

  반구정(伴鷗亭)(임진각에서 문산 방면 2km, 사목리 소재) : 만년에 그가 갈매기와 벗하며 유유자적하던 곳

---  시조 <대쵸 볼 불근 골에 밤은 어이 드르며>, <강호에 봄이 드니 이 몸이 일이 많다.>

 

효녀 지은 : ---  <효녀 지은 설화>

 

후직(后稷)

· 중국 순임금 때 농사일을 관장하던 관직의 이름

· 혹은 주(周)나라의 선조. 이름은 기. 농사일을 잘 다스린다는 소문을 듣고 순임금이 후직의 벼슬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무왕(武王)은 그의 16대 손자라 한다.

---  가전 <국순전(麴醇傳)>

 

훔볼트(W. Humboldt, 1767-1835)

· 독일의 정치가, 언어학자, 철학자.

· 나폴레옹 전쟁으로 황폐해진 프로이센의 재건을 위해 활약했으나 1819년 정부의 반동적 정 책에 반대하고 공직 생활을 청산하고 문학과 언어의 연구에 몰두함

· 그는 “언어의 발생은 인간의 내적 요구이며 자연적으로 갖추어진 능력의 발현이다. 인간의 실제 회화의 산물인 언어는 정신과 자연의 영원한 매개자(媒介者)로서 특정한 국민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발현(發顯)된 것, 즉 세계관(世界觀)을 나타내는 내면 형식을 외부적으로 표현한 것 이다. 따라서 언어는 개인에 대해서 하나의 도구(道具)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 (에네르게이아, energeia)이며, 그것은 사고를 분절(分節)된 음으로써 표현하는 바 영원히 반복 되는 정신 활동이다. 인간의 본성에는 언어를 창조하는 힘과, 언어 형식이 있으며, 세계의 언어 가 다양한 것은 이 내부 형식을 외적 형식으로 나타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고 했다.

· 그의 학설은 언어의 분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도이치 학파 언어관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1) 에르곤(ergon) : 의사 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 즉 언어 활동의 결과

(2) 에네르게이아(energeia) : 사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계속 반복되는 정신의 활동

---  < 헤르더(Herder)>

 

히틀러(Adolf Hitler, 1889. 4. 2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브라우나우암인 ~ 1945. 4. 30. 독일 베를린)

· 나치(Nazi)독일의 정치가.

· 히틀러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레알슐레(실업계 중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성적이 불량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1906년 16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동안 린츠에서 방황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그의 어머니도 이에 찬성했다.

· 1920(또는 1921)년부터 독일국가사회주의당인 나치당의 당수를 지냄

·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리

· 1934년 8월 2일에는 총통겸 총리로 취임하여 정권을 독점

·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에서 음독자살했다.(권총자살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최근의 소련 자 료에 의해 음독자살로 판명되었음). 그의 시체는 소련군에게 발견되었으나 독일측에 반환되지 않았다.

 

󰏐 [인물]

히틀러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채식주의자였으며 개인생활은 검소했다.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았지만 남성으로서는 정상적인 체질의 소유자였다. 조카인 겔리가 자살한 후에는 에바 브라운을 사랑하여 그녀를 개인비서로 채용했다. 스포츠와 유행과 가정밖에는 관심이 없는 평범한 부인이었던 그녀는 히틀러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백과사전을 찾아보기도 했으니 이러한 노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1945년 4월 29일 히틀러는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다음날 이들 부부는 함께 자살했다.

 

히틀러의 일상생활은 어딘가 색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매일 한낮이 될 때까지 침대에 누운 채 조간신문을 훑어본 후 직무를 시작했으며, 이튿날 동틀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 예술에 애착을 느낀 그는 특히 제3제국의 기념비로 남을 만한 공공건축물의 건립을 소원했다. 사치나 여성편력 또는 미식가로서의 기질은 전혀 없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부근에 있던 산장에 가서 자신의 사진사․의사․운전수․비서에 둘러싸여 마음 편히 담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이 때의 화제는 대개 개 사육법, 최신유행, 예술계의 이야기, 개인생활의 사소한 사건 등 다양했는데, 오페라의 노래를 듣고 여가수의 이름을 알아맞추기 게임을 즐겨 했다. 이 산장에서 각종 정치적 구상을 다듬는 경우도 있었다. 히틀러는 기억력과 직관력이 뛰어났고, 사람 보는 눈에 있어서 우수한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여 능력을 발휘시킬 줄 알았다. 그러나 특정 인물의 지나친 권력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2명 이상의 인물에게 같은 일을 배당하여 충성경쟁을 유발시켰다. 그의 생동은 기본적으로 독일제국주의의 극단적인 반영이었고, 그 자신은 세간의 평처럼 미친 사람도 성격 이상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동방대제국의 건설, 게르만족의 동방에로의 대규모 진출, 열등한 민족의 절멸(絶滅) 및 추방 등 시류에 역행하는 세계관을 고집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마침내 자신도 파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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