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난자 논란과 19세기 생물학의 과오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난자 논란과 19세기 생물학의 과오 / 도정일

 

 

 

52년 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이루어낸 디엔에이(DNA) 구조 발견이 지금은 󰡐20세기의 가장 획기적인 과학적 사건󰡑이라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 그 연구의 󰡐획기성󰡑을 간파하고 있었던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10명도 안 되었다고 한다. 1953228, 발견이 이루어지던 날, 흥분한 크릭은 케임브리지 대학 󰡐󰡑(pub)으로 달려가 󰡒우리가 생명의 비밀을 풀었다󰡓고 외친다. 그러나 그 중대성을 세상이 인식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다.

 

황우석 교수팀이 지난 6년간 잇따라 내놓은 연구 성과들도 왓슨-크릭이 터놓은 󰡐생물학의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사건들이다. 왓슨과 크릭에 주어졌던 무관심에 비하면 황 교수팀이 지난 2년 동안 내놓은 연구 성과들은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황우석 시리즈󰡑1999년 그가 복제 소를 탄생시킨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세계가 깜짝 놀란 것은 2004년의 󰡐복제배아󰡑 만들기와 그 배아로부터의 줄기세포 추출이다. 1년 뒤인 20055월 그는 복제배아에 환자의 체세포 핵을 주입해서 치료용 줄기세포를 얻는 데 성공했음을 세계에 알리고 8월에는 복제 강아지 󰡐스너피󰡑(Snuppy)를 탄생시켜 또 한 번 뉴스의 초점 인물이 된다. 복제가 가장 어렵다는 개를 원판 그대로 복제해냄으로써 그는 일종의 󰡐마술사󰡑 같은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주기에 이른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기술복제시대󰡑는 황 교수의 손에서도 그 가장 현란한 실현의 순간들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황 교수는 마술사가 아니다. 그의 연구 성과들은 땀으로 얻어진 것이지 마술사의 지팡이나 도깨비 방망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복제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얻어내는 작업에 대한 윤리적 찬반 논의를 떠나서 말하면 황 교수팀이 연구에 쏟아 부은 열정, 정성, 끈기와 땀방울은 세상의 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우리가 이만한 연구자, 이만한 과학자를 갖게 된 것도 자랑할 만하다. 이런 성취의 영광은 누구보다도 황 교수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에는 항상 어두운 그늘이 따른다. 복제배아는 키우면 그대로 복제인간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에 관계된 근본적인 문제가 따라 붙는다. 복제배아는 그 자체로 생명체다. 그런데 거기서 줄기세포를 뽑아내고 나면 생명체인 배아는 파괴된다. 생명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줄기세포 연구에 얽힌 근본적인 윤리적 쟁점들이다. 이런 논란들을 피해 가기 위해 복제배아를 사용하지 않고도 줄기세포를 얻어내려는 이른바 󰡐성체 줄기세포󰡑 연구 작업들도 외국 대학들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다.

 

이번 황 교수 팀이 휩싸이게 된 윤리논란은 줄기세포 연구 그 자체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윤리 문제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난자를 확보하는 절차와 방법이 윤리적으로 온당했는가에 대한 논란이다. 지금까지 나온 해명 자료들을 종합해서 보면, 난자 수집의 과정에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국면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면 황 교수 자신이 󰡐사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 사안은 법의 차원 아닌 윤리의 차원에 있다. 윤리적으로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듯 난자 제공자들에게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난자 공여에 응한 여성들이 뭐가 뭔지 알고 채취에 동의했는가, 그들에게 충분한 사전 설명이 주어졌는가 같은 문제들이다. 난자 채취의 목적, 연구의 성격, 제공자들에게 닥칠 수 있는 고통과 희생에 대한 제공자들의 충분한 인식 없이 난자 채취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여성의 육체를 실험용 모르모트로 사용했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번 사태를 보면 난자 수집 과정에 이런 윤리적 부적절성과 부주의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당당하게 대면해야 할 반성과 성찰의 요목이지 애국심의 유무로 대응할 사항이 아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문제를 인정하고 시정에 나서야지 아무 문제도 없다고 우기거나 󰡒그만한 희생쯤이야󰡓의 논리로 문제를 깔아뭉개어서는 안 된다. 여러 쟁점들에도 불구하고 줄기세포 연구가 허용되는 이유는 난치병 치료 자체가 생명보호라는 높은 가치를 실현한다는 윤리적 근거 때문이며 이 근거가 여타의 윤리적 쟁점들을 앞지르기 때문이다. 이런 윤리적 긍정을 떠나면 줄기세포 연구는 의미가 없다. 이 점을 깊이 인식한다면, 줄기세포 연구는 난자 확보의 방법 같은 문제들에서도 당연히 윤리적 하자를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생명과 관계된 󰡐과학의 길󰡑이다.

 

지난 한 세기, 인간은 과학기술에 의한 반인간적 반문명적 파괴 행위 때문에 막대한 고통을 받아야 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유대인 집단수용소에서 󰡐죽음의 천사󰡑 노릇을 했던 나치 의사 요셉 멩겔레,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무자비한 생체실험, 북미 인디언을 대상으로 한 미국 백인 사회의 원주민 씨말리기 작전 같은 아픈 과거를 의학기술사는 갖고 있다. 지금은 생물학이 대중적 갈채를 받으며 생물학의 전성시대를 누리고 있지만, 19세기 생물학은 제국주의와 백인중심주의에 봉사했던 수치스런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는 배타적 국수주의, 편협한 국민주의, 맹목적 애국심의 포로가 될 단계는 벗어나야 한다. 반성할 일이 있으면 냉철히 반성하고 생명과학 연구에 필요한 윤리적 기준을 선도적으로 마련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성숙한 나라, 생명과학을 할 만한 나라임을 세계에 과시하는 길이다. 과학자라 해서 어찌 야심이 없겠는가. 왓슨과 크릭을 이끈 제1의 동력도 󰡐야심󰡑이다. 그러나 이 긍정적 야심이 편협한 국익론, 성급한 성과주의, 방법만 있으면 뭐든 하자는 식의 맹목적 기술주의와 도구주의에 고삐잡히면 과학 한국의 위상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개인이건 국가이건 할 수 있다고 해서 무슨 일이건 다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과 사회의 윤리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 사회는 반성할 일이 많다. (한겨레신문)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