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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속에 비친 우정 / 김시습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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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속에 비친 우정 / 김시습

-남효온에게

 

 

 

며칠 전, 선생과 함께 하루종일 아름다운 자연 속에 노닐다가 맑은 개울가에서 작별하였소. 우리 사이에 오가던 감흥은 끝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빨리 헤어지게 되어 아직까지 마음의 미련을 못 버리겠소. 선생과 이별한 지 수일이 경과하도록 이 아름다운 자연과 문장, 그리고 술에 대한 의논을 할 사람이 없소이다. 이른바 사흘 동안만 도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면 혓바닥이 굳어진다고 하는데, 두어 봉우리 청산(靑山)과 한 조각 떠다니는 구름만이 청하지 않은 벗이 되고 말없는 짝이 되어 변함 없이 나와 마주하고 있소. 이것들이 모두 나의 십년 지우(知友)들이라오.

 

선생께서 계신 성중(城中)에도 이런 벗들이 있소? 선생은 만나서 신선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헤어진 뒤 고결한 인품을 흠모(欽慕)2)할 만한 무리를 날마다 접하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니 우습소이다.

 

말씀드릴 것은 지난 번에 만났을 때에 선생께서는 술을 끊었다고 하였소. , 하늘에 있다는 주성(酒聖:술을 주관하는 별)을 가두고, 과거에 술 취한 날들은 진시황의 구덩이에 넣어 불태워 버리고 싶다고 하였소. 그 의도는 훌륭하다면 훌륭하오. 저 폭군으로 유명한 하()의 걸()왕이나 은()의 주()왕도 술로써 망하였고, ()() 같은 나라의 선비들(죽림 칠현 등)도 이것 때문에 나라를 어지럽혔소말할 것도 없이 술은 만대에 경계할 물건이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변명할 만한 말은 있소.

 

술의 본래 임무는 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며, 노인을 봉양하고, 복을 비는 것이었소. 그러니 인간 생활에서 복을 빌자면 술이 꼭 필요했던 것이오. 술이 본래부터 사람을 나쁘게 만들어 패가 망신하는 도구로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뜻이오. 그리고 옛사람들은 술을 빚을 때에 쓴 술만을 만든 것이 아니라오. 맑고 순한 술도 만들고 달게 만든 단술도 만들어 그 종류를 다양하게 했던 것이오. 그것은 술에 취하여 이성을 잃고 난잡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소. 게다가 술을 먹는 데 예절을 까다롭게 정하여 술 한 잔씩을 나눈 뒤에 백 번씩 절을 하게 함으로써 종일토록 마셔도 취하지 않도록 하였소. 그러다가 그것도 부족하여 술을 먹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옛날 제왕들도 좌우에 감시하는 사람을 세워 놓고 술을 많이 먹는 것을 경계하였소. 이것은 고전인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에 전해 오는 사실이오.

 

그러면 우리가 술을 먹어야 하는 경우를 열거하여 봅시다. 제사를 지내면 음복(飮福)을 하여야 하고, 집을 지으면 낙성식(落成式)을 하며, 손님을 초대하면 환영식을 하고, 사람이 길을 떠날 때에는 환송연을 열지요. 활을 쏘는 데는 향사례(鄕射禮)가 있고, 시골 마을에는 향음주례(鄕飮酒禮)가 있으며, 집에서는 부모를 술로써 봉양하여야 하고, 오래도록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축수(祝壽)를 하는 예가 있소. 술을 가지고 우리가 행 해야 할 도리가 이렇게 많소이다.

 

이러하거늘 염치불고(廉恥不顧)하고 윗저고리를 벗어 던진 뒤에 함부로 지껄이며, 마치 짐승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더러 있소. 이것은 술의 본래 기능이 아니오. 이러한 사람은 술의 좋은 점은 이용하지 못하고 술 때문에 화를 자초하는 자들이오.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 때문에 술을 끊어 버린다는 것은 마치 밥을 짓는데 불을 때지 않겠다는 것과 같소. , 익은 밥을 한평생 먹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소. 그러니 술에 흠뻑 빠져서 패가 망신하는 것이야 논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술을 전혀 하지 않겠다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오. 군자가 지켜야 할 중용(中庸)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오.

 

만일 술을 끊는 것이 타당하다면,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술이 아무리 많더라도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하였고, 󰡒술로 인하여 때로 곤경에 빠질 때가 있었다.󰡓라고 하였겠소? 그리고 옛날 위무령공(威武寧公)은 술의 해()를 깊이 뉘우치고 이르기를, 󰡒석 잔만 마시면 정신이 혼미한데 어찌 그보다 더 많이 마시겠는가?󰡓 하였으니 위무령공도 술을 완전히 끊지는 않고 다만 삼가기만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오.

 

지금 선생께서 만일 술로써 지켜야 할 예절을 저버린다면 이는 임금이나 어버이를 버리고 종족을 멀리한 뒤에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살아야 가능한 것이오. 예절과 문물이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 살면서 옛사람이 가르치는 효도와 충성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일이오. 그래, 아무리 술을 한 잔도 안 마신다지마는 제사에 음복도 하지 않겠소? 잔치 자리에 가서 축하 술 한 잔도 안 마시겠소? 부모님을 봉양할 때에 음식 맛도 먼저 보지 않겠소? 그러니 절약한다든가 삼가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평생토록 완전히 금주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소. 선생의 생각은 어떠하오?

 

게다가 지난번에 내가 선생의 얼굴을 보니 옛날보다 더 여위었소. 기운도 부치는 것 같았소. 아니, 많이 초라해 보였소. 만일 내가 본 것이 맞다면 살아 계신 자당(慈堂)께서 반드시 근심하실 것이오. 옛날에 부모를 즐겁게 하려고 병아리를 놀리다가 일부러 자빠진 효자도 있다고 하지 않소? 효자가 어버이의 뜻을 거슬러서야 되겠소? 그러니 술을 금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은 효자가 취할 도리가 아니오. 사랑과 공경으로써 어버이를 섬겨야 된다는 교훈은 선생도 익히 아는 바이오. 그러니 넓은 도량으로 살펴보시오. (후략)

 

- 󰡐추강집(秋江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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