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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식민지와 그 이데올로기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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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식민지와 그 이데올로기

 

 

자연주의 계열의 그림은 우리 미술계에서 그 인맥과 뿌리가 깊을 뿐더러, 많은 감상층감상자와 구매자를 포함하여을 갖고 있다. 이는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그림 양식으로서, 감상자뿐만 아니라 미술가를 지망하는 사람들도 가장 많이 선호한다.

 

우리 나라 자연주의 계통의 그림은 인상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도구에서부터 재료기법미학 및 내용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인상파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자연주의 미술을 논하기 위해서는 인상파의 미학을 그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서구의 많은 미술사조 중 유독 우리 나라에 인상주의가 수용되고 그것이 아카데미즘이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굳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주의 그림은 고급스러운 액자 속에 고요히 담겨져 있다. 현실과 그만큼 먼 차원의 세계라는 뜻이다. 그것들은 두꺼운 액자 속에서 자족적이고 행복하다. 액자의 바깥 세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 그 속에 그려진 것들은 현실과는 저만큼 물러나 있다. 액자 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 생각하고 있는지 졸고 있는지 쉬고 있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며, 무엇을 애써 생각하거나 뚜렷이 어떤 것을 쳐다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완된 시선 속에는 일말의 불만도 갈등도 욕망도 진실도 거짓도 윤리도덕도 빈부도 모두 무장 해제되어 있다. 꿈길 같은 아른한 세계만 있을 뿐, 땀 흘리는 노동으로 인생을 가꾸는 삶의 애환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구체적 삶의 모습이 빠져 있는 것이다. 가난조차도 자족적인 것으로 치환된다. 온통 평온한 세상뿐이다. 전쟁도 기아도 죽음도 없고 오직 생의 안일한 일상만이 그들의 표현 대상이다. 지금 누가 어떤 상태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는다. 세상은 평화롭고 한가하며 삶의 악다구니가 있을 수 없는, 아니 결코 없는 그런 곳도 있을 수 있느냐는 듯 휴식의 공간으로만 그려 낸다.

 

무엇 때문에 꽃이나 과일은 꼭 그렇고 그런 모습으로만 그려지는가. 복잡한 세상사가 그렇게 간단히 환원되고 추상화될 수는 없다. 이것은 바로 시각의 교정이다. 인상주의가 그려내는 세계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 즉 한 개인을 위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나 하나만의 소유주를 위한,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의미가 있는, 내가 쳐다봄으로써 비로소 존재 가치가 있는, 나 하나만을 위한 나의 예속물이라는 의미다. 꽃도 풍경도 여자도 나의 장식품일 뿐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상주의는 감상자 즉 그림의 소유자를 위하여 온갖 형식을 두루 갖추고 있다. 가로와 세로의 비례, 화면 속에서의 주종 관계, 감상에 필요한 거리일정한 거리 이상을 접근하여 보아야 할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한등 철저히 봉사 정신을 발휘하여 소유자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고안되었다.

 

휴식 공간은 생산의 공간이기도 하다. 서양의 인상주의에서 표현된 자연은 그 결과에 있어서는 휴식의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본래 자연은 인간을 둘러싼 미지의 공간인간을 위한 자연으로 가꿀 것인가 하는 과제가 부여된다으로 탐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소기의 일정한 목표에 도달함으로써 인상주의는 다른 개념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자연은 인간을 포함한 전체적 개념으로서의 자연으로, 그것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목적으로 되돌아감의 고향이다. 따라서 기법은 같으나 뜻이 다름으로 해서 한국의 인상주의는 지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 다른 뜻이 한 가지 형식으로 포괄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일 것이다. 서구 인상주의에서 표현된 자연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서정성을 바탕으로 불화와 갈등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여유와 무관심성은 재음미해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현실 도피적인 요소와 사실을 감추려고 하는 독소적 미학이 도사리고 있다.

 

인상주의 미술이 우리 나라에 등장한 것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식민 강권을 동원하여 문화 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인상주의를 수용하도록 하였다.

 

서구의 재편성 과정에서 인상주의 미술은 전혀 낡은 양식이었다. 산업 혁명과 시민 혁명 이후의 가장 평온했던 시기,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신흥 부르주아지들은 도시산업 혁명의 혜택으로 발전을 거듭했던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생산 기술의 발달과 자본의 축적, 새로운 사회 질서, 특히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등으로 그들은 여가를 즐길 수가 있었다. 인상파 미술은 이와 같은 배경과 요구에서 만들어진 당시 지배 계급신흥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기 위한 예술 양식이다. 사회의 제 문제가 중산층의 나른한 시각, 즉 감각주의가 극대화한 미술 양식이다. 세계의 실체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빛으로 환원한다는 것은 덧없음의 찰나의 미학, 즉 모든 것을 살아 있은 순간의 의미로만 해석하는 감각 우위의 세계관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만지고 쓰다듬는 붓 놀음, 그 중첩 효과, 유화의 끈적끈적한 점액질을 강조하는 화면 처리, 도상의 몽롱함, 보라와 핑크의 선정적 채색이 모두 관능의 감각이 아닐 수 없다.

 

서구의 미술 사조 중 이미 한물 간 전대의 양식인 인상주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한 것은 일본이 국내 사정상 자국민의 전제적 지배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는 조선의 식민화를 가속화하는 데 매우 유효하리라는 데서 나온 문화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의도대로 피지배 민족의 정서에 교묘히 접목되어 서정적 향토주의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는 선전을 통해 극소수이인성, 김인승, 심형구 등화가에게 엄청난 기득권을 주어 식민지 백성을 문화적으로 조작하였다. 인상주의가 우리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는 과정은 한국의 식민화 과정과 아주 일치한다. <임옥상 누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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