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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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방법을 배우는 사람

이 홍 우(서울대 사범대 교수/뿌리깊은나무사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인가에서)

 

 

어떤 여성 단체에서 규수학당이라는 것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는 혼례 때에 폐백을 드리는 방법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에 이르기까지, 여자가 혼인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석달 동안에 걸쳐서 가르치고 있다. 이 학당의 담당자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 규수 학당에서 다루는 내용은 고등학교나 대학 과정에서 가르쳐야 마땅한 것인데, 우리나라 현실에서 학교가 이러한 교육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허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석달이라는 교육 기간은 혼인 생활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다루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어서 수박 겉핥기 식의 교육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안타까울 것이다. ‘혼인 생활에 필요한 모든 내용’ - 그것이 과연 어떤 것들인지는 의문스럽지만 - 을 가르치자면 석달이 짧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삼년이 아니라 삼십년인들 충분할까? 혼례에서 시작하여 부인이 되고 시어머니가 되어 늙어 죽을 때까지를 여자의 혼인 생활이라고 하면 그것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가르치는 데는 국민학교에서 고등학교나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십이년이나 십륙년의 정규 교육 기관도 넉넉한 기간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그 교육 기간 동안에 배워야 할 것은 꼭 혼인 생활에 필요한 것만 아니고, 직업 생활이나 사교 생활이나 심지어 여가 생활 같은 온갖 생활에 필요한 모든 생활을 포함한다고 생각하면, 십이년이나 십육년은 분명히 짧은 기간이다.

 

그 학당 담당자는 학당의 교육 기간이 짧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허점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느낌을 나타냈다. 곧 그 학당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것인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학당 담당자의 눈으로 보면, 그 중요한 혼인 생활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제쳐 두고 현실이 그렇듯이, 물리학이나 수학이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학교 교육의 허점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학당 담당자는 무슨 근거로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할 내용이 이것이라거나 그 내용에 비추어 오늘날 학교 교육이 허점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그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대신에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른바 교과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물론 그 학당 담당자가 되도록 많은 손님을 불러들 여서 학당을 번성시키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사람은 학교 교 육의 의미에 대한 일반적인 단정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학교가 참으로 중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학교 교육에 허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꼭 그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학교란 바로 그러한 것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만일에 학교가 그러한 것 대신에 물리학이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보면 그것 이 학교 교육의 허점이라고 생각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자기가 일하고 있는 기관의 번성을 위해서거나 자기의 주관적인 견해를 충분히 따르기 위해서거나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내용으로서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판단할 때에 사람들은 이미 교육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일정한 방향으로 구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말하면, 그들은 교육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종류의 삶인지를 가정하고 있다. 그리고 교육이라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삶을 실현하는 노력이라면, ‘교육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규정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의 모습을 규정짓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문제삼으려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의 그 가정이 올바른 것인지 어떤지를 따져 보자는 것이다.

 

퓨즈를 갈아 끼우는 방법을 아는 것과 빛이 곧게 나간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퓨즈를 갈아 끼우는 것이 어디에 쓸모 있는지는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적어도 그것은 캄캄한 방을 밝힐 수가 있다. 그러나 빛이 곧게 나간다는 것은 알아서 무엇에 쓰는가? 물론 빛이 곧게 나간다는 원리가 이를테면 사진기를 발명하는 데에 유용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그것도 퓨즈를 갈아끼우는 것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이 빛은 곧게 나간다는 것이 퓨즈를 갈아 끼우는 것과 똑같은 까닭에서 쓸모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의 중요성을 더욱 낮추는 결과가 된다. 빛이 곧게 나간다는 것을 모른다고 해서 퓨즈를 갈아 끼울 줄 모를 때처럼 당장 캄캄한 방에 답답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 그런 불편은 겪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에 있는 학교든지 빛이 곧게 나간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것을 보면, 온 세계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릇된 생각을 한다고 볼 수 없는 만큼, 빛이 곧게 나간다는 가르침도 어떤 점에서는 쓸모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퓨즈를 갈아 끼우는 것처럼 살아 가는 데에 직접 유용하지 않은데도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 교육 내용을 실용적인 것장식적인 것으로 크게 나눈다. 위의 보기에서 퓨즈를 갈아 끼우는 일은 실용적인 것, 그리고 빛은 곧게 나간다는 것은 장식적인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가 있다. 실용적인 것이 가르칠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살아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식적인 것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에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그것을 장식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중요성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장식적인 것은 실용적인 것에 견주어 그 중요성이 언제나 뒤져 있기 마련이다.

 

한때는 사람들이 올바른 교육을 나타내는 말로 생활과 직결된 교육이라는 말을 썼고 지금도 여전히 그 말은 많은 사람들의 교육관을 지배하고 있다. 실용적인 것의 가치가 누구에게나 명백하다는 것에 비추어 보면, 사람들이 생활과 직결된 교육실용적인교육 내용과 결부시키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그들은 흔히 그러한 교육의 본보기를 원시 시대의 교육에서 찾는다. 원시 시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냥하는 법이나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고 어머니가 딸에게 요리법과 길쌈을 가르친다.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생활과 직결된 실용적인교육 내용이었다. 여기에 견주면 대부분, ‘장식적인것을 가르치는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분명히 허점 투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활과 직결된 교육을 주로 실용적인것과 묶어 생각하는 것은 생활이라는 말의 뜻을 지극히 한쪽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원시인들의 생활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얼른 생각하면, 원시인들의 교육 내용은 순전히 실용적인 것에 한정된 것 같지만, 실제로 원시 시대의 아이들이 배운 내용 중에도 살아가는 데에 직접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없는 내용이 분명히 있었다. 말하자면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부족의 전설과 민화를 배웠고, 노래와 춤, 의식의 의미와 절차 그리고 여러 가지 터부 곧 금기를 배웠다. 이런 것 속에는 그때 사람의 세계관이나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이나 부족의 역사에 관한 지식이 들어 있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원시인의 생활의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사냥이나 길쌈 못지 않게 유용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유용성은 사냥이나 길쌈의 유용성과 똑같은 종류의 유용성은 아니다.

 

생활에 직접 도움이 되는 교육 내용이 장식적인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육관은 생활이라는 것을 순전히 의식주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다. 그러한 교육관에 따르면 생활의 의미는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편하게 먹 고 사는 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으로서 생활하는 것의 의미를 전혀 그릇되게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생활한다고 하기 위해서는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함께 자기 주위의 자연 현상이나 자기와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일도 하여야 한다. 보는 일이 의식주의 해결이나 개선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보는 일을 한 결과가 오히려 그것에 방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보는 일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다. 이른바 생활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거나 눈을 가리고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람다운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제정하던 때에 있었던 한글 자음 자가 그 뒤에 없어지면서 또는 으로 바뀌었다는 것에는 국어학계의 의견이 일치된다. 얼마쯤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가 아직도 사용되던 때에 혹 시 이라는 단어가 쓰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가 있다. 그 단어에서 으로 바뀌면 이 되고, 으로 바뀌면 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라는 가상적인 단어는 아마도 아는 것사는 것의 개념이 나뉘기 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에 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그 단어는 우리 조상들에게 어떤 느낌을 불러 일으켰을까? 앎과 삶이 하나의 실체로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상태란 과연 어떤 상태였을까? 오늘날 앎과 삶의 개념이 완전해 갈라져 있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 시대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 조상들은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서로 다른 게 아닌 동일한 현상임을 체험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입버릇처럼 자주 말하는 생활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라는 말은 그들의 경험 세계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면 분명히 우리 조상들은 살아가는 일은 곧 알아 가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직업을 가지고 보수를 받아서 먹고 사는 것만으로 생활의 의미가 충분히 설명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살아 간다는 것은 그와 동시에 우리 주위의 사물이나 현상, 그리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하여 그 뜻을 생각해 보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참뜻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면 무엇보다도 우리 조상들은 교육을 받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올바로 알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교육을 받는 것은 살아가는 데에 직접 도움이 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과 세계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을 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눈을 가지는 것은 그들에게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마치 살아가는 데에 직접 도움이 되는 내용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심할 필요가 없이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 보는 일은 살아가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한 만큼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비록 우리 조상들이 앎과 삶을 같은 말로 묶어 사용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앎과 삶이 한 가지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 다. 오히려 그것은 앎과 삶이 누구에게나 두 가지 다른 것으로 생각될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앎과 삶의 의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성찰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경계한 것은 그때의 아테네 사람들 중에 성찰을 할 능력과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도 이 점에서는 아테네 사람들보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영국의 어떤 신경 생리학자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흥미를 가지고 그 문제를 신경 생리학의 관점에서 연구하였다. 그 연구의 방법으로 그는 장님으로서 오직 눈을 밝히겠다는 열망으로 유럽 어디라도 개안 수술을 시술하는 곳이 있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그곳으로 찾아가 개안 수술로 눈을 밝힌 사람이 그 이후의 생활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조사한 것이었다. 그 환자들은 대부분이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다가 어른이 된 뒤에야 개안 수술을 받은 사람이었다. 얼른 생각하면, 앞을 못 보던 사람이 수술을 받아 눈을 뜨게 되면 아주 편리할 것 같지만, 개안 수술을 받은 사람의 반응은 한결같이 이러한 생각은 오직 눈을 뜨고 지닌 사람들의 짐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눈을 뜨지 못한 채 살아 온 사람들은 눈을 뜨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눈을 떴을 때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늘 보는 그런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어지럽게 돌아가는 빛의 소용돌이일 뿐이며, 그것은 실제로 그들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한다.

 

개안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눈을 뜨면 어지러운 것은 단순히 그들의 시력이 밝은 빛에 적응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시력이 빛에 적응하는 데는 기껏해야 몇 주일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어지러움은 몇 달, 때로는 몇 해 동안 계속된다. 이 어지러움은 그들이 우리처럼 눈으로 사물을 보는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수술을 받은 뒤부터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 눈으로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서 보는방법을 배움에 따라 점차로 없어진다.

 

개안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처음 얼마 동안 어지럽게 돌아가는 빛의 소용돌이밖에 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눈이 생리학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은 가지고 있지만, 그 눈으로 줄은 모른다. 만일에 눈으로만 사물을 볼 수 있다면 그들도 눈이 있으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아직 눈으로 사물을 보는 데에 필요한 생각또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개념을 써서 사물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개안 수술을 받은 뒤에 몇달 또는 몇 해 동안 주위의 사람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개념을 써서 사물을 보는 방법이다. 이때 그들은 눈으로 들어오는 감각 자료를 개념으로 해석하는 일을 배우게 된다.

 

이 신경 생리학자의 연구 결과가 교육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과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한 가지 가상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떤 장님이 영국의 어떤 곳에서 배를 타고 런던으로 개안 수술을 받으러 간다. 런던 근방의 해안에 거의 닿을 무렵에 배가 부숴진다.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지만, 이 장님만 평소에 잘 발달시킨 촉감 덕택으로 바다 밑을 더듬어서 혼자 육지에 올라온다. 그러나 바다 밑을 기어오르는 동안에 바위에 이리저리 부딪쳐서 눈이 떠졌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앞에서 말한 신경 생리학자의 연구 결과가 옳다면, 그는 눈만 뜨면 어지러울 것이다. 완전히 혼자인 채, 그는 구조대가 올 때까지는 손으로 더듬어서 굴이라도 따먹고 적당한 잠자리를 찾으면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그는 이때까지 익숙해 왔던 대로 눈을 도로 감지 않으면 안 된다. 눈을 뜨는 것은 생활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편을 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만 뜨면 볼 수 있으므로 그는 틀림없이 이따금씩 눈을 뜨고 싶을 것이다. 그가 눈을 뜨고 싶어할 때는 언제일까? 아마 생활의 필요를 해결해야 할 때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생활의 필요가 해결되고 난 뒤에 우리가 보통 말하는 호기심비슷한 것이 생겨서 그는 눈을 뜨고 싶을 것이다. 그러다가 생활의 급한 필요가 생겨서 일을 처리해야 될 경우에는 다시 눈을 감아야 할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가상적인 장님의 경우가 교육받은 사람의 모습을 잘 나타내 준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교육을 받는 것은 생활의 필요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물론 두 가지 사이의 비유에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를테면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생활의 필요를 해결하고 난 ' 세상을 보는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서, “옷과 밥이 넉넉한 뒤에야 예절을 안다는 말은 참으로 불행한 결론을 암시한다. “옷과 밥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에 예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옷과 밥문제를 해결하는 모양이 예절에 맞아야 하는 것이다. 또 보통 사람의 경우에,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보고 싶은 심정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 곧 교사의 가르침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생긴다. 다시말하면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교사의 가르침을 받아야 세상을 보는 눈도 생기고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사의 가르침을 개안에 견줄 수 있다는 데 대한 더욱더 확실한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생활의 필요를 해결하는 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빛은 곧게 나간다를 왜 가르쳐야 하는지를 좀더 직접 해답할 때가 되었다. 먼저 우리의 생활을 둘러보면, 빛은 곧게 나간다는 원리가 응용되는 듯한 사태를 많이 볼 수가 있다. 한여름 뙤약볕이 쪼일 때 우리는 나무 그늘을 골라서 앉는다. 방에 커튼을 칠 때에 우리는 앞집과 마주 보이는 쪽에다가 커튼을 친다. 회중 전등으로 물건을 비출 때에 우리는 비추려고 하는 그 물건에다가 곧바로 불빛을 들이댄다. 우리는 남의 시야가 가리는 곳에 숨는다. 이 모든 일은 만일에 빛이 곧게 나가지 않는다면, 전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반드시 빛은 곧게 나간다는 것을 응용하는 것도 아니요, 빛은 곧게 나간다는 원리가 이런 일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과학에서 빛은 곧게 나간다는 말을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을 하기 전에도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 앉고 커튼을 치고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을 줄 알았다. 빛이 곧게 나간다는 것은 이런 일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는데에 도움이 된다. 누군가가 빛은 곧게 나간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냥 그런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수는 없었다. 앞에서 말한 비유를 쓰면 그 상태는 마치 방금 개안 수술을 받은 장님과도 같이 온통 어지러운 빛의 소용돌이밖에 아무 형체도 분간할 수 없는 상태와도 같다고도 말할 수가 있다. 빛이 곧게 나간다는 것은 그러한 상태에서 형체를 분간할 수 있는 새로운 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을 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빛이 마치 총알이 날아가는 것과 같이, 일직선을 이루며 나가는 것으로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 중에 실용적인가치가 분명하지 않다는 뜻에서 우 리가 흔히 장식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교육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내용은 모두 빛이 곧게 나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로 하여금 사물과 현상을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에서 쓸모가 있다. 그것을 장식적인 것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은 아니다. 우 리의 생활에서 장식적인 것을 모두 없애 버린다면. 그때 우리의 생활은 지금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생활이 될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른바 문학, 과학, 역사 같은 교과는 저마다 관련된 현상을 보는수단으로써 쓸모가 있다. (‘교과에는 실용적인것도 있을 수 있다고 하여, 요즈음은 주지 교과라는 어색한 새말을 만들어 쓰고 있다.) 이를테면 그러한 교과는 개안 수술을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주위의 감각 자료를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에 해당한다. 그것을 배우지 않는다고 해서, 퓨즈를 못 갈아 끼운다거나 장사를 해서 이득을 못 남긴다거나 하는 불편은 없다. 다만 그것을 배우지 못하면 문학이나 과학이나 역사가 보여 주고자 하는 세계를 볼 수 없다.

 

보는 수단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것을 배운 사람으로서 그것을 써서 사물이나 현상을 볼 수 있게 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교과의 중요성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그것을 부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사람들에게 교과의 중요성을 설명하여 이해시키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까닭도 여기에 있다. 소크라테스가 본 아테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퓨즈를 갈아 끼워 방을 밝히고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잘 먹고 잘 살기 만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보는 수단을 배우는 과정이 사람들에게 행복과 건강을 안겨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즐길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육의 의미를 말할 때에, 사람들은 가끔 교육은 곧 생활이라거나 사람이 살아가는 것치고 교육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만큼 교육의 뜻을 그릇되게 말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교육이 곧 생활이라면, 애당초 교육이라고 할 것 없이 생활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중에도 교육 아닌 일이 얼마든지 있다.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교육이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교육은 살아가는 동안에 일어난다. 그러나 교육은 살아가는 동안에 일어나는 특별한 일을 가리킨다.

 

교사는 교육을 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교육이라는 특별한 일이 어떤 종류의 일인지를 알려면 교육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교사가 어떤 종류의 삶을 사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교육은 반드시 교사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교사라고 하는 말은, 모든 것이 교육이라는 말이 그렇듯이, 교사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뜻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사가 아닌 사람도 교육을 할 수는 있지만, 그때에 그 사람은 교사가 업으로 삼고 있는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교사는 교육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인 만큼 그의 삶은 교육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어떤 직업이거나 그 직업에서 전문으로 하는 일이 있다. 교사는 어떤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일까? 이때까지 이 글에서 한 말이 대체로 타당성을 가진다고 하면, 교사는 사람의 경험 세계의 한 분야 또는 몇 분야에 관하여 보는 일을 하면서 학생들에게도 자기와 마찬가지 일을 하도록 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아무도 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교사가 있는 동안에는 이 일은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이어 나갈 수 있다.

 

보는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교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근본 자질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보는 일곧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치있는 일이라고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이 자질이 교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러한 확신이 없이 교직에 들어 온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 가르치는 일은 오직 봉급을 받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조금이라도 봉급을 더 주는 자리가 생기면 그런 사람은 서슴없이 교직을 팽개쳐 버릴 것이다. 스스로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일을 할 까닭이 없다. 자기 자신이 보는 일의 가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런 교사가 학생들의 마음속에 그 가치를 일깨워 줄 가능성은 아주 적다. “교육받았다는 것의 뜻이 보는 일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고 하면, 이런 교사는 스스로도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요, “교육받은 사람을 만들어 낼 수는 더욱 더 없다.

 

보통 생각하는 것과 달리, 교사로서 가장 뚜렷하게 성공한 경우는 자기가 가르친 학생 중에 교직에 들어오는 학생이 있을 경우이다. 어째서 그럴까? 어린아이들은 아직 보는 일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학교에 들어간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이미 보는 방법을 배운 교사의 시범을 통하여 보는 일이 어떤 종류의 일이며 그것이 어떤 뜻을 갖는지를 배운다. 일정 기간을 배운 뒤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저마다 자기의 직업을 찾아 군인이나 상인이나 정치가가 된다. 물론 이들도 저마다의 직업에 종사하는 동안에 학교에서 배운 보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교사의 처지에서 보면, 이와 같이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나는 학생들은 결과적으로 보는 일보다는 다른 일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만큼 보는 일의 중요성을 덜 배운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학생 중에 적어도 몇 명은 교사가 하는 일에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아 자기도 한평생 그 교사와 같은 일을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교사가 성공한 경우이다. 교사가 자기의 뒤를 잇겠다는 학생들을 환영하지 않고 도리어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사회가 있다면 이 사회야말로 교육의 중요성을 전혀 믿지 않는 사회이다.

 

한 사회에서 교사가 존경을 받는 정도는 그 사회가 보는 일의 중요성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보는 일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회는 그만큼 그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교사를 존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사를 존경해야 할 사회 사람들은 바로 교사에게서 보는 일을 배우다가 군인이나 상인이나 정치가로 나간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학교가 지식 교육을 한다는 데서 찾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지식 교육은 마치 나쁜 교육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이러한 지식 교육에 대한 비판이 오로지 실용적인 것에만 마음을 쓰고 보는 일의 가치는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경우에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식 교육의 목적은 실용적인 효과를 얻도록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현상을 이해하도록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의 지식 교육에 대한 비판이 타당성을 가지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식 교육을 한다고 하면서, 그 본디의 목적과는 어긋나는 교육을 하는 경우이다. 이를테면 지식 교육을 하는 교사 자신이 지식 교육의 의미와 중요성에 관하여 조금도 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지식은 사물이나 현상을 보는 수단이 된다거나 그것은 살아가는 데에 직접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사람이 되는 데에 중요하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교사는 지식을 배우는 것도 장사를 하는 것과 똑같은 점에 서 중요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 교사의 믿음은 현실로서 충분히 뒷받침된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을 배우면, 그것도 남보다 뛰어나게 배우면, 사회의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 현상이다. 사회의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은 어떤 실용적인 것보다도 더 실용적인 것이다. 만일에 그것이 장사라면, 그것은 한 평생이 걸려 있는 장사이다. 사회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가장 합법적인 방법은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대학을 나오기 위해서는 입학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지식은 입학 시험에 합격하는 수단이다. 이 긴 추리의 연속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생리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추리는 한 가지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 사한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은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결과라는 본디의 순서를 뒤집어서, 교육이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 오류에서 희생되는 것은 바로 지식 교육이다. 지식 교육은 그 본디의 의도에서 떨어진 채 단순히 입학 시험에 합격하는 수단으로, 또 멀리는 사회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전락된 지식 교육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게 될까? 아마 학생들은 지식을 배우는 것도 또 하나의 실용적인 투자라는 것을 배우게 될지 모른다. 적어도 그러한 교육으로 학생들이 교육받은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배울 가능성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한 교육을 받은 결과로, 학생들은 생활의 의미를 오직 실용적인 것과 결부시켜 파악하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사람답게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배우지 못한 채 살아 갈 것이다.

 

우리 집 개가 병이 들어서 며칠 동안 가축 병원에 다닌 일이 있다. 그 병원에서는 서양 발발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수의사는 우리 개를 치료하는 동안에, 자기 개를 창살이 달린 개장 안에다 가두어 두곤 했다. 며칠 동안을 두고 보아 온 일이지만, 수의사가 우리 개를 치료하는 동안 줄곧 그 발발이는 개장 안에서 팔딱팔딱 뛰고 깽깽 짖고 온통 난리를 부렸다. 주인이 아무리 타이르고 얼러도 막무가내였다.

 

나는 그 발발이의 하는 짓이 분명히 질투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 모양을 본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은 틀림없는 질투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발발이의 눈으로 보면 주인의 행동은 충분히 질투를 자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주인은 바로 자기를 쓰다듬어 주는 것과 같은 손길로 다른 개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아닌가.

 

이제 그 발발이의 행동을 질투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 질투는 사람이 하는 질투와 어떻게 다를까? 얼핏 생각하면 개의 질투와 사람의 질투는 질투의 감정을 어느 정도로 직접 강렬하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개는 직접 강렬하게 질투를 표현하는 데 에 견주어, 사람은 간접적으로 완곡하게 질투를 표현한다. 그러나 개의 질투와 사람의 질투를 이와 같이 직접성과 강렬성이라는 정도차이로 파악하는 것은 개와 사람이 본질에서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와 사람이 본질의 차이가 없다는 결론 에 거북스러운 느낌을 가질 것이다. 사람과 개 사이에는 낭떠러지와 같은 차이가 있어서, 개가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도저히 그 낭떠러지를 뛰어 넘을 수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문제는 그 낭떠러지를 무엇으로 보아야 하느냐에 있다.

 

그 낭떠러지는 바로 이것이다. , 개는 자기가 질투를 한다는 것을 알지 못 하고 질투하는데 견주어 사람은 자기가 질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질투를 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다. 개가 자기의 행동을 억제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사람이 자기의 질투하는 마음을 억제하고 그것을 간접적으로 완곡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와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낭떠러지의 표면을 기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낭떠러지의 밑바닥을 파헤치려면 우리는 다시 어째서 개와 사람 사이에 그러한 차이가 있게 되는지를 설명하여야 한다. 그것은 과 관계가 있다. 개와는 달리, 사람은 질투라는 말을 가지고 있고 그 말을 써서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줄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말 또는 개념을 써서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주는 것을 가르친다.

 

교과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와 사람의 행동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개처럼 행동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세계를 파악하면서 살아 갈 수 있다. 사람의 사람다운 점은 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할 줄 아는 데에 있다. 앞의 학당 담당자에게는 분명히 실례가 되겠지만,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만 하면 사람으로서 충분히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행여나 사람의 의미를 사람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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