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국어학습사전 / 문인(ㄱ~)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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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賈島, 779?-843)

 

· 중국 당의 시인. 자는 낭선. 기금의 하북성 판양사람

·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중이 되어 무본(無本)이라 부름

· 811년에 낙양(뤄양)에서 한유와 교유하면서 환속했다. 다시 관계 진출을 지망하여 진사시험 에 응시, 급제 못하고 837년에 사천성(쓰촨성) 장강현의 주부(主簿)가 되기도 했음.

· 그의 시는 북송의 시인 소식이 같은 무렵의 시인 맹교(孟郊)와 ‘교한도수(郊寒島瘦)’라 평한 것처럼 풍족한 정서는 결핍되어 있지만, 서정적인 시는 매우 세련되어 세세한 부분까지 잘 묘 사되어 있다. 그는 1자 1구도 소홀히 하지 않고 고음(苦吟)하여 쌓아 올리는 시풍이었으므로 그 유명한 ‘퇴고(推敲)’의 일화는 그의 창작태도에서 생겨난 것이다.

· 작품으로 시집 [가랑선장강집(賈浪仙長江集)](10권)

--- 어휘 <퇴고(推敲)>

 

 가어옹(假漁翁) = 어부(漁父)

 

· 어부(漁夫)가 아니면서 어부처럼 지내는 사람이란 뜻. 정계 혹은 세사를 온전히 잊어 버리고 자연에 묻혀 낚시나 드리우며 술잔이나 기울이고 시나 짓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

·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고산 윤선도 등

--- 이현보 시조 <이 듕에 시름 업스니 어부(漁父)의 생애이로다>, 윤선도 시조 <어부사시사> 등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

 

· 일본 작가. 오사카에서 의사였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16살 때 고아가 됨

· 1968년 타고르(인도)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 수상

· 1972년 의문의 자살로 세상을 뜸

· 주제의식 : 고아의식

- 전 생애, 전 작품을 통해 근저를 이루고 있어 그 위에 동방적 허무사상이 합쳐 차갑고 지적인 비정과 서정으로 형상화됨

· 주요작품 : [설국(雪國, 유키구니)], [금수(禽獸)], [산의 소리], [호수]

 

 강경애(姜敬愛, 1906-1943)

 

· 황해도 장연 태생. 여류소설가

· 1931년 잡지 [혜성]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 발표하여 데뷔

· 1932년 간도로 이주, 단편 <채전(菜田)>, <부자(父子)> 등 발표

· 장편소설 <인간문제>를 동아일보에 연재

- 당시 인간 사회의 관계를 대담하게 다루었으며 노동자의 처참한 현실을 잘 드러냄

· 기타, 중편소설 [지하촌], 단편 [꺼레이] 등

· 간도에서 귀국한 후 1년 만에 병으로 사망

--- 소설 <인간문제>

 

 강릉 출신 문인

 

· (시인) 황금찬, 엄창섭, 갈정웅, 함혜련, 윤명

· (소설가) 서영은, 윤후명, 이순원, 김형경, 최명길, 고경희, 박기동 등

 

 강소천(姜小泉, 1915-1963)

 

· 함남 고원생. 아동문학가.

· 함흥고보졸, 해방 후 청진여자고급중학교, 청진제일고급중학교 교편생활

· 월남 후 1930년 [아이생활], [신소년] 등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

·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민들레와 울아기> 당선

 강소천문학비 (서울 어린이대공원)

: 동시 ‘닭’ 새김(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강신재(康信哉, 1924- )

 

· 서울 생. 경기여고, 이화여전 가사과 입학(2년 중퇴)

· 1949년 김동리 추천으로, 단편 <얼굴>, <정순이>를 [문예]지에 발표, 등단

· 1959년 <절벽>으로 한국문인협회상 수상

· 대표작 : <임진강의 민들레>(1962), <오늘과 내일>(1966), <파도>(1970)

· 창작집 <희화>(1959), <젊은 느티나무>(1970)

· 작품 경향 : 초기에는 현대 남녀의 애정 윤리를, 최근에는 역사소설에 관심

--- 소설 <젊은 느티나무>

 

 강은교(姜恩喬, 1945- )

 

· 함남 홍원 생. 연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 현 동아대 국문과 교수

· 1968년 [사상계(思想界)] 신인문학상에 <순례자의 잠>이 당선 등단

·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 윤상규, 임정남, 정희성, 김형영 등과 [70년대] 동인으로 활동

· 제1시집 [허무집](71) : 인간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인간의 감정이 거의 배제)

· 시선집 [풀잎](74) 이후 문단의 주목 : 관념적, 개인적 차원에서 현실적, 공동체적 삶으로 관 심을 바꿈

- 제1부 : 허무집(68년 문단데뷔 ~ 71년까지)

- 제2부 : 허무집 이후(73, 74년)

· <빈자 일기>(77), <소리집>(82), <붉은 강>(84), <우리가 물이 되어>(86), <바람노래>(87),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89) 등

· 시세계 변화 : 존재 탐구의 문제 󰠜󰠜󰠜󰠜󰋼 사회 역사적 삶의 문제

(두 번에 걸친 죽음의 체험과 관련(72년 대수술 후 갓난아기 잃음)

--- 강은교 시 <사랑법>, <우리가 물이 되어>

--- < 김남조>

 

 강태공(姜太公, ? - ?, 태공망, 본명 강상)

 

· 태공망(太公望)의 속칭. 주나라 초기의 정치가, 병략가

· 성은 강(姜), 이름은 상(尙)

· 주나라 문왕이 위수가에서 처음 만나 스승으로 삼았으며, 뒤에 무왕을 도와 은을 멸하고 천 하 를 평정하여 그 공으로 제(齊)나라에 봉함을 받아 그 시조가 됨

· 동해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나 위수(웨이수이강)에서 낚시질하다 문왕을 만났 다는 등 그 의 전기가 대부분 전설적이지만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시대에는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로서 그 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했음

· 병서(兵書) [육도(六韜)](6권)은 그의 저서라 전해짐

--- 가전 <죽부인전>

 

 계관시인(桂冠詩人, poet-laureate)

 

· 영국 궁내관(宮內館)의 대우를 받는 명예 시인. 즉 월계수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탁월 한 시인을 국왕이 선택하게 되는데, 이 영광을 받은 시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명예의 상징으로 월계관(月桂冠)을 씌워 준 데서 유래한다. 현재는 영국 국왕으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 는 명예직이며 지금은 총리의 추천으로 임명된다.

 

· 매년 국왕의 탄생일이나 신년 축하연 등에 시를 지어 바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이 칭 호는 제임스 1세가 1616년에 B. 존슨에게 수여한 것이 최초이지만, 정식으로는 1670년 드라이 든(J. Dryden)이 이 칭호를 수여 받은 이후 관직화(연봉 300파운드, 카나리아제도 산(産) 포도 주 1통)했다. 이런 관행은 H. J. 파이가 현금을 원하면서부터 폐지되었다.

· 영국의 경우 T.휴스가 임명되기까지의 명단과 임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J.드라이든(1668~89), T.섀드웰(1689~92), N.테이트(1692~1715), N.로(1715~18), L.유스던 (1718~30), C.키버(1730~57), W.화이트헤드(1757~85), T.워턴(1785~90), H.J.파이(1790~1813), R. 사우디(1813~43), W.워즈워스(1843~50), A.L.테니슨(1850~92), A.오스틴(1896~1913), R.브 리지스 (1913~30), J.메이스필드(1930~67), C.D.루이스(1968~72), J.베처먼경(1972~84), T.휴스 (1984~) 등이다.

 

· 미국에서도 1985년부터 계관시인이라는 칭호를, 의회도서관에서 시부문 고문의 지위를 갖는 사람에게 이 칭호를 주었는데 매년 새로 임명되며 급료는 적다. 주요 시작품을 1편씩 제출해야 하고 특정한 국가 행사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다.

- 미국의 역대 계관시인으로는, 1986년 R.P.워렌, 87년 R.윌버, 88년 H.네머로브, 90년 M.스 트랜드, 91년 J.브로드스키, 92년 M.V.딘, 93년 R.도브 등이 있다.

 

 계랑(桂娘, 1513-1550, 호 매창·梅窓, 본성명 이향금)

· 16세기 명종 때의 전북 부안의 현리 이양종의 서녀로서 당시 명기(名妓).

· 노래, 거문고, 한시, 시조에 능한 여류 예술인

· 작품으로 가사와 한시 등 70여 수 이외에도 금석문(金石文)까지 전함

· 작품집 [매창집]은 부전(不傳)

· 1668년(현종)에 구전해 오던 시 58수를 모아 판각한 것이 현전함

 유적지

1) 묘(부안읍 봉두메, 속칭 매창이뜸)

2) 시비(부안읍 서림공원) : ‘이화우 흩뿌릴 제~’ 새김

--- 시조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계용묵(桂鎔黙, 1904-1961)

 

· 평북 선천군 생. 소설가

·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928년에 도일하여 일본 동양(도요)대학 동양학과 수학

· 1924년 [조선문단] 현상 문예에 시 <봄이 왔네>와 <상환(相換)>이 당선, 등단

· 단편 <최서방>을 1927년 [조선문단]에, <인두지주>를 1928년 [조선지광]에 발표, 본격 활동

· 1935년에 <백치 아다다>를 [조선문단]에 발표, 주목을 끔

· 작품경향

- 초기 경향 : 현실성이 강한 경향파적 성격

- 후기 경향 : 인생파적 시각에서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형상화

· 주요 작품 : <연애 삽화>, <병풍에 그린 닭이>, <심원>, <제비를 그리는 마음>, <장벽>, <별을 헨다>, <마부> 등

· [매일신보]에 ‘일장기의 당당한 위풍’이란 친일 수필을 발표한 바 있음

· 경향 : 과작(寡作)으로서 콩트 풍의 단편만을 썼으나 기교를 중시하고 정교한 작품을 남겼다. 인간의 선량함과 순수성을 옹호하면서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탐구했다. 그러나 갈등이 부각 되어 있지 않고 단순 세태 묘사에 머문 한계점도 있다.

· 수필집 [상아탑](1955년), 수필 <구두> (--- 󰃫 <수필> 수필의 종류)

--- 소설 <백치 아다다>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

 

·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유학의 대의명분론을 내세워 왕씨 고려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새로 개국한 (이씨)조선에서 벼슬을 하지 않은 학자.

· 이들은 이성계의 등극을 반대하다 살해되기도 했다.

· 고려 멸망 후에는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는데 72인의 이름이 전한다. 그중에는 그곳에서 생애를 마친 이도 있으나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기도 했다. --- 󰃫 <두문동>

· 정몽주, 이색, 길재, 거견, 원천석, 김진양, 이숭인, 조연, 안원, 김주, 우현보, 조신충, 이고, 이 집, 김자수, 송유, 허도, 허금, 이양중, 박유, 윤충보, 조의생, 고천상, 신규, 신우, 임선미 등

 

고려왕 계보(系譜)

 

(1) 태조(918-943) === 장화왕후 (2) 혜종(-945)

(3) 정종(-949) (4) 광종(-975)

(5) 경종(-981) (6) 성종(-997)

(7) 목종(-1009) (8) 현종(-1031)

(9) 덕종(-1034) (10) 정종(-1046)

(11) 문종(-1083) (12) 순종(1083)

(13) 선종(-1094) (14) 헌종(-1095)

(15) 숙종(-1105) (16) 예종(-1122)

(17) 인종(-1146) (18) 의종(-1170)

(19) 명종(-1197) (20) 신종(-1204)

(21) 희종(-1211) (22) 강종(-1213)

(23) 고종(-1259) (24) 원종(-1274)

(25) 충렬왕(-1308) (26) 충선왕(-1313)

(27) 충숙왕(1313-1330, 1332-1339)

(28) 충혜왕(1330-1332, 1339-1344)

(29) 충목왕(-1348) (30) 충정왕(-1351)

(31) 공민왕(-1374) (32) 우왕(-1388)

(33) 창왕(-1389) (34) 공양왕(-1392)-신종 7세손

··········· [475년, 918-1392]

 

고려시대 개관 : --- 어휘 <고려>

 

* 태조 ~ 10대 정종 (918-1046) : 국기(國基)가 다져졌고, 국권 확립

( 2대 : 혜종, 3대 : 정종, 4대 : 광종 )

* 문종(11대) - 예종(16대) (1047-1122) : 화평이 계속되었고 국력이 융성

* 인종(17대) - 원종(24대) (1123-1274) : 권신과 무신들의 발호로 일어난 정치적 파동, 내란(內亂)으로 국정의 혼란.

 

· 예종(16대) ---- 순덕왕후(이자겸의 딸)

인종(17대) ---- 공예왕후(임원후의 딸)

의종(18대)

* 충렬왕(25대) ~ 공양왕(34대) (1275-1392)

· 충렬왕 ---- 원 세조의 딸

충선왕(26대) ---- 몽고여자

충숙왕(27대)

충혜왕(28대)

공민왕(31대) ---- 궁인 한씨

우왕(32대) ---- 근 비(이림의 딸)

창왕(33대)

· 충렬왕 때, 백이정의 소개로 송의 성리학(혹은 정주학, 程朱學)이 소개

: 주돈이 󰠏󰠏󰋼 정호, 정이 󰠏󰠏󰋼 주희(朱憙)

 

고은(高銀, 본성명 고은태, 1933- )

 

· 전북 군산시 미룡동(옥구)생. 미룡초등학교 졸

· 1951년부터 해인사의 승려가 됨( ~ 1962년까지)

- 서정주와 같이 ‘불교시’에서 시적 영감을 많이 얻고 있으나, 서정주의 인연설(因緣說)에 기초하지 않고 선(禪)적인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곧 서정주의 샤머니즘적인 면모를 뛰 어 넘기 위해, 토속어를 많이 버리고, 오히려 생경한 서구어를 많이 사용, 실험하고 있다.)

· 1958년 <봄 밤의 말씀> 등 [현대문학]지 추천으로 환속(還俗), 문학활동 시작.

· 1969년 연재 중단 후 22년만에 불교경전 <화엄경>을 소설로 집필(1991)

· 1970년대 지식인의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함

· 시집 : [피안감성](1960), [해변의 운문집](1964), [문의 마을에 가서](1974), [새벽길](1978), [조국의 별](1984), [고은 시 전집](1983), [백두산](1987), [만인보]1,2

· 한국문학작가상 제1회 시 부문 수상

 생가(군산시 미룡동 용둔리 138) : 현재 노모가 기거

---  시 <여름 강가에서>, <문의 마을에 가서>, <상구두쇠>, <눈길>, <만인보>

---  어휘 <바다를 소재로~>

 

- 시세계

① 시 세계 : 방대한 시의 분향, 폭넓고 다양한 변모

· <폐결핵> [현대문학](1958) 으로 등단

·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

⇨ 30여년 선승(禪僧)이었던, 투사였던 시인의 정신적 편력과 고뇌의 자취가 나타남

 

② 특성 : 자연이 지닌 변전의 요소와 예리한 감성에 의해 파악되는 순수한 서정성

· 초기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60), [神, 言語, 최후의 마을]

⇨ 인간은 자연과 같은 질서 아래서 삶의 법칙 지배

 

(1) 죽음의 주제 (2) 일상 생활 세계에의 갈망

 <여름 강가에서> --- 󰃫 <강(江)(2)> 󰊵

⇨ 죽음, 안식, 고요의 세계이자 현상세계의 모든 것이 묻혀버리는 최후의 상징. 곧 ‘소멸’의 이미지

 

③ 시 세계의 변천

· 불교적 자의식, 허무주의 󰠏󰠏󰠏󰠏󰋼 역사와 민중

 <조국의 별>, <백두산>, <새벽길>

⇨ 은유(metaphor), 상징보다는 평이한 서술성을 띠는 경향

· 그의 미래는 긍정적임. 그러나 역사발전을 위해 희생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임

하루내내 강원도 산길 걸으며 맘먹었어요

남북통일 안 되면

아무것도 뜻없습니다.

그리운 그리운 우리 민주주의도 뜻없습니다.

--- <山길> 중에서

 

④ 참여의식의 작품 <만인보(萬人譜)>

· 한국적 특성이나 구체적 대상과의 조우(遭遇)

(즉, 민중·역사라는 추상적인 것에의 ‘정열’이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전 이(轉移)됨)

· 단순화되기 쉬운 ‘서정시’ + ‘극적 요소’ 가미

· 화자·청자로 3인칭 유형 (즉 가상세계 속에서 시인 자신을 객관적으로 투영)

· 각 시마다 화자 또는 대상을 달리 취함(다양한 관점 제시)

· 시대·현실을 풍자하는 시인의 목소리(의식)는 ‘객관화된 목소리’로 잔잔한 한의 요소를 찾 으며 독자와의 공감을 유도함

 

군산 묵은 장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 떨이로 남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리길 한밤 중이니

십리 길 더 가야지

빈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 <선제리 아낙네들> 중에서

 

⇨ 민요형식 (유사한 음의 반복)

 

▶ [만인보]에서 시인은 시적 에피소드에 의한 화자의 다양한 인물변용과 감정의 절제 또 는 이입을 보여주며, 전체적으로 연관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1) 구어체 구사, (2) 농촌민속의 배경, (3) 사물 묘사의 보편적 원용

 

▲원로시인 고은씨가 [만인보] 10~12권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냈다.70 년대 각계에서 활동한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씨 등 정치인, 신경림 박목월 선우휘 백낙청씨 등 문인, 함석헌 문익환 백기완씨 등 재야인사들의 활동 과 인간됨을 시편으로 형상화했다. [조선일보] 96년 12월 02일

 

고정희(高靜熙)

 

 고정희 생가·묘(전남 해남군)

 

고조(高祖)

 

- 중국 한나라의 초대 황제 : 성명 유방. 강소성 풍읍의 농민으로 태어나 한때 도둑의 두목이 되었다가 진시황이 죽은 다음 해 군사를 일으켜 항우들과 합세, 기원전 207년 진도 함양을 점 령하고 한(漢)의 왕이 됨. 그후 항우를 멸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제위에 오름 ( 247? - 195 B.C, 재위기간 202 - 195 B.C)

- 중국 당의 초대 황제 : 성명 이 연. 수나라 태원 유수에 임명되었다가 차자(次子) 세민(世 民)의 권고로 거병하여 장안을 점령. 양제의 손자 공제를 옹호하였다가 후에 스스로 즉위하여 당나라를 세움. ( 566 - 635, 재위기간 618 - 626 )

---  < 태조(太祖)>

 

공맹(孔孟) : 공자와 맹자 --- 󰃫  <공자>, <맹자>

 

남(男兒ㅣ) 셰샹의 나, 어려서 공(孔孟)의 글 닑고, 자라 요순(堯舜)  님군을 만나,

--- <구운몽> 중 ‘성진’의 갈등(세속에의 욕망) 부분

 

공자(孔子, B.C. 552-479, 이름 구·丘, 자는 중니·仲尼) : 유교의 할아버지.

 

- 생애

춘추시대 말기에 노나라의 창평향 추읍(지금의 산동성 곡부의 남동)에서 태어났다. 생년을 기원전 551년으로 보는 이도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홀(紇), 자는 숙량(叔梁)이다. 어머니의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노나라의 중신(重臣) 밑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공자는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周) 왕조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의 습득에 힘을 썼다. 수양을 쌓아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에게 중용(重用)되어 탁월한 정치가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서 공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 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으며, 개혁은 성공하는 듯 했으나, 56세때 실각하여 노나라를 떠나야만 했다.

 

그후 14년간 문하생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를 계속하며 이상의 실현을 꾀했으나 65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교육에 전념했다. 이 무렵 50세가 된 아들 이(鯉)와 제자 안회 및 자로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으나 그래도 남은 자공, 증삼 등 제자를 지켜보면서 74세로 사망했다.

 

- [논어]에서 <위정편(爲政篇)>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50에 천명을 알고, 60에 귀가 순하여지고, 70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기지 않았다)

 

- 공자의 교육사상

 

❶ 제자백가와 유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산동성에 위치한 제(齊) 나라의 수도였던 임치(臨淄)라는 도시에 ‘직하’(稷下)라고 불리는 학술기구가 있었다. 직성(稷城)의 아래에 수도의 서쪽 문이 있는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직하’ 혹은 ‘직하문’이라고 불려졌고, 그 곳은 학자들이 모여서 학문을 함께 논하는 곳이어서 일종의 학술기구이기도 하고 후진을 양성하였기 때문에 일종의 학교이기도 한 곳이었다. 이 기구는 기원 전 318년에 제 나라의 선왕(宣王)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곳에 거주하는 학자들은 모두 대부(大夫)의 서열을 받아 임명되고 왕실에서 제공한 높은 대문의 큰 집에서 살면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거기에는 70여명의 대부들과 1천여명의 학사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유래로 말하면, 제 나라가 태공(太公) 때부터 어업과 염전을 개발하고 후에 철의 생산까지 발전시키면서 상공업을 진작시켰고 후에 관중(管仲)은 어업과 염전업에 세금을 부과하여 형성한 재정으로 학술을 장려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위왕(威王), 선왕(宣王), 양왕(襄王) 등 후대의 왕들도 그 뒤를 이어 임치를 학술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맹자(孟子), 추연, 신도(愼到), 윤문(尹文), 순자(荀子), 묵자(墨子) 등을 포함하여 유가, 도가, 명가, 법가, 음양가 등의 학자들이 직하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저작을 통하여 통치술을 논하였고, 평시의 국정을 토론하였으며,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분위기가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3 세기 초에 이르러 혼왕은 무력을 숭상한 데다가 학자들의 충고를 거역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여 학자들은 점차로 직하를 떠나버렸다.

 

물론, 당시의 직하에서 고대의 학문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기원전 500년 경에 이미 고도의 학술적 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직하의 규모와 학풍과 역할을 미루어 볼 때 고대 중국의 학술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다양한 노선의 사상가들이 형성한 학풍, 그것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앞서서, 그리고 그것에 못지 않는 수준의 다양한 사상적 체계가 발달해 있었다.

 

중국사의 최근 연구는 고대 중국에서의 학술의 발달은 주(周)나라의 봉건제도가 붕괴되면서 시작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봉건제도의 붕괴는 어느 시기부터인가를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기원전 7세기 경부터 3세기까지를 사회적, 정치적 변동기로 보며 이 시기에 봉건제도가 붕괴되어 가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봉건시대에는 왕실의 관 리들이 학문분야의 대표들이었으나, 봉건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관리 혹은 귀족이 사방으로 흩어져 개인적 노력으로 사상을 전하는 직업적 교사가 됨으로써 여러 다양한 학파들이 형성되었다. 이 학파들을 통칭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일컫고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고대 중국의 학문적 개화가 시작하였고, 제자백가의 시대는 기원전 500 -250 년 사이에 절정기를 이루었다. 학파들 가운데 중국사상의 양대 조류가 되는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그 대표적인 것이지만 기원전 5-3세기까지만 해도 수많은 학파 중의 둘에 지니지 않는다. 물론 제자백가의 분류는 사마담(司馬談), 유흠(劉歆) 등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시도된 것이다.

 

사마담은 사가(史家)들 가운데 제자백가를 6가로 분류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기원전 2세기 후반의 사가이다. 그가 분류하여 명명한 6가에는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 등이 포함된다. 다른 한편 유흠(기원전 46 - 기원후 23)은 제자백가를 사마담의 6가에다, 종횡가, 잡가, 농가, 소설가를 더하여 10가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그 중 소설가는 별로 주목할 만큼의 무게를 두지 않았다. 물론 유흠이 제자백가의 배경과 특징을 분석한 것에는 수정되어야 부분들이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1) 유가(儒家)는 대체적으로 주 나라의 교육을 맡는 관직인 사도(司徒)의 출신이었다. 그들은 음양의 도에 순응하면서 군주를 도와 교화를 밝히는 것을 직책으로 삼았다. 이 학파는 어느 다른 학파보다 그 지위를 확실히 하였고, 6경을 즐겨 연구했으며, 인의 도덕에 뜻을 두었고, 요순(堯舜)의 시대를 동경하였으며, 공자(孔子)를 최고의 스승으로 삼아 학술을 닦았다.

 

(2) 도가(道家)는 대체로 사관(史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성패, 존망, 화복 등 고금의 도를 빠짐없이 널리 기록하였으며 그 요점을 파악하여 근본을 알고자 하였다. 군주의 통치방법으로 청허한 마음, 그리고 욕심을 멀리하고 자신을 낮추며 유연한 태도를 가질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도가는 본래 양주(楊朱)의 사상에서 그 근원을 가진 것이나 주로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흠은 주로 노자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장자의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3) 음양가(陰陽家)는 천지와 사계절의 변화에 대응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리였던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하늘을 삼가 존중하고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을 추산하여 천문을 보고 백성들에게 농사철을 일어 주었다.

(4) 법가(法家)는 옥사(獄事)를 심리하던 이관(理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상벌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예절의 제도적 관습을 보충하였다.

 

(5) 명가(名家)는 예절을 관장하던 예관(禮官)의 출신들이었다. 옛날에는 명칭과 지위가 다르면 그에 따라서 예의와 범절도 달랐다. 공자는 사물의 질서와 행동의 도리를 바로 나타내어야(이름을 바로 붙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 도리를 바로 나타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로울 수가 없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어떤 일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6) 묵가(墨家)는 종묘의 관리인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검약을 귀하게 여겼으며 겸애를 주장하였고 현인을 존경하였으며 묘제(廟祭)를 엄숙히 지내고 효도하는 생활을 천하에 보여 주었다.

 

(7) 종횡가(縱橫家)는 나라의 외교를 맡은 관직인 행인(行人)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일을 처리할 때 실제에 비추어 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국가의 명령을 접수하더라도 그것을 실제의 상황을 보고 처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8) 잡가(雜家)는 간쟁하는 벼슬을 뜻하는 의관(議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유가, 묵가, 명가, 법가의 학설을 한데 통합시켰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제가의 주장과 관행을 모두 구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러 다른 주장에 대하여 관용성을 보였다.

 

(9) 농가(農家)는 농업을 관장하던 벼슬인 농직(農稷)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곡식의 씨를 뿌리고 밭갈며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10) 소설가(小說家)는 거리의 풍속을 기록하는 패관(稗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거리에서 들은 것, 길에서 말한 것 등을 채집하여 이야기로 엮고 그것을 백성의 의견으로 수용하였다.

 

주 나라 말엽의 여러 학파를 일컬어 ‘제자백가’라고 하지만 유학(儒學)이 학술상의 정통이며 또한 주류였다. 제자백가는 모두 그 지류 혹은 아류이며 마치 해가 가운데 자리잡고 뭇 별들이 그 주위를 둘러 싼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유’(儒)라는 글자는 본래 ‘학자’ 혹은 ‘문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유에 속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옛 경전에 밝은 교사들이었고, 고대적 문화유산의 상속자들이었다. 공자는 이러한 사람들의 지도자였으므로 그의 사상을 따른 학자들이 ‘유가’(儒家)라고 부른 것이다. 춘추시대의 말엽까지만 하더라도 유가는 다만 직업상의 한 계급일 뿐이지 학파로서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었다.

 

유가가 학파로서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전국시대의 초엽이었다. [공자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춘추」(春秋)의 연대기에 포함된 부분을 ‘춘추시대’라고 부르나, 그것은 기원전 481년으로 끝난다. 보통은 그보다 훨씬 후인 기원전 5세기의 종말까지 춘추시대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어 기원전 403년 당시의 강국인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의 3국으로 분리된 시기부터의 역사를 기록하였고, 그 이후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공자가 죽은 후에 그 제자들 중에 어떤 이는 스승의 도를 이어 받아 사숙(私塾)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 어떤 이는 연줄을 찾아 당시 전국시대의 어느 왕가의 조정에서 벼슬을 얻어 관료가되거나 교육에 종사하거나 했다. 그들은 공자의 도를 전하면서 유학의 기초를 형성하고 하나의 독특한 학파로서의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가가 하나의 학파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이를 본받아,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새로운 학파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묵작(墨雀)의 사상을 이은 묵가(墨家)와 양주(楊朱)의 사상을 이은 도가(道家)가 그것이다.

 

❷ 군자교육론

공자는 중국에서 공부자(孔夫子)라고 불려져 왔고 서양에서 공자를 일컬어 Confucius라고 하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 온 표현이다. 그의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라고 한다. 그는 기원전 551년에 노(魯) 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었으나 관직에 투신하여 50세 때에는 높은 관직에 등용되었다고 한다. 정치적 모략으로 그 직책에서 물러난 후에 13년 동안 그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국을순방하였으나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치 못하고 노년에 노 나라에 돌아와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사상에서 중심되는 개념은 ‘인’(仁)의 개념이다. 우리는 그 말을 ‘어질 인’이라고 하듯이 ‘어질다’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번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만으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 우리말의 ‘어질다’라는 말은 마음이 너그럽고 인정이 두터우며 덕행이 높은 인격의 특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칼날 같이 분명하고 사물을 보는 눈이 명석하고 지혜로우며 엄격하기만 한 인격의 소유자를 우리는 ‘어진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감싸주고 매사를 따지거나 밝히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것이나 용서해 주는 심성의 소유자도 때때로 ‘어진 사람’으로언급되기도 한다. ‘어질다’는 우리말은 일상적인 용어로서 사용되는 것일 뿐,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체계적으로 밝힐 수 있는 이론적 용어는 아니다. 국어 사전에 그 뜻을 진술하고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학(儒學)에서, 공자가 말한 ‘인’의 개념을 ‘어질다’의 말이 지니는 의미만으로 이해되기는 어렵다. 물론, 공자가 사용한 인의 개념에는 우리 말의 ‘어질다’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또한 그것을 순수한 우리말로 반드시 표현하도록 강요한다면 ‘어질다’의 말 이외에 또 다른 무슨 표현이 있겠는가?

 

 

‘인’이라는 말의 상형적(象形的) 구조로 보아 그것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을 나타내고, 확대해서 해석하면 인류의 공통된 속성이며 인간을 다른 모든 동물로부터 구별짓는 특징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서양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인간의 핵심적 본질로 규정하고 그것이 제기능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다하는 것으로 본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공자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성의 핵심적 본질이라고 하였다. 완전히 그것을 꽃피우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삶의 과업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은 지식과 지혜라는 가치를 획득하는 기관으로 이해하고 그것의 특징을 기능적 능력으로 한정한 데 비하여 공자의 인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기능적 특징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삶을 통하여 실현시켜야 할 원리(혹은 도)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성이 작용한다’는 말은 옳으나 이성을 실현한다는 말은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인이 작용한다’는 말도 가능하고 ‘인(仁)을 실현한다’는 말도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 차이는 다소 암시된다.

 

제자들이 인에 관해서 질문했을 때, 공자는 인의 개념을 정의한다든가, 아니면 한 마디로 인을 밝힌 일이 없다. 어떤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을 언급하면서 거기에 인이 담겨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번지(樊遲)가 인을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평소에 일이 없이 한가로히 있을 때도 공손한 태도를 가지고, 일에 임하였을 때도 경건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충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로 갈지언정 이 세 가지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사마우(司馬牛)가 인을 물었을 때 ‘인자는 말함을 어려워 한다’고 하고 ‘행함이 어렵거늘 어찌 말함이 어렵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그러나 자장(子張)에게는 또 이렇게 대답하였다. ‘다섯 가지를 실행하면 그것이 곧인이다. 공손하고 너그러우며 믿음성있고 민첩하며 은혜를 베푸는 것이 그것이다. 공손하면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며, 너그러우면 인심을 얻게 되고, 믿음성이 있으면 사람들이 무엇이든 맡길 수 있으며, 민첩하면 공을 이루고, 은혜를 베풀면 사람들의 도움을 저절로 받을 수 있다.’(양화 6) 그런가 하면, 중궁(仲弓)에게는 또한 달리 대답하였다. ‘문을 나서면 몸가짐을 바르게 하되 귀한 손님을 맞는 듯이 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시킬 때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고, 자기가 하고 싶지 아니한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그리하면 온 나라 백성의 원한이 없고 온 집안 가족의 원망이 없다.’

 

공자가 이와 같이 인을 달리 가르친 것은 제자마다 인에 이르는 실천의 과제가 다르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실천을 통하여 인을 체득하고, 인을 실천하는 생활에서 가장 초보적인 ‘효’(孝)를 가르쳤다. 효의 실천은 모든 사람들이 인을 체득하여 인격의 완성적 경지에 이르는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였다. 공자가 효도를 가르칠 때도 인을 가르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을 언급하면서 가르쳤다. ‘부친의 생존시는 그 뜻을 다하고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 그 행적을 살펴 3년 동안 부친의 유습을 고치지 않으면 좋은 효자라고 할 수 있다’고 한 것, ‘요즈음은 봉양함을 일러 효도라고 하나 개와 말도 사람이 기르는 데 공경치 아니하면 무엇이 다르겠느냐?’라고 한 것, 그리고 ‘어버이 살아 계시거든 멀리 떠나지 말며 부득이 나다녀야 할 경우는 방향을 정해 두어야 한다’든가가 그러하다.

 

공자는 인을 인간의 핵심적 본질이라고 가르쳤으나 그 개념만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덕’이라든가 ‘의’라든가의 다른 규범적 개념들도 사용하였다. 그것은 인의 실천적 내용이나 요소, 그리고 인을 실천하는 사람의 특성을 밝히는 데 필요한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의 개발은 ‘대인’, 즉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군자는 무엇이 의로운가를 이해하지만 소인은 무엇이 유익한가를 안다’고 하였다.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군자’(君子)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군자’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임금의 아들’이지만 본래 그 말은 보통 당시의 봉건제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공자는 군자라는 말을 도덕이나 학문 혹은 재능을 가진 사람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군자는 ‘가르치는 데 있어서 구별이 없다’(유교무류)고 하여 교육의 평등을 주장한 사람으로 기술되기도 하나 그것은 신분상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뜻으로 이해될 수는 있으나, ‘하나를 가르쳐 열을 깨우치지 못하면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능력적 차등주의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선천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양화 3) 중인 이상은 심오한 학리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중인 이하는 그럴 수 없다(계씨 9)고 하였다. ’저절로 도리를 아는 자는 상급에 속하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며, 곤난을 당한 뒤에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고, 모르면서 배우지 아니하면 우민으로서 그 아래에 속한다.‘(계씨 9) 그러나, 공자가 학리를 익히고 배움을 통하여 안다는 것은 사물의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 원리, 즉 인의 도리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인의 도를 실천하여 성인이 되어야 하지만,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범용한 인간이 수양과 공부를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을 ‘군자’라고 한 것이다. 공자는 ‘성인은 만나 볼 수 없고, 군자라도 만나 볼 수 있으면 좋겠다’(술이 25)고 말하기도 하였다. 군자의 기본적인 자질은 인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는 ‘군자가 인을 버리면 어찌 군자라고 하겠는가?’(이인 5)고 하였다.

 

공자는 군자의 도로서 인을 가르칠 때 비록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을 언급하였지만, 거기에는 회통하는 하나의 원리를 암시한 바가 있다. 그것은 공자가 증자(曾子)와의 대화에서 암시된 것이다. 공자는 ‘삼(參: 증자)아, 나의 도는 하나의 원리로 회통하고 있다’(一以貫之)고 하자, 증자는 ‘예’라고 답하였다. 공자가 나간 후에 제자들이 증자에게 묻자, 증자는 ‘선생님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이인 15)라고 하였다. 충서에 대하여 주자(朱子)는 해석하기를 자기가 바라는 것을 미루어 타인이 바라는 것을 아는 것을 ‘충’이라고 하고, 자기가 원치않은 것을 미루어 타인이 원치않는 것을 아는 것을 ‘서’라고 하였다. 충(忠)은 적극적인 개념으로서 인을 실천할 때 남을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신이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하면 남도 이루어지도록 해 주는 것’(옹야)을 것이 충이다. 이에 비하여 서(恕)는 소극적인 개념으로서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것을 뜻한다.

충서의 적극적인 면을 「중용」(中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자기가 자식들에게 바라는 그 마음으로 어버이를 섬기며, 자기가 신하들에게 바라는그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며, 자기의 아우에게 바라는 그 마음으로 형을 섬기며, 벗들에게 바라는 그 마음으로 먼저 벗들에게 베풀어 주어라. (중용)

 

그리고 충서의 소극적인 면을 후대 유가의 학자들이 ‘혈구(潔矩)의 도’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귀절이 「대학」(大學)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윗사람으로서 싫어하는 것을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시키지 말 것이며 아랫사람으로서좋아하는 것이라고 하여 위사람을 섬길 때 하는 법이 아니다. 그리고 앞사람으로서 싫어하는 바를 앞서 있다고 해서 뒷사람에게 그것을 쓰지 말 것이며 뒷사람으로서 싫어하는 바를 앞사람을 쫓는 위치에 있다고 하여 그것을 쓰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오른쪽 사람으로서 싫어하는 바를 왼쪽 사람에게 주고 받지 말 것이며 왼쪽 사람으로서 싫어하는 바를 오른 쪽 사람에게 주고 받지 않는 법이다. 이것을 혈구의 도라고 한다. ( [대학] 10)

 

공자의 교육목표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실천적’이라는 말은 좁게 이해될 수도 있고 넓게 이해될 수도 있다. 좁게 이해하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교육받은 결과 직접적으로 실제의 생활에 반영되어 어떤 유용성이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개인적으로는 지식을 배워 관직을 얻는다든가 기술을 익혀 직업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회적으로는 국가나 사회가 필요로 하는 관리나 기술자를 양성하여 충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넓게 이해하면 고도로 이념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현실적인 요구와는 무관하게 고답적인 이론이나 사상을 배우고 거기에 전념함으로써 고매한 인격을 갖추어 구체적인 현실에 초연함을 보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삶을 영위하고나 사회적 제도를 운영하는 원리에 관심을 둔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에 이론이나 사상은 그 자체에 가치 혹은 목적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 보다 나은 개인적 혹은 사회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직접적 혹은 간접적 수단이나 방법이 된다는 것으로 수용될 뿐이다. 공자의 교육이 ‘실천적’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의 것이다.

 

공자가 교육의 사회적 목적을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와 같이 기술적으로 유능한 관료를 만드는 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가 목표로 하는 ‘교육받은 인간’의 모습, 즉 군자로서의 인간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은 물론 인을 소유한 인간이지만 더욱 완전하게 표현하면 지혜(知)와 인의(仁)와 용기(勇)의 덕을 균형있게 갖춘 사람이다.(헌문 30)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의 과업, 즉 학문(文)을 닦고 실천(行)을 중시하며 충의(忠)를 다하고 신의(信)를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 (술이 24) 그러나 공자가 그러한 덕목과 과업을 교육적으로 중시한 것은 그것들이 개인으로서 성공적인 정치적 생애를 살 수 있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교육을 받은 군자들이 통치에 종사할 때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학자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양인으로서 정치에 종사할 지도자를 기르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가 일차적으로 가르치고자 한 것은 지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집안에 들면 효도하고(入則孝), 밖에 나가서는 사람들에게 공손의 정의(情誼)를 다하며(出則弟), 근신하여 신의를 지키고, 넓게 여러 사람을 사랑하며, 어진이를 가까이 하라. 그리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은 전적으로 비형식적인 것이었다. 물론, 수업이나 시험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을 상대로 하여 대화하였고 때로는 질문을 하고 생각할 문제를 던져 주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가 가르치는 방법은 대상에 따라서 달랐다.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도 대상에 따라서 다르다. 논*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자로(子路)가 ‘옳은 것을 배웠으면 곧 행하여야 합니까?’고 물은 즉, 공자는 ‘부모와 형제가 계신데 왜 여쭈어 보지 않고 행할 것인가?’라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염유(苒有)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공자는 ‘들은 대로 어서 행하라’고 하였다. 그것은 염유가 무엇을 행하고자 할 때 언제나 주저함이 있고 자로는 오히려 행함에 지나침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공자는 잘못에 벌하거나 무엇을 강제하기보다는 옳게 행동하도록 자극하고 권유하는 방법으로 가르쳤다.

 

❸ 정명사상과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논리

공자가 증자에게 자신의 도에는 하나로써 꿰뚫는 원리(一以貫之)가 있다고 암시한 바 있으며(논어 4), 그 하나의 원리가 중요함을 말하기 위하여 자공(子貢)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내가 많은 것을 배워서 많을 것을 기억하여 모든 도리를 안다고 생각하느냐?’ 자공은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의 도리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고 하였다.(논어 15) 공자가 이와 같이 하나로 회통하는 원리가 있다고 할 때, 거기에는 자신의 우주관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즉, 천지의 만물은 천차만별의 복잡성을 띠고 있지만 그 가운데 전체를 하나의 조리바른 계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이관지에 대하여 하안(何晏)은 이렇게 주석하였다. 즉 ‘만가지 선에는 그 근원되는 것이 있고만사는 모이는 데가 있다. 천하에 각가지 길이 있지만 돌아가는 데는 결국 같다.’

 

증자가 공자의 일이관지를 충서로 이해한다고 언급한 이래 충서의 개념은 유가의 인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충서의 개념을 도덕론적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냐, 아니면 인식론적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냐를 두고 다른 의견이 있어 왔다. 도덕론적으로 이해하면 충서는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자기를 타인에게 미치게 하는 것’[盡己之心推己及人]이나, 인식론적으로 이해하면 그것보다 넓은 의미가 된다.

 

❹ 예(禮)와 악(樂)과 시(詩)의 교육

공자의 시대에 교과목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면 육예(六藝)를 들 수가 있다. 서(書), 수(數), 어(御), 사(射), 예(禮), 악(樂) 등이 그것이다. 공자도 군자는 모름지기 도에 뜻을 두고 덕을 지키며 육예(六藝)를 체득해야 한다고 하였다.(술이 6) 글씨쓰고(書) 수리공부(數)를 하는 것은 당시의 귀족의 자녀들이 배워야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초보적인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활쏘기(射)와 말타기(御)는 제외하였다. 본래 이 두 가지는 전쟁시에 필요한 것이었기는 하지만 단순히 그런 목적으로만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오늘의 체육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예의와 절도를 배운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공자 자신도 활쏘기를 언급하면서 예의를 말한 바 있고(팔일 7) 제자들도 말타기를 했다. 공자가 그 두 가지를 배격했다기보다는 단지 자신이 제자를 교육할 때의 실질적 내용으로 삼지는 않았을 뿐이다. 대신에 공자는 시의 교육적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이러한 관심의 상대적 전환은 종래의 세습적 혹은 군사적 귀족주의의 사고에서 문사적 혹은 도덕적 귀족주의의 사고로의 전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예(禮)와 악(樂)과 시(詩)는 다소 심오한 것으로 고급 수준에서 가르쳐졌다. 이 교과들은 절제와 조화의 도야를 가능하게 하고 인간의 성정(性情)을 균형있게 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서 공자가 교육에서 가장 중시한 부분이다.

 

‘예(禮)’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겠는가를 물으면, 우리는 ‘예의’ 혹은 ‘예절’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공자 시대에 사용된 ‘예’라는 말의 의미는 매우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 넓다는 뜻은 예가 종교적 의식과 사회적 관습의 일체, 그리고 도덕적 규범을 총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며, 좁다는 뜻은 인간의 행실과 태도 등에 적용되는 행동적 규범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예’(禮)라는 글자의 상형적 구조는 제사(祭祀)의 기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며, 그 본래의 의미는 종교적 의식과 절차인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후에 그 의미는 점차로 확대되었다. 예컨대, 여섯 가지의 의례(儀禮), 즉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 향례(鄕禮), 상견례(相見禮) 등의 관습에서 ‘예’라는 말이 쓰인다. 본래 고대 중국에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를 비롯하여 의식이 반드시 성직자에 의해서 집행되지 않았고 가정의 가장도 의식을 주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의식과 세속적 의식은 확연히 구분되지 않았다. 예의 의미가 반드시 종교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예는 점차로 사회 일반의 관습과 풍속으로 지켜지는 의식이나 절차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런데, 예의 넓은 의미는 그것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도덕적 규범의 모두를 포괄한다.

 

공자의 예는 법률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두 가지의 기율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예는 미연(未然)에 금하는 것이며 법은 기연(旣然)에 금하는 것이다.’(大戴禮記 경해편) 도리에 합치고 행위의 표준이 되고 도덕적 습관을 양성하고 사회의 치안을 증진시킬 수 있는 규범의 모두가 예에 속한다. (호적 151) 공자의 예는 인이 실천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기를 극복하여 예를 행함이 곧 예이다. 단 하루라도 자기를 이겨 예를 행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 올 것이므로 인은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 남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안연1) 인이란 마음의 자세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하고, 그것이 실천된다는 것은 세련된 품행을 통하여 나타내어지는 예의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은 인격의 내면적 바탕이요 근원이라면 예는 그것이 밖으로 나타내어진 모습이며 군자의 품위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공자의 예는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 균형을 이룬 교양인의 세련된 품행을 뜻하기도 한다. 그는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기만 하고, 신중하되 예가 없으면 두렵기만 하며, 용감하되 예가 없으면 난폭하기만 하고, 솔직하되 예가 없으면 경직되기만 할 뿐이다.’ (태백 2)

 

그러나 공자의 예는 외양적 갖춤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지키면서 공경스럽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팔일 26) 본래 당시의 귀족들이 지켜야 하는 행동의 형식적 규범이 얼마나 엄격하였던가는 우리가 「예기(禮記)」에 쓰인 행실의 도리들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그 한 가지만을 보면 이런 것이 있다.

 

무릇 손님을 인도해 들어가는 이는 문마다에서 손님에게 먼저 드시라고 하면서 사양한다. 손님이 침실의 문에 이르면 주인이 손님에게 말하고 들어가 자리를 편 뒤에 나와서 손님을 맞아들인다. 손님이 주인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굳이 사양한다면 주인이 앞에서 손님을 인도하여 들어간다.

 

주인은 문안에 들어가서 오른 쪽으로 가고, 손님은 문안에 들어가서 왼쪽으로 간다. 주인은 동쪽 계단으로, 손님은 서쪽 계단으로 향한다. 손님이 만약 주인보다 지위가 낮으면 주인이 오르내리는 계단의 동쪽을 향하여 간다. 주인이 굳이 사양하면 손님이 다시 서쪽 계단으로 간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 먼저 올라가기를 사양하다가 주인이 먼저 올라가면 손님이 뒤따라 올라가는 데 한 계단마다 두 발을 모아가면서 걸음을 이어 올라간다. 동쪽 계단으로 올라갈 때에는 오른쪽 발을 먼저 내고 서쪽 계단으로 올라갈 때에는 왼쪽 발을 먼저 낸다.

 

장막과 주렴 밖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며, 마루 위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며, 옥(玉)을 잡고는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며, 마루 위에서는 발자취를 서로 붙이고, 마루 아래서는 서로 떨어지게 걷는다. 방 안에서는 팔을 벌리고 빨리 걷지 않는다.

 

남과 나란히 앉을 때에는 팔을 옆으로 벌리지 않으며, 서 있는 이에게 무엇을 줄 때에는 꿇어 앉으며, 앉은 이에게 줄 때에는 서서 주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세련된 행동은 마음 속의 인을 예의 형식으로 나타내는 방식이다. 공자에게서 인과 예는 군자의 양면적 자질이다. 그러나 형식적 규범의 세련성은 겉보기에만 좋을 뿐 실제로 마음은 공허한 것일 수가 있다. 유교의 관습은 후일에 그러한 특징을 보이기도 하였다.

 

공자의 예는 세련된 균형과 절도를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균형과 절도는 성정의 개념이 요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자가 음악의 교육적 중요성을 든 이유가 있다. 음악이 여러 가지의 의식에서 연주된다는 것은 예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이 균형과 절도와 조화의 질서를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의 음악은 예악으로서 예(의식)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음악을 직접 가르쳤다는 기록은 없으나, 남과 함께 노래 부를 때 그가 잘하면 반드시 다시 시킨 후에 이와 함께 불렀고,(술이 31) 예악은 도덕적 정서를 함양하고 군자가 배워야 할 중요한 것으로 언급한 것은 여러 군데 있다. 공자가 노(魯) 나라의 악관에게 한 말이 있다. ‘음악은 저절로 모든 것을 알아서 한다. 연주를 시작하면 음률은 모여서 화음을 이루고, 음률은 각기 맑고 밝게 이어지며, 점차 가경에 이르러 완성된다.’(팔일 23) 당시에 여러 가지의 악기로써 연주되는 음악이 있었던 것 같다.

 

공자는 음악이 예와 도덕에 관련이 있음을 말하였다. ‘무릇 음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며, 악은 윤리에 통한다. 음을 상세히 살피면 악을 알게 되고 악을 잘 살피면 정치를 알게 된다.’ 표문태(表文台)는 이 귀절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음은 마음의 표현이고 리듬이다. 악은 인간의 도의심과 통한다. 인생의 도가 여기에 표시되어 있으므로 악을 잘 터득하면 정치의 이치를 알게 된다. 그것은 정치도 천리(天理), 즉 인간의 보편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시(詩)는 육예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공자는 그 교육적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공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시는 감흥을 일으키며, 세상을 관조할 수 있게 하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하며, 그릇됨을 원망할 줄 알게 하고, 가까히는 어버이 섬김을 가르치고, 나아가서는 임금 섬기는 바탕이 되며,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하기도 한다.’(양화 9) 그는 ‘시로써 일어나서 예로써 서며 악으로써 완성한다’(태백 8)고 하였다. 이 말은 시에 의해서 정서를 북돋우고 예에 의해서 품위를 세우며 악을 통하여 군자의 에서 도덕을 완성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시와 예의 관계는 인의 도리에 따른 정조를 일으켜 예로 표현되게 하는 데 있어서 시가 정서를 순화하고 성정을 가다듬고, 희노애락의 감정이 중(中)을 유지하면서 화(和)를 이루는 것, 즉 중용의 덕을 성취하는 마음을 형성시킨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음악과 예의 관계는 예가 그 의미와 질서를 따라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실천된 극치의 상황에 있게 한다.

 

시는 고대의 문학이며 문학은 오직 시 뿐이었다. 공자는 시가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한다고 믿었다. 그는 시경 3백편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에 간사한 생각을 없게 한다’는 것이라고 하였다.(위정 2) 그리고 시경의 ‘관저’(關雎)에 실린 시는 즐겁되 결코 음탕함에 흐르지 않으며, 슬프되 감상(感傷)에 흐르지 않는다고 하였다.(팔일 20) 이렇듯 시는 인간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인의 정조가 순수하게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정서를 제공해 준다.

 

공지영(孔枝泳)

 

- ‘문화계 올 화제의 인물’ - 소설가 공지영씨

저무는 갑술년, 작가 孔枝泳씨가 걸어온 올 한해의 길은 넓고도 환한 것이었다. 등단후 7년만에 펴낸 창작집 [인간에 대한 예의](11만부)와 새 장편 [고등어](21만부)가 지난해부터 베스트셀러 자리를 고수해온 장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36만부)와 함께 독자들로부터 동시에 큰 호응을 얻게된 것.

 

이 작품들의 호조에 힘입어 89년 출간됐던 첫 장편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도 독서계에 재등장, 9월이후 2만부가 나갔다. 2년 연속 큰 호응을 받고 있는 [무소의 뿔…]은 우리 여성 문학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계열 선배 작가인 박완서 이경자씨는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절반의 실패]등의 작품을 통해 주로 기성세대 중년여성들이 당하는 남성 폭력과 외도에 따른 갈등 등에 주안점을 두어왔다. 그러나 [무소의 뿔…]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새로운 세대 여성들의 강렬한 자기 주장을 담고 있다.

 

“우리 세대의 관심은 여성들의 사회적 자아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구조 마련에 있습니다. 더 이상 육아와 가사 능력이 여성 평가의 절대 기준이 되는 것을 방관않겠다는 것이지요. 다음번에 여성소설을 쓴다면 이같은 사회구조는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孔씨의 또다른 작품인 [고등어]와 […아름다운 방황…]은 “민중적 삶의 실현을 위해 고뇌했던 80년대 우리 청년들을 대변해 보겠다.”는 작가의 오랜 소망이 담겨진 것이다. 이 작품들은 80년대 세대의 자기연민에 치우친 점이 엿보이는 반면, 당시 우리 청년들의 사회변혁 열망과 순수성을 윤기 있게 드러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녀가 이제 새롭게 겨냥하고 있는 것은 번성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당하는 당대 인간군상의 실체를 그려보는 것.

 

“따뜻하고 선량한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낙오되는 사람들을 보곤 합니다. ‘좋은 인간’이긴 하지만 ‘팔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 사회에 보편화된 이런 모순이야말로 작가들이 전면 대응해야 할 주제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녀는 “고전들의 행간에는 범작이 놓치고 있는 삶의 아이러니가 배어있다”며 “이러한 것들을 일상 속에서 잡아내는 깊은 눈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곽거(郭巨) : --- 󰃫 어휘 <곽거의 고사>, <손순매아>

 

 괴짜 문인(文人)들 : --- 󰃫 어휘 <괴딴지>

 

- <문학> 方外. 괴짜 문인들

 

① 오상순(吳相淳․1893~1963)

오상순은 시대와의 불화가 빚어낸 대자유인이었다. 목재상 아들로 태어나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을 나와 전도사 활동을 하던 그는 1920년 김억․남궁벽․황석우․변영로등과 함께 [폐허]동인으로 참가, 창간호에 <시대고와 희생>이란 평론을 발표하면서 식민 치하의 허무주의자로 돌아선다. 불교에 귀의, 허무의 극한에서 공(空)을 깨치고 속세로 돌아와 동 가식서가숙하며 70평생을 문학도들에게 시의 순수를 자신의 삶 자체로 깨우쳐주다 갔다. 기독교도, 불교의 공사상도 초월해 「공초(空超)」라 한 오상순은 하루 2백개비씩 줄담배를 피운「꽁초」로도 유명하다. 오상순같이 세상과의 불화를 견뎌낼 수 없는 타고난 순정한 기질로 세 상 어디에도 편입하지 못하고 오직 자유혼으로 문학을 일군 방외(方外) 문인들. 이들의 맥은 우리 문학사에 깊은 골을 이루고 있다.

 

② 김시습(金時習․1435~1493)

멀리 조선조로 올라가면 중의 신분으로 문득 성안에 거지차림으로 나타나 지나가던 고관들에게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았던 김시습이 방외문인의 한 전범으로 꼽힌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것을 보고 세상에 등을 돌려 왕까지도 안중에 안두고 사대부 출신이면서 유교도, 또 중이면서 불교도 훌쩍 뛰어넘은 그의 자유혼이 웅혼한 시와 [금오신화]를 낳게 했다.

 

③ 김병연(김삿갓, 金炳淵․1807~1863)

풍자시의 진면목을 보인 김병연의 기행(奇行)은 가위 전설적이다. 철종시대의 방랑시인 김삿갓이 바로 그다. 할아버지가 홍경래난에 투항한 사실을 부끄러이 여기며 구름을 이불삼고 시 한 수로 밥을 빌며 전국을 떠돌다 첩첩산중 강원도 영월에 묻힌 그도 우리 문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괴짜, 아웃사이더 문인이다.

 

④ 한용운(韓龍雲․1879~1944)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연인과의 이별을 절절하면서도 단아하게 읊은 듯한 [님의 침묵]의 시인 한용운은 근대문학사의 최초의 방외문인으로 볼 수 있다. 만삭의 아내를 저버리면서까지 출가(出家), 속세와 인연을 끊은 그는 어디에도 구속되거나 굴하지 않은 숱한 기행을 남기고 있다. 변절한 최남선이 아는체 하자 ‘당신을 장례치른지 오래다’며 죽은 사람 취급했던 일이나 언 방에서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세상의 도움을 거절했던 그다.

 

⑤ 이상(李箱, 본성명 김해경․1910~1937)

문단의 봉우리에 올랐으면서도 일체의 문단 출입도 없었다. 박제(剝製)된 천재 이상)은 대책 없는 자유혼으로 그의 문학을 한국 문학사에 문학의 영원한 「원형」, 속인이 쉽게 풀 수 없는 비의(秘意)로 각인시켜 놓았다. 건축기사 출신 이상(김해경·金海卿)은 인부가 잘못 부른 「이-상(李氏·이씨)」을 그대로 필명으로 쓰며 문단에 들어왔다. 기생 금홍과 기괴하고 방만한 풍문을 뿌리며 27세로 요절한 이 상. 청춘의 무한한 실험과 가능성 그 자체로의 요절이 오늘도 그의 문학을 푸르게 흘러들게하고 있다.

 

⑤ 김관식(金冠植․1934~1970)

 

“좌충우돌의 미학은 / 너로 말미암아 비롯하고, / 드디어 끝난다.

/ 구슬도 먼지도 못되는 / 점잖은 친구들아, / 이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니

/ 되려 기뻐해다오. / 김관식의 가을바람 이는 이 입관을”

 

천상병(千祥炳) 시인의 시 <김관식의 입관(入棺)> 일부분이다.

 

55년 서정주(徐廷柱)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김관식은 타계할 때까지 거칠 것없는 행동으로 문단에 숱한 화제를 뿌렸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리며 시 1천수를 줄줄 외웠던 김관식은 한학에도 밝아 시의 세계가 깊고 그윽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문단에서 그의 행태는 광기를 띨만큼 호탕해 「미친 아이」로 불리기도 했다. 문단 대선배도「군(君)」자를 붙여 제자 다루듯 했으며 시 세계에 가식이 섞였거나 조금만 삐뚤어져 있으면 독설(毒舌)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김관식이 4․1 9로 열린 민주국가에 기여하겠다며 서울종로 국회의 원후보로 나서 당시 거물급 정치인 장면(張勉)과 맞붙은 일화는 유명하다. 또 홍은동 산동네에다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 멋대로 팔고 가난한 시인들에게는 거져 주기도 했다. 세상 거칠 것없이 몸으로 「좌충우돌의 시학」을 가르치다 죽었으니 시도 아닌 시로 점잔을 빼던 시인들이 기뻐했을 법도 하다.

 

⑥ 한하운(韓何雲․1920~1975)

김관식과는 정반대편에서 천형의 나병에 걸려 전국을 떠돌면서도 「보리피리」같은 아름다운 서정시를 남긴 한하운도 빼놓을 수 없는 방외문인이다.

 

“맑은 생시의 / 속 깊은 슬픔은 / 어떻게 무엇으로 / 어떻게 달래나

/ 나는 취했다 / 명동에서 취했다 / 종로에서 취했다 / 나는 / 나는

/ 이런 것이 아니다」( <아니다의 주정>중에서).

 

⑦ 신동문(辛東門․1928~1993)

56년에 등단, 65년 절필할 때까지 참여시인으로 필명을 날렸던 신동문도 시인의 결벽성으로 시대와의 불화를 이겨낸 시인이다. 5․16군사정권에 맞서는 자신의 시도, 자기 자신도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다」며 신동문은 세상을 등져버리고 충북 단양의 초야에 묻혀버렸다. 거기서 그는 침술로 주민의 병을 치료,「단양의 신(辛)바이처」로 인술을 떨치다 자신의 암은 치유치 못하고 세상을 영원히 등졌다.

 

⑧ 박용래(朴龍來․1925~1980)

「오오냐, 오오냐 적당히 살거라 시인들아!」라며 세상을 온통 긍정하면서도 눈물로 시적 에스프리를 캐냈던 박용래는 천성적 순수로 현실에는 도저히 편입될 수 없는 시인이었다. 강경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갔으나 돈 세는 것에 염증나 그만둬버린 박용래는 돈․사회와는 영영 등을 돌리고 술로만 살았다. 술을 마시면서도 울고, 별을 보고도 울고, 봄 햇살에 날리는 장닭 꼬리를 보고도 울고, 울면서 또울던 박용래는 삼라만상에서 한 (恨)의 원형을 끌어올린 극순수의 서정시인이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 거기 조그만 주막집. /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 만 / 순하기 순하기 마련인가,」(<주막에서>중).

 

⑨ 천상병(千祥炳, 1930~1993)

천상병 시인도 대책 없는 순수로 이 세상을 가난하게만 살다간 천상의 시인이다. 서울대 상대를 나와 보장된 그 좋은 직장도 다 마다하고 천상병은 술로써만 시를 지키다 갔다. 그는 무직․방랑․구걸․주벽으로 우리시대 마지막으로 숱한 화제 를 뿌리다 쓰러져가는 철거민촌 오두막에서 외로이 숨져갔다. 그러한 삶도 좋았노라고, 마치 소풍놀이 같았다며 하늘로 돌아갔다. 그가 죽자 문학평론가 김재홍(金載弘)씨는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곤궁한 삶의 극한 속에서도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여 인생의 의미를 깊이있게 일깨워준 참자유인, 진짜 시인의 타계로 이제 이 땅에서 시인의 신화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

 

「참자유인」은 천상병만이 아니라 「진짜 괴짜문인」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한 아웃사이더 문인들을 우리가 기리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인생의 깊은 의미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또 바로 이것이 문학의 핵심 아닌가. 시절이 수상해지면 방외자로서 숨어 있는 문인들이 우리의 시야에 다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참자유가 무엇인가를 깨우칠 것이다.

 

구상(具常, 1919- )

 

· 함경남도 원산 생

· 1946년 시집 [응향(凝香)] 사건으로 북조선 문학예술 총동맹으로부터 반동시인으로 낙인, 월 남함.

· 6.25때 종군(從軍) 시인으로 활동.

· 한때 사제가 되기 위해 수도 원산학교에 들어갔다가 환속(還俗)함

· 시적 경향 : 카톨릭의 종교의식 바탕, 인간존대와 우주의 의미를 탐구하는 구도적(求道的) 경 향이 짙다.

· 시집 : [초토의 시](1956)

---  시 <초토(焦土)의 시>,  <필화문인>

 

- [응향]필화사건

1. 1947년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 상임위원회에 의해 전면적 규탄받음

2. 동인 작품

· 강홍운 <파편집18수>,

· 구상 <길>, <여명도>, <밤>

· 서창훈 <해방의 산상에서>, <늦은 봄>

· 이종민 <3.1폭동>

 

- 구상에 대한 평가

‘참여의식’ --- 한국 시단에 중대한 도전임

Ⓐ 자연 서정파의 리리시즘(lyricism, 서정주의)

Ⓑ 해외문학파류의 모더니즘(modernism)과 쉬르-레알리즘 및 르네상스적 인본주의

Ⓒ 미당(서정주), 청마(유치환)의 ‘생명의식’을 극복, 거부.

 

· 구지(求之) : 기생(妓生)인 구지의 적극적인 사랑을 표현한 시조

--- 󰃫 시조 <장송(長松)으로 를 무어 대동강에 워 두고>

 

굴원(屈原, B.C 340-278)

 

· 초(楚)나라 사람. 왕족 출신인 굴원은 뛰어난 재능으로 20대에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사람에 의해 모함을 받고 추방을 당함.

· 그 후 초나라는 진나라에 패하고 굴원은 돌아갔으나 다시 쫓겨난다(49세).

· 굴원은 상강 기슭으로 오르 내리며 정치적 향수와 좌절 속에 유랑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 을 품은 채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62세의 생을 마감. 중국 최고의 비극적 시인으로 평가 한다.

· 작품 : <이소(離騷)>, <천문(天問)>, <어부사> 등

--- 고전 <어부사(漁父辭)>

 

균여(均如, 923-973, 속성은 변(邊)씨)

 

· 고려 광종 때 승려

· 15세 출가, 식현화상에게서 수학. 학덕이 높아 광종의 경중을 받고 항상 법(法)을 넓히고 사 람을 이롭게 함에 힘씀

 

- 균여의 탄생 이야기

· 신라 경순왕 7년 황주(황해도)에서 변(邊)씨 집안에서 출생

· 너무 추하게 생겼기에 집안에서는 괴물이라 하여 붉은 포대기에 싸서 성안으로 가는 들판에 버림.

· 여러 마리의 새가 날아와서 보호해 줌.

· 이에 그 아이는 부모 품에 돌아와 길러짐.

· 남달리 어렸을 때부터 총명.

 

- 보현시원가(普賢十願歌) = 일명, 보현십종원왕가.(10구체)

· 불교의 화엄사상에 입각하여 자신이 먼저 수행득도하고 난 뒤, 고해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제 도하여 불국토를 건설해 보겠다는 내용.

·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포함한 11수가 [균여전]에 전함.

 

▲ 예경제불가 (김완진 교수 현대역)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님 앞에

절하는 이내 몸은

법계(法界) 끝나도록

이르거라(할지어다)

티끌마다 부첫 절이며

절마다 뫼셔 놓은

법계 차신 부처님에게

구세(九世) 내내 다할 때까지

예경하고 싶어라

--- 󰃫 책 <균여전(均如傳)> 서문

 

극결

 

· 진(晉)의 대부.

· 그는 들에서 김을 매고, 아내는 들에 점심을 나르며, 서로 손님처럼 공경했다 함.

⇨ 현처(賢妻) 혹은 양처(良妻)의 상징 : 맹광과 극결의 아내.

 

▲ 김(짐승)은 미물이나 입으로 밥을 물어 식을 먹여 쥬며, 치우면 날 버려 주식을 덥난 거슬, 나난 엇지 람으로 슈다(數多) 자식더를 굼기고 벗기난고? 극결의 안갓치 밧치나 여 볼가? 양홍의 안갓치 물이나 길어볼가> 직녀성의 걸교(乞巧)여 침(針刺) 품을 파라볼가?

--- <박타령>에서 흥보가 놀보에게 매를 맞고 돌아온 후 흥보 아내가 신세 한탄 후 제 힘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생각.

--- 어휘 <거안제미(擧案齊眉)>

 

급장유(汲長孺)

 

· 한무제 때 직간신(直諫臣,임금에게 충직하게 조언하던 신하)으로 무제가 회양이라는 곳의 태 수로 좌천시켰으나, 정치를 오히려 잘하여 칭찬을 들었다 한다.

 

▲ 淮회陽양 녜 일홈이 마초아 시고

汲급長댱孺유 風풍彩를 고텨 아니 볼게이고.

--- 정철 <관동별곡> 제14, 15행

 

김경린(金璟麟, 1918- )

 

· 시인, 함북 종성 생

· 일본 와세다 대학 (토목공학과 졸)

· 일본의 시잡지 [Vou]의 동인으로 시쓰기 시작, 모더니즘 운동에 참여

· 귀국 후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계열 시 씀

· 재래시의 감상성을 지양, 현대문명과 도시 생활 속에서 과학 무기의 횡포와 그 에너지를 노래

 

 김관식(金冠植, 1924-1970)

 

· 시인. 충남 논산생

· 문인 중에서 한학(漢學)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시적 경향은 ‘노장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 1960년대 국회의원 출마, 결국 패가망신하여 폭음, 주벽으로 많은 일화를 남김

· 시인 박용래와 강경상고 동문

· 시집 [김관식 시선집], [낙화집], [해 넘어 가기 전의 기도](공저)

 유적지

 

1) 김관식시비(대전 보문산 사정 공원 ‘박용래 시비’ 인근 소재)

* 대표작 <다시 광야에> 새김

2) 김관식시비(모교인 강경상고)

* 대표작 <이 가을에> 새김

2) 생가터·시인김관식지묘(논산군 연무읍 소룡리)

--- 어휘 <그리움의 목소리>

--- <괴짜 문인들>, <박용래>

 

김광균(金光均, 1914-1993)

 

· 개성공립상고 졸

· 1937년 [자오선]을 이육사, 윤곤강 등과 발간.

· 한 때 [시인부락] 동인. 감각적인 언어 구사, 회화성을 살린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 한 사람.

· <외인촌>(조선중앙일보 1935.8.6), <추일서정>(인문평론, 1940)

· 50년대부터 기업경영에 전념하면서 한국경제인 연합회 이사, 한국무역협회 이사 역임

· 80년대 후반부터 중풍을 앓았지만, 틈틈이 신작시를 발표, 죽음에 대한 성찰을 보여 주었다.

· 1990년 제2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  어휘 <이별>(김광균 시<은수저>전문 게재),

---  < 김현승>(김현승, 장만영-즉물주의의 자연과 비교)

---  시 <외인촌>, <언덕>, <와사등>, <추일서정>, <데생>

 

- 타계한 시인 김광균

 

눈 내리는 밤의 말없는 풍경조차도 청각적 이미지로 포착했던 시인 김광균씨가 첫눈 내린 뒷날 먼곳으로 갔다. 80년대 후반 들어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도시시>라는 것을 들고 나왔지만, 그 원조를 거슬러가면 30년대의 시집 [와사등]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홀로 어데로 가라는 슬픈 信號냐.

 

황혼이 내린 거리를 거닐며 시작되는 이 시 <와사등>은 38년 6월 3일자부터 [조선일보]에 실렸다. 1926년부터 시작 활동을 펼친 시인은 <와사등> 등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새롭게 대두된 도시문명을 시적 이미지로 포착하면서 모더니즘시의 시대를 개척했다.

 

김 시인은 정지용, 김기림 등과 함께 정서를 운율로 표현하던 전통 서정시를 벗어나 관념을 구체적 이미지로 그려내는 시의 세계를 열어보였다.

 

시집 [와사등]을 보면 ‘시계, 기적, 람프, 샴펜, 코트, 리봉, 외인묘지, 차창’ 등 그 이전의 한국시가문학이 의존했던 자연공간에서 볼 수 없었던 도시적 풍물의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도시 문명의 이미지들 속에서 시인은 ‘서글픈, 고달픈, 눈물 지운다.’ 등의 애상적 어투를 통해 존재의 비애와 식민지 지식인의 좌절감을 형상화 했다. 포스크모더니즘이 운위되는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고색창연하지만, 30년대 후반에 그 시적 이미지들은 말그대로 <모던(modern)한 감각>의 대명사들이었다.

 

시인은 또한 시의 기법에 있어 시의 <회화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시에 <공감각적 이미지>의 세계를 접목시켰다.

 

김광림(金光林, 1929~ )

 

· 함남 원상생, 국학대학 졸업

· 1955년 [전시문학선]에 <장마>, <내력>, <진달래 발표>

· 시집 : [상심하는 접목>(59) 등

--- 시 <산>

 

김광섭(金光燮, 1906-1977, 이산·怡山)

 

· 함북 경성군 출신.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

· 창씨 개명 반대로 4년 가까이 옥고를 치름

· 1935년 [시원]을 중심으로 오일도, 모윤숙, 노천명 등과 활동

· ‘해외문학’ 동인으로 외국 문학의 번역·소개, ‘극예술 연구회’ 활동

· 광복 후 공보처장, 대통령 공보비서관, 자유문인협회장 역임

· [세계일보] 사장, 경희대 교수 역임

· 1965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이후 강인한 생의 애착을 노래한 <생의 감각>은 그의 그칠 줄 모 르는 시정신을 보여 줌

· 시적 경향

- 초기시들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들을 관념적인 방법으로 시화

- 후기시(1960년대 이후)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

· 시집

- [동경](1937) :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의 고뇌, 민족의식

- [마음](1949) : 여유있는 인생

- [해바라기](1957) : 광복의 기쁨

- [성북동비둘기](1969) : 근원에의 향수, 사회 비판 의식

(특히 ‘성북동비둘기’는 물질 문명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를 외형적인 측면과 내면 세계를 함께 다루고 있는 상징적인 시)

- [반응](1972) : 주로 행사시, 사건시 등 사회적 성질의 시 발표

 

 관련 유적지

1) 파주군 문산읍 통일공원 내 10용사 충혼비 조소상

2) 추모시 제목 ‘10용사 영혼을 따라’(김광섭 작)

---  시 <성북동 비둘기>, <마음>(모윤숙 시 <밤 호수>와 비교), <생(生) 감각>, <산>, 수필 <일관성에 대하여>

 

(이산) 김광섭과 (다형) 김현승 두 시인의 비교

 

다형(茶兄)을 생각할 때 비슷한 시대를 살다가 간 이산(怡山) 선생이 떠 오른다. 이 두 시인은 식민지 시대의 어두운 사회 현실 속에서 다 같이 카프에 날카로운 거부감을 느끼며 관념으로 기울어져 간다. 한국 현대시가에서 이 두 분 이상으로 관념 그 자체를 시의 주제로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던 시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시인이 만년에 도달한 시의 경지는 사뭇 대조적이다.

 

1) 이산은 ‘고독’에서 출발하여 ‘산’에 이르고, 다형은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에서 출발하여 ‘절대 고독’에 도달한다.

2) 이산의 시가 고독을 벗어나려는 몸짓이라 한다면 다형의 시는 고독의 단단한 껍 질로 자신을 감싸려는 몸짓이라 하겠다.

3) 이산이 만년에 자기 양심의 실체를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운명 속에서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기울어지는 데 반해, 다형은 타락한 현실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고독에 침잠하거나 신 또는 초월적인 진리 속으로 은퇴한다. 다형의 고독은 그러므로 인간 본연의 문제라기보다는 방법적인 고독이다.

 

 (시적변모) 관념적 사변적 시 ⇨ 인간에 대한 애정

 

그는 현실을 타협할 수 없는 괴물처럼 인식했다는 점에서는 낭만주의자이지만, 그 낭만주의자처럼 현실밖으로 벗어나려하지 않는다. 그의 시에 격렬한 자기 부정 대신에 따뜻한 동경이나 자기 위안이 보이는 이유이다. 그것은 그가 생명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고 계속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입증한다. 그의 대표작이 될 <성북동 비둘기>와 동명의 제목 밑에 실려있는 시들은 그의 시가 초기의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서정감각을 벗어나 인간에 대한 애정을 그가 찾아냈음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쫓기고 있는 인간과 그것에 버금가는 모든 것에 그는 오랜 관조와 사색에서 얻어진 애정을 부여한다.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사옹, 한훤당)

 

· 조선 성종 때 성리학자

· 실천궁행(實踐躬行)의 정신으로 행동한 조선 5현(賢) 중의 한 사람

· 김종직의 문하

·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귀양 순천으로 이배(移配), 조 광조에게 자기의 학문을 이어주었으며, 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 처형됨

 유적지 - 옥천서원(전남 순천 시내) : 김굉필 제향

---< 조위>

 

 

 

 

김규동(金奎東, 1923 - ) ---  <나비와 광장>

 

· 함북 경성생. 연변 의대 수료

· 1948년 [예술조선]에 <강>이 당선되어 등단

· 초기에는 ‘후반기’동인으로 모더니즘 시를 발표, <나비와 광장>(1955) <현대의 신 화>(1958) 같은 시집을 선보임

· 후기에는(1970년대) 사회성 짙은 민중지향적 서정시로 돌아섬

· 시집 [죽음 속의 영웅](1977), 깨끗한 희망(1985), <오늘밤 기러기떼는>(1989) 등

 

 김기림(金起林, 1908- ?)

· 함경북도 성진 생. 시인. 평론가

· 보성고 졸. 일본 니혼대학 문학예술과를 거쳐 도호쿠제대 영문과 졸업

· 1931-32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사이에 <고대(苦待)>, <날개가 돋치면> 등 시각적 이미지가 선명한 시를 발표, 문단의 각광(脚光)을 받음.

· 이양하, 최재서 등과 함께 주지주의 문학 이론 도입, 이후 한국적 모더니즘 문학 운동의 선구 자가 됨

· 시집에 [기상도(氣象圖)](1939), [새노래](1947), 시론집에 [시론](1947), [문장론신강](1949)

· 6·25때 월북, 1988년 해금 조치

 

김기림시비(서울 송파구 보성고교 교정) : ‘바다와 나비’ 새김

---  김기림 시 <바다와 나비>, 이상 시 <오감도>

---  문학이론 ‘문예사조’ <모더니즘>

 

김기진(金基鎭, 1903-1985, 팔봉)

 

· 일본 리교 대학 중퇴. 초기에 언론사 기자로 활동

· [개벽]에 평론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 단편 <붉은 쥐> 발표

· 1923년 [시대일보]에 장편 <약혼>을 발표, 본격 등단

· [백조] 동인

· 1923년 평생 그는 프로문학 운동에 전념, 이념적 경향의 작품 세계를 지향

(이념적 경향으로 한때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음)

· [개벽]에 비평문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 발표(최초의 프로문학이론)

· 작품 : 단편 <불이야 불이야>(1924), <젊은 이상주의의 死>(1925)

 

 유적지

1) 묘(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마명리)

2) 생가, 문학비(충북 청원군 팔봉리 팔봉산 자락)

 

김남조(金南祚, 1927- )

 

· 대구생. 서울 사대 국어과 졸

· 6.25 직후 첫시집 [목숨](1953, 25편)으로 등단.

· 여성의 섬세한 감각으로 ‘사랑과 인내’ 등을 종교적으로 승화

· 1955년부터 숙명여대 교수 재직

· 서울대 후배인 김후란, 숙대 제자인 신달자, 허영자, 카돌릭교의 代女인 강은교 등 여류 시인 들을 지도

· 모윤숙, 노천명의 뒤를 잇고 60년대 후배 여류시인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

· 제2시집 [나아드의 향유(香油)](1955), [나무와 바람](1958), [정념의 기](1960), [풍림의 음 악](1963), [겨울 바다](1967), [雪日](1971), [사랑 초서(草書)](1974), [동행](1980), [빛과 고 요](1983), [바람 세례](1988)

· 제9시집 [동행] 이후 신에의 절대 귀의가 뚜렷이 드러남

---  시 <목숨> 신동집 시 <목숨>과 비교, <정념의 기(旗)>, <겨울 바다>, <기도>, <설일>

---  < 허영자>

 

- 김남조 ‘나의 인생, 나의 문학’

- 시를 쓰게 된 동기와 당시의 상황은 ?

 

- 특별한 동기랄 것은 없어요. 다만 병약(病弱)했던 탓으로 외롭다는 감정을 많이 가지게 됐는데, 이러한 것들이 이유가 되어 어떤 생명에의 열기 같은 걸 강렬히 느끼게 되었지요. 당시에는 인간에 대한 고뇌, 사랑, 갈등, 슬픔 같은 것이 많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것들을 내 육신으로 노래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받았고, 또 틈틈이 일기를 통하여 습작(習作) 같은 것을 했지요. 그러다가 6.25사변이라는 커다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민족적 시련과 함께 내 개인에게도 엄청난 핍박과 고통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김남주(金南柱, 1946-1994)

 

· 전남 해남 생

· 1974년 [창작과 비평]지에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 등단

· 1984년 첫시집 [진혼가] 이후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사 랑의 무 기](1989) 등 시집 발표

· 그는 안락의자를 시의 무덤이라 말하고 투쟁을 시의 요람이라 부름

· 시의 주된 원천은 농촌체험과 감옥체험이며 적에게는 가열한 증오, 민중에게는 따뜻한 애정 을 보여주고 있다.

 민족시인 고 김남주의 묘(광주 망월동) : 묘비 내용 “온 몸을 불 태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시인의 영혼, 여기에 잠들다.”

---  <함께 가자 우리>, <사랑>

 

 1주기 추모 문학의 밤

 

김남주 시인의 ‘1주기 추모 문학의 밤’이 11일 오후(95년 2월) 4시 여의도 여성백인 회관 강당에서 열린다. 이날 행사는 고인의 유고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작과 비평사刊)과 브레히트 등 외국 시인의 작품을 번역한 시집 [은박지에 새긴 사랑],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푸른 숲刊)의 출판 기념회도 겸한다.

 

시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 / 김남주

 

“당신은 묻습니다 나에게, 시와 혁명의 관계를. 시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입니다. 시가 혁명의 목적에 봉사하는 문학적 수단임에는 틀림없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에 종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는 그 자체의 독자적인 내용과 형식을 가지고 혁명에 봉사하는 것이지 기계적으로 혁명의 종속적인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와 혁명의 관계는 서로 자기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밀접하게 상호 보완하는 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김내성(金來成, 1909-1958, 아인·雅人)

 

· 평남 대동군 생. 일본 와세다 대학 독문과 졸

· 1935년 단편 <타원형의 거울>로 등단

· 1939년 [조선일보]에 <마인(魔人)> 발표

· 우리 나라 초유의 탐정소설가로서 1949년부터 4년간에 걸쳐 완성한 대표작 <청춘극장>과 < 인생화보>는 유명

· 외국 탐정 소설 번역에 힘씀

---  소설 <비밀의 문>

 

김달진(金達鎭, 1907-1989)

 

김달진 시인 시비(詩碑) 제막식

1995.4.1 경남 진해시 시민회관 부근 헌장비 옆에서 김시인의 사위 최동호(고려대 교수)를 비롯한 200여 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군항제 행사의 하나로 이루어진 이 행사는 진해에서는 처음 세워지는 시비(2m)다. 검은 대리석 위에,

 

가끔 바람이 오면

뒤 울안 열무 꽃밭 위에는

나비들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로 시작하는 그의 대표시 <열무꽃> 전편이 새겨져 있다.

 

김시인은 진해에서 출생해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한시 번역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이날 시비제막식에는 원로시인 설창수, 문학평론가 김윤식, 김선학, 홍신선, 박덕규, 하응백, 시인 황동규, 이하석 등 40여 명의 문인이 참석했다.

 

김동리(金東里, 1913-1995, 본명 시종·始鍾)

 

· 경북 경주 생.

· 1927년 [조선일보]에 시 <白鷺(백로)>입선.

· 1935년 [중앙일보]에 <화랑(花郞)의 후예(後裔)>로 등단.

· 초기작품경향 : 토속적 소재를 운명론적 인생관으로 다룸.

· 후기작품경향 : 종교를 배경, 한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다룸.

 

 유적지

1) 생가(경북 경주시 성건동 186번지)

2) 묘(경기도 광주군 신현2리) : 부인인 소설가 손소희(1917-1987)씨의 묘 옆

 

* 묘비 후면 : ‘김동리찬金東里讚’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견디던 한국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 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 에 떠오른 기묘하게는 아름다운 무지개여 1996년 6월 1일 미당 서정주 글

---  소설 <무녀도>, <바위>, <잉여설>, <황토기>, <까치소리>

---  < 서정인>

 

- 관련기사

 

한국 현대 소설사의 거인이자 산 증인인 김동리(82세) 지난 90년 지병으로 쓰러져 언제부터인가 일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 같던 김씨가 되돌아 왔다. 병세가 호전된 것은아니지만(87년 부인 손소희 타계, 90년 김씨 뇌졸증) 그의 분신이랄 수 있는 생애 전 작품들이 [김동리 문학전집]이란 이름으로 3월말부터 민음사에서 출간되는 것이다.

 

지난 35년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로 등단한 그는 올해로 작가 생활 60주년을 맞이한 현역 작가이다. 그러나 90년 병으로 쓰러진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

 

한국적 샤머니즘의 세계를 파고든 <무녀도> 등 그의 주요 소설들의 인물들이 거대한 운명의 힘에 휩슬려 일상과 신내림(神降)의 경지를 왕복하듯, 그는 현재 자신의 운명과 정면으로 대치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닷새에 한 번꼴로 의사로부터 검진을 받고 매일 물리치료를 받는 그는 거의 의식을 잃고 지내지만, 간혹 찾아온 사람을 알아보고 눈빛으로 무언의 대화를 건넨다고 한다.

 

장남 김재홍씨는 “솔직히 별 차도가 없다”면서도 “상태가 좋으신 날에는 가족들도 알아 보고 하시니까 의식 불명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80년대 초 어느 문학강연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내 단편 소설들을 모두 외고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짜놓은 소설의 구조를 잊어 먹을 리 없고, 문장의 리듬감각을 살리기 위해 여러 번 고쳐 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게 된다.”

 

지난 해 가을 대하소설 [토지]를 완성한 박경리 씨가 찾아와 “선생님 제가 왔습니다. [토지]가 완간됐습니다.”고 외치자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김동리 문학전집]에 수록될 단편 소설은 모두 1백 17편이다. 그는 지난 79년 단편 <曼字銅鏡(만자동경)>을 발표한 뒤 신작 발표를 중단한 상태에서 병석에 누웠던 것이다. 이 전집에는 <사반의 십자가>부터 그가 단편<무녀도> 이후 40년 동안 구상햇던 <을화(乙火)>에 이르는 장편 소설들이 들어간다. 소설 외에 발표했던 문학 평론과 에세이 등고 수록한다. 따라서 전집의 총분량의 20여 권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3월 말에 출간될 1차분은 중단편설 5권과 장편 소설 1권으로 구성됐다. 평론가 유종호, 김치수, 이동하, 진정석씨 등이 김동리 문학을 초기, 중기, 후기별로 나누어 쓴 작가론도 각 권뒤에 붙는다.

 

󰏐 연보 개략

48년 첫 평론집 [문학과 인간] 펴냄.

49년 창작집 [황토기] 펴냄.

50년 6.25 발발 때 서울에 숨어 지냄.

51년 한국문총 사무국장 피선, 문총구국대 부대장 지냄.

56년 아세아자유문학상 수상.

57년 [사반의 십자가] 간행.

58년 [사반의 십자가]로 예술원 문학부문 작품상 수상.

61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피선. [등신불] 발표.

65년 민족문화중앙협의회 부이사장,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이사 피선.

67년 [까치소리]로 3.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수상.

68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월간문학] 창간.

70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피선. 서울시 문화상 문학부문 본상 수상.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72년 서라벌 예술대학장 취임.

73년 중앙대 예술대학장 취임. [한국문학] 창간.

78년 장편 [을화] 발표.

79년 한국소설가협회장 피선. 중앙대 정년퇴임.

81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피선.

83년 5.16 민족문화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피선.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 추대.

89년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추대.

90년 소설가협회장 피선. 7월 30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

95년 타계

 

󰏐 [김동리문학] 타계한 김동리씨 삶과 작품세계

 

장기간의 투병 끝에 17일 작고한 작가 김동리는 반공주의적 순수주의라는 한국소설의 한 흐름을 창작과 이론 두 분야에서 주도한 인물이다. 샤머니즘과 토속성을 기조로 삼아 시간의 진행 속에서도 변치 않는 민족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그의 문학은 가장 민족적이며 따라서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찬사와, 팍팍한 현실에 등 돌린 몽환과 주술의 포로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수반하고 있다.

 

1935년 <중앙일보>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그 이듬해에 <동아일보>에 `산화'가 당선되어 등단한 동리(본명 김시종)는 `무녀도' `바위' `황토기' 등의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30년대에 이미 나름의 문학세계를 확고히 했다. 그 자신 󰡒세계의 여율과 작가의 인간적 맥박이 어떤 문자적 약속 아래 유기적으로 육체화하는(것)󰡓이라고 표현한 그 세계란 인간과 섭리 사이의 치열한 대결 또는 조화를 축으로 삼는 것이었다.

중학교 4학년 중퇴라는 최종학력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세계문학전집과 동서의 철학 및 사상․종교서적 등을 섭렵한 그는 나름의 뚜렷한 문학관을 수립해 자신의 창작을 안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창작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회 전체의 혼란과 대립이 문학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던 해방공간에 그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그는 해방 직후 좌익계 문인들이 발빠르게결성한 문학가동맹에 맞서 1946년 서정주,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등과 함께 반공문학단체인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한다. 이 단체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뒤인 1949년 12월 이념적 색깔이 비슷한 문필가협회와 합해 한국문학가협회로 발전하며 동리는 이 단체의 소설분과위원장에 피선된다.

 

동리 자신 대한민국 정부와 `정신적 내지 역사적 성격'을 공유한다고 밝힌 바 있는 한국문학가협회는 지금의 한국문인협회의 전신으로 이후 이땅의 제도권 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동리는 나중에 두번에 걸쳐 한국문인협회의 이사장으로 뽑히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이들 단체와 그 소속 문인들의 창작의 지도원리가 되기도 한 문제적 평론을 거듭 발표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 평론이 자신과 문학적 대척점에 놓인 작가․평론가들과의 논쟁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 문학적 의의는 지대하다.

 

일찍이 30년대 말의 선배 작가 유진오와 벌인 논전에서 시작해 해방 공간에는 좌익계 소장 평론가인 김동석․김병규와, 50년대 말에는 당시의 젊은 평론가 김우종․이어령 등을 상대로 펼친 불꽃 튀는 논쟁에서 동리가 이룩하고 지켜낸 문학적 화두는 `구경(究境)적 삶의 형식'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구경적 삶의 형식'이란 달리 말하면 인간의 원형적 조건 또는 운명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일제 말기인 30년대 후반과 해방공간, 그리고 민족적 분단의 세월을 통과하면서 많은 수의 동료 문인들이 문학과 현실의 불가분의 관련성을 강조할 때에도 동리는 역사와 현실이휘발해 버린 어떤 민족의 원형적 공간을 상정하고 그 안에서 운명이라는 이름의 알 수 없는 힘에 맞서고자 했다. 그 대결의식은 `역마' ‘사반의 십자가’ `등신불'과 같은 기념비적 작품으로 구현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중의 문총구국대 부대장, 5․16민족문화상, 국정자문위원 등으로 미끄러지기도 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서 많은 후배들을 키우기도 한 동리는 두 번째 부인이었던 작가 손소희가 먼저 세상을 뜬 뒤 30년 연하의 작가 서영은씨와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서라벌 예술대~>, <추천문인>

 

김동명(金東鳴, 1901-1968, 초허·超虛)

 

· 시인. 정치 평론가. 강원도 명주 생

· 일본 아오야마 학원(청산학원) 신학과 졸

· 1923년 [개벽]에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시면>을 발표, 등단

· 제1시집 [나의 거문고]에서는 다소 퇴폐적 기질을 보였으나, 제2시집 [파초]에서는 농촌에 살 며 전원적인 것을 소재로 하여 향수, 고독을 참신한 서정으로 노래.

· 1947년 월남을 기점으로 하여 정치적, 사회적 관심을 갖게 되고 초대 참의원을 역임함. 조선 민주당 정치부장

· 1954년 시집 [진주만]으로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

· 이화여대 교수 역임

 

 유적지

1) 김동명 시비(오죽헌에서 주문진 쪽으로 9km 지점 국도변, 탑 모양) : <내 마음은>, <파초> 새김

2) 김동명 시비 공원 : 주문진과 강릉 사이 미노리 바닷가

--- 시 <내 마음은>, <파초>

 

김동인(金東仁, 1900-1951, 금동·琴童)

 

· 평양 생, 최초의 문예동인지 [창조] 발간(1919)-주요한, 전영택 등

· <약한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

· 이광수의 계몽주의에서 벗어나 ‘사실주의’적인 수법을 보임.

·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기틀 확립.

·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혹은,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문학을 주장.

 

· 작품경향 정리

- 자연주의 : 약한 자의 슬픔, 감자, 명문

- 낭만주의 : 배따라기

- 유미주의 : 광화사, 광염소나타

- 인도주의 : 발가락이 닮았다.

- 역사주의 : 젊은 그들(1929 동아일보 장편 연재), 운현궁의 봄, 붉은 산

· ‘평론’으로 [춘원 연구]는 유명함.

 

 김동인문학비·동상(서울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  소설 <감자>, <광염소나타>, <광화사>, <배따라기>, <붉은 산>, <태형>

 

김동환(金東煥, 1901-?, 파인·巴人)

 

· 함북 경성 생. 중동 중학을 거쳐 일본 도오요오(동양·東洋) 대학 문과 수료

· 1924년 [금성]에 ‘적성을 손가락질하며’ 등단.

· [국경의 밤](1924)은 최초의 근대 서사시

· 1925년에는 카프에도 가담했다가 6·25때 납북되었음

· 작품 <산 너머 남촌에는>, <북청 물장수> 등

· 서사 시집 [승천하는 눈물], 서정 시집 [해당화]

---  시 <국경의 밤>, <북청물장수>, <남촌>

 

 김만중(金萬重, 인조15-숙종18, 1637-1692, 서포·西浦, 자(字) 중숙·重叔, 시호 문효·文孝)

 

󰊱 누구인가?

 

· 광산(光山) 김씨.

· 관계

- 증조부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 : 한국 예학(禮學)의 시발

- 종(從)조부 : 김집(金集, 1574-1656)

- 아버지 : 김익겸(金益兼, 1614-1636)

- 형 : 김만기(1633-1687)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 형 김만기의 딸 : 인경왕후(仁敬王后, 숙종妃)의 숙부(叔父)가 됨

- 모(母)부인 윤씨의 고조부 : 해원부원군 윤두수(尹斗壽, 1533-1601)

- 윤씨의 증조부 : 영의정 문익공 윤방(尹昉)

· 문집 :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 [지구고증(地球考證)], [주자요어(朱子要語)]

· 작품 : <구운몽>,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아버지 김익겸이 정축호란 때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함으로써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난 김만중은 부친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어 자연 그의 교육적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준 모부인 윤씨에게로 쏠려 그의 원초적 마음이 되게 한 효도심에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김만중은 조선 중기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늘 정의감에 앞장서서 왕에게 상소를 올려 여러 차례의 유배생활을 겪어야만 하였다. 거기서 그는 유배를 통해 그의 인간과 사상, 문학관과 학문관을 알 수 있게 하는 [서포만필]도 이루어졌고,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통속소설도 창작되었다. <사씨남정기>는 숙종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의 비리적 처사를 상징적으로 풍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만중은 학문에서도 유·불·도의 이동(異同)은 물론 산수·율려·천문·지리·패설 등에까지 두루 통한 박학자였고, 당시 국가·사회의 강한 이데올로기로 지배됐던 주자학도 비판적 시각에서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천시했던 통속소설의 대중적 기능을 중요시하여 직접 창작도 했다.

 

김만중은 또한 당시 사회가 한문학권에 꽁꽁 묶여 있었을 때에, 인도·중국·한국 등 각 나라의언어적 특징을 일찍이 파악, 한국 사람은 한국 언어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소위 국민문학론을 제창한 선구자였다.

 

󰊲 생애(生涯)

 

① 수학기(修學期, 1~28세)

그의 가족이 정축호란(丁丑胡亂) 때 강화도로 피난을 했지만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되자 그의 부친 충정공 김익겸은 순절하고 만삭(滿朔)이 된 모부인 윤씨는 서울로 귀향 중 강화와 김포를 잇는 강을 건너는 가운데 배 안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그의 아명(兒名)을 ‘선생(船生)’이라 했다.

 

어린 시절 교육은 모부인 윤씨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윤부인은 명문거족의 출신으로 총명지혜로웠으니 윤씨의 유년시절 교육은 조모인 정혜옹주(貞惠翁主, 선조의 딸)로부터 받았다. 일찍이 남편을 잃은 윤부인은 만기, 만중 형제를 데리고 친정으로 데려와 부친 참판공 윤지(尹墀)를 섬기고 안으로는 모친 홍씨를 정성껏 섬긴 효부인이기도 하다.

 

모부인은 고금에 드문 현부인으로 부친인 참판공이 별세한 후로는 친정의 생활도 어려워 베틀과 수놓은 것으로 생애를 이어갔지만, 자식들의 학업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 그들에게는 곤궁한 내색을 전연 감추었다고 한다. 특히 [소학], [사략(史略)], [당시(唐詩)] 등은 윤씨가 직접 가르쳤으며, 병자호란 후로 서적을 구하기가 어려워 [맹자], [중용] 등은 윤씨가 곡식을 많이 주고 사서 읽혔고, [죄씨전(左氏傳)] 一秩은 값이 너무 비싸 자식들이 감히 사달라고 하지 못하자, 윤씨가 베틀 가운데서 베를 끊어 사주었다한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에 비할 바 아니어서 재주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야 겨우 그들에게 비할 바 되나니, 너희들이 행실의 잘못이 있은즉, 반드시 과부(寡婦)의 자식이라 하리니 그러면 이후 내가 지하에서 어떤 면목으로 너희들의 부친을 뵈올 수 있겠느냐? ”

 

--- [先妣(선비) 貞敬夫人(정경부인) 行狀(행장)] 김만중의 술회 내용 중

 

② 사환기(仕宦期, 29~50세)

현종 6년(1667) 29세 때 문과에 급제, 15년 38세 때까지 10년간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 사서(司書) 등 벼슬을 역임했다. 이 기간이 그의 일생 중 가장 평온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30세 때는 그의 형 김만기가 2품직에 오르고, 35세 때는 그의 질녀(姪女)인 김만기의 딸이 세자빈(숙종비 仁敬王后)에 책봉(冊封)되는 등 영광의 세월이었다.

 

이후 환해(宦海)의 풍파가 일어났던 것은 현종 초년의 첫번 째 예송(禮訟)이 서인(西人)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현종 15년 예송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해에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승하, 인조의 계비의 복제(服制)문제로 남인(南人)은 소위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고, 대신 서인은 소위 대공설(大功說)을 내놓았는데 왕은 서인의 설이 근거가 미약하다 하여 남인의 기년설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서인은 조락하기 시작, 숙종 초에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즉 서인의 영수(領首)인 송시열 등 일파는 유찬, 혹은 파직되었고, 김만중도 그 여파로 결국 삭직된다.

 

이때부터 5~6년간 남인의 집권 중에 영의정 허적(許積, 1610-1680)의 전횡(專橫)으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는 가운데 그의 서자(庶子) 허견의 역모가 탄로나자 허적은 사사(賜死)되고 남인의 대다수가 이지 연좌되어 찬배 또는 파직된다.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한다. 이로서 서인은 다시 집권하게 되었으니 김만중은 43세의 나이로 예조참판에 오르고 47세 때는 대사헌, 50세 때는 대제학에 오르고 그의 형 김만기는 노론(老論)의 중진이 되었다.

 

③ 유배기(流配期, 51~56세)

숙종 13년(1687) 言事사건으로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즉 숙종은 혈통을 이을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중, 인경왕후의 승하로 계비를 맞이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閔)씨의 양해로 궁녀 장씨를 후궁으로 맞게 되었고 숙종 12년에는 장씨가 일약 숙의(淑儀)가 되었다. 이것이 2차 당쟁의 실마리이다.

 

이후 장숙의는 정사에 참여함에 따라 지위와 권세가 드세게 되고 이를 기화로 재야의 남인들이 재차 등용을 꾀했고, 그녀의 오라비 장희재(張希載)와 결탁, 득세를 시도했다. 여기에 장씨의 모는 일찍이 조사석의 비첩이었지만 조사석은 숙종 13년에 右相에까지 올랐고, 대신 영의정 김수항은 파직되었다.

 

이때 김만중은 숙종에게 조사석의 현달(顯達)과 김수항의 파직의 부당함을 상소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영의정 남구만(南九萬, 1629-1711)(--- 󰃫 < 남구만>, 예조판서 남용익을 비롯한 정원(政院), 옥당(玉堂)의 신원한 보람도 없이 드디서 숙종 13년 9월 12일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구운몽>은 바로 이 선천 유배지에서 쓴 것이다. 그런데 장씨로부터 왕자 균(畇, 훗날 경종)이 태어난 국경을 맞아 숙종 14년에 다행스럽게 특사(特赦)로 풀려났다.

 

그러나 숙종 15년 정월, 숙종은 균을 서둘러 왕자로 책봉하자 서인들은 한결같이 반대했다. 이에 숙종은 반대하는 모든 중신을 납관퇴거케 하고 송시열·김수항 등 서인의 영수들은 유배중 사사되고, 김만중은 보사공신(保社功臣)의 칭호를 삭탈당했으며, 이것이 소위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이에 김만중은 남해로 유배되고 거의 온 가족들이 절도(絶島)로 귀양가게 되니 윤씨는 우수 끝에 그해 겨울 12월 22일 세상을 뜬다. 효자 김만중은 모부인의 장례에도 참예치 못하고 애곡하다가 숙종 18년 4월 30일 56세를 일기로 외로이 숨을 거두었다.

 

만중의 남해 유배 3년의 시기에 비교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그의 저서 [서포만필]을 비롯, <구운몽>, <사씨~ >등의 소설을 완성했다. 아울러 모부인을 그린 애절한 사친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 󰃫 신사임당의 ‘사친시’ <신사임당>

 

▲ 오늘 아침 사친시를 쓰고자 하여 (今朝欲寫想親語·금조욕사상친어)

몇 번이나 붓을 적시다가 다시 내던졌는가? (幾度濡毫還復擲·기도유호환부척)

글씨가 이루어지지 않아 눈물이 이미 적시니 (字未成時淚已濨·자미성시루이자)

쓰고자 하는 마음뿐, 사친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集中應缺海南詩·집중응결해남시)

己巳 9월 25일)

 

김부식(金富軾, 1075-1151, 호 뇌천)

 

· 고려 인종 때 학자, 정치가

· 묘청(妙淸)의 난(인종 13, 1135)에 원수(元帥)로서 이를 평정하여 수충정난 정국공신의 호를 받음

· 1145년에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엮음

· 기타 [인종실록] 편

· 형 : 김부일, 동생 : 김부의

---  < 정지상(鄭知常)>

 

김삼현(金三賢, ? - ?)

 

· 숙종 때 벼슬이 절충 장군에 이르렀으나 관직에서 물러난 후 장인 주의식과 함께 산수와 자 연을 벗하며 시로써 소일한 중인층의 위항(委巷) 시인

· 현전 시조 6수가 [청구영언], [가곡원류] 등에 전하며 내용은 밝고 명랑함

---  시조 <공명을 즐겨마라 영욕이 반이로다>

 

김삿갓(金笠, 본성명 김병연·金炳淵․1807~1863, 호 난고) ---  <괴짜문인들>

 

· 조선 철종 때의 방랑 시인

· [일화] 조부인 선천 부사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항복, 난이 평정된 뒤에는 처형되었는데 이로 인해 가문이 멸족 당했으며,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김병연의 모친이 영월로 이사하여 살 고 있었는데, 천성이 영리했던 김병연은 영월의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가산군수 정시를 찬양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을 규탄하라’는 시제가 나오자 김익순이 자기의 조부인 줄도 모르고 “한 번은 고사하고 만 번 죽어 마땅하고 / 너의 치욕스러운 일동국의 역사에 유전하리.”라고 준엄하게 질타한 시로 장원 급제했다. 그 후 김익순이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굴욕을 느끼고 삿 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함. 김병연의 차남 김익균이 영월로 돌아가자는 여러 번 의 간청을 끝내 물리치고 방랑하다가 전남 화순 동복에서 일생을 마감했는데 차남이 시신을 모셔 영월에 안치했다 함.

 

 유적지

1) 시비, 묘(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소재)

· 시비 내용

이십수하삼십객(二十樹下三十客)

사십촌중오십식(四十村中五十食)

인간개유칠십사(人間豈有七十事)

부지귀가삼십식(不知歸嫁三十食)

---  <언어유희>

2) 김삿갓 유적지(단양군 의풍리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접경지역) : 은둔지

3) 김삿갓시비(광주 무등산 잣고개)

 

김상옥(金相沃, 1920- 초정·草汀)

 

· 시조시인. 경남 충무생

· 1938년 [문장]에 ‘봉선화’‘백자부’ 통해 등단.

· 전통적인 율격과 제재로 사실적 기법을 활용 현대 시조 경지 개척.

---  시조 <강 있는 마을>, <다보탑>, <백자부>, <봉선화>, <사향(思鄕)>,

 

김상용1(金尙容, 1561-1636, 선원·仙源)

 

· 경북 안동 생. 좌의정 김상헌의 형

· 조선 인조 때 상신(相臣)으로 벼슬이 우의정에 이름

· 병자호란 때 왕족을 모시고 강화로 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함

· 시조 작품 <오륜가> 5편, <훈계자손가> 9편 등

--- < 김상헌>

--- 시조 <오동에 듣는 빗발 무심히 듣건만은>

 

김상용2(金尙鎔, 1902-1951, 월파·月坡)

 

· 경기도 연천 생.

· 1935년 [시원(詩苑)]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

· 동양적인 관조와 평화의 세계를 담담하게 그림

· 시집 : [망향(望鄕)](1939)

·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묘(서울 망우리묘) : 부부 합장묘

--- 시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청음·淸陰)

 

· 인조 때 문신(이조, 예조, 대제학, 공조, 형조 판서 역임) 학자. 경북 안동 생

· 병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 3년간 심양에 잡혀가 갇힘, 귀국 후 좌의정 역임

· 명필로 유명, 중국의 동기창 체를 잘 썼음

· [청구영언] 등 가곡집에 시조 4수가 전함

---  시조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쟈 ~>

---  < 김상용>

 

󰏐 김상용, 김상헌 형제

 

남양주시 와부업 덕소리에 가면 석실부락이라 하여 안동 김씨의 선영이 산을 둘러 자리잡고 있다. 덕소 중심가를 조금 벗어난 지점에 위치한 석실부락 일대는 이 가문 출신 인물들의 묘소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 중 김상용, 김상헌 형제가 단연 손 꼽힌다. 김상용은 호가 선원인데, 병란 때 왕족을 시종해서 강화도로 피란갔다가 강화성이 함락, 그곳에서 화약으로 폭사한 충신이다.

 

김상헌은 병란 때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다가 심양까지 끌려가서도 절의를 굽히지 않은 인물이다.

 

김성기(金聖器, 영조 때, 호 조은)

 

· 조선 영조 때 가인(歌人)으로 평민 출신

· 처음에는 궁인(弓人)이었으나 활을 버리고 거문고를 배워 비파(琵琶), 퉁소, 창곡에 뛰어나 이름이 높았다.

· 시조를 잘 지어 <강호가> 5수 등이 [해동가요]에 전함

---  시조 <홍진(紅塵)을 다 치고 죽장망혜(竹杖芒鞋) 집고 신고>

 

김성한(金聲翰, 1919- )

 

· 소설가. 함북 풍산생. 함남중, 야마구치(山口)고교졸, 동경제대 중퇴

· 서울문리사대, 한국외대 강사 역임

· 1950년 단편 <무명로(無名路)>로 등단( [서울신문]신춘문예당선작 )

· 1955~58 [사상계] 주간, 그 후 [동아일보] 논설위원, 출판국장, 편집국장

· 1956년 동인문학상 수상 ( 수상작 <바비도> )

· 1958년 제5회 자유문학상 수상 ( 수상작 <5분간> )

· 1963년 영국 멘체스트대 사학과 석사학위

· 1968년부터 [동아일보]에 장편 <요하(遼河)>를 연재하다가 미완성 종결

·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을 간결하고 지적인 문장으로 묘사.

- 전후(戰後)세대 작가군에 속하며 전쟁으로 인해 좌절하는 인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 항하는 인간상을 그림

- 소극적이며 순응적인 인간상을 배제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의 수호를 위해 적극적으 로 행동하는 인간형을 창조하려고 노력함

- 소설 속에서 ‘신화(神話)’, ‘풍유(諷喩)’, ‘우화(寓話)’ 형식을 빌어 쓰는 것은 현실 문제를 고발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임

· 50년대 단편에서 60년대 장편으로 바꿈

· 작품 : <오분간(五分間)>, <바비도>, <이성계>, <귀환(歸還)>

---  문학이론 <근대사를 다룬 역사소설들> ( <이성계> )

---  소설 <바비도>

 

김소운(金素雲, 1907-1981)

 

· 시인, 수필가. 부산생

· 34년간 일본에서 거주하면서 1924년에는 우리말 시집 [출범(出帆)] 간행

· 우리 나라의 시, 민요, 소설 등을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함

· [조선민요집], [조선시집]

---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

 

김소월(金素月, 1902-1934, 본성명 김정식·廷湜) : 1920년대 민요조 서정시인

 

· 시인. 평북 정주 출생

· 오산중학 시절 스승인 김억(金億, 김안서)의 추천으로, [창조(創造)] 5호에 <낭인(浪人)의 봄> 등 5편 의 작품을 발표

· 1922년부터 김억의 주선으로 [개벽(開闢)]지를 통해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 <못잊어> 등 발표

· 1923년에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1924년 김동인 등과 함께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

· 민요조의 고운 가락, 그리움의 애달픈 정서 표현

· 1934년 12월 사업의 실패와 세상에 대한 실의로 고민하다 자살

· 1925년 그의 생전에 [진달래꽃] 출간

· 그의 사망 후 1939년 김억의 주관 하에 [소월시초(素月詩抄)] 발간

---  시 <길>, <초혼>, <산>, <가는 길>, <금잔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개여울>

--- < 김억>(김억과 소월 관계),

 

󰏐 전국에 문학비 총 3백16기

 

**** 김소월 시비가 16기로 가장 많아 ****.

 

시인이자 사진 작가인 김구림씨가 이 땅에 세워진 문인들의 문학비를 모두 조사한 「한국의 문학비를 찾아서」(문학아카데미 간)를 펴내 화제다.

 

저자가 10년동안 현장을 답사하며 각 문학비의 위치와 설립경위, 비문내용 등을사진을 곁들여 소개한 이 책에 따르면 전국에 문학비가 세워진 문인은 총 2백 5명이며, 문학비는 3백16기로 드러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비는 48년 3월 대구에 세워진 이상화의 시비. 시인이자 번역문학가인 김소운은 해방전 영변 약산을 둘러보며 그곳에 김소월의 시비를 세우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었다. ---  < 김소운>

 

그러나 해방이 되고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영변에 세우려던 소월시비 건립은 무산되고 대신 이상화의 시비를 세운 것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3백16기의 문학비를 문인별로 살펴보면 김소월이 16기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유치환(10기), 한용운(8기),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7기)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사망문인으로는 김소월, 생존문인으로는 서정주의 시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또 문학비가 세워진 2백5명의 문인중 생존자는 54명으로 집계됐으나 제주조각공원 등 집단건립에 속한 33명을 제외하면 13명의 문학비가 세워진 것으로 집계됐다.

 

저자는 "문인들은 사라져도 그들의 작품은 남아 두고두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그 추모의 마음들이 모여 세워진 것이 문학비"라면서 "그러나 그리운 문인들을 추모하는 진심으로 세워야지, 누구의 비나 함부로 세워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김송(金松, 1909~ )

 

· 소설가. 함경남도 함주생

· 니혼(일본)대학 예술과 중퇴

· 초기에는 연극 운동에 참가항 <산의 승패>, <농월> 등의 희곡 발표

· 광복 후 문예지 [백민]을 발행

· 이후 소설 창작에 전념하여, 장편 <이성계>, <애정 도시>, <농민사>, 단편 <세월> 등 발표

· 작품 경향 : 부당한 현실의 압력에 짓눌리는 힘없는 소시민들의 생활상의 소박하게 표현

---  < 윤동주> (김송 하숙집에서의 윤동주 생활)

 

김수영(金洙暎, 1921-1968)

 

· 시인. 서울 출생, 1941년 선린상고 졸. 1942년 동경 상대 전문부 입학

· 1943년 학병징집을 피하기 위해 귀국

· 1944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 광복 후 귀국

· 연희대학 영문과 졸업, 후반기(後半期)동인

· 1949년 김경린, 박인환 등(후반기동인)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간행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 1950년대 모더니스트의 주요 인물

· 점차 모더니즘의 공허함을 느끼며 이로부터 탈피하고자 노력

(초현실주의의 ‘자유’의 개념을 가장 잘 이해, 그의 시 세계에서 강렬히 추구)

· 1960년 무렵 4.19를 기점으로 강렬한 현실의식을 추구하는 방향

( 60년대 참여시의 운동의 선구자 역할 )

· 시집 : [달나라의 장난](1958), [거대한 뿌리](1974)

· 평론집 : [시여 침을 뱉어라](1975)

· <풀>을 짓고 난 뒤 15일만에 귀가길에 술에 취한 채로 좌석버스에 치여 사망

· 작품 200여 편 남김

  김수영시비(북한산 국립공원 입구) : ‘풀’ 새김

 

▲ 4.19를 바라보는 김수영과 신동엽의 차이

* 공통점 : 4.19를 완성되어야 할 혁명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

* 차이점 : 상호 대립적 감정 기조와 정신적 지향

 

김 수 영

신 동 엽

4.19이후 관점

실의(失意)와 환멸(幻滅)로 파악

과거와 미래 동시 조명

이념의 역사적 재현과 완성 확신

거리

원거리에서 파악

아주 근접 (보다 적극적)

태도

동시대 지식인 대표하여 먼저

좌절, 자조(自嘲)

부단한 변혁의지, 허위 모순 거부

- 4.19를 갑오 동학혁명과 3.1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

- 민족운동, 민중운동

 

☞ 김수영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사령(死靈)>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狂氣)

실망(失望)의 가벼움을 재산(財産)으로 삼을 줄 안다. < 그 방(房)을 생각하며 >

 

☞ 신동엽

 

우리 사람 밭에

우리 두렛마을 심을, 이

찬란한 혁명의 날 <금강(錦江)의 후화(後話)(2) >

 

* 김지하는 김수영의 시를 극복하는 것을 자기 시의 과제로 설정함.

 

󰏐 시여 침을 뱉어라 -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 김수영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  시 <풀>, <폭포>, <사령(死靈)>, <푸른 하늘을>

---  어휘 <참여시>(‘눈’ 시 인용)>

---  문학이론 <시(詩)> (‘시적 언어의 개념과 기능’에서 시어(詩語)에 대한 견해 인용)

---  <김지하>(‘어느 날고궁을 나오면서’ 시 인용), <신동엽>

 

김수장(金壽長, 1690 - ? , 노가재·老歌齋)

 

· 조선 영조 때 가객

· 숙종 때 병조(兵曹)의 서리(書吏)를 지냄

· 영조 22년(1746)부터 46년(1770)까지 시가집 [해동가요(海東歌謠)]를 편찬했으며, 그의 사실적 인 서경시 작품 117수가 수록되어 있음

--- 시조 <초암이 적막 벗 업시  안 >

 

김승옥(金承鈺, 1941- )

 

· 소설가. 일본 오사카 생.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출신

·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 <생명연습>으로 등단

· [산문시대] 동인.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수상

· 경향 : 삶의 일상성과 자기 기만의 세계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

· 의의 : 내성적 기교주의자의 대표

· 작품 : <생명연습>(62년), <환상수첩>(62), <무진기행>(64), <서울, 1964년 겨울>(65), <다 산성>(65), <내가 훔친 여름>(67) 등

--- 소설 <서울, 1964년 겨울>, <무진기행(霧津紀行)>

 

󰏐 유혹(誘惑) 그리고 공포(恐怖) - 김승옥론 (정과리)

 

김승옥은 개항 후 한국인의 상황과 그것에 대한 반응을 당대의 시각에서 구조적으로 탁월하게 보여준 작가이다. 여기서 <구조적>이란 말은 김승옥의 소설 작법이 위에서 말한 외세에 의한 충격이라는 역사적 현상을 현실의 중심적인 일부에서 포착하여 그 상황의 구체적 모습을 집약적으로 생생하게 모사(模寫)한 것이 아니다, 충격의 본질적 요소들을 길러내어 작가의 의식 속에서 상상적으로 재조립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김승옥의 작품들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리얼리즘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 김승옥이 인식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들은 특이한 것, 혹은 새로운 것에 대한 유혹과 공포이다. (중략)

유혹과 공포라는 두 기본 요소를 가진 자기 세계의 논리적 파행과 파국은 작가가 그 세계에 대해 더 이상 집착을 가질 힘을 상실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암시해 준다. 이후 작가의 관심은 <소시민의식>에 집중된다.

 

󰏐 [김승옥 작품세계] 세련된 언어표현 뛰어나

 

-- "6.25이후 혼란 뭔가 정리할 필요" 당시 회상

 

[서울, 1964년의 겨울]은 65년 [사상계] 6월호에 발표됐다. 당시 김승옥씨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먹물 룸펜]이었다. 그러나 이미그는 60년대 소설에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유명 작가였다.

 

훗날 연극연출가로 이름을 날린 오태석의 신촌 자취방과 이화여대앞 파리다방을 오가며 65년 봄 완성한 이 소설은 그해 동인문학상을받았다. 사상계의 청탁을 받은 그는 천박하지 않고, 유머가 있으며, 시니컬한 소설을 쓰기로 했다. 냉소의 대상은 서울. {서울을 보면 우리나라의 모든 것이 보입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본 서울은 생존에만 신경을 쓰고, 자기 논리만 강요하는 인간들로 가득차 있었다. {대학원생과 병사계직원이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도 실은 대화가 아닙니다. 다이얼로그가 아니라 모노로그지요. 자기의 논리만 일방적으로 얘기하는….}.

 

그는 대화부재의 근본원인을 공통된 규범의 부족에서 찾고 있다.

동행하던 사람이 죽어도 자신의 불편을 피해 총총히 여관을 떠나는인물에게 어떤 가치나 질서도 찾을 수 없다. {6.25이후 모든 질서가 사라졌습니다. 어떤형태의 질서라도 좋으니 혼란을 정리해줄 그 뭔가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는 6.25이후 무너진 질서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4.19 적경험]이니 하는 부분은 당시 머릿속을 채웠던 질서회복에 비하면 별로 큰부분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글은 문단에 커다란 감동과 충격을 안겨 주었다. 동세대 평론가 김치수씨는 {기존 가치에 대한 절망감을 엄숙하지 않지만, 세련된 언어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김승옥소설은 오랫동안 문학청년들 사이에서 정전으로 추앙받았다. 올해 동인문학상 수상작가 신경숙씨는 습작시절 김승옥소설을 대학노트에 그대로 베껴쓰면서 문장 수업을 했다.

 

문학의 새 기수로 환영을 받은 그는 그후 영화 [감자]등을 제작하기도했고, 70년대에는 [겨울여자]등 히트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70년대말 이후에는 절필과 복귀등을 거듭하기도 했다. 80년대 이후 신앙 생활에 몰두하면서 창작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지난해 [김승옥전집](전 5권․문학동네)을 출간, 그동안의 작업을 일단 정리하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문단에선 김승옥문학의 화려한 부활을 기대하고있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 매월당 혹은 동봉)

 

· 강릉생. 생육신의 한 사람

· 생후 8개월에 글자를 터득, 3세에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다음 시를 지었다 함

“無雨雷聲何處動(비는 아니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黃雲片片四方分(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 신동으로 세종에게 칭찬을 받기도 한 천재였음

- 세종이 박이창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했는데,

세종이 “어린이의 글이 끝없이 푸른 하늘에 흰 학이 춤추는 것 같구나.”

하니 이에 시습은 즉석에서

“임금의 덕은 푸른 바다에 황룡이 튀어 오르는 듯합니다.”

고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함.

· 21세 때 삼각산에 들어가 학문 닦다가, 단종 폐위 후 3일 간 통곡

· [금오신화(金鰲新話)] 펴냄

· 만년에 설악산 오세암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음

· 한 때 환속하여 재혼하기도 했으나 방랑을 계속, 부여 ‘무량사’에서 세상을 마침

· 유적지 - 매월당시비(부여 무량사)

---  < 괴짜 문인들>

 

김억(金億, 1893-?, 안서·岸曙)

 

· 시인. 평북 정주생. 일본 게이오 대학 문과 중퇴

· 투르게네프, 렝보, 베들레에르 등의 시를 번역 소개. 주로 상징시 소개

· 1916년 9월 [학지광] 10호에 베를레느의 시 두 편 번역, 소개

· 1918년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약 [태])에 창작시 <봄은 간다> 발표.

· 평론 <프란스 시단>([태] 10~11호), <스핑스의 고민>[폐허] 창간호(1920)

· 1919년 [창조] 동인으로도 활동.

· 1921년 [오뇌(懊惱)의 무도(舞蹈)](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번역시집) 발간

· 1923년 [해파리의 노래](창작 시집) - 안서의 창작시는 민요조의 가락을 바탕으로 인생의 애 상과 한을 주로 노래해 오산학교에서 만난 제자 김소월에게 영향을 줌.

· 1922년 김소월을 문단에 소개함

·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에스페란토어를 연구

· 6·25전쟁 때 납북됨

· 작품 : <봄은 간다> : --- 󰃫 <음악성>항에 전문 수록

--- 시 <봄은 간다>, 책 <태서문예신보>

 

 안서(岸曙)와 소월 ----- 오산학교 시절

 

① 소월의 시 <진달래꽃>([개벽] 1922.7), <먼 후일>([개벽] 1922, 8)

⇒ [개벽](1920년 창간 , 최초의 본격 종합지)에 발표 주선

② 민요의식 ( 3·3·4조, 7·5조 )을 소월에게 심어 줌

③ 한(恨)이 서린 애상적(哀想的) 내용

④ 안서는 33세로 요절한 제자를 위해 [소월시초](1939)를 엮어 냄

 

 김억, 황석우의 상징주의에 대한 인식

 

상징주의의 표면적 양상인 <퇴폐적 정조>에 지나치게 이끌린 나머지 <감각의 혼융, 언어의 음악적 정련(精鍊)> 등과 같은 미학적 원리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못했다. 그것은 [오뇌의 무도]에 말라르메, 랭보의 시가 단 한 편도 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이점에서는 황석우도 마찬가지다. 황석우는 <상징주의 시 = 구상성의 시 = 은유시>라는 식의 피상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김영랑(金永郞, 1903-1950, 본성명 김윤식·允植)

 

· 시인. 전남 강진 생. 지주의 아들로 태어남. 강진 공립 보통학교 졸

· 서울 휘문고보 졸. 3·1운동 때 6개월간 복역

· 출옥 후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 수학.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귀국

· 22세(1925)에 결혼

· 27세(1930) 정지용, 정인보와 함께 [시문학] 동인지 발간

- 예술적 최고의 미(美)인 ‘순수미’를 추구(‘북의 소월, 남의 영랑’이란 칭호)

· 1945년 강진에서 우익운동 주도, 강진대동청년단장으로 활동

· 1948년 가족과 함께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 공보처 출판국장 역임

 

· 작품 경향

(1) 시의 음악성 강조,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

(2) 짧은 형식의 시행 채택. 섬세한 정서의 흐름.

(3) 영랑의 시는 ‘흐름’과 ‘떨어짐’으로 인한 <유동성>을 지님. 곧, 정지적(靜止的)이고 객 관적이 아니라 “유동적, 가변적”임

 

- 영랑의 이러한 표현은 김소월의 <풀따기>에서 그리움을 자라나는 ‘풀’과 흐르는 ‘냇물’ 에 비유한 것과 유사하다. 이 흐름 속에서 삶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

- <가늘한 내음>에서 3연의 ‘흐르는 마음’이란 구절에서도 상실감에 젖은 마음의 유동성 을 노래하고 있다.

- <춘향>, <독을 차고> 등에서는 민족의 매서운 정신을 형상화함

 

· 6·25전쟁 때 포탄에 맞아 숨짐

· 시 81편(이 중 60여 편은 강진에서 씀)

· 첫시집 [영랑시집](1935), 시와 산문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 유적지

1) 생가(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

2) 시비(생가) : ‘모란이 피기까지는’ 새김

3) 묘(서울 망우리 묘지 내) : 위치 확인 불명

4) 김영랑시비(광주 광주공원) : ‘모란이 피기까지는’ 새김

---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가늘한 내음>, <꽃>,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을 아실 이>, <오월>, <독을 차고>, <두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돌담에 소색이는(속삭이는) 햇발같이>

---  문학이론 <시문학파>, < 신적정>(시의 변모에서의 두 시인의 유사점)

 

▲ 강물

 

꿈에 본 강물이라 몹시 보고 싶었소.

무럭 무럭 김 오르며 내리는 강물 //

언덕을 혼자서 거니노라니

물오리 갈매기도 끼륵끼륵 //

강물을 철철 흘러가면서

아심찬이 그 꿈도 떠실코 갔소. //

꿈이 아닌 생시 갖인 서름도

작고 강물은 떠실코 갔소.” //

 

󰏐 유홍준, 남도답사 일번지(2) ‘영랑생가 답사’

 

영랑생가는 동산 중턱 양지바른 쪽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터에 본채와 사랑채가 널찍이 자리잡고 있다. 화단에는 방문객을 위함인지 그를 기리기 위함인지 모란꽃을 가득 심어 놓아 그 작위적 발상이 가상스러운데, 한쪽에는 1988년에 세운 영랑시비가 육중하고 촌스러운 자태로 이 집의 운치를 다 망쳐 놓았다. 오직 볼 만한 것은 뒷담 쪽으로 빽빽이 들어선 대밭의 싱그러움과 해묵은 고목이 된 동백나무 여남은 그루가 있어 아리땁고 그윽한 남도의 정취를 보여 주고 있음이다. 그러께는 이 집을 지방문화재 89호 지정하여 사랑채를 초가로 올려 복원해 놓았는데 나는 이 영랑생가 초가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나에게 있어서 영랑은 누구인가를 한번쯤 생각해 보았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시 중략)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같은 영랑의 시를 생각하면 나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 만연한 인간적 상실과 좌절을 뼛속까지 느끼게 된다. 영랑의 시가 향토적 서정과 민족적 운율을 동반한 영롱한 서정시라는 것은 문학사가들의 해설이 없어도 알겠고, 또 실수 없이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서정의 발현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리하고 맥빠질 수 있겠는가? 모란이 피기까지 그가 기다린다는 것은 고작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그런 식의 정서 발현이란 감상의 과소비밖에 안 될 것이니, 클리넥스 홑껍질보다도 근수가 덜 나갈 이 가벼움을 티없이 맑다고 표현하기는 싫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개화·신문화 운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1925년이 되면 KAPF를 비롯한 진보적인 문예운동이 일어나다가 1930년대 들어서면 국내는 진보적 운동이 결정타를 맞고 그 대신 남만주와 북간도에서는 항일 게릴라와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하고 있을 때이다. 이때 우파의 문학·예술인들은 맥없이 순수예술을 주장하다가 그래도 그중 괜찮다는 사람들이 일말의 양심 내지 자존심에서 좌파가 내세운 민족성·현실성의 가치 중 고작해서 향토색이라는 이름으로 흡수되어 갔다. 그것이 문학에서 국민문학파이고, 미술에서 오지호·김용준 등의 향토색 논쟁이며, 김중현·김종태의 향토적 서정주의 그림이다. 그리고 음악에서 홍난파 같은 작곡가를 낳았다. 속알갱이는 송두리째 일제에 빼앗겨 버리 식민지적 현실을 극복할 비전과 의지는 상실한 채 형식에서만 향토적 빛깔과 맛을 찾으면서 그것이 민족적 아이덴티티라고 믿으려고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랑의 시에서 차라리 측은한 인간적 상실과 좌절의 비애가 느껴지는 것이다.

 

󰏐 김영랑의 시 세계

 

“아름다움은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키이츠(Keats, 1795-1821)의 말에 큰 영향을 받은 바 있다. 특히 [초기시]의 고요하고 미세한 감각과 내면의 세계가 보여준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는 이것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순결한 삶에의 욕구가 자연과의 내적 연관을 통해 잘 드러났던 것이다.

 

그의 [후기시]가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함으로서 정갈한 시적 구조와 예술적 가치의 약화를 초래했으나 이 역시 순결한 삶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낳은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현실 참여에 바탕을 둔 시를 발표할 때도 자신이 추구한 서정시의 본령을 끝까지 실천코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 제1회 영랑문학상 대상에 시인 장호씨

 

월간 순수문학사가 永朗 김윤식 시인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제1회 영랑문학상의 대상수상자로 시인 章湖씨(본명 金長好․동국대 명예교수)가 뽑혔다. 수상시집은 「신발이 있는 풍경」

 

김용택(1948- )

 

· 전북 임실생

· 1982년 창작과 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으로 작품 활동 시작

· 시세계

- 농촌의 실상을 농촌의 언어를 통해 현장성 있는 작품을 씀

· 시집 : 첫시집 [섬진강](1985), [맑은 날] 등

·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 [나를 키운 공간] 시인 김용택의 섬진강

 

- 굽이굽이 5백리 `내 문학의 고향'…50평생 함께 호흡

섬진강은 아름다운 강이다. 산과 산들이 만들어낸 계곡을 굽이굽이 굽이 돌며 작은 마을들을 곳곳에 거느리고 평화롭게 때론 굽이쳐 부서지며 어쩔 때는 유장함을 자랑하며 흐르는 아름다운 이 강의 가을은 얼마나 서정적인지 모른다. 강변에, 강언덕에 피어난 억새와 골짜기마다 누렇게 익은 벼들, 그 벼를 거두어들이는 마을의 부산함, 산마다 고운 단풍과 산 아래 하얀 쑥부쟁이 꽃들, 해저문 날의 가을 섬진강은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서정이 넘친다. 이 아름답고 고운 강은 전북 진안에서 발원하여 3개 도와 12개 군을 넘나들며 남도 5백리 길을 흐른다.

 

나는 이 아름다운 강의 상류 쯤에 있는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껏 50평생을 살며 글을 쓰고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다. 나는 22살을 먹을 때까지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우연히 교사가 되어 너무도 우연히 책들을 가까이 하게 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문학에 빠져 들어 오늘까지 문학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하루도 섬진강을 보지 않은 날이 없다. 눈만뜨고 방문을 열면 언제나 강이 내눈에 들어왔다. 우리집 마루에 앉아도 누워도 강물은 보였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까지 가는 길도 강길이고, 학교에서도 눈만 주면 언제나 거기 강이 있었다.

 

나는 그 강길에서 내 새파란 청춘을 다 보냈다. 누구나 그렇듯 청춘시절의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과 고독함들을 나는 혼자 문학에 기대어 지냈다. 내 젊은 청춘시절은 온통 책과 외로움 뿐이었다. 내 주위에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단에 나가기까지 나는 혼자 절망하고 혼자 일어섰다.

 

그것은 캄캄한 절망과 눈부신 비상이었다. 나는 캄캄한 그 작은 마을 작은 방에서 부활를 꿈꾸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가려는 나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에 떨었었다. 거기 강이 있었다. 강은 내 유일한 삶의 위안이었고, 세상을 향한 길이었다. 나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늘 강물을 따라 걷고 강가에 나가 헤매었다. 사랑을 잃었을 때도, 사랑을 얻었을 때도, 기쁘고 슬플 때도, 강물은 내 진정한 동무였다.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강물은 예사로운 강물이 아니었다. 강은 역사의 강이었고 강물의 외침은 역사의 외침이었다. 강은 내 시의 젖줄이었고, 가난한 마을사람들의 얼굴이었고, 핏줄기였다. 강과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내 시가 되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들의 분노 슬픔과 기쁨은 강물을 떠나 있을 수 없었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내가 보고 알고 있는 그 어떤 삶의 모습보다 조촐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의 아름답고작은 삶은 모두 강물을 닮았다. 늘 고운 앞산, 산을 닮아 이쁜 앞강, 그리고 그 작은 마을 사람들의 일하는 일상은 늘 내가 꿈꾸는 삶의 모습이었다. 나는, 내 문학은 그 강가 거기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고, 거기 그강에 있을 것이다. 섬진강은 나의 전부이다.

 

󰏐 [문학] 교사시인 김용택씨 "농촌이 좋아요"

 

교실 복도에서 벌 한마리 붕붕거리는 5월의 오후, 산골의 어린 학생들이 동시를 외운다.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파보나마나 자주감자/하햐 꽃 핀 건 하얀감자/파보나마나 하얀 감자.].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 전교생이 모두 15명 뿐이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씨(49)가 호수가 바라보이는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동시를 가르친다.

 

김씨가 맡은 학급은 2학년 1반과 5학년 1반. 2학년은 두명, 5학년은 세명이다. 그는 5명의 제자를 한 교실에서 가르친다. 이처럼 작은 학급에서 교사가 일어서서 강의하면 너무 위압적으로 보인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바퀴달린 의자에 앉아 2학년과 5학년 책상 사이를 오가면서 학생들과 머리를 맞댄 채 숙제를 도와주듯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는 올봄에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소월시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됐고, 최근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창작과 비평사)도 펴내 또다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섬진강변의 임실에서 태어난 그는 20여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교사시인이다. 올 3월 마암분교로 옮기기 전까지 그는 전교생이 53명인 임실군의 덕치초등학교에서 근무했다.

 

{나한테 배운 여학생이 나중에 커서 낳은 아들까지 내 제자가 됐고, 몇몇 집안의 삼형제를 모두 가르쳐본 경우도 많았어요.}.

 

그는 마암분교로 옮긴 뒤 아이들과 함께 대청소를 벌이다가 낡은 학교종을 찾아냈다. 놋쇠로 만든 그 종은 옛날 졸업생들이 기증한 것이었지만, 이 시골 학교에서도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교실 창가에 학교종을 걸어놓고 아이들을 부를 때 땡땡땡 소리나게 친다. {처음찾아오는 문우들도 멀리서 이 종을 보면 아, 저기가 김용택이네 교실이구나 하고 알아봅니다.}.

 

지난 82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뒤늦게 시단에 나온 그는 첫 시집 [섬진강]이후 5권의 시집을 펴내면서 섬진강변 농촌공동체의 생활과 자연의 서정을 다뤄왔다. 광대살이꽃, 노란 꽃다지꽃, 현호색꽃, 때죽나무, 이팝나무 등 도시 시인들이 식물도감에서나 찾아낼 자연의 알갱이들이그의 문학 속에 가득하다.

 

[아침 산 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누가 알랴 사람마다/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마주 보는 산은 흰이마가 서럽다/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사람들은왜모를까] 부분).

 

그의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를 보면 농촌에서도 사라져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있다. 초가 지붕의 박꽃과박덩이,여러차례 깁고기운 쌀바가지, 물바가지 등을 찾을 수 없는 농촌. {우리들의 할머니는 긴긴 겨울밤 뱀이야기로 몇날 며칠밤을 보내기도했는데 이제 내 아이들은 구렁이를 텔레비전의 동물의 세계에서 본다.}.

 

그는 5년전부터 전주 시내의 아파트에서 출퇴근을 하지만 아직도 도회생활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일주일에 이틀은 반드시 마암분교에서 가까운 고향 덕치의 엄니 집에 가서 자고 나와야 살 것 같다.}모친이 무심코 내놓는 토속어라든지, 들풀을 아플까봐 뜨거운 물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모친의 순박한 마음이 바로 김용택문학의 원천이기때문이다.

발행일 : 97년 05월 14일

 

김용호(金容浩, 1912-1973. 추강·秋江, 야돈·耶豚)

 

· 시인. 경남 마산 생

· 1935년 [신인문학]에 작품 발표 등단

· 1938년 첫시집 [낙동강]을 냄으로써 본격 시작 활동

· 1938년 [맥] 동인.

 

· 시적 경향

- 항상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 직선적이며 평이한 시어

- 가난한 사람들의 인정과 애환 어린 시를 씀.

- 일6·25 후 제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는 정신에서 서정시로 돌아섬

· 시집 [향연](1941), 부동항(不凍港)](1943), 해마다 피는 꽃](1948), [푸른 별](1952)

· 서사시집 [남해찬가(南海讚歌)](1953) 등

---  시 <주막에서>

 

김원일(金源一, 1942- )

 

· 경남 김해군 진영읍 생. 서라벌예술대를 거쳐 영남대 졸. 단국대학원 수료

· 1966년 <1960·알제리아>로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데뷔

· 1967년 장편 <어둠의 축제> [현대문학] 장편소설 공모 준당선

· 1968년 영남대 졸업 후 상경, 10일만에 ‘국민서관’에 입사

· 1973년 단편 <어둠의 혼>을 계기로 해방 직후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6·25로 인한 비극과 화 해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천착함

· 1978년 장편 <노을>을 [현대문학]에 연재, 로 제4회 한국소설문학상과 제4회 대한민국 문학 상 대통령상 수상

· 1997년 장편 <불의 제전> 전7권 완간함

· 작품 경향 : 광복부터 전쟁 직전까지의 역사를 소설로 형상화했는데 자신과 가족의 비극적인 삶은 물론 민족 전체의 비극적 현실을 이해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보임

· 작품 : 단편집 [어둠의 혼](1973), [오늘부는 바람](1976), 장편집 [어둠의 축제](1975), [노 을](1978) 등, 그외 <도요새를 찾아서>, <환멸을 찾아서>, <바람과 강>, <겨울 골짜기>, <마 당 깊은 집> 등

---  소설 <겨울골짜기>

 

󰏐 [동정] 김원일, 한무숙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시인 천양희, 문학평론가 도정일, 소설가 윤대녕씨가 제43회 현대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내년 3월말 열릴 예정이다.

●소설가 김원일씨가 제3회 한무숙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장편 [아우라지로 가는 길]. 시상식은 내년 1월 30일 한국일보사 송현클럽에서 열린다.

 

󰏐 소설 김원일

 

김원일에 관한 한 술 이야기를 빼어 놓을 수 없다. 앞서도 얼핏 비쳤듯이 그는 술을 점잖게 마시면서도 많이 마시는 편이다. 지금은 그와 나 사이의 술은 체력이 달린다는 이유로 고작해야 2차 정도에서 그치고 있지만 내가 아닌, 의기가 투합하는 어떤 사람과 만나면 3, 4차 새벽 2시까지 술집을 전전하며 마시는 모양이다. (중략) 그의 독서량은 만만치가 않아서 국내에 발표되는 웬만한 소설과 시들은 그때그때 거의 빼놓지 않고 읽어댄다. 소설, 시뿐이 아니다. 우리 나라 사회학에 관한 서적은 그의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어서 학구적이라 할 만하다.

 

<어둠의 혼>에서 시작하여 <노을>을 거쳐 [불의 제전]에 이어지는 그의 어렸을 적 삶의 터전이었던 ‘진영(경상남도)’을 배경으로 한 서사문학은 그의 독특한 체험도 작용했으려니와 그 작품들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당위성과 객관성을 얻는 것은 그의 학구적인 정열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가 [불의 제전] 제1부의 연재를 마칠 즈음 나는 그에게 넌지시 건네 보았다.

 

“이제 진영 얘기는 그만 쓰지. 지겹지 않아?”

그러자 그는 표정을 굳히며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 내게는 그것밖에 없어. 내 소설 중 단 한 편의 소설이 남을 수 있다면 그것뿐이니까.” 그것이라는 것은 [불의 제전] 2부와 3부를 의미한다. 그는 이 소설을 앞으로 10년이 걸리더라도 해내고야 말겠다고 벼르고 있다.

 

󰏐 ‘이상(김해경)’에 대한 술회

 

“고등학교 2학년 때에야 비로소 문학에 눈을 떴던 내가 이상을 처음 만난 것은 고3인 1959년이었다. (중략) 전후(戰後)의 혹독한 가난과 삶에 찌들 대로 찌들어 늘 자살을 꿈꾸던 나에게 이상의 그 무절제한 자유로움과 파격이 부러웠다. <날개>의 주인공의 왜소한 두더지와 같은 용기도 말주변도 없던 병약한 열등 인간이 앞으로 이 생존 경쟁의 장바닥을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이냐의 두려움에 주눅들어 있던 무렵이었다. 나는 여섯 명의 부양 가족을 책임져야 할 홀어머니 아낼 장남이기도 했다. 용기가 없었으므로 상상의 자살만을 꿈꾸던 나는 이상을 만나고서 그 꿈을 유보하기로 마음 먹었다.

 

김유정(金裕貞, 1908-1937)

 

· 소설가.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 작면 증리(현,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일명 실레마을)

· 가계

- 부친 김춘식, 모친 청송 심씨 2남 6녀 중 막내

- 10대조 김육(대동법을 실시한 실학자의 선구자)

- 9대조 김우명(현종의 국구(國舅), 숙종의 외할아버지)

- 고조부 김기순 때부터 실레마을 정착

- 증조부 김병선(실레마을에 화서학파의 거유인 김평묵을 초빙, 학당을 열어 학풍을 일으 킴)

- 조부 김익찬(춘천의병 봉기의 배후인물, 6천석이 넘는 춘천 대부호로서 재정지원을 함)

 

· 휘문고보 졸, 연희전문 문과 중퇴

· 맏이 형님, 막내 유정. 중간은 내리 누님이었음. 부모님의 사랑은 막내에게 쏠렸음. 지방의 당 당한 지주의 집안.

· 그러나 그가 6세되던 해 어머니를, 8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각각 여읨.

(정신적 외톨이가 됨. 법석대는 집안 속에서도 유정은 내성적이 됨)

· 12세까지는 시골 마을에서 성장 후 주로 서울에서 지냄.

· 맏형은 주벽(酒癖)과 낭비벽(浪費癖)이 심해 가산을 탕진함.

· 휘문고보를 졸업할 시기엔 거의 빈털털이가 되었음.

· 고보 시절 그는 상당히 다방면에 재주(아코디언, 바이올린, 하모니카)가 있었고 아령, 철봉 등 운동에도 소질. 늑막염으로 고생하다가 형수와 조카가 살고 있는 ‘실레마을’로 내려와서(1931) 병을 회복.

· 1932년부터는 [동아일보]사가 펼친 브나로드 운동에 가담, <농우회(農友會)>조직, <금병의숙 >을 세워 야학(夜學)을 시작. (성격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1933년 서울로 다시 올라와 소설을 쓰기 시작하나 건강은 더욱 악화.

· 1932년경 고향인 실레 마을에 <금병의숙>을 열고 문맹퇴치 운동을 벌임

· 1932년 처녀작 단편 <심청> 탈고(발표는 1936년)

· 1935년 단편 <소낙비>가 [조선일보]에, 단편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 문단 등단.

· 한때 <구인회(九人會)> 가담

· 토속적 어휘와 요설체(饒舌體) 문장

· 심한 폐결핵으로 사망(1937.3.29)

· 소설 <산골나그네>, <금따는 콩밭>, <금>, <떡>, <만무방>, <산골>, <솟>, <정분>, <봄 봄> 등

 

-유적지

1) 문학비 : 강원도 춘천시 의암댐 근처(1968년 김유정 기념사업회 건립)

2) 금병의숙 : 춘천시 신동면 증1리(경춘선 신남역 하차)

---  <구인회>, 소설 <봄.봄>, <동백꽃>, <금 따는 콩밭>, <만무방>

 

󰏐 김유정 문학

 

① 복수(復讐) 문학으로서의 김유정 소설

김유정의 소설은 문학적 복수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소설로서 자신이 체험해야 했던 고통에 대한 앙갚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찍이 단테가 정치적 망명으로 인해 발이 묶인 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앙갚음을 하기 위해 <지옥(地獄)과 연옥(煉獄)과 천당(天堂)>이라는 3계를 순례함으로써 시의 복수를 감행했던 경우와 흡사하다고도 할 수 있다.

 

김유정의 경우 문학적 복수는 거절당한 사랑에의 복수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거절당한 사랑의 아픔을 소설을 통해 카타르시스함으로써 정신적 고통에서 해방, 자신을 치유하고자 하는 복수를 통한 자기 구원(救援)의 수단에서 문학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 경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동백꽃>을 들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주지하다시피 그 스토리는 마름집의 딸 점순이와 소작인의 아들 나와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드러낼 수 없는 애정심리적 갈등을 닭싸움에 전가(轉嫁)시켜 교묘히 표출해 내고 있는 소설이다.

 

점순이와 나는 이웃에 사는데 점순이는 나를 몹시 못살게 군다. 왜냐하면 점순이가 사랑하고 있는 내심을 내가 읽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순이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닭싸움을 시키는데 번번이 내 닭이 패배함으로써 더욱 고통을 증가시켜 준다.

 

그러나 이때의 닭싸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닭의 공격성으로 은유되는 나의 피동성에 대한 점순이의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프로포즈이고, 동시에 이는 여성에게 프로포즈했다가 거절당한 유정 자신의 정신적 피해를 여성으로 하여금 프로포즈하게 함으로써 보상받고자 한 문학의 복수라고 할 수 있다.

 

② 자기 구원 수단(手段)으로서의 소설

문학의 복수가 정신적 억압을 카타르시스함으로써 구원의 수단이었다면, 또 다른 측면을 구원의 수단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김정유정의 소설이다.

 

김유정은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고도 불행한 일생을 살았었다. 그것은 고아가 됨으로써 전전해야 했던 안정대를 구축하지 못한 삶, 늑막염과 폐결핵의 고통에서 체험해야 했던 병고에의 시달림, 그리고 부모를 잃은 고독과 형으로부터의 소외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정신적 울증, 그런가 하면 일확천금에 대한 좌절과 방랑 등에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 그 뿐이 아니라 일제의 억압에 의해 안으로만 삭여야 했던 울분 따위들의 그의 <정신적 콤플렉스>로 작용했다는 점은 이미 여러 견해들이 밝힌 진단의 일단이다. 억압의 고통과 좌절에서 체험한 허탈, 그리고 고독과 소외와 가난이 안겨다준 정신적 콤플렉스 등은 예외없이 유정의 정신울증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예외없이 이러한 고통에 직면했을 때 디펜스(defense) 메커니즘을 동원하게 마련이다. 일종의 방어수단의 동원이다. 김유정이라고 예외일 수 있었겠는가? 그도 이러한 고통을 카타르시스함으로써 구원이기를 희망했고, 그 구원의 수단으로서 문학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김인겸(金仁謙, 1707-1772)

 

· 조선 숙종 때 문인

· 영조 39년(1763)에 일본 통신사 조엄의 삼방서기(三房書記)로 따라갔으며, 그 기행담을 <일 동장유가>로 노래함

---  가사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김정한(金廷漢, 1908-1996, 요산·樂山)

 

· 경남 동래(東萊)군 북면 남산리(현, 부산 금정구 남산동) 출신

· 12세 때 범어사에서 설립한 사립명정학교 입학

·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 1학원에 재학 중에 1932년 양산 농민 봉기에 관련 피검되어 학업 중단.

·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사하촌(寺下村)> 당선, 문단 등단

· 1940년 <낙일홍>, <추산당과 곁사람들>, <월광한> 등 발표.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에 반발, 절필

· 광복 후 신문사 논설 위원.

· 1949년~74년 부산대 교수 역임

· 1966년 단편<모래톱 이야기>로 작품 활동 재개

· 1969년 중편 <수라도>로 제6회 한국문학상 수상

· 1971년 제3회 문화예술상 수상

· 1976년 문화훈장 은장 수여받음

·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 초대회장 추대. 산문집 [황량한 들판에서] 간행

 

· 작품 세계 : 그는 주로 낙동강 주변의 가난한 농민들을 통해서 민족적 현실의 모순을 파헤친 그는 41편이 라는 과작을 남겼으나 틈틈이 자신의 생애를 반추하는 참회록을 쓰는 등 끊임없 이 작가 정신 을 불태움

· 1996. 11. 28 부산 수영구 남천성당에서 타계

--- 소설 <사하촌>,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

 

󰏐 [요산선생을 보내며] 중

 

선생님 저희들은 선생님으로부터 크게 세 가지를 배웠습니다. 부부는 끝내 함께 살아야 한다. 이것을 선생님께서는 몸소 저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찾아뵐 때마다 선생님 내외분 서로 의지하시면서 사시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둘째, 작가는 유혹에 강해야 한다. 온갖 것들이 작가들을 유혹하고 있지만 선생님께서는 초지일관 굳은 의지와 신념으로 선생님답게 사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 언제 어디 누구 앞에서나 해야 할 말씀을 반드시 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이셨기에 저희들은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사람답게 살아라.”고 하신 선생님의 가르침.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허허로운 이 시·공간에 이제부터 저희들의 책임이 되어 소리쳐질 것입니다.

 

김종길(金宗吉, 1926- , 본성명 김치규)

 

· 경북 안동 생, 고려대 영문과 졸

· 1992년 고려대 교수 정년 퇴임(현 고려대 영문과 명예교수)

· 엄정한 균형과 절제 속에 시상 전개, 시 비평에도 기여함

· 시집 [성탄제](1969), [하회(河回)에서](1977)

---  시 <성탄제(聖誕祭)>, <설날 아침에>

 

김주영(金周榮, 1939- )

 

· 소설가. 경북 청송생

· 제8회 이상문학상 수상

· 작품 <객주>, <야정>, <화척>

---  소설 <객주(客主)>, <화척>

 

󰏐 <저자와 함께> 작가 김주영씨

 

헐렁한 옷차림에 허름한 구두이면서도 작가 김주영(金周榮, 57)씨는 구두닦이를 보면 항상 구두를 닦는다.

지난 7월초 기자(김경철)와 페루의 잉카 유적지를 여행할 때도 인디오 슈샤인 보이만 보면 구두를 내밀었다. 격식에 거리낄 것 없는 "순수 자연인" 金씨이기에 구두를 광내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전후(戰後)자신의 슈샤인 보이 시절, 그 신산했던 기억을 다시 불러모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문학평론가 김화영(金華榮)씨는 金씨의 소설에서 신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은 그의 떠돌이 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산으로 첩첩이 막힌 경북 청송의 장터에서 태어난 金씨는 떠돌이 장꾼들의 삶을 보고 자라며 자신도 떠돌이를 택했다. 한 말(韓末)보부상의 삶과 풍속사를 재현한 "객주"를 비롯, "활빈도", "화척" 등 대하소설들은 바로 떠돌이 의식과 삶이 일궈낸한 국문학의 한 성과로 볼 수 있다.

 

金씨가 다시 이달 말 대하소설 "야정(野丁)"을 전5권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내놓는다. 金씨는 또 25일 이산 김광섭의 문학적업적을 기려 제정된 제8회 이상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소설 업(業) 25년을 중간결산하고 있다.

 

"편집광적인 세심한 고증 및 현지조사 작업과 잊혀졌던 우리의 말을 창조적으로 살려냄으로써 방대하고 선이 굵은 이야기를 흐트러짐없이 이끈다"는 게 선정 이유다.

 

이 평은 수상작 "화척"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 전체에 대한 평으로 볼수 있다.

 

"별로 상을 타본 적도, 안달한 적도 없어 수상에는 별다른 소감이 없다"는 金씨는 그러나 "야정"의 집필기간을 둘러보면 " 치가 떨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야정"에는 기초자료조사 2년, 집필 5년 등 총 7년이 소요됐다. 또 현장답사비로만 2억여원이 들었다.

청나라가 그들의 선조인 여진족의 발원지로 신성시하며 이민족의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던 만주지방. 행정력이 느슨해지면서 그곳으로 한족이 몰리고 1860년대부터는 우리 민족도 이주해 들어 가며 만주 개척사가 시작된다.

 

"야정"은 학정과 굶주림을 등지고 새삶을 찾으러 황무지 만주로 들어가 이민족 지배의 가렴(苛斂)과 비적들의 주구(誅求)를 당하며 항일 독립전쟁의 초석을 놓고 오늘 2백만 중국 조선족의 터전을 닦은 만주 이민 1세대의 억센 삶을 재현하고 있다.

 

야생에 던져진 사내와 계집들이 내뱉는 싱싱한 토종 모국어를 통해 읽을 맛을 내며 작가는 고통스런 시대 우직하면서도 강인하게 버텨온 우리 선조 민초들의 삶을 고스란히 들려주고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물론 지형이나 언어의 사실성을 위해 金씨는 8번이나 중국을 드나들며 백두산과 압록강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한 일간지에 북한지역을 무대로 고려무신정권 시대를 그리다 직접 발로 그곳에 가볼 수 없어 당분간 연재를 미루려다 89년 "절필선언"으로까지 비화된 경험까지 안고 있을 정도로 金씨는 현장답사에 철저한 발로 뛰는 작가다. 물론 그의 떠돌이 근성에 기인한다.

 

주로 신문연재를 통해 대하작품을 내놓은 대형작가 金씨는 이제 소설의 진한 농도,그 함축미를 위해 연재는 피하겠다고 한다. "야정"도 4년 연재후 지난 1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다시 줄이고 다듬은 작품이다.

또 민초등 거대한 덩어리로서의 인간보다 이 시대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사람다운 사람의 심성과 삶을 다뤄보겠다고 한다.

 

김지하(본성명, 김영일· 金英一, 1941- 필명 김형·金灐)

 

· 1941년 전남 목포 생, 1959년 서울대 미학과 입학, 1966년 졸업

· 1964년 대일 굴욕 외교 반대투쟁에 가담. 첫 투옥

· 이후 1980년 출옥 때까지 투옥, 재투옥을 거듭하여 장장 8여년 동안 영어(囹圄)의 세월을 보 냄. ( <오적> 필화사건 등 )

· 1963년 첫 시 <저녁 이야기>를 발표한 이후, <황톳길> 계열의 초기 민중 서정시와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판소리 가락에 실어 통렬하게 비판한 특유의 장시(長詩) <오적(五賊)> 계열의 시들, <빈 산>, <밤나라> 등의 빼어난 70년대의 서정시들, 그리고 80년대의 ‘생명’에의 외경(畏敬)과 그 실천적 일치를 꿈꾸는 아름답고 도저한 ‘생명’의 시편들을 만들어 냈다.

· 1975년에는 ‘로터스(LOTUS) 특별상’을 수상.

· 첫시집 [황토(黃土)](1970), [타는 목마름으로](1982), [애린]1․2(1986), [이 가문 날에 비구 름](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대설(大說) [남(南](1982, 1984, 1985) 등의 시집과 ‘생명사 상’을 설파한 산문선집 [생명](1992) 등이 있다.

---  시 <오적(五賊)>, <타는 목마름으로>

▲ 1960년대 80년대 시사(詩史)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절규 [양심선언]

 

“내가 요구하고 내가 쟁취하려고 싸우는 것은 철저한 민주주의, 철저한 말의 자유 -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 민주주의는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피와 시민의 칼을 두려워하는 권력을 바란다. ” [양심선언] 중에서

 

이 글은 정부가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했을 때 이에 맞서 그가 직접 쓴 글이다. 이처럼 그는 독재 권력을 철저히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며 민중의 혼을 담고 있는 시를 창작했다.

 

󰏐 김지하 평론 <자살(自殺)이냐 풍자(諷刺)냐>(1970)

 

····· 김수영 시의 한계 극복을 자기 시의 과제로 설정한 그에 의하면 김수영의 시는,

인정하는 바

인정하지 않는 바

자기 자신 희생하여 넋의 생활력이 회복되길 희망한 하나의 강력한 부정의 정신.

→ 즉, 참된 시민성의 개화(開花)를 열망한 뜨거운 진보(進步)에의 열망(熱望)

→ 풍자(諷刺) 선택은 옳고 인정함

그러나, 시적 폭력(暴力) 표현 방법으로 그 방향을 ‘민중(民衆)’에게만 집중하고 ‘특수집단’의 악덕(惡德)에는 무관심

 

 

- 김지하 시의 의의 : 김수영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한 70년대의 시인 ( 김수영은 시인으로서의 비애(悲哀)는 있었으나, 비애의 최고 형태인 한(恨)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함. )

 

▲ 김수영 시와 김지하 시 비교(김수영 시에 대한 극복의 예)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대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

한번 정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 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 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 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一월 때문에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 자유라는 이상을 버릴 수 없으면서, 싸우지도 못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소시민이 되어 버 리고 만 자신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면서 정말로 분노해야 할 것에는 침묵해 버리는 자신을 비 웃으면서 5연에서는 자조적으로 돌아선다. 7연은 분노가 쓰디쓴 자기 연민으로 표현되어 있다.

 

󰆳 김지하 < 모래내 > 전문(全文)

 

목숨

이리 긴 것을

가도 가도 끝없는 것을 내 몰라

흘러 흘러서

예까지 왔나 에헤라

철길에 누워

철길에 누워 //

 

한없이 머릿속으로 얼굴들이 흐르네

막막한 귓속으로 애 울음소리 가득차 흘러 내 애기

핏속으로 넋속으로 눈물 속으로 퍼지다가

문득 가위 소리에 놀라

몸을 떠는 모래내

철길에 누워 //

한번은 끊어버리랴

이리 긴 목숨 끊어 에헤라 기어이 끊어

어허 내 못한다 모래내

차디찬 하늘 //

 

흘러와 다시는 내 못 가누나 어허

내 못 돌아가 에헤라

별빛 시린 교외선

철길에 누워

철길에 누워. //

 

* 화자의 독백을 통해 70년대 민중의 한을 창조

 

󰏐 [새로읽는 그작품] 김지하 첫시집 `황토'....안찬수

 

## 비극적 서정성 가득한 `저항의 노래'...3공 민주화운동 그려 ##.

 

김지하씨의 시집 [황토]가 금서로 묶였던 80년대초 문학도였던 시인 안찬수(33)씨가 그 시절, 그 시집을 되돌아봤다. <편집자>.

 

열일곱 살의 문학도였던 나에게 시인 김지하라는 이름은 처음 낯선 금기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80년 늦가을 나는 학교 문예반의 일원으로 교지를 편집하고 있었는데, 3학년 선배가 교지에 투고한 [60년대 시의 현실 극복](양정 43호)이라는 글이 문제가 되었다. 그 글에는 시인 김지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몇 분 선생님들과의 논의 끝에 그 부분은 끝내 삭제되고 말았다. 그때 나는 한 사람의 시인과 한 편의 시가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두려움과 함께 어떤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함도 느꼈다. 두려움과 함께 신성함을 주는 것, 그것은 금기였다. [지하]라는 이름, 언더그라운드! 내 마음속에는 그 이름이 각인되었다. 그것은 제도 밖의 어떤 것이었으며 시에 대한 반시였다.

 

모든 금기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는 5백원짜리가 되고 만 삼중당 문고본부터 차차 두 분 누님이 사 모은 책과 외사촌형이 우리집에 피신차 왔다가 남기고 간 책들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가운데 비매품이라는 화인이 찍혀있는 책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누군가가 그어놓은 선 밖의 세계를 보는 긴장감을 주었다. 그렇게 10월 유신의 주입식 교육으로 굳어져 있던 내 의식에도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리라.

 

시인 김지하라는 이름과 마침내 [접신]하게 된 것은 1982년 대학교 초년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황토]라는 시집으로는 아니었다. 몇편의 서정시와 담시 [오적] [비어] 그리고 [양심선언] [옥중메모] 등을 함께 엮어놓은 해적 복사판의 책을 통해서였다. 저자도 김지하가 아니라그의 본명인 김영일로 명기되어 있었던 책이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가 간행됐지만 이 책도 곧 금서가 되고 말았다.

 

김지하라는 이름은 여전히 금기였으며 비매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와 불화하고야 마는 시정신의 뜨거운 상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을 저항정신으로 살아내며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그와 그의 시에 대한 이야기는 제5공화국 치하에 살고 있던 우리들 대학생의 가슴엔 꺼지지 않는 불씨였다.

 

비극적 서정성으로 가득찬 시집 [황토]를 오늘 다시금 읽는다. [녹두꽃]이나 [서울길] [수유리 일기]같은 시를 울부짖음에 가까운 목소리로노래 부르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빈손 가득히 움켜쥔/햇살에 살아/벽에도 쇠창살에도/노을로 붉게 살아/타네/불타네/깊은 밤 넋 속의 깊고/깊은 상처에 살아](녹두꽃에서).

 

이 죽음과 절망과 고통의 언어는 한 시대의 거울이다. 그 거울을 자꾸들여다 보게 되는 것은 닫힌 시대에 대한 시적 응전을 생각하기 위해서다. 악몽과 강신과 행동의 시, 그리고 사랑의 언어를 생각하기 위해서다. 또한 밥과 똥과 틈과 생명의 세계로 나아갔던 한 시정신의 원형을생각하기 위해서다. <시인>

 

󰏐 [대담]日작가 오에 - 시인 김지하 씨…"일본 거듭나야"

 

방한중인 일본 노벨문학상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는 한국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해방50년과 패전50년」 심포지엄(2,3일․서울 아카데미하우스)에 주제발표자로 참석한 뒤 3일 밤 같은 장소에서 시인 김지하씨와 대담을 가졌다. 두 사람은 불행했던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시작, 인간과 문학의 근원적인 문제와 동서양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밤늦도록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다.

 

김지하〓오에선생, 오랜만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지난90년 8월 NHK특집프로 「세계는 히로시마를 기억하는가」에서였습니다. 그러니까 5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군요.

오에 겐자부로〓그렇습니다.

 

김〓먼저 노벨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오에〓고맙습니다.

 

김〓노벨상을 수상하시면서 「나의 수상이 아시아문학의 발언권을 높여주고 아시아 문학발전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하신 말씀이 퍽 감명깊었습니다. 그렇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5년전의 만남에서 나는 그 프로의 주제부터 신랄히 공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 일본인들은 남경대학살 강제징용 정신대 투옥 고문등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은 언급하지 않고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자 신들이 입은 피해만 얘기하는가 하고 비판했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내부에서 과거의 죄를 청산 하는 운동을 먼저 전개하지 않고 왜 히로시마 얘기를 하느냐고 했었지요. 특히 오에선생에게는 「대작가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하고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시인과 작가가 만나 좀더 멋있고 신비한 얘기를 나눠야하는데 한일양국의 과거이야기부터 너무 거칠게 나눴지요.

 

오에〓당시 대단히 격렬한 얘기들을 많이 나눴습니다. 나는 단순해서 그때「아, 이건 옳은 얘기구 나」라고 생각해 머리를 숙였습니다. 당시 김선생의 비판내용은 그대로 일본에서 방영됐습니 다. 당신의 지적은 옳았습니다.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히로시마를 기억하느냐고 물을 권리는 없 습니다. 그때 당신의 지적은 나에게 아주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내가 노벨상을 받을 때 어느 분의 덕택이냐는 질문을 받고서 오카 료헤이와 아베고보등 전후 일본작가들의 도움도 컸지만 5년전 나를 꾸짖었던 김선생의 도움이 큰힘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일본의 작가로서가 아 니라 아시아의 작가로서 노벨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내가 당시 말하려던 것은 히로시마 비극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핵을 써 서 종전하려한 미국의 국방정책도 달갑지 않지만 일본 민초(民草)들의 머리위에 원폭이 떨어질 때까지 일본 민중들이 잘못한 면도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문제를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히로시 마에 앞서 일본 내부의 죄와 죄의식 도덕문제를 제기하는 운동을 강하게 일으켜야 한다는 이 야기였습니다. 해방50년 패전50년을 맞아 몇가지 문제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후 일본 에서는 민주주의가 많이 창달돼왔지만 아직까지 보수우익세력은 軍國主義 皇道主義를 청산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심적인 인사들의 과거청산주장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한국은 전쟁후 박정희식의 개발독재로 여러가지 형태의 저항운동을 전개해오다 이즈음에야 민주화가 되고 언 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습니다. 전통보존에는 실패했고 민심은 사납습니다. 이제부터 좌표를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일본 무라야마총리는 최근 일본이 한반도분단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가 보수파의원의 공격을 받자 다시 이를 번복했습니다. 이같은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에〓일본의 근원적인 죄악은 근대화과정에서 찾아야 합니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를 위 해 지난 1백30년동안 경제력 군사력 이데올로기에 매달려 왔습니다. 일본은 한국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를 희생시키고 근대화를 해왔습니다. 일본은 패전에서 새로 태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패전후 新生을 위해 한국인에게 사죄하고 과거죄과를 청산해야 하는데 그 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 지식인들은 전후 50년동안 사회당에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무 라야마 사회당당수도 의원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총리가 되고부터 많이 바뀌어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라야마총리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고 있습니다. 21세기의 밝은 미 래를 위해 일본은 新生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주창한 아시아의 생명공동체가 21세기에는 실현 되기를 바랍니다.

 

김〓오에선생이 日王의 賞을 거부한 것을 보고 일본국민의 양심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일본의 근 대화는 「천황제」와 같은 수직적 사회구조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데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같은 근대화는 태평천국운동이나 동학운동을 통해 반제반봉건과 민중중심주의 로 나가려 했던 당시의 중국 한국 등과 큰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오에선생은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애매한 일본인」이라는 용어를 쓰셨습니다. 이것은 일본 사 회구조와 일본인 내부의 양극분열을 뜻한다고 봅니다. 이것을 나는 선생의 작품「사육」「기묘 한 일」「개인적 체험」등에서 봅니다. 이 작품들을 위시해서 선생의 문학은 「實存的 主體」 와 「他人과의 共生」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에〓그렇습니다. 「주체성」과 「공생」은 내 문학을 일관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대 일본제국의 천황이라는 일종의 신적 존재 아래서 참된 주체를 확립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의 미에서 문학이란 공생과 주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불구자 아 들이 태어난 이후 30년간 그와 어떤 형태의 공생을 할까 생각하며 문학을 해왔습니다. 그는 이 제 작곡가로서 자아 실현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와 나를 통해 「공생과 주체성」문제를 붙 들고 늘어진 것은 어쩌면 좁은 생각이었습니다. 이젠 큰 생각을 해보고 싶군요. 그래서 김선생 과 만나려했던 것입니다.

김〓오에선생과 나는 지금 개인과 개인으로서 만나고 있다기 보다는 2차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동북아의 새로운 미래를 논해 보려는 양국의 작가와 시인으로서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 동북아 는 역내 교역 급증등 큰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반면 환경파괴,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등의 문제도 겪고 있습니다. 이는 서구 근대 휴머니즘이 상정한「理性的 人間觀」과 관련되어 있습 니다. 「이성적 인간관」은 신으로부터는 독립했으나 자본주의와 기계문명 등에 의해 존재분열 을 겪어왔지요. 이에 대한 출구의 하나로 인간 속에 신령한 우주가 들어있다는 東學 佛敎 陽明 學등 동양사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지난 시대의 박정희 독재정권은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의 삶과 가 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어왔습니다. 이제 文民정부가 들어서 이러한 고민이 깊이와 넓이를 가질 시기를 맞았습니다. 현재 내 문학은 「내가 어떻게 물 풀 우주와 교감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의 해결책은 근대적 인간관을 극복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 니다.

 

오에선생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선생은 라블레적 인간관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중세의 왜소한 인간관을 극복하고 인간을 거대한 세계적 육체를 가진 존재로 파악하는 인 간관 말이지요.

 

오에〓라블레는 인간의 육체 회복에 대해 생각했지요. 인간의 육체 속에 근본이 있고 우주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이성보다 육체가 갖는 지혜를 더 중시했습니다. 라블레의 그로테스크 리 얼리즘은 민중의 웃음의 원리라고 합니다. 나는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서구화의 영 향은 역시 근대 휴머니즘입니다. 데카르트, 융, 뉴턴,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과학적 계몽주의 영 향을 받고 그런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合理主義는 유럽 안에서도 비판받고 있습니 다. 김선생이 동북아에만 둘레를 치려 하는데는 의문이 갑니다.

 

김〓서구 문화의 속에 있는 스피노자같은 예언자적인 흐름은 극히 제한돼 있습니다. 주류는 몽테 스키외 이후의 계몽사상가들 입니다. 특히 이들은 시간관과 결합해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며 미래에 목적의 왕국인 유토피아가 있어서 모든 문명이 이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은 것은 빈곤의 탈출등 많이 있지만 인간성의 상실과 자연파괴와 같은 부정 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내가 구태여 동북아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여기에 내장돼 있는 영성적 인 靈肉一體의 우주관이 서양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華嚴經의 광대한 세계관을 서양에서는 발 견할 수 없습니다. 라블레의 육체 발견은 다분히 해부학적(분열적)이거나 생태학적(통합적)인 간인데 이것이 아니라 영적 그물망 체계로서의 인간육체 발견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동 학의 인간관에서 우리는 이것을 발견합니다.

 

문명의 대세가 아시아로 이동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문명이 내부의 보편성으로부터 발화하지 않고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 서 있다면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의 작품 「개인적 체험」에서 버드가 아들과의 공생 가능성을 찾음으로써 인류 보편적인 재생 가능성 을 찾는 것 같은데요. 공생이 다만 나와 타자 사이의 「拘束的 共生」에 그칠 때는 문제가 있 다고 봅니다. 자아의 변화와 함께 아들과의 공생이 자연스럽게 되고 생명의 실존적 가치도 발 견한 것 같습니다. 이점이 중요할텐데요.

 

오에〓당신은 하나의 우주를 완성시키고 있는 느낌입니다. 나와는 매우 다르군요. 나는 세계를 구 축한다는 것보다는 자신의 세계를 확산함으로써 자신을 無化시켜 왔습니다. 나라는 작은 마을 안에 우주가 없는가 고민하던 중 당신의 글을 읽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이 아시아에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세계의 온마을에다 중심이 있을 뿐입니다. 동학 역시 마찬가집니 다. 유럽인들도 그럴것입니다. 김선생은 동학이라는 커다란 기댈 바위를 갖고 있습니다. 일본인 은 그렇지 못합니다. 일본인은 이러한 바위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저의 작업도 바위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김〓오에선생과 나는 몇가지 기본 관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일치하 는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오에〓일본에 오셔서 다시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진섭(金晋燮, 1906 - ?, 청천·廳川)

 

· 전남 목포생. 일본 호세이대학 독문학과 졸

· 수필문학의 개척, ‘해외문학’ 연구회 동인으로 외국 문학 소개에 기여

· 1930년 모송론(母頌論)을 발표하면서 본격 수필을 씀

· 사색적이고 철학적 수필을 많이 씀.

· 수필집 : [인생예찬](47년), [생활인의 철학](48) 등

  김진섭문학비(전남 목포시 남교동) : 문학비 내용 ‘이곳 목포는 1920년대부터 한 국문학을 가꾸며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 등을 남긴 청천 김진섭 선생의 고향임’

---  수필 <생활인의 철학>, <백설부>(1947)

 

김천택(金天澤, ? - ?, 남파·南坡)

 

· 숙종·영조 때 평민 출신 가인(歌人)

· 벼슬은 포교(捕校)에 그쳤으나, 영조 4년(1728)에 시조집 [청구영언] 편찬.

· 김수장 등과 ‘경정산가단’을 만들어 후진 양성

· 단가 57수가 [해동가요]에, 30수가 진본 [청구영언]에 수록

· 작품세계 : 그가 지은 대부분의 작품이 부귀영화를 버리고 자연 속에 파묻혀 자유분방하게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인생을 즐기는 호탕한 생활 모습이 드러나 있다.

--- 󰃫 시조 <강산 좋은 경(景)을 ~ >, <흰구름 푸른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백구야 말 물어 보자 놀라지 말아스라>

 

김춘수(金春洙, 1922 - )

 

· 시인. 경남 충무생. 경기중학 졸, 일본대학 예술원 창작과 졸업

· 한국시인협회장(1958), 제7회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1959)

· 광복 후 <애가(哀歌)> 발표 후, 첫시집 [구름과 장미](1947) 통해 등단.

· 작품경향변화 : 주지적 서정을 독특한 수법으로 형상화. 릴케의 경향과 유사한 상 징시의 경 향 ⇨ 의미적 시(<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 설명, 의미적 요소 배제

· 시집 [구름과 장미](1947), [늪](1949),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 음](1959) 등.

· ‘인식의 시인’ - 시의 목표는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의 파악임

· 연작시 : <꽃>, <꽃을 위한 서시>, <꽃의 소묘>, <꽃 Ⅰ>, <꽃>

---  시 <꽃>, <꽃을 위한 서시>, <나의 하느님>, <능금>

 

󰏐 <나의 문학실험 2> 시인 김춘수씨

 

40년대 후반은 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습작기였다고 할 수 있다. 암중모색의 시기다. 남의 시를 모방하면서 어떻게 쓰면 시가 되는가 하는 것을 나대로 습득해가는 과정이었다.

 

50년대로 접어들자 나에게 비로소 길이 열리는 듯 했다. 나는 남의 시의 압력으로부터 풀려났다. 그러자 내가 시도하게 된 시는 관념적인 색채를 띠게 되고 몹시도 과작이 되어갔다. 1년에 한 편 정도가 고작이었다.

 

꽃 연작시에 있어서의 꽃은 단지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꽃에 빗대어 관념(사상이나 철학)을 드러내려고 했다. 나는 그때 실존주의 철학에 경도되어 있었고, 학생때 읽은 릴케의 관념시가 새삼 새로운 매력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60년대로 접어들자 시에 대한 또 한번의 회의와 반성이 왔다. 한 3~4년동안 새로운 연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무렵 시는 관념으로 굳어지기 전의 어떤 상태가 아닐까 하는 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관념을 의미의 세계라고 한다면 시는 의미로 응고되기 전의 존재 그 자체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시에서 관념을 빼는 연습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이 한 3~4년 걸렸다.

 

시에서 관념, 즉 사상이나 철학을 빼자니 문체가 설명체가 아니고 묘사체가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존재의 모습)을 그린다. 흡사 물질시의 그것처럼 된다.묘사라는 것은 결국 이미지만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때의 이미지는 서술적이다. 나는 이미지를 비유적인 것과 서술적인 것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서술적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를 위한 이미지다. 말하자면 이미지가 무엇을 비유하지 않는 이미지다. 무엇을 비유한다고 할 적의 무엇은 사상이나 철학, 즉 관념이 된다. 그러나 서술적 이미지는 그 배후에 관념이 없기 때문에 존재의 모습(사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즉 그 이미지는 순수하다.이리하여 나는 이런 따위의 이미지로 된 시를 순수시라고도 하고, 무의미의 시라고도 하게 되었다.

 

무의미한 관념, 즉 사상이나 철학을 1차적으로는 시에서 빼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미지가 아무리 순수하게, 즉 서술적으로 쓰인다 해도 이미지는 늘 의미, 즉 관념의 그림자를 거느리게 된다. 이리하여 이미지도 없애야 되겠다는 극단적인 시도를 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내 무의미 시의 둘쨋번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를 없애고 리듬만이 남게 한다. 흡사 주문과 같은 상태가 빚어진다. 음악을 듣듯 리듬이 빚는 어떤 분위기에 잠기면 된다.

 

김현승(金顯承, 1913-1975, 다형·茶兄)

 

· 전남 광주 출생.

· 평양 숭실중학 및 숭실전문학교 문과 졸업

(목사인 아버지가 평양에서 목회활동을 했기에 그곳에서 수학)

·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 양주동의 인정을 받고, 1934년 [동아일보]에 발표하 면서 데뷔.

· 일제 치하에서는 시작활동을 않고 거부하다가 광복후 재활동

· 기독교적 주제시를 많이 씀.

· 시적 경향

- 초기시 : 자연예찬과 감상어린 서정시.

- 후기시 : 존재의 고독과 구원을 노래.

· 시집 <김현승 시초>(1957),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절대고독 >(1970)

 

-유적지

1) 다형김현승시비(숭실대학교 교정) : ‘가을의 기도’ 새김

2) 다형김현승시비(광주 무등산 소재) : ‘눈물’ 새김

---  시 <눈물>, <가을의 기도>, <플라타너스>, <견고한 고독>

---  김광섭과 김현승의 비교 <김광섭>

 

󰏐 김현승 시의 특색

 

① 모더니즘과는 무관

그의 시는 서구의 몰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모더니즘’의 유행(--- 󰃫 <문예사조> 중 ‘모더니즘’) 을 뒤쫓지 않고 있다.

 

② 인간만을 위한 자연

그의 시는 정경(情景)과 묘사(描寫)의 이미지즘과 무관하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자연, 그리고 인간 그 자체보다도 이미지즘은 자연과 그 속에 융화된 인간을 그림으로써 고통하고 고뇌하는 인간을 시에서 소외시킨다. 그러나 김현승의 주제는 인간에 한정되어 있다. 그의 자연은 김광균의 복고주의적 자연도 아니며, 장만영의 즉물적 자연도 아니다. 그의 자연은 인간의 유한성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초월에의 욕구를 보여주는 자연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만을 위한 자연이다.

 

③고독, 프로테스탄트의 자기고뇌-각성을 주제로 함

그래서 그의 시는 철저한 자기 부정도 철저한 자기 망각도 보여지지 않는다. 그의 시의 품격은 엄격하게 언어를 절제하고 그 절제된 언어로서 그의 고통스러운 삶을 표한하는 데서 얻어진다.

 

④관념어의 많은 사용

유치환의 그것처럼 과거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서유럽적인 것이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관념어들이다. 또한 그는 성서적 비유와 경귀, 성경고사를 많이 인용한다. 이 때문에 비기독교인인 독자들에게 그의 시가 관념적으로 비치는 것이다.

 

까뮈(Albert Gamus, 1913-1960)

 

· 알제리아 태생의 프랑스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 철학자

· 아버지는 프랑스인, 어머니는 스페인인

· 1936년 알제리아 대학 철학과 졸업

· 인간의 위엄은 모든 위자(慰藉)를 거부하고 자기 숙명의 부조리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희 망, 영원, 신을 부정함에 있다고 생각함. 극계 및 저널리즘에 활약 제2차 대전때는 반독일운동 에 참가하여 지하 신문을 발간.

· 1942년 [異邦人]을 발표하여 고독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반항을 표현, 당시의 혼란 과 프랑스 에 이상적 반향과 공감을 불러 일으킴.

· 기타 작품, 소설 [페스트](1947)

·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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