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국어학습사전 / 문인( ㄴ~ㅅ)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나도향(羅稻香, 1902-1927, 본성명 나빈·羅彬)

 

· 소설가. 서울 생

· 1922년 홍사용, 현진건과 함께 [백조(白潮)]동인.

· <젊은이의 시절>,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 등 소년적인 감상에 젖은 단편 발표

· 그후 감상주의 청산, <뽕>, <벙어리 삼룡이> 등 냉정한 작가적 안목으로 어두운 현실을 묘 사, 건강한 리얼리즘의 세계에 도달, 결핵으로 요절.

 

남구만(1629-1711, 호 약천·藥泉)

 

· 조선 숙종 때의 소론의 거두

·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역임

 

남이(南怡, 1441-1468) 장군

 

· 의령 생

· 세조 때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등과 함께 야인을 정벌하기도 했음

- 정해서정(丁亥西征, 1467)

· 태종(太宗)의 외증손으로 이시애의 난에 용맹을 떨침

· 28세에 병조판서 역임

· 유자광의 무고로 예종 즉위년(1468)에 옥사(獄事)로 죽음

 

백두산석 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 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 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 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노신(魯迅, Lu Hsn, 1881-1936, 루쉰, 본성명=주수인)

 

· 절강성 선비 집안 대가족의 맏아들로 태어남. 성씨는 주(周), 이름은 수인.

· 1898년(17세) 남경으로 건너가 기관과 장학생으로 강남 수사학당에 들어감

· 1909년(28세) 절강의 고급과 초급 사범학교 생리학 및 화학선생이 됨

· 신임교감에게 불만을 품고 사직한 뒤 귀향, 소흥 중학당의 생리학 겸 교감이 되고 식물학을 연구함

· 1918년(37세) <광인일기>를 써 노신이라는 필명으로 [신청년]에 발표

· 1920년(39세) 북경대학 및 북경고등학교 강사 겸임. 중국소설사 강의

· 1921년 <아Q정전(阿Q正傳>을 파인(巴人)이란 이름으로 [신보부간]에 연재함

· 1936년(55세) 어깨와 가슴에 통증, 천식, 위병, 늑막염 등으로 고통을 겪다가 지병으로 사망

· 홍구공원에 노신기념관 건립

---  소설 <아Q정전(阿Q正傳>

 

󰏐 중국에 노신 열풍… 60주기 맞아 반봉건사상 관심끌어

 

중국에 때아닌 노신(魯迅) 열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중국현대문학의 거장이자 혁명시기의 사상가이기도 한 노신의 작품들이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가 하면 노신의 두상을 새긴 배지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인민문학출판사가 지난 81년부터 새로 주석을 달아 펴내고 있는 노신전집은 중판을 거듭할 때마다 수만질이상씩 팔린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94년 이전에 찍어낸 책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한 조사에 의하면 노신전집은 금년도 상반기 10대 베스트셀러중 4위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다른 베스트셀러들이 수십元(한화 수천원)짜리 단행본인데 반해 노신전집은 무려 3백95元이나 하는 비싼값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금년도 최고 베스트셀러인 셈이다.

 

대표작 「阿Q正傳(아큐정전)」은 해외로 번역출판된 것만도 10만권 이상이다. 노신열기는 출판계만의 현상이 아니다.

상해(上海) 홍구공원에 위치한 노신기념관은 금년들어 방문객이 몰리기 시작, 지난 5월1일에는 1천여명이 다녀가는 신기록을 세웠다. 또 노신이 1923년부터 26년까지 교사로 재직했던 북경(北京 )158중학교는 최근 교명을 노신중학으로 고쳤다.

 

이같은 노신열기에 대해 북경대의 한 교수는 『금년이 노신서거 60주년인데다가 중국인의 의식과 사고방식이 아직도 봉건성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제기되면서 노신의 깨우침이 새삼스레 중국인의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 암흑 속에서 광명의 미래를

 

노신의 문학 세계는 1927년을 기점으로 크게 두 시대로 분수령을 이룬다.

 

전기시대 후기시대

· <단편시대> · <잡감문(雜感文)시대>

· 계몽적, 사실적 인생문학 · 사회비판, 문학비평을 전제로 한 정치문학

· 전통적 애수, 낭남, 풍자 · 맵고 신 정공적인 표현

 

만년의 노신은 중국의 <고리키>라 할 정도로 많은 청년 작가들로부터 숭앙을 받았다. 지병으로 자주 병상에 드러누우면서도 집필을 쉬지 않았던 노신은 세상을 뜰 때 당시 1만여 명의 군중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정도로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노신의 작품들은 대개 짤막짤막한 단편이지만 그 속에 깃든 사상성과 예술성으로 인해 그 생명력은 어느 작품보다도 길다. 노신의 문학은 혁명을 위한 문학이지만, 안이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향기롭고 위대한 문학이다. 작품 속에서 그리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슬로건이나 말뿐인 지식인 작가의 허위가 아닌, 진실한 생활, 눈부신 투쟁, 약동하는 맥박, 뜨거운 정열, 그리고 상승하는 인간의 희망이었다.

 

노신의 문학세계는 ‘어둡다’. 그것은 노신을 둘러싼 현실이 모두 생명력을 잃어버린 절망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신은 그 절망 속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극적인 자기확인을 통해 발전적인 의지로 승화시킨다.

 

노자(老子, 604~ ?) : 중국 주나라 때의 사상가. 도가(道家)의 시조. 이름 이이(李耳).

 

1. 신비의 인물 노자

 

생몰 연대가 불분명한 인물 노자는 초나라에서 태어나 춘추말기 주(周)나라에서 국립 도서 관 관리인 정도의 벼슬인 <수장실사(守藏室史)> 자리를 역임한 바 있고, 그 뒤 은퇴하여 [도 덕경]이란 책을 지었다고 한다.

 

노자는 공자를 필두로 하는 유가(유학파)에 대립하는 도가(도학파)의 시조로 꼽히지만 그의 생애는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면이 많다. 노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기는 [사기(史記)]에 노자 에 관해 전해져 내려 오는 여러 가지 설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고, 그 논조에는 ‘아마도’, ‘혹시’ ‘ ~라고 하지만 잘 알 수 없다’는 구절이 있다. 게다가 노자가 160세 혹은 200세까지 살았다는 설까지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비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2. 도덕경에 대해 (제1권이 道, 제2권이 德)

현재의 도덕경은 모두 5천여 자(字)로서 짤막한 경구(警句) 같은 것을 나열해 놓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전국 시대에 많이 사용된 격언이나 속담으로 보이는 것들이 적잖게 포함되 어 있어 도덕경이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의 격언들을 모아 놓은 책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도덕경이 여러 사람의 생각을 담아 놓은 것이라면 문체가 각양각색으로 달라야 하겠지만 실제로 보면 도덕경은 그 문체가 일관되고 있다. 결국 도덕경은 한 사람이 지 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어느 시기에 한 사람의 저자가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 이것을 자기의 언어로 표현하여 고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노자의 도(道)

노자 사상을 도가 사상이라 부르는 이유는 도를 가장 참된 것, 근원적인 것으로 보고 자기 사상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물론 도라는 말은 도가에 속하는 사람들만이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공자만 하더라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할 만큼 도를 중시했다.

 

그러나 노자는 유가의 도를 부정했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 도는 늘 그러한 참된 도가 아니다. -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 道)> 즉, 노자의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러나 말로 표현 할 수 없다고 해놓고 어찌 ‘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에 대한 설을 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는 도가 쉽게 파악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편의상 <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했으므로 노자의 도는 <자연의 길>이며 <인간의 길>은 아닌 것이다.

 

4.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

무위란 말은 억지로 하지 않는 것,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하는 행위를 말한다. 다시 말하여 <인위적인 요인이 없는 행위>인 것이다.

 

우리 속담에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이 그의 사상관을 대변해 준다.

 

5. 아는 게 병, 식자우환(識字憂患)

노자의 무위자연의 사상은 지식, 욕망, 기술, 도덕, 법률 등 모든 문화 내용을 부정하는 생 각을 담고 있다. 이것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처럼 인간의 지적인 힘이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여러 고통에서 벗어나 유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과는 반대된다.

 

지식은 왜 병인가? 우선 지식은 욕망을 살찌우는 원흉이다. 욕망이 비대해지면 어떤 결과 를 낳는가?

 

오색(五色, 청·홍·황·흑·백)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五音, 궁·상·각·치·우)은 귀를 어둡게 하고,

오미(五味,짜고 맵고 달고 쓰고 신 맛)는 입을 마비시키고,

말을 타고 수렵을 하며 즐기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진귀해서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동을 사악하게 한다.

--- 어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노자영(盧子泳, 1898-1940. 춘성·春城)

 

· 시인, 평남 생

· [백조] 동인으로 시단 등장

· [신인문학](43) 창간, 후진 양성

· 시적 경향 : 영탄조의 가락에 감상적인 내용을 담음(소녀적 취향)

· 대표시집 [내 혼이 불 탈 때](1928)

 

노천명(盧天命, 1912-1957)

 

· 시인. 황해도 장연 생. 진명여고보 졸, 이화여전에서 영문학 공부

· 조선 중앙일보 기자

· 1935년 [시원(詩苑)] 동인으로 등단.

· ‘극예술연구회’에 참가 연극 운동을 한 일도 있음.

· 여성다운 섬세한 감각과 우수어린 시풍

· 시집 : <산호림(珊瑚林)>(1938), <창변(窓邊)>(1945), <별을 쳐다보며>(1953), <사슴의 노래 >(1958) 등 총 4권의 시집을 남김

· 문학비, 묘지 :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가톨릭 묘역

· 평생을 독신으로 마침. 일찍이 천주교에 귀의,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세상을 뜸

---  <사슴>, <남사당>, <장날>

 

▲ 부인근로대(婦人勤勞隊) * 항목색인 : 친일문학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 나비인가 //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 彈丸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

한땀 두땀 武運을 빌며 /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 日本의 名譽를 걸고 나간이여 / 훌륭히 싸워 공을 세워주 //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 오늘도 山 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

 

논개(論介, ? - 1592. 성은 주(朱)씨)

 

· 전북 장수 생. 임란 때 목숨을 바친 충절의 명기.

· 장수 현감이던 남편(?, 애인) 최경회(崔慶會)가 경상 우병사가 되어 진주로 근무지가 바뀌게 되자 그를 따라 갔으며, 임란이 일어난 해 왜장 게야무라로스게(毛谷村六助)를 껴안고 진주 남 강에 빠져 죽었음.

 

-유적지

1) 의암사(진주 촉석루) : 논개사당.

2) 논개비(전북 장수군 의암사 입구) : 수주 변영로의 시 ‘논개’ 새김

 

-니이체(Friedrich Wihelm Nietzsche, 1844-1900, 독)

 

· 목사인 카알 루드비히 니이체의 장남으로 출생(아버지 31세, 어머니 18세 때)

 

❶ 생(生) 철학

 

① 운명애(運命愛)

그는 운명을 사랑할 것을 역설했다. 운명이란 인간의 자유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인간에 게 부여되어 가지고 인간의 존재와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힘 또는 결정을 의미한다.

 

② 권력의지(權力意志, Will zur Macht)

쇼팬하우어의 맹목적 생존의지 대신 권력의지를 생의 본질로 보고, 이것을 원리로 하여 모 든 가지의 새로운 변혁을 부르짖고, 이 이념을 토대로 초인사상을 전개했다. 이 권력의지는 안 에서 소용돌이쳐 나오는 생명의 본질로서 정장하고 투쟁하고 창조하는 생명력이다.

 

❷ 허무주의(虛無主義)

 

① 신(神)은 죽었다.

허무주의란 최고의 가치가 가치를 상실해버리는 것인데, 최고의 가치란 2천년간 서양을 지 배해 온 기독교의 종교적 세계관과 그 도덕을 말한다. 또한 “신은 죽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신이라 함은 기독교의 신이요, 기독교의 이상과 가치를 의미한다. 이에 “모든 것에 의미가 없 다. 모든 것에 가치가 없다. 일체가 허위다.”고 했다. 그리하여 권력의지의 구현자인 초인(강자) 가 되는 것이 최고의 도덕이라 했다.

 

② 초인사상(超人思想)

신은 이미 죽은 이상 인간이 나아갈 목표는 초인(Ubermensch)이라고 했으며, 인간은 초극 되어야 할 존재라고 했다. 초인이란 지성보다도 본능, 합리보다도 의지, 이성보다도 정열, 사고 보다도 육체를 존중히 여길 줄 아는 의지의 인간을 말한다. 이 초인은 유한 속에서 무한까지도 긍정하며,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인간이다.

 

❸ 실존주의(實存主義)

신에 대신할 이념으로서 초인을 내세운 그는 인간이 근대의 기계화와 대중화 때문에 병들 고 비소하게 되었으며, 평범화, 균일화를 초래했으며, 따라서 새로운 원리, 가치평가의 기준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다 파괴하여라. 낡은 법칙은 모조리 파괴하여라. 그리고 인생을 춤추는 자처럼 즐겁게 살아야 한다.”

 

도연명(365-428, 자·연명, 본명 도잠, 호 오류(五柳)선생)

 

· 동진 시인. 심양에서서 태어난 전원시인

· 20세 때까지는 유복한 가정이었으나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가운이 쇠퇴하여 그의 일가를 도 연명이 지탱해야 했음

· 그래서 관리가 되어 생계를 유지했지만 41세 되던 해 이를 사임하고 63세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전원생활로 일관했다.

· [도화원기(桃花源記)] - 무릉도원, [귀거래사]

---  <무릉도원(武陵桃源)>, <귀거래사(歸去來辭)>, <오류선생(五柳先生)>, 한시(5언절구) <사시(四時)>, <맹호>, <왕유>

 

󰏐 [고전여행] 도연명시선

 

동양문학의 양대 흐름이 애국주의와 체제비판주의라면 이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지점에 탈세속주의라는 맥이 존재한다. 이같은 제3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읽고 넘어가야 할 작품이 '도연명시선'이다.

 

도연명은 중국 북위부터 송대까지 살았던 시인. 관료가문 출신답게 그 역시 하급벼슬을 얻었으나 41세 때 13년 관직을 뿌리치고 "내 어찌 5두미 현령 봉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소인(하급관료들)을 대할 소냐"라는 말을 남긴 뒤 전원에서의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천성적으로 자연을 좋아하는 그는 현실을 돌아보지 않고 경제적 고통 속에서도 정신적 해방과 열락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의 모든 시들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같은 탈세속적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도연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가 '귀거래사'이다. 이 작품은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면서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시이다.

 

'돌아가련다/이제 정원이 장차 거칠어지려 하는데/어찌 돌아가지 않으리/돌아갈꺼나/사귐을 그만두고 교유도 끊으리/세상과 나는 서로를 잊으리니/다시 수레를 타고 여기에 무엇을 구하랴/향촌 친척의 정다운 이야기를 기뻐하고/거문고와 책으로 시름 잊으리라'

 

후세 시인들은 그의 시를 두고 "자연과 인간의 동화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도연명 시작의 핵심인 이같은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음주'라고 이름 붙여진 20수 연작이다.

 

'초려를 맺어 인경에 있고/더구나 거마의 시끄러움이 없고/그대에게 묻노니 무엇이 능하뇨/마음 머니 땅 또한 편벽되다/국화꽃 동쪽 울 밑에서 꺽고/유연히 남산을 보누나/산기운 낮밤으로 좋고/나는 새 서로 더불어 돌아간다/이 가운데 참 뜻이 있으나/말하려 해도 이미 말을 잊는다'

 

도연명이 탈세속적이라 해서 전혀 정치적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리는 이상사회가 언뜻 드러난 시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진왕조 때 난을 피해 나온 사람들이 개척한 마을인 도화원에 대한 예찬시이다.

 

'토지는 평탄하고 가옥은 즐비하게 서 있는데/비옥한 밭 좋은 못이 있고 뽕나무와 대나무가 늘어졌다/두렁길은 가로세로 뻗어있고 개 짖는 소리 닭울음 소리 들리누나/거기로 사람들은 오가며 농사 짓는다/남자와 부녀자들의 옷차림은 모두 밖의 사람과 다름 없다/늙은이와 어린 것들은 모두 걱정없이 즐거이 지낸다'

 

도연명의 현실도피에는 시대적 이유가 있다. 꼬리를 문 전쟁과 당화는 수많은 인재를 앗아갔는데도 유학은 이념적 건강성을 잃고 부귀를 위한 도구로 변질된다. 이 와중에서 이념적으로는 노장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문학적으로는 낭만적 신비적 경향이 두드러졌다. 문학이 공용의 학문에서 개인적 언지로 바뀌는 순간, 그 선두에는 전원시인 도연명이 서 있었던 것이다.

 

도종환(1934- )

 

· 충북 청주생. 교사 출신

·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창작 활동 시작

· [접시꽃 당신](1986)은 ‘한 사내가 앞서간 제 아낙에게 한 혼잣말’의 형식을 빌어 그 그리움의 절실성 속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목숨들 앞에서의 겸허함과 작은 목숨들의 소중함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노래한 시집이다.

·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2-내가 사랑하는 당신]

· 현재 전교조 충북지부장

---  시 <접시꽃 당신>

 

󰏐 [나를키운공간] 도종환 누구인가

 

[접시꽃 당신]으로 일약 유명 시인의 반열에 오른 도종환(43). 1백만권 이상이 팔려나간 것으로 알려진 그의 시집은 암울했던 80년대를 마감해가던시절, 평범한 시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도종환 시인을 떠올릴때 [눈물] [사랑] [그리움] 등이 우선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적부터 화가를 꿈꿨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후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척집에서 눈칫 밥을 먹는 등 청소년기는 그에게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부에 몸담으며 화가를 지망했으나 돈이 없어 등록금이 싼 국립 충북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 뜻하지 않던 문학의 길로 접어든다.

 

교직생활 8년째인 84년부터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나선 그는 첫번째시집 <고두미 마을에서>를 시작으로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당신은누구십니까> 등 섬세하고 사랑 넘치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의 시에서 묻어나오는 섬세함은 궁핍하고 외로웠던 성장기와 상처에서 비롯됐고, 전교조 체험 등을 통해 사랑과 양심이 작품속에 발현됐다.

 

교육현장의 파행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시로 표현하기도했던 그는결국 89년 전교조 사태로 교단에서 쫓겨났고, 현재까지 미복직 상태다.

 

전교조 충북지부장을 맡아 끈질기게 복직투쟁을 전개해온 덕분에(?) 조건부 복직대상에서도 제외됐다.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기약할 수 없는 약속만을 남기고/강물이 가다가 만나고 헤어지는 산처럼/무더기 무더기 멈추어선 너희들을 두고/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중에서).

 

비록 학생들 곁을 떠났지만 그는 또 다른 [선생]으로 고향 청주에 남았다. 돈벌이 되는 직업은 없지만 요 몇년동안 교사보다 열배나 더 바쁜 나날을 보냈다. 본업인 문학은 삶의 일부이자 직업이 됐다. 충북민예총 문학위원장을 맡아 민예총 시창작 교실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고, 지역 대학에도 가끔씩 강의를 나간다. 최근까지 지역 월간지 [충청리뷰]의 발행인과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의장을 맡는 등 지역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당분간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창작활동에 전념하겠다는게 그의 구상이다.

 

동기창(董其昌, 1555-1636, 사백)

 

· 중국 명대의 문인 화가, 서예가. 행서, 초서에 능함

󰏐 정약용 <기예론>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 2, ‘論’

 

글씨를 배우는 데 미불과 동기창의 체를 쓰는 자가 있으면, “왕희지의 순수함만 같지 못하다.”하며, 벽생백과 장원소의 방법을 쓰는 자가 있으면 “단계나 하간의 옛 법만 같지 못하다.”하면서 은연중 빗대어서 성세(聲勢)를 만들어 한 세상을 호령하려고 한다.

 

두목(杜牧, 803-853, 호, 번천)

 

· 당나라 말기의 시인

· 시풍은 호방하면서도 또한 아름다움

· 작품 <아방궁부>, <강남춘> 등

· 두보(杜甫)에 대해 소두(小杜)라고도 함

---  <적벽>(두목 한시)

 

두보(杜甫, 712-770, 호 소릉·少陵, 자 자미·子美, 공부·工部, 노두·老杜 등) : 당 현종 때의 시인

 

1) 생애

· 조상은 양양에서 대대로 살았으나, 두보는 허난성 공현에서 출생

· 어려서부터 병약하고 가난한 환경이었음

· 장년기에 여러 번 진사시에 응시, 낙방

· 32세(744년)에 당시 이백(당시 43세)을 만나 교유함

· 현종의부터 문재(文才)를 인정받아 등용되었으나,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피난하여 부주, 진주, 동곡, 성도로 옮겨 다님

· 49세 때 성도 교외에 완화계 가에 초당을 지어 놓고 옛날 친구이자 절도사인 엄무(嚴武) 비 호를 받으며 은거, 정신적 안정을 얻음 (--- 󰃫 <두시언해> ‘강촌’, ‘절구’)

· 엄무가 죽은 후 방랑하다가 뇌양이란 곳의 배안에서 59세의 일기로 객사함. 지병이었던 폐결 핵에다 중풍까지 겹쳐 병약했음

 

2) 시풍

· 현전 1,450여 편

· 내용 : 평민적, 인간적, 유교적 현실주의

· 표현 : 사실적

· 인도주의자, 우국주의자

- 한유, 황정견에 영향을 줌

· 나라의 운명과 백성의 고통을 항상 자기의 고통으로 수용

· 시어를 깎고 다듬는 노력

 

램, 차알스(Charles. Lamb, 1775-1834)

 

· 영국의 수필가, 비평가.

· 오랫동안 회사원 생활 중 누이와 함께 쓴 [셰익스피어 이야기]외에 대표작 [엘리아 수필집]이 유명함.

· 일생을 독신으로 지냄.

--- 문학이론 <수필>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Claude. 1908-1991)

 

· 프랑스 인류학자. 인류학에 구조주의(構造主義) 방법론을 도입한 선구자

· <오이디푸스>왕 신화를 분석하여 구조주의 방법론 개척

 

마샬 필(1932~1995)

 

󰏐 판소리는 한국인넋 집약된 예술

 

“가령 서양문학의 고전인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지은 호머 역시 요즘 개념의 작가는 아니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신화를 모아 노래하는 가수이자 이야기꾼었죠. 초기 문학은 모두 구비문학의 모양을 띠었고, 광대들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기본 골격에 살을 붙여 나갔습니다.”

 

필 박사는 “한국의 판소리의 경우 스승과 제자의 특별한 관계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판소리 사설이 정착되었다.”고 덧붙였다.

 

1개월 안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될 필박사의 저서는 외국인이 영어로 쓴 유일한 판소리 연구서. 판소리의 개략, 광대사, 판소리사, 심청가 영역 등 모두 네 부분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한국어를 전공하는 미국학생들의 교재로 사용하게 된다.

 

“심청전은 다섯 판소리 중 한국적인 요소가 특히 짙고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서울대 김동욱 교수의 증언으로 심청가를 번역하게 되었고, 광대사 부분은 정노식이 1940년 발간한 명창열전 [조선창극사]를 참고로 했다.

 

“80년대 들어 판소리 연구가 활발해져 많은 논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두드러진 현상은 판소리 기원설 중 <무가기원설>이 아주 강해졌다는 점이에요. 서울대 서대석 교수의 <서사무가와 판소리의 비교 연구>같은 것은 대표적인 논문이지요. 한국문학을 알려면 판소리를 알아야 하고, 판소리를 이해하려면 무교를 모르면 안 돼요.

 

신라가 망하면서 육두품이 올라가고 화랑의 지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몰락한 무가에서 판소리가 발생했다는 것이 필 교수의 이론이다.

 

자신을 보스톤 토박이라고 소개한 그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한국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일단 상대방을 놀라게 한다. 하버드 대학 재학시절 군에 입대,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그는 귀국 후 전공을 심리학에서 한국어로 바꾼 후 30여년 간을 한국문학 연구에 쏟았다. 63~65년 서울대학에서 <한국말에 나타나는 미종결어미>라는 제목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74년 하바드 대학에서 <심청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서울대 조동일 교수의 5권 [한국문학통사]를 축약하고 배경설명을 곁들여 한권의 영문판으로 낼 계획이다.

 

󰏐 [인물] 타계한 <마셜 필> 박사…우리문학 해외소개 한평생

 

12일 세상을 떠난 하와이대 동아시아어문학과의 한국문학담당 마셜 필 박사는 해외 한국문학분야를 대표할만한 학자로서 가장 적극적으로 한국문학의 번역소개와 교육연구작업에 힘써왔다.

 

19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그는 명문 하버드대 출신으로 한국문학연구에 뜻을 품고 50년 한국에 유학,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였다. 76년 하버드대에서 심청가의 음악적 형식과 그 사설구조를 관련시켜 연구한「판소리 심청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문학 전공의 박사 학위를 미국의 대학이 수여한 최초의 일이 되고 있다.

 

80년대초에 선생은 하버드대 서머스쿨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문학」강좌를 하버드대에 처음 개설하기도 하였고 88년 이후 하와이대의 정교수가 되어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 현대 단편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여「유형의 땅」이라는 제목의 선집을 펴냈다. 92년에는 해외의 한국문학 연구자들을중심으로 국제한국문학회를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고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를 위해 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최근에는 영문판 한국문학총서 6권(미국 컬럼비아대출판부)을 위해 필자와 함께 공동 편집책임자로 작업을 진행중이었다.

 

마셜 필 교수의 대표적인 업적은 지난해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간행한「이야기를 노래하는 한국의 소리꾼(The Korean Singer of Tales」이라는 판소리 연구서이다. 선생의 판소리 연구를 집약시켜 놓은 이 책은 판소리 공연 형식의 예술적인 변천과 판소리의 내적인 구조를 분석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덧붙여져 있는 판소리「심청가」의 영역본은 해방 이후 이루어진 한국문학 작품의 해외 번역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손꼽을 수있다.

 

몇년전 회갑이 지났지만 오히려 젊고 활력이 넘쳤던 마셜 필 교수의 갑작스런 부음을 듣고 그 놀라움과 애통함을 금할 수가 없다. 삼가 선생의 영전에 고개숙여 명복을 빈다.

 

맹광(孟光) : 양홍의 아내. --- 󰃫 <거안제미(擧案齊眉)>고사, <포선·환소군 부부>

 

맹모 : --- 󰃫 고사성어 <맹모단기(孟母斷機)>,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맹사성(孟思誠, 1360-1438, 고불·古佛)

 

· 충남 아산 생.

· 청렴함으로 많은 일화를 남김

· 1386 고려 우왕 때 문과에 등극, 예문춘추관 검열을 시초로 관직생활

· 1392 조선 건국시 참여, 수원판관, 예조정랑 역임

· 태조, 세종 때 예조, 호조, 공조, 이조 판서 역임

· 1427 우의정, 1431 세종 때 좌의정.

· 1435 76세의 일기로 좌의정 직을 물러남(약 50년간 재직)

 생가(충남 아산시 배방면 소재)

 

* 일화 : 맹사성의 생가는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고려 최영 장군이 살던 곳이라 한다. 최영은 자 신의 집을 친구인 맹유에게 물려 주었고, 맹유에게는 맹희도라는 아들이 있었다. 정몽주와 절 친한 사이였던 맹희도는 젊은 시절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개성에 올라가 과거 준비를 하고 있 었는데, 어느 날 부친 위독이라는 급전을 받게 된다. 정신없이 아산으로 달려온 아들 맹희도를 맞이한 것은 빙그레 웃는 아버지 맹유였고, 맹유는 아들을 무조건 시집온 새색시의 방으로 들 라 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며느리의 기막힌 ‘태몽’ 때문이었다 한다. 새며느리는 어느 날 태양이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났다. 보통 꿈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시 아버지 맹유에게 고하자, 맹유는 즉기 개성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불러 내린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태어난 인물이 맹사성이라고 한다. 그 뒤 공교롭게도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 사위가 되었다.

---  <이현보>(맹사성과 이현보의 강호자연 인식의 차이점), <강호사시가>

 

1) 신왕조의 새로운 통치기구에 적극 가담한 집권 사대부의 일원으로서 정치적 위기는 단 한 번(1408 태종에게 알리지 않고 조대림을 국문하여 만주에 유배, 그러나 영의정 성석린의 변호 로 곧 해결)밖에 없었음

2) 이러한 정치 현실은 강호자연을 대하는 심미적 감각을 ‘낙관적’으로 볼 수 있게 했다. 즉 강 호자연과 정치적 현실에는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 84세설)

 

󰆲 이름은 가(軻), 춘추시대 추(鄒)나라 사람.

󰆳 책 [맹자]

󰏐 맹자의 교육사상

 

❶ 유가(儒家)와 묵가(墨家)와 도가(道家)

한비자(韓非子)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가 죽은 후에 유가는 여덟개의 지파로 나뉘어졌다. 자장(子張), 자사(子思), 안씨(顔氏), 맹씨(孟氏), 칠조씨(漆彫氏), 중량씨(仲良氏), 순경(筍卿), 악정(樂正) 등이 그것이다. 이 8대 유가의 지파는 동시에 생겨난 것이 아니고 공자가 죽은 후 약 200여년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인 (曾子), 자하(子夏), 자유(子游), 자공(子貢), 민자(閔子) 등이 이 8대 유가에 들지 않고 있어서 후세의 사람들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안씨, 자장, 칠조씨의 경우에만 공자의 직접 제자이고, 다른 학파들은 3대 내지 5대의 인물들이다. 그리하여 공자의 유가는 그 이상의 학파를 두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한 유가의 전통이 이어지는 속에서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생으로부터 배워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킨 사상가이다. 공자가 지성(至聖)이라면 맹자(孟子)는 아성(亞聖)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가의 전통에서는 공자 다음가는 스승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맹자는 공자의 인의의 도를 발전시켜 성선설과 왕도정치론을 편 사상가로서 당시대의 다른 학파인 묵가와 도가를 물리치고 유가적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전국시대의 사상계에는 유가 이외에 여러 학파가 있었으나, 그 세력으로 보면 묵가(墨家)와 도가(道家)가 그 대표적인 것이었고 후에 법가도 점차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묵자(墨子)--본명은 묵적(墨翟)--가 어느 시대의 사람이었느냐를 두고 설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공자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공자보다 훨씬 후의 사람이었다고도 하나, 대체로 기원전 470년대에서 380년대에 살았을 것으로 본다. 묵가의 사상은 전쟁을 반대하고 도가처럼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가의 사상과 다소 유사성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점에서 공자의 사상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도가의 근원인 은둔 사상가 양주(楊朱)도 묵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생존하였을 것으로 본다. 후에 도가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 의해서 크게 발전되어 유가와 묵가와 더불어 3대 사조의 하나로서 영향력을 미쳤다. 노자는 종래에 공자보다 앞섰던 시대의 사람으로 알려졌고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사상가로 인정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노자를 공자보다 휠씬 뒤에 태어난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장자는 맹자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묵자도 유가의 학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유가의 예가 번거러움을 비판하였다. 묵자는 특히 장례식을 거창하게 치르는 것은 재산을 없애고 백성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며, 오래토록 상복을 입게 하는 것은 산 사람을 괴롭히고 일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하여 유가를 공격하였다. 그는 유가와는 달리 귀신의 존재를 믿는 명귀론자(明鬼論者)로서 종교적 정열을 가진 사람이나, 그러면서도 공리주의적 사고를 하였으며 사회의 개혁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공자는 초기 주(周) 나라 때의 예악과 문물을 동경하였으나, 묵자는 전통적 제도와 관행에 반대하였다. 묵자는 공자가 주의 문, 무, 주공을 이상적인 성인으로 존숭하여 그 도를 퍼뜨린다고 주장한 것에 대하여 그보다 더욱 옛날의, 따라서 더욱 유덕한 하(夏)의 우왕(禹王)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왕은 근검역행하며 민중의 모범이 되고 황하의 대홍수를 수습하여 세상을 구제한 군주이므로 정치가는 모름지기 이를 본받아 절약하고 장례식을 간단히 하며 음악 등 무용한 오락을 폐지하고 타인을 위해서는 몸이 가루가 되도록 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묵자는 유가가 주장하는 인(仁)은 자기 주위의 사람을 후대하고 멀어짐에 따라서 박하게 대우하므로 덕이 불충분하다고 하였다. 오히려 자타를 구별치 않고 ‘겸애하는 것’이 최고의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묵자의 사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바로 이 ‘겸애설’(兼愛說)과 그의 독특한 논리적 방법인 ‘삼표법’(三表法)이다.

 

묵가의 영향력은 한 때 공자의 유가에 비길 만한 것이었다. 묵가가 유가를 비판하였으나 사상적 노선에 있어서 정반대되는 것은 유가라기보다는 오히려 도가(道家)였다. 도가도 묵가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난세에 대한 대응적 사상이었으나, 묵가는 적극적 대응이었다면 도가는 소극적 대응이었다. 「열자」(列子)의 ‘양주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 사람은 털 오라기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결코 하지 않았고, 온 천하를 맡긴다고 해도 받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털 한 오라기를 뽑지 않고 또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려 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안정되리라.’(열자: 양주--풍우란, 91) 이러한 도가적 태도는 공자 시대의 은자(隱者)들에게서 볼 수 있다. 은자란 난세를 피하여 숨어서 지내는 사람을 뜻한다. 은자들은 공자가 난세를 구하려고 쓸데 없이 애쓰는 사람이라고 하여 조소를 하였다.(논어 미자 5,6) 도가는 바로 이러한 은자들에게서 유래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노자(老子)에게서도 양주의 개인주의적 은둔사상과 유사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노자는 ‘제몸을 천하같이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고, 제몸을 천하같이 아끼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다’(노자 13)고 하였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은 개인주의에만 머물었다기보다는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도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모든 만물은 도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그의 도는 ‘무위’(無爲)의 도,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도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 도이다.(37장) 그것은, ‘천지 만물은 본래 유(有)에서 생기고 유는 무(無)에서 생긴다’(42장)는 말과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42장)는 말이 시사하듯이 무와 무위의 개념은 일종의 파라독스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노자의 학문은 개인주의의 주장으로서 양주의 계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쾌락주의가는 아니다. 그는 쾌락을 초월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가가 존중하는 예제(禮制)도 또한 초월해야 할 대상이며 정신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노자의 사상과 유사하게 장자(莊子)는 ‘무용’(無用)의 도를 내세워 단순한 현실적 은둔이 아니라, 오히려 무용의 쓰임을 들면서 무용은 결과적으로 크게 쓰임, 즉 대용(大用)을 뜻한다고 하였다. 가지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언급하면서 나뭇꾼이 그 나무를 베어가지 않는 것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 나무는 크게 자랄 수 있었고 무성할 수 있었다는 것, ‘무용’은 이런 의미에서 곧 ‘대용’(大用)이다.

 

맹자는 도가와 묵가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물리치는 일을 유가로서의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맹자는 당시에 양주와 묵적(墨翟)의 사상이 천하에 팽배해 있다는 사실에 긴장을 느꼈고, 천하의 의견이 양주와 묵적으로 기우는 현상을 두고 크게 우려하였다. 공자가 주 나라의 문왕, 무왕, 주공의 사상을 잇는 것에 대하여 묵적은 그 이전인 하(夏) 나라 우왕(禹王)의 사상을 잇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맹자는 다시 그보다 더 앞서 요(堯)와 순(舜)의 두 임금을 들어 자신의 유교는 요순의 도이며,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 공자의 법통을 잇는다고 가르쳤다. 맹자는 말하기를 ‘사악한 설이 떠돌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인의의 도를 가로 막고 있다’고 하였다.(등문공하 9) 이 말은 도가와 묵가의 사상이 횡행함을 언급한 것이다. ‘양주는 자기만을 위하므로 이는 임금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요, 묵적은 겸애를 주장하므로 이는 아비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양주의 ‘위아설’(爲我說)은 자기의 이익을 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묵자의 ‘겸애설’(兼愛說)은 남의 이익을 구하고 있으므로 서로 대립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러한 양극적 사고에 대하여 맹자는 공자가 제창한 충서(忠恕)의 사상에 터하여 중도적이면서도 통합적인 원리를 내세우고자 하였다.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것으로 끝나면 위아적인 이기주의로 남지만 그 사랑으로 남의 가족에로 넓히면 이타주의적 태도를 포괄하는 것이 된다. 맹자는 인간이 지닌 인(仁)의 단서,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으므로 남의 고통을 그대로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부모와 남의 부모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자기 부모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연의 애정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본래 인간은 인의(仁義)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류라고 할 수 있으나, 사물은 모두 똑 같은 것이 아니며 자기 부모를 더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정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모를 먼저 생각하고 측은지심의 단서를 계발하면 자연히 남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맹자는 스스로 말하기를 역사상 여러 성인들이 있지만 자기가 바라는 것은 오직 공자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공손추상 호연 13) 공자는 맹자의 당시에 성인으로 지칭되고 있던 백이(伯夷), 이윤(伊尹), 유하혜(柳下惠) 등의 성품을 전체로서 집대성한 성인이다. 백이는 성인 가운데서도 청념하고 성품이 곧은 성인(聖之淸者)이며, 이윤은 누군들 임금이 아니며 누군들 백성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지도할 사명감에 넘치는 성인(聖之使者)이며, 유하혜는 더러운 임금을 섬기는 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화해와 조화의 기질을 가진 성인(聖之和者)이다. 이들에 비하면 공자는 시의에 맞게 시종을 조리정연하게 전개하는 성인(聖之時者)이다. 그는 공자의 성품과 능력을 ‘집대성’으로 표현하고 음악으로 비유해서 설명하였다.

 

한편으로 종(鐘)의 소리를 내고 또한 편으로 경(磬)의 울려 조화를 이룬다. 종의 소리는 조리있는 시작을 뜻하고 경의 울림은 조리 있는 끝맺음을 나타낸다. 조리있게 시작하는 것은 지혜(智慧)에 속하고 조리있게 끝내는 것은 성덕(聖德)에 속한다. 다시 활쏘는 데에 비유하면, 지혜는 기교이고 성덕은 기력이다. ... 공자는 지(知)와 성(聖)을 겸하여 집대성한 것인다.(만장하 백이 5-6)

 

맹자는 사람들이 세상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공자같은 성인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공손추상 호연 14) 그러나 공자는 인(仁)의 도를 편데 비하여 맹자의 인과 의(義)의 두 개념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인과 의의 차이와 관계를 맹자는 인심(人心)과 인로(人路), 혹은 안택(安宅)과 정로(正路)로 표현하였다. (이루상 자폭1) 인을 ‘인심’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본연의 마음이라는 뜻이며, (나중에 논하겠지만) 맹자는 인간의 마음은 본래 착한 성(性)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을 ‘안택’이라고 한 것은 ‘편히 살 수 있는 집’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으로서 인간의 마음이 본래 거하여야 할 본연임을 뜻한다. 그리고 의를 ‘인로’ 혹은 ‘정로’라고 한 것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을 뜻한다.

 

도덕성을 논할 때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을 일차적으로 중시하여 ‘행복’, ‘덕성’ 등의 적극적 가치에서 궁극적 기준을 구하려는 목적론적 윤리설과, 인간이 지켜야 할 행위의 격률을 일차적으로 중시하여 ‘법칙’, ‘규칙’ 등의 소극적 가치에서 궁극적 기준을 구하려는 법칙론적 윤리설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설은 전자의, 칸트의 윤리설은 후자의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적용하면 공자와 맹자의 ‘인’은 목적론적 개념이라면 ‘의’는 법칙론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공맹(孔孟)은 인을 일차적 개념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경향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장지윤은 ‘인’은 보편적 원리이며 ‘의’는 개별적 실천의 원리라고 하였으나(장기윤 118), 보편성과 개별성, 혹은 지행(知行)의 논리를 두 개념의 관계에 적용하지는 어렵다. 오히려 인은 인간의 감정, 의지, 태도 등을 포함하는 마음과 그 성품을 전체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이라면, 의는 그 마음이 작용하는 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맹자는 의(義)의 개념과 공자가 중시한 예(禮)의 개념도 그 관계를 말하여 ‘의는 길이요 예는 문이다’(만장하 불견7)라고 하였다. 사람은 반드시 문을 통하여 길을 따라야 한다. 아무리 임금이 불렀다고 해도 의에 어긋나면 그 예를 지키지 않을 수 있으며, 아무리 세련된 예를 갖추었다고 해도 그것이 의에 어긋나고 인이 실린 것이 아니라면 진정한 의미의 예가 아니다.

 

❷ 성선설(性善說) 교육관

사람의 본성이 본래 선한 것인가 아니면 악한 것이가에 대한 대답의 향방은 교육의 목적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결정요인이 된다. 만약에 인간이 본래 선하다면 그 선성을 보존하거나 회복하는 것이 교육일 것이며, 만약에 악하다면 그 악성을 계속적으로 고쳐서 다시 악성으로 되돌아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교육일 것이다. 맹자의 시대에 이 문제를 두고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하였고, 같은 유가의 전통 속에 있던 순자(荀子)는 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선설과 성악설의 이원론적 대립과는 달리 고자(告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주장하였다.

 

맹자는 ‘우산(牛山)의 비유’를 들어 사람의 본래 성품은 착한 것이었으나 혼탁한 세상의 영향으로 인하여 흐려져서 악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산의 수목은 본래 울창하게 우거져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산림이 큰 나라의 국도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끼로 마구 베어내었다. 그러니 어찌 본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잘린 나무의 뿌리는 밤낮으로 쉬면서 다시 자라고 또한 비와 이슬이 내려 적셔 주므로 새싹이 돋아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나 양들이 와서 풀을 뜯어 먹었으므로 저렇게 뻔질뻔질한 헐벗은 산이 되고 말았다. 오늘 사람들은 그 뻔질뻔질한 산을 보고 원래부터 나무가 없었으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어찌 저렇게 헐벗은 모습이 산의 본래 모습이겠는가?

 

사람의 본성에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었겠는가? 사람들이 본래의 양심을 버리는 것은 마치 도끼로 나무를 잘라 버리는 것과 같다. 매일 잘라 버리니 어찌 아름다울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양심도 밤낮으로 자라고자 하며, 새벽의 청명한 기운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도 즐겨 추구하는 바와 싫어서 배척하는 바가 사람답지 못하고 낮에 일어나는 혼잡스런 일들 때문에 다시 교란되어 사라져 버린다.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 결국에 가서는 밤의 기운도 없어지고, 밤의 기운이 없어지만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와 가까운 상태에 빠진다.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금수가 된 꼴 만을 보고 본래부터 착한 재성(才性)이 없었던 것과 같이 생각하겠지만 어찌 그런 것이 사람의 본성이겠는가? (고자상 우산장 1-2)

 

그러나 맹자가 성선설을 견지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로,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이 선하거나 악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인(仁), 의(義) 등의 도덕적 개념은 원천적으로 인간 혹은 인간의 마음에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內在)하는 것이어야 한다. 과연 그런가? 둘째로, 인과 의가 인간의 성품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본래 똑 같은 심성을 소유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째로, 인간은 누구나 그 본성이 선하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근거에 의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과 관련하여 맹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의 의문은 이것이다. 만약에 인과 의가 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관습에서 온 것이라면, 인간의 성품이 본래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판단이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선악의 판단은 인간의 심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관습 혹은 제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선악의 문제는 원천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적용되는 것이거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 도덕적 기준은 내재적인 것인가? 맹자와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린 고자는 인의 경우에는 내재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의의 경우에는 외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두 가지의 예를 들었다. 첫째, 음식을 먹는 것과 이성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내재적인 것이다. 그러나 연장자를 존경하는 것은 연장자라는 이유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마치 어떤 물체가 흰색인 경우에 그것을 희다고 하는 것은 마음 속에 희다고 하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 물체가 희기 때문에 희다고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인은 내재적인 것이며 의는 외재적인 것이다. 둘째, 자기 동생은 사랑하지만 먼 나라 사람의 동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인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며, 남의 나라 영장자도 내 나라의 연장자처럼 모시는 것은 연장자라는 객관적인 사실로 인한 것이므로 의는 마음의 밖에 있는 것이다.(고자상 식생장) 이러한 고자의 논변에 대하여 맹자는 이렇게 반문하였다. 흰 말과 흰 사람의 경우에 희다는 사실은 같을 수 있으나, 그것으로 인하여 말과 사람이 같다고 할 수 있겠으며, 연장자를 존경하는 것을 의라고 하지 연장자 그 자체를 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흰 것을 희다고 하는 것과 연장자를 존경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일이며, 존경하는 마음이 없이 존경의 대상만을 두고 의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의 의문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은 선하고 어떤 사람은 악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인과 의의 설정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본래 성인은 성인으로 태어나고 범인은 범인으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맹자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즉, 「시경」(詩經)에서 말하기를 ‘하늘이 모든 사람들을 낳고 만물에는 법칙이 있게 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그 법칙을 지키고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였듯이, 사람들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법칙을 지키고 덕을 행하게 되어 있다.(고자 상 공도장) 만물에 주어진 법칙에 따라서 같은 종류의 사물은 비슷하게 마련인데 어찌 오직 사람만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성인이나 나나 같은 종류의 사람이다.(부세장 3) 성인은 이(理)와 의(義)로 충만하므로 성인의 본성은 선하다. 성인과 나는 동류이므로 나는 동류에 속하므로 나의 성도 선할 수밖에 없다. 맹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수양하면 ‘누구나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이 될 수 있다’(고자하 조교)고 하였다.

 

셋째의 의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 본성이 선하다면 그 선성을 나타내어 주는 증거는 무엇인가? 고자는 사람의 본성이란 마치 버드나무의 가지나 물과 같이 이리저리 변화될 수 있는 것이지 선하거나 악하거나로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햐였다.(고자 상 기류장, 湍水章) 그러나 맹자는 어렇게 대응하였다. 즉, 버드나무의 가지를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만든다면 우리는 그 본성을 어기고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물이 이리저리 좌우로 흐를 수 있으나 항상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다. 물로, 이러한 일정한 본성은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았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 대답이 바로 맹자의 유명한 ‘사단설’(四端說)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惻隱之心)이 있고,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마음(羞惡之心)이 있으 며, 공경하는 마음(恭敬之心)이 있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이 있다.(고자상 공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인(仁)의 단서이고,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마음이 바로 의(義)의 단서이며, 공경하는 바음이 바로 예(禮)의 단서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바로 지(知)의 단서이다. 인의예지는 밖으로부터 와서 나를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본래 있는 것이나 단지 우리는 마음에 내재하는 바를 평소에 생각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찾아서 닦으면 그것을 얻지만 스스로 버리면 잃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 찾는 사람과 스스로 버리는 사람의 차이는 성인과 법인의 차이처럼 크게 벌어질 수 있다.(고자상 공도장)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는 본래의 선성을 확충하는 양성(養性)과 그것을 잃어 버리는 실성(失性)의 차이이다. 이러한 인성관에 의하면, 교육의 목적과 방법은 선단(善端)을 확충하는 것과 잃어버린 선단을 회복하는 것으로 함축될 수 있다. 사단은 인간의 인의예지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단서라면, 확충하고 회복하는 것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즉, 선한 성품의 실체는 무엇인가? 마음은 본래 인의예지의 덕을 앟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재성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즉, 그것은 양심(良心)이다. 양심은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포함한다.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양능이며,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양지이다.(진심상 양능장) [이러한 ‘양지양능설’은 오늘의 서양 윤리학들이 양심(conscience)의 개념을 도덕적 판단의 인지적 요소와 도덕적 실천의 동기적 요소로 분석하여 설명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개념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본래의 성정(性情)을 따르면 선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사람들이 착하지 못한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악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재성를 다하지 못했기 대문이다.(고자 상 공도)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그 재성의 발휘를 가로 막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다. 맹자는 대체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환경의 영향이다. 풍년이 들어 넉넉한 해에는 젊은이들이 거의 선량하고 흉년에는 포악한데, 그것은 사람의 재성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유인케 한 원인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마치 같은 땅에 같은 시기에 보리를 심어두면 하지(夏至) 때에 이르러 또 같은 결실을 하지 않는 것은 토질이 다르거나 기후가 다르거나 아니면 사람의 손길이 같지 않아서 그런 것과 마찬가지이다.(고자 상 부세장) 맹자는 인간의 성품의 변화에 미치는 환경의 영향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둘째는 자포자기의 태도이다. 비록 인간에게 환경의 영향이 크다고 하여도, 순 임금과 같이 깊은 산속에서 야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이 살았으마 착한 말을 듣고 착한 행동을 보면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노력이 있으며 성인이 되기도 한다.(진심 상 수지장) ‘우산의 비유’에서 설명하였듯이 낮의 거칠고 문란한 행동과 밤의 안식을 통하여 순화하고 아침의 맑은 기운을 입어 사람은 다시 새롭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자포자기하는 데 있다. 맹자는 입만 열면 예의를 비난하는 것을 일컬어 ‘자포’(自暴)라고 하고 스스로 인에 거하고 의를 지키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을 ‘자기’(自棄)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포하는 사람과는 말을 같이 할 수 없고, 자기하는 사람과는 일을 같이 할 수 없다고 하였다.(이루상 자포장)

 

셋째는 작은 것이 큰 것을 해치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의 몸에는 귀한 부분과 천한 부분, 큰 부분과 작은 부분이 있다.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해쳐서도 안되고 천한 것으로써 귀한 것을 해쳐서도 안된다. 작은 것을 키우면 소인이 되고 큰 것을 키우면 대인이 된다.’(고자 상 인지장)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맹자는 마음의 관능(官能)을 육체의 관능보다 앞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진심상 鈞是장) 마음은 큰 몸(大體)이고 육체는 작은 몸(小體)인데, 마음을 따르면 대인이 되고 육체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 왜냐하면, 육체의 감각기관은 생각할 힘이 없고 물질에 가리지만 마음은 생각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의 교육은 바로 선성의 보존, 양육, 회복에 관한 것이다. 맹자는 군자가 사람을 교육하는 방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진심상 군자장) 첫째, 제 때에 내리는 비가 초목을 저절로 자라게 하는 것과 같이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인간 자체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연적 법칙에 따라서 성장할 수 있도록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교육의 가장 중심되는 원리로 생각하는 루소(Rousseau) 등의 자연주의적 교육관에서 말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둘째, 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덕성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성선설적 인간관에서 일관되게 도출될 수 있는 방법이다. 덕성은 인간의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계발되는 것이다. 세째, 각자가 지닌 재능과 소질을 충분히 발달시킬 수 있도록 해 주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잠재력과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계발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소위 ‘자아실현’(自我實現)이라고 표현하는 바 그것이다. 네째, 의심나는 것을 묻게 하여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탐구학습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섯째, 혼자서 덕을 잘 닦아 나가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이 방법은 인간의 자율적 성장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맹자는 이러한 다섯 가지의 방법에 대하여 체계적인 이론적 정당화를 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아동중심교육을 내세우는 진보적 교육이론에서 주장하는 것과 그 정신과 원리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자연적 성장을 기한다고 하여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마치 논밭에 김매기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하여 어느 송(宋) 나라의 농부가 모자리의 모들을 뽑아 올린 것과 같이 하면 모들은 말라 죽고 만다.(공손추 상, 호연장) 그러므로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에게 인위적인 통제나 제재를 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맹자는 당시의 송 나라 정치를 담당해 온 대불승(戴不勝)이라는 사람이 당대의 선량한 선비인 설거주(薛居州)를 등용하여 왕의 측근에 있게 함으로써 왕의 덕성을 높이고자 한 사실을 두고, 왕의 측근에 우글거리는 악한 무리들이 함께 있을 경우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평하였다. 초(超) 나라의 대부가 그 아들로 하여금 제(齊) 나라의 말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제 나라의 사람을 시켜서 그를 가르치게 한다고 해서 제대로 가르치겠는가? 제 나라 사람 혼자서 그를 가르치고 주변에 초 나라 사람들이 욱실거린다고 하면, 글 때려서 가르친다고 해도 제 나라 말을 제대로 하겠는가? 차라리 제 나라의 거리에 내버려 두면 매일 같이 그를 때려서 초 나라 말을 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제 나라의 말을 할 것이다.

이처럼 맹자는 교육에 있어서 환경의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자신이 교육받은 환경, 즉 그의 어머니가 세번이나 자식의 교육을 위하여 환경을 선택하여 옮겨 다닌 것(孟母 三遷之敎)에서 체득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환경 그 자체가 군자를 만든다는 보장은 없다. 군자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의 양성(養性)의 원리가 따라야 한다. 하나는 ‘규구(規矩)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개념’이다. 규구는 교육의 방법적 과정에서 적용되어야 할 원리라면 호연지기는 개체 인간을 위한 교육의 목표이다.

 

맹자의 교육방법은 어떤 점에서 상당히 방임적인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군자로서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성장을 이끌어 가는 규구(規矩), 즉 표준이 있어야 한다. 선성을 보존하고 자라게 하고 그것이 혼탁해졌을 때 회복하는 노력, 그것은 막연한 수양이나 극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치 훌륭한 목수가 도제를 가르칠 때 규구준승(規矩準繩), 즉 콤퍼스, 곡척, 수준기, 먹줄 등을 사용하면서 가르치듯이 행위의 표준에 따라서 배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진심상 공손장) 그 표준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그것은 옛날 요순(堯舜)의 두 임금, 그리고 삼대의 왕들, 하(夏)의 우왕(禹王), 은(殷)의 탕왕(湯王), 주(周)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등의 성왕(聖王)들, 또한 백대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 등의 성현들의 행적과 교훈에서 찾을 수 있다. 맹자는 ‘임금이나 신하나 모두 요 임금과 순 임금을 본받으면 된다.’(이루상, 규구장)고 하였다. 순이 요 임금을 섬기던 극진한 태도와 도리, 그리고 순과 요의 두 임금이 백성을 위하던 정성과 태도, 그것이 바로 인간 윤리의 표준이다. 군자를 기르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에게 깨우쳐 주고 밝혀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표준에 따라서 힘있게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만 해야 한다. 그것은 군자교육의 궁극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인간의 선성이 만개(滿開)한 경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기는 지극히 크고 굳센 것이므로 곧게 가꾸고 기르면 천지의 사이에 가득찬다. 그러므로 의(義)와 도(道)가 합친 상태에서라야 제대로 함양된다.(공손추 상 호연장) 호연지기가 크게 무르익은 경지의 사람을 ‘대장부’(大丈夫)라고 한다. 대장부는 ‘천하의 넓은 보금자리인 인에 살고 천하의 올바른 자리인 예를 지키고, 또한 천하의 대도인 의를 행한다. 뜻을 얻어 도를 행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면 백성들과 함께 그 도를 따르게 하고, 뜻을 얻지 못하여 재야에 머물면 홀로 선을 행한다. 부귀에 의해 마음이 타락되는 일이 없고 빈천으로 인해 절조를 굽히지 않으며, 어떤 위세나 무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다.’(등문공 하 경춘장) 호연지기는 인간이 자기의 본성을 충분히 계발시킨 것일 뿐이므로 그것은 결코 한갖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누구나 실현할 수 것이다.

 

❸ 귀족주의적 왕도정치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장 가볍다’고 하였다. 그리고 ‘백성들(丘民)의 민심을 얻어야 천자(天子)가 될 수 있고 천자의 신임을 얻어야 제후(諸侯)가 될 수 있으며 제후의 신임을 얻어야 대부(大夫)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진심 하 귀위장) 이 표현으로 보면 장기윤이 말했듯이 맹자는 민주정치의 가장 중요한 선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장기윤, 127) 통치권의 행사가 궁극적으로 민중을 위한다는 데 있다고 선언한 것이므로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킨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을 위한 정치’ 그 자체만으로 민주정치의 충분한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권의 근원이 민중에 있지 않으며 주권의 소유가 또한 민중에 있지 않는 한 ‘백성 이 가장 귀하다’고 한 것만으로 완전한 민주정치를 선언한 것이라고 할 수는 결코 없다. 전재정치나 귀족정치의 경우에도 통치권의 도덕적 정당성을 언제나 위민(爲民)의 정신에서 찾고자 한다.

 

그러나 맹자는 전재적 왕권국가가 이상적인 국가라고 보지는 않았다. 민중은 왕의 절대적 의지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자의로 전횡을 행사할 수 있는 지배적 존재도 아니다. 오히려 맹자의 왕은 도덕적 상징으로서, 그리고 도덕적 관리자로서 존재한다. 그리하여 맹자의 이러한 정치를 ‘왕도정치’(王道政治)라고 하고 ‘패도정치’(覇道政治)와 구별하였다. 왕도는 인의의 도덕으로써 인정(仁政)을 행하는 것이고 패도는 인정을 가장하여 무력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다.(공손추 상 가인장) 패도에 의한 통치는 그 세력을 넓히고 복종을 강요하지만 실제로 민중은 심복(心服)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왕도에 의한 통치는 마치 공자의 70 제자들이 스승에게 진심으로 복종하듯이 덕으로써 복종케 한다. 맹자는 왕도정치의 표본을 옛 성왕들이 천하를 다스리던 것에서 찾고자 하였다.

 

통치자의 임무는 영토와 인민과 정사(政事)르 지키는 일이라고 하였다.(진심 하, 제후장) 이러한 임무는 하늘로부터 받은 것, 즉 천명(天命)이므로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민심(民心)으 배반한 것이 되고 결국 천심(天心)을 잃은 것이 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도 정당화 된다. 말하자면, 집권자의 정통성이 부정당하고 천명이 바뀐다는 것이다. 은(殷) 나라의 탕왕(湯王)이 하(夏) 나라의 걸왕(桀王)을, 그리고 주(周) 나라의 무왕(武王)이 은 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한 것도 이러한 역성혁명의 논리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역성혁명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통치자가 천명을 잃었을 때이다. 맹자는 백성을 배반하고 잔적(殘賊)을 일삼는 자는 그가 왕일지라도 이미 왕이라고 할 수 없는 일개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주 나라의 무왕이 은 나라의 폭군인 주왕을 정벌한 상황을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즉, ‘인도(仁道)를 어기는 자를 적(賊)이라고 하고 의리(義理)를 어기는 자를 잔(殘)이라고 한다. 잔적을 일삼는 자는 일부(一夫)라고 한다. 일부에 불과한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살해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다.’ 다른 하나는 반복해서 간(諫)해도 듣지 않을 경우이다. ‘나라의 임금에 큰 과오가 있으면 간하고, 그것을 되풀이 하여도 들어주지 않으면 그 지위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버린다.’(만장 하 문경장) 그러나 맹자의 역성혁명론은 국민의 적극적인 권리선언과 같은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도덕성에 대한 긴장을 자극하는 예방적 발언에 불과하다고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은 나라의 건국에 공을 세운 이윤(伊尹)이 왕인 태갑(太甲)을 추방했다기 태갑이 현명함을 되찾자 그를 다시 맞이한 사실이 있다. 이에 대하여 맹자는 이윤과 같은 현명한 판단에 근거한다면 왕을 그렇게 다루는 것을 시인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함부러 허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사실을 두고 맹자도 결국 극악의 상태가 아니라면 역성혁명을 적극적으로 바란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천명은 하늘이 준 통치력 혹은 지배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덕적 바탕을 의미한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관계는 도덕적 관계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에 임금이 신하를 자기의 손발처럼 여겨서 사람하면 신하도 임금을 자기의 배와 가습처럼 아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임금이 신하를 개와 말 같이 대하고 마구 부리기만 하면 신하도 임금을 평범한 인간으로 대할 것이다. 더욱이 만약 임금이 신하를 초개(草芥)같이 여기고 함부러 짓밟으면 신하도 임금을 도덕이나 원수같이 여기고 증오할 것이다.’

 

맹자에 있어서 도덕성은 모든 것의 위에 놓인다. 맹자가 언급한 ‘군자의 삼락’(君子之三樂)에는 왕노릇하는 것이 거기에 들지 못한다. ‘부모가 모두 생존해 있고 형제들이 모두 무고한 것, 그것이 첫째의 즐거움이다. 우러러 보아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 그것이 둘째의 즐거움이다. 천하의 영재들을 얻어서 그들을 교육하는 것, 그것이 세째의 즐거움이다. 군자에게는 이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천하에 왕노릇하는 것만은 거기에 들지 않는다.’ (진심 상 삼락장) 군자의 도덕성은 왕위보다도 귀한 것이며, 왕위 그 자체도 민중의 삶의 질과 나라의 정사보다 귀하게 여길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란 천명을 실천하는 것이며, 천명은 인간의 마음 속에 하늘이 부여한 성품, 즉 도덕적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왕에 부여된 정치적 임무이기 때문이다. 맹자에게 있어서 하늘은 도덕적인 하늘이다.(풍우란 106) 인간은 하늘을 앎으로써 천민(天民)이 될 수 있다. 하늘을 안다는 것은 ‘천작’(天爵), 즉 하늘의 벼슬을 얻는 것이다. ‘인의충신(仁義忠信) 등의 선을 즐겨 실천하고 싫증내지 않는 것은 하늘의 벼슬을 받은 것이오, 공경대부(公卿大夫) 등은 인간이 준 벼슬이다.’(고자 상 천작장) 천작을 얻는 길은 다른 일이 아니라 나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만물의 이치를 스스로 통찰해 보고 성실히 행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다.(진심상 만물장)

 

그러면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실제적인 정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맹자는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일정한 경제적 바탕을 갖추는 것을 ‘항산’이라고 하고 일정한 정신적 안정을 기하는 것을 ‘항심’이라고 한다. ‘항산이 있으면 항심이 있게 마련이지만 항상이 없으면 항심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등문공 상 위국장) 항산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무농(務農), 즉 농사에 전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항심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거학(擧學), 즉 교육을 진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맹자의 ‘귀족주의’(貴族主義)가 노출된다. 무농이라고 해서 나라의 모든 인민이 농업에 종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거학이라고 해서 모든 인민이 교육을 받는다는 말이 아이다.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소인(小人) 혹은 야인 (野人)의 일이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군자 혹은 대인(大人)의 일이다.

‘대인’과 ‘소인’, 혹은 ‘군자’와 ‘야인’의 구분은 사회적 계급의 구분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공자는 그 구분을 도덕적 품위의 구분으로 사용하였다. 맹자도 대인과 소인은 큰 몸 즉 마음을 쓰는 사람과 작은 몸 즉 육체를 쓰는 사람으로 구분할 때 그것은 도덕적 품위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마음을 쓰서 선성을 계발하면 군자가 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하여 육신의 욕정에만 매이면 소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맹자는 한 편으로 모든 사람은 선성을 확충하거나 회복하면서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 군자가 아닌 소인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 마음을 쓰는 사람(勞心者)을 육체적 힘을 쓰는 사람들(勞力者)이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은 ‘천하의 통의(通義)’라고 하였다.(등문공 상 신농장) 이러한 사회적 기능의 분담은 옛 「좌전」(左傳)에 ‘군자는 마음을 쓰고 소인은 힘을 쓰는 것, 이러한 전통은 옛 임금 때부터 내려 오는 제도이다’라는 말에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토지제도상으로도 정전제(井田制) 아래서 노심자 계급을 위한 공전(公田)을 먼저 가꾸고 그것이 끝난 후에야 사전(私田)을 돌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등문공 상 위국장) 그리고 학교를 세워서 교육을 하는 것도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나 ‘군자의 삼락’에서 언급되었듯이 천하의 영재를 모아서 가르치는 것이다. 즉, 엘리티즘의 국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노심자가 노력자의 부양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의 도덕주의적 논거에 있다. 공손추가 옛 「시경」(詩經)에 ‘일하지 않고서 먹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는데 군자가 농사를 짓지 않고서도 살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고 물었을 때 맹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군자가 나라에 살고 있으므로 임금이 그를 등용하여 안부존영(安富尊榮)을 기할 수 있고, 그 나라의 젊은이들이 군자를 따라서 배우면 효제충신(孝弟忠信)을 지키게 된다. 그러니 군자는 거저 녹을 먹는 것이 결코 아니다.’(진심상 시왈장)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유인은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여가를 누리면서 학문에 종사하여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과 거의 유사한 사고의 경향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귀족계급 자체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었고 맹자의 경우는 사회적 기능의 분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민은 인간의 이성적 활동을 할 수 없고 맹자늬 소인은 선성을 계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❹ 맹자와 순자

공자의 유가사상은 두 갈래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그 하나는 증자(曾子)가 이끌어 맹자로 이어지는 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자하(子夏)가 이끌어 순자(荀子)로 이어지는 학파이다. 증자와 맹자의 계틍은 주로 인의(仁義)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일관된 체제를 발전시킨데 비하여 자하와 순자의 계통은 예의(禮義)를 중시하여 실천적 원리의 체제를 발전시켰다. 순자(기원전 322 - 234)는 맹자의 뒤에 태어난 사람으로 직하문(稷下門)에서 활동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학자였다. 순자의 사상은 맹자의 성선설에 대립되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여 후대, 특히 송(宋) 나라의 유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록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맹자와는 성선설과 성악설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교육의 과제는 다같이 선성을 기르는 것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이다. 맹자는 선한 성품의 회복을 교육적 과제로 삼았으나, 순자는 악한 성품의 개조를 교육적 과제로 삼았다. 맹자는 도덕성의 선천성을 주장한 셈이지만, 순자는 도덕성의 사회성을 제시하였다. 순자는 착한 인간은 선천적 본성의 회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후륭한 관습과 제도가 사람을 착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맹자는 천도(天道)와 천심(天心)을 중시하였으나, 순자는 인도와 인심을 중시하였다. 순자의 도는 천지의 도(天地之道)가 아니라 사람이 지켜야 할 도(人之所道)이다. ‘도는 하늘의 도도 아니고 땅의 도도 아니다. 사람이 도로 삼아서 행하는 것이며 군자가 행하는 바 그것이 도다’(儒效篇) 순자의 이론에서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없다. 그는 성인(聖人)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군자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공경하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 소인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놓아 두고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날마다 진보하나 소인은 날마다 퇴보할 수밖에 없다.’(天論篇)

 

순자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모든 것의 근본이요, 처음이요, 아무 것도 손대지 않은 소박한 그대로를 말한다. 만약 인간에게 본성이라는 것이 없으면 인위적인 노력으로 더 할 것이 없고 또한 인위적인 노력이 없다면 인간의 본성은 아름다와질 수가 없다.(禮論篇) 순자에게 있어서 본성은 악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인데 이것을 착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인위적인 것(僞)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제 사람의 본성을 보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고 그것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자연히 다른 사람과 싸워서 빼앗으며는 마음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 사람은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소리와 색을 좋아하는 이목(耳目)의 욕망이 있어서 이것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자연히 음란한 행실이 생기게 되고 동시에 예의와 조리가 없어지는 법이다.(性惡篇)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도덕적으로 착하게 될 수 있는가? 인간의 본성이 본래 악한 것이므로 그대로는 세상의 혼란을 가져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옛 성왕(聖王)은 예(禮)를 제정하여 모두 지키게 하였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반드시 스승과 법도가 있기 때문에 바로 잡히고 예가 있기 때문에 다스려진다. 예는 바로 인위적으로 본성을 바른 기준에 의해서 바로 잡은 것이며, 그것은 사회적 산물이다. 유가에 있어서 예는, 앞서 공자를 논할 때 이미 언급했듯이, 매우 광범한 뜻을 지니고 있다. 예는 예의(禮儀), 의식(儀式), 제도(制度), 관습(慣習) 등을 포괄하는 것이다. ‘예라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의 욕망을 알맞게 길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먹줄은 직선의 최고 표준이고, 저울은 공평의 최고 표준이며, 그림쇠는 방형(方型)과 원형(圓型)의 최고 표준이며, 예는 인도의 최고 극치이다.’ 그리고 ‘예는 긴 것은 끊어 주고, 짧은 것은 이어 주고, 넘치는 것은 덜어 주고, 모자라는 것은 보태 주는 것이다.’(예론편)

 

순자는 예의의 수양이 있느냐 없느냐로써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였다. 수양은 곧 도(道)를 아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마음이 어떻게 도를 알 수 있는가? ‘대청명’(大淸明)의 원리가 있다. 즉, 마음을 비우고 하나로 가다듬어서 고요하게 한다는 것이다. 순자도 맹자와 같이 마음이 육체보다 크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음은 육체의 왕이며 신통하고 영묘한 주체로서 명령을 내리되 외부로부터 명령을 받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解弊篇) 그러나 수양은 사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군자가 되는 길은 사색에만 잠기는 것보다 배워서 실천으로 옮겨져야 한다. ‘군자의 학문은 귀에 들어가 마음에 붙고 몸에 퍼져서 행동으로 나타난다.’ ‘듣지 않음은 들음만 못하고 들음은 보는 것만 못하고 보는 것은 아는 것만 같지 않고 아는 것은 행함만 못하다. ... 성인은 인의에 근거하고 시비를 바로 하며 언행을 같게 하여 조금고 어긋남이 없으며 딴 길이 없고 오직그것을 행할 뿐이다.’(유효편) 마음은 도를 알지만 몸에 의한 실천이 따라야 한다.

 

마음의 작용으로 생각하고 깨닫는 과정이 있고 환경과의 관계에서 예에 따른 좋은 습관을 길러야 선의 경지에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수양을 위한 학문은 범인(凡人)으로부터 선비, 군자, 성인의 경지로 나아가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이러한 학문은 「詩書」의 경전을 외우는 데서 시작하여 최고 표준이 되는 「예기」(禮記)를 정독하여 몸소 실천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다. 어진 스승의 지도를 받고 예의를 실천하며 마음을 하나로 가다듬어 통일하고 덕성의 조리를 몸에 익히면 자연히 완벽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순자는 또한 완전한 예는 마치 훌륭한 음악이 천지와 동화하는 것과 같이 천지와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음악은 덕성의 교육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는 음악을 예찬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음악은 대체로 즐겁다. 인간의 감정으로서는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악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음악이 없을 수 없다. 즐거우면 반드시 소리로 나타내고 행동으로 표현된다. 사람으로서 즐거움이 없을 수 없다면 반드시 겉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겉으로 표현된 것이 도에 맞지 아니하면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옛 성왕은 그 혼란을 싫어하여 아송(雅頌)의 음악을 제정하여 길잡이로 하고 그리로 하여금 족히 즐겁도록 하되 함부러 이탈하지 않게 하였다. 가사의 뜻은 충분히 또렷하면서도 끊이지 않게 하였다. 그 소리는 굽기도 하고 곧기도 하며, 복잡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하며, 날카롭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며, 꺾이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여 충분히 사람의 마음이 착하도록 감동을 줄 것이며, 사악하고 더러운 기운이 닫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음악이라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데 탁월한 방법이 될 수 있다.(樂論篇)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와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가 결과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 맹자는 인간의 악한 성품이나 행동은 본연의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본성이 흐려지고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이 마비된 현상으로 본 데 비하여, 순자는 악한 성품과 행동 그대로가 인간의 본성으로 보고 성인의 경지는 그러한 본성을 다듬어 예(禮)을 실천한 결과라고 보았다. 맹자는 악한 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본연으로 되돌아 감을 의미하였고, 순자는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은 관습과 제도로써 인간의 마음을 바로 잡은 것을 의미하였다. 설명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수양과 학문의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적 본성에 대한 차이는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존엄성을 평가는 데 중요한 차이를 나타낸다. 맹자는 본연의 인간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순자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순자는 관습과 제도가 지닌 도덕적 질서와 의미를 높게 평가함으로써 문화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수용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맹종(孟宗) : --- 󰃫 고사성어 <맹종곡죽(孟宗哭竹)>

 

모윤숙(毛允淑, 1909~1990, 영운)

 

· 함남 원산 생, 이화여전 영문과 졸업

· 처녀 시집 [빛나는 지역](1934) 출간

· 신문학 초기 [시원(詩苑)] 동인

· 산문 시집 [렌의 애가(哀歌)](1948) 출간

·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 한국 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 역임

· 1975년 서사시 <논개> 발표

· 1980년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등 60편을 미국에서 영역 출간

· 1990년 6. 7 병고 끝에 별세

---  시 <밤호수>, <이 생명을>

 

▲ 동방의 여인들 * 항목색인 : 친일문학

 

새날이라서 / 상 차려 즐기지 않겠습니다. / 입던 옷 그대로 / 먹던 밥 그대로 / 달 가워 새아침을 맞이하렵니다. //

동은 새로 밝고 / 바람은 다시 맑아졌습니다. / 훤한 하늘 사이로 / 힘차게 나는 독수리나래 / 쳐다보며 호흡을 준비합니다 //

비단치마 모르고 / 연지분도 다아 버린 채 /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라. / 온갖 꾸밈에서 / 행복을 사려던 지난 날에서 / 풀렸습니다 / 벗어났습니다. //

들어보세요 / 저 날카로운 바람 사이에서 / 미래를 창조하는 / 우렁찬 고함과 /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 산 발자국 소리를 //

우리는 새날의 딸 / 동방의 여인입니다.

 

*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고 영·미의 4백년 침략의 마수에서 동아 10억을 구출하고 동아인을 위한 대동아 건설을 노래하고 있다.

 

󰏐 [사람들] `모윤숙문학 재조명' 세미나

 

한국여성문학인회가 주최한 [모윤숙문학의 재조명] 세미나가 11일 오후 4시 서울 플라자호텔 22층 덕수홀에서 열렸다. 이날 세미나는 모윤숙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렌의 애가] 출간 60주년을 맞아 마련됐다.

 

추은희 한국여성문학인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모윤숙선생님은 자각된인간으로 발돋움할 수 없었던 어려운 시절을 살면서 남성 못지 않은 꿋꿋한 의지의 세계를 혼신으로 살아 나오셨고 위대한 문학과 민족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면서 {거품같이 허물어지고 사그러지는 이 삭막한시대에 마음 깊은 곳의 향수와 그리움을 찾듯 다시 모윤숙 문학의 세계에 저희들은 들어가 본다}고 말했다. 추회장은 또 {오늘은 음력으로 3월5일 모윤숙선생님의 생신날}이라며 {우리와 함께 이 자리에 계신다면 88세미수이니 오늘의 행사는 더 큰 보람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세미나는 최동호 고려대교수, 김유선 장안전문대교수 등의 주제발표에 이어 참석자들의 질의-토론으로 진행됐다. 이날 모임에는 전숙희 국제펜클럽부회장, 조경희 전예술원 전당이사장, 시인 김종길 김남조, 소설가 김이연, 시인 성춘복, 노향림, 이경희, 전옥주, 이영춘, 김영은씨 등이 참석했다.

 

묵적(墨翟) : --- 󰃫 고사성어 <묵적지수(墨翟之守)>

 

미생(尾生) : --- 󰃫 고사성어 <미생지신(尾生之信)>

 

미첼, 마가렛(Mitchell, Margaret, 1900-1949)

 

· 미국 여류 소설가

· 남북전쟁에서 취재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크게 인기를 모아 퓰리처상을 탐

---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민태원(閔泰瑗, 1894-1935, 우보·牛步)

 

· 소설가. 언론인 충남 서산 생. 와세다 대학 종경부 졸업

· 신소설기와 현대소설기에 걸쳐 활약한 작가

· 작품 : 번역작품 <무쇠탈>, <서유기>, 단편소설 <소녀>, 수필 <청춘예찬>

  민태원문학비(서산 음암휴게소옆 대로변) : 두 면의 화강석에 검은 돌을 붙여 한면에는 초 상과 약력을, 다른 면에는 ‘청춘예찬’을 새겨 놓았다.

---  수필 <청춘예찬>

 

박경리(朴景利, 1927- )

 

· 경남 충무생. 진주여고 졸

· 1956년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되어 문단 등단

·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 <전도(剪刀)>, <불신시대>

· <전장과 시장>(1965) 제2회 여류문학상 수상

  유적지 - 박경리 문학기념관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742-9 현거주지 중심, 영동고속도로 원주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시내로 진입, 서원대로변 끝부분, 한국도로공사 공사가 조성하고 있 는 박경리 기념공원 내)

 

󰏐 (문학광장) <토지> 광복이후 대표소설로 뽑혀

 

박경리씨의 대하소설 [토지]가 광복 이후 한국 소설사를 대표하는 소설로 선정됐다. 계간 [문예중앙]이 문학 평론가 5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해방 50년 대표 소설 50편]에서 [토지]는 총 52표를 얻어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2위는 49표를 얻은 최인훈씨의 [광장], 3위는 45표를 얻은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이 각각 차지했다. 50편 중에 여러 편에 걸쳐 다득표를 얻은 작가들은 황순원, 김원일, 박완서(5편), 이문열씨(4편) 등이다.

 

이밖에 대표소설 50편에서 10위권에 든 작가와 작품의 득표순서는 다음과 같다. 황석영 [장길산], 안수길 [북간도],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김주영 [객주], 김원일 [노을], 이문열 [영웅시대],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 박경리 대하소설「토지」,「서사음악극」으로 꾸민다

 

박경리씨의 대하소설 「토지」가 서사 음악극으로 무대에 올려진다.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상임지휘자 김영동)이 5일 오후 7시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선보이는 「토지」(전4막)는 박씨의 소설을 80분짜리 음악극으로 새롭게 꾸민 것. 전통음악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온 김영동씨가 작곡하고 시인겸 소설가 이승하씨가 원작을 각색했다.

 

작곡자 김씨는 『5부작 전체를 극화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1, 2부만 축약해서 40여편의 노래에 담았다』면서 『일제하 민중들의 끈질긴 삶과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자 하는 강한 집념을 음악으로 얼마나 잘 풀어 내느냐가 큰 고민이었다』고 작업과정을 밝혔다.

 

그는 『「토지」의 묘미를 전하는데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경상도 방언을 리듬감있는 음악언어로 바꾸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며 『기존의 음악극이 판소리 위주였던데 비해 이 작품은 3박자 리듬의 민요에 바탕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음악극 「토지」는 원작과 달리 주인공 서희보다는 민초를 대표하는 용이와 월선이 쪽에 극의 비중을 두고 있으며 합창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인물들이 사건이 있을 때마다 무대에 등장해 노래하며 줄거리를 풀어가는 식으로 진행된다.

 

극은 어머니 별당아씨가 머슴과 함께 달아나자 어린 서희가 눈물과 앙탈로 주변 사람들을 들볶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어 동학의 접주 김개남이 절에 불공드리러 온 윤씨부인을 겁탈해 환이를 낳게되고 환이가 서희엄마를 데리고 달아나는 사건이 2막에 담긴다.

 

조준구에게 재산을 모두 빼앗긴뒤 서희가 주변사람들과 함께 북간도로 떠나는 사연(3막)에 이어 길상과 결혼한 서희가 두아들을 낳은 뒤 조준구로부터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장면(4막)에서 막을 내린다.

 

전통가곡 이수자인 강권순씨가 서희역을 맡았고 용이역은 판소리 영화「휘모리」의 주인공을 맡았던 이태백, 월선역으로는 국립국악원의 젊은 소리꾼 유미리씨가 출연한다.

 

󰏐 소설가 박경리씨 [동아일보] 창간 75주년 특별기고

 

세상이 무섭게 변해간다는 것은 요즘 누구나 하는 얘기로 충격적이거나 감동적인 것이 못된다. 매사는 그 빈도가 거듭될수록 신선함 격렬함이 사라지게 마련이고 타성에 빠지게 돼 있다. 지속적이지 못한 것은 에너지하고 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그것은 인간의 한계가 아닌가싶다. 그 한계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 적응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응이 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 살아남을 수도 있고 소멸돼 버릴 수도 있다는 양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역사의 명운같은 것이기도 하다.

 

세계화 방향제시를얘기는 좀 달라지지만 민족주의에도 두가지 측면이 있다. 과거 일제가 내 민족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삶의 터전을 강점했을 때 민족주의에는 당위성이 있었고 도덕적이며 또한 정의였다. 반면 타민족을 도륙하고 국토를 강탈한 일본의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그 당위성을 인정할 수 없고 부도덕하며 불의였다.

 

그러나 힘의 논리로 가치기준을 삼는 사람은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을 말한다. 물론 그것은 호도(糊塗)에 불과한 것, 기실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생명들은 생존할 만큼 취할 뿐이므로 욕망무한의 인간이나 집단이 내세우는 약육강식은 내용적으로 그 개념이 다르다.

 

힘의 논리에 의하면 남을 정벌하여 나를, 국가를 부강하게 했다면 그것은 애국이며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은 치욕이라. 그러니까 살인자 강도도 영광이요 피해자는 전리품(戰利品)이라는 가치전도, 이른바 군국주의의 강변인데 그곳에는 문화가 있을 수 없다. 동물에게 문화가 없듯이. 세계화, 세계주의에도 양면성은 있다. 일찍이 알렉산더가, 가깝게는 일본, 독일의 히틀러가 전쟁을 전제로 세계정복을 꾀했지만 사실 세계주의는 인류 마지막의 꿈이기도 하다. 세계정부를 구심점으로 전쟁없는 평화, 인종 간의 약탈없는 평등을 이상으로 한 꿈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세계화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불분명하다. 무한경쟁이라는 말이 출정가처럼 울려퍼지고 실제 무역전쟁이라는 용어까지 나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실 다음에 다가올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무한경쟁의 끝은 어디메일까. 요즘 세계추세를 보면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와 세계화가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세계주의와 세계화가 다르기 때문일까. 묘하게도 과거 식민지 쟁탈의 악몽같은 시대가 연상된다. 영토에서 경제로 대상이 바뀌었을 뿐 쟁탈전은 여전하니 말이다.

 

시대에 맞는 신문으로 물론 우리는 과거의 쓰라림, 그 전철을 밟지 않겠 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며 미래를 위해 현실을 희생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위해 미래를 희생시킬 수 없는 것 또한 절실한 문제다. 이 딜레마를 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세계화의 작업이 아닐까.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 衣食住를 받쳐주는 생산보다 소위 삶의 질을 높인다는 산업의 생산고가 훨씬 앞지르고 있는 오늘,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삶의 질을 높인다는 바로 그것(文明)때문에 인류는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는 사실이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의식주는 자연과 더불어 순환하고 환원되는 것이지만 기본을 넘은 여타의 것은, 그것에 쏟아부은 인력과 자원은 순환하는 것이 아니며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며 결국 쓰레기로 남아서 환경이 파괴되고 오염되고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킬 뿐이다.

 

그렇다고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돌아갈 수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화의 방향을 깊이 생각해야 하며 인류가 더불어 살아남을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21세기는 고도의 기술이 지구복원에 집약되어야 하고 순환하고 환원되는 새로운질서를 강구해야 하며 삶의 질을 내용에서 높여 가야 지구사막화 인간사막화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민족 수난기에 선도적 역할, 민족의 희망이기도 했던 東亞日報는 오늘 어떠한 위상일까. 생각해보면 영상매체나 첨단으로 치닫는 시대에 신문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럴 때 신문은 다시 선도적 역할, 희망적 존재로서, 인류 생존을 위한 보다 본질적인 문제, 삶의 터전에다 말뚝을 박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미래로 향한 우리들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박계형(朴啓馨) : 소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 󰃫 <베스트 셀러> 󰏐 비등단작가

 

박남수(朴南秀, 1918-1994)

 

· 시인. 평양 생. 일본 중앙대학 졸. 조선식산은행 근무.

· 초기에는 자연적 서경과 서정 속에서 절박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시를 씀.

· 후기에는 존재성을 규명하려는 주지적 경향.

· 시집 : [초롱불](1940), [갈매기 소묘](1957), [신의 쓰레기](1964), [새의 암장](1969)

---  <강>, <국화>, <아침 이미지>, <새>, <마을>, <무제(無題)> (* 박남수 마지막 작품)

 

󰏐 관련기사

 

유신 시절인 지난 75년 홀연히 미국 이민을 떠났던 재미 원로시인 박남수(朴南秀)씨가 1994년 9월 17일 하오 2시(현지시간) 미국 뉴저지주 자택에서 숙환(宿患)으 로 별세했다.

 

1918년 평양에서 태어난 박시인은 평양 숭인(崇仁)상업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39년 鄭芝溶(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문장(文章)]지를 통해 등단했다.

 

박시인은 40년 첫시집인 [초롱불]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새의 암장(暗葬)]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시를 써 왔다. 92년 부인과 사별한 박시인은 93년 4월에는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그린 [그리고 그 이후]라는 시집을 펴내는 등 최근까지도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웠다.

 

57년에는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 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세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94년 6월에는 조국 통일에의 절실한 심경을 노래한 시 <꿈의 물감>으로 서울 신문사가 제정한 <공초(空超)문학상(제2회)을 수상했다.

 

▲ 강(江)

 

밤새도록 충혈된 등(燈)이 하나

검은 강을 비추고 있다. //

도시의 가슴을 뚫고 흐르는 강은

산물소리처럼 맑지는 않지만, 가끔

점벙 물고기 뛰는 소리를 낸다 //

사위(四圍)가 어두워서

잘못 길을 잡은 물고기는

오예(汚穢)의 물을 마시고

한 길을 뛰어 오르는 고통을 치솟는가 //

밤새도록 충혈된 등이 하나

검은 강을 비추고 있다. //

 

박두진(朴斗鎭, 1916- , 혜산·兮山)

 

· 경기도 안성생

· [문장]지를 통해 등단. <향연>, <묘지송>, <낙엽송>, <들국화> 등

· 소재를 하늘, 해, 바다로 택해 ‘영원에 이르는 주재자요, 생명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빛과 참과 선과 미의식, 그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노래.

· 이러한 초기의 경향이 사회적 현실(일제/광복/6.25)에 대한 불굴의 자세로 뜨거운 신념을 관 념적인 시어로 표현하려는 경향으로 변화

·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1946년 [청록집]을 발간해 자연파(청록파)로 불림.

· 시집 : 제1기 작품-[해], [오도(午禱)] (‘해’, ‘도봉’, ‘청산도’ 등 작품)

·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 등

· 건국대, 우석대, 이화여대, 연세대 교수 역임

---  시 <청산도(靑山道)>, <향현(香峴)>, <도봉(道峯)>, <어서 너는 오너라>, <묘지송>, <해>, <강2>, <꽃>, <돌의 노래>, <삼월 일일의 하늘>

 

▲ 낙엽송

 

가지마다 파아란 하늘을

받들었다.

파릇한 새순이 꽃보다 고옵다. //

 

청송이라도 가을 되면

홀홀 낙엽진다 하느니 //

봄마다 새로 젊은

자랑이 사랑옵다. //

 

낮에는 햇볕 입고

밤에 별이 소올솔 내리는

이슬 마시고 //

 

파릇한 새순이

여름으로 자란다. //

 

󰏐 [문학단신] 박두진씨 산문전집 [박두진 문학정신] 출간

 

시인 혜산 박두진씨가 산문전집 '박두진 문학정신'(전7권.신원문화사)을 냈다. 수필을 모은 '고향에 갔더니' '여전히 돌은 말이 없다' '숲에는 새소리가' '밤이 캄캄할수록 아침은 더 가깝다'등 네 권에는 50여년 시를 짓는 틈틈이 써온 글을,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에는 시의 본질과 기능, 현대시의 위상등 시평론을 실었다. 또 '한국현대시 감상에서' '시적 번뇌와 시적 목마름'에서는 자신의 시세계를 청록집시대, 해시대, 오도시대, 거미와 성좌시대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박목월, 윤석중, 윤동주등의 시작품을 해설하고, 마종기, 유경환, 함홍근, 이해인, 김유신 등 후배 시인의 작품을 격려하고 칭찬했다.

 

박목월(朴木月, 1916-1978, 본성명 박영종)

 

· 경북 경주생

· 1955년 제3회 자유문학상 수상

· [문장]에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가 1939년 9월 추천, <산그늘>(12월) 등과 1940년 < 가을 어스럼>, <연륜>(1940. 9)으로 등단.

· [청록집]을 통해 한국적인 자연과 전통 정서 노래. 민요조, 향토적 소재.

· 시세계 : 박목월의 ‘자연’에 대하여

 

1) 정한모 평 : “향토적이면서 향토적인 현실의 풍경이 아니라 공간을 초월하여 살아있는 상징적인 실재(實在)로서의 자연이다.”

2) 김윤식 평 : “환상적인 자연이며,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있는 자족적(自足的) 자연이 다.”

· 시집 : [청록집]

- 첫시집 [산도화] : 외재적 가락과 압축적인 시로서 함축미 추구

- 제2시집 [난(蘭)·기타] : 육친의 죽음과 비극적인 민족적 체험

- 제3시집 [청운(晴雲)) : 가정 생활

- 제4시집 [경상도의 가랑닢] : 고향 경상도의 언어 탐구

(cf. 김영랑, 서정주 등의 전라도방언 탐구)

· 자작시해설집 [보랏빛 소묘](1959)

 

- 유적지

1) 생가(경주시 건천읍 모량2리)

2) 목월시비(한양대학교 자연과학관 건물 뒤) : 시 ‘산도화’ 새김

--- 시 <가정>, <청노루>, <하관>, <물새알 산새알>, <산도화>(자작시 해설 포함)

--- 어휘 <이별>

 

박범신(朴範信, 1946- )

 

· 충남 논산 연무읍 생. 황북국민학교 졸.

· 1967년 전주교육대 졸업

(성적이 좋지 않아 오지, 전북 무주 괴목국민학교 교사로 발령)

· 1969년 교직 사직하고, 무작정 상경하여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부랑아로 지냄

· 1971년 원광대학에 편입학, 졸업. 그후 강경여중교에서 교편 생활

· 1973년 결혼 후 단편 <여름의 잔해>로 신춘문예 당선, 상경한 후 문영여중 국어교사로 취직

· 작품 : <토끼와 잠수함>, <식구>, <아버지의 평화>, <청운의 꿈>, <역신의 축제>, <아침 에 날린 풍선>, 첫창작집 <토끼와 잠수함>, <돌아눕는 혼> 등

· 현,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재직

 

󰏐 문단소식

 

우리 시대의 인기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소설가 박범신씨가 “당분간 소설을 쓰지 않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겠다”고 주변에 밝혀 문단의 화제가 되고 있다.

 

박씨는 현재 일간지와 월간지 등에 연재 중인 작품을 12월 말로 모두 마무리 짓고 일정 기간 동안 독서와 강의(명지전문대)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이것은 절필(絶筆)선언이 아니고 다만 상상력의 고갈로 인해소설 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 지쳐 있는 상태다. 그래서 글이 고일 때까지 논리적 학습이 되는 칼럼 등이나 논픽션 등에만 관심을 갖겠다”고 했다.

 

올해 초부터 용인에 있는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맡고 있는 박씨는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고 학생들을 더 열심히 가르치고 싶은 것도 내 소망”이라고 말했다.

 

󰏐 [나의 신인시절] 소설가 박범신

 

신춘문예에 당선돼 가슴떨리는 성찬으로서 작가라는 이름이 내게 부여됐을 때, 나는 내 앞날이 광휘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문학을 가리켜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나는 말했다. 신혼이었던 젊은 아내와 더불어 먹고 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상경, 정릉천변에 단칸방 하나 얻어든 것이 데뷔하던 73년 봄이었다. 생활 환경은 남루한데다가 희망 또한 없었지만 신인 작가로서 내 눈빛은 광대한 세상을 향해 곧게 열려있었다.

 

나는 세상 한가운데에 자신을 힘있게 세울 수 있기를 꿈꿨다. 어린 시절부터 거의 선험적으로 나를 억압하고 있던 고독감도 그때는 무섭지 않았고, 대를 물려온 가난도 두렵지 않았다. 작가라는 이름은 내게 있어 세상과 맞서 싸우는 하나의 빛나는 무기였으며, 동시에 구원의 [썩지 않은 새 동아줄]과도 같았다.

 

그러나 실패는 이내 확인됐다. 첫 번째 고통은 밤세워 쓴 원고를 발표할 데가 없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고통은 가난이었다. 단편소설 원고를 들고 몇몇 문예지 편집자를 찾아가곤 했지만 지면을 얻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도대체 작품을 발표해야 세상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든 나를 세울 수 있을 게 아닌가. 게다가 가난의 사슬 또한 낭만주의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문학청년인 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잔인했다.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나몰래 뒷구멍으로 흘러나온 양복지를 팔러다녔다. 그 시절엔 쌀을 아끼고자 점심을 굶은 날이 더 많았었노라고 아내는 나중에 술회했다. 내 이상과 포부는 상처받았다.

 

그래도 나는 썼다.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임산부처럼 나의 내부에 들어차 있었다.

연필을 들면 내 감수성의 통로엔 휘황한 수천의 나비떼들이 생동감있게 날아올랐다. 어쩌다가는 아내 몰래 울면서 쓰는 날도 있었다. 나는 작가야,라고 소리내어 중얼거릴 때, 그 혼잣말에 곧잘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럼. 그렇고 말고. 나는 작가야. 나는 내 자신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 얼음같이 차가운 세상 때문에 상처받았지만, 그러나 작가라는 이름은 언제나 내게 떨리는 성찬이었고 방부제였다.

 

죽음같은 고독 속에 산 내 젊은 날. 작가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잔인한 고독에 눌려 끝내 죽었거나, 아니면 차가운 세상 때문에 내 영혼이 썩어 오욕의 땅에 묻혔거나 했을 것이다. 작가라는 이름에게서 신인시절이나 지금이나 나는 너무도 많은 은혜를 받고 있다. 그 이름에게 광영있을진저!

 

박성룡(朴成龍, 1934- )

 

· 전남 해남생. 중앙대 문리대. 기자생활

· 1961년 [문학예술]지 추천 문단데뷔

· 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 시 <풀잎>

 

박영준(朴榮濬, 1911- )

 

· 평남 강서 생. 연희전문 문과 졸

· 1934년 단편 <모범경작생>이 [조선일보], 장편 <일년(一年)>이 [신동아]에 당선, 문단 진출.

---  소설 <모범경작생>

 

박완서(朴婉緖, 1931- )

 

· 소설가.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박적골 생(장녀)

· 세 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읜 작가에게 숙부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음

· 1944년 숙명여고 입학, 1950년 서울대 국문과 입학, 난리 통에 오빠와 숙부가 비명에 죽고 고향은 이북 땅이 됨

· 노모, 올케, 조카들 등 오빠가 남긴 유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미군부대 전전

· 1953년 그곳에서 만난 남편과 열애, 결혼 (1남 4녀를 둠)

· 소설가 한무숙이 가끔 찾아와 살림에만 파묻힌 작가에게 더러 자극이 됨

· 1970년 [여성동아]에 장편소설 현상모집 [나목(裸木)] 당선

· 제5회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다수 수상

· 작품 <어떤 나들이>(71), <부처님 근처>(73), <배반의 여름>(76), <엄마의 말뚝 1>(1980),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83),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89) 등 다수

---  소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엄마의 말뚝>, 장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 제25회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 수상작품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한탄과 울분을 벽을 향해 토해낸다. 그 절실한 사연은 감동이 되어 절벽을 허물어 버리고 만다. 건강하지는 않아도 살아 있는 생명이 자랑스레 죽은 아들보다 낫다 함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생물적인 비명이 바로 그 줄거리.

 

박용래(朴龍來, 1925-1980)

 

· 충남 논산 강경생, 1943년 강경상업학교 전교수석 졸

· 대전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며 시작

· 55년 국어교사로 교단에 섰으나 65년 그만두고 대전 교외에 칩거, 시작(詩作) 전념

· 55년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가 추천돼 문단 본격 등단

· 시집 [싸락눈], [강아지풀], [백발(白髮)의 꽃대궁]

· 유고시집 [박용래 시선집 - 먼바다]

  박용래시비 : 대전 보문산(458미터) 사정공원 소재(시인 조막인의 열정적 주도로 건립)

---  문학이론 <한>

---  시 <쓰디쓴 담배재>[중앙일보] 91.2.11 “사후 10년만에 재조명”, <겨울밤>

---  <김관식>, <괴짜 문인들>

 

󰏐 박용래론

 

1. 시인의 관점 : ‘반쯤만 창문을 열고’ 세상을 바라봄

- 그무렵 나는 늘상 방안 아이였다.... 그후 육친인 홍래(鴻來)누님과의 사별은 더더 욱 나를 늘상 방안 아이로 만들었지만, 사정이야 어쨌든 지금도 나는 방안 아이. 더없이 어깨가 좁은 늙은 방안 아이. 반의 반쯤만 창문을 열고 본다.

 

▲ 담장

오동꽃 우러르면 함부로 노한 일 뉘우친다.

잊었던 무덤 생각난다.

검정치마, 흰 저고리, 옆 가르마, 젊어 죽은

홍래(鴻來) 누이 생각도 난다.

오동꽃 우러르면 담장에 떠는 아슴한 대낮

발등에 지는 더디고 느린 원뢰(遠雷) (전문)

 

2. 시인의 성격 : 향토시인의 한 사람

- 향토시인이란 생활거점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시적 소재’가 향토적임

 

- 자연관

(1) 산, 바다 등 의식적으로 찾아가 만나는 자연

(2) 명상의 대상물

(3) 강호가도의 유풍으로 은둔자의 이상향 ............. 이 아니라,

(4) 생활 속의 자연, 향토에서의 삶을 바탕으로 한 무의식적으로 만나는 자연임

 

3. 시의 주체 : 소외된 인간 (가까운 혈육과 이웃들)

 

▲ 설야(雪夜)

 

눈보라가 휘돌아간 밤

얼룩진 벽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고산 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오리

맷돌 가는 소리

 

4. 시인의 성격 : 눈물의 시인, 정한의 시인

 

① 눈물의 시인

“박 시인은 눈물이 많았다. 그렇게 불러도 된다면 가위 눈물의 시인이 그였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그러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② 정한(情恨)의 색조

바닥난 통파 / 움 속의 강설 / 꼭두새벽부터 / 강설을 쓸고 /

동짓날 / 사락죽이나 / 끓이며 / 휘젓고 있을 / 귀뿌리 가진 /

후살이의 / 목수건

* 이중적 소외 : 후살이(개사,改嫁)를 살아가는 가난한 여인

③ 한(恨)의 의의 : 소외된 민중의 견고한 토착적 감정이라는 사실의 발견

 

5. 소재의 일상성 : 보잘 것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발견

“하늘타리,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 수레바퀴, 멍멍이, 빈잔 등은 내가 찾는 소재, 우렁껍질, 먹감, 진눈깨비, 조랑말, 홍래 누이(16세때 사별한) 등은 내가 즐겨 쓰는 소재“

 

6. 의의

① 향토적 삶에 뿌리를 두고 ‘전통정서를 노래한 시인’

· 김소월, 김영랑, 초기의 박목월, 신경림(전통적 율격에 바탕을 두고 노래)을 이어 전통적 율격 을 ‘이미지’로 대신하려는 의도

 

▷ 이미저리(imagery, 심상)을 이용한 상상적 제고에 대한 시인의 노력

(1) 단시(短詩)의 형태를 취함

(2) 사물을 그 자체로 인식 (응시의 기법)

(3) 병치은유 : 무관한 두 사물을 병치 - 새로운 의미 부여

 

②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언어의 군더더기를 일체 없앤, 시적 압축으로 섬세하고도 간결한 함축미를 꾀한 한국 현대시의 한 전형

 

박용철(朴龍喆, 1904-1938, 용아·龍兒)

 

· 전남 광산 송정 생. 광주 공립 보통학교 졸

· 1916년 휘문의숙에서 배재학당으로 전학, 졸업 직전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 가 동경 외국어 학교 독문과 입학,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 귀국 후 연희 전문에 입학하여 위당 정인보 로부터 시조를 배움

· 1930년 김영랑(金永郞), 정지용(鄭芝溶) 이하윤(異河潤) 등과 함께 [시문학]을 발간, 주간(主 幹)이 됨.

· 그 후 한계를 느끼고 [문예월간]을 창간함. 또 그 후에 순문예지 [문학]을 창간했으나 재정난 으로 제3호까지 발간하고 중단함

· 경향파 문학에 대항하여 순수 서정시 운동을 전개. 감상적인 가락에 인생의 회의가 그 내용 의 주조를 이룸

· 독일 시인 하이네와 릴케 작품의 번역 작업에도 열중. 하우스만의 영향을 받아 주지주의적인 평론을 전개함

· 한때 극예술연구회 일원으로 활동

· 작품 <떠나가는 배>, <싸늘한 이마>( [시문학], 1930) 등

 박용철시비(광주 광주공원)

---  시 <떠나가는 배>

 

󰏐 [시문학] 창간에 대하여

시라는 것은 시인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한낱 존재이다. 조각과 회화가 한 개의 존재인 것과 꼭같이 시나 음악도 한낱 존재이다. 우리가 거기서 받는 인상은 혹은 비애, 환희, 우수, 혹은 평온, 명정(明淨), 혹은 격렬, 숭엄 등 진실로 추상적 형용사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그 자체수대로의 무한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방향이든 시란 한낱 고처(高處)이다. 물론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 내려온다. 시의 심경(心境)은 우리 일상생활의 수평 정서보다 더 숭고하거나 우아하거나 더 섬세하거나 더 장대하거나 더 격월(激越)하거나 어떻든 ‘더’를 요구한다. 거기서 우리에게까지 ‘무엇’이 흘러 ‘내려와’야만 한다. ( 그 ‘무엇’까지를 세밀하게 규정하려면 다만 편협에 빠지고 말 뿐이다. ) 우리 평상인보다 남달리 고귀하고 예민한 심정이 더욱이 어떠한 순간에 감득(感得)한 희귀한 심경을 표현시킨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흘려주는 자양(滋養)이 되는 좋은 시일 것이다. 여기에 감상이 창작에서 내리지 않는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박이문(朴異汶, 1931- )

 

· 시인. 불문학자. 평론가

· 1955년 [사상계]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 시작 활동과 더불어 프랑스 현대 문학작품의 국내 소개에 힘씀

· 이화여대, 미국 시몬즈 여대 교수 역임

· 현, 포항공대 교수 재직

 

박인로(朴仁老, 1561-1642, 노계·蘆溪)

 

· 무인(武人)으로서, 임란 때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돌아왔으나 가산이 빈한하여 극히 어렵게 살았음

· 그러한 가운데도 안빈낙도하겠다는 신념이 그의 가사 <누항사>의 끝부분에 잘 표현되어 있음

· <누항사>, <선상탄>, <태평사>, <조홍시가>

· 7편의 가사, 72수의 시조를 남김

· 저서 : [노계집(蘆溪集)]

  박인로문학비(부산 수영공원) : 두 차례나 수군으로 복무한 수영성(현 수영공원)에 <선상탄 > 일부가 새겨진 비가 있다.

---  가사 <선상탄>, <누항사>, 시조 <동기로 세 몸 되어 한 몸같이 지내다가>,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다>(‘조홍시가’ 중)

 

박인환(朴寅煥, 1926-1956) : 30세 요절

 

· 시인. 강원도 인제생. 평양 의전(醫專) 중퇴

· [자유신문], [경향신문] 기자

· 1949년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김수영, 김경린과 공동 발간.

· 후반기 동인. 현대 도시 문명의 퇴폐적인 모습과 그에 따른 우수를 표현.

 

- 관련 유적지

1) 생가터 : 강원도 인제군 남북리 303번지에서 살았다는 이야기(확인 불명)

2) 시비 : 군축령에 세워졌던 시비는 도로 확장 관계로 철거, 군청 창고에 보관

---  시 <목마와 숙녀>

 

박재삼(朴在森, 1933 - 1997. 6)

 

· 1933년 동경 출생, 삼천포고교를 거쳐 고려대 수학

· 1949년부터 간행된 [문예]와 1955년부터 간행된 [현대문학]을 통해 시와 시조로 등단(서정주 의 추천)

· 25여년 간 바둑 관전평을 집필, 박 국수(國手)로 잘 알려져 있음

· 개인적인 추억과 생활 주변의 체험을 비애어린 서정적 감각으로 엮음

- 그의 시에는 ‘운다’(동사)와 ‘눈물’(명사)이란 시어가 많이 등장함

---  눈물의 시인  <박용래> 

· 자연스럽게 피어오르는 사랑의 마음을 고전 속의 인물 춘향을 통해 형상화.

· 한(恨)의 정서를 노래, 한국적 서정시의 전통을 계승한 시

· 특징 : 평이한 조사법, 직설법 회피한 우회적 표현, 사투리 이용한 독특한 영탄법

· 시집 : 첫시집 [춘향의 마음], [햇빛 속에서], [천년의 바람], [비 듣는 가을 나무], [해와 달의 궤적], [다시 그리움으로] 등 15권의 시집,

· <자연> : 전 10연으로 된 연작시

---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추억에서>, <자연>, <죽세공 노래>

---  어휘 <한(恨)>의 정서

 

󰏐 자기망각의 자연

그가 즐겨 묘사하는 자연은 인간적인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그 속에 들어가 편히 쉴 수 있는 자기망각의 자연이다. 당연히 시간성과 공간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한국의 하층민들의 숙명관과 허무의식을 짙게 내포하고 있다.

 

󰏐 '서러움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자유인' 박재삼시인

 

[한(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미당 서정주는 박재삼 시인을 이렇게 불렀다. [20세기 한국의 마지막 서정시인]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찬사가 아닐 서정의 시인이었던 그가 근 30년의 투병생활 끝에 8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화안한 꽃밭 같네, 참/........./돛단배 두엇, 해동갑하여 그 참 흰나비 같네]([봄바다에서]중) .

 

그 화안한 꽃밭 같은 고향 삼천포 바다 너머의 세계로, 흰나비처럼 시인은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는 [슬픔]의 시인이었다. 감상기 섞인 [한]이 아닌, 진정한 [서러움]의 시인이었다. 그의 서러움은 이 절창을 낳았다.

 

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박시인은 4살부터 스무살 무렵까지 삼천포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광주리 이고 멍게 장사를 하고 아버지는 지게 지고 노동했다. 그는 유년시절을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바닷가에서 자라/ 꽃게를 잡아 함부로 다리를 분질렀던 것/../햇빛에 반짝이던 물꽃무늬 물살을 마구 헤엄쳤던 것]([신록을 보며]중 )으로 회상하기도 했다.

고려대 국문과 중퇴 후 신문 등에 바둑관전평을 쓰는 일 말고는 평생을 다른 직업 갖는 일없이 살았던 이 자유인에게 대신 가혹한 가난과 병마가 덮쳤다. 35세에 처음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그는 임종시까지 만성 신부전증과 심근경색, 창(창)으로 투병해왔다. 문단에서는 [박재삼 시인 돕기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남은 시로 이제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천년의 바람] 전문)

 

박종화(朴鍾和, 1901-1981, 월탄)

 

· 소설가, 시인. 서울 생. 휘문의숙 졸

· 1921년 [장미촌](최초 시 전문지)에 <오외의 청춘> 발표, 등단

· 1922년 [백조] 동인으로, 단편 <목 메이는 여자>

· 1925년부터는 주로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

· 시집 : [흑방비곡(黑房秘曲)], [청자부(靑磁賦)]

· 장편 : <금삼(錦衫)의 피>(1936), <다정불심>(1940), <대춘부>, <임진왜란>, <세종대왕> 등

· 문학비, 묘소 : 경기도 장흥면 부곡1리

 

박지원(朴趾源, 영조13-순조5, 1737-1805, 연암·燕巖, 연상, 열상외사, 공작관, 방경각)

 

· 본관 반남(潘南). 지돈녕부사를 역임한 박필균의 손자

· 서울의 서쪽 반송방 야동에서 출생

·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16세에 처음으로 처삼촌인 이양천에게 글을 배움

· 영조 36년 할아버지 사망 후 생활이 곤궁해졌으며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

· 영조 44년(1768) 백탑 부근으로 이사, 박제가, 유득공, 홍대용 등과 학문적 교유

· 정조 4년(1780) 종형 박명원(사절단 우두머리인 正使)을 따라 북경을 다녀와 [열하일기] 저술

· 정조 10년 뒤늦게 음사(蔭仕)를 통해 등용, 평시서 주부, 사복시 주부를 역임

· 정조 16년 안의 현감으로 시작, 순조 1년(1800) 양양 부사를 끝으로 줄곧 지방관을 역임함

- 지방관 시절 [과농소초(課農小抄)] 등 완성

  한문소설

* [열하일기] 옥갑야화에 수록

· <허생전>

* [열하일기] 궐내정사(闕內程史)에 수록

· <호질(虎叱)> : 도학자의 거짓과 간악(奸惡)함을 풍자. 액자식.

* [방경각외전]에 수록

· <마장전(馬駔傳)> : 미천한 자들의 교우(交友)를 통해 충의에 대한 재래적 견해 비판. 양 반 사회 비판

·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 천민(賤民)의 성실성과 양반의 무위도식을 비교

· <양반전> : 양반의 타락과 무위 도식 풍자

· <민옹전(閔翁傳)> : 올바른 삶의 길을 소설의 효용에 실어 전달

· <김신선전(金神仙傳)> : 신선 사상의 허무맹랑함 풍자

· <광문자전(廣文者傳)> : 거지인 ‘광문’을 통해 미천한 자의 의로운 삶을 칭송

  주제별

· 중상주의적 이상향 추구 : 허생전

· 허위에 찬 양반 풍자 : 호질, 양반전, 마장전

· 문학관 제시 : 민옹전

· 인간성 옹호 : 광문자전, 예덕선생전

---  책 <열하일기(熱河日記)>

 

박태원(朴泰遠, 1909-1987)

 

· 소설가. 서울 생. 경성제일고보 졸. 일본 호세이 대학 예과 중퇴

· ‘구인회’ 회원

· 식민지 치하 서민층의 변모상을 객관적으로 묘사, 1930년대 대표 작가로 위치

· 월북작가

---  장편 <천변풍경>,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 월북문인들>

 

󰏐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박태원의 `천변풍경' 청계천

 

청계천은 경복궁 서북쪽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서울의 중 심부를 뚫고 동진한 다음 답십리 부근에서 남쪽으로 물길을 틀어 내려가 다가는 성동구 사근동과 송정동, 성수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중랑천과 합 수해 한강으로 흘러든다. 성수대교와 동호대교의 어름이다. 태백시 인근 에서 샘솟아 강화 북쪽의 서해로 몸을 풀기까지 5백㎞ 가까운 한강의 흐 름이 대체로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강의 제2지류인 청 계천의 물길은 본류와는 정반대되는 행로를 밟고 있는 셈이다. 본디 이름이 청풍계천(淸風溪川)인 청계천은 그러나 일제 때 광화문 네 거리에서 광교까지가 1차로 복개된 데 이어 1958년부터 시작된 여러차례 의 복개로 지금은 용두동과 마장동 어름 이하를 제하고는 정작 물길을 볼 수는 없게 돼 있다. 폭 50m의 아스팔트가 덮이고 그것도 모자라 삼일고가도로가 공중을 가로지르는 지금의 청계천에서 `맑은 개울'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짐작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복개되 기 전의 청계천에는 제법 맑은 물이 흘렀고, 시골의 여느 개울가와 마찬 가지로 아낙들은 빨래더미 속에 일신의 번뇌와 세상 근심을 함께 넣어 두 들기고 비벼 빨았다. 박태원(1909~86)의 장편 <천변풍경>은 바로 이 청계 천 빨래터의 광경으로부터 시작한다.  

 

󰡒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히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 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립지는 않은 모양이다.

 

1936~7년에 걸쳐 월간 <조광>에 두차례로 나뉘어 연재된 <천변풍경>은 일제 통치의 극성기라 할 30년대 중반 서울 서민층의 삶을 꼼꼼히 재현하 고 있다. 모두 50개의 짧은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제목이 가리키는 대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장삼이사들의 삶의 이모저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수십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중심되는 사건도 주인공이라 할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이 소설에서 어찌 보면 청계천이야말로 진짜 주 인공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청계천 주변이라는 것말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과 사건들을 하나의 소설 속에 모아 놓는다. 요컨 대 청계천은 이 소설의 조직원리가 된다.

 

젊은 첩 안성댁이 학생놈과 보쟁이는 모양을 보고 속을 태우는 민주사, 바람둥이 남편에게 시집을 갔다가 남편의 무관심과 시부모의 학대를 못 이겨 이혼하고 돌아오는 이쁜이, 처녀과부 신세로 호색한인 시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무작정 상경한 금순이, 술집 여급에서 부잣집 맏며느리로 신 분이 격상됐으나 남편의 변심과 시댁 식구들의 냉대로 괴로워하는 하나꼬 , 금순이와 하나꼬를 친언니처럼 보살피는 또다른 여급 기미꼬, 시골 가 평에서 상경해 어리보기 취급을 당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서울 깍쟁이로 변모하는 소년 창수, 청계천 다리 밑 움막에 거주하는 거지들….  소설은 이들 천변 인물군상의 1년 남짓한 삶을 카메라의 눈처럼 충실히 좇을 뿐 그것들을 모아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일구어내거나 섣불리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소설은 문득 시작하고 불쑥 끝난다. 기승 전결이 따로 없다.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도 천변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고, 소설이 끝난 다음에도 그들의 삶은 아랑곳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럴진대, 소설의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소설 속에서 청계천은 근대와 전근대, 도시와 시골이 만나는 접경이다. 창수와 금순이, 만돌 어멈 등은 각자의 사정이야 어떠하든 시골집을 떠나 서울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시험해보고자 할 때 청계천변을 그 첫 무대로 삼는다. 그곳에는 기생과 카페 여급이 나란히 활보하며, 냉혹한 이익의 추구와 끈끈한 인간애가 공존한다. 시골에서와는 달리 청계천의 빨래터에 는 엄연히 주인이 있어 빨래꾼들에게서 돈을 받아서는 다시 나라에 세금 을 낸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모르고 빈손으로 나온 시골뜨기 아낙이 다른 빨래꾼들의 역성 덕분에 첫번의 요금 지불을 면제받을 만큼은 인정이 살 아 있다.  

 

<천변풍경>은 이처럼 두 개의 시대의 공존과 자리바꿈을 세필화의 필치 로 그려내지만, 그것은 그뿐,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임화가 그 자연주의적 편향을 지목해 `세태소설'이라 이름붙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 다. 소설에는 소박한 휴머니즘의 관점은 있을지언정 뚜렷한 이념이나 사 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소설 속 어느 인물에게서도 당시의 민족적․계급적 모순에 대한 자각을 엿볼 수 없음은 물론 그에 대한 밖으 로부터의 비판도 부재하다는 사실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바람 없고 따뜻한 날, 남향한 대청에는 햇빛도 잘 󰡒바람 없고 따뜻한 날, 남향한 대청에는 햇빛도 잘 들고, 그곳에가 시 어머니와 며느리, 귀돌 어멈과 할멈이, 각기 자기들의 일거리를 가지고 앉아 육십팔원짜리 `콘서트'로 `쩨․오․띠․케'의 주간방송, 고담이라든 그러한 것을 흥미 깊게 듣고 있는 풍경은, 말하자면, 평화―그 물건이었 다󰡓는 대목은 그 직후에 나온 채만식의 <태평천하>와 <탁류>의 풍자적 어투나 비극적 분위기와 얼마나 다른가.

 

박태원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이효석 등 30년대 모더니스트 들과 함께 문학친목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해 활동한다. 그들이 내세운 바는 문학적 전문성과 프로의식이었거니와, 그것은 실은 카프 계열의 계급문학에 대한 반발에 다름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중편 `소설가 구보 씨의 1일'과 <천변풍경>은 당시로 보아 최고의 문학적 기교를 갖춘 작품 으로서 춘원 이광수와 월탄 박종화 등의 상찬이 잇따랐다. 그 박태원이 해방기에는 좌익계인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을 맡고 한국전쟁중 월 북해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는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한 사실은 지금도 숱한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 다 괜은 소리… 덮긴, 말이 그렇지, 이 넓은 개천을 그래 무슨 수루 덮는단 말이유? 온, 참….

 

소설 속 한 인물은 청계천 복개에 관한 소문을 듣고 턱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마나 그 넓은 청계천은 어김없이 아스팔트로 뒤덮이고 이 제 그 위로는 자동차들이 질주한다. 빨래하는 아낙들이 깃들었던 천변의 가옥 자리에는 높직높직한 건물들이 솟아 있다. 한때 맑았던 물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소음과 진동에 짓눌리며 질식 상태로 흘러간다. 광교를 중심 으로 한 소설의 무대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청계천 평화시장은 1970 년 봉제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감싸안고 오늘도 청 계천의 복개된 도로 아래로는 한때 맑았으나 더이상은 맑지 않은 물이 동 쪽을 향해 흘러간다.

 

박팽년(朴彭年, 1417-1456)

 

· 사육신 일인. 세종 때 등과. 훈민정음 창제 동참.

·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

· 작품

- 시조 (1) <가마귀 눈 비 마자 ~> --- 󰃫 <일편단심(一片丹心)>

- 시조 (2)

 

금생여수(金生麗水)ㅣ라 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ㅣ라 들 뫼마다 玉이 나랴.

아모리 女必從夫(여필종부)인들 님마다 조랴.

(물이라고 해서 다 같은 물이며, 산이라 해서 다 같은 산인가. 여자라고 다 같은 여자인 가?)

 

박화성(朴花城, 1904-1980)

 

· 전남 목포 생. 일본여자대학 영문학 전공

· 귀국 후 1926년에 단편 <추석전야>를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발표

· 1931년 <하수도 공사> 발표

 유적지-박화성문학기념관(목포 유달산 구시립도서관 2층)

---  문학이론 <가난을 소재로 ~>

---  소설 <한귀(旱鬼)>

 

방이 : --- 󰃫 <방이설화>

 

백결선생(百結先生)

 

󰏐 [삼국사기] 열전(列傳) 백결선생 조(條)

 

“대악은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 백결선생이 지은 것이다. 백결선생은 신라 자비왕 때 사람이나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 낭산(현, 경주) 밑에 살았는데 집이 몹시 가난하였다. 옷을 백 군데나 기워 마치 메추리가 달린 것 같아 동네 사람들이 백결선생이라고 불렀다.

 

백결선생은 영계기(榮啓期)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희로비환(喜怒悲歡)과 불평이 있으면 모두 이로써 위로하였다. 어느 세모(歲暮)에 이웃집에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듣고 그의 아내가 ‘사람들은 모두 떡방아를 찧는데 우리만 홀로 이를 못하니, 어찌 이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 것입니까?’라고 하니, 이 말을 듣고 선생은 하늘을 우러러 탄신하면서

 

‘무릇 사생(死生)은 목숨에 있고, 부귀(富貴)는 재천(在天)인 것이다. 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가는 것을 쫓을 수 없는데, 그대는 어찌 이를 상심하는가? 내 그대를 위하여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슬픔을 위로해 주겠다.’

하여 곧 거문고를 타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것이 세상에 알려져 [대악(碓樂)]이라 불리게 되었다.”

 

--- 고려 속요 <상저가(相杵歌)>

 

백광홍(白光弘, 1522-1556, 기봉)

 

· 전남 장흥군 안양면 생. 조선 시대 중기 문인

· 아우 백광훈(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이 났었음

· 율곡, 기대승, 정철 등과 교류, 명종7년(1552) 31세에 문과 급제

· 34세 때 평안도 평사가 되어 서도의 국경지역에서 일할 때 지은 가사 <관서별곡>이 전함

 

백석(1912~ )

 

· 평양 정주생

· 오산고보를 거쳐 1934년 일본의 청산학원을 졸업

· 1935년에 조선일보에 시[정주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

 

󰏐 [문학] 시인 백석을 다시 만난다…전집 발간

 

{오지항아리에는 삼춘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춘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에 두부산적을 꿰었다/ 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둘렀다}(시[고방]의 일부)잊혀진 시인 백석이 돌아왔다.

 

백석은 평안도 방언을 시어로 사용하여 우리의 토속적인 삶의 모습을 이야기시 형태로 형상화한 3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36년 발표한 [사슴]으로 한국시사에 큰 발자취를 남겨 일부 국문학자들 사이에는 {남에는 정지용, 북에는 백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지만 일반독자에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해방이후 북한에서 활동, 납-월북 작가 작품 해금조치 이전까지는 잊혀진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백석전집](실천문학사)이 발간되어 백석에 대한 전체적인 조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전집]은 시와 소설을 비롯, 동화시, 수필, 평론, 정론에 이르기까지 백석의 저작을 망라하고 있다. 해방이전의 시95편, 수필 3편, 소설 3편을 비롯, 해방이후 발표한 동화시 12편, 시13편, 평문 4편, 정론 3편이 실려있다. 북한에서 발표한 작품 33편은 이번에 최초로 독자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백석은 본명이 백기행으로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고보를 거쳐 34년 일본의 청산학원을 졸업했으며 35년에 조선일보에 시[정주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전집]을 엮은 문학평론가 김재용씨는 {백석문학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서는 일제하는 물론이고 북한에서 발표한 작품까지 포함해 전반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밝히고 있다.

 

백석 작품의 특색은 민속적 세계다. 그는 전근대 민중들의 생활속에 전해내려오는 풍속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 [여우 난골족]이나[칠월백중] 등의 시에 나타나는 공동체는 근대인이 잃어버린 원형질의 세계다. 백석의 또 다른 특색은 지방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쓴 시가 많다는 것이다. 남행시초를 비롯해 관북지방, 특히 관서지방의 방언을 의식적으로 사용했다. 표준어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지만, 바탕에는 중앙집권화가 지방나름의 구체적인 삶을 압살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해방직후 만주에서 고향인 평북 정주에 돌아온 그는 당시의 남북현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꿈을 가졌던 백석에게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큰 차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결국 6․25이후에도 남하하지 않고 삼팔선 이북에서 활동한 그는 본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시 쓰기를 버리고 번역을 하는 한편, 동시나 동화를 발표하기도 한다. 57년에 나온 [집게네 형제]는 시의 형식을 빌린 동화시집으로 혁명이나 계급의식보다 휴머니즘을 고양하려는 글들이 주로 실려있다.

 

이런 경향이 북한내부의 당파분쟁에 겹쳐 백석은 58년 사실상 숙청되어 삼수군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양치기 일을 한다. 그리고 62년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 비판과 연관되어 마침 내 창작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신애(白信愛, 1908-1939)

 

· 경북 영천 생. 대구도립사범학교 졸. 영천공립보통학교 교사

· 1928년 박계화란 필명으로 단편 <나의 어머니>가 [조선일보]에 당선

· 주요작 : <꺼래이>, <복선이>, <낙오>, <적빈> 등

· 초기작은 동반자 작가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난한 밑바닥 삶을 현실적으로 그림

---  어휘 <가난> ‘적빈’

 

백아(伯牙) : --- 󰃫 고사성어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유(伯兪) : --- 󰃫 고사성어 <백유지효(伯兪之孝)>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 형 백이와 동생 숙제는 성(姓)이 묵태(墨胎), 중국 은나라의 처사(處士)

·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

·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반대하는 사상을 투영시킨 인물.

· 주(周)나라의 무왕이 은(殷)나라를 치려는 것을 말리다가 듣지 않으므로, 주나라 곡식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어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살다가 죽음.

 

법정(法頂) 스님

 

· 1954년 효봉선사 문하에 입산, 출가

· 조계산 불일암 수도

· 저서 : <영혼의 母音>,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무소유> 등

---  수필 <무소유(無所有)>

 

베이컨, 프랜시스(Francis Bacon, 1561-1626)

 

·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자연 과학의 방법론으로서 귀납법을 체계화함.

· 특히 인간의 편견(偏見)을 4가지 우상(偶像)으로 비유

· 그의 실천 철학은 최초의 본격 수필로 알려진 [수상록]에 잘 나타남.

 

󰏐 베이컨의 ‘우상론(偶像論)’ --- 󰃫 관련작품, 이규보 <슬견설(蝨犬說)>

 

올바른 지짓을 얻기 위해서는 진리 탐구에 방해가 되는 모든 편견을 배제해야 한다고 함. 이러한 <편견(偏見)>을 ‘우상(idola)’이라 함.

 

❶ 종족(種族)의 우상

종족 일반의 천성에 뿌리박고 있는 인간의 그릇된 성향에서 오는 편견, 즉 모든 사물을 인 간 본위로 생각함 (예컨대, 자기가 기쁘다고 꽃이 웃는다고 생각)

 

❷ 동굴(洞窟)의 우상

종족의 우상과 대조되는, 개인적 편견. 즉 각 개인이 타고난 성격, 자란 환경, 받은 교육 등 에 의해 형성된 편견. 마치 동굴에서 밖의 넓은 세계를 보려는 일이나 다름 없음(예컨대, 배금 주의자는 돈의 소유량으로 사람을 평가)

 

❸ 시장(市場)의 우상

사회생활하는 데서 생기는 편견. 이는 인간들이 사회생활하면서 사용하는 언어가 빚어내는 편견임. (예컨대 운명의 여신이 있는 줄 알고 숭배하는 일)

 

❹ 극장(劇場)의 우상

자신이 보고 생각하는 바에 따르기보다 권위나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생기 는 편견. (예컨대 극장에서 연출되는 가공적 이야기를 맹신함.)

 

베스트 셀러(best-seller) 작가들

 

① 1950년대 이전

· 이광수 <무정>

· 한용운 <님의 침묵>

· 심훈 <상록수>

· 박계주 <순애보(殉愛譜)>

· 이광수 <춘원춘란지절(春園春蘭之節)>

· 김구 <백범일지(白凡逸志)>

· 최현배 <우리말본>

· 한글학회 <큰사전>

· 정비석 <자유부인>

· 조흔파 <얄개전>

· 을유문화사간 <한국동란>

· 김래성 <청춘극장>

 

② 1960년대

· 이어령 <흙속에 저 바람속에>

· 김용제 <김삿갓 방랑기>

· 이윤복 <저 하늘에도 슬픔이>

· 유주현 <조선총독부>

· 유치환(이영도 편)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헤르만 헤세 <데미안>

· 전혜린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최희숙 <슬픔은 강물처럼>

 

③ 1970년대

· 최인호 <별들의 고향>

· 한수산 <부초(浮草)>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이문열 <사람의 아들>

· 미카엘 엔데 <모모>

· 생떽쥐베리 <어린 왕자>

· 황석영 <어둠의 자식들>

· 이동철 <꼬방동네 사람들>

· 조선작 <영자의 전성시대>

· 김성동 <만다라>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존재)이냐>

 

④ 1980년대

· 김홍신 <인간시장>

·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 박경리 <토지>

· 황석영 <장길산>

· 조정래 <태백산맥>

· 서정윤 <홀로서기>

· 이해인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도종환 <접시꽃 당신>

· 김정빈 <단(丹)>

· 정비석 <소설 손자병법>

· 바스콘셀로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 크리슈나무르티 <자기로부터의 혁명>

· 이시형 <배짱으로 삽시다>

 

⑤ 1990년대

 

[ 종 합 ]

· 미소 한 잔 눈물 두 스푼(허수경․세기)

· 하얀배(윤후명외․문학사상사)

· 밤새 훌쩍 크는 아이들(김영희․시공사)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홍세화․창작과 비평사)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이정하․푸른숲)

·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김정일․푸른숲)

· 고등어(공지영․웅진출판)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로버트 제임스 월러․시공사)

· 컴퓨터 길라잡이(임채성외․정보문화사)

· 전원주택 나도 주인이 될 수 있다(이광훈․살림)

 

[ 인 문 ]

· 작은 인간(마빈 해리스․민음사)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유홍준․창작과 비평사)

· 역사는 끝났는가(송두율․당대)

· 법과 문학사이(안경환․까치)

· 욕망의 진화(데이비드 부스․백년도서)

· 이야기 한국사(교양국사연구회․청아출판사)

· 국화와 칼(루스 베네딕트․을유문화사)

·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윤태영외․청아출판사)

· 식인과 제왕(마빈 해리스․한길사)

· 절로 가는 마음2(신영훈․책만드는 집)

 

󰏐 비등단 작가 베스트 셀러

 

어렸을 때, 지금은 찾아보기조차 힘든 『자유공론』이나 『새농민』등의 잡지에 실렸던 『안나카레리나』나 『에덴의 동쪽』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의 다른편에서 나를 더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것은 지금처럼 「옐로 페이퍼」를 쉽게 접할 수 없던 시절 그와 거의 맞먹는 호기심으로 읽은 수많은 무협지와 애정소설들이다. 그 유명한 김래성(金來成)의 소설 『청춘극장』과 『벌레 먹은 장미』를 읽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대부분 뻔한 결말과 지극히 단순한 감정에 호소하는 듯한 그 읽을거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노리는 행복과 사랑과 화해의 실체가 가짜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나를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마력을 발휘했다.

 

대체로 베스트셀러 작품들이 보여주는 특징중 하나는 인간의 보편적 약점이나 호기심을 직접적으로 자극한다는 점이다. 처음 몇장만 읽으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단박 알 수 있는 단순한 내용과 구조, 감정에의 직선적 호소, 근본적으로 존재론적 불안을 안고 있는 대중의 마음을 교양 욕구와 지적 호기심으로 보상하려는 것 등이 그렇다.

 

해방후 수많은 베스트셀러 작품들이 명멸해 갔다. 이 베스트셀러의 작가들 중에는 문단 등단절차를 밟은 이른바 「제도권 문인」보다 「비제도권 문인」들이 많다. 때문에 평단에서도 논의의 대상에서 대개 배제된다.

 

김래성의 『청춘극장』과 『벌레 먹은 장미』는 6․25를 겪으면서 읽을거리가 거의 없던 시절 청․장년층, 심지어 중․고생층까지 광범하게 파고든 소설이다. 50년대 풍속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정비석(鄭飛石)의 『자유부인』이 지식층을 파고들며 「공식적으로」 화제와 논란의 도마위에 올랐다면 『청춘극장』과 『벌레 먹은 장미』는 입에서 입을 통해 암암리에 읽혔다. 그러면서 성에 눈뜨게 해 연애학 지침서 구실까지 해냈다.

 

60년대 들어서면 박계형(朴啓馨)의 장편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을 꼽을 수 있다. 64년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朴씨를 동양라디오 현상문예 당선자로 만든 이 작품은 66년 출간돼 독서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 소설이 당시 많은 독자를 끌어들인 이유는 교양체험 이상의 사회적 일탈의 정서에 대한 폭넓은 교감을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사회적 일탈의 이야기에 대한 집착은 거의 성적 집착과 맞먹는다. 대중적 베스트셀러들은 바로 그 점을 파고든다.

 

때문에 베스트셀러의 등장에는 「우연의 필연」이라 할 반시대적․반문화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돼 있어야 한다.

그 시대가 바로 70년대다. 경제개발 최우선 정책과 유신으로 넘어가는 독재는 『별들의 고향』이나 『영자의 전성시대』에 나오는 경아나 영자 같은 수많은 술집여자를 만들어냈다. 억눌린 말과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 수 없을 때 술집에서 실컷 취하고 그 여자들과 어울리던 것과 같이 독자들은 그러한 소설속으로 빠져들었다.

 

70년대 들어 대중문학․상업문학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또 한국적 자본주의 발전의 영향이 컸다. 서서히 붕괴돼가는 농촌과 상대적으로 급증한 도시빈민의 유입은 그 시대 소설가들이 당면한 고통스럽고 절실한 문제였지만, 그런 소설들은 읽히지 않고 대중과 영합하는 상업적 소설만 읽혔다.솔직히 필자는 70년대 이른바 제도권 문인들의 베스트셀러와 비제도권 문인들의 그것들을 주제적 측면에서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단지 제도권 문인들의 문장과 구성이 좀더 세련됐을 뿐이다. 70년대에는 비등단 문인들이 베스트셀러 작가군에 거의 낄 수 없었다. 본격작가들이 대중 지향적 작품으로 독서시장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5․18로 열린 80년대에는 대중의 정서를 바꿔놓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으나 감정에 직선적으로 호소하는 제도권 작품들이 여전히 베스트셀러 행진을 했다. 독자들이 김홍신(金洪信)의 『인간시장』을 통해 폭력과 군사문화에 억압된 감정을 대리로 푸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본격문인들의 대중문학 지향성이 일단 진정되고 또 진보적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이 쇠퇴하기 시작한 80년대후반 들어 비제도권 문학이 베스트셀러로 속속 진입하게 된다.

 

이해인(李海仁)수녀의 맑고 잔잔한 감성시집『민들레의 영토』가 베스트셀러로 나서더니 이내 무명시인들의 낙서같은 시집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또 김정빈씨의 『단』을 시작으로 이은성(李恩成)씨의 『소설 동의보감』, 이재운(李載雲) 씨의 『소설 토정비결』, 황인경씨의 『소설 목민심서』등 「이상한 역사교양적 읽을거리」가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1백만부 단위로 팔리며 기세를 펴기 시작하며 90년대 비제도권의 본격상업문학시대를 맞게 된다.

 

이러한 추세를 타고 90년 대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은 4백만권 이상 나간 김진명(金辰明)씨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 작품으로 무명의 金씨는 막대한 인세와 함께 슈퍼셀러 작가로서의 유명세를 타고 국회의원후보로까지 진출했었다.

 

문학이 걷잡을 수 없이 상업성으로 휘말려들고 있는 이 때 이제 더이상 제도권․비제도권 등 문단의 양분은 효력을 잃은 것 같다. 소위 본격문학․순수문학을 하는 문인들은 이제 독서시장 밖으로 밀려나 비제도권 문인들이 문학의 이름으로 독자를 석권하는 상황을 넋놓고 바라보는 형국이 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이제 등단문인․비등단문인의 구분을 떠나 무엇이 문학이냐, 아니냐 하는 고전적 명제를 놓고 전면적 싸움을 벌여야 한다. 문학의 이름으로 더이상 독자, 나아가 사회와 인간성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 스테디 셀러 작가들

 

대를 이어 읽힐만한 문학이 있는 것은 후세에 물려줄 법전이 있는 것보다 더한 민족의 영광이다. 우리 문학은 시대의 한계를 넘어 계속 읽히는 작품들을 풍성히 산출한 공적이 있다.

 

시장의 변덕을 견디는 작품들이 많다는 것은 문학인들의 확고한 성취와 아울러 튼튼한 독서 공중의 형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스테디 셀러로 꼽히는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문학 생산과 소비의 성숙한 모습을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을지 모른다.

 

스테디 셀러의 기준은 매우 유동적이다. 출판하고 1년이 지난 후에도 연간 1천부가량 팔리는 책이라 하는가 하면, 매년 부수는 일정치 않으나 쇄나 판을 거듭하는 책이라 하기도 한다. 그것은 결국 꾸준히 팔리는 책이라는 막연한 한정 이상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부수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독자의 수요가 지속적인 작품들을 스테디 셀러로 상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광복전 문학작품 중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는 것에는 우선 김소월․한용운․정지용․윤동주의 시편이 있다. 김소월의 시는『진달래』(1925)․『소월시초』(1939)로 묶여져 나온 이후 국민시인이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사랑을 받아왔다. 그의 시집은 판본이 많아 현재 유통되고 있는 것만도 수십종에 이른다. 한용운의『님의 침묵』도 1926년 출간된 이후 수종의 판본으로 읽히고 있다.『정지용시집』(1935)․『백록담』(1941)에 실린 정지용의 시는 88년 월북․납북작가 해금조치 이후 여러 형태로 재간돼 독자를 늘려가고 있다. 스테디 셀러 시집의 대명사와 같은 윤동주 시집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로 처음 간행됐다. 해방전 소설 중에서는 이광수의 『무정』(1918), 염상섭의『삼대』(1931), 이기영의 『고향』(1937), 채만식의 『태평천하』(1940)등이 스테디셀러에 속한다. 이 작품들은 문학애호가들의 수요보다 문학교육에 따른 수요가 많은 편이다.

해방전 단편소설 중에서는 이상과 김유정의 작품이 많은 판본으로 유통되고 있다. 해방전부터 활동한 문인중에선 김동리와 황순원이 한동안 스테디 셀러를 낳았으나 근래엔 독자가 급격히 줄었다. 반면 서정주는 김소월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가장 많은 애독자가 있는 시인이다. 1983년 초판이 나온『미당 서정주 시전집』 만 해도 연간 2천~3천부를 찍고 있다. 해방후 스테디 셀러는 60년대 작품들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선 최인훈의 『광장』. 1961년 초판이 나온 이 작품은 연이은 비평적 관심과 찬사 속에서 많은 독자를 얻어왔으며 수차례 수정을 거치는 이색적인 기록도 남겼다. 1976년 『최인훈전집』의 제1권으로 간행된 판본이 현재 1백1쇄 29만부를 기록했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1962)은 대하소설 『토지』의 명성에 가려있긴 해도 꾸준히 읽히고 있는 장편이다.『서울 1964년 겨울』(1966)로 처음 묶여져 나온 김승옥의 단편들도 빼놓을 수 없다.

 

70년대부터는 창작과비평사․민음사․문학과지성사 등이 본격적인 스테디 셀러 시대를 열었다.

특히 대중 출판의 혜택을 보지 못하던 시집이 계속 팔리는 책자로 자리잡은 것은 이들 출판사의 기획과 관리 덕택이다. 70년대 스테디 셀러 시집으로는 김수영 신화의 발단을 연 『거대한 뿌리』(1974)와 민중적 서정시의 중시조격인 신경림의 『농무』(1975)가 대표적이다.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서두를 장식한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정현종의 『나는 별아저씨』(1978)도 꾸준한 판매를 기록하고 있다. 소설중에서는 황석영의 『객지』( 1974),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1976),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1979)이 매년 부수를 경신하고 있다. 박경리의 『토지』(1973), 황석영의 『장길산』(1976)도 70년대에 선보였다. 발행일 : 96년7월15일

80년대 스테디 셀러군에선 새로운 문학세대의 등장이 눈에 띈다.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1981),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곽재구의 『사평역에서』(198 3),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1984),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1989)이 출간 이후 줄곧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1982)는 판권이 바뀌기까지 애송시집으로 남아 있었고, 이해인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는 지금도 판매가 꾸준하다.

 

80년대의 두드러진 스테디 셀러 작가는 이문열이다.『젊은 날의 초상』(1981),『황제를 위하여』(1982),『변경』(1989)이 새로운 독자군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1989)은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경이적인 인기작. 윤흥길의 『장마』(1980),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1982), 강석경의『숲속의 방』(1986),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1987),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1987)도 수요가 끊기지 않는 책들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스테디 셀러가 모두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라하긴 어렵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우리 문학이 시대와 문화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쌓아온 창조적 업적들이 여기에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 책자들은 그 저자들의 재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독자들의 양식에 의해서도 살아남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독서공중의 심미적 향상이 수량적 확대 못지 않은 중요한 과제임을 스테디 셀러의 현황은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변영로(卞榮魯, 1898-1961, 수주·樹州)

 

· 서울생. 중앙학교 졸업 후 이화여전에서 교편생활 후 도미(渡美)

· 13세부터 한시 창작, 16세에 영시를 지어 [청춘]지에 발표.

· 우리 나라 신시에서 기교파의 선구 시인(기교에 중점을 두고 어귀의 선택과 연마에 시인적 재능을 보였으며, 민족의식을 세련된 기법으로 시화시킴)

· 캘리포니아 산호세 대학 졸, 귀국 후 [동아일보] 기자, [신동아] 편집국장

· 1920년 [폐허] 동인.

· 1924년 시집 [조선의 마음]에 <논개> 발표.

· 광복 후 성균관대 교수, 한국 펜클럽 회장 역임

· 1948년 제1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 초기작으로 <운상소요(雲上逍遙)>, <저녁놀빛>, <사벽송(四壁頌)>

· 작품경향

- ‘생시에 못뵈올 임’에서 볼 수 있는 서정성

- ‘논개’에서 배어나오는 민족주의 정신

· 작품집 : [수주 시문선], 변영로 유일 시집 [조선의 마음], 수필집 [명정 40년(酩酊40年)]

 

- 유적지

1) 묘(경기 부천시 고강동 산63번지 일대) : 변씨 일가 3대의 묘(변영로, 변영태, 변 영만 3형제, 그의 부모, 조부모)가 계단식으로 조성.

2) 논개비(전북 장수군 의암사 입구) : ‘논개’ 새김

---  수필 <명정40년>, 시 <논개>, <봄비>

---  책 <조선의 마음>

 

봉림대군(鳳林大君, 1619-1659) : 

 

조선 제17대 효종. 병자호란을 당해 청에 볼모로 잡혀가서 고 초를 겪고 귀국, 왕위에 오른 뒤 치욕을 씻고자 북벌정책을 펴기도 했음.

---  시조 <청석령 지나거냐 초하구ㅣ 어듸오>, <영릉(寧陵)>

 

브루너(J. Bruner, 미) : --- 󰃫 <인지발달이론>

 

아동의 정신, 사고, 인식의 발달을 다음 3단계로 보고 있다.

① 행동적 표시(enacting representation)

② 상기호적(像記號的) 표시(iconic representation)

③ 상징적 표시(symbolic representation)

⇨ 브루너의 언어기호의 핵심적 특성

(1) 간결성(compactness) (2) 생산성(generation)

 

사대 서가(書家, 조선시대) : 양사언, 안평대군, 김구, 한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 색인 : 샤르트르, 싸르트르

 

· 파리 해군 기술장교였던 쟝 바티스트 사르트르의 장남으로 출생

· 어머니 안느 마리 시바이쩌는 노베평화상 수상자인 시바이쩌의 사촌

 

󰏐 사상

 

❶ 존재(存在)와 무(無)

 

의식과 대상의 두 영역을 인정, 대상(객관적 존재)은 나의 의식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고 나의 의식도 내가 의식하는 대상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의식으로서의 존재(즉자존재·卽自存在)와 그것의 대상으로서의 존재(대자존재·對自存在)라고 했다. 즉 즉자존재는 그냥 있는 것, 충만된 것, 안정된 것, 즉 대상으로서의 모든 사물을 가리킨다. 사람도 대상화되면 즉자존재이다. 이에 대해 대자존재는 공허한 것, 욕망하는 것,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 했다. 이것은 곧 의식을 가진 인간을 말한다. 이같은 인간 존재를 다른 사물과 구별하여 실존(實存)이라 했다.

 

그는 또 대자존재(인간의식)에는 마치 과일의 심에 벌레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본시 무(無)가 들어 있다. 그러나 ‘무가 있다’는 것은 모순형용이므로 그는 ‘무는 있지 않고 있어진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 무 작용 때문에 대자존재는 부정하고, 항거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라 했다.

 

❷ 인간의 실존(實存)은 본질(本質)에 앞선다.

 

그에 의하면 모든 대상(사물)은 그것을 구상하고 만든 사람의 의도에 복종한다. 예컨대, 한 목수가 책상을 만들 경우 먼저 책상의 형태를 고안해 가지고, 일정한 나무로, 일정한 크기의 책상을 만든다. 미리 정해진 일정한 설계에 따라 그 책상은 만들어졌기 때문에, 즉 만들어지기 전부터 그 책상은 목수의 머리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기에 사실상 본질이 그 사물의 실재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어느 누구도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한 인간을 보면 그 인간은 순간 순간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을 내려서 행동한다. 그 인간이 잠시 후에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본질을 규정할 수 있는 길은 없으며, 그가 행한 행위에 의해 그의 본질을 말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우선 실존하고 나서, 본질이 후에 있는 존재다.

---  장용학 소설 <요한시집>

 

󰏐 [20세기를 만든 책] 사르트르 `지식인들을 위한 변명'

 

- 기존체 제에 대한 논란 통해 지식인의 존재이유 진단

 

[존재와 무]의 철학자이자 [구토]의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는 점차 잊혀져가는 사상가가 되고 있다. 하이데거로부터 사사받으며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존재와 무]를 썼으나 그것은 이제 오독의 대표적 사례로만 인용될 뿐 더 이상 고전의 명단에는 낄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구토]의 경우도 실존주의 문학의 원조로 평가를 받지만 작품성에서 고전으로 꼽히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오히려 지난 10여년간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해 프랑스 사상가들이 세계 지성계에서 큰 인기를 모은 동안에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사르트르라는 이름 넉자가 최근 다시 거명되기 시작한 것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다. 그가 65년 일본방문에서 행한 강연집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이 시점에서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관련해 재독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리오타르는 [지식인의 종언]을 선언했다. 이때 지식인은 체제비판적인 좌파지식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르트르가 옹호하려 했던 바로 그 지식인상이기도 하다.

 

10여년만에 다시 읽어보는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분명 그렇다. 기존체제에 대한 총체적 비판과 이에 맞서는 실천의 강조에서부터 {혜택받지 못한 계층의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또한 철저하게 연대를 맺어야 한다}는 역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반(ANTI)]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의 지식인은 그 정당성을 떠나 현실 속에서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지금은 [지식인]이란 단어에서 냉소적 뉘앙스까지 풍길 정도다.

 

이런 가운데 최근 다시 [지식인이란 누구이며 앞으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세계 각지에서 제기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여전히 사르트르적 입장이 유효하다는 차원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구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강조한다.

 

또 다른 입장은 이와 정반대에서 지식인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체제 싸움이 끝난 상황에서 지식계층의 역할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비판했던 기능적 지식인들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중간적 입장도 있다. 사르트르식의 접근법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후쿠야마식의 역사 종언론을 받아들여 모든 비판을 철회하는 것 또한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우리의 경우도 이런 중간적 입장에서 사르트르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물음은 이렇다. [90년 한국의 지식인은 누구이며 그들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사마천(司馬遷, 145?-86 B.C)

 

· 중국 전한의 역사가

· 기원전 108년에 태사령(太史令)이 됨

· 친구 이흥이 흉노족에게 항복한 것을 변호하다 궁형(宮刑)에 처해짐

·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기(史記)]를 저술

 

사육신(死六臣)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 의해 죽은 여섯 충신

·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성삼문, 박팽년

 

사피어(Edward Sapir, 1884-1939) & 워프(Benjamin Lee Whorf, 1897-1941)의 가설(假說)

 

: 언어의 상대성 이론 ---  <언어관>, <헤르더(Herder)>

 

· 언어의 <상대성>이론은 독일의 언어학자인 <헤르더>가 ‘민족 정신은 언어에서 나타나고, 동 화, 민요, 풍습 등에서도 창조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언어는 인간의 지식에 그 윤곽과 형태를 부여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싹트기 시작했다.

· 이 이론은 훔볼트와 신낭만파의 연구 성과로,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중요 한 원리로 정착되었으며, 20세기에와서 미국의 <사피어-워프의 가설>로 명명되어 상대성 이 론이 크게 주목을 끌고 있다.

 

󰏐 언어(言語)와 사고(思考)의 관계

 

사피어는 “인간은 보통 생각하듯이 객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를 매개로 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히 표현만의 수단이 아니다. 실세계라고 하는 것은 언어 습관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는 언어가 노출시키고 분절시켜 놓은 세계를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워프는 “언어는 우리의 행동과 사고의 양식을 주조(鑄造)한다.”는 말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객관적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인식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광선이 프리즘을 통과했을 때 나타나는 색깔이 일곱 가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색깔을 분류하는 말이 일곱 가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로 인접하고 있는 색, 예컨대 녹색과 청색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경계선은 아주 녹색도 아주 청색도 아니지만 그 부분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런 모호한 색깔도 분명하게 인식할 것이라고 말한다.

 

삼국지(三國志) 주요 인물

 

󰊱 촉(蜀)

 

  유비(劉備) : 자는 현덕(玄德), 한(漢)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아 유황숙이라고 일컫는다. 의형제인 관우·장비, 명참모 제갈 공명이 도움을 받아 군웅들 사이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장강의 중류와 상류 지역을 점령. 한중왕(漢中王)이 되었다가 촉의 황제가 되었으나, 천하 통일과 한 왕실 부흥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관우·장비의 복수를 위해 동오와 싸우다가 죽는다. 시호(諡號)는 소열제(昭烈帝).

  관우(關羽) : 자는 운장(雲長). 현덕에게 가장 충실한 지조와 충성의 인물. 의리는 강하나 인정에 약함(조조의 후의에 결국 조조를 죽이게 되는 상황에서 조조를 풀어 줌) 오의 기습으로 죽지만, 혼령으로 나타나 여몽을 죽게 한다. 작품에서 신격화되었을 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신으로 모신다.

  장비(張飛) : 자는 익덕(翼德). 호탕한 인물. 성급하고 화를 잘 내며 술에 취하면 부하를 친다. 결국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조운(趙雲) : 자는 자룡(子龍). 공손 찬을 섬겼으나 주인이 죽은 후에 현덕의 부하가 되어 위기에서 여러 번 현덕을 구한다.

  손건(孫乾) : 현덕의 보좌역, 연락관으로 활약.

  제갈 량(諸葛 亮) : 자는 공명(孔明). 촉의 군사령관. 와룡강에 은거해 있었으나 현덕의 삼고(三顧)의 예에 감격하여 천하 삼분의 계략을 세운다. 천문·지리에 능통하고 지략과 꾀는 초인적이다. 현덕이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된다. 현덕이 죽은 후에 다음 임금 아들 유선을 섬겨 남만을 평정한 후 북으로 쳐 올라가 위와 싸운다. 오장원의 진중(陣中)에서 죽는다.

  유선(劉禪) : 현덕의 아들. 아명은 아두(阿斗). 현덕이 죽은 후에 제위에 오른다. 내시 황호에게 미혹되어 전쟁을 게을리 하고 위에 항복한다. 재위 32년

  방통(龐統) : 자는 사원(士元). 호는 봉추(鳳雛). 처음에 강동에 살았으며, 적벽 싸움 때 연환(連環)의 계략으로 조조를 기만했으나, 후에 손 권에게 버림을 받아 현덕에게 와서 부군사가 된다.

  황충(黃忠) : 오호 대장의 하나로 활쏘기의 명수. 유표와 한현에게 충성했으나, 현덕에게 귀순, 여러 차례 전투에서 분전. 75세로 관우의 복수전에 자진하여 나섰다가 화살을 맞고 죽는다.

  위연(魏延) : 한현에게 충성했으나 현덕에게 귀순, 참모가 되어 공을 세우지만 야심가로 제갈 양이 죽자 반역한다.

  마초(馬超) : 서량 태수 마등의 아들. 오호대장의 하나. 부친이 조조에게 죽자 원수를 갚기 위해 조조를 추격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에 현덕에게 귀순한다.

  강유(姜維) : 본래 위 나라의 무장이나 촉에 항복한다. 공명의 병법을 전수받고 공명의 뒤를 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한다.

  관흥(關興) : 관우의 아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싸움에 나서면서부터 많은 공을 세운다.

  장포(張苞) : 장비의 아들. 관흥과 함께 여러 싸움에서 공을 세운다.

 

󰊲 위(魏)

 

  조조(曹操) : 자는 맹덕(孟德). 아버지 조숭(曹嵩)은 본성(本姓)이 하후(夏侯)씨였는데 중상시(中常侍) 조등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조씨가 된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놀이, 사냥을 좋아하고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권모술수에 능했으며 임기응변에 강했다. 난세(亂世)의 교활한 인물로 활약. 산동 일대를 평정. 허창에 도읍을 정하고 천자를 받들어 재상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다. 후에 하북의 원소를 멸망시켜 황하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장강 유역에 세력을 확장하여 촉·오와 싸운다. 위나라 왕이 된다. 시호는 무제(武帝).

 

󰊳 기타

 

  영제(靈帝) : 후한의 천자. 재위 168-189년

  헌제(獻帝) : 협황자(協皇子). 잠시 재위한 소제(少帝)를 이어 9세에 천자가 됨. 재위 189-220년.

  동탁(董卓) : 황건적의 반란과 궁정 안팎의 세력 분쟁에 편승하여 한 임금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잡는다. 장안으로 수도를 옮겨 악랄한 정치를 펴다가 왕윤의 계략에 빠져 여포에게 배신을 당해 죽는다.

  원소(袁紹) : 명문 출신으로 동탁을 타도하는 연합군의 맹주가 된다. 동탁의 사후에 하 북에 세력을 펴고 조조와 대립, 백마 등 싸움에서 패하고 아들들이 다투는 가운데 죽는다.

  원술(袁術) : 원소의 사촌 동생. 손책에게서 옥새를 차지하고 회남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유비에게 패하고 죽는다.

  여포(呂布) : 검술이 뛰어난 호걸. 처음에 정원의 양자, 이어서 동탁의 양자가 되었으나 양부를 살해한다. 후에 서주를 점령했, 조조·현덕의 연합군에 의해 죽는다.

  유표(劉表) : 형주의 자사로 한 왕실의 후예. 손견과 원수가 되었고 자기를 의지하려는 현덕에게 형주를 양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유비는 결코 생전에 도의상 그럴 수 없다며 고민한다.

  동승(董承) : 한 왕실의 충신. 천자로부터 비밀 특명을 받고 조조의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 죽는다.

  맹획(孟獲) : 남만의 왕. 촉에 침입했으나 공명에게 일곱 번 잡혔다 일곱 번 풀려난 후 진심으로 항복한다.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

  사마 소(司馬昭) : 사마 의의 차남. 형이 죽자 정권을 인수한다. 촉을 멸한 후 진의 왕위에 오른다. 시호는 문제(文帝)

  사마 염(司馬炎) : 사마 소의 장남. 부친의 사후에 진의 왕위 계승. 위왕인 조환에게서 왕위를 뺏아 국호를 대진이라고 칭한다. 오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다.

 

삼대명필 : 조선시대 대표적인 세 사람의 명필. 곧, 한호, 양사언, 김정희

 

삼당시인(三唐詩人) : 조선 중종, 선조 연간에 한시로 이름을 떨친 세 사람의 시인

· 백광훈, 최경창, 이달

 

생육신(生六臣)

 

· 단종이 왕위에서 밀려난 뒤 세조의 부당한 처사에 불만을 품고, 벼슬않고 여생을 보낸 여섯 충신

· 이맹전, 조여,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사가·四佳)

 

· 조선시대 학자로 문장과 글씨에 능함.

· [경국대전], [동국통감] 등의 편찬에 참여.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을 주도하여 편찬.

· 이외에도 [동인시화(東人詩話)]를 비롯, [필원잡기(筆苑雜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 傳)] 등의 저서가 있음.

 

서경덕(徐敬德, 1489-1546, 화담·花潭)

 

· 본관은 당성. 조선초 학자

·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도학(道學)에만 전념

· 개성의 송도삼절(황진이, 박연폭포 등)에 속함

--- 󰃫 시조 <마음이 어린 후(後)ㅣ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 허균>,

 

서기원(徐基源, 1930- )

 

· 서울생. 서울대 상대 중퇴

· 1956년 <암사지대(暗射地帶)>로 현대공문학지에 데뷔

· 1961년 <성숙한 밤의 포옹>으로 동인문학상 후보작수상

· 1964년 역사소설 <혁명> :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붕괴 과정을 그림. 주인공 김헌주(소외, 몰 락한 가문 출신)

· 작품 : 역사소설 <김옥균>

· 주로 역사소설과 풍자소설의 경향

 

󰏐 서기원 문학관

 

그의 문학이란 세련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으며, 그 세련된 언어로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현실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문학은 언어라는 ‘순수주의적 입장’과 문학은 현실표현이라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다 같이 수용하려고 애를 쓴 것이다. 그런 문학관은 식민지 후기의 순수문학파의 문학론과 광복 후의 참여문학론을 다 같이 수용,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서라벌예대와 중앙대 ‘문예창작과’ 출신 문인

 

서라벌 예대 문창과(文創科)는 김동리(金東里)의 아성(牙城)이었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옛말대로 김동리가 손때묻혀 키운 맹장들이 오늘의 한국문단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가 서라벌 예대 문창과를 정예부대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전심전력했는지 알 수 있다.

 

1. 1954년에 개설한 서라벌예대 문창과와 그 학풍을 고스란히 계승한 중앙대 예술대 문창과는 특기자 교육의 성공사례로 압권이다. 작금에 앞다퉈 문을 열고 있는 여러 대학의 문창과들이 뒤늦게나마 이를 입증하고 있다.

 

2. 김동리는 이 두 대학의 명실상부한 가장이자 후손들의 위엄스러운 師父였다. 그의 슬하에서 誤文부터 일일이 지적받아온 숱한 중견 문인들이 그점을 방증한다.

 

3. 58년 서라벌예대 문창과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 김주영 : 역사소설의 주체를 서민으로 못박고 그들의 애환과 풍속을 집중적으로 찾아내 아 로새긴 [객주(客主)], [화적]

* 김문수 : 단편소설의 정수를 보여줌

* 천승세 : 희곡과 소설에서 재능을 보여줌

* 유현종 : 현대소설과 역사소설을 통틀어 왕성한 필력을 자랑

* 이근배 : 시조 작단의 좌장으로 손색없는 인물

* 박이도 : 詩作과 시론을 겸비(경희대 교수)

 

4. 60학번

* 김원일 : 남북문단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원근법적으로 조명해 사실주의 소설추구

 

5. 61학번

* 이문구 : 우리말의 보고(寶庫)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 희귀한 스타일리스트로서 [관촌수필 (冠村隨筆)], [우리동네] 등의 연작단편을 통해 농촌사회의 전면적인 붕괴 국면을 적나라하고 정직하게 묘사

* 조세희 : 문장을 극도로 아끼는 과작(寡作) 작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산업사회 의 소외문제를 극명하게 조탁한 작가

* 박상륭 : 오래전에 이민을 가서 신비주의 문학을 개척하고 있음

* 한승원 : 남도지방의 어촌 풍경과 그 정서를 탄탄하게 그림. 한(恨)의 모색.

 

6. 김주영부터 이문구까지는 이른바 4·19세대에 속한다. 그들이 70년대 한국작단의 한 평지돌 출이었던 이면에는 6·25와 4·19를 통해 몸세 체험한 마지막 세대라는 사실과 그 생생한 경험들 을 소화해낼 수 있는 지면이 많아졌다는 사정이 숨어 있다.

 

7. 65학번, 66학번

* 이동하(중앙대문창과교수) : [장난감도시]에서 서정적인 문체로 소시민의 간절한 소망을 단 정하게 소묘, 66학번 오정희는 구성의 완벽, 일물일어(一物一語)에 집착하는 적실(績實)한 문장 력으로 단편소설 미학의 최대치를 추구

 

8. <미아리 시대>와 <흑석동 시대> : 서라벌예대가 2년제 초급대학으로서 미아리에 校舍를 두었다가 4년제 정규대학으로 개편되면서 중앙대 본교가 있는 흑석 동으로 옮겼는데, 66 학번들(오정희, 윤정모, 정종명 등)이 미아리시대의 마지막이다.

 

9. <미아리 시대>에는 서정주의 밑에서 많은 시인을 배출했는데, 60학번의 신중신, 송수권을 필두로, 64학번 윤금초, 65학번에 미당의 수제자임을 자랑하는 임영조와 과작의 시인 김형영이 쌍벽을 이룬다.

 

10. 70년대 중반부터 한국문단은 군사정권의 파행적인 정치 행태, 산업사회로의 진입과 아울러 농촌사회의 급격한 와해, 반체제 인사들의 집단적인 각성 등 사회상에 따라 종래의 가부장적 문단질서가 무너지고 일종의 파벌식으로 흩어진다. 그 주요 요인으로 계간지 밑 상업지의 속출 과 문학의 상품화를 들 수 있는데, 등단제도의 다양화가 더 큰 요인이 되었다.

 

서막(徐邈) : [태평광기]에 나오는 이름. 술을 먹으면 정신이 알쏭달쏭하고 까마득하므로, 천천히 서(徐)로 성씨를 삼고, 아득할 막(邈)을 이름으로 삼았다.

--- 󰃫 임춘 <국순전>, 이규보 <국선생전>

 

서영은(徐永恩, 96년 현재 53세)

· 소설가. 강원도 강릉 생

 

󰏐 (신작을 찾아서) [꿈길에서 꿈길로]

 

서영은씨가 [사다리에 놓인 창] 이후 6년 만에 장편 [꿈길에서 꿈길로](청아출판사)를 냈다. 서씨는 그동안 30년 연상인 김동리씨와 결혼, 김씨의 와병, 김씨 자식들과의 불화로 이어지는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이번 작품은 서문에서 “이 소설은 나의 울음 섞인 한판 말의 춤, 두 번 다시 출 수 없는 그런 춤과 같다.”라고 밝히고 있듯 그간의 체험을 질료로 삼은데다 전보다 한층 세련된 사유의 세계를 펼치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끈다.

 

로드로망(여로소설,旅路小說)의 형식을 띤 이 소설은 화자인 시사주간지 여기자 박희주가 연극배우 한진옥과 이라크의 축제에 초대 받아 동행하면서 겪는 심경 변화를 좇아 간다. (로드로망 ---  <하얀 배>(윤후명 소설) )

 

30대인 희주는 사랑의 힘을 믿고 결혼했으나 남편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위기의 여자다. 한진옥은 [51세, 강릉 태생, 44세 때 화단의 상처한 원로 화가와 결혼해 세인의 화제가 되었음. 4년 뒤 화가가 뇌출혈로 쓰러져 지금껏 투병 중이고 재산 문제 때문에 자식들과의 싸움으로 또다시 떠들썩한 스캔들에 휩싸임. 화가와의 관계가 드러난 것은 4년 전이나 24세 때부터 연인사이였다고 함]이라는 작중 묘사에서 보이듯 서씨 자신을 모델로 만들어낸 인물이다

 

희주는 처음에 진옥의 인상을 [나의 상식으론 파격적이고 괴이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함께 지내면서 이내 [그 인간이 풍기는 따스하고 밝았다. 이 상반된 부조화는 무엇일까]라고 갈 등에 휩싸이며 마침내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의 육성은 내 삶을 바꿔 놓았어요.]라고 적고 있다.

 

짧은 기간에 한 인간의 삶을 바꾸어 놓은 진옥의 육성. 그 소리는 20년 동안 서씨의 삶과 문학이 연주했던 소리들이 하나의 육체에 스며 울리는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연상시킨다.

 

서씨 문학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끊임없는 활력에의 지향과 삶의 무의미>를 단숨에 넘어서려는 절대적인 정신의 추구는 비로소 한진옥이라는 인물 속에서 합일을 이룬다.

---  <김동리>, <추천인 / 피추천인>(김동리의 추천을 받음)

 

서울대 출신 문인, 평론가 *( ) 속의 나이는 96년 현재

 

▷국문과(國文科) 그룹

 

1. 문단의 평가 : “어디에나 존재하나 구심점이 없는 평론계 최대의 학벌”

“한국 문학의 이슈를 가름하는 다양한 색깔의 비평가 군단”

 

2. 활약상

1) [창작과 비평](최원식 주간)

2) [문학과 사회](홍정선·김동식)

3) [세계의 문학](권성우)

4) [문학동네](서영채·유보선)

5) [상상](이인화·김탁환)

6) [문예중앙](김윤식)

7) [리뷰](강헌·서영채·주인석·권성우)

8) [문학사상](권영민 주간, 정홍웅·신범순 - 이어령 창간)

9) [소설과 사상](조남현 주간)

10) [오늘의 소설](유보선·한기)

 

3. 평론가 전통

1) 이어령 --- <이어령>

· 56년 데뷔, [문학과 사상] 창간, 감각적이고 예리한 문체로 50-60 연대 풍미함. 문화부 장관

2) 김윤식

· 서울대 국어교육과 출신, 국문과 간판급 교수로 활동, 어어령 뒤의 맥을 이어 나감. 후 배 평론가·작가를 키우지 않았다는 점과 국문과가 구시대의 작고 문인들만을 학문 대상 으로 삼고 당대의 문학은 철저히 외면한 점은 이후 배출되는 국문과 출신 문인들의 한 특 성을 규정한다.

 

4. 개혁성향 계보

 

1) 민족문학 계열

 

(1) 최원식(49, 인하대)

· 80년대 힘을 발휘했던 민족문학 이론이 90년대 들어 쇠퇴하는 기운 속에 서구의 발전 단계와는 다른 한국의 독자적 모델을 찾으려는 이론적 모색을 계속하고 있는 점이 특징

(2) 방민호(31, 창작과 비평사 신인비평가상 수상)

 

2) 노동해방문학계보

(1) 김명인(38. 인하대 박사과정)

·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을 소시민적이라고 비판하고 문학생산도 노동자가 담당해야 하며 사회주의 당파성에 복무해야 한다는 결정적 논문을 발표(87년)해 바람을 일으킴

· 92년 [실천문학]에 ‘이제 그 시기의 문학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소위 전향선언으로 다 시 이름남

(2) 김사인(40)

· 90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발행인을 맡았으며, 獄苦를 치르기도 함. 현재 [창작과 비 평] 편집 자문위원

 

5. 대중문학론 계보

1) 이인화(30, 이대 국문과)

· [영원한 제국]

· 94년 [상상]을 통해 “독자들의 요구에 충실한 문학작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대중문학 론 제기

2) 김탁환(28, 소장평론)

· 대중문학론을 옹호

↔(정면 비판) 권성우(33, 동덕여대), 방민호

* [세계의 문학], [창작과 비평]을 통해 이들을 {타락한 사이비 문학집단}으로 맹공

 

6. 문인 계보

1) 소설가

· 최일남(64, 언론인, 세태소설)

· 박완서(65)

· 주인석 :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2) 시인

· 오세영(54, 서울대 국문과 교수) : 시인

· 정희성(51)

 

▷불문과 그룹

 

1. 문단평가 : 첨단이론과 정치(定置)한 분석, 섬세하고 세련된 문체, 실험적 기법으로 무장된 소수 정예의 문학 엘리트

 

2. 문인계보도

서울대 불문과 출신 문인 계보도

1세대

(50년대)

김붕구(작고)

정명환(66)

평론가, 서울대

평론가, 서울대

2세대

(60년대)

김치수(56)

곽광수(56)

김현(작고)

김화영(55)

김승옥

오생근

평론가

이화여대

평론,서울대불어교욱과

평론,서울대

산문가,고대

소설가

평론,서울대

3세대

(80년대)

권오룡

이성복

이인성

정과리

최수철

진형준

평론,교원대

시인,계명대

소설가,서울대

평론,충남대

소설가

평론,홍익대

4세대

(90년대)

김태동

박철화

성기완

 

시인

평론가

시인

2.

1세대 : 김붕구, 정명환(66세) - 일본어를 통한 서구문화수입을 벗어나 프랑스어를 통해 직 접 외국문학 수용

(1) 김붕구 : [보들레르 평전]으로 한국문학의 감수성 개발에 기초제공, [작가와 사회]란 책 을 통해 순수·참여 논쟁을 일으킴

(2) 정명환 : 사르트르의 연구. 이상(李箱)론인 [부정과 생성]을 통해 주제비평의 전범을 보 여줌

 

3.

2세대 : 한글을 배우고 자란 첫세대, 4·19세대

(1) 김현 : 70-80년대 전반에 걸쳐 독보적인 지위와 영향력을 지님(90년 48세 작고). 김치 수·김병익(서울대 정치학과 졸), 김주연(서울대 독문과)와 함께 [문학과 지성] 창간, 후배 인 오생근(50)교수도 뒤이어 합류, 문지 1세대로 불림

(2) 김치수 : 롤랑 바르트의 구조주의 비평, 80년대부터는 기호학의 수용에 남다른 역할 수 행, 현재 한국기호학회장

 

4. 작가 : 김승옥(55, 62년 등단), 이인성(43, 서울대교수, 80년 등단), 최수철(38, 81년 등단), 시 인 이성복(44, 계명대 교수, 77년 등단)

(1) 김승옥 : 명징(明澄)하고 아름다운 언어, 번뜩이는 감수성으로 60-70년대를 풍비했으나 80년 이후 절필했다가 95년 집필 재개 선언

(2) 이인성, 최수철 : 한국소설의 전통인 리얼리즘 계열을 벗어난 난해하고 실험적인 작품 으로 이름이 나 있음. 언어와 현실의 불일치 문제에 대한 추구. 복잡한 사유를 바탕으로 한 복잡한 구문, 전통적인 서사구조의 무시 등으로 평단의 관심을 모음

(3) 이성복 : 상상력과 언어 실험을 중시하는 해체시 1세대, 90년대 들어 전통적 시작법으 로 돌아감

(4) 정소성(52, 단국대), 김운비(37, 평론가, 95년 장편 [청동입술])

 

서정인(徐廷仁, 1936- )

 

· 전남 순천생. 서울대 대학원 영문과 졸. 하바드대 객원 연구원 수학

· 62년 [사상계] 신인 작품 모집에 현대인의 주체 의식의 문제를 다룬 단편 <후송(後送)> 당 선, 등단

· 수상 : 제3회 한국문학작가상(1976), 월탄문학상(1984), 한국창작문학상

· 초기 경향 : 지식인의 자의식적 세계를 주로 다룸

· 후기 경향 : 현실적 문제를 구체화함

· 대표작 : <후송>(1962), <강>(1968), <철쭉제>(1983), 장편 <달궁>

· 전북대 문리대 교수

---  소설 <강>, <달궁>

 

󰏐 [서정인의 작품세계] 시적 암시-여운 강한 한국단편 백미

 

{강은 흘러가는 것이므로, 여행을 상기시키지 않습니까. 우리의 살림살이도 그렇게 흘러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강]이란 제목은 그런 우의적 뜻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소설가 서정인씨는 68년 단편 [강]을 발표했을 때 서울 돈암동 삼선고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이 소설의 모티브는 우연히 김포 부근의 강가로 여행을 갔다가 그풍경과 분위기를 보고 떠올렸습니다. 제가 전라도 출신인 탓에 많은 독자들이 소설무대를 섬진강 부근의 시골로 오해하더군요. 그러나 섬진강일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작가는 [강] [후송] [나주댁] [물결이 높던 날] 등 지금도 단편 소설 미학의 전범으로 꼽히는 소설들을 모아 76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창작집[강]을 펴냈다.

 

작가는 당시 후기를 통해 {그것들 중의 어느 것을 쓰고 나서도 장티푸스를 앓고난 듯한 기분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창작의 산고를 털어 놓았다.

 

이 책에 해설을 쓴 평론가 김현은 서정인 소설의 문체를 가리켜 {귀중한 돌을 갈듯이 그는 말 하나하나를 경건하게 다듬는다}고 지적했다.

 

그만큼 서정인 소설미학의 요체는 단아한 언어구사력과 세밀한 내면 심리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강]을 쓸 때 저 자신도 젊은 세대였던지라 급하고 과격했어요. 자연히 당시의 사회 현실에 답답해했지요. [강]을 지배하는 우울한 분위기는 그렇게 좌절했던 세대의 심경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요.}.

 

[강]은 도입부에서 진눈깨비 쏟아지는 풍경을 제시한다. 버스 창밖으로 진눈깨비를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의 짧은 대화에서 그 인물들 각자의심경과 삶의 내밀한 사연이 드러난다. 인물의 외양이나 내면 묘사에서군더더기가 없다.

 

진눈깨비에 의해 흐릿해진 풍경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남루한 생의 초상이 오히려 또렷하게 드러나면서 그 쓸쓸함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서정인 소설은 오늘날까지도 이야기로서의 소설이 아니라시적 암시와 여운의 소설 세계를 펼쳐보인 한국단편의 백미로 꼽힌다.

발행일 : 97년 09월 09일

 

서정주(徐廷柱, 1915- , 미당·未堂)

 

· 전북 고창 생.

· [동아일보] 신춘문예 ‘벽’ 당선, 문단 등단(1936)

· 1936년 불교전문 중퇴

· [시인부락](1936~) 주간

· 1948년 동아일보 사회․문화부장.

· 서라벌 예대․동국대 문리대 교수를 역임,

·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장,1976년 명예 문학박사(숙명여대)

· 1979년 문협 명예회장, 1979년 동국대 대학원 명예교수(현직)

· 주요시집과 시 세계

- [화사집](1938) :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 토속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인간의 원죄 (原罪)를 노래함.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고 그 운명적 업고(業苦)를 <문둥이>, <뱀>을 통 해 울부짖었다. 이후 미당은 ‘한국의 보들레르(프)’로 불림

- [귀촉도](1946), [서정주 시선](1955) : 원숙한 자기 성찰과 달관을 통한 화해. 동양적 사 상으로 접근하여 재생(再生)을 노래. 민족적 정조와 그 선율(旋律)을 읊었다.

- [신라초](1960, 정음사) : 불교 사상에 관심을 보여 주로 불교국 신라에서 시의 소재를 얻음. 선적(禪的)인 정서를 바탕으로 인간 구원을 시도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함

- [동천](1968, 민중서관) : [신라초] 시대보다 더 불교에 관심을 두고,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시 기이다.

- [서정주 시선](1974, 민음사)

- [질마재 신화](1975, 일지사), [떠돌이의 시](1976) : 토속적이며 주술적인 원시적 샤머니 즘이 노래되며, 시의 형태도 산문시, 정형시로 바뀌게 된다. 대표작 <신부(新婦)>

· 흔히 ‘생명파, 혹은 인생파’로 불림.

 

- 유적지

1) 禪雲山歌碑(고창 선운산 도립공원 선운사 동구) : 육필원고를 확대하여 ‘선운사동구’ 새김

2) 서정주생가(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 ‘질마재신화’의 현장, 현재 생가엔 미당의 아우이자 시 인인 서정태가 살고 있음

---  시 <무등을 보며>, <자화상(自畵像)>, <추천사(鞦韆詞)>, <화사(花蛇)>, <선운사 동구>

 

󰏐 서정주시인, 금년도 노벨문학상 후보 추천돼

 

미당 서정주시인(79)이 올해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것으로 7일 알려졌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회장 문덕수)는 지난해말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추천의뢰를 받고 철저한 보안속에 선정작업을 진행해 최근 노벨상 평의회에 미당을 한국측 후보로 추천했다고 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밝혔다. 이로써 미당은 지난 90년대 이어 두번째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셈이다. 한편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매년 10월 초순께 확정, 발표된다.

 

󰏐 서정주시인 팔순잔치 열려

 

서정주 시인의 팔순잔치가 2일 오후 5시30분 강남구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대연회장에서 각계 인사 8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미당의 팔순잔치는 60년가까이 시를 통해 한국문단에 큰 영향을 끼쳐온 시인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의 문학적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동국문학인회(회장 홍기삼)와 동국대 총동창회가 마련했다.

 

이날 축하연에는 정계에서 이민섭문체부 장관, 남재희노동부 장관, 황명수 민자당 의원, 강인섭민자당 의원 등이 참석했다. 종교계에서는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이, 학계에서는 민병천 동국대 총장이, 재계인사로는 이종대 유한킴벌리사장, 김태구대우자동차 사장 등이 참석했다.

 

문화예술계에서는 황명(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문덕수(한국펜클럽 회장), 곽종원(예술원회원인 평론가), 시인인 김요섭, 홍윤숙, 김남조, 이원섭, 황동규, 소설가 이문구씨 등이 자리를 같이했다. 또 이준, 오승우, 권옥연 화백, 무용가 김백봉, 원로체육인 손기정씨 등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팔순잔치에 앞서 오세영(서울대), 황현산(고려대), 이승훈(한양대) 교수등이 미당시 세계를 조명한 학술회의도 열렸다. 탤런트 이덕화씨의 사회로 진행된 축하연에서는 미당의 대표시 <자화상>, <귀촉도>, <무등을 보며>, <풀리는 한강가에서>, <꽃밭의 독백> 등이 탤런트 손숙씨를 비롯한 연예인과 후배시인들에 의해 낭송됐으며, 가수 송창식씨는 미당시에 곡을 붙인 <푸르른 날>을 불러주었다.

 

또 원광대 한국무용과 이길주 교수의 무용공연 <동천>과 명창 안숙선 씨의 판소리공연도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미당의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론중 좋은 글만을 골라 수록한 「미당서정주연구」(민음사간)도 봉정됐다.

 

󰏐 미당 서정주씨 시선집 아일랜드서 출간

 

한국시인 가운데 외국에서 시집이 가장 많이 번역, 소개된 未堂 徐廷柱 씨의 영역본 시선집 「떠돌이의 시」(영어제목: Poems Of A Wanderer)가 아일랜드의 데덜러스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대산재단(이사장 愼昌宰) 지원으로 경희대 영문과 케빈 오록교수가 영역한 이 시선집은 1941년 출간된 未堂의 처녀시집 「화사집」에서부터 1982년 나온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에 이르기까지 10권의 시집에서 1백20편의 시를 추려 실었다.

未堂의 시 전반에 걸쳐 두루 소개하고 있는 이 시선집은 특히 「동천」과「질마재신화」, 「떠돌이의 시」,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등 未堂의 중기와 후기 시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했다.

 

未堂의 중기와 후기 작품들은 신라라는 신화적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발견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농밀한 명상, 험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자애로운 감응 등과 같은 원숙한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영역자인 오록교수는 "이제 한국문학의 해외소개는 단편적인 데에서 벗어나 문학적 업적이 뛰어난 한 작가의 전모를 통찰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소개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번 未堂의 시집도 이런 생각에서 번역, 소개했다"고 밝혔다.

 

󰏐 <문학> 서정주문학 60년

 

서정주(徐廷柱, 81)시인이 시력(詩歷) 60년을 맞았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돼 나온 徐씨의 문단생활 60년을 맞아 최근 출간된 [시와 시학] 가을호는 특집으로 "미당문학 60년"을 꾸몄다.

 

이 특집에서 徐씨는 "나의 문학인생 7장"이란 장문의 글(2백자 원고지 60장)을 통해 시라는 한송이의 국화꽂을 피우기 위해 가슴 조였던 젊음의 뒤안길, 그 사상적 편력을 진솔하게 밝혀놓았다.

 

徐씨는 10대 중반의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다. "가난하고 불행한 이때 이 나라의 많은 민중들의 처참한 꼴을 보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제적 균배(均配)주장이 좋은 해결책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은 가죽구두도 벗어던지고 노동자들의 "지까다비"를 신고 다녔으며 하숙도 학교 근처의 좋은 집에서 빈민촌으로 옮겨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다 염병(장티푸스)에 걸려 사선(死線)까지 돌파했다. 1930년 광주학생사건 2차년도에는 중앙고보 주모자로 퇴학당하고 투옥됐다.

 

그러다 16살때 읽은 톨스토이의 "물질적 균배로서 인생의 행복을 두루 좌우하다니 그 무슨 엉터리 소리냐"는 외침에 감명받아 자유사상의 넓은 벌판으로 나아갔다." 넓다면 한정없이 넓고 깊다면 또 한정없이 깊은 인생에서 경제적인 균배만으로 그 해결책을 삼는 사회주의의 좁은 이해력"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18살 때는 니체의 사람과 신을 일치시키는 인신(人神)이라는 초인격과 모든 비극의 철저한 극복의지에 빠져들었다. 또 니체의 "그냥 지나쳐 가기"가 "천하고 저속한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동화하지 않고 인생의 순수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아주 필요한 일"로 생각됐다고 밝히고 있다.

 

20대 후반인 일제말기에는 "거북이처럼 끈질기고 유유하게 이 난세의 물결을 헤치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인생관을 갖게 됐다. 그와함께 이조백자를 바라보며 한정없는 체념 속의 달관을 깨우치고 동양사상으로 회귀했다고 밝히고 있다. 徐씨는 또 "친일적이라는 시 몇 편이 있지만 그것은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국민 총동원연맹의 강제명령에 따라 어쩔수 없이 쓴 것들이니 이 점은 또 이만큼 이해해 주셨으면 고맙겠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한국 현대시의 최고봉임을 누구나 시인하는 徐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역사성, 탈현실성을 공격받는 徐씨에게도 역사와 현실에 괴로 워하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은 있었다는 것이다.

 

석식영암(釋息影庵)

· 고려 최씨 집권 시대 승려

· 시문에 재능이 있었고, 사대부들과 교유

--- 󰃫 가전 <정시자전>

 

선우 휘(鮮于 煇, 1922-1986)

 

· 평북 정주군 생

· 1943년 경성사범학교 졸업, 구성국민학교 교사생활

· 1946년 월남, [조선일보] 기자 생활

· 1949년 육군 소위로 임관

· 1955년 단편 <귀신>을 [신세계] 발표

· 1957년 단편 [불꽃]으로 제2회 동인문학상 수상

· 1957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

· 1958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 1971년 [조선일보] 주필

· 1986년 뇌일혈로 사망

· 오상원과 함께 앙르레 말르로, 쎙 떽쥐베리의 ‘행동주의적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음

(현실을 절실한 문제로 보고 힘을 다해 그에 부딪치고자 하는 모습 형상화, 행동인의 대부분은 우익적(右翼的) 색채를 띠고 있음

- <불꽃> ‘현’, <깃발없는 기수> ‘허윤’, <추적의 피나네> ‘윤호’ )

· (그러나) 행동주의에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비판이 없는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것임 (일체의 사건들과 규범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전제하고 부딪치는 것(김윤식)

· 1960년대 이후에는 월남한 사람들의 ‘망향의식’을 그린 작품을 발표

· 작품 : <깃발없는 기수>(1959), <추적의 피나레>(1951)

---  < 오상원>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매죽헌·梅竹軒)

 

· 사육신의 일인.

·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공로가 큼. 벼슬은 승지(承旨)까지 이름

· 세조가 즉위하자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처형당함.

 성삼문유허비(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 시조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 >,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 사형 직전에 지은 漢詩 두 수

 

①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 고개 돌려 보니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 황천가는 곳 주막 하나 없으니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 오늘 밤 누구 집에 잘 것인가?

 

② 食人之食衣人衣(식인지식의의의) : 남의 밤, 옷을 먹고 입으며

素志平生願莫違(소지평생원막위) : 평생에 행여 잘못없기 빌었네

一死固知忠義在(일사고지충의재) : 이몸은 죽어가도 충의는 사니

顯陵松柏夢依依(현릉송백몽의의) : 꿈에도 못 잊혀라 현릉의 솔빛

 

성현(成俔, 1439-1504, 용재·慵齋)

 

· 예조, 공조판서, 대제학 지냄(세종-연산군)

· 연산군 때 유자광과 함께 음악의 집대성인 [악학궤범(樂學軌範)] 편찬

· 시·서·화에 대한 평,야담과 이야기 등을 실은 [용재총화(慵齋叢話)] 편찬

· 사후에 갑자사화에 연루, 부관참시 당함.

 

성혼(成渾, 1535-1598, 우계)

 

· 어려서부터 초시(初試)에 합격했으나 병으로 인해 포기

· 율곡과 이·기(理·氣)의 학문에 대해 토혼.

· 훗날 율곡의 추천으로 벼슬하였으나 자주 물어나고, 자연을 벗하며 삶

· 저서 : [우계집] 등

---  시조 <말 업슨 청산이요 태 업슨 유수ㅣ로다>, <전원에 봄이 오니 ~>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영, 1564-1616)

 

· 영국의 극작가. 시인

· 18세 때 8세 연상의 앤 해더웨이와 결혼

· 23세 때 런던의 어느 극단에 가입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음

· 29세 때 <말괄량이 길들이기> 초연

· 30세 때 <로미오와 줄리엣> 초연

· 32세 때 <베니스의 상인> 초연

· 34세 때 <헛소동> 초연

· 35세 때 <줄리어스 시어저> 초연

· 36세 때 <햄릿> 초연

· 이후 <오델로>, <리어왕>, <맥베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상연

 

󰏐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

 

영국에서 최초로 희극 작품이 나온 것은 1550년이며, 최초의 비극 작품이 햇볕을 본 것은 1560년이었다. 셰익스피어가 1601년까지 이미 <헛소동>, <십이야>, <햄릿> 등을 썼다고 볼 때, 16세기 후반에 있어서의 영국 희곡의 급격한 발전상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셰익스피어가 영국극계에 데뷔하는 시기에 영국 희곡의 근대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1590년대에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 활약을 하게 되는데 다행스럽게도 이 시기에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극단들이 마련되었고, 또한 여러 극장들이 개설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훌륭한 극작가의 탁월한 작품과 안정된 극단과 극장의 개관이 시기적으로 일치가 되어 영국 연극의 황금시절이 이루어진 것이다.

 

1590년대 초에 극계에 진출한 셰익스피어는 약 10년간 사극과 희극에 중점을 둔 창작 생활을 해 왔는데, 1600년(36세)을 경계로 하여 셰익스피어의 희곡세계는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여, 어두운 인생의 뒤안길과 인간의 고뇌, 절망, 죽음 등의 주제를 주로 다루는 비극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사랑과 믿음에 근거한 인간의 행복, 기쁨, 사회적 유대감 등을 그는 희극세계 속에서 주로 다루었는데, 비극세계에 이르면, 햄릿의 대사처럼 ‘숭고한 이성, 능력, 모습, 거동의 무한한 가능성, 틀림이없는 놀라는 행동력, 천사 같은 이해력, 신처럼 보였던’ 인간이 ‘먼지 덩어리로 보이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낙천적 인생관이 염세적 인생관으로, 희망적 세계관이 절망적 세계관으로 바꾸어진 것이다. 존경하는 아버지를 잃은 햄릿은 사랑하는 모친의 도덕적 타락과 인간적 배신 앞에, 그리고 숙부의 배신, 어지러워진 나라 사정, 왕비의 죽음 등으로 깊은 절망감에 빠져 비통한 최후를 맞는다. 로미오와 줄리엣는 양가의 해묵은 불화 때문에 그들의 청순한 사랑이 죽음으로 끝난다. 이아고의 간계에 빠진 오델로 장군은 질투에 미쳐 선하고 착한 데스데모나를 살해한다. 딸뜰의 불효에 분노한 리어 왕은 광야를 헤매고 효심이 지극한 코딜리어는 그녀의 선량한 의지 때문에 가련한 죽음을 당한다. 맥베드 장군은 마녀들의 꾀임에 현혹되어 끔찍한 살인 행위를 범함으로써 스스로 치욕적인 죽음을 당한다. 거대한 악의 힘에 의하여 선한 의지와 행위가 무참히 파괴당하는 비극세계 앞에 우리는 어둡고 침울한 비통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 속으로 참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물결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워

이를 물리쳐야 하는가, 죽는 것은 잠자는 것-

오직 그뿐, 만인 잠자는 것으로 육체가 상속받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피치 못할 괴로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심으로 바라는 바 극치로다. 죽음은 잠드는 것!

잠들면 꿈을 꾸겠지? 아, 그게 곤란해.

죽음이란 잠으로 해서 육체의 굴레를 벗어난다면

어떤 굼들이 찾아올 것인지 그게 문제지.

이것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고, 또한 그것 때문에

이 무참한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게 마련이다.

(후략)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 1036-1101, 호 동파)

 

· 중국 북송(北宋) 때 제1의 문인

·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鐵)과 함께)

· 22세 때 진사에 급제, 벼슬과 귀양을 되풀이 하는 곡절 많은 인생을 삶

· 그의 [전후(前後) 적벽부](1082년 가을 음력 7월 16일 밤, 47세 때)는 유명함.

· 저서 : [동파지림], [동파전집]

---  부(賦) <적벽부(赤壁賦)>

 

소부·허유(巢父許由) : 중국 고대의 전형적인 은사(隱士)

 

① 소부(巢父, 혹은 소보) : 중국 고대의 처사. 속세를 떠나서 나무 위에서 살았다 하여 붙인 이 름. 堯(요)임금이 그에게 나라를 넘겨 주려 했으나, 이에 불응함

② 허유(許由) : 요 임금이 왕위를 물려 주려 했으나, 이에 불응. 오히려 자기의 귀가 더러워졌 다 하여 영수(穎水)에 가서 귀를 씻고, 기산(箕山)에 들어감

(소부는 이 물에 말을 먹일 수 없다 하여 다시 끌고 감)

소부와 허유가 문답하던 기산영수(箕山穎水)가 예 아니냐! --- 잡가 <유산가(遊山歌)> 중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 스위스 언어학자. 구조주의 언어학파의 창시자.

· 그는 언어활동을 ① 머릿 속에 개념으로 저장되어 있는 추상적인 말[랑그-langue]과 ② 이것 을 개인이 사용하여 발음되는 구체적인 말[빠롤-parole]로 나누고, ‘랑그’를 언어 대상으로 삼음 으로써 문자보다 말을 중시하는 언어관을 세웠다.

· 또한 언어 연구의 방법을 공시적(共時的)연구와 통시적(通時的) 연구로 체계화하였다.

 

소식(蘇軾) : --- 󰃫 <소동파(蘇東坡)>

 

손창섭(孫昌涉, 1922- )

 

· 소설가 평양 생, 일본 니혼 대학 수학

· 49년 단편 <얄궂은 비>

· 52년에 단편 <공휴일>, <사연기(死緣記)>로 [문예]지의 추천

· 53년 <비오는 날>이 [문예]지에 추천, 등단. (김동리 추천)

· 55년 <혈서>-현대문학 신인문학상, <잉여인간>-제4회 동인문학상(59년)

· 작품경향 : 광복 후의 혼란, 6·25라는 민족적 비극 속에서 육체의 불구와 비정상적 삶을 살아 가는 인물의 현실 밑바닥을 어둡고 침통하게 파헤침.

---  소설 <비오는 날>

---   <추천인 / 피추천인>

 

송병수(宋炳洙, 1932~ )

 

· 경기도 개풍 출신. 한양대 졸업

· 1957년 [문학예술]지에 <쑈리 킴>을 발표, 등단

· <잔해>로 제9회 동인문학상 수상

· 기타 <그늘진 양지>, <인간신뢰>, <탈주병>, <장인>, <대한독립군> 등

---  소설 <쑈리 킴>

 

송순(宋純, 1493-1583, 면앙정·俯仰亭, 기촌·企村)

 

· 27세에 급제하여 대사헌, 한성부 판윤, 우참찬 등을 지냄

· 농암 이현보의 후배, 이 퇴계(이황)의 선배

· 음률에 정통하여 현금(玄琴)을 잘 탔다고 함

· 벼슬을 버리고 하향, 전남 담양의 면앙정과 석림정사를 짓고 독서와 시작에 전념

· 정철, 임제, 기대승과 교류함

· 저서 [기촌집], [면앙집]

 면앙정(俛仰亭)(전남 담양) : 정자 밑 처마 밑의 글에 보면 ‘俛有地, 仰有天, 亭其中 ··· ’이라 는 시문이 적혀 있다. 여기서 정자의 이름을 따 제호로 삼았다.

---  시조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여내니>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우암)

 

· 조선시대 정치가, 학자.

· 서인(西人)의 거두. 남인과 논쟁

· 후에는 노론(老論)의 거두로 활약, 숙종 15년 세자 책봉 일(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 상소)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도에 귀양, 이후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호송 도중 남인의 책동으 로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음

· 율곡 이이의 학통 계승(일원론적 기발이승일도설 지지), 기호학파의 주류(퇴계의 이원론적 이기호발설 부정)

· 북벌론의주창

· 저서 : [송자대전](그의 저술이 정조 11년에 목판본 215권 102책으로 묶임)

 

- 유적지

1) 화양서원(충북 청원군 창원리) : 정계에서 물러난 뒤 머물렀던 곳

2) 묘(괴산군 청천면 창리)

3) 보길도 : 우암이 제주도로 귀양가는 길에 심한 복통이 일어나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그 흔 적이 ‘송시열 글씐 바위’에 시구로 남아 있다.

---  시조 <님이 헤오시매 나는 전혀 미덧더니(믿었더니)>,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송욱(宋稶, 1925-1980)

 

· 충남 홍성 생. 영문학자, 시인

· 일본 교토대학 거쳐 서울대 영문학과 졸, 서울대 영문과 교수

· 저서 : [시학평전], [문학평전],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전편 해설

· 시집 : [하여지향(何如之鄕)], [나무는 즐겁다] 등

---  어휘 <풍자>

 

순(舜)임금

· 요(堯)를 도와 천하를 잘 다스리고, 선위(禪位)를 받아 나라 이름을 우(虞)라 함.

· 뒤에 우(禹)에게 선위(禪位)함.

 

순자(荀子, B.C 298-238)

· 맹자와 같은 시대, 조(趙) 나라의 유학자로서 이름은 황(況), 때때로 순경이라 함

· 법가의 이론가인 한비자(韓非子, B.C 280-233)와 진나라 재상 이사(B.C ?-208)의 스승이었음

· ‘성악(性惡)’에 기초한 규범적 사회의 이상을 주창

---  < 맹자>

 

시저(영어명, Caesar, Gaius Julius, 100-44, B.C, 카이사르 혹은 케사르)

 

· 로마의 군인·정치가. 명문 출신으로 여러 요직을 거친 후 기원전 60년 크라수스와 폼페이우 스와 더불어 제1차 삼두정치에 참가

· 크라수스가 죽은 뒤 폼페이우스와 싸워 이를 이집트까지 추멸함.

· 각지 내란을 평정하여 종신(終身) 호칭 ‘딕타토르’를 얻어 정치를 독재하다가 공화정치파의 음모로 원로원 의사당에서 피살되었음

· 그의 [갈리아 전기(戰記)]는 라틴 문학의 걸작으로 뽑힘

 

시조시인들

 

󰏐 맥 잇는 시조 시인들

 

"장마 중 잠깐 비치는 햇살처럼 내겐 많은 시간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어둠을 긋고 지나는 섬광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듯이 영혼을 닦아 생명이 허락하는 한 좋은 시로 내 삶을 불 밝히고 싶다."

 

박권숙씨(34)가 최근 두번째 시조집 "객토"를 펴내며 한 말이다. 91년 중앙일보 시조지상백일장을 통해 등단한 박씨는 93년 첫 시조집 "겨울 묵시록"으로 중앙일보 시조대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다음 세기의 시조를 짊어질 신예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박씨는 20대 꽃다운 처녀시절부터 신부전증과 힘겹겨 투병해오고 있다. "객토(客土)"란 논밭의 지력(地力)를 북돋기 위해 딴 곳의 기름진 흙을 옮겨넣는 것을 이른다.

 

박씨의 시조짓기는 꺼져가는 생명에 불을 밝히는 객토 행위에 다름 아니다. 영혼을 닦아 삼라만상의 본체, 생명의 섬광을 잡아내 시를 쓰는 행위자체가 그녀의 존재이유요 또 구원이기에. 넓게 보면 우리 시조시인 모두가 꺼져가는 우리 고유의 정형시 시조의 현대화를 위해 객토작업을 힘들게 벌이고 있다.

 

금세기 초 서구문학이 유입되면서 우리 전통문학 양식들은 급속히 붕괴되고 서구문학 일변도로 치달았다. 때문에 우리의 근, 현대 문학사를 서구문학 이식사(移植史)로 간단없이 설명하려드는 경향도 없지 않다.

 

그러나 시조만큼은 우리 전통의 율격과 정서의 텃밭에 서구문학의 유용한 기법을 끊임없이 "객토", 현대화시켜 오늘 현대시와 어깨를 나란히 발전해나가고 있다.

 

1926년 최남선(崔南善)의 시조집 "백팔번뇌"가 나오면서 시조는 본격적으로 현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이 시조집으로 해서 시조는 시조창에 종속된 가사에서 벗어나 자체로 읽히는 시로서 독립하게 된다.

 

이와함께 일제 치하에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시조부흥, 혁신운동이 일며 이병기(李秉岐), 이은상(李殷相)등 빼어난 이론과 창작에 뛰어난 시조시인들에 의해 시조는 확고하게 현대시가로서 자리잡게 된다.

 

"사람이 몇 생(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金剛)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玉流) 수렴진주담(水簾眞珠潭)과 만폭동(萬瀑洞) 다 그만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 안개풀끝에 이슬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潭)함께 흘러 / 구룡연(九龍淵) 천척절애(千尺絶涯)한번 흘러 보느냐" //

 

이병기 등과 초창기 시조현대화 운동에 앞장섰던 조운(曺雲)의 시조 "구룡폭포"전문이다. 금강산 절경인 구룡폭포를 서늘하게 그리고 있으면서도 사설조 가락에 실어 유한한 우리네 삶의 한을 호탕하게 천길 절벽으로 떨어뜨리며 무한한 시공(時空)을 향해 다시 솟구치게 하고 있다

 

고시조의 단순한 경치 묘사나 심정풀이, 혹은 관념의 표출에서 벗어나 시적 대상과 시인과의 냉철한 거리 유지가 현대시를 압도하는 긴장된 감동을 부르며 시적 깊이를 지니게 하고 있다.

 

이병기 등의 추천으로 39년 "문장"지를 통해 조남령(趙南嶺), 김상옥(金相沃)씨가, 40년 장하보, 이호우(李鎬雨)가 시조단에 나와 일제말 암흑기를 거쳐 해방 이후의 시조단을 이끈다.

 

이밖에 일제하에서 활발히 창작 활동을 펼친 시조시인으로는 고두동(高斗東), 조종현(趙宗玄), 정훈(丁薰)등을 들 수 있다.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알이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청(秋晴)

한가닥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석류> (이영도)

 

물레소리와 타작마당의 도리깨질에서 시조의 가락을 익히고 오빠 이호우의 영향을 받은 이영도(李永道)가 45년 12월 "죽순"지를 통해 나옴으로써 해방 이후 최초 등단 시조시인으로 기록된 위 시 "석류"에서도 드러나듯 여성 특유의 기다림에 의한 단아한 서정과 미모로 李씨는 황진이의 맥을 이은 현대 시조시인으로 여류 시조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영도 이후 이렇다할 신인을 못내다 6·25 전란기를 거친 시조단은 이태극(李泰極), 정소파(鄭韶坡), 장순하(張諄河), 정완영(鄭梡永), 박재삼(朴在森), 박경용(朴敬用), 최성연(崔聖淵), 송선영(宋船影), 최승범(崔勝範), 허연(許演), 박일송(朴一松), 박병순(朴炳淳)씨 등을 내놓으며 60년대 들어 시조의 중흥기를 맞게 한다.

 

60년 6월 이태극, 조종현 주도로 시조전문지 "시조문학"이 창간되면서 작품 발표와 독자적 신인배출의 토대를 마련한 시조단은 60년대 비약적 발전을 보게된다.

 

60년대에 배출된 주요 시조시인으로는 이근배(李根培), 이우출(李禹出), 이우종(李祐鍾), 김제현(金濟鉉), 박항식(朴沆植), 유성규(柳聖圭), 이상범(李相範), 김월준(金月埈), 서벌(徐伐), 박재두(朴在斗), 김종윤(金鍾潤), 윤금초(尹今初), 김시종(金市宗), 김춘랑(金春朗), 진복희(晉福姬), 조오현(曺五鉉), 이은방(李殷邦), 유제하(柳齊夏), 장지성(張芝城)씨 등을 들 수 있다.

70년대 들어서는 유재영(柳在榮), 김남환(金南煥), 이우걸(李愚傑), 박시교(朴始敎), 김상묵(金相黙), 김영재(金永在), 김원각(金圓覺), 백이운(白利雲), 정해송(鄭海松), 박영교(朴永敎), 이기라(李起羅)씨 등이 시조단에 나와 60년대 시인들과 함께 중진, 중견으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현 시조단을 이끌고 있다.

 

80년대 등단한 주요 시조시인으로는 박기섭, 지성찬, 이정환, 문무학, 이지엽, 정수자, 김복근, 오종문, 전병희, 김연동, 최도선, 오승철, 홍성란씨 등을 꼽을 수 있다.

 

90년대 들어서는 박권숙, 김수엽, 나순옥, 강현덕, 원은희, 이달균, 최준씨 등이 나와 기성 시조단의 주목을 끌고 있다.

현재 시조시단 인구는 6백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시조문학", "현대시조", "시조생활", "시조시학", "한국시조" 등 시조전문 문예지 및 종합문예지 등을 통해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중앙일보는 81년부터 시조짓기 운동을 펼치며 "중앙시조대상"을 제정, 기성시단의 시조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고 있으며 "중앙시조지상 백일장"을 매달 열어 시조의 저변확대에 힘쓰고 있다.

 

또 시조단은 96문학의 해를 맞아 "온겨레시조짓기 추진회"(회장 정완영)를 결성, 시조의 중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시조단 자체에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계파별, 지역별로 갈려 나름대로 신인을 배출해 시조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에 광주, 대구, 제주, 마산, 서울, 인천 등 전국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는 중견, 신예 시조시인들이 지난 7월 중순 만나 지역과 계파를 타파, 열린시조를 지향하며 질을 끌어올리자는 취지의 모임을 결성하기로 해 시조의 앞날을 밝게 하고 있다.

 

󰏐 묵은 밭 일구는 고투(苦鬪)

 

시조시인들은 밭을 새로 일군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채찍하며 외로운 작업에 임하고 있다. 아니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 시조짓기인지도 모른다. 전통의 묵은 밭에서 현대의 복잡다단한 삶과 정서의 결실을 맺어 현대시와 질적인 수준에서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 묵은 밭에서 쭉정이가 아닌 알곡을 맺기 위해 6백여 시인들이 묵묵히 땀을 흘리고 있는게 현 시조단 풍경이다. 현대시에 비해 돈도 명예도 안되는 시조에 사재까지 털어넣은 선·후배 시인들도 다른 어느 문학 분야보다 많다. '한국시조'를 편집하면서 줄곧 느끼는 것은 의식있고 깨어 있는 시인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 각각의 혼신을 다한 내밀한 움직임이 작품을 통해 포착된다.

 

시조 전문지 편집자로서 그런 작품들을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겠는가. 그런 작품들은 접수 즉시 평론가의 손에 넘긴다.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서다. 시조가 외로운 것도 사실은 현대시에 비해 정당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 아닌가. 작품이 훌륭해 모두 다 싣고 싶고, 또 제대로 평가도 받게 해주고 싶지만 능력이 달리는 것을 어찌하랴. 언젠가 어느 신인에게 말한 바 있다. 적어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시대와 숨결을 같이해야 하고 역사적인 안목도 지녀야 한다고. 결국 시조도 <새로운 의식과 새로운 서정의 싸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통과 당대를 한 축위에 놓고 아우를 수 있을 때만 시조는 진정 현대시로서 기능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처럼 쉽지 않은 그 작업을 위해 오늘도 시조시인들은 붓을 벼르고 있다. 현대시로서의 찬란한 중흥을 그리면서.

 

신경림(申庚林, 1935- )

 

· 충북 충주 생. 동국대 문리대 영문과 졸업

· 1956년 [문학예술]지 <갈대> 추천 등단

· 오랜 침묵 끝에 작품 활동을 재개함

·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

· 시적 경향

- 초기시 : 인간존재를 관념적으로 다룸

- 후기시 : 농촌현실을 통한 인간 정서

---  시집 [농무]속의 시 <농무>, <장마>,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목계장터>, <갈대>, <가난한 사랑노래>

 

▲ 눈길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 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 뿐

수제비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 타령을 늘어 놓고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 [새로 읽는 그작품] 신경림 시집 `농무'.....글 안도현

## 친근한 언어로 담아낸 `70년대 삶'...현실 그대로 묘사 새 장 ##.

 

 

비탈진 달동네 개똥이네집 지붕이 비만 오면 샌다거나 공장에 나가는순이가 얼굴이 헬쓱하다는 이야기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도 없는 일처럼 꾹꾹 덮어 두는 게 제대로 세상을 사는 방식임을 가르치고 또 익히던 시절. 그야말로 가난이 죄라서문학예술마저 그 가난을 드러내기를 주저했고, 오히려 외면하고 말았던시절.

 

[농무]라는 한 권의 얇은 시집이 조근조근 되셔겨낸 세계는 현실의 사실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사건이 될 만했다. 얻어 쓴 조합 빚과 술집 색시의 분 냄새와 담뱃진내 나는 화투판이 소외의 장막을 활짝 걷어젖히고 신선한 시어가 되어 한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는 화두를 접한 [못난 놈]들이 비로소 소줏잔을 들이키며 당당히 어깨를 흔들수 있게 되었던 것.

 

열일고여덟 살 무렵 [농무]가 아직 내 책꽂이에 꽂히기 전, 까까머리나는 이른바 고등학생 문단을 들락거리던 나름대로 [잘난] 문학소년이었다. 쥐뿔도 없는 내가 잘난 척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시를 척척 써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 기술을 나에게 전수한 것은 요샛말로 모더니즘이었다. 가증스러울 정도로 치밀하게 언어를 계산하는 데 몰두했으며, 삶의 남루와 슬픔을 함부로 까발리지 않아야한다는 자기 제어 장치도 마련해 두고 있는 터였다. 나는 향기롭기만한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겨운 풍경들이 내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에는 나와 어울려 놀았으나, 내가 까마득하게 잊어 버린, 빛바랜 흑백사진속에 담겨 있던 풍경들이 생생하게 다시 인화가 되어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시집속의 평범한 좌우명 하나가 실제로 시골 큰집 내 사촌 형의 책상 앞에 붙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 권의 시집 속에 쓸쓸하고 고단한 줄로만 알았던 세계가 그렇게 눈부신 또아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었다니! 게다가 구태여 말을 비비 꼬지 않더라도 시가 태어날 수 있으며, 한토막의 이야기도 서정을 만나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롭게 배웠다.

 

원래 이 시집은 한 이름없는 출판사에서 시인이 자비로 5백부 한정판을 낸 뒤에 1975년 [창비시선] 제 1권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이십 년이지나도록 시집을 찾는 이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니 과히 시를쓰고자 하는 문학청년들의 빠뜨릴 수 없는 교과서가 되고 있다 하겠다. <시인>발행일 : 97년 09월 23일

 

󰏐 시집 [농무(農舞)]에 대하여 - 제1회 만해문학상 심사를 마치고

 

신경림씨의 시집 [농무]는 새 각광을 받는다. 이는 신씨의 시가 모두 걸작이라는 것도 아니요, 그가 위대한 시인이라는 것도 아니다. 그는 시의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리얼한 데서 시의 감동을 찾는다. 진실로 리얼한 데는 산문에도 시와 같은 감동이 있다. 그의 시의 감수성이나 언어구사가 그런 데 기조를 두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 정서의 바탕은 농촌에 있었던 것인데, 현대의 물질 문명에 눌려 우리는 그것을 가난으로만 알고 잊어버렸다. 이것을 오늘의 독자들의 감수성에 맞도록 회복하는 것이 한국시가 살아가는 하나의 길이 될 수도 있다. (1974.5)

 

󰏐 신경림시인 회갑기념 평론집 출판기념회

 

申庚林 시인의 회갑기념 평론집인 「신경림 문학의 세계」 출판기념 모임이 23일 저녁 서울 마포구 용강동 한정식집 「나룻터」에서 열렸다. 이날 모임에는 申씨와 가깝게 지내는 문인들과 집필자 출판관계자등 30여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학계에서 서울대 白樂晴, 연세대 李善榮, 수원대 具仲書, 이화여대 柳宗鎬, 인하대 尹永川, 고려대 黃鉉産교수등이 참석했다. 또 任在慶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아동문학가 孫春翼씨, 시인 閔暎, 趙泰一, 鄭喜成, 李時英, 金正蘭, 金正煥 씨, 소설가 李文求씨, 문학평론가 金思寅, 金允泰, 林奎燦, 方珉昊씨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 평론집은 申씨와의 대담 작품론등에대해 16명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국문학자들이 집필했다.

 

56년에 문단에 데뷔한 申씨는 민예총 사무총장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등을 역임했다.

 

신동문(辛東門, 1927-1993)

 

· 시인

· [조선일보] 신춘문예 <풍선기(風船期)>가 당선, 등단

· 주로 현실 참여적 경향의 작품을 창작(‘앙가주망’ 시인으로 일컬어짐)

· 1960년대 중반, 절필 선언,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농장에 정착, 침술을 무료 시술하여 10만 치유자로부터 ‘辛바이저’로 불리었다 함.

· 시인이기 앞서 소탈, 인정 많은 인간이었다 함

  신동문 시비(단양읍 근린공원 내, 삼봉정도전선생숭덕비 아랫쪽) : 시 ‘내 노동으로’ 후반부 가 새겨져 있음

---  고은 시 <문의마을에 가서>

 

신동엽(申東曄, 1930-1969)

 

· 부여 생.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전주사범 및 단국대 사학과 졸.

· 1959년 [조선일보]에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하여 등단.

· 첫시집 : [아사녀](1963) 발간.

· 장편서사시 <금강> 발표(1967)

· 시선집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79) 발행

· 1961년 명성여자고등학교 교사 부임 재직 중 69년 작고.

 

- 유적지

1) 신동엽시비(부여읍 백제대교 인근) : ‘산에 언덕에’ 새김

2) 묘(부여읍 능산리 고분 근처 야산)

---  < 김수영> (4.19를 바라보는 두 시인의 인식 차이),

---  문학이론 <사일구(4.19)>

---  시 <산에 언덕에>, <진달래 산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봄은>, <껍데기는 가라>,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진달래 산천>

 

󰏐 신동엽의 역사관과 여성관

 

󰊱 연구사

① 김우창 <신동엽의 금강에 대하여> [창작과 비평사] 1968. 봄호

② 김주연 <시에서의 참여문제 - 신동엽의 금강을 중심으로> [현대한국문학의 ~] (김병익 외 3인 공저)

③ 채광석 “민중시인 신동엽”

④ 성민엽 평전 <껍데기는 가라> [문학세계사] (1984)

 

󰊲 특징

① 1950년대 시단에 문학수업을 했음에도 역사와 현실문제에 접근

㉠ 모더니즘으로부터 초연함

㉡ 서정주, 박재삼류와 비교

· 공통점 : 전통지향적 보수주의

· 차이점 : 서정주, 박재삼은 역사와 현실을 관조의 눈길로 덮어 버렸으나, 신동엽은 동의하 지 않음

 

② 양대 주류 거부 - 고독

· <진달래 산천>에 대한 동료문인들의 용공성(容共性) 시비 --- <진달래 산천>

 

신동집(申瞳集, 1924- , 현당·玄堂 )

 

· 대구 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 미주 인디애나 대학 수학.

· 영남대 교수 역임.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 1948년 대학 재학 중 첫 시집 [대낮]으로 등단

· 1954년 [서정의 유형]을 발표한 이래 [제2의 서정], [모순의 눈물](63) 등 10권이 넘는 시집을 낸 다작 시인

· 경향 :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존재의식 추구

---  <목숨>( 김남조의 <목숨>과 비교 ), <변신>

 

󰏐 신동집론 - 탈향(脫鄕)과 귀환(歸還)의 미학(美學) / 이은애

 

① 시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요건

(1) 시인은 언어에 대한 사랑을 지녀야 한다.

(2) 시인은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상상력과 직관으로써 투시할 줄 알아야 한다

(3) 생과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녀야 한다.

 

② 시인 = 영원한 무(無)에의 도전자

표현자는 끊임없이 꽃피우는 사람이요, 안주를 거절하는 사람이요, 무한표박자(無限漂迫者)이다. 표현자는 길을 떠나는 사람이요, 표현자의 시학은 행인(行人)의 시학이다. 시인은 영원한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다만 무한히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지향하는 바에 일단 도달한다면 표현이란 행위는 곧 소멸하고 만다. 표현자는 끊임없이 재출발을 해야 한다. 표현자는 끊임없는 탈향자요 귀환자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 호 사임당, 1504-1551)

 

· 본관은 평산. 율곡 이이의 어머니

· 어려서부터 경전 독해, 자수와 시에 능함

· 안견의 화풍을 영향 받아 산수, 포도 등을 잘 그렸음

 

▲사친시 비문

 

늙으신 어머니는 강릉에 계시는데

서울 향해 떠나는 서글픈 이내 마음

머리를 돌이켜 북평을 바라보니

흰 구름 나는 아래 저녁 산만 푸르네

 

신석정(辛錫正, 1907-1974, 석정·夕汀, 본명 錫正)

 

· 전북 부안 생. 시문학파

· 6·25전쟁 후 전주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만년을 보냄

· 24년 [조선일보]에 습작시 <기우는 해> 발표 후 시작 활동

· 1930년 [시문학]에 <선물>을 쓰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 농촌에 살면서 도연명, 타고르 등의 영향을 받아 목가적인 자연귀의의 정신을 노래해 김상용 과 더불어 ‘전원파’로도 불림.

· 김기림은 신석정을 ‘목가시인’이라 부르기도 했음

· 후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가지는 시>들을 발표, 김영랑과 같은 변모를 보임.

· 시집 [촛불](39), [슬픈 목가](47), [빙하](56), [산의 서곡](67), [대바람소리](70) 등

 

- 유적지

1) 생가(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2) 청구원(부안군 선은리) : 신석정 문학의 산실

3) 석정공원·시비(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 시비에 ‘파도’ 새김

---  시 <슬픈구도>, <전아사>, <꽃덤불>, <들길에 서서>, <소년을 위한 목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문학이론 <전원파>

 

▲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햇볕이 유달리 맑은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아스라한 산 너머 그 나라에 나를 담뿍 안고 가시겠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구름이 된다면 ·····.

바람 잔 밤하늘의 고요한 은하수를 저어서 저어서

별나라를 속속들이 구경시켜 주실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초승달이 된다면 ······.

내가 만일 산새가 되어 보금자리에 잠이 든다면

어머니는 별이 되어 달도 없는 고요한 밤에

그 푸른 눈동자로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 신석정의 문학 사상 - 지조와 고향의식에 대한 고찰

 

석정에게 있어 시정신이란 지조(志操)를 가리킨다. 그는 말하길 <시정신이 없는 민족, 시정신이 없는 국가는 흥할 도리가 없다. 시정신의 바탕이 되는 것은 신념(信念)이요, 신념은 바로 지조와 통하는 길이다라고 했다. 불안하고 암담한 시대에 처했던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시로써 그 상황을 초극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안이한 시작 태도를 지양하고 <무서운 정신의 소요>를 시 쓰는데 요구했다. 이 것이 바로 지조가 되는 것이다. --- 󰃫 <지조론>(조지훈)

 

신석초(申石艸, 1909-1975, 유인·維仁, 본명 응식·應植)

 

· 충남 서천 생. 경성제일고보, 일본 호오세이대 철학과 수학

· [자오선](1937) 동인으로 활약

·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일보] 논설위원 역임

· 경향 : 초기작은 ‘발레리’의 영향을 받아 지적으로 동양 허무(노장사상)사상을 가지고 노래.

· [석초시집](1946), [바라춤](1959), [폭풍의 노래](1970) 등 시집

· 장시(長詩) ‘처용(處容)은 말한다’(1947)

---  <꽃을 소재로 한 시> 󰊱(꽃잎절귀), <바라춤>

 

▲ 고풍

 

분홍색 회장저고리,

남 끝동 자주 고름

긴 치맛자락을

살며시 치켜들고

치마 밑으로 하얀

외씨버선이 고와라.

멋들어진 어여머리

화관 몽두리,

화관 족두리에,

황금 용잠 고와라.

은은한 장지 그리메

새 치장 하고 다소곳이

아침 난간에 섰다.

· 시상의 전개 : 시선(視線)의 이동

 

신재효(申在孝, 1812-1884, 동리·桐里)

 

· 전북 고창 생

· 업적 - 조선 후기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

·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능, 음률,가곡,창악,속요에 정통

· ‘중인’ 신분이기에 사회진출 제약, 지방서리에 머물면서 풍류를 즐김

· 퇴임 후 동리정사를 지어 칩거, 김창록, 전해종, 진채선 등의 명창을 기름

· 종래 계통없이 불려지던 판소리를 여섯마당으로 통일, 체계확립

· 이같은 사실이 조정에 전해지자 1877년(고종 14년)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가선대부 동지중추 부사)’를 제수 받음 --- 󰃫 <품계>

· 1990년 문화부 12월의 문화인물 선정

 신재효 고택(고창군 고창읍내) : 1979년 중요민족자료 제39호로 지정 보존. 당대 1천석의 부 자로 국창, 명창을 길러냈으며, 단가도 창작하기도 했음. 원래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 하나 현재는 한 채의 초가지붕 일자집이 있다.

 

신채호(申寀浩, 1880-1936, 단재·丹齋)

 

· 애국 사상가, 사학자.

· 충남 대덕군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뒤에 충북 청원군으로 이사, 이곳에서 소년 시절 보냄.

· 1905년경부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위원 또는 주필이 되어, 배일사상(排日思想), 독립정신 고취.

· 역사저술 :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등

  신채호생가 · 신채호 동상 : 대전 도리미산 도리미 마을

 

▲ 한 나라 생각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랑 사이 칼로 써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줄줄 흘러내려 오리니

한 죽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 나라 땅에 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 1913년 무렵 상해에서 쓴 작품으로 잃은 나라를 다시 찾는 길은 오직 힘을 모아 항쟁하는 것이라고 노래

 

신흠(申欽, 명종 21~인조6(1566-1628), 상촌)

 

· 본관 평산. 조선 인조 때 학자, 문신

· 개성도사 신승서의 아들

· 이정구, 택당 이식, 장유 등과 함께 ‘한문사대가’로 불림

· 정주학의 대가로 저서에 [상촌집](60권 20책)이 전함

---시조 <산촌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무쳐셰라>, <노래 삼긴 사 시름도 하도 할샤>

 

심훈(沈熏, 1901-1936, 본성명 심대섭·大燮)

 

· 소설가, 언론인, 시인. 본관 청송. 서울생

· 교동초등학교 졸, 경성제1고등학교 입학, 4학년 때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 그 후 상해로 망명. 1923년에 귀국

· 귀국 후 [동아일보], [중앙일보] 기자 생활

· 1924년 [동아일보]에 번안소설 <미인의 한> 연재하면서 작가명을 얻음

·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한 인연으로 영화계 진출.

· 1927년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 각색, 감독한 영화인

· 1930년 이후 <동방의 애인>, <영원의 미소>(33), <직녀성> 등의 장편과, <상록수>(35)를 발표, 소설가로 모습을 부각.

· 또한 시로서 <그날이 오면> 발표, 민족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한 염원을 격렬한 호흡으 로 노래.

- 1932년 시집 [그날이 오면]이 일제 검열로 출간되지 못하자 낙심, 아버지의 농토가 있는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낙향 )

·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다는 보도가 실린 신문 호외(號外)의 뒷면에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즉흥시를 씀

· <상록수> 출판을 위해 교정을 보다 장티푸스에 걸려 경성제대부속병원에서 하직

 

- 유적지

1) 심훈시비(필경사 경내 소재) : ‘그날이 오면’ 새김

2) 상록수문학비(경기 안산시 본오동) : 우리문학기림회(회장 이명재)는 소설가 심훈의 장편 < 상록수>를 기리는 문학비를 이 작품의 무대인 경기 안산시 본오동의 상록수전철역 앞 녹지공 원에 세웠다(1996)

---  시 <너에게 무엇을 주랴>, <그날이 오면>

 

󰏐 <심훈>의 작품 세계(글, 천이두)

 

사실 이광수나 현상윤 등의 단편소설에서 시작된 한국의 근대소설은 망국의 한이 서린 식민지 상황에서 시작된다. 국토와 주권을 상실한 현실에 대한 순응과 변혁의 갈등 속에서, 한민족은 탄압과 수탈 속에서 굶주리고, 고향을 버리고 북간도로 떠나는 민족적 비극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식민지 상황에서 많은 작가들은 민족의 광복과 현실 극복을 위하여, 사회적 자아의 인지와 성취를 위하여, 현실을 조명하고 그 아픔을 극복하려는 헌신적 삶을 창조하는 경향을 띠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게 된다.

 

심훈도 역시 19세의 나이로 3․1 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르고, <탈춤>이나 <상록수>와 같은 작품으로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려는 강력한 저항의식을 형상화하고, <영원의 미소>와 <직녀성>과 같은 작품으로 지난날의 생활윤리와 이제의 그것의 갈등 속에서 인간성을 발양(發揚)하려는 변혁적 의식을 보여준다.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노래한 <그날이 오면>에 집약되어 있는 절규는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시원치 않아 가죽이라도 벗겨 북을 만들어 마구 행렬 앞에 치고 싶은 그날 ―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절규한 강력한저항의식이 나타난 이 시를 보아도 심훈의 지향의식이 무엇인가를 짐작케 한다. 심훈은 이런 의지로 제일고보 재학 시절 19세의 나이로 만세를 부르고 옥고를 치를 때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몰래 내보낸 사연>은 민족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려는 집요한 의지가 피맺혀 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요.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천 분이요, 또한 몇만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사나이외다.

 

이 얼마나 처절한 부르짓음이며, 자유를 위한 절규인가.

심훈은 1901년 9월 12일 서울 노량진 현 수도국 자리에서 조상 숭배의 관념이 철저한 부 심상정과 파평 윤씨 사이에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조선조 말 중류 가정의 출생으로 온후한 성품을 지녔고 뛰어난 재질을 지닌 여인이었다. 심훈은 본명은 대섭이고 소년 시절에는 금강생, 중국 유학 때는 백랑(白浪), 1920년 이후에 훈(薰)이라고 썼다. 1915년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후의 경기중)에 입학하여, 작곡가 윤극영과 은행가 윤기동과 함께 미남 행렬 속에서 명석함을 자랑했다. 1917년 3월 외족이며, 명문인 후작 이해승의 누이 전주 이씨와 혼인하여 심훈이 해영(海映)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3․1운동 때(제일고보 4학년, 19세때)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3월 5일 피검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변장을 하고(안경을 쓰기 시작) 상해를 거쳐 항주에 이르러 지강(之江)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한다. 여기에서 이동녕과 이시영 등과 알게 되고 귀국한 후 안석주 등과 교우하여 극우회를 만들기도 했다.

 

심훈은 손이 없어 이해영과 헤어지고 1924년 이후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나라 없는 울분을 술로 달랬으나, 아무리 기생이 구애를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아 호탕하고 멋진 미남의 무관심에 기생들은 가슴만 불태웠다.

 

1930년 12월 24일, 심훈은 19세의 무희인 안정옥과 혼인하여, <독백> <그날이 오면> 등을 발표하다가 장남 재건과 같이 충남 당진에 내려가 창작에 전념하게 된다. 1933년 장편 <영원의 미소>를 조선,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를 발표한다. 이해영에 대한 회고 작품이라고 하는 <직녀성>을 조선 중앙일보에 연재하여 그 고료로 부곡리에 집을 지어 <필경사>라고 불렀다. 이 필경사에서 쓴 <상록수>가 1935년 동아일보 15주년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상금 5백원을 받아 그 중에서 상록학원을 설립한다. 1936년 9월 6일 대학병원에서 급서(急逝)하여 심훈의 문학은 더 펼치지 못하고 만다. 시집 <그날이 오면>이 일제의 검열로 출간되지 못하고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동방의 애인> <불사조>가 걸열로 중단되고 말아 미완성으로 끝난다.

 

<상록수>(1935), <황공의 최후>(1933), <탈춤>(1926) 등은 심훈의 소설세계를 조명할 수 있고, 장편과 단편, 영화소설이란 심훈의 소설의 양식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상록수>는 경성농업을 졸업하고 진학하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부곡리에서 ‘공동경작회’를 만들어 농촌운동을 일으킨 당질 <심재영>을 모델로 하여 수원군 반월면 천곡리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최용신>과의 허구적 로맨스를 만들어 씌어진 소설이다. <상록수>에는 심재영이 박동혁으로 최용신이 채영신으로 주인공이 되어 있고, 심재영이 한 <공동경작회>는 <농우회>로 <샘골>이 <청석골>로 바뀌어져 있으며, 심재영은 작품과의 인연으로 최용신의 무덤을 찾아보기도 했다고 한다. <상록수>는 당시 브나로드 운동의 선봉에 서서 농촌활동을 하는 박동혁과 채영신의 헌신적인 봉사와 둘 사이에 얽혀지는 사랑을 내용으로 한 소설이다. 청석골을 다듬어지고 가꾸어진 성취된 사회로 만들려는 지향적 욕구와 식민지 치하라는 존재적 현 실 사이의 갈등과 그 비극적인 현실을 그린 농민소설이다.

 

또한, <황공의 최후>는 직업을 잃고 시골 삼촌집에 온 ‘나’라는 청년이 애지중지하면서 기른, 기골이 장대하고 영리한 황공이 닭과 같은 짐승을 잡아 먹는 것으로 하여 미움을 사던 중 마을사람들에 의해 보신탕용으로 죽는 처참한 최후를 본다는 내용으로 무엇인가 상징적인 내용이 담긴 단편이다.

 

<탈춤>은 최초의 영화소설로서, 혜경이란 한 여성을 둘러싸고 서로 사랑하는 일영, 처자가 있으면서 여러 여성을 섭렵하고 혜경이를 탐내는 지주의 아들 준상, 혜경이와 일영의 사랑을 성취시키려는 흥열의 인물이 진실한 사랑과 탐욕적인 사랑의 상극 속에서 준상의 위선적인 결혼식에서의 희극적인 결말과 혜경의 죽음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보여주는 애정 삼각의 멜로드라마적인 면에서도 인물의 갈등이 심화된 작품이다. 또한 혜경의 아버지가 준상이네 집의 소작인이라는 것과 지주의 아들인 준상이 소작인인 혜경의 아버지를 협박하여 혜경이를 준상의 집에 머물게 하여 야욕을 채우려는 장치나, 준상의 처남 아이를 낳는 난심이, 준상의 아들을 데리고 온 일영, 그리고 이런 사실을 매도하는 흥열, 이 혼인식장에서 고하는 희극적이기도 한 종말은 이 영화소설의 절정을 이루어 현실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해부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삽화로 당시의 배우 나운규, 김정숙, 주삼손 등이 매장면에서 실연(實演)하는 사진을 넣은 것도 특이하다. 이 <탈춤>은 심훈이 영화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심훈의 소설은 다음 몇 가지 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첫째는 존재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행동성이 강력하게 나타나 있다. 식민지 치하의 질곡 속에서 신음하는 현실, 낡은 관념과 관습이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동력을 저해하는 현실을 초극하여 새로운 내일을 지향하려는 정신이 투철하게 나타나 있다. <상록수>에서 여러 촌로(村老)의 거부와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청석골을 낙후되고 고질화된 농촌에서 보다 활기차고 운명을 같이하는 공동체로서의 한 이상향으로 변혁시키기 위하여 채영신과 박동혁이 각기 청석골과 한곡리에서 농우회를 조직하고 야학을 운영하여 ‘갱생의 광명은 농촌으로부터’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마라 !’ 등의 기치 밑에서 낡은 관습에 젖어 잠자고 있는 농촌을 일깨워 새로운, 갱생되고 다 같이 웃고 살 수 있는 한 낙원을 건설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한다. 안에서의 관습에 의한 방해와 밖에서의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면서 그날을 성취하려는 집요한 의지와 행동이 보인다. 또한 <탈춤>에서 소작인의 딸을 애욕의 대상으로 구사하려는 낡은 의식과 사랑을 기저로 한 내일에의 지향을 위한 갈등이 행동화하여 나타나 있는 것은 그런 경향을 말한다. <영원의 미소>에서 서로 사랑하는 수영과 계숙은 현실적인 절망의 극한 상황속에서도 지주의 유혹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결별하여 빈손으로 갯벌을 일군 보리밭에서 힘찬 내일을 그리면서 미소를 짓는 것도 바로 현실 극복의 자세이다. <그날이 오면>의 시에 나타나 있는 조국의 광복과 청석골을 위시한 농촌의 변혁을 실현하려는 심훈의 소설에선 역사적 현실을 인식한 세계관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행동성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변혁적 의지의 발로 이며, 낙원 추구 사상의 발로이기도 하다.

 

둘째는 사랑을 기저로 한 인간 애정이 발현되어 있다. 역사적 현실의 인지에서 인간의 본질을 외면한 표면적인 현실의 인식에 머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 심훈은 사랑을 비롯한 인간의 본질의 인지와 그 역동에 의한 현실극복의 지표를 추구한다. <상록수>에서 채영신과 박동혁의 사랑과 신앙에 의한 성취적 활력소나 청석골의 젊은이들의 인간에 대한 생활의 성숙을 비롯하여, <영원의 미소>의 수영과 계숙의 사랑을 근저로 한 현실 극복의 집요한 자세, 그리고 <탈춤>의 일영과 혜경의 현실의 굴곡 속에서 성숙하려는 사랑을 모태로 한 준상의 봉건적 잔재의식의 극복과 흥열의 의사적(義士的)인 구제, <황공의 최후>에서 황공에 대한 애정 등이 다 사랑을 기저로 한 인간애의 발현이다.

 

셋째는 장르의 확대에 의한 표현영역의 확대와 일탈이다. 심훈은 주로 소설을 쓰면서 저항정신이 나타나 있는 시집 <그날이 오면>의 시, <탈춤>의 영화소설 등 장르의 확대에 의해 그의 문학적 영역의 다양성과 확대를 보여준다. 그러나 소설은 전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어 그의 기법과 문체는 변혁보다는 영역의 확대라는 데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이 심훈은 식민지 치하란 역사적 현실에서 존재현실을 극복하려는 행동성을, 사랑을 기저로 한 인간애의 정신을 박동혁으로 하여 장르의 확대에 의해 <상록수>, <황공의 최후>, <탈춤> 등에 강력히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심훈을 1930년대 소설에서 사회의식에 의한 현실과 지향적 성취의 갈등을 부각하고 삶의 지표를 제시하려는 경향의 기수라고 할 만하다.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