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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종류의 사랑에 대하여 -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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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종류의 사랑에 대하여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어떤 자비로운 운명이 어머니로부터, 즉 자궁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해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심지어 태어난 후에도 어린애는 태어나기 전과 거의 다르지 않다. 막 태어난 어린애는 대상을 인식하지도 못하며 아직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할 뿐더러 세상을 자기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지도 못한다. 갓난애는 단지 따뜻함과 음식이라는 긍정적인 자극만을 감지하지만, 그나마도 따뜻함과 음식을 제공하는 근원인 어머니를 구별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따뜻함이고 음식이며, 만족과 안전을 보장해주는 행복한 상태이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 단계는 자아 도취의 상태이다. 외부의 현실, 사람과 사물은 오직 신체의 내적 상태를 만족시켜 주는가, 아니면 실망시키는가에 따라 의미를 지니게 된다. 실제는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밖에 있는 것은 그 자체의 자질이나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욕구에 의해서만 현실로 인정된다.

 

어린애가 성장하고 발달하게 되면,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자각하게 된다. 젖을 먹는 데서 얻는 만족은 젖꼭지, 어머니의 가슴과 구별되게 된다. 결과적으로 어린애는 자기의 갈증과 만족을 가져다 주는 젖과 어머니의 가슴, 그리고 어머니를 각기 다른 실체로 경험하게 된다. 그는 그 밖의 많은 사물을 각기 다른 실체로, 그 자체의 존재를 가진 것으로 자각하는 것을 배운다. 이 시기에 그는 그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배운다. 동시에 어린애는 그것을 다루는 것을 배우게 된다. , 불은 뜨겁고 고통스러우며, 어머니의 몸은 따뜻하고 즐거우며, 나무는 딱딱하고 무거우며, 종이는 가볍고 쉽게 찢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린애는 사람을 대하는 것도 배운다. 예를 들면 내가 젖을 먹을 때 어머니는 웃을 것이고 내가 울 때 어머니는 나를 팔에 안을 것이며, 내가 배변을 할 때 나를 칭찬해 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경험들은 '내가 사랑 받고 있다'는 경험으로 요약되고 한데 모아진다. 나는 어머니의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나는 예쁘고 칭찬할 만하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 이를 좀더 일반적인 형태로 정식화하면, '나는 지금의 나로서 사랑 받는다' 혹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나이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에 의해 사랑 받는다는 경험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내가 사랑 받기 위해서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일이라고는 존재하는 것, 어머니의 자식이 되는 것뿐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커다란 복이고 평화이며 획득할 필요도, 보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의 무조건적인 특징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보상할 필요도 없으며, 획득하거나 만들어 내거나 통제할 수도 없다. 만약 어머니의 사랑이 거기에 있다면, 그것은 은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없다면, 그것은 모든 아름다움이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 것과 같다. 어머니의 사랑을 만들어 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여덟 살 반이나 열 살 이전의 어린이들 대부분에 있어서의 문제는 거의 전적으로 '사랑 받는' 문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 받는 문제이다. 이 연령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는 아직 사랑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사랑 받는 것에 대해 즐겁고 기쁘게 반응할 뿐이다. 어린이의 성장 단계 가운데 이 시기에 이르면 새로운 요소, 즉 자기 자신의 활동에 의해 사랑을 만들어 낸다는 새로운 느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어린이는 무엇인가를 어머니 혹은 아버지에게 주려는, 시나 그림, 그 외 어떤 것이든 만들어주려는 생각을 하게된다. 어린이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사랑에 대한 개념이 사랑 받는 것에서 사랑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출발에서부터 성숙한 사랑에 이르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결국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고, 더 이상 타인이 자신의 욕구 충족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욕구가 자기의 욕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되고 사실상 더욱 중요하게 된다.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만족스럽고, 더 즐거운 것이 되며, 사랑하는 것이 사랑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된다. 사랑함으로써 자기 도취와 자기 중심성에 의해 구축되었던 고독과 고립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는 새로운 일치감, 참여감, 일체감을 느낀다. 오히려 그는 사랑 받음으로써 받는 데 의존하는 것보다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만들어 내는 잠재력을 느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작고 무기력하며 병든, 혹은 '착한' 아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유아적인 사랑은 '나는 사랑 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을 따른다.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는 원칙을 따른다. 미성숙한 사랑은 '나는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능력의 발달은 사랑의 '대상'의 발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생후 몇 달, 또는 몇 년이 지난 어린이는 그의 어머니에 대해 가장 밀접한 애착을 갖고 있다. 이러한 애착은 탄생 이전에 생겨난다. 즉 어머니와 어린이는 두 사람이지만 여전히 하나일 때부터 생겨난다. 탄생은 어떤 면에서 보면 상환의 변화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변화는 아니다. 이제 자궁 밖에서 살고 있는 어린이는 아직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매일 독립적으로 되어간다. 즉 걷는 것, 말하는 것, 자기 스스로 세계를 관찰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생명에 관련된 중요성을 점차 상실해가며, 대신 아버지와의 관계가 점점 중요해진다.

 

어머니에서 아버지로의 전환을 이해하려면 모성애와 부성애 사이에 나타나는 성질에 있어서의 기본적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모성애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모성애는 그 성격상 무조건적이다. 어머니는 갓난애가 어떤 특별한 조건을 채워 주어서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기대에 따라 성장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아기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물론 내가 여기서 말하는 모성애나 부성애는 마르크스 베버적인 의미에서는 '이념형', 융의 개념으로는 전형에 해당하는 것이며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머니가 된 사람이나 아버지가 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아버지의 원칙과 어머니의 원칙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바람 가운데 하나에 상응하는 것이다. 반면에 장점이나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 받는 것에는 항상 의심의 여지가 있다. 즉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남게 되며,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항상 있다. 게다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상대방을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에 받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분석해 보면 결국 사랑 받는 것이 아니라 이용당하고 있다는 씁쓸한 감정을 흔히 남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모성애를 매우 동경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부분의 어린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는다(어느 정도까지는 뒤에서 언급할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성인의 바람은 훨씬 더 충족되기 어렵다. 가장 만족할 만한 발달 과정에서는 성인의 이러한 동기는 정상적인 성애의 한 요소로 남아 있게 된다. 흔히 이것은 종교적인 형태로 표현되기도 하며, 그보다 더 자주 신경증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상이하다. 어머니는 우리가 생겨난 고향이고 자연이며, 땅이요 바다이다. 반면에 아버지는 그러한 자연적인 가정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생후 몇 년간은 어린이와 거의 관계를 맺지 않으며, 이 기간에 있어서 어린이에 대한 아버지의 중요성은 어머니와 비교될 수가 없다. 하지만 비록 아버지가 자연적 체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 존재의 다른 곳 즉 사상 과 인간이 만든 사물, 법과 질서와 훈련, 여행과 모험의 세계를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린이를 가르치고, 그에게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기능은 사회 경제적 발달과 관련된 기능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사유 재산이 생겨나고, 그 사유 재산이 아들에 의해 물려받게 될 때,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남겨줄 수 있는 아들을 찾기 시작한다. 자연적으로 그 상속자는, 아버지가 자기의 계승자가 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그를 가장 많이 닮고, 결과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이 원칙은 '너는 내 기대를 충족시키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널 사랑한다' 라는 것이다. 조건부의 아버지의 사랑에서도, 우리는 무조건적인 어머니의 사랑처럼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볼 수 있다. 부정적인 측면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은 보답 받기를 바라는 것이며, 기대했던 바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잃게된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사랑의 특징은, 순종이 주요 덕목이며 불순종은 중요한 죄가 되어 벌로 그 사랑을 잃게 된다는 점이다. 긍정적인 측면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부이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며 일해야 한다. 즉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는 달리 나의 통제 영역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에 대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태도는 어린이 자신의 욕구와 일치한다. 유아는 생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여섯 살이 지나야 아이에게는 아버지의 사랑과 권위와 지도가 필요하게 된다. 어머니는 생명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기능을 맡고 있지만, 아버지는 어린이가 태어난 특별한 사회가 던져 주는 문제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상적인 경우에 있어서 어머니의 사랑은 아이가 자라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으며 무력감을 조장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생()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하며, 지나치게 불안해서도 안되고 어린이에게 자기의 불안을 심어 주어서도 안된다. 어머니의 삶의 일부는 아이가 독립적이어야 하고, 결과적으로 자기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희망이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원칙과 기대에 의해서 인도되어야 한다. 그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라기보다는 인내심이 많고 관용적이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자라는 어린이에게 점증하는 능력감을 심어 주어야하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권위가 되도록, 아버지의 권위 없이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성인이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단계에까지 이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숙한 인간은 어머니다운 양심과 아버지다운 양심을 지니고 있다.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떤 못된 행동이나 범죄도 나의 너에 대한 사랑과, 너의 인생과 행복을 바라는 내 소망을 빼앗을 수는 없다" 라고 말하며, 아버지다운 양심은 "너는 잘못했다. 넌 네 실수의 결과를 인정해야만 한다. 내가 널 좋아하게 되길 바란다면 넌 네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성숙한 인간은 외부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이며, 자기 내부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형성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프로이트의 초자아에 대한 개념과는 반대로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편입'시키는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어머니다운 양심을 형성하고, 이성과 판단에 아버지다운 양심을 구축함으로써, 그들을 내면에 간직한다.

 

게다가 성숙한 사람은 아버지다운 양심과 어머니다운 양심이 서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두 양심을 가지고 사랑한다. 만약 아버지다운 양심만을 갖고 있다면 그는 거칠고 비인간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또한 어머니다운 양심만을 갖게 된다면, 그는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발달을 방해하기 쉽다. 이렇게 어머니 중심의 애착에서 아버지 중심의 애착으로 발달하는 과정 속에, 그리고 양자가 궁극적인 종합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정신 건강의 바탕과 성숙의 성취가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발달의 실패는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이 흐름의 사상을 더 깊이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간단히 몇 가지 언급을 덧붙이면 그 말의 뜻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신경증이 일어나는 한 가지 원인은 한 소년이 애정은 있지만 지나치게 방임하거나 군림하는 어머니와 약하고 무관심한 아버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경우 그는 초기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 머물러 있으며,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무기력하며 수용적인 인간, 즉 받기를 좋아하고 보호받고 보살핌을 받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버지다운 자질 즉, 훈련과 독립, 그리고 자신이 삶을 주도하는 능력이 결핍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어머니'를 찾으려 하며 때로는 여자에게서, 때로는 권위와 힘의 영역에 있는 남자에게서도 어머니를 찾으려고 한다. 반면에 어머니가 냉정하고 무관심하거나 지나치게 간섭한다면, 그는 어머니의 보호에 대한 욕구를 아버지에게,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상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그 결과는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일방적으로 아버지 지향적인 인간, 즉 법과 질서, 그리고 권위의 원리에 충실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사람으로 자라날것이다. 이러한 발달은 아버지가 권위주의적이고 지나치게 아들에 대해 애착심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강화된다. 이러한 모든 신경증 발생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은 신경증이 심각한 경우에는 아버지다운 것이든 어머니다운 것이든 한 가지 원칙은 발달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 자기 외부에 있는 사람이나 내부의 이러한 역할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좀더 살펴보면, 강박 신경증과 같은 특정 유형의 신경증은 아버지에 대한 일방적인 애착에 근거를 두고 나타나며, 히스테리와 알코올 중독,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인생을 현실주의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의 결핍으로 인한 신경증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하는 태도에서 생겨난 것이다.

 

 

사랑의 대상

 

사랑은 근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와의 관계를 결정 짓는 '태도'이며 '성격의 방향'이다. 만약 어떤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정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사랑받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랑의 강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것과 똑같은 오류이다.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찾아야 할 것은 올바른 대상이 전부이며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저절로 진행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마치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이 그 기술은 배우지도 않고 단지 적당한 대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그것을 찾게 되면 멋지게 그리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에 비유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이 세계를,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또한 나는 "난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 이 세계를,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그렇지만 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태도 결정이라는 주장은 사랑 받는 대상의 종류에 따라 구분되는 여러 종류의 사랑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형제간의 사랑

 

모든 유형의 사랑의 바탕에 깔려 있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사랑은 형제애이다. 형제애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책임과 보살핌, 존경, 지식과 더불어 그의 삶을 심화시키려는 소망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형태의 사랑이다. 형제애는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서, 배타성이 전혀 없다는 점으로 특징지어진다. 만약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시켜왔다면, 나는 내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형제애를 통하여 모든 인간과의 일치, 인간적 유대의 경험이 가능해진다. 형제애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재능이나 지능, 지식의 차이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인간적 내면의 동일성애 비하면 매우 하찮은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주변에서 한가운데로 침투해들어 갈 필요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주로 겉으로만 인식한다면 차이점, 그것도 우리를 갈라놓는 차이점만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지만 중심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우리의 동일성, 즉 우리 모두는 형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중심과 중심과의 관계는 주변과의 관계와는 달리 '중심적 관계'이다. 시몬느베이유(Simone Weil)가 이를 너무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똑같은 말이라도(예를 들어 한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라고 말하는 것) 그 말을 듣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평범한 것일 수도, 특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의지 없이 진행되는, 인간 존재의 핵심에 있는 영역의 깊이에 따라 좌우된다. 또한 기이한 일치에 의해서 이 말들은 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있는 똑같은 영역에까지 도달한다. 따라서 듣는 사람은 약간의 분별력만 있다면 그 말의 가치를 파악할 수 있다."

 

형제애는 동등한 존재간의 사랑이다. 하지만 아무리 동등한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는 반듯이 '동등'하지가 않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는 모두 도움을 필요로 한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당신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움의 필요성이 한 사람은 무력하고 다른 사람은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력함은 일시적인 상태이며, 혼자의 힘으로 서서 걸을 수 있는 능력은 영원하며 보편적인 상태이다.

 

그렇지만 무기력한 사람, 가난한 사람,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형제애의 시작이다. 자기의 혈육을 사랑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동물도 자기 새끼를 사랑하며 돌보아 준다. 무력한 사람은 생명이 주인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주인을 사랑한다. 어린이는 부모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부모를 사랑한다. 오직 어떤 목적과 관계가 없는 사랑 속에서만 사랑은 펼쳐지기 시작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이 사랑해야 할 주요 대상은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라의 적, 즉 이집트인과 에돔인이라고 나타나 있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무력한 사람에 대해 동정심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키게 되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연약하고 위태로운 인간 존재를 사랑한다. 동정은 지식과 동일시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너희들은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이방인의 마음을 알고있다.......그러므로 이방인을 사랑하라 !"

 

 

모성애

 

우리는 이미 앞에서 모성애와 부성애의 차이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모성애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루었다. 거기서 말했던 것처럼, 모성애는 어린이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러한 정의에 대해 중요한 것을 한 가지 첨가해야 하겠다. 어린이의 삶에 대한 긍정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어린이의 생명을 보존하고 성장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보살핌과 책임이며, 다른 하나는 단순한 보존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이에게 삶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는,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것이 좋고 어린 소년 혹은 소녀라는 사실과 이 땅 위에 있다는 것이 좋다는 느낌을 심어 주는 태도이다. 모성애의 이 두 가지 측면은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 매우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단순한 보살핌 및 긍정과 일치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최소한의 요구를 초월한다. 매일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나서 하느님은"매우 좋구나" 라고 말한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모성애는 어린이에게 태어났다는 것은 좋은 일이며, '생명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살아있고자 하는 희망을 심어 준다. 이와 비슷한 사상은 다른 성서 구절에 나타난 상징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약속된 땅(땅은 항상 어머니의 상징이다)'젖과 꿀이 넘치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젖은 모성애의 첫 번째 측면, 즉 보살핌과 긍정의 상징이다. 꿀은 생명의 달콤함, 생명에 대한 사랑과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대부분의 어머니는 젖을 줄 수 있지만, 오직 소수만이 꿀도 줄 수 있다. 꿀을 주기 위해서 어머니는'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며,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어린이에 대한 영향은 거의 과장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불안과 마찬가지로 감염된다. 이 두 가지 태도는 어린이의 전인격에 않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사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만 받은 사람과 '젖과 꿀'을 받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

 

동등한 존재들 사이의 사랑인 형제애나 성애와는 달리, 어머니와 자식간의 관계는 성격상 불공평한 관계이다. 즉 한 사람은 전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며 다른 한 사람은 도움을 준다. 모성애를 지고의 사랑이며 모든 정서적인 유대 가운데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이러한 이타적이고 비이기적인 성격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모성애는 조그마한 아기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라는 어린이에 대한사랑에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아이가 작고, 여전히 자기에게 의존적일 때만 사랑을 주는 어머니이다. 대부분의 여자는 아이를 갖기 원하며,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며 행복해하고 열심히 보살피고자 한다. 이 점은 어머니가 아기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나 만족의 표현을 제외하고는 아기에게서 어떤 것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러한 태도는 여자뿐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본능적 장치에 부분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본능적 요소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건 간에, 이러한 유형의 모성애에 해당되는 특별히 인간적인 심리학적 요소도 있다. 모성애에서 자아도취적 요소를 찾아볼 수도 있다. 아기가 아직 어머니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한, 어머니의 사랑과 열중은 자아 도취적인, 만족일 수 있다. 또 다른 동기는 어머니의 힘 또는 소유에 대한 희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력하고 어머니의 의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어린이는 지배적이고 소유욕이 강한 여자에게는 자연히 만족스러운 대상이다. 이러한 동기들이 아무리 흔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들은 아마 초월을 향한 욕구라고 불릴 수 있는 것보다는 덜 중요하고 덜 보편적인 것이다. 초월에의 욕구는 인간이 자기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 즉 인간은 피조물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으며 던져진 주사위로서의 자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인간은 창조자로서, 즉 창조되었다는 주동적인 역할을 초월한 존재로서 느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창조의 만족을 느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쉬운 방법은 어머니의 창조물에 대한, 즉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보호와 사랑이다. 어머니는 아기를 통해 자신을 초월하고, 아기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의 삶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해 준다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신을 초월할 수 없는 남자에게 있어서는 사물이나 사상을 창조함으로서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

 

하지만 어린이는 자라나게 마련이다. 어린이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 어머니의 젖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결국 완전하게 분리된 인간 존재가 된다. 모성애의 주요 본질은 자라는 어린이를 보살핀다는 것이며, 그것은 어린이를 어머니에게서 분리시키기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성애와 근본적 차이를 드러낸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 모성애에서는 하나였던 두 사람이 분리된다. 어머니는 참아야 할뿐만 아니라 그 분리를 원하고 도와 주어야 한다. 바로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 되며 비이기심 즉, 모든 것을 주고 사랑 받는 아이의 행복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능력을 필요로 하게 핀다. 자아도취적이며 지배적이고 소유욕이 강한 여자는 어린이가 어릴 때만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진실로 사랑을 주는 여자, 받는 것보다 주는 데서 더 행복감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확고히 서있는 여자만이 분리의 과정을 밟고 있는 어린이에게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자라는 어린이에 대한 모성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은 아마도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사랑일 것이다. 어린 아기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일이 쉽기 때문에 자칫 기만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때문에 어머니가 사랑할 수 있을 때만, 즉 남편, 다른 아이들, 이방인, 모든 인간 존재를 사랑할 수 있을 때만 진실로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사랑을 할 수 없는 여자는 어린이가 아주 어릴 때만 다정한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분리를 인내하는 의지, 즉 분리된 이후에도 계속 사랑을 줄 수 있는 의지를 시험받을 때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육체적 사랑

 

형제애는 동등한 사람 사이의 사랑이고, 모성애는 무기력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이 양자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한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만일 내가 내 형제를 사랑한다면, 나는 내 형제들 모두를 사랑한다. 내가 내 자식을 사랑한다면, 내 모든 자식들을, 아니 더 나아가서 모든 어린이들을,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사랑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성애'인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융합, 다른 한 사람과의 일치를 갈구하는 것이다. 성애는 성격상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성애는 아마 존재하는 여러 형태의 사랑 가운데가장 기만적인 형태일 것이다.

 

우선 성애는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경험, 즉 그 순간까지도 존재했던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갑자기 무너져 버리는 것과 흔히 혼동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지적했던 바와 같이 갑자기 친밀해진다는 경험은 기본적으로 단명한 것이다. 낯선 사람이 친밀하게 아는 사람이 되고 나면 더 이상 극복해야 할 장벽도 없고, 갑작스런 친밀감도 더 이상 없게 된다. '사랑 받는'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잘 알게 된다. 혹은 거의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올지도 모른다. 상대방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경험을 한다면, 그의 인격의 무한성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 상대방은 그렇게 친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장벽을 극복하는 기적은 아마 매일 새롭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타인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곧 탐구되며 철저히 규명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친밀성은 기본적으로 성적인 접촉을 통해 형성된다. 사람들은 우선 물리적으로 분리된 것으로써 타인의 분리를 경험하기 때문에, 육체적 결합은 분리를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분리의 극복을 나타내 주는 다른 요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 자신의 희망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신의 순진한 혹은 유치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 세계에 대해 공통의 관심을 형성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분리를 극복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분노, 증오, 자제심의 완전한 결여를 드러내 보이는 것도 친밀감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변태적인 매력을 설명해 주는데 그 부부는 잠자리에 같이 있거나 서로간의 증오나 분노를 터뜨릴 때만 친밀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친밀성은 모두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축소된다. 결과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낯선 사람과의 사랑을 찾는 것이다. 다시 낯선 사람이 '친밀한'사람으로 변하고,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경험이 흥겹고 강렬해지며, 다시 점차 그 강렬함이 누그러져 새로운 사랑은 이전과는 다르리라는 환상에 젖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는 희망으로 끝난다. 이러한 환상은 성욕의 기만적 성격에 의해 크게 조장된다.

 

성욕은 융합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결코 육체적인 욕망이나 고통스러운 긴장에서 탈피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욕은 사랑에 의해서 자극되는 것처럼, 고독으로 인한 불안과 정복하거나 정복당하려는 희망, 허영과 상처를 주고 파괴시켜 버리려는 희망에 의해서도 자극된다. 성욕은 강렬한 정서와 쉽게 결합되며, 그것에 의해 자극되어지고 사랑을 단지 그 강렬한 정서의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성욕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생각과 짝을 짓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를 육체적으로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으로 쉽게 나가게 된다. 사랑은 성적인 일치를 향한 욕구를 고양시킬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있어 육체적인 관계에는 탐욕이나, 정복하고 또는 정복당하고 싶은 욕구는 존재하지 않고 부드러움이 결합되어 있다. 만일 육체적 일치를 향한 욕구가 사랑에 의해서 자극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취적이며 순간적인 감각을 넘어서는 일치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성적 매력은 순간적으로 일치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데, 만일 사랑이 없다면 이 '일치'는 두 사람을 예전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로 남겨 둘 것이다. 또한 때로 그 환상이 사라지게 되면 그들은 이전보다 더 현저하게 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심지어 서로를 미워하게 되기도 한다. 부드러움은 프로이트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성적 본능의 승화는 아니다. 그것은 형제애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비육체적 형태의 사랑에서뿐만 아니라 육체적 형태의 사랑에서도 존재한다.

 

성애에는 형제애나 모성애에서는 볼 수 없는 배타성이 있다. 성애의 이러한 배타적 성격에 대해서는 좀더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성애의 배타성은 흔히 소유적 애착을 의미하는 것으로 혼동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결코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서 서로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들의 사랑은 사실 서로간의 자기 중심주의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을 상대방과 동일시하며 하나의 개인을 둘로 확대함으로써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두 사람이다. 그들 두 사람은 고독의 극복을 경험하지만,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서로에게서 분리되어 있고 소외된 상태로 남는다. 결국 그들이 갖는 일치의 경험은 환상인 것이다. 성애는 배타적이지만, 상대방을 통해 모든 사람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 성애는 내가 오직 한 사람과 전적으로, 강렬하게 융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배타적이다. 성애는 깊은 형제애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생의 모든 측면에서의 완전한 위임, 즉 성애적 융합이라는 의미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을 배제한다.

 

성애도 그것이 사랑이라면 하나의 전제를 갖고 있다. 즉 나는 내 존재의 본짙에서부터 사랑하고 있고 상대방을 그의 존재의 본질에서 경험한다는 전제를 지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 존재는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가는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의지의 행위, 즉 내 인생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위임하겠다는 결심의 행위이다. 이것은 혼인은 파기할 수 없다는 사상의 배경이 되며, 두 배우자가 서로를 선택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선택되어 서로 사랑할 것을 기대하는 여러 형태의 전통적인 혼인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현대 서구 문화에서는 이러한 사상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랑은 자발적이고 정서적인 반응의 결과로 저항할 수 없는 감정에 의해서 갑자기 묶여 버린 결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모든 남자는 아담의 일부이며 모든 여자는 이브의 일부라는 사실보다는 관계를 맺은 두 사람의 특수성만을 볼 뿐이다. 우리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인 '의지'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결정이며 판단이고 약속이다. 사랑이 단지 감정이라면 서로를 영원토록 사랑하겠다는 약속의 근거는 사라지고 만다. 감정은 생겼다가 없어질 수 있다. 만일 내 행위 속에 결정과 판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이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견해를 고려하면 우리는 사랑은 전적으로 의지와 위임의 행위이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결혼이 다른 사람에 의해 주선되건 개인적 선택의 결과이건 간에, 일단 결혼이 성립되면 의지의 행위는 사랑의 지속을 보장해 줄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인간 본성과 성애의 모순적 성격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이다. 그렇지만 우리들 각자는 독특하며 복사할 수 없는 실체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은 모순이 반복된다. 우리가 모두 하나인 한, 우리는 형제애라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다른 존재인 이상, 성애는 모든 사람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특별하고 매우 개인적인 요소를 필요로 한다.

 

성애를 완전히 개인적인,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매력으로 보는 견해나 성애는 의지의 행위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모두 옳다. 그러나 좀더 적절히 표현하자면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사랑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쉽게 해체될 수 있는 관계로 보는 생각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해체되어서는 안되는 관계로 보는 생각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자기애

 

사랑의 개념을 여러 가지 대상에 적용시키는 데는 아무런 반대도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라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다. 이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기 사랑은 이기심과 같은 것임을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서구 사상에서는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캘빈(Calvin)은 자기애를 '페스트(pest)'라 말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경신 의학적인 용어로 기술하고 있지만, 그의 가치 판단은 캘빈과 다를 바가 없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자기애는 자아도취, 즉 성욕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하는 것과 같다. 자아 도취는 인간의 발달에 있어서 최초의 단계이며, 나중에 이 자아 도취단계로 되돌아오는 사람은 사랑을 할 수가 없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미치기까지 한다. 프로이트는 사랑은 성욕의 표현이며 성욕이 타인을 향하고 있는 경우는 사랑이고,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경우가 자기애라고 가정한다. 사랑과 자기에는 한쪽이 커지면 커질수록 다른 쪽은 작아진다는 의미로 볼 때 서로 배타적이다. 만일 자기애가 나쁘다면, 비이기적인 것이 덕이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생긴다. , 심리학적인 관찰로써 자기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뒷받침할 수 있을까? 자기에 대한 사랑이 과연 이기심이라는 것과 동일한 현상인가? 아니면 반대인가? 게다가 과연 현대인에게 있어서 이기심이란 자신의 모든 지능적이고 정서적이며 감각적인 능력을 가진 개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관심'인가? 그는 자기의 사회 경제적 역할의 부속품이 되지 않았는가? 그의 이기심은 자기애와 동일한가? 그렇지 않으면 이기심은 자기애의 결여로 생기는 것이 아닌가?

 

이기심과 자기애의 심리학적 측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기에 대한 사랑이 서로 배타적이라는 표현 속에 담긴 논리적 오류를 강조해두어야 한다. 만일 내 이웃을 인간 존재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악이 아니라 덕이 되어야한다. 왜냐하면 나도 역시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인간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나 자신을 배제하는 원리는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성서의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 특이성에 대한 존경,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해는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끊어질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논의의 결론이 근거하고 있는 기본적인 심리학적 전제에 도달했다. 일반적으로 그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타인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우리의 감정과 태도의 '대상'이다. 타인에 대한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는 결코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문제와 관련시켜 보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와 반대로 자신에 대한 사랑의 태도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안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상'과 우리 자신 사이의 관계가 문제시되는 한, 사랑은 원칙적으로 분할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며, 보살핌과 존경과 책임, 그리고 지식을 포함한다. 그것은 타인에 의해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한, 사랑 받는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능동적으로 갈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힘의 실현이며 집중이다. 사랑에 내포되어 있는 기본적인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 성질의 구현으로서 사랑 받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 자체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James)가 말하는 일종의 '노동의 분업', 즉 우리는 이를 통해서 우리의 가족을 사랑하지만 '낯선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게 되는데, 이는 사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기본적인 표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흔히 생각되어지는 것처럼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비록 특정한 개인에 대한 사랑에서 획득된다 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사랑은 특별한 사람을 사랑하는 전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귀결이 나온다. 곧 나 자신의 자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신의 생명, 행복, 성장, 자유에 대한 긍정우리 자신의 사랑의 능력’, 곧 보호, 존경, 책임, 지식에 근원이 있다. 만일 어떤 개인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한다. 만일 그가 오직 다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원칙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순순한 관심을 분명히 배척하고 있는 이기심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기적인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며 주는 데에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받는 데에서만 기쁨을 느낀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외부 세계를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욕구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통합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유용성(有用性)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불가피한 이자택일임을 증명하지 않는가? 만일 이기심과 자기애가 동일하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하는 오류이다.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기는커녕, 사실상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배려의 결여 --- 이것은 그의 생산성의 결여에 대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는 그를 공허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는 반드시 불행하며 생활로부터 만족을 강탈하려고 초조해 하지만 스스로 이 만족의 달성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는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이기적인 사람은 마치 그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철수시켜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과 같다고 해서 프로이트는 이기적인 사람이 자가 도취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예컨대 지나치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다른 사람에 대한 탐욕스러운 관심과 비교하면 이기심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쉬워진다. 이 어머니는 그녀의 어린애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의식적으로 믿으면서, 사실은 그녀의 관심이 대상에 대해 깊이 억압되고 있는 적의(敵意)를 갖고 있다. 이 어머니는 어린애를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아니라 어린애를 사랑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을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기심의 본질에 대한 이 이론은 신경증의 한 증상인 신경증적 비이기주의(非利己主義)’ --- 이것은 흔히 이 증상만이 아니라 이 증상과 관련된 다른 증상, 곧 억압, 피로, 노동에 있어서의 무능력, 애정 관계에서의 실패 등으로 시달리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관찰되는 신경증의 증상이다 --- 에 대한 정신분석적 경험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비이기주의는 증상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흔히 이러한 사람들이 자랑하고 있는 구원적(救援的)인 성격의 특색이다. ‘비이기적인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뿐이고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자랑한다. 그는 자신의 비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며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원활하지 못하면 당황한다. 분석적 연구에 의하면, 그의 비이기주의는 그의 다른 증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증상 중의 하나이며 사실은 흔히 가장 중요한 증상이다. 또한 분석적 연구에 의해 그는 사랑하는 능력이나 즐기는 능력이 마비되어 있고 삶에 대한 적의로 가득차 있으며 비이기주의라는 표면 뒤에는 미묘하지만 매우 강렬한 자기 본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의 비이기주의도 다른 증상과 함께 증상으로 해석되어서 그의 비이기주의와 다른 고통의 근원인 생산성의 결여가 고쳐질 수 있을 때에만 이 사람은 치유될 수 있다.

 

비이기주의의 본질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특히 명백하게 나타나고 우리들의 문화에서는 비이기적인어머니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에 가장 자주 나타난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비이기주의에 의해서 자녀들이 사랑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다음에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배우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녀의 비이기주의의 영향은 그녀의 기대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어린애들은 사랑 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행복감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불안해 하고 긴장해 있고 어머니의 비난을 두려워하고 어머니의 기대에 따라 살려고 애를 쓴다. 보통, 이 어린애들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적의의 영향을 받는데, 이러한 적의를 명백히 인식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느낄 뿐이며 마침내 그들도 이러한 적의에 감염된다. 결국 비이기적인어머니의 영향은 이기적인 어머니의 영향과 별로 다르지 않다. 사실상 비이기적인 어머니의 영향은 흔히 더욱 나쁘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비이기주의 때문에 어머니를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애들은 어머니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속박을 받고 있다. 어린애들은 덕이라는 가면 밑에서 삶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만일 우리들이 순수한 자기애를 가진 어머니의 영향을 연구할 기회를 갖는다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랑, 기쁨, 행복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전도력(傳導力)이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이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들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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