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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습사전 / 문인( ㅇ~ )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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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 : 고대 그리이스 철학자.

 

· 부친은 마케도니아 왕의 시의(侍醫)였고, 어머니 역시 의사 집안 출신

·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냄

· 청년기에 스승 플라톤의 철학 학원인 ‘아카데미아(Academea)’에서 수학, 기원전 367년에 플 라톤의 제자가 됨(그 후 20년간 아카데미아에서 머물렀다.)

·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 ‘현실주의적 이론’ 체계화.

· 후에 알렉산더 대왕의 국사(國師)

 

논리학 : 3단논법

윤리학 : 중용(中庸)의 미덕.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幸福)

정치학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시학(詩學) : (1) 창작의 본질은 ‘모방(模倣)”이다. (2) 감정의 정화(淨化, 카타르시스)

 

󰏐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믿기 쉬운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쾌락(快樂), 명예(名譽), 덕(德), 재산(財産)이 그것인데 이것들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생활태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를테면 관능적 욕망을 추구하는 속된 대중은 쾌락을 행복으로 여기며, 귀족 계급은 며예를 행복이라고 여긴다. 또 식견 있는 사람은 덕을 행복이라 여기며, 실업가는 재산을 행복과 동등하게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네 가지가 결코 행복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쾌락이란 노예나 짐승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쾌락을 제외한 명예, 덕, 재산은 행복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행복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조건일 뿐이다.

 

그는 행복이란 모든 생물이 자기의 타고난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는 데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즉 식물은 영양섭취와 번식 기능을 함으로써, 동물은 이 기능에 덧붙여 감각과 운동 능력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써 행복이 이루어지며 인간은 이 기능에 덧붙여 이성(理性)이라는 기능을 발휘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즉 인간의 본질적 기능은 바로 이성이므로 이성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해야만 진정한 인간의 행복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안국선(安國善, 1854-1928, 천강)

· 본명 ‘필선’, 1907년에 ‘연설법방’, ‘정치원론’ 등을 저술

· 1908년 우화소설 ‘금수회의록’과 근대적 단편집 [공진회(共進會)] 발표

· [공진회]에 발표된 작품들은 대개 친일적, 사회순응적이어서 <금수회의록>과 대조를 이룸

---  신소설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인력거꾼>

 

 

안수길(安壽吉, 1911-1977, 남석)

 

· 소설가, 함흥생

· 1935년 [조선문단]에 단편 <적십자 병원장>, 콩트 <붉은 목도리>가 동시에 당선, 등단

· 그후 [만선일보]를 주요 무대로 문단 활동을 함

· 초기에는 만주의 한국인 농민을 주로 다루는 <농민소설>을 주로 썼으나, 후기에는 도시 서 민 생활을 다룬 작품을 발표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고뇌와 용기, 그들의 의식 세계를 사실적으 로 그려 나가는 경향을 보임

· 대표작

- 단편 : 적십자 병원장, 제삼인간형, 여수, 밀회, 풍속 등

- 장편 : 북간도, 성천강, 제2의 청춘

 

󰏐 구세대 작가들의 역량

 

60년대 와서 대가급 작가들이 엄연히 버티고 서서 장편에서 그들의 역량을 드러내었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북원(北原)>의 작가 안수길의 <북간도> 5부작은 1959년에서 비롯 1967년에야 완성된 장편으로서, 북간도에 이민간 이한복 일가의 4대에 걸치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한민족의 생존 방식에 대한 서사시적 공간을 확득한 작품으로서 민족문학의 가장 확실한 거점으로 평가될 수가 있다. 이어서 그는 <성천강(城川江)>(1973) 등의 역작을 발표하여 정통적 리얼리즘의 길을 열어 놓았다.

 

양사언(楊士彦, 1517-1584, 봉래·蓬萊)

 

· 조선 중기 서예가. 30세때 문과급제

· 조선 전기 4대 서예가(안평대군, 김구, 한호) 중 1인. 삼대명필에도 속함.

· 회양 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들어가 만폭동에 ‘봉래 풍악 원화 동천(蓬萊楓嶽元 化洞天)’이 란 글씨를 썼다 함

  관련유적지 : 금수정(金水亭, 경기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소재)

· 이 마을은 안동 김씨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양사언은 안동 김씨의 외손이라는 연고가 있다. 양사언의 편액이 걸려 있던 본래의 금수정은 6·25때 멸실되었는데 1989년 고증을 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함. 암벽에 새겨진 ‘금수정’이란 양사언의 글씨를 탑본하여 현재 액으 로 걸어 놓았다.

---  시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양주동(梁柱東, 1903-1977, 무애·无涯)

 

· 황해도 장연 생. 와세다 대학 영문과졸.

· [금성]동인으로 1922년 문단 등단, 염상섭과 함께 [문예공론(文藝公論)]을 발간.

· 초기에는 민족주의 경향의 시를 많이 발표. 1928-29년에는 민족주의 문학과 사회주의 문학 의 절충을 꾀해 ‘절충파’(혹, 중간파)로 불리기도 했음.

· 광복 후 학계에서 후진을 양성.

· 시집 : [조선의 맥박] , 기타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1942)

---  <면학의 서>

 

양홍(梁鴻) : 한 나라 사람. --- 󰃫 고사성어 <거안제미(擧案齊眉)>

 

엘리엇(Eliot, Thomas Stearns, 1888~1965)

 

· 미국 출생의 영국 시인, 비평가

· 1913년 이해 영국에 거주, 귀화함

· 하바드 대 철학과 졸업

· 1920년 자신이 편집하고 창간한 평론지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다 1차 대전 후의 지성의 혼란을 노래한 장시 <황무지(荒蕪地)>를 내어 큰 반향을 부름

· 만년에 문명의 비평으로 옮아 투철한 이성으로 카돌리시즘에 의한 질서의 회복을 주장하는 수다한 평론을 씀

· 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

 

󰏐 황무지」의 T.S 엘리엇…「몰개성의 시학」

 

미국 미네소타대는 지난 56년 4월30일 한 시인의 강연회를 위해 대학 전용 축구장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이날 모인 청중은 1만5천여명에 달했다. 강연회의 주인공은 4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시인 T.S 엘리엇(1888~1965). 그는 이날을회상하며 “거대한 투우장으로 들어가는 투우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강연모습은 서구문학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문인들에게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한 사람만을 고르라면 바로 엘리엇이 선택될가능성이 가장 높다. 금세기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그의 시 「황무지」 때문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워왔다······.

 

5부 4백33행으로 이뤄진 「황무지」는 딱 떨어지게 해석되는 시가 아니다. 1차대전 후의 <시대적 환멸과 허무사상>을 노래한 시라고 하는가 하면 <현대문명의 불모성>을 노래한 시라고 보기도 한다. 심지어는 불교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엘리엇 자신은 이같은 해석을 모두 거부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쓴 시>에 불과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같은 다면성을 갖춘 「황무지」는 20세기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지난 22년 출판된 후 새로운 시의 대명사로 통해왔다. 다양한 인용과 다채로운어법등을 통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혁신적인 기법의 시세계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대학 창립자이자 목사였으며 엘리엇은 엄격한 가풍 속에 방종과 쾌락을 멀리하고 수줍음을 잘 타는 아이로 자라났다. 하버드대에 입학한 그는 철학에 빠져들어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된다. 그는 1908년부터 런던에서 머물렀는데 미모의 무용수 비비언 헤이우드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녀의 정신질환으로 결혼생활은 불행하기만 했다. 그는 1917년부터 9년간 로이드 은행 행원으로 일하면서 격무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큰 비약을 했다. 1920년 최초의 비평선집 「신성한 숲」을 펴내 비평가로서 위치를 확립했다. 여기서 그는 시란 시인의 개성을 떠난 독자적인 생명체라는 「개성 배제의 시론」과 시인의 감성은 객관적 이미지로 표현돼야 한다는 「객관적 상관물」이론을 펼쳤는데 이는 이후 구미비평계를 휩쓴 「신비평」의 기초가 됐다.

 

엘리엇은 출판편집인으로서도 큰 활약을 했다. 그는 문예지 「크라이테리언」의 편집책임자로서 로렌스, 조이스, 헉슬리 등의 글을 실었으며 대형출판사 「페이버」사의 편집이사로서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했다. 한편 그는 극작가로도 활약해 「성당의 살인」 「가족의 재회」 등의 시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엇 문학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였다. 그는 8년간의 작업 끝에 지난 43년 장시 「네 사중주」를 출간했다. 영문학계에서는 엘리엇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것은 「황무지」이지만 그를 대표하는 걸작은 「네 사중주」로 보고 있다. 초기 시의 난해성을 극복하고 통일된 구조와 안정된 세계관을 보여주는 원숙한 작품이라는 것. 엘리엇에게 노벨문학상수상을 안겨준것도「네사중주」였다. 노벨상 수상 이후 그는 잇따르는 상훈(賞勳)속에 비서였던 39세 연하의 발레리 플레처와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열자(列子)

· 중국 전국 시대 초기의 철인. 이름은 어구. 노나라 사람.

· 일설에는 정(鄭)나라 사람이라고도 하며, 진의 무공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라고도 함

· 사상적으로는 ‘도가(道家)’에 속함

 

염상섭(廉想涉, 1897-1963, 횡보·橫步, 본명 상섭(尙燮))

 

· 보성중학, 일본 경응대 문과 수학

· 1920년 [폐허] 동인으로 문단활동 시작 --- 󰃫 <폐허> 중 ‘☞’ ‘리얼리즘’

· 이듬해 식민지 지식인의 정신적 고뇌를 그린 <표본실의 청개구리> 발표.

· [동아일보] 기자, 조선일보 학예부장 등 언론계에 있으면서 명필을 얻음.

· 특히 <삼대>(1931, 조선일보 연재)는 당시 사회현실의 문제와 지적 분위기를 정면으로 묘사 한 대표작.

· 경향 : 서울 중류층, 지식인, 예술가 등의 생활에서 소설적 제재를 많이 취함. 초기에는 주로 단편을, 30년대 이후에는 장편을 씀.

· 40년간 장편 28편, 단편 150편, 평론 101편, 수필 30편 발표

· 1963년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타계

 작가 횡보 염상섭지묘·묘비(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 내)

--- 소설<두 파산(破産)>, <만세 전(萬歲 前)>, <삼대(三代)>, <괴짜 문인들>

 

󰏐 [횡보문학 100주년] 한국 근대소설의 아버지

 

소설의 발생이 근대 국가의 태동과 보조를 나란히 하였음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처럼 소설은 문맹 상태를 지양하고 문명 세계를 확보해 나간다. 소설은 정의, 평등, 인권 등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정신활동이다.

 

문학적 성취라는 측면에서 볼 때 횡보의 소설만큼 근대문학의 내실을 수미일관하게 자각, 장악해간 실례는 달리 찾기 어렵다. 횡보는 초기작에서부터 [개인]의 사회성을 고통스럽게 부각함으로써 그의 방대한 작품량과 묵직한 주제의식의 단서를 유감없이 토로했다. 그의 독보성은 바로 이 [근대성]을 누구보다 철두철미하게 자각한 현실파지력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횡보의 그런 [근대성] 확보는 그의 작품세계를 다채롭게 열어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내연하고 있는 한국 현실의 온갖 다급한 화두들이 그의 소설에서 이미 다루어졌다. 식민지 주민의 고뇌와 뒤틀린 시각, 사회주의자들의 한계 많은 암약과 보수주의자들의 끈질긴 내것 챙기기 근성, [너만 죽어라]식의 동족상잔의 참담한 아귀다툼 등을 횡보는 남보다 먼저 제기함으로써 [야만세계]의 극복을 우울하게 천착한 것이다. 요컨대 횡보는 우리 현실의 [야만성]을 미주알 고주알 캐어묻는 작업에 혼신의 정력을 다바친 불세출의 작가였다. 횡보의 소설에 드리운 이런 대의를 간과해 버리면 지리멸렬하고 시끌벅적한 시장바닥 같은 [현실]만 오롯이 떠오른다. 일반 독자들이 횡보의 작품과멀어진 것도 실은 이런 비합리의 수렁이 짓누르는 무게 때문임은 자명하다.

 

횡보 소설의 미덕은 워낙 많지만 크게 두 가지로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1) 늑장 좋은 횡보문체의 확립과 (2) 여성 화자의 자기 정체성 과시가 그것이다.

 

거의 수집가적 집념으로 우리말을 한껏 끌어 모으고 그것들을 풍요롭게 구사한 횡보의 만연체 스타일의 문체가 산문의 바람직한 질량을 툭박지게 부풀려 놓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학사적인 맥락에서 정산하며 읽을 때 횡보 문체의 이런 성과는 작지 않고 그 영향이 지금도 한국 소설 일반에 합류하고 있음을 손쉽게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이다.

 

흔히 통속 취향이라고 무시하거나 오독하고 있는 대목이 횡보 소설에서의 여성 화자이다. 횡보소설들을 동시대의 다른 작가 작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 소설들과 비교해보아도 그의 여성 화자들은 단연 개성적이고 그 능동적 역할이 압도적으로 군림한다. 여성을 사물시할 때여성은 설 자리를 잃고 권선징악형의 대중소설만 맹위를 떨치게 된다. 여성의 지위는 [근대성]의 한 바로미터이다. 횡보소설에는 성녀도 어머니도 아닌 인간으로서의 여성성이 힘차게 그 소임을 떠맡고 있다.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우리의 근대소설을 개척하고, 적어도 그 지향점을 어느 정도까지는 완성시킨 작가가 횡보이다. 따라서 횡보가 종횡무진으로 휘두른 현실비판적 시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가 고군분투한 [주체적 개인]의 형상화는 [근대성]의 실물찾기 바로 그것이었다. <김원우․소설가>

발행일 : 97년 08월 06일

 

 

󰏐 제목 : [염상섭동상] 김영중 조각--임현기 글…30일 제막

 

가을 벤치에 앉아 작품을 구상하는 소설가 염상섭.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소설로 꼽히는 [표본실의 청개구리] 의 작가인 횡보 염상섭의 동상이 작가의 출생지 근처인 서울 종묘공원에 들어선다. 입상이나 흉상, 또는 문학비 형태로 세워지는 기존의 동상과는 달 리 공원벤치에 앉은 작가의 모습을 담아 서울의 새 명소로 떠오르고 있 다. 전신 조각상이 앉아있는 벤치에는 빈 공간을 두어 작가와 함께 사진도 찍을 수 있고, 시간의 간격을 뛰어 넘어 그와 함께 [무언의 문학토 론]을 벌일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동상은 원로조각가 김영중씨가 제작했고 작가의 작품세계를 담 은 글은 서예가 임현기씨가 썼다. 30일 오후 3시에 열리는 개막식에는 김영수 문체부장관과 서기원 문학의해 조직위원장 등 문단인사들이 참가, 작가를 기린다.

[조선일보] 96년 10월 26일

 

 

󰏐 [염상섭 일화] 동네 문패 살피며 등장인물 구상

 

횡보 염상섭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생을 마친 작가였다. 그는 서울 중산층의 풍속과 의식, 토박이 서울말씨를 창작의 텃밭으로 삼았다. 그는 문학으로 일가를 이루었지만 정작 자기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했다. 대신 외상 술집을 확보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이사를 자주 했는데 집을 옮긴 2~3일 후에는 으레 외상 선술집을 마련해 내셨다. 돈과는 거리가 멀어도 점잖은 용모가 주효했나 보다. 새벽녘에는 혼자 선술집에서 해장하시기가 적적하다고 파출소의 숙직 경관들을 불러들이곤 하셨다.].

93년 타계한 장남 재용씨가 생전에 부친을 회상하면서 쓴 글의 한 대목이다. 횡보라는 호는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비뚤고 바르지 않아 친구들이 붙여 준 것.

 

[한 번은 만취가 되어 파고다 공원에서 쓰러져 코를 고는데 누가옷을 벗겨가 추워 오그리다 못해 정신이 번쩍 나서 일어나 보니 내의뿐이라 화가 나서 뛴 것이 마포강]이라고 횡보 자신이 털어놓은 적도 있다.

 

지난 63년 3월14일 직장암으로 별세하기 직전에도 부인 김영옥(87)씨가 정종을 숟가락에 떠서 입안에 넣어 주었다. 당대의 [문호이자 주호]였던 그는 술내를 풍기며 숨을 거두었다.

 

횡보는 그 주량 못지 않게 집필량도 엄청났다. 장편만 무려 28편이었고, 단편 1백50편, 평론 1백1편, 수필 30편 등을 남겼으나, 장편소설[삼대]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았다.

 

횡보는 연재가 끝난 뒤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선뜻 출판하려고 나서지 않았다. 그의 가난은 바로 그처럼 꼿꼿한 성품이 자초한 것이었다. 그는 [밥을 굶어도 평생에 남에게 머리를 굽혀 가며 구직 운동이라곤 하여 본 일이 없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횡보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고르기 위해 동네 문패를 하나씩 살피면서 그 이름의 항렬도 따져 볼 정도로 꼼꼼하게 작업했다. 우리말에 대한 애착과 함께 그는 소설 공간의 현실성 확보를 지향했다.

 

그는 문학 지망생들을 향한 산문에서 [첫째, 말과 글을 배울 것이요, 둘째, 소설을 지향하거든 사실주의를 탐구하고 여기에 철저하라]고권유했다.

 

서라벌예대의 학장 시절에는 강의 한 달 만에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강의를 그만둔 그였다.

 

올해가 횡보 탄생 1백주년이라고 하지만 한국 문단은 아직도 제대로 된 [염상섭 문학전집]을 갖고 있지 않다. 수많은 문학상이 존재하지만 여태껏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 80년대 말 민음사에서 전 13권 분량의 전집을 기획, 일부를 의욕적으로 출간했다가 일반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 중도 하차했다. 문단에선 창작과 비평사에서 문고본으로 내놓은 [삼대]와 [만세전](정해렴 교열)을 정본으로 인정한다.

현재 횡보의 유족으로는 부인, 차남과 2녀가 있고, 부인은 맏며느리 김귀순씨와 함께 서울 구파발 기자촌에 살고 있다.<박해현기자>

발행일 : 97년 07월 09일

 

오규원

 

· 68년 [현대문학] 통해 등단

· 시집

①[분명한 사건], ②[순례], ③[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④[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⑤[가끔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⑥[사랑의 감옥] (문학과 지성사 간, 1991)

· 시적 경향 : 산업사회의 물신화(物神化)되고 제도화된 대상과 관념의 틀을 부수고 자유로운 정신의 장 개척

 

󰏐 작가의 말

“우리는 지금 꽃이나 시내나 초가집과 함께 살기보다는 아파트, 버스 정류장, 분식집, 광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산업화된 도시의 삶을 지탱하는 도구화된 언어, 수단화된 언어들 속에서 말입니다. 역설, 반어나 우화적 접근 등 모든 시적 방법을 동원, 그 타락한 언어들을 뚫고 대상과 삶의 본질을 향한 것이 내 시입니다.”

 

▲ 목단(牧丹) / 오규원

 

습관이란 무섭다 북경의 한 반점(飯店)에

짐을 풀자마자 텔레비젼을 켜고 채널을

돌려본다. 놀라워라 채널 4에서

목단(牧丹)이란 화장품을 선전하고 있다.

천안문(天安門)에는 진눈깨비가 치고

TV속 중국의 한곳에는 목단이 피고 있다! (하략)

 

* 천안문에는 눈보라 같이 민주화를 외치며 진눈깨비처럼 스러지고 있는데 실내의 시청자들은 TV속에서 화창한 봄날을 보고 있는 것을 꼬집고 있다. 즉 본질과 동떨어진 채 사람들은 편안 한 습관 속으로 기어들게 하는 언어를 부수고 사물의 본질, 가두어지지 않은 생생한 삶으로 나 가고자 노래

 

오그덴(C.K. Ogden) & 리차즈(I.A. Richards)의 언어 기능

 

󰊱 지시적 기능 : 지시하거나 지칭하는 것으로 순수하게 지적인 것, 과학 서적에 사용된 언어 기능이 이를 대표.

󰊲 정서적 기능 : 감정이나 태도를 표현하고 자극하기 위한 것. 시에 사용된 언어 기능이 이를 대표

 

① 청자에 대한 화자의 표현

· 화자와 청자 사이의 친하고 멂, 나이가 많고 적음, 좋아하고 싫어함 등의 여러 관계에 서 생겨나는 화자의 태도

· 직접 표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간접적 표현 : 어휘 항목의 선택, 어미 변화 등 ( 안녕하십니까? )

② 지시 대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 표현

· 현실 세계의 사물에 대한 여러 관심과 감정 ( 이 꽃은 참 아름답다. )

③ 지향된 효과의 촉진(증진)

· 다른 사람을 감화(感化)시켜 자기가 의도한 대로 반응하도록 함 ( 명령문, 청유문, 의 문문, 감탄문, 평서문으로 표현 가능 )

④ 지시의 지지(支持)

· 동일한 사물이라도 그에 대한 인식의 곤란도는 다를 수 있는데, 이를 언어적으로 표현 한 것 ( “바로 저 집이야.”와 “바로 저 집인 것 같아.”는 지지도가 다른데 전자가지지 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

 

󰏐 의미 삼각형도

사상(思想, thought)

내용(內容, reference)

상징(象徵, symbol) 대상사물(referent)

⇨ 상징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 단계로서 사상, 내용, 의미인 <심리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오류선생(五柳先生)

· ‘도연명’을 가리킴

· 집 주위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놓고 지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함

---  <도연명(陶淵明)>, <귀거래사(歸去來辭)>

 

오상순(吳相淳, 1894-1963, 공초·空超, 탄운·彈雲)

 

· 서울 생. 일본 도지샤(同志社) 대학 종교철학과 졸

· 중앙학교, 불교학원, 보성고보 교사 역임.

· 1920년 [폐허]동인으로 등단.

·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방랑을 거듭하고, 한때는 참선에 몰두하기도 하는 등 특이한 생애 를 삶

· 퇴폐적인 풍조 속에서 애서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이려고 함

· 1955년 예술원상 수상

· <시대고와 희생> [폐허] 창간호에서

- 시대고는 당시 지식 청년의 가장 신성하고 가치있는 일이며,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 이라는 폐허 옹호론을 폄. 또한 폐허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허무나 폐허를 극복하여 낙원을 찾는 긍정적 의미가 있다고 함

· <방랑의 마음>에서는 현실을 딛고 또다른 이상향에 대한 갈구를 보임.

· 작고한 뒤 [공초 오상순 시집](1963)󰡕

 오상순시비·묘(도봉구 수유동 빨래골) : 시비에 ‘흐름위에 / 보금자리 친 / 오-흐름 위에 / 보금자리 친 / 나의 혼’ 새김

---  시 <방랑의 마음>

---  < 괴짜 문인들>

 

오상원(吳尙源, 1930-1985)

 

· 1950년대 대표적 소설가. 평북 선천 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 장막극 <녹쓰는 파편>, 단편 <유예(猶豫)>로 등단

· 6·25 전후세태의 사회적, 도덕덕 문제를 통해 전후 세대의 정신적 좌절을 행동주의적 안목으 로 주제화함

· 작품 : <유예>, <모반(謀反)>, <황선지대> 등

· 문학비, 묘지 : 경기 안산시에서 시흥으로 가는 외곽에 자리잡은 수암동 옛날 향교터에 위치 (문학비는 ‘작가언론인오상원추모비’라고 되어 있으며, 작가의 부모, 형제 묘비는 모두 세례명 으로 되어 있음)

---  소설 <유예(猶豫)>

---  < 선우 휘> ‘행동주의적 휴머니즘’

 

오영수(吳永壽, 1911-1979, 월주·月洲)

 

· 소설가. 경남 언양 생.

· 풍류를 즐기는 몰락한 유가(儒家) 집안에서 자랐기에 17살이 되어서야 보통학교를 다닐 수 있었으며, 보통학교 졸업 후 면사무소 서기로 집안을 도왔다.

· 1935년 일본대학에 입학했으나 각기병에 걸려 잠시 귀국했으나 다시 일본으로 건 너가 국민 예술원을 졸업

· 부친의 부탁으로 귀국한 그는 고향에 청년회관을 열어 역사, 한글, 연극을 가르침

·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청년회관을 문닫게 되자 43년까지 북만주를 방랑함

· 광복 후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 생활.

· 1948년 38세의 나이에 늦은 나이로 등단.

· 1949년에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남이와 엿장수>를 [신천지]에 발표

· 1950년 [서울신문]에 신춘문예 <머루>로 당선, 데뷔.

· 단편집 [갯마을](1956), [머루](1954), [명암](1958)

· 1955년 문예지 [현대문학]지 창간에 참여, 편집을 맡아보기도 함

· 평생을 장인 정신으로 토속적이고 서정성 짙은 단편을 남김

· 주로 서민의 삶을 애잔하고 온화하게 그림(100편 단편 발표)

- 인간 순수의 본원성(순수성)을 추구, 반문명의 정신

 

· 작품 연보

- 동시 <산골아가>(1948, [백민]에 발표)

- 단편 <화산댁이>(1952, [문예])

- 단편 <갯마을>(1953, [문예])

-- 󰃫 소설 <갯마을>, <후조(候鳥)>

 

오영진(吳泳鎭, 1916-1974, 우천·又川)

 

· 희곡, 시나리오 작가, 연출가, 정치가. 평남 평양생

· 평양고보,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졸

· 1937년 <영화예술론>을 [조선일보] 투고, 평론가로 등단

· 1942년 <배뱅이굿>을 발표, 문단 데뷔

· 1949년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를 발표

· 1954년 [문학예술]을 창간 경영함

· 각종 영화상 수상

· 국제대 교수

· <해녀 뭍에 오르다>, <맹진사댁 경사> 등 다수

---  희곡 <맹진사댁 경사>,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오장환(吳章煥, 1918- ?)

 

· 충북 보은 생. 휘문 고보 중퇴. 경기 안성으로 이사. 동경 지산중학교 전입, 수료

· 1933년(16세)에 [조선문학] 11월호 산문시 <목욕간>을 발표

·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 발표 후 시작 활동

· 1936년 김달진, 서정주 등 [시인부락], 1937년 이육사, 김광균 등과 [자오선] 동인

· 다채로운 시적 편력을 통해 여러 시세계를 다룸

- 전통의 거부, 나그네 의식, 허무주의 등

· 광복 직후에는 현실문제에 관한 시를 썼고, 조선 문학가 동맹에서 활동하다 월북

· 첫시집 [성벽](1937), [헌사](1939), [병든 서울](1946) 등

· 1948년 이태준, 임화 등과 함께 월북

---  시 <고향 앞에서>,

---  <이용악>, <월북문인들>

 

󰏐 제목 : [다시읽는 한국시] The Last Train…오장환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냇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흐터져잇고 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여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즉도 누귈 기둘러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맛나면 목노하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름 펼처잇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오장환이라는 시인도, 그리고 그가 쓴 [The Last Train](더 라스트 트레인)이라는 시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오랫동안 금제의 월북문인 목록에 올라있었던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대 이상의 문학애호가들이라면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비애야!]라는 그 시구를 한번쯤 속으로 외쳐보지 않았던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날이 저문다던가, 역두라던가, 그리고 너라고 의인화해서 부른 비애라던가, 누가 읽어도 어두운 종말의식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비애야] 라는 짧은 한마디 말이 시행 전체를 한숨처럼 메우고 있는 운율감도 처절 하다. 실상 이 시에는 [비애]란 말을 비롯하여 [청춘] [추억] [슬픔] [목 놓아 울리라]와 같이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낱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인생을 역이나 기차에, 그것도 막차에 비기는 우유는 아무리 호의적으로 평한다 해도 참신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이 시가 주는 독창성, 그리고 그 매력은 그러한 감상의 흐름을갑자기 절단하고 돌연한 이미지로 전환하는 그 의외성에 있다. [조선일보] 96년 10월 28일

 

요절문인(夭折文人) - 50세이전

 

나도향, 김소월, 김영랑, 김유정, 박인환, 심훈, 윤곤강, 이상, 이육사, 최학송, 신동엽, 현진건, 허난설헌(27세), 홍사용, 고정희, 김민부, 고월 이장희(29세), 임제(조선 선조, 37세) 이외다수

---  <죽음>(작고 문인 6명)

 

와룡선생(臥龍先生, 자 공명·孔明)

 

· 일명, 복룡(伏龍). 촉(蜀)의 승상. 군사령관(軍師). 제갈 양(諸葛 亮),

· 와룡강에 은거해 있을 때, 유비 현덕의 삼고초려의 예에 감복하여 천하삼분의 계략을 세움. · 천문, 지리에 정통하고, 지략과 꾀는 초인적임.

· 현덕이 제위(帝位)에 오르자 재상이 됨.

· 현덕이 죽은 후, 다음 임금 유선을 섬겨 남만을 평정한 후 북으로 쳐 올라가 ‘위(魏)’와 싸움.

· 오장원의 진중에서 죽음.

---  <삼고초려(三顧草廬)>

 

완적(阮籍)

· 위(魏)나라 때의 사상가. 죽림칠현의 1인

· 위선과 권모술수에 휩쓸린 정계에 실망,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뜻을 두지 않고 술과 청담(淸 談)으로 세월을 보낸 인물

---  < 유령(유영)>, <국순전>

 

왕건(王建, 877-943)

·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 밑에서 왕건은 아버지와 함께 20년을 넘게 지내다가 어느 날 동지들 과 함께 뜻을 모아 고려를 건국했다. --- 󰃫 < 태조>

 

󰏐 왕건의 등장

 

호경(虎景)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스스로 칭하여 성골장군이라 하며 부소산(송악산) 골짜기에 들어가 살았다. 그의 아들 강충은 풍수장이의 말에 따라 소나무를 온 산에 두루 심고 그 땅의 이름을 송악군이라 고쳤다. 강충의 아들은 보육이었는데 보육의 작은 딸 진의는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의 숙종과 하룻밤을 지내고 작제건(作帝建)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작제건은 활을 잘 쏘았다. 그는 열여섯 살 때 중국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던 도중에 갑자기 배가 멈추어 서 버렸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뱃사람들이 점을 쳐 보니 “고려 사람을 배에서 떼어 버려라.”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를 본 작제건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때 서해 용왕이 늙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작제건을 구해 주고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그것은 부처로 변신해 자신을 괴롭히는 여우를 물리쳐 달라는 것이었다. 작제건은 다음날 부처로 변신한 여우를 활로 쏘아 잡아 주었다. 용왕은 고마움의 표시로 자기의 딸을 작제건에게 주었다. 용왕의 딸을 아내로 얻은 작제건은 육지로 올라와 살림을 차렸는데 용왕의 딸은 우물을 파고 용으로 변해 몰래 용궁을 왕래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모습을 작제건이 엿보자 그녀는 영영 떠나 버렸다.

 

작제건과 용녀(龍女) 사이에서 난 아들 중 맏아인 용건은 나중에 이름을 왕융이라고 고쳤다. 그는 꿈에서 본 미인과 비슷한 여인을 길에서 만나 아내로 삼았다. 부인의 성씨를 몰라 꿈에서 만난 부인이란 뜻으로 몽부인이라 불렀으나, 나중에 삼한(三韓)의 어머니가 되어 성을 한씨라 했다.

 

하루는 왕융이 자신이 살던 송악의 옛집 대신에 남쪽에 새로 집을 지으려 했다. 그 때 당(唐)에서 풍수지리를 배워 온 승려 도선이 지나다가 새로 집을 지으려는 왕융을 보고 말했다. “기장을 심을 땅에 어째서 삼(蔘)을 심었는가?” 이어 도선은 주변 땅의 지맥을 살피더니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지맥이 북방의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온 명당이니 내 말대로 이 터에 집을 지으면 내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게 될 것이오.” 왕융이 그의 말을 좇아 집을 지으니 과연 그 다음해에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이 바로 [왕건]이었다. [고려사] 첫머리 요약

 

왕방연(조선초 ?-?)

 

· 조선 초 관원.

· 세조 3년(1457) 폐위된 단종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될 때 의금부도사로 호송했으며, 한양으로 다시 돌아갈 그 때의 심정을 읊은 시조가 1수 전한다.

  유적지-왕방연시조비 :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 선착장에서 제천 쪽 500미터 지점

---  시조 <천만리(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희고>

 

왕상(王詳) : --- 󰃫 고사성어 <왕상지효(王詳之孝)>

 

왕연(王延) : --- 󰃫 고사성어 <왕연지효(王延之孝)>

 

왕유(679-762) : 당 시인. 한시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 󰃫 정지상 시 <송인(送人)>

 

요(堯)

· 중국 태고의 성군(聖君)

· 이상적 성덕을 가진 군주로 되어 있으나 가상, 전설적 인물

· 기원전 2367년 경에 산서성 평양에 도읍, 재위 50년

· 정치를 잘했는가 알아보기 위해 미복차림으로 큰 거리에 나갔다가 요임금의 선정을 칭송하는 아이들의 노래를 들었다 함

 

立我烝民(입아증민) : 우리 뭇 백성을 세움이

莫匪爾極(막비이극) : 임금의 지극한 덕 아님이 없도다.

不識不知(불식부지) : 알지 못하는 사이에

順帝之則(순제지칙) : 임금의 본을 받아 따르네.

 

· 아들 단주(丹朱)가 어리석으므로 순(舜)에게 양위함.

---  <요순시절>, <격양가>

 

󰏐 [사기] 일절

“그의 어짊은 하늘과 같았고 그의 지혜는 신과 같았다. 백성들은 그를 해처럼 따랐고 구름처럼 바라보았다. 부귀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사람을 깔보지 않았다.”

* 요임금은 당시 허유라는 사람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천하를 넘겨주려 하였으나 이 소문을 들은 허유는 거절하고 영수 가의 기산으로 가서 숨었다.

 

우공(愚公) : --- 󰃫 고사성어 <우공이산(愚公移山)>

 

우탁(禹倬, 1263-1343, 역동)

· 단양 생. 고려 충선왕 때 학자 송나라 정주학에 관한 서적이 들어왔을 때 한 달 동안 두문불 출, 연구하여 해득해 후학들을 가르쳤다 함

---  시조(탄로가) < 손에 막 ~ >, <춘산에 눈 녹인 람 ~>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

 

·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호반(湖畔)시인’

· 19세기 영국 낭만주의의 개척자

· 영국 북부 캠벌랜드 호소 지방 생.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

· 프랑스 혁명에 동조하여 지롱드당에서 활동했으나, 공포(恐怖)정치의 출현으로 정 치에 환멸 을 느껴 귀국함.

· 주로 영국 남부의 농촌에 살면서 시작(詩作)에 힘써 <자연의 목사(牧師)>라고 부르기도 함.

· 그의 [서정 민요집(Lyrical Ballads)](1798)은 영국 낭만주의의 물결을 일으킴

· 1797년 S.T 코울리지와 친교를 맺고 교유(交遊)함.

· [서정민요집]의 서문(낭만주의 부활의 한 시기 결정)

“시골 가난한 사람들의 감정의 발로만이 진실된 것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로써 시를 써야 한다.” ( 18세기 전반의 기교적인 수법의 시어를 그는 배척했다.)

· 작품 <서정민요집>, <루시의 노래>, <틴터언수도원>, <서곡(序曲)>, <영혼불멸>

---  시 <뻐꾸기에 부쳐>

 

원천석(元天錫, ? - ? , 운곡·耘谷)

· 본관 원주. 고려 수절신

· 고려말 세상의 어지러움을 보고 사적을 기록한 야사 6권을 저술, 가묘에 몰래 안치해 두었으 나 그 증손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소각하고 지금은 다만 시집 2권만이 전함

  묘 : 원주시 행구동 산37 소재 (묘비명 ‘高麗國子進士元天錫之墓’)

--- 󰃫 시조 <회고가 (3)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ㅣ로다>

--- 󰃫 시조 <눈 마자 휘어진 대를 뉘라셔 굽다턴고>

--- 󰃫 (인물) <고려수절신>

 

원호 : 생몰 연대 미상

--- 󰃫 절의가(시조) <간밤에 우던 여흘 슬피 우니 우러 지내여다.>

 

원효(元曉, 617-686, 姓은 설(薛))

· 신라 시대 승려.

· 황룡사에서 중이 되어 불경을 두루 섭렵, 수도에 정진

·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가다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一切唯心 造)을 깨닫고 돌아와 불교 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하는 등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교리를 몸소 실천함(당시 유행하던 당나라 유학(西學)을 하지 않음)

· ‘해동종’ 창시자, 민중불교 실천

· 저서 [화엄경소] : [화엄경탐현기](화엄종 제3조 ‘현수’가 지음)의 본보기가 됨

 

월명사(月明師)

· 신라 경덕왕 때 명승

· [삼국유사] 권5 감통 ‘월명사 도솔가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경덕왕 19년(760) 4월 2일 해 가 둘이 나타나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자, 왕명을 받들어 <도솔가>(4구체 향가)를 지었음.

--- 󰃫 향가 <도솔가(兜率歌)>

 

월북문인들 : 1988년 7.19 해금조치( 월북문인 120여명 )

 

· 광복 후 40여년간 근대사 연구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남북 분단으로 인 해 월북(혹은 납북) 문인들에 대한 논의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1988년 7월 월북문인에 대한 대대적 해금 조치로 인해 문학사의 복원이 가능해졌다.

 

(1) 시기 : ‘조선문학가동맹’(‘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 ‘조선문학건설본부’) ~ 6.25 전쟁

(2) 1차 월북자 : 이기영, 한설야, 한효, 이동규, 윤기정, 박세영, 안함광, 송영, 안막

- 이유 :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연결하면서 주도권 상실

(3) 2차 월북자 : 임화, 김남천, 이원조, 오장환, 이태준, 임학수, 박팔양, 김오성, 윤세중, 안희남

- 미군정이 공산당을 불법단체로 인정, 탄압한(47년) 이후부터 정부 수립 직전

(4) 3차 월북자 :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설정식, 이용악, 송완순, 홍효민, 김용호, 이광수, 김동 환, 박영희, 김진섭, 김억 (납북자도 끼어 있음)

- 다음에 대표적 시인을 몇 사람 들었다.

 

김기림 모더니즘계 기상도, 바다와 나비, 새 노래 등

정지용 [시문학] 동인 [정지용 시집], [백록담]

임화 카프 서기장, 47년 월북 [조선신문학사], 현해탄

이용악 6·25 월북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

백석 1935년 등단 사슴, 산중음

오장환 [시인부락], [자오선]동인 성벽, 헌사, 병든 서울, 나사는 곳

박세영 [염군], [별나라] 동인 산제비

권환 카프 회원 자화상, 윤리

 

 

유령(劉伶, 유영)

· 중국 진(晉)나라 때 사람

· 술을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던 선비. 죽림칠현의 1인

· 대표작으로 <주덕송(酒德頌)>이 전한다.

---  < 완적>, <국순전(麴醇傳)>

 

유몽인(柳夢寅, 호 어우당, 1559-1623)

· 조선 시대 문인. 설화 문학의 대가. 흥양 사람

· 벼슬은 이조 참판에 오름

· 북인(北人)으로 이이첨과 교유했으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인조 반정 때는 화를 면하였음

· 그 후 기자헌 등이 이괄과 동조할 우려가 있다하여 체포되어 그가 지은 <孀婦詩(상부시)>로 화를 면하려 했으나 결국 사형됨

· 문집 : <어우야담(於于野談)>

 

유윤겸(柳允謙, 1420-?)

· 조선 초기의 문신. 충남 서산 생

· 일찍 두보의 시를 배워 세종의 부름으로 두시 찬주(撰註)에 백의(白衣)로 참여

· 성종 12년 조위와 함께 초간본<두시언해>25권을 강희안의 필체(을해자)로 간행

· 성종의 명으로 서거정 등과 함께 <연주시격>, <황산곡시집> 등을 한글로 번역

 

유응부(兪應孚, ? -1456, 벽량·碧梁)

· 사육신의 한 사람. 사육신 중 단 한 사람의 무인(武人)임

---  시조 <간밤의 부던 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유진오(兪鎭午, 1906-1987, 현민)

· 서울 생. 소설가. 법학자(경성제대 법학과 졸)

· 28년 [조선지광]에 단편 <스리>, <복수> 등 발표, 문단 등단

· <빌딩과 여명(黎明)>, <여직공>, <5월의 구직자> 등 발표

· 경향

- 초기에는 경향적 문학(이효석, 채만식 등과 ‘동반자 작가’)을 함

- 후기에는 복고풍의 이야기를 작품화 함.

· 작품 : 단편 <김강사와 T교수>

--- 소설 <김강사(講師)와 T교수>

---  <필화문인>

 

󰏐 <我等必す勝つ(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 항목색인 : 친일문학

 

대동아전은 이미 최후에 돌입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이 이미 3년, 지나사변(支那事變) 이래 자에 7년, 아니 米·英이 동아의 침략을 시작하여, 이미 수세기에 걸친 장구한 전쟁의 최후의 막이 이제 바야흐로 닫쳐지려고 하는, 실로 역사적인 숨막히는 순간입니다.

 

그리하여 전쟁의 귀추(歸趨)는 이미 명백한 것입니다. 침략자와 자기 방어자의, 不正者와 正義者의, 세계 제패의 야망을 붙들린 자와 인류 상애(相愛)의 이상에 불타는 자의, 일언이폐지 하면 악마와 신의 싸움인 것입니다. 정의는 太陽과 같고, 사악은 黑雲과 같아서 구름은 마침내 태양의 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의이며 정의자 일어설 때 그 승리는 명백한 것입니다.

 

유치진(柳致眞, 1905-1974, 동랑·東郞)

· 경남 충무생. 극작가,

· 1931년 이헌구, 이하윤과 함께 극예술연구회창립, 현대극의 수립에 공이 큼

·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당대의 현실상을 그린 <토막>(32), <소>, <자매> 등의 희곡을 씀

· 그외 작품 : <원술랑>, <소>, <자매> 등

--- 󰃫 <극예술연구회>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청마·靑馬)

·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 경남 통영(충무) 생. 동래고보 수학. 연희전문 중퇴.

·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靜寂)>을 발표 등단.

· 1936년 [조선문단]에 <깃발>발표.

·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 이른바 생명파의 한 사람으로 동인지 [생리]를 간행

- 그러나, [시인부락] 동인으로는 활동 않음

· 경향 : 허무를 극복하려는 남성적, 의지적인 시.

- 사람의 삶 어디에나 있는 뉘우침, 외로움, 두려움, 번민 등의 일체로부터 벗어난 어떤 절 대적인 경지를 갈구했으며, 그 해결의 길은 일체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자각에 서 찾았다.

- 곧, 강렬한 허무적 의지는 그 밑바닥에 생명의 뜨거운 꿈틀거림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간 직한 것 때문임

· 1960년대에 부산에 정착, 부산고, 경남여고 등지에서 교사, 교장으로 근무

· 시집 : [청마시집](1940), [울릉도](1948), [보병과 더불어](1951) 등

 

- 유적지

1) 유치환시비

- 바위시비(부산진역앞 수정가로 공원, 영도남여자상업고등학교)

- 깃발시비(에덴공원)

- 그리움시비(용두산 공원 ‘시의 거리’)

---  시 <깃발>, <저녁놀>, <봄소식>, <일월(日月)>, <바위>, <울릉도>, <해바라기의 비명(碑銘)>(함형수 시)

 

󰏐 [문학] 청마 유치환의 초기시 27편 발굴

 

한국현대시의 거목인 청마 유치환의 초기시 27편이 발굴됐다. 시인 박 철석씨(전동아대교수)가 계간 [문학예술]에 처음공개한 초기시들은 여성 적인 섬세한 감각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시단에 남성적인기상과 의지, 생 명력을 불어넣은 청마 시세계의 단초를 잘 보여준다.

 

청마가 젊은시절 정열을 쏟았던 시동인지 [소제부 제1시집]과 [생리] 에 수록된 이들 시편은 생동감 넘치는 서정시와 관념세계를 담은 명상시 계열로 크게 구분된다.

 

[봄비츨 모조리 빨어마시며/도다오르는 새파란 새닙들을/동산에 노힌 염소 갓치/ 나는 모조리 뜨더목고 십습니다/그것이 이 풀의게 주는/ 나의 가쟝 큰 축복입니다]

 

서정시 [5월의 마음]에 나오는 구절 [젊은 오월의 하 늘]은 초기 대표작 [깃발]에 나오는 [저 푸른 해원]의 시초로 해석된다. 자연을 시의 단골제재로 삼은 청마는 이번 초기시에서도 바다와 산을 각 각 남성적인 정열과 굳건한 의지를 관념적으로 대변하는 상징물로 이용하고 있다.

 

[람벽의 바다는 그의 바닥에/죽음의 처참이 잇고/광란의 정염이 잇고/ 고독의 자존이 잇고/심사의 과단이 잇고/한업시 맑은 그의 예지의 깁히는/ 저 수평선 넘에서 굴려오는/풍운을 감득한다](바다)청마는 또한 [저녁 풍 경]등 일제하의 가난했던 뒷골목의 풍경을 서정적인시선으로 담은 풍물시 를 통해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 [다시보는 풍수] 예술적 풍토 두루 갖춘 `문인의 고장'

 

전에는 충무시라 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주변 군과 통합하여 통영시로 불리는 곳, 남해의 상징적 중심성을 띤 고장이 통영이다. 그 곳 말로는 ‘토영’ 또는 ‘퇴영’이라 발음되지만 평양을 피양이라 발음하는 것처럼 현지에서는 그말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들린다.

 

통영은 삼도 수군 통제영을 줄인 말이다. 본래 조선 수군 편제에 없던 것을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잇단 승첩으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이 제도는 고종 33년(1896) 마지막 통제사 홍남주가 병사함으로써 역시 자연스레 303년간의 역사를 마감했다.

 

지금 통영을 대외적으로 드러내주는 상징성을 지닌 것은 민속공예와 문인, 예술가 등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중 민속공예는 나전칠기로 대표되는 바, 충무공이 임진왜란 당시 통제부 산하에 12공방(동고도까지합치면 13공방)을 설치하여 군사물자를 제작케 한 것이 시발점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 고장의 풍토와 맞물려 그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있으니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의 기라성 같은 인물의 배출이다. 그를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남망산공원을 올라야 한다. 여러 번 와 본 곳인데도 타관 나그네인지라 길을 몰라 헤매고 다니자니 이 곳의 특이한 교통현상이 마음을 복잡케 한다. 너무 혼잡한데다가 통영 시민께서는 듣기 거북하겠지만 무질서하기까지 하다. 두가지 쯤 이유가 생각되는데 우선 민망한 얘기부터 하자면, 이 곳이 조국 근대화의 변방지대이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제 말하려는 주제이기도 한데, 통영의 예술가적 기질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측면이다. 예술가적 자유혼의 발로가 남이 보기에 무질서로 비쳤다면 그렇게 바라본 나의 예술에 대한 무지의소치이므로 사과하고 물러날 수 밖에는 없을 터이다. 이유가 어느 쪽에 있든 통영에서 운전하기는 꽤나 피곤한 일이다.

 

남망산공원은 통영의 가시적 문화 공간이다. 거기에 문화관이 있고 통영 오광대, 남해안 별신굿, 승전무 협회와 전수관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에서 통영 전체를 조망할 수 있기에 그렇게 본 것이다.

 

전체에 대한 조망은 문화의 기본이다. 부드럽지만 복잡할 정도로 다양한 해안선, 명미한 기후와 밝고 소박한 풍토, 농촌과 어촌의 근대적 항구 도시를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는 남망산이야말로 문화를 말하기가장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춘 곳이다.

 

그 곳에서는 먼저 청마 유치환 시인을 만날 수 있다. 1974년 건립된 그의 시비에는 이미 교과서에 실려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의 시 [깃발] 전문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그의 시가 표상하고 있는 깃발에서가 아니라 이제 우리는 이 시 자체를 읽는 것만으로도 학창 시절의노스탈쟈를 느낀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이 앞에 설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아, 벌써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되었구나, 그 간 난 뭘하며 살아왔나, 하는 따위의 감상 말이다.

 

그러나 시비의 뒷면은 값 싼 감상을 계속 허용하지 않는다.

{내 눈을 뽑아 북악의 산성에 높이 걸어 행패하는 망국의 이리들과 불의의끝장을 보리라}같은 대목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민족 시인이란 호칭을 들었던 것이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의 서정에 마음이 더 끌린다.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같은 시들. 그 동생에 그 형이라 유치환의 형 유치진은 극작가이자 연극인으로 탁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시조 시인, 그 자신은 시조를 3행시라 주장했지만, 김상옥이 이곳 출신이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의 시인 김춘수도 이 곳 태생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에 이르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기 위한 사전까지 발간되었으니 더 덧붙일 말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작가들의 배출을 나는 상당 부분 그 풍토에 기인하는것으로 이해한다.

청마 시비에서 더 오르면 프랑스 조각가 장 피에르 레이노의 분재조각이 나온다. 자연 상태의 커다란 소나무에 화분 모양을 두른 작품이다. 그 작품 설명에 이르기를 {예술가의 꿈이란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 하였던데 그 점 풍수학인의 바람도 다를 바 없다. 조금 표현을 바꾸자면 {풍수의 꿈은 자연과 합일되는 것}정도가 될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정상에 서 있는 충무공 동상은 너무 초라하기도 하거니와 얼굴 표정이 지나치게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정상 나무 그늘에서 할아버지 몇 분이 장기를 두고 있다. 한 할아버지가 일어서더니 숲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소변을 본다. 지나치다 얼핏 보니 소변 본 밑에 무슨 팻말이 놓여 있다. 경상남도지사 모씨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념 식수 초석이었다. 오줌 맞는 기념비라면 처음부터 세우지 말았어야 좋았을텐데 하는 감상이 지나간다. (최창조. 전 서울대교수)

 

윤곤강(尹崑崗, 1911-1949, 본성명 윤봉원)

 

· 충남 서산 생. 서울 보성고 졸

· 1937년 [자오선], 1939년 [시학] 등을 통해 활동.

· 모더니즘, 카프, 보들레르에 대한 관심을 많이 두었기에 시 세계가 자연 어두운 이미지가 되 었으며, 애드가 앨런 포우의 영향으로 ‘묘지, 고양이, 유령’ 등의 어휘가 많이 보인다.

- 주제는 주로 불안, 절망 등 시대 현실과 관련

· 초기에 카프의 일원으로 작품을 남김( 시 <나비> 창작)

· 성격은 냉철하고 날카로웠으며 1938년 이후에는 신경쇠약, 정신분열증을 앓음

· 후기에 고려 속요를 포함한 전통가락에 관심을 두고 현대시와의 접목을 시도, 민족 정서를 형상화.

· 시집 : <만가>, <동물시집>, <피리>, <살어리>

· 시론집 : <시와 진실>

 윤곤강시비(서울 보성고 교정) : ‘잉경’ 새김

---  <피리>(--- 󰃫 <승무>와 비교), <아지랑이>

 

윤동주(尹東柱, 1917. 12. 30-1945. 2. 16, 아명(兒名). 해환)

 

·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 생. (본관이 파평 윤씨의 한 파인 보령공파에 속하며 증조부인 윤재옥(1844~1906)은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개에 살았으며 43세 때 4남 1녀의 어린 자녀를 거느리고 북간도 자동(子洞)이란 곳으로 옮겼다. 그 때 형제 중 맏아들인 윤동주의 조부 윤하 현(1875~1947)이 12세였다 하니 서기로는 1886년이었다. 성가(成家)한 뒤의 윤하현은 소지주였 을 정도로 넉넉했으며, 동주의 부친인 윤영석은 자동에서 출생했다. 1900년 같은 간도의 명동 촌에서 정착하였는데, 명동이 농촌이긴 하지만 1900년대에 들어와 교육, 종교, 독립 운동 등 여 러 면에서 관북 일대의 중심지였다. 그것은 1899년 규암 김약연 선생이 그 고장을 중심으로 일 으킨 혁신 운동의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땅을 사서 조선인 부락을 형성하고 규암재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일으켰으며, 명동서숙을 거쳐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로 발전시켰다. 1910년에 동주의 조부는 기독교를 믿게 되고, 같은 무렵에 입교한 다른 몇 가문과 더불어 규암 선생을 도와서 가풍을 고치고 신문화 도입에 힘을 썼다. 같은 해 동주의 부친은 16세로 규암 선생의 누인(김 용)와 결혼하여 규암 선생은 동주의 외삼촌이 되었다. )

 

· 동생 일주(아명. 달환)를 비롯 3남 1녀(아래 누이동생 혜원, 남동생 광주, 일주)

· 9세 때 명동소학교 입학

· 15세 때 김동환 [국경의 밤]을 졸업 선물로 받고 졸업

· 16세 때 용정에 위치한 미션스쿨인 은진 중학교에 입학

· 19세 때 은진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편입

· 20세 때 숭실 중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관에 접수되자, 항의 표시로 자퇴, 광명학원 중학부 4년에 편입

· 22세 때(38년)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 입학에서 수학

· 25세(41년) <서시>, <또 다른 고향>, <십자가>, <별 헤는 밤> <새벽이 올 때까 지> 등 여 러 편의 원숙한 작품을 쓰는 한편, 연전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발표.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발레리, 지드, 보들레르, 프랜시스 잠, 릴케, 장 콕도 등의 작품과 정지용, 김영랑, 백석, 이상, 서정주의 시편에 심취

· 1942년 창시개명을 강요하고 고향 집을 계속 탄압하자 일본 도일 수속을 위해 성을 <히라누 마(평소,平沼)>로 개명.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 고향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됨

· 1942년 3월 도일한 윤동주는 도쿄 릿교 대학 문학부 영문과 입학(송몽규는 쿄토 대학 사학과 (서양사) 전공)

·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 동북 제국 대학에 편입하기 위해 일본으로 다시 건너 갔으나, 10월 1 일 교토 도지샤 대학 영문학부에 편입

· 27세(1943) 때 일본의 징병제가 공포, 문과 대학, 고등·전문 학교 학생으로 학도병 에 지원하 지 않은 재학생 및 졸업생에게 일제의 징용 영장이 발부되자, 7월 14일 첫학기를 마치고 귀향 하려던 차,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구금

· 128세(1944년)에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 형을 언도(言渡)받고 규슈 후쿠오카 형 무소에 수 감

· 1947. 2. 13일 광복 후 최초로 유작 <쉽게 씌어진 시>가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정지용의 소개 문과 더불어 [경향신문]에 발표

· 1948년 1월 유고 31편이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정음사)

· 1941년 자신의 시 19편을 모아 [하·바·별·시]를 간행하려 하나 이양하 교수가 만류한 바 있음

· 일본 동지사(同志社) 대학 유학 중 사상 불온,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 후쿠오카(福岡) 형무소 에서 옥사.

· 1948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간행.

---  시 <서시>(1941.11.20), <참회록>, <또 다른 고향>(1941.9), <십자가>, <자화상>, <간>, <별 헤는 밤>(1941.11.5) <슬픈 족속>, <바람이 불어> <쉽게 씌어진 시>,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항목 [부끄러움], <초 한 대>

 

󰏐 작품 연보

 

1934. 12. 24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1935. 1. 18 거리에서

1935 공상(空想)

1935. 10. 20 창공

(중략)

1938. 5. 10 새로운 길 연전 [문우]지, 자선(自選)1

1938. 9 슬픈 족속 자선2

1939. 9 자화상 연전 [문우]지, 자선3

1939 소년 자선4

1940. 12 병원 자선5

1941. 2. 7 무서운 시간 자선6

1941. 3. 12 눈 오는 지도 자선7

1941. 태초의 아침 자선8

1941. 5. 31 또 태초의 아침 자선9

1941. 5 새벽이 올 때까지 자선10

1941. 5. 31 십자가 자선11

1941. 5. 31 눈 감고 간다 자선12

1941. 못 자는 밤 자선13

1941. 6 돌아와 보는 밤 자선14

1941 간판 없는 거리 자선15

1941. 6. 2 바람이 불어 자선16

1941. 9 또 다른 고향 자선17

1941. 9. 31 길 자선18

1941. 11. 5 별 헤는 밤 자선19

1941. 11. 20 서시(序詩)

1942. 1. 24 참회록

1942. 5. 12 흐르는 거리 동경에서 씀

1942. 5. 13 사랑스런 추억 〃

1942. 6. 3 쉽게 씌어진 시 〃

1942. 봄 〃

 

󰏐 문학 시기 구분

(1) 습작기(1934-1936)

: 외부 현실의 시대적 상황과 자신의 내향적 성격의 정신적 마찰

(2) 발전기(1937-1940)

: 습작기의 유년적 향수나 단조로운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소간 내향적이며 상황 관계를 가진 자취가 드러남 ( <새로운 길>, <비오는 밤>, <자화상 등> )

 

󰏐 윤동주 시의 가치

동주는 20세를 전후하여 근 10년간에 전개된 그의 체험과 더불어 그의 시 역시 여러 가지 면에서 급격한 변화 및 갈등을 보인다. 초기시의 암울한 분위기, 동시(童詩)에 깃든 유년적 평화에의 지향, 다시 강화. 확장되는 방황과 어두운 세계상, 자아의 분열과 긴장 --- 이렇게 서로 인과(因果)하고 혹은 반발하는 주제의 흐름을 우리는 보았다. 이러한 시적 편력의 배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체험적 원천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하나는 청년기의 정신적 불안정성과 고독감 및 정신적 방황에 기인한 <개인적 어둠>이요, 다른 하나는 조국을 잃음으로써 역사적, 사회적 삶의 자리를 박탈당한 <집단적 어둠>이다. 이 두 어둠이 윤동주라는 하나의 정신속에 결합하는 데서 그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그의 시의 가치는 <시대의 고뇌와 개인적 번민이 통일된 육체>로 느끼고 표현했다는 점이다.

곧, 그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고, 동시에 그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과 연결함으로써 보편적인 공감에 도달 하였다.

 

󰏐 尹東柱 50주기, 한국대학신보사-연세대 각종행사준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尹東柱의 50주기(2월16일)를 기념하여 다음달부터 한국대학신보사와 연세대학교 등이 각종 기념행사들을 마련하고 있다. 먼저 기일을 이틀 앞둔 2월14일 尹시인이 숨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 시인의 순결한 얼을 기리는 걸개그림이 걸린다. 이 그림은 한국대학신보사가 주관하고 한국문학평론가협회(회장 金宇鍾) 일본 同志社대학의 고려동창회등이 공동후원하는「민족시인 윤동주의 발자취 탐방」행사의 하나로 마련되고 있다.

 

서울대, 덕성여대 등의 학생 12명으로 구성된 미술팀이 지난 11일부터 제작에 들어가 25일 완성한 이 그림은 가로 10m 세로 4m 크기다. 尹시인과 그의 외사촌인 독립투사 송몽규를 포함한 당시 청년들의 모습과 시대상황, 새벽 여명 등을 내용으로 하였으며 기일을 맞아 후쿠오카 형무소 앞 추모위령제 무대에 걸리게 된다.

 

16일에는 시인이 다녔던 동지사대학을 찾아 추모식과 추모시 낭송회등을 가질 계획이다. 추모식 참가자들은 덕성여대 金宇鍾, 충남대 宋百憲, 단국대 金秀福 교수 등과 자원자들로 구성된다.

 

한편 尹시인의 모교인 연세대에서도 2월16일 교직원 학생 문화계 인사 등 9백 여명이 참석하는 거교적인 추모행사를 가진다. 이날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는 기념추모예배를 가진후 尹시인에 대한 추모학술행사 등을 가질 예정이다.

 

이밖에 연세대는 3월 셋째주를「尹東柱 주간」으로 정해 추모예배를 잇달아 가진다. 2월17일에는 宋梓 총장과 총학생회장단 등이 중국 북간도 명동에 있는 尹시인의 생가와 묘소 등을 방문, 참배하고 기념관 확충 등에 대해 유족들과 협의한다. 연세대는 올해 있을 尹東柱 기념사업의 하나로 「尹東柱기념 석좌교수제」실시 등을 추진하고 있다.

 

󰏐 [윤동주 전집을 엮으면서] 광복 50년의 한국 문학과 시인 윤동주

 

식민지 시대의 문학과 그 역사적 조건에 대한 반성을 전제로 할 경우, 윤동주시의 위상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는 극단적인 절망의 상태에서도 역사에 대한 전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상황의 우위에 서는 비판자가 되기도 하고, 상황의 한 복판에서 저항하는 시인이 되기도 한다. 역사의 신념을 고고하게 노래하는 예언자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도 시적 주체는 민족과 국가라는 절대적 명제를 고수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상상의 변주를 자족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다른 시인들과 구별되기도 한다.

 

윤동주 시에서 삶의 현실은 대개 비극적인 상황으로 내세워지고 있다. 민족과 국가라는 절대 개념이 부정되는 식민지 현실은 왜곡된 역사며 불모(不毛)의 땅이다. 그의 시는 바로 이 같은 현실에 대한 시적인 도전이며 예술적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편자 서문 중)

 

󰏐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들 (정지용)

 

노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虛其心實其腹弱其志强其骨其志强其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을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내가 아는 시인 윤동주 형 (문익환, 시인, 목사)

 

나는 누구보다도 동주 형을 안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그의 친동생 일주보다 더 안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자부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감성이 가장 예민한 국민 학교 6년 간을 그와 한 교실에서 배우며 뛰놀았다. 한 반이라야 20명 내외였으니 얼마나 서로 가까이 알 수 있었겠느냐는 것은 물을 나위도 없다. 우리 반에는 중학교 2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숟가락>이라는 콩트로 당선한 송몽규(宋夢奎)도 있었다. 동주와 몽규는 고종 사촌간이다. 동주나 몽규는 나보다는 한 살 위여서 나는 어딘지 모르게 그들 앞에서 어리게 느껴지곤 했는데 그 느낌은 지금도 여전하다. 우리는 그 작은 교실에서 민족심을 불태웠고, 소박한 대로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를 맛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6년 동안 “얘”, “쟤‘하면서 자란 명동소학교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명동은 북간도 민족 운동의 요람이었고, 정신적인 중심지였다. 거기는 북간도의 대통령이라고 하던 김약연 목사님이 사는 곳이었고 안중근 의사가 와서 권총 사격 연습을 하신 곳이다. 그리로 모여든 우국지사들이 민족 광복의 먼 앞날을 내가보며 오는 세대의 교육을 위해서 세운 학교가 명동 소학교였다.

 

6학년 때의 일이다. 학생 자치회가 조직되고 내가 초대 신문사 사장이 되었다. 동주 형이 무슨 부서를 맡았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신문사라야 한 달에 한 번 벽신 문을 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신문에 동주 형의 글이 가끔 실려졌지만, 워낙 기억력이 없어서 나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가 다닐 그 때는 그 학교에도 일본어 과목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일본말’이라고 하면서 일본어를 통 공부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해도 일본말을 몰라서 어떻게 할 길이 없었다.

 

그때 우리 집은 용정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나는 용정에서 해성학교에 들어가 1년 동안 일본말 공부를 해야 했다. 그 1년 동안 동주 형은 몽규 형과 함께 명동에서 한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중국학교에 가서 중국말 공부를 했다. 1년 후에 우리는 용정 은진 중학교에 나란히 입학해서 3년을 같이 다녔다. 몽규 형이 어떤 사명을 띠고 중국 본토에 갔다 온 것이 아마도 은진 3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3학년을 마치고 대학 진학을 위해 평양 숭실학교에 전학을 했는데, 다음 학기에 동주 형도 숭실학교에 전학을 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기숙사 밥을 먹으면서 더 가까워진 셈이다. (중략)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 나는 일본 도쿄로 신학 공부를 하러 가고, 동주 형과 몽규 형은 문학 공부를 하러 연전(延專)으로 올라 왔다.

 

󰏐 윤동주에 대한 평론가들의 여러 가지 시사적(詩史的) 평가

 

① 윤동주의 시는 압박받은 불행한 조국의 최후를 수호한 민족의 혈서이다.(정병욱)

② 그는 민족의 아픔과 시대의 어려움을 개인적 고뇌로 형상화함으로써 궁핍(窮乏) 한 시대를 살다간 시인 (정한모)

③ 1942년대를 문단의 암흑기라 했으나, 동주의 시를 발견한 뒤, 암흑 시대를 레지스탕스의 시 대로 그 제목을 바꾸어야 하겠다. (백철)

④ 그는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 저항 시인이 되고 만 슬픈 시인 (임헌영)

⑤ 윤동주는 암흑 시대에도 조금도 절망하지 않고, 긍정과 희망과 밝음의 빛깔로 시를 쓴 사람 (박영준)

 

󰏐 김송 씨 집에서의 하숙 생활

 

그의 하숙 생활은 매우 질서 있는 일과로 짜여져 있었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의 중턱까지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와 방청소를 끝내고 조반을 마친 다음 학교로 갔다. 하학 후에는 조선은행 앞까지 전차를 타고 들어와 책발을 두루 돌아다녔다.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 군서당 등의 신간 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후유노야도’나 ‘남풍장’이란 음악 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 보기도 했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걸어서 을지로와 청계천을 거쳐 관훈동에 있는 헌책방을 다시 순례했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에 들러 책들을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되었다. 누상동 9번지 하숙집으로 돌아 오면 주인 조 여사가 손수 마련한 저녁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송의 청으로 대청 마루에 올라가 한 시간 남짓한 환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는 방으로 돌아와 자정 가까이까지 책을 보다가 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  소설가 < 김송>

 

윤백남(尹白南, 1888-1954, 본명 교중·敎重)

· 소설가. 연극인

· 17년 백남 프로덕션을 창립, 여러 편의 영화 제작, 영화계의 공로

· 21년 조중환과 함께 극단 문수성을 조직, 원각사에서 공연, 신극계의 선구

· 31년 극예술 연구회 동인으로 있다가, 34년 만주에 건너가 광복 때까지 역사소설을 씀

 

윤선도(尹善道, 1587-1671, 고산·孤山)

· 서울 생. 본관 해남

·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인, 여러 차례 유배와 만년의 은거(隱居) 생활을 통해 시조 창작

· 26세 때 진사, 30세때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경원유배(31세), 이어 기 장 유배

· 인조반정 때 유배 해제, 의금부도사

· 42세 때 별시문과 장원, 왕자(봉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됨

· 43세 때 공조좌랑, 형조정랑을 거쳐 한성 서윤 역임

· 47세 때 증광문과 급제, 예조정랑 역임

·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덕 유배, 곧 풀려 금쇄동에 은거

· 66세 때 왕명으로 예조참의, 서인의 참모로 은거

· 71세 때 동부승지, 당쟁으로 삼사의 탄핵. 효종 승하시 복식 문제로 3년설을 주장 (남인), 서 인의 세력에 밀려 삼수에 유배, 광양으로 이배됨

·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77수의 작품을 남김.

· 문집 : [고산유고(孤山遺稿)]

 

-유적지

1) 고산윤선도생가의 터(서울 종로구 예총 건물 옆)

2) 윤선도시비(광주 사직공원) : ‘오우가’ 새김

3) 보길도 부용동(전남 해남 보길도) : 해안가의 산줄기가 마치 연꽃 모양이라 해서 부용동이 라 이름짓고 노년의 은거지로 삼았다. 보길도는 그의 유배지가 아니다. 경원, 기장, 영덕, 삼수 등으로 유배를 갔었으나 노년기에 자기 스스로 이곳을 찾아 생활했던 것이다.

4) 해남윤씨 녹우당(전남 해남읍 연동리, 사적 제167호) : 조선 성종 때 지은 목조건물로 호남 지방 사대부의 대표적 건축양식

- <산중신곡>(보물 제 482호), <어부사시사>,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

---  시조 <석양이 빗겨시니 ~ >, <잔 들고 혼자 안자 먼 뫼흘 라보니.>, <비 오 들희 가랴 사립 닷고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월출산 높더니만~>

 

윤오영(尹五榮, 1907-1976, 치옹·痴翁, 동매실주인·桐梅室 主人)

· 수필가. 서울생. 보성교보 교직생활

· 59년 [현대문학]에 수필 <측상락(廁上樂)> 발표 후 다수 창작

·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수필의 창작과 이론 전개에 힘을 씀. 정교한 문장으로 사물을 고 전적 세계와 접목

· 수필집 : [고독의 반추](1974) 등

· 작품 : <방망이 깎던 노인>, <달밤>, <양잠설>, <마고자> 등

---  수필 <달밤>, <양잠설>, <마고자>

 

윤해영(尹海榮)

· 가곡 <선구자>(작곡 조두남)의 작시자(作詩者)

 

▲ 선구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 윤해영 친일시도 써

 

한반도를 일제에 빼앗기고 간도(間島)로 들어가 조국 수복과 새 삶을 꿈꾸는 민족의 의지를 비장하게 노래한 가곡 <선구자>. 이 선구자의 작시자 윤해영은 민족시뿐만 아니라 친일시도 쓴 것으로 밝혀졌다.

 

문학평론가 오양호(吳養鎬)씨(인천대교수)는 최근 발표한 논문 <1940년대 시의식 고찰-윤해영과 만주 체험의 두 반응>에서 윤씨의 시 다섯 편을 분석한 결과 <선구자>의 민족의식과의 정반대의 친일의식도 드러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오씨가 최근 발굴한 사화집 [반도사화(半島史話)와 악토만주(樂土滿洲)]에는 친일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것. 이 책은 1943년 간행된 것으로 이광수, 최남선 등 국내 문인, 지식인들이 총동원 돼 일제 괴뢰국가 만주국을 정치·경제·사회·문화 면에서 찬양, 합리화한 글들을 모으고 있다.

 

오색기 너울너울 악토만주 부른다

백만의 척사(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

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

 

송화강 천리언덕 아지랑이 행화촌(杏花村)

강남의 제비들도 봄을 따라 왔는데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을 일꾼들

황무지(荒蕪地) 언덕 위에 힘찬 광이 두르자 //

 

끝없는 지평선에 오곡금파(五穀金波) 굼실렁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흥겨워

우리는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

한 천년 세월 후에 영화만세(榮華萬歲) 빛나리.” [악토만주 전문)

 

오색기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직후인 1932년 세운 만주국의 깃발.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옹립 일군부가 세운 만주국은 일본의 패전과 함께 1945년 막을 내렸다. 이러한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윤씨는 이 시에서 오색기 아래서 뭉치자고 노래하고 있다. <선구자(先驅者)>의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윤후명(1946- )

· 강원도 강릉생. 연세대 철학과 졸

· 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 당선

· 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 당선

·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추천우수작상 수상(83,84,85,90년)

· 시집 [명궁], 작품집 [돈황의 사랑], [원숭이는 없다]

 

󰏐<인터뷰> 이상문학상 대상 받는 윤후명씨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인 눈 생기는 것 같소.“

"몇 차례 이상문학상 후보에 올랐다가 올해 이 상을 받게 되어 기쁩니다. 늘 새로운 출발을 제 삶의 기본 자세로 삼아왔습니다. 새 삶이야말로 늙도록 젊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이 상 수상을 계기로 새로운 시작이 공고하게 되길 바랍니다.".

「협궤열차」, 「돈황의 사랑」,「원숭이는 없다」 등의 작품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통해 삶의 본질적인 쓸쓸한 분위기를 시적인 문체로 보여줬던 중견 소설가 윤후명씨(49)가 올해의 이상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 「한국문학」 봄호에 발표된 중편 <하얀배>.

 

일종의 `로드 로망'으로 볼 수 있는 수상작은 화자인 `나'가 우리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중앙아시아지역에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동포 처녀 <류다>를 찾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여정을 그렸다. 중앙아시아의 사막에서 천리마의 전설이 깃든 초원, 그리고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 만들어 놓은 이시크굴호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속에서 화자의 눈에 비친 나무와 강과 마을과 국경묘사가 섬세한 언어로 교직돼 있다. 여기에 화자의, 국내에서의 곤고한 삶이 회상 형식으로 곁들여져 있다.

 

이 작품에서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화자의 공간여행은 류다라는 인물을 향한 탐색이며 류다는 우리말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미래에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류다가 막 배우기 시작한 우리말로 "안녕하십니까? 이 말은 우리 민족 말입니다"라고 외치자 "개양귀비 꽃밭이 수런거리고 숲속의 들고양이들이 귀를 쫑긋 거리고 커다란 까마귀들이 전나무가지를 치고 날았으며 사막쥐들이 이리뛰고 저리 뛰고 돌소금이 하얗게 깔린 사막으로 큰 바람이 불고 천산에서 빙하가 우르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윤씨는 그려내고 있다.

그는 이 소설이 "지난 2년동안 네차례 소련땅을 밟으면서 얻어진 것"이라고 전하면서 "민족이라는 것, 우리 말과 글의 중요성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내 전작들에 비해 이 작품에 우리 민족의 역사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많이 담겨 있다"고 자평하는 윤씨는 "아무래도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인 눈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강원도 강릉생인 윤씨는 지난 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빙하의 시>, 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이 당선되어 소설가와 시인의 길을 걷고 있다.

 

▲ <이 몹쓸 그립은 것아> / 윤후명 시

 

어둠이 더 짙어지기 전에

너를 잊어 버려야 하니

오늘도 칠흑같은 밤이 되면

사라진 길을 길삼아

너 돌아오는 발자욱 소리의

모습 한결 낭랑하고

숨막혀, 숨막혀, 숨막혀

숨막혀를 깨물며 나는 자지러지지

산 자 필히 죽고

만난 자 필히 헤어지는데

어쩌자고 어쩌자고

온 몸에 그리운 뱀비늘로 돋아

발자국 소리의 모습

내 목을 죄느냐

소리죽여 와서 내 목을 꽈악 죄느냐

이 몹쓸 그립은 것아

 

󰏐 [나의 신인 시절] 윤후명

 

나는 아직도 문학을 믿는다. 이 말은 불과 20년 전, 혹은 30년 전에 내가 [믿었던] 문학의 본질을 지금도 여전히 믿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불과]라는 말을 지나쳐서는 결코 안 된다고 나는 강조한다. 신춘문예라는 함정을 두 번 거쳐서 나는 30년 전에는 시인이, 18년 전에는 소설가가되었다. [불과] 이런 시간이 지난 다음 과연 세기말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려는 듯, 반야만국에서는 본질이니 진실이니 하는 말은 아예 사라진 것처럼 허황됨만 요란하다. 정치 얘기가 아니라 엄연히 문학 얘기만 하겠다는 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름답고 진지한 본질적인 미학을 믿는다. 신인 시절에 바쳤던 그 고통과 번뇌를 보상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한자루의 흐린 촛불일지라도 꺼뜨리지 않고 내 개인의 삶 앞에 받쳐들고 이 시대를 밝혀 보리라 했었다.

시인이 되어 10년 만에 한 권의 시집을 낸 뒤 그 적막과 갈증을 소설에 의탁하고자 했을 때, 33세의 내 삶은 만신창이였다. 구차한 목숨을 이어 가느냐,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가느냐, 나는 어둡게 묻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시적인 생명으로 소설쓰기를 택했다. 즉, 신춘문예에 되지 않으면 미련없이 제주해협의 밤바다에 투신하겠다는 약속을 스스로에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피폐한 날의 피폐한 약속이었다. 차디찬 겨울 밤바다에 내던져진 내 몸뚱이는 과연 어떤 몰골로 흐를 것인가, 가엾은 상상이 충분히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여기에 [생명은 모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12월24일 저녁, 임시직장의 마지막 퇴근시간이 넘었는데도 유일한 연락처였던 그곳으로 학수고대하던 당선 소식의 벨은 울리지 않았다. 틀렸다…. 나는 신음했다. 사무실을 나가는 동료들의 발자국 소리를 덮치며 새하얗게 바랜 내 골속으로 해협의 차디찬 바닷물이 와락 밀려들고 있었다. 그 마지막 순간, 미적거리는 유예와 미련의 짧디짧은 찰나에 나는 생명 연장의 그 신비한 벨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너는 이제 죽지 않아도 돼…. 조금만 더일찍 그 소식을 전해 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나는 지금도 그 기자를 원망한다. 고맙지만, 원망한다. 왜 마지막 절체절 명의 찰나까지 내 생명을 시험했느냐는 것이다.

 

운명은 그렇게 나로 하여금 소설가가 되게 했고, 따라서 [생명 담보]의 소설을 쓰리라 늘 다짐하고 있다. 소식을 전해 준 그 기자에게 생명의 고마움을 긴밀히 전한다.

 

󰏐 윤후명 소설 <협궤열차(挾軌列車)> 배경

 

경기 안산시, 4호선 고잔역에서 잠시 하차하여 역밖으로 나가면 허름한 횟집이 하나 서 있고, 그 집의 앞에는 사라져 가는 추억의 공간으로 금세라도 손님을 싣고 갈 것 같은 협궤열차의 좁은 선로가 있다. 지금은 녹슬고 풀이 우거진 선로 위로 아이들이 깽깽이 걸음을 걸으며 놀고 있을 뿐이지만 한때 소래 포구로 가는 협궤열차를 타고 낭만적인 문학도의 꿈을 키우던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의 아름다움과 그 비극성을 발견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윤후명의 <협궤열차> 속에서 고잔역의 역장을 찾아간 ‘나’가 ‘류’를 끌고 들어가 막걸리를 마시던 허름한 음식점만이, 한때 ‘소철’, ‘작은철’의 이름을 가졌던 협궤열차를 대신해서 사라져 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증언할 뿐이다.

 

윤흥길(尹興吉, 1942- )

 

· 전북 정읍 생. 은행원이었던 아버지 윤상오와 어머니 조옥성 사이에 손위 누이 하나를 둔 6 남매의 장남

· 부모님의 의견대로 법관이 되려던 꿈을 포기, 전주사범학교에 진학

· 1964년 공군 제대 후 익산군 춘포국교 교사로 발령, 그후 부안군 진서국교 석포분교로 근무 처를 옮긴 다름 습작에 몰두

·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회색 면류관의 계절> 당선, 문단 등단

· 1973년 원광대학 국문과 졸업. 같은 해 문학과 지성에 대표작 <장마> 발표

·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로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 <에미>, <완장(腕章)>(1983)으로 제 28회 현대 문학상 수상

· 작품경향

- 우리 민족 고유의 한이나 인정을 6·25와 같은 역사의 격동기에서 파악

- 지식인의 입장에서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을 바라보는 것

---  소설 <장마>

 

󰏐 작가론

 

<황혼의 집>으로 역량을 인정받은 윤흥길은 70년대 소설 형식의 특징을 이루는 계열형 소설 형식의 탐구는 그의 작가적 성장을 가장 잘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을 다소 체계적으로 읽어본 독자라면, 화자로 교사(敎師)가 많음을 알수 있다. 교사는 한 국가나 사회의 이념을 피교육자에게 가르치고 전달하는 중립적 혹은 중간적 존재이다. 쉽게 말해 교사는 새디스트, 학생은 매저키스트로 될 수가 있지만 그 거꾸로도 될 수 있다. 어느 쪽이나 정상적이 아님은 새람 말할 필요가 없다. 교사에 해당하는 관점이 ‘우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식은 그대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단계로 생성되지 않는 한 이 작가는 매너리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즉 방향성을 향한 변증법에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현실 폭로의 충격을 노리더라도 현실은 도식 이상인 것이다. 제3의 방향성을 향한 변증법적 전개는 이와 같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확신되는 것이기에 <아홉켤레의 ~ >가 요청될 수밖에 없었다.

 

이개(1417-1456)

· 사육신의 1인

---  시조 <방(房) 안에 혓는 燭(촉)불 눌과 離別(이별) 엿관>

 

이곡(李穀, 1298-1351, 가정·稼亭)

· 고려 말기의 신흥 유학자.

· 한산의 군리(郡吏) 출신으로 충숙왕 7년(1320) 과거급제 벼슬

· 원나라에 건너가서도 과거에 급제하여 그곳의 문우들과 교류

- 특히 원과의 교유에 외교적 공이 많음

·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編年綱目)] 편찬

· 여말의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

· 작품 : 가전체 소설 <죽부인전>, 문집 [가정집], 설(說) <차마설(借馬說)>

---  <설(說)>, 가전 <죽부인전>

 

이광수(李光洙, 1892 - ? , 춘원·春園)

 

· 평북 정주 생.

· 10세 때, 부모가 콜레라로 8일 사이에 차례로 사망하여 고아 됨

· 그 이듬해 동학의 이념에 감명을 받고 입도(入道), 종교 활동이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침

· 동학에 대한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5년 상경,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도일(渡日) · 1907년 명치학원 중학부에 편입, 도산 안창호의 일본 동경 연설을 하는 것을 듣고 크게 감명. 기독교의 성경도 접하여 청교도적인 생활을 지향한다.

· 이 무렵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에 공명하며 일본 작가의 작품을 애독하는 한편 홍명희의 영 향을 받아 바이런의 작품을 읽고, 당시 풍미하던 자연주의에 몰입.

· 1915년 김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 입학.

· [청춘]에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등 단편 발표.

· 1917년 근대적인 형태의 계몽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 명성얻음.

·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기초, 대학을 중퇴,

· 상해로 건너가 임정에서 활약, 안창호에게 영향.

· 귀국 후 1922년 [개벽]에 <민족개조론> 발표,커다란 물의를 일으킴.

· 1924년 [조선문단] 주재.

·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역임.

·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반 년 동안 수감, 병으로 보석

· 점차 친일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 ,

· 1939년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

· 1940년 가야마 미쓰로오(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

· 학병을 권유하는 강연을 하며 다니기도 함.

· 단편 <무명>(1939)<원효대사>(1942) 등을 집필. 6.25때 납북.

· 광복 후 친일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1949년 [반민특위-1948년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집행하 기 위해 제헌 국회가 설치한 특별 기관]에 회부

· 1950년 와병 중 7월 12일 북한에 의해 불법 납북됨.

· 작품 : <재생>(1924), <마의태자(麻衣太子)>(1926), <단종애사>(1929), <흙>(1932-1933), < 이순신>(1931), <유정(有情)>(1933), <사랑(1938)>

---  소설 <무정>, <개척자>, <사랑>

 

󰏐 이광수 문학 4기

󰆲 제1기 : 인도주의 계몽 사상기. 개성에 눈을 뜬 근대적 자아의식으로 개화, 계몽을 외침, 자녀 중심론과 부부 중심론을 통하여 유교적 전통과 인습에 반항하는 시기.( 무정, 개척자, 선도자 )

󰆳 제2기 : 민족성 개조 주장 - 우리 민족의 부정적인 모습과 결함을 발견, 그 내부적 요인을 비찬하는 데 주력 - 일본 민족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민족을 비판하였는데 이는 친일 행위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부분임 ( 재생(1924), 혁명가의 아내, 사랑의 다각형, 흙(1932) )

󰆴 제3기 : 영적 구원을 모색하는 종교적 경향의 시기 ( 사랑, 이차돈의 사 )

󰆵 제4기 : 친일문학기 - 수양 동우회 사건(1937) 이후 일제에 협력,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는 등 친일행각을 계속함

 

󰏐 이광수의 친일의식

 

❶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대해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랑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天皇御命)과 독법(讀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臣民)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다웁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❷ 내선일체(內鮮一體)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 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이었다. 조선인이 內地人과 차별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의 제거를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백운거사·白雲居士)

 

· 고려 때 문인

· 일명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 시, 거문고, 술을 지독히 좋아했다 함.

· 생전 모습은, 눈은 구슬처럼 빛났고, 살결은 희고, 키도 후리후리하고 뭇사람 사이에서도 눈 에 띄는 군계일학의 모습이었다 전해짐.

· 신동으로 소문, 9세 때 경전, 역사, 제자백가서, 노자, 불경 등 문헌 섭렵

· 22세 장원급제, 24세때 부친 여의고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라 칭함.

- 이곳에서 [백운거사록](20권), [동명왕편] (3권) 저술

· 1189년 벼슬길에 다시 올라 최씨(최충헌) 정권에 문학적 재능을 인정 받아 벼슬이 상서(尙 書)에 이름

- 이 때 이인로, 최자 등도 무신 정권의 총애를 받음

· 1241년 7월 병을 얻었을 때, 최이(崔怡)가 그의 시문을 모아 판각에 들어 갔으나 그의 문집 을 못보고 74세 일기로 운명. ( 이것이 [동국이상국집](전53권)임 )

· 작품

- 최초의 서사시 : <동명왕편>

- 가전체 : <국선생전(麴先生傳)>, <청강사자현부전>

- 저서 :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白雲小說)]

---  <국선생전>, <청강사자현부전>, <동명왕(東明王)편>

 

이근삼(李根三, 1929- )

· 극작가, 영문학자

· ‘민중 극장’의 대표로 연극에 직접 참여

· 사회 풍자적 경향의 작품을 많이 씀

· 주요 작품 : <원고지>, <욕망>, <국물 있사옵니다> 등

---  희곡(반극, 부조리극) <원고지>

 

이기영(1895-1984)

· 충남 아산 생

· 단편소설 <오빠의 비밀편지>로 [개벽] 통해 등단

· 1934년 카프 2차 검거로 인해 2년 동안 옥고

· 1945년 광복 후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가담 활동

· 1945년 말 월북, 그곳에서 조직활동과 작품활동을 함

· 의의 : 농민소설 전념

· 장편 [고향](1934년) - 일본 독점자본의 침탈하에 놓여있던 식민지의 반봉건 농촌이 겪는 황 폐화와 이에 맞서 일어선 농민들의 모습을 노동 동맹의 관점에서 형상화시킨 작품

 

이달(李達, ?-?, 손곡)

· 본관 원주. 조선 중기, 선조 연간의 한시의 대가

· 당시에 능했던 삼당(三唐) 시인 중 1인

· 허균의 스승으로 서자(庶子) 출신

  문학비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1리 손곡교 옆 길가 소재(1983년 전국시가비 건립동호 회 건립)

 

이덕형(李德馨, 1561-1613, 명종16-광해군5,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擁散人)

· 본관 경기 광주(廣州). 조선시대 문신.

· 1580년 별시 문과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보직되어 정자(正字)를 거쳐 사가 독서함

· 이듬해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교리 등 역임

· 1592(선조25년) 예조참판에 올라 대제학을 겸임

·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지(同知) 중추부사로서 일본 사신과 화의를 교섭했으나 실패. 후 에 왕을 정주까지 호종함. 그 길로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을 거둠. 귀국후 한성 부판윤이 되고 이여송의 접반관으로 활약.

· 1598년 우의정에 승진, 이어 좌의정에 오름

· 1613년(광해군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사직, 양근으로 내려가 죽음.

· 남인과 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고,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많이하여 많은 일화를 남김

 

이무영(李無影, 1908-1960)

· 소설가. 충북 음성 생.

· 1932년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참가,

· 1933년 이효석, 정지용, 유치진 등과 구인회 동인이 됨.

· 1934년 [동아일보] 입사,

· 1938년 낙향, 이듬해부터 <제일과 제일장(第一科 第一章)>, <흙의 노예> 등으로 본격적인 농촌 소설을 쓰기 시작함

· 1954년 동학혁명을 배경, 토호들에게 수탈당한 농민들이 동학군의 힘을 빌어 항거하는 내용 인 <농민> 발표

· 광복 후에는 도시 생활을 했으며, 서울대·연세대에서 강의

 

  유적지

1) ‘李無影先生文學碑’ : (음성터미널 앞) 음성문화원 뒤 설성공원 내

- 비석 오른쪽에는 이무영을 그리워하는 구상의 시가 새겨진 자연석이 있음

2) 무영로(문학비가 있는 거리) : 95년도 무영문화재 이후 무영로라 부르기 시작

3) 묘(서울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 염상섭 묘 인근)

---  소설 <제일과 제일장>

 

이문구(李文求, 1941- )

· 소설가. 충남 보령 생

· 작품 <관촌수필>, <우리 동네>

---  소설 <관촌수필(冠村隨筆)>

---   <서라벌예대와 중앙대 ‘문예창작과’ 출신 문인>

 

󰏐 [이문구 작품세계] 6.25에 풍비박산된 `가족사'

 

이문구씨가 지난 77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 연작소설집 [관촌수필]이 올해로 출간 20주년을 맞았다. 토정 이지함 선생의 후손인 작가가 어릴 적부터 습득한 한문학적 인문교양에 바탕을 둔 의고체 문장에다가 충남지역의 토속어가 어우러진 [관촌수필]은 오늘날 한국적 문예미학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남들으라고 떠들기는 민망하지만 [관촌수필]은 적어도 문인으로서의 경력에 대한 중간결산이며 내 역량으로 창작할 수 있는 문학의 본바닥이라고 할 수 있다. 8편의 단편 중에는 쓰면서 운 것도 있고 탈고와 함께 눈물을 지은 것도 있는, 모두가 내 이웃과 내 이야기를 기록.

 

[관촌수필]은 6․25의 광풍에 풍비박산이 난 작가의 가족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작가의 부친은 충남 보령의 남로당 총책을 맡았다가 전쟁이 터지자 예비 검속돼 처형당했다. 작가의 큰형은 이미 일제때 징용돼 실종된 상태였던 터라 둘째형이 부친과 연루돼 비명에 갔다. 셋째형은 전쟁 당시 18세의 나이였으나, 역시 빨갱이 집안 자식이란 이유로 대천 앞바다에서 산 채로 수장당했다. 이같은 기구한 사연을 아는 문단 동료들은 결코 대천해수욕장으로 피서가는 법이 없다.

 

전쟁이 끝나자 집안에서 살아남은 남자라고는 이미 팔순을 넘긴 할아버지와 넷째아들로 태어난 작가뿐이었다. 소년 이문구는 당시 {어린마음에도 맨 먼저 다짐한 것이, 나만은 절대로 형무소나 유치장 출입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살아남아서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처절한 생존본능이 어린 그를 짓눌렀다.

 

[관촌수필]은 근대 이전 시골 선비의 표상을 따랐던 조부 밑에서자라난 소년 이문구의 성장기를 성년이 된 작가의 시점에서 회상하는 단편들로 꾸며져 있다. [공산토월] [화무십일] [행운유수] 등의 고색창연한 제목을 지닌 이 연작소설들은 작가의 자전적 회상뿐만 아니라전쟁의 혼란에 떠밀려진 순박한 농민들의 인생유전을 담담하게 그려나간다. 상상력으로 쥐어짠 허구가 아닌 실화에 토대를 둔 이야기들이기에 작가는 이 소설의 제목에 [수필]이란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이문열(李文烈, 1948- )

· 1948년 서울 생, 1950년 고향인 경북 영양군 석보면에 이주.

· 1953년 안동으로 이사. 57년 서울로 이사, 59년 밀양으로 이사.

· 1961년 밀양 중학 입학했으나 그만두고 64년 검정고시로 안동고교 입학

· 1965년 안동고교 그만두고 부산으로 이사, 이후 3년간 떠돌이 생활

· 1968년 대입 검정고시를 쳐 서울대 사대 입학. 70년 자퇴 후 사법고시 준비

· 1973년 - 76년 군생활. 77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당선.

· 1978년 동아일보 신춘 당선으로 문단 데뷔

---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황제를 위하여>(항목 <미생지신>, <인물설정>에서 인용)

 

이백(李白, 701-762)

· 당나라 시인

· 동서고금을 통해 술을 마신 사람은 많지만 술의 깊은 멋을 안 사람 중에 이태백을 빼놓을 수 가 없다. 또한 천의무봉한 군색한 데 없는 시재를 발휘한 사람도 이태백이다.

· 이태백은 62세때 채석강에서 술에 취해 놀다가 물 속의 달을 붙들려고 뛰어들어 죽었다는 이 야기가 있을만큼 달을 사랑하고 술을 좋아했다. 그는 두보(杜甫)와 더불어 최대의 문장가로 이 야기 되는데, 두보는 시성(詩聖), 이백은 시선(詩仙)이란 칭호를 얻고 있다.

·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태백성(금성)을 품에 안았다 하여 이름을 백, 자를 태백이라고 했다. 42세 때 당 현종의 부름을 받고 장안에 갔는데, 그가 궁정에 불려 가서 시를 지을 때는 당시 궁내 세력가이던 고역사(高力士)로 하여금 그의 신발을 벗기게 하고 총희 양귀비에게는 벼루를 받쳐 들고 서있게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이백 <장진주(將進酒)>

 

이범선(李範宣, 1920-1982)

· 소설가, 평남 안주 생. 유복한 대지주의 아들로 출생

· 1938년 평양에서 은행에 근무, 광복 후 월남

· 동국대 전문부 국문과 졸

· 1954년 거제고교 교사, 그후 대광고교 교사 (오랫 동안 교직자 생활을 함)

· 1955년 [현대문학]에 단편 <암표>, <일요일> 통과 등단(김동리 추천)

· 1962년 외국어대 전임 강사

· 1970년 월탄문학상 수상

· 1982년 뇌일혈로 사망 (80여 편 작품 남김)

· 단편 ‘학마을 사람들’(1957)

· 제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오발탄(誤發彈)’(1959),

· 장편 ‘춤추는 선인장’(1967) 등 발표.

--- 소설 <오발탄>, <학마을 사람들>

 

이병기(李秉岐, 1892-1968, 가람·嘉藍)

· 전북 익산 출생

· 1921 조선어 연구회 발기 참여.

· 고향에서 한문 수학(修學), 공립 보통학교 졸업, 조선어 강습원 수료

· 한성사범학교 졸업.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름

· 1925년 [조선문단]에 시조 ‘한강을 지나며’를 발표, 문단활동 시작.

· 1926년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 연재.

· 이태준(소설), 정지용(시)과 함께 [문장]지 심사 위원(시조 부분)으로 신인 배출

· 조남령, 김상옥, 이호우, 장하보 시조 시인 추천 배출

· 6·15전쟁 후 전주시 교동에 살면서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초대 학장을 역임

· 시조 세계

- 전통적인 한국적 운치를 현대화함.

- 깊은 통찰력, 완벽한 시상, 엄정한 시어 선택.

- 난초와 매화를 평소 사랑하는 그의 취미가 시조에 반영,

- 청초하고 담담한 우아미(고아미) 형상화함.

 

 유적지

1) 생가(전북 인산 여산면 원수리) : 지방기념물 제6호. 초가 네 채. 가람은 자신이 세가지 복 을 타고 난 것이라 여겼는데, ‘술복, 글복, 제자복’ 그것이다.

2) 묘(생가 앞에 위치) : 봉분이 따로 없이 묘비만 서 있고 그 밑에 잠들어 있다.

3) 동상·가람시비(여산남 초등학교) : ‘별’이 새겨져 있다.

바람이 소슬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

4) 가람시비(전주 다가공원) : 시조 ‘시름’ 새김

---  시조 <비>, <난초>, <구름> <매화Ⅱ>, <오동꽃>

---   <계랑(이매창)>, <시조 시인들>

 

이북 출신 문인 : 우리 문단 180여 명

송병수 [쇼리킴], 이범선, 손소희, 선우휘, 전봉건, 오상원, 김광섭, 김현승, 양명문[어머니], 황석영, 박완서, 구상, 박남수, 최태응, 장용학, 최인훈, 김광균, 안수길, 김이석, 전광용, 임옥인, 서기원, 손창섭, 최정희, 노천명, 홍윤숙, 이헌구, 윤병로 등

 

이사(李斯, ? - B.C208)

· 중국 전국시대 사람.

· 진나라의 재상으로서 시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을 확립

·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으나 시황제가 죽은 후 간신 조고에게 죽임을 당 한 인물

---  <죽부인전>

 

이상(李箱, 1910-1937, 본성명 김해경)

· 서울생. 보성고보, 경성고공 건축과 졸

· 1930년 [조선]에 <12월 12일> 발표, 등단

· 1931년 <이상한 가역 반응>을 발표 등단.

·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烏瞰圖)> 발표해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드러내, 한국 현대시의 영역을 자의식의 세계에까지 확장시켜 문단의 주목을 받음.

· 구인회(九人會) 동인.

· 1937년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 악화로 사망

· 소설 : <날개>, <종생기>, <봉별기>, <지주회시>등

· 수필 : <권태>, <산촌여정> 등

 이상문학비(서울 보성고 교정) : ‘오감도’ 새김

---  시 <거울>, 소설 <날개>, <봉별기>, <종생기> 등

 

󰏐 [이상-김유정 60주기] 박제가 된 두 천재를 아십니까

- 불우한 집안환경에 실연-폐결핵까지 닮은 문우...재조명 활발 -

 

이상과 김유정. 한국문학이 낳은 천재 소설가들이다. 서른문턱을 넘지못하고 요절한 두 사람은 모두 올해가 60주기다. 이들의 일생과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친교관계 등을 살펴본다. <편집자>.

 

1937년 이상과 김유정은 이땅에서 나란히 사라졌다. 김유정은 3월29일 스물아홉의 나이에, 이상은 20일 뒤인 4월17일 스물일곱에 죽었다. 둘다 폐결핵이 원인이었고 요절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혼을 이해했던 절친한 문우였다.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구인회]에서 단짝으로 지냈던 이들이 죽자 문단에서는 그해 5월15일 부민관에서 합동추도식을 올렸고, 평론가 백철은 {파시즘의 도래를 앞둔 문학의 죽음}이라고 애도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는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소설 [날개]에서 번쩍이는 기지와 독설을 남기고 찬란하게 파산한 이상은 지금도 문학청년들이 한번씩 거쳐가는 통로이자 극복의 목표다.

이상과 함께 구인회 멤버였던 시인 김기림은 {이상의 죽음으로 우리문학이 50년 후퇴했다}고 말했다.

 

김윤식 교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문제로 고민하는 문인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근대]를 파악했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시에 초극하려 했던 이상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문학이라는 [지방성]에 가두지 말고 세계 문학의 반열에서 이상을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상은 본명이 김해경으로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건축 기사가 되었다. 31년에 시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고, 서양화 [초상화]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상했다. 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연작시 [오감도], 36년에 잡지 조광에 소설 [날개]를 발표, 큰 화제를불러일으켰다. 한때 다방 [제비] [69] 등을 경영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불온사상 혐의로 체포됐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지병인 결핵으로 결국 동경에서 사망했다.

 

{[장인님!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그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고 뭐고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장차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한국 단편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봄봄]의 작가 김유정. 그는 향토색 짙은 서정과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30년대 농민들의 삶을 그렸다. 무엇보다 남루한 삶의 슬픔을 감춘 해학이 작품 곳곳에 번져 나온다. 김유정을 집중 연구해 온 한림대 전신재 교수는 {옹달샘에서 물긷는 아낙네가 샘 속에서 자기 얼굴을 보듯 유정의 소설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 그의 언어는 생동하고 삶은 발랄하다}고 말한다.

 

김유정은 1908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우다 12세때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를 중퇴, 고향에 내려가 금병의숙이라는 야학당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에 들어갔다. 33년 서울로 올라온 김유정은 35년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와 [노다지]가 각각 당선, 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그는 2년여에 걸친 짧은 작가생활을 통해 계몽적 이상주의나 감상적 농민문학을 떠나 농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 30여편을 내놓았다.

 

이상과 김유정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닮았다. 둘다 집안 환경이 불우했다.

이상은 2살때 백부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친부는 이발업 등을 했던 막노동꾼이었고 백부는 총독부 기술직에 있었던 중인이었다. 김유정은 천석꾼의 아들로 서울에도 백여칸의 집이 있었을 정도였으나 아버지 사망후 형의 방탕한 생활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나중에는 밥장사를 했던 누이에게 얹혀지내는 처지였다.

 

또한 지독한 실연의 아픔이 있었다. 이상에게는 정상적인 사랑인지 도피인지 아리송하지만 금홍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소설 [날개]에 나오는 인물이다. 김유정은 휘문고보 졸업 직후 나중에 명창이 된 박녹주에게 구애를 했다. 열렬한 사랑이 거절당하자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자학적으로 떠돌이들과 어울렸다.

 

둘은 폐결핵에 꽁꽁 묶여 있었다. 이상은 20세 무렵부터 각혈을 했고, 김유정은 25세때 발병했다. 이상의 폐병은 그래도 느릿느릿하게 진행되었지만 늑막염과 치질까지 앓았던 김유정은 속도가 빨랐다. 식민지라는 시대적 좌절아래 죽음의 늪으로 차츰 빠져들어가는 그들이 광기와 열정으로 생명의 불꽃을 태워 만든 것이 바로 소설이었다.

 

두 사람의 60주기를 맞아 문단은 작은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문학사상사는 통권 3백호인 문학사상 10월호에 [이상문학 특집]을 마련하고, 11월에 [이상 세미나]를 준비중이다. 한편 전신재 교수는 최근 소설 31편을 비롯한 전작을 모은 [원본 김유정 전집]을 강출판사에서 출간했고, 평론가 김윤식 이재선 김병익씨, 소설가 전상국씨 등의 김유정론을 모은 [김유정 문학의 전통성과 근대성]도 한림대출판부에서 이달말 나올예정이다.

 

󰏐 관련기사

20여년간 문학의 꿈을 키웠던 이상의 집터는 현재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 경복궁의 한쪽 담을 따라 세검정에 이르는 자하문길 대로에서 불과 30여 미터떨어진 ‘ㄱ’자형 골목안에 자리한 그의 집터는 마치 시간이 ‘박제(剝製)’가 된 양 적막감이 돌고 있다.

 

사직동에서 태어나 부모의 가난 때문에 2세때부터 이곳 통인동 백부집에 맡겨졌는데, 각혈로 인해 23세에 황해도 백천으로 요양을 가지까지 20여 년 동안 행랑채, 사랑채가 딸린 150여평의 기와집에서 문학의 꿈을 키웠다. 현재는 그 기와집은 없고 그 자리에 수십 년 된 낡고 옹색한 기와집 5~6채가 빈틈없이 붙어 있다.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상화·尙火)

· 시인. 대구 생

· 1922년 [백조](박종화, 홍사용, 박영희 등과 함께) 창간

· 1927년 대구에 돌아왔으나 일본 관헌의 감시와 가택 수색을 받았고, 마침내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피검

· 1937년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백씨(伯氏)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에 다녀와 수차례 옥고를 치렀으며, 1943년 위암으로 타계

· 작품 : <나의 침실로>(1922),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

· 유고시집 : [상화(尙火)와 고월(古月)](1951), [상화시집](1973)

· 작품경향의 변화

- 전기 : 감상적, 허무적, 현실 도피적 자세로 삶 자체의 가치에 대한 부정과 몽환적(夢幻 的) 세계를 노래

- 후기 : 토착적 리얼리즘의 민족주의 의식으로 고유한 정서를 노래하여 저항적인 시를 보 이고 있다. 예리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역사 의식, 당대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치열한 대응력을 예술적 차원으로 상승시켜 서정시의 전범을 이루었다. (1924년 신경향파 저항시)

 

 유적지

1) 상화시비(대구 달성공원) : ‘나의 침실로’ 제11연 새김

2) 생가(대주 중구 서문로)·거주지(대구 중구 계산동 2가 84) : 생가는 흔적이 없어졌으나 거주 한 한옥은 거의 보존되어 있다.

3) 이상화동상(대구 두류공원)

---  시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통곡>

 

이색(1328-1396, 목은·牧隱)

· 경기도 여주 생. 여말 삼은 중 1인

· 14세에 진사. 부친은 이곡, 16대손은 이상재 --- 󰃫 < 이곡>

· 21세 때 원나라의 정시(庭試)에 뽑히어 국사원 편수원을 지내고 귀국, 벼슬이 판문하부에 이 르고 한산군에 봉군됨.

· 문하에 정도전, 김종직, 권근, 변계량 배출 · 그의 스승 이제현과 쌍벽을 이룬 대문장가로 호 평을 받았다.

· 69세 되던 해 여강에서 뱃놀이 하던 중 급사한 것으로 전해짐

 

 유적지

1) 문학비(신륵사, 여주읍 상리 소재)

2) 이색신도비(문헌서원,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기린봉 아래)

---  시조 <백설이 자진 골에 -- >

 

이성계의 업적

1. 국호의 제정

· 즉위와 동시에 신정강령(新政綱領) 17조 발표

“모든 제도는 전기(前期)의 고사(故事)를 따른다.”

· 그 후 한상질(韓尙質)을 명 태조에게 보내, ‘조선(朝鮮)’, ‘화령(和寧)’ 중 조선을 국호로 택 할 것을 승인 받은 (1394년)

2. 왕호(王號) 문제

· 조반(趙胖)을 명에 보내,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의 칭호를 받았으나, 태종 원년(1401) 에 가서 고명(誥命-승인장)과 인신(印信-도장)을 받음

3. 통치규범

· 조선경국전, 경제6전 편찬

4. 숭유억불정책

5. 한양으로 천도(遷都)

6. 관부의 개편

  등극과정

홍건적 격퇴(1361) 󰠜󰠜󰠜󰋼 왜구 토벌 (1380) 󰠜󰠜󰠜󰋼 위화도 회군(1388) 󰠜󰠜󰠜󰋼 공양왕 옹립(1389) 󰠜󰠜󰠜󰋼 전제개혁(1391) 󰠜󰠜󰠜󰋼 역성혁명(1392)

---  < 태조(太祖)>

 

이성복(李晟馥, 1952~ )

· 시인.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인문과 및 동 대학원 불문과 졸업

· 1977년 [문학과 지성]에 시 <정든 유곽에서> 발표

· 1980년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 지성사) 출간

· 1982년 제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 1986년 시집 [남해금산](문학과 지성사) 출간

· 1990년 시집 [그 여름의 끝](문학과 지성사) 출간

· 1993년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 지성사) 출간

---  < 서울대 불분과~>

---  시 <정든 유곽(遊廓)에서>

 

이성부(李盛夫, 1942- )

· 전남 광주생. 경희대 국문과 졸.

· 1962년 [현대문학]에 <소모의 밤>이 추천 완료, 등단

·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우리들의 양식>과 연작시 <전라도>를 통해 70년대 사회파 시의 흐름 주도.

· 시집 [이성부시집](69), [우리들의 양식](74) 등

---  시 <벼>

 

이수광(李睟光, 1563-1628, 지봉)

· 본관 전주 이씨. 조선 중기 문신·학자

· 선조 15년(1582) 별시 문과에 ‘병과’ 급제, 이조 좌랑, 대사성 등 역임

· 인조 반정(反正) 이후 도승지, 대사헌, 이조판서 등 역임

· 임란을 전후하여 명나라에 여러 차례 왕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리치를 만나고 돌아와 천주 교와 함께 서양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운동의 선구자가 됨

· 저서 : [지봉유설] 등

 

  유적지

1) 인물비(전남 순천대학교 교정)

2) 지봉서원(순천 금곡동) : 이수광을 제향한 서원이나 지금은 전하지 않음

 

이수복(李壽福, 1924-1986)

· 전남 함평생. 조선대학 국문과 졸.

· 1954년 [문예]에 <동백꽃> 추천, 등단

· 오랫 동안 고향 근처 학교에서 교직 종사, 시작(詩作)

· 섬세한 한국적인 정감을 ‘한(恨)의 미학’으로 승화.

· 김소월의 시를 계승한 시인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

· 작품 : <동백꽃>, <모란송>

- <봄비>는 1955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시로 토속적인 어휘 구사와 감각적인 표현으로 한의 정서가 승화되고 있음.

 이수복시비(광주 사직공원 내) : ‘봄비’ 새김

---  시 <봄비>, <동백꽃>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시호·충무공)

· 임란 때 수군 통제사로 활약, 노량해전에서 전사함

---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십년 온 칼이 ~>

 

이승훈(李昇薰, 1942- )

· 강원 춘천생. 한양대 국문과 졸

· 1963년 [현대문학]에 <두 개의 추상>이 추천, 등단

· 경향

- 초기시 : 온건한 비유 구사

- 후기시 : 60년대말부터 과격 분방한 비유

 

이양하(李敭河, 1904-1963)

· 평남 강서 생, 일본 동경 제국대학 영문과 졸

· 영문학자. 수필가. 연희전문, 서울대 교수.

· 1930년경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한 바 있음

· 저서 : [이양하 수필집](1958), [나무](1964)

· 시집 : [마음과 풍경](1962)

 

󰏐 이양하의 문학적 활동

󰇌 현대수필의 개척자 - 서구의 수필(영국 찰스 램,윌터 페이터 등)을 수입, 남구적(南歐的) 정취가 짙은 수필을 많이 남기면서 본격적 수필 토대 마련.

󰇍 주지주의 이론 소개 - 1930년 최재서와 더불어 영국 주지주의 문학 이론 소개. 지적 경향의 수필 씀.

---  문학이론 <예찬적 성격의~ >

---  수필 <나무의 위의(威儀)>, <신록예찬>, <페이터의 산문>

 

이어령(1934- )

· 충남 온양 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

· 문학박사. 서울, 한국, 경향, 중앙, 조선일보 논설위원

· 초대 문화부장관 역임

· 현 이화여대 석좌 교수

· 저서 : [에세이 옴니버스(전5권)], [세계문장대사전(전6권)], [한국과 한국인(전6권)], [문장대백 과사전](전3권) 등

---  < 서울대 출신 ~ >

 

이영도(李永道, 1916-1976)

· 1946년 대구의 [죽순]동인.

· 간결한 언어 구사로 절제된 시조의 아름다움.

· 시조집 : [청저집], [석류], [언약] 등.

· 오라버니(이호우)의 [휴화산]과 [석류]를 묶어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라는 오누이 공동시 조집 발간.

· 유치환과 플라토닉 러브로 일화를 남김

---  < 시조 시인들>

 

이용악(1914-1971)

· 함북 경성 생. 1936년 일본 상지대 신문학과 입학하여 그 때 김동환의 시를 탐독하고 감동을 받았음

· 1935년 [신인문학]에 <패배자의 소원> 발표, 시작 활동 개시함

· 1939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인문평론]에 편집 기자로 근무

· 30년대 후반기 서정주, 오장환과 함께 ‘시삼재(詩三才)’로 불렸음

·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시부위원으로 임화, 정지용, 김광균, 오장환 등과 활동

· 1947년 오장환의 권유로 남로당에 입당, 남로당 서울시 문련 예술과원으로 임명

· 1949년 남로당 서울시 문련 예술과 사건으로 구속, 징역 10년을 선고 받고 복역 중 1950년 전쟁 중에 출감했음

· 한국전쟁 시기에는 전투적이고 호소력이 높은 시 창작(월북)

· 60년대 초반 [조선문학] 부주필을 그만둔 뒤 평양시 창작실에 출근하며 창작에 전념

· 시세계

- 초기시는 모더니즘 영향을 받아 이미지즘 경향, 민족적 생활의 시에서 암울한 세계 인식 의 시로, 광복 후는 이념지향적인 시로 변모함

- 시에 대한 인식 : ‘생활의 거짓없는 기록’으로 봄

- 시집 [분수령](1937) : 피폐한 농촌 현실과 이농(離農), 유랑과 이민, 굶주림과 죽음의 비 참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표출

- 시집 [낡은 집](1938) : 유랑민의 슬픔을 노래

· 주요 작품 : 시집 [분수령](삼문사, 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아문각, 1947), [이용악 시전집](윤영천 편, 창작과 비평, 1988), [이용악 전집](정한모 외 편, 미래사, 1991)

---  시 <낡은 집>, <오랑캐꽃>, <달 있는 제사>

---  어휘 <한(恨)>

---  < 월북문인(越北文人)들>

 

이육사(李陸史, 본성명 이활·李活, 이원록, 이원삼 1905-1944)

· 시인, 독립운동가.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생. 진성 이씨. 퇴계 이황의 14대 손

· 5세 때부터 조부로부터 한문 수학, 그후 신학문 수학, 20세 때 대구 남산동 662 번지로 이사

· 1927년 형(원기), 동생(원조-문학평론가, 원일)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군정서 <의열 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독입운동을 하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검거, 이 때 학생인 원조는 풀려 나오고 3형제는 2년 7개월간 옥고를 치름 (아호인 ‘육사’는 이 때의 수인 (囚人) 번호 64 혹은 264번의 음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29년(26세)에 조선일보 대구 지사를 경영하면서 기자로 활동

· 1930년(27세) 대구격문사선에 연루되어 원일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피검, 6개월간 옥고를 치 르고, 외삼촌의 독립운동 자금관계로 만주에 들어갔다가 군관학교 학생모집을 위해 귀국, 원조 를 포함한 3인을 데리고 북경으로 가는 도중,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3인은 3개월만에 돌아오고 육사는 봉천에 머물렀다.

· 1932년(29세)에 만주의 군관학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입교, 30세 졸업. 31세에 서울서 일본헌병에 피검되는 등 생전 17회 이상 투옥됨

· 데뷔작은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 발표작인 <말>이다. 그후 [조광]지에 <계절의 표정> 을 발표한 1942년까지 약 13년간 작품활동을 함

· 1932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여 등단

· 1937년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등과 [자오선] 동인. --- 󰃫 < 김광균>

·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 투옥.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옥사.

· 이상화, 윤동주와 함께 대표적 저항시인.

· 대표작 : <절정>, <교목>, <광야>, <청포도> 등 한결같이 남성적 어조로 민족사의 창조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음.

· 유고시집 : [육사시집]

· 사후 그가 환갑이 되는 1964년에는 그의 큰조카 이동영(모 전문대교수)이 신석초, 이효상, 조 지훈 등의 협조를 얻어 [육사시집]을 [청포도]로 개제하여 다시 증보 발행하기도 했으며, 1968 년 어린이날에는 안동 낙동강 가에 육사시비를 세웠으며 여기에 <광야>가 새겨져 있다.

· 이육사의 작품 세계

- 초기 : 일제 강점하의 현실 소재, 강렬한 저항의식 - <광야>, <절정>

- 중기 : 실향 의식과 비애 표출 - <청포도>, <자야곡>, <교목>

- 후기 : 향토색을 띤 목가풍의 서정시로 높은 인간애 - <황혼>

---  시 <꽃>, <광야(曠野)>, <절정(絶頂)>, <청포도>, <교목(喬木)>, <자야오가>

 

󰏐 김광균(金光均)과 이육사(李陸史)

일제 강점 하의 후반에 활동했던 김광균, 이육사는 모두 ‘어둠’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예로 김광균의 <설야>, <와사등>, 이육사의 <광야>, <절정>을 들 수 있다. 이는 30년대의 불안한 상황의식을 반연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 김광균 : 지향없는 방황의식, 불안의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휴머니즘

- 이육사 : 독립투사로서의 강렬한 저항 의지

 

󰏐 육사의 시어(詩語)

 

󰊱 백철

① 강렬성, ② 전통성(고전성), ③ 수식성, ④ 광활성, ⑤ 다양성(한자어, 서구식 외래어, 신어(新語), 방언, 어미의 활용기교)

 

󰊲 정한모

① 강렬한 시어 선택에 의한 저항적, 투쟁적 이미지 형성, ② 원대하고 광활한 풍모의 수사법 활용에 상응하는 심미적 표현 가치의 획득, ③ 세련된 성형의식과 리듬에 대한 배려로 하여 시의 내면적 의미와 아울러 예술적 가치를 확대시키는 원동력을 이루고 있음

 

이은상(李殷相, 1903-1982, 노산·鷺山)

· 경남 마산생. 1922년부터 작품활동 시작

· [조선문단]에 시를 발표, 등단.

· 국민문학파의 한 사람.

· <양장시조>라는 두 행으로 된 새로운 시형 모색.

 

이이(李珥, 1536-1584, 호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자 숙헌·叔獻)

· 강릉생. 조선 중종, 선조 때의 학자.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 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 라 일컬어졌다.

· 승지, 부제학, 대사헌, 대제학, 호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내외 요직을 역임

· 퇴계 이황과 더불어 ‘주리파’, ‘주기파’의 양대 산맥을 이룸

·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 ‘해동공자’라 칭송되며 문묘에 배향됨

· ‘십만양병설’을 헌책한 일은 유명함

· 저서 : [율곡전서], [격몽요결], [자경문], [경연일기], [정언묘선]

· 시조 : <고산구곡가>(일명 석담구곡가>

 

 관련 유적지

1) 자운서원(紫雲書院)(통일로, 법원읍 동문리 소재) : 이이를 배향해 놓은 서원

2) 화석정(법원리 북서쪽, 임진나루 위) : 율곡의 선조 이명신이 건립. 어렸을 때부터 틈이 있 을 때마다 이곳에서 제자들과 문답, 연구를 하였다고 함

3) 오죽헌(보물 제165호) : 강릉시청 북쪽 3킬로미터 지점

4) 묘 : 서울에서 세상을 뜬 그는 자운산 선영에 묻힘

5) 기념식수비(청주시 청원군청 내) : 1571년 청주목사로 부임, 향풍 순화에 힘썼으며, 퇴임시 기념으로 식수했으나 나무는 사라지고 비석만 남아 있다.

---  시조 <고산구곡가>

---  어휘 <가을>( 이이 한시 ‘화석정(花石亭)’ )

---   <이황>, <백광홍>, <성혼>, <송시열>

 

이익(李瀷, 1681-1763, 호·성호)

· 경기 여주생. 조선 영조 때 실학자

· 숙종 32년(1707) 형 이잠이 당쟁으로 희생, 관계에 나가지 않고 안산 첨성촌에 거가하면서 평생을 학문에 전념.

· 유교의 고전과 성리학을 두루 공부함. 西學까지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감

· 실학자답게 모든 학문은 실제 사회에 유용해야 한다고 주장.

· 사농합일(士農合一)을 주장

· 저서 : [성호사설(星湖僿說)], [성호문집]

 관련 유적지

· 묘지 : 서울 지하철 4호선 상록수역 하차, 버스를 타고 일동의 중앙병원 입구를 지나 10분 정도

 

이인직(李人稙, 1862-1916, 국초·菊初)

· 경기도 이천 생. 일본 동경대 정치학교 수학

· 신소설 작가. 언론계, 정치 참여

· 1906년 [만세보] 주필, <혈의 누> 연재

· 1907년 이 신문 매수하여 [대한신문] 창간

· 1908년 소설 <은세계>를 각색하여 신연극으로 원각사(圓覺社)에서 상연

· 국권피탈 때 이완용을 돕고 대정(大正)(다이쇼) 일본왕 즉위식에 헌송문(獻頌文)을 바치는 등 친일 행동을 함. 한편 처음으로 산문성이 강한 언문일치에 가까운 문장으로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가 있다.

· 작품 : <귀(鬼)의 성(聲)>, <혈의 누>, <치악산(雉岳山)>, <모란봉(牡丹峰)> 등

---  신소설 <혈의 누>, <은세계>

 

이장희(李章熙, 1900-1929, 고월·古月)

· 대구생. 시인. 일본 경도(교토) 중학 졸업

· 1924년 [금성]지에 <청천(靑天)의 유방(乳房)>, <실바람 지나간 뒤>,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 등 발표.

· 은유(metaphor)와 직유(simile)를 통해 예리한 감각적 표현을 함.

· 복잡한 가정환경과 친일파인 부친과의 갈등 때문에 고민하다가 28세로 음독 자살하였다.

· 그의 유고는 백기만(1901-1967)이 편찬한 [상화와 고월]에 정리됨.

· 작품 : <동경(憧憬)>, <고양이의 꿈>, <봄철의 바다>, <눈은 나리네>, <연(鳶)>

 

이정보(李鼎輔 1693-1766, 삼주)

· 연안 이씨. 조선 중기 문신

· 벼슬은 이조·예조판서에 이름.

· 아첨을 모르는 올바른 주의(奏議)로 직책에 충실함

· 시조 78수를 남겼으며 한시의 대가였음

 묘, 묘비 : 경기도 이천군 율면 신추2리 소재(정경부인 여흥 민씨와 합분)

---  시조 <국화야, 너난 어이 삼월 춘풍 다 지내고>

 

이정환(李廷煥, 1604-1671, 송암·松巖)

· 조선 중기 인조 때 학자. 시인. 본관 전주 이씨

· 1633년 생원시에 급제했으나 병란 후 국치(國恥)를 보고 벼슬 단념, 시작(詩作)으로 세월 보냄

· 병자호란을 통분하여 지은 <비가(悲歌)> 10수가 한역시와 함께 유고(遺稿)에 전한다.

· 저서 : [송암유고]

---  시조 <풍셜 석거친 날에 뭇노라 北來使者(북래사자)>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익재)

· 본관 경주. 고려 말기 학자. 백이정의 문인.

· 충선왕 이후 공민왕에 이르는 6대 임금을 모심

· 충숙왕 때 원나라에 설치한 ‘만권당’에서 조맹부와 교유,

· 귀국 후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림

·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름

· 외교 문서 작성에 탁월한 재능을 보임

· 저서 : [익재난고] ‘소악부(小樂府)’에 17수의 고려 민간 가요를 한시 7언 절구로 번역하여 남 겨 고려 가요 연구에 이바지.

· [역옹패설]을 통해 시화 비평에도 기여

 

  유적지

1) 이제현 영정(청주 미원면 수락영당 내)

2) ‘정과정곡’의 소악부체 보관

---  정지상 한시 <송인> 󰏐 논평

 

이조년(李兆年, 1269-1343,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 고려시대 문신. 본관 성주 이씨. 고려 충렬왕 20년(1294)에 진사로 문과 급제.

· 38세 때 비서승이 되어 왕을 원(元)나라에 호종(扈從)했을 때, 충렬왕 후계자의 세력 다툼 때 문에 말려 들어 억울하게 유배되기도 했음.

· 그 후 석방, 13년간 고향에 은거함.

· 충혜왕의 음탕함을 여러번 충간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곧, 사직함. 후에 성근익찬경절공신(誠 勤翊贊勁節功臣)이 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l수가 전한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시조 <이화에 월백고 은한이 --- >

 

이존오(李存吾, 1341-1371, 석탄·石灘)

· 고려 공민왕 때 직신(直臣)

· 신돈을 통렬히 비난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거 면책을 당하고 이로 인해 하 옥됨.

· 벼슬을 내놓고 석탄으로 물러나 신돈의 횡포를 비난하다 죽었다. (그의 사후 석 달만에 신돈 이 주살되자 왕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 여겨 성균관대사성을 추증함)

---  시조 <구룸이(구름이) 무심 말이 아마도 허랑다>

 

이청준(李淸俊, 1939- )

· 전남 장흥군 대덕면 출생. 서울대 독문과 졸

· 1965년 제7회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단편 <퇴원(退院)> 당선, 데뷔

· 1967년 <병신과 머저리>로 제13회 동인문학상 수상

· 이후 <이어도>, <잔인한 도시>, <살아 있는 늪> 등으로 이상문학상 등 수상

· 1986년 한양대 인문대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

· 1978년 잔인한 도시로 이상문학상 수상

· 1990년 자유의 문으로 이산문학상 수상

· 1993년 소설 서편제 출간

· 경향 : 지적 방법으로 현실 세계의 부조리, 불합리 정밀하게 해부,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 과 진실에 대해 성찰하는 경향을 보임

· 작품 : <매잡이>, <당신들의 천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 <자유의 문>, <소문의 벽>,

---  소설 <병신과 머저리>, <선학동 나그네>

---  < 베스트 셀러(best-seller) 작가들>

 

󰏐 [문학] 이청준씨, 판소리 다섯마당을 소설로 형상화

 

소설가 이청준씨가 우리 민족의 정신과 삶의 원형을 고스란히 담은 판소리 가락을 소설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나섰다. 판소리 흥부가를 바탕 으로 한 판소리소설 [놀부는 선생이 많다]와 수궁가를 테마로 한 [토끼야, 용궁에 벼슬 가자](열림원)를 펴낸 작가는 옛날 이야기나 전래 동화로 이 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동화나 우화 혹은 풍자소설의 형식으로 새롭게 조명했다. 그는 내년초까지 판소리 5마당인 심청가-춘향가-적벽가-옹고집 전 등을 바탕으로 한 판소리소설을 완간할 계획이다.

 

이씨는 {판소리 이야기는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정도의 교훈적인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오묘한 됨됨이와 세상살이의 깊은 이치를 담고 있다}며, {전통 판소리의 구절구절을 자세히 살피다보니 그 밑에 깔린 초인간적인 힘이나 하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놀부는 선생이 많다]에 등장하는 흥부와 놀부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선과 악을 상징하며, 작가는 이들을 통해 인간은 어떤 모습 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순진한 흥부의 모습이 위태위태하고 욕심쟁이 놀부마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까닭은 선과 악이 보태어지고 보완되어 인 간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토끼야, 용궁에 벼슬 가자]는 서로 속고 속이는 토끼와 자라의 이 야기를 통해 인간관계의 여러 모습을 풍자했다. 서로 상반된 성격의 토끼 와 자라는 극단적인 인간유형들이며 , 자라처럼 살 것인가와 토끼처럼 살 것 인가는 현대인에게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다. 우직한 곰과 권모술수에 능한 여우 등 산속의 짐승들도 인간세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흥부가 박을 타는 장면에 [스르렁 스르렁 톱질이야, 허이어 루 톱질이야, 이 박을 타거든 아무것도 나오지 말고 흰 쌀밥 한 통만 가 득 나와 주소…. 스르렁 스르렁 톱질이야, 당겨주소 밀어주소…]라는 우 리말 가락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라의 눈에 비친 토끼를 [두 귀는 쫑긋, 눈은 도리도리, 허리는 늘씬, 꼬리는 몽툭…]이라고 묘사하는 등 판 소리의 유장한 가락을 되살리기도 했다. 이씨는 {심술꾸러기 놀부와 마음씨 착한 흥부, 약삭빠른 토끼와 충 직스런 자라 등은 우리를 웃기고 울리지만, 결국 우리는 이들을 모두 포용 하고 사랑하는 것 아니냐}며, {이는 인간세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우리 민족이 넓은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어 린이들이나 어른 할 것 없이 판소리나 판소리 이야기를 처음부터 제대로 즐겁게 다시 만나고, 거기에서 두고두고 우리 삶의 지혜와 위안을 얻어 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태극(李泰極, 1913- , 월하·月河)

· 시조 시인. 강원 화천생

· 시조에 대한 창작 열의는 30년대부터 가졌으나, 1955년 [한국일보]에 <산딸기>등 발표하면서 본격 등단

· 1960년 시조 전문지 [시조문학] 창간.

· 1965년 한국시조작가협회 창립에 산파 역할

· 이화여대 교수 역임,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네 차례 역임

· 대표작 : <산딸기>, <인간가도>(1964), <나상(1966년)>

· 시조집 : [월하시조집], [꽃과 여인] 등

· 저서 : [시조개론], [현대시조선총], [시조연구논총], [고전국문학연구논고] 등

  ‘산딸기’ 시조비 :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 기념비에서 100미터

---  시조 <산딸기>, <삼월은>, <서해상의 낙조>

 

이태준(李泰俊, 1904- ?, 상허·尙虛)

· 소설가. 강원도 철원 생 일본 상지대 수학

· 1925년 단편 <오몽녀>를 [시대일보]에 발표, 등단

· ‘구인회’ 회원.

· [개벽] 기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역임

·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하층민의 삶과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1930년대 대표 작가

· 작품

- 단편 : <복덕방>, <가마귀>, <밤길>, <해방 전후>, <영월영감>, <농군>, <돌다리>, < 토끼 이야기> 등

- 장편 : <제2의 운명>, <왕자 호동>, <청춘 무성>, <황진이> 등

· 수필집 : [무서록]

· 저서 : [문장강화], [상허문학독본] 등

· 1939년부터 (시)정지용, (시조)이병기와 함께 [문장]지 ‘소설’ 부문 추천인.

 

  유적지

1) 생가터(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율리면 614 소재, 민간인 통제구역)

2) 거주지(서울지방문화재 11호, 서울 성북구 성북동 248번지)

---  소설 <해방전후>, (인물) <월북문인들>

 

󰏐 관련기사

 

월북 작가 이태준의 희곡 2편이 대학로 마로니에 소극장에서 연속 공연되고 있다. 이태준의 [어머니]와 [산사람들]이 그것. 극단 민예(대표 공호석)가 월북 작가 창작극 부활 시리즈 2번째로준비, 탄생 90주년과 때를 맞추어 무대에 올렸다.

이태준은 30년대부터 활발히 창작 활동을 펴, [오몽녀], [아담의 후예], [호랑 할머니], [왕자 호동], [황진이] 등 주옥 같은 단편소설을 남겼지만, 월북작가라는 멍에로 인해 작품세계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그는 월북 후 ‘퇴폐적 부르주아 문학가’로 몰려 53년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공연되는 두 작품 모두가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어 최근의 여러 충격적인 사건들에 경종을 울려 주는 점에서 더욱 의미있는 공연으로 평가 받고 있다.

 

작품 [어머니]는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려고 무리해서 집을 마련했던 장남이 겪는 마음 고생과 이를 감싸주고 힘을 북돋워 주는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고 있으며, [산사람들]은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는 화전민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이하윤(異河潤, 1906-1974, 연포·蓮圃)

· 강원도 이천 생. 일본 호세이대학 졸.

· 중외일보, 경성방송국을 거쳐 광복 후 좌익 프로문학에 반대 입장으로 서정시를 창작

· 해외문학파의 일원으로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 각종 번역 작업에 힘을 쏟음

· 서울대학교, 덕성여대 교수 역임

· 시집 : 첫시집 [물레방아](1939), [실향의 화원], 역시집 : [불란서 시선]

· 문학비(1984년 건립) : 경기도 용인 한국민속촌 내, ‘연포시피’ <물레방아> 새김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백사·白沙)

· 선조 때 문신. 벼슬이 영의정.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봉해짐

· 인목대비 폐비사건 반대하다 유배

---  시조 <철령(鐵嶺) 노픈 峯(봉)에 ~ >

 

이해인(李海仁, 1945- )

· 부산생. 올리베타노 성베네딕트 수녀원 입회.

· 필리핀 세인트 루이스대 영문과, 서강대 종교학과 졸.

· [소년]에 동시 <하늘>, <아침>(1970) 등이 추천 완료, 문단 등단

· 시집 [민들레의 영토](1976), [내 영혼에 불을 놓아](1979)

---  시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 베스트셀러 작가>

 

이현보(李賢輔, 1467-1555, 농암·聾巖)

·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연간

· 4차례 사화 겪음

· 강제적 왕권교체기 : 중종 반정(1506)

- 의미 : 당시 사회의 갈등과 투쟁은 개인의 도덕적 완성을 기초로 한 왕도정치 구현에 장 애가 됨

· 저서 [농암집], 작품 <어부가>

---  시조 <농암에 올아보니~>, <이 듕에 시름업스니~>

---  < 맹사성>

 

 

이형기(李炯基, 1933- )

· 시인. 경남 진주생. 동국대 불교과 졸

· [연합신문], [서울신문] 기자, [대한일보] 문화부장 역임

· 1950년 진주농림학교 재학중 [문예]지 추천으로 등단

· 1963년 첫시집 [적막강산(寂寞江山)]으로 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 제시

· 시집 [돌 배게의 시](1971), [꿈꾸는 한발](1975), [풍선심장](1981) [보물섬의 지도](1985)

· 한국문학가협회상(1956), 문교부 문예상(1966), 한국시인협회상(1976), 한국문학작가상(1982), 윤동주문학상

· 언론계 종사 - [국제신문] 논설위원, 편집국장 역임

· 부산산업대 교수 역임, 현 동국대 국문과 교수

---󰃫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 항목 <‘나무’에 대하여> ), <낙화(落花)>

 

󰏏 시 세계

 

(1) 초기시

① [적막강산]으로 대변되는 자연친화의 순수서정시

② 삶과 인생을 긍정하고 자연섭리에 순응하는 수용(受容)의 미학

⇨ 순수서정, 낭만주의, 감성적, 동양적, 노년기

 

(2) 후기시 : 즉물적, 날카로운 감각, 격정적 표현

① [돌베게의 시] 이후 [꿈꾸는 한발]까지 질적 대전환

② 맑고 투명한 시어가 음산, 암울한 어둠의 시어로 바뀜

⇨ 데카당스(decadence, 퇴폐), 상징주의, 지성적, 서양적, 청년기

③ 자연과의 심한 단절, 불화현상

 

󰏐 허무의 형상화

평소 내가 즐겨 다루는 주제의 하나의 허무이다. 이 시(편집자, <모비딕>)도 그 허무를 형상화한다고 해본 것의 하나에 속한다.

 

허무는 나를 절망케 하지만 동시에 나를 꿈꾸게 한다. 허무는 별들이 거기서 죽고 거기서 태어나는 블랙홀이다. 허무를 통해 나는 영원도 알게 되고 영원의 부질없음도 알게 되었다. 한낱 티끌에 불과한 인간으로 하여금 삼천대천 세계를 만들어 갖게 하는 것이 허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허무는 은총이고 제기랄이다.

 

이호우(李鎬雨/爾豪愚, 1912-1970)

· 경북 청도생. 시조 시인. 경성 제일 고보

· 1940년 [문장]에 <달밤>을 통해 등단.

· 생명의 의지를 주된 사상으로 관념적 낭만주의 개척.

· 시조집 : [이호우시조집](1955), [휴화산](1968)

  이호우시비(대구 앞산공원) : ‘개화’ 새김. 청도 출생이지만 주로 대구에서 활동

---  시조 <살구꽃 핀 마을은~>, <개화>

---  <이영도>(이호우 오누이), <시조 시인들>

 

이호철(李浩哲, 1932- )

· 함남 원산 생. 고 3때 인민군으로 동원되었다가 고리키의 문고본 에세이 한 권을 들고 1950 년 12월 9일 LST로 부산에 상륙, 월남함

· 이후 항만 노동자로 일했으며 광복동의 밀다원 다방을 드나들기도 함

· 1955년 [문학예술]에 <탈향>으로 등단

· 민족분단의 문제를 ‘문’으로 상징화한 <판문점>으로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 소설 <닳아지는 살들>로 제7회 동인문학상 수상

· 시인 박재삼과 50년대 초부터 단짝이었음

· 작품경향 : 월남인들의 실향의식을 바탕으로 남한의 현실을 예리하게 풍자

· [문단골 사람들-이호철의 문단일기](프리미엄 북스 간행)

· 한국소설가협회 대표위원

·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 숙명여대(총장․이경숙)가 창학 91년 만에 처음으로 [남학생] 졸업생

 

숙명여대는 23일 학교 중강당에서 창학 91주년, 개교 59주년 기념식을 갖고 소설가 이호철(65)씨에게 명예문학사 학위를 수여했다. 숙대는 {이씨는 분단 문학 분야에서 탁월한 작품을 남겨 한국통일문화연구와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기여해 명예 문학사 학위를 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1949년 원산고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인 이씨는 한국소설가협회 대표위원을 지내고 현재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과 방송위원회 위원으로있다.

 

이황(李滉, 1501-1570, 호· 퇴계·退溪, 자 경호·景浩)

· 예안생, 조선 중종, 명종 때 유학자, 문신. 자는 경호, 계호.

·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28 년 진사가 되고 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 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39년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 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 人)으로 문학(文學)․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 다.

· 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 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52년 대사성에 재임, 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 다.

· 일생을 통해 학문에 몰입하여 후세 사림들의 큰 귀감이 됨

·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 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 정주의 성리학 체계를 집대성, 이기이원론, 사칠론을 중심사상으로 함

· 문묘에 배향, 시호(諡號)는 문순

· 저서 : [퇴계전서], [주자서절요], [사서석의], [심경석의], [논사단칠정서]

· 작품 : 시조 <도산십이곡>

---   <조식>(영남문학의 거두), <이이>

---  시조 <도산십이곡>

 

이효석(李孝石, 1907-1942, 가산·可山)

· 소설가. 강원도 평창생. 제일고보, 경성제대 영문과 졸업

·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 발표, 등단

· 함북 경성농업학교,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편 생활

· 초기에 ‘동반자(同伴者) 작가’로 활동 : 단편 <도시와 유령>(1928)을 발표

· 1933년 구인회(九人會) 회원으로 참가.

· 작품 경향의 변화

- 초기 : 주로 도시 빈민층의 비참한 삶을 다룸, 사회 모순 비판

(<도시와 유령>, <행진곡>)

- 후기 : 경향성에서 벗어나 자연과 심미의 세계로 몰입

(1933년 <돈(豚)>([朝鮮文學] 창간호) 발표 이후 <메밀꽃 필무렵>, <산>, <들>, <화분 > 등)

 

  유적지 : 영동고속도로 장평 인터체인지(원주를 지나 강릉방면, 영동제1터널 통과한 후 약 10분 거리) 진출

1) 생가터 : 평창군 봉평면 창동 4리(남안동)

: 강원도 평창군이 확정한 <봉평 메밀관광마을 육성사업 추진계획>에 따라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된 평창군 봉평면 창동 4리(남안동) 이효석의 생가로부터 물레방앗간까지 약 1km 사이 에 1만 5천 평규모의 메밀밭 조성(95년 6월)

2) 흥정천(일명 봉평천) : 소설 <메밀꽃필무렵>에서 허생원이 물에 빠져 동이에게 업혀가는 냇물

3) 가산공원 : 봉평중학교 맞은편

4) 물레방앗간, 작품 속의 성씨처녀 양각비 : 1992년 10월 건립 ‘메일꽃필무렵’ 일부 새김

---  소설 <메밀꽃필무렵>, <돈(豚)>, 수필 <화초>

 

이희승(李熙昇, 1896-1989, 일석·一石)

· 국어학자(시, 수필) 경기 광주생

· 경성 제대 조선어 문학과 졸

· 1942년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름

· 서울대 교수 · 학술원 회원

· [동아일보] 사장

 

󰏐 일화(逸話)

서울대에는 학문적 업적이나 기이한 행동으로 逸話(일화)를 남긴 교수들이 많다. 일석 선생은 키가 145cm밖에 안 되는 그야말로 5척단구였다. 강단에 서서 손을 뻗쳐 쓴 글씨가 흑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다. 특이한 외모와 함께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꼬장꼬장한 성품. 그는 2시간 연장 강의도 정시에 들어와 정시에 끝내면서 중간에 휴식시간을 주지 않았다. 강의실 밖에서 돌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격렬한 데모가 일어나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진행했을 정도로 수업에 철저했다. 한글전용론에 맞서 죽을 때까지 국한문 혼용을 고집하기도 했다.

<딸깍발이>, <대추씨>,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지조> 등은 그로부터 비롯됐다.

 

임옥인(林玉仁, 1915-1995)

· 원로 여류소설가. 80세 일기로 별세(1995.4.4)

· 함북 길주에서 태어나 40년 [문장]지를 통해 데뷔, 건국대 교수, 크리스천 문인협회장, 여류문 학인 회장, 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

· 창작집 [후처기], 장편 [그리운 지대], [월남 전후] 등을 남겼다.

· 자식이 없었던 임씨는 1993년 남편 방기환 씨가 사망한 이후 혼자 지내왔으며, 장례는 조카 들이 치렀다.

 

󰏐 타계한 임옥인씨, 문단의 「신여성 1세대」로 활약

4일 새벽 타계한 임옥인씨는 40년대 [문장]지로 데뷔했던 마지막 세대로 해방전후 우리 소설에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를 담고자 노력했던 원로 작가다.

 

임씨는 함북 장흥에서 태어나 일본 나라 여자고등사범학교에 유학한 후 모교인 영생여고보 교사로 활동했다. 39년 [문장]지에 단편 <봉선화>가, 이듬해 <고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으며 선배 작가 박화성, 최정희씨 등과 함께 문단의 ‘신여성 1세대’로서 활약했다.

 

임씨는 대표 단편 <후처기>, <전처기>등을 통해 ‘여성들의 시각’을 담아낸 작품들을 문단에 선뵀으며 대표 장편 <월남전후>에서는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소박한 삶을 상실한 여성들을 그려내기도 했다.

 

60년대이후 신문연재소설로 인기를 누렸으며 10여편의 장편과 60여편의 단편을 남겼다. 또 <월남전후>등의 작품으로 아시아자유문학상 한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지난 75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는 기독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고백하는 수필집들을 펴내왔다.

 

임제(林悌, 1549-1587, 백호, 겸재)

· 본관 나주. 조선 선조 때 시인

· 1575년 탕음부(蕩陰賦)와 유독시(留犢詩)로 진사 3등급에, 1576년에 대과 급제

· 아부하지 않는 천성으로 인해 벼슬운은 없었으나 당파 싸움을 개탄, 명산을 찾아 시문을 즐 기며 호방하게 즐기다 37세에 요절함

· 문집 : [백호집], [수성지(愁城誌)],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花史] 등

 유적지-백호임제선생시비·묘(전남 나주시)

---  시조 ‘북천이 맑다거늘 우장 없이 길을 가니’ <언어유희>,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  < 황진이>

 

임춘(林春, ? - ?, 호 서하)

· 본관 서하. 고려 인종 때 문신

· 여러 차례 과거 낙방, 이인로 등과 함께 강좌칠현의 한 사람으로 한문과 당시에 능했음

· 정중부의 난 때 강남으로 피난, 겨우 목숨을 보전함

· 가난하고 불우한 일생을 보내며 현실에 대한 불만을 문학으로 표현했다.

· 문재는 뛰어났으나 30세에 세상을 떴다 함.

· [동문선]에 7언고시 ‘홍천원에게’, 전(傳) <국순전>, <공방전> 등이 실려 전함

· 작품 :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 <서하선생집> 등

---  가전 <국순전>

 

임포(林逋)

· 송나라 때의 시인

· 절강성에 있는 ‘서호(西湖)’에 은거하며,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아(매처학자, 梅 妻鶴子) 살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 縞호衣의玄현裳상이 半반空공의 소소 니,

西셔湖호 녯 主쥬人인을 반겨서 넘노 .”

--- 정철 <관동별곡>

 

임화(1908-1953, 본명 인식)

· 카프의 대표적 시인

· 80여편 가까운 시와 200편이 넘는 평론을 남긴 현대시사와 비평사의 중요한 위치

· 1946년 월북했으나 1953년 미제 스파이라는 혐의로 사형당함

· <네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 등 단편 서사시 개척

--- 시 <네거리의 순이>, < 월북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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