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텔레비전 매체에 대하여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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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씹는 껌, 텔레비전

김 규

 

 

세 사람의 부모

요즈음 어린이들에게는 세 사람의 부모가 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텔레비전이라고 불리는 양어머니이다. 어린이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분만실이나 병실에 설치된 텔레비전과 대면하게 되며 어머니 품에 안겨서도 눈은 텔레비전의 명멸하는 화면을 바라보고 친어머니의 얼굴보다 더 강한 자극을 받게 된다. 이유기가 지면서 텔레비전이라는 양어머니의 비중은 점점 더 커지며 언제나 곁에 있어 준다. 어린이의 왕성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신기한 존재인 동시에 누구보다도 먼저 어린이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유치원에 갈 무렵부터는 놀 때나 밥 먹을 때는 물론 공부할 때까지도 켜 있지 않으면 섭섭하게 느껴지며 중학교를 마칠 때에는 교실에서 보낸 시간보다 텔레비전과 더불어 보낸 시간이 더 많은 경우도 드물지 않다. 외로움이나 슬픔 같은 것도 텔레비전을 통해 달래며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여 제법 세상사에 능통한 어린이 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른바 열두 살의 성인이 되는 것이다. 평생을 통해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가장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과 더불어 보내게 되며 별다른 의심없이 극히 자연스럽게 검은 상자와 같이 살게 된다.

 

4백만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지구를 지배해 온 인류가 불과 50년 동안에 텔레비전이라는 이 괴물의 노예가 되어 이제는 이것 없이는 생활하기가 어렵게 되어 버린 상황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만일 외계인이 이 지구를 관찰한다면 밤마다 40억의 인간이 사는 이 지구에서 벌어지는 꼭 같은 광경 --- 10억 이상의 인간이 꼭 같이 생긴 검은 상자 앞에 앉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괴상한 광경 --을 보고 그것을 근래에 와서 나타난 괴이한 이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문제는 외계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이러한 변화를 별다른 비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점점 그 속에 깊이 빠져들어 가는 우리들 자신에 있다. 특히 텔레비전 시대에 태어난 이른바 텔레비전 세대라는 새 인류는 텔레비전이라는 눈으로 씹는 껌을 버리지 못하며 전파를 통해 들어오는 마약을 주는 대로 받아 먹게 되어 급기야는 텔레비전이 이끄는 대로 따라 다니는 불쌍한 포로의 신세가 된다.

 

텔레비전이라는 마약 속에는 비현실적 허구와 환상이 우글거리며 정치적 조작과 경제적 착취가 난무하고 대리 경험과 대리 만족으로 이루어진 유사 환경 속의 비틀어진 이미지가 가득차 있다. 죽어서 최후의 심판대에 섰을 때 너는 일평생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텔레비전을 구경하다 보니 일생을 덧없이 지내고 제가 스스로 제 생활을 찾은 적은 없습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인간을 만드는 문자 문명 시대에서 멍청한 인간을 만드는 텔레비전 시대로 전환하는 기로에 서 있다. 지난 반 세기는 여러 가지 과학 문명의 발달이 너무도 다양하고 빨라서 그것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데 급급했었다. 그 결과에 대한 검토나 이론적 정립은 자연 소홀히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학 절대주의라는 흐름 아래 여러 가지가 잘못 처리된 것이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오펜하이머 박사나 수소 폭탄을 완성시킨 에드워드 텔러 박사는 그 가공할 만한 파괴력에 놀란 나머지 만년에 들면서 자신이 이룩한 과학적 업적을 오히려 후회하고 개탄했었다. 또 삼극 진공관을 발명하여 텔레비전의 대중화에 전기를 마련한 츠월킨 박사도 텔레비전의 역기능에 놀라 비관적인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과학 절대주의의 오류를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적 산물에 뜻을 불어넣어 그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발명가라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제도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과에 대한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방송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우가 말한 대로 텔레비전이란 물리적으로는 나무나 플라스틱 상자 속에 전선과 유리 조각이 들어 있는 것에 불과하며, 여기에 정신을 집어넣어 매스 미디어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이용하는 인간에 달려 있다. 이용하는 인간이 순기능이나 역기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말살론을 주장하는 제리 맨더 같은 사람은 텔레비전은 중립적이고 몰가치적인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일종의 마성(魔性)으로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시키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히드라와 같은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른바 본질적인 성악론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두 개의 상반되는 얼굴을 지닌 야누스적인 텔레비전의 불가사의한 정체 --알라딘의 램프처럼 모든 꿈을 즉각적으로 실현시킬 것 같은 마력, 해박한 지식의 상자에서 백치의 상자까지 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 무명의 인사를 하루 아침에 대통령으로 만들 수도 있고 또 파멸시킬 수도 있는 위력적인 조작, 전란 속에서 헤어져 수십년 동안 찾아 헤매던 가족을 단시간에 찾아 주는 놀라운 재현력, 그런가 하면 저질 오락 프로그램과 흥미 위주의 스포츠로 온 국민을 무력하고 몽매한 대중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는 파괴력, 별로 필요도 없는 물건을 안 사면 못 배기도록 만들어 만인을 소비층으로 만드는 놀라운 마이더스의 팔 -이 변화 무쌍한 텔레비전이라는 괴물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대담하며 바벨의 탑처럼 무한한 욕망의 화신이다.

 

 

2의 신

80년대에 들어서면서 텔레비전의 귀재라고 불리는 토니 슈월츠는 텔레비전을 마침내 제2의 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은 전지 전능하며 육체이고 정신이며, 우리들 내부와 외부에 다 같이 존재하며 우리와 항상 같이 있으며, 무서운 창조력과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신의 속성을 텔레비전은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제2의 신은 과학이 만들어 낸 신이며 전 인류가 이 제단 앞에 향불을 피운다는 전이 다른 것뿐이다. 수백만, 수천만, 아니 수억의 인간이 꼭 같은 텔레비전 시청이라는 의식을 통해서 사랑과 죽음의 신비성을 느끼며 인생의 환희와 슬픔을 나누고 영혼의 시련을 경험한다. 우리는 이 의식 속에서 외화 <달라스>의 범인을 물어 보며, <형사 콜롬보>는 뉴욕, 마드리드, 오슬로, 부카레스트 어디에서나 화제가 되고 마침내는 20억 인구가 달 표면을 걷는 우주 비행사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예수나 석가모니, 모하메트 그 어떤 성자도 이렇게 많은 신도를 매혹시키지는 못했으며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매체를 연구하는 전문가나 일부 학자들의 세계에서만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심심풀이의 수단이요 별다른 뜻이 없는 제2의 관심사로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보고 즐기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반문한다. 또 현학적인 사람들은 속된 텔레비전 같은 것은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한다고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텔레비전 매체의 가장 큰 특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점에 있으며 그 영향력은 직접 간접으로 우리들 모두에게 빠짐없이 작용하고 있다. 만인의 문제는 누구의 문제도 아니라는 명제는 텔레비전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을 뿐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무지의 소치라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슈월츠의 자장을 필자는 그대로 다 수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 운동을 텔레비전을 이용하여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백 개 이상의 대기업체의 상업 광고물을 제작하고, 칸느 영화제에서 네 번이나 수상한 슈월츠만큼 풍부한 경험도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는 아직도 미국 사회만큼 텔레비전 문화가 다양하지도 않고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속해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1,000만 세대에 한 대씩의 텔레비전이 이미 보급되고 있으며, 세대당 2대 이상의 복수 소유 현상도 나타나고 비디오 테이프 레코드의 대중화도 활발하며 여러 모로 뉴 미디어 시대가 가까웠다고 생각된다. 정보와 오락의 가장 큰 공급원이 텔레비전이 되었으며 텔레비전의 출현과 더불어 태어난 제1세대가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텔레비전 왕국이 된 우리 나라의 시청 현상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은 일부 선진국이 보여 준 그대로이다. 즉 텔레비전에 대해 비판의식이 비교적 높은 식자층은 텔레비전 문화를 천시, 기피하고 다른 한편으로 압도적으로 많은 일반 대중은 수동적, 무비판적으로 그것을 수용한다. 텔레비전이라는 무례한 손님이 안방 한구석을 차지한 채 무슨 소리나 행동을 하든 무제한 관용을 베풀며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어쩌면 그 위력이 너무 강해서 혹은 횡포가 지나쳐서 혹은 내용이 하도 복잡해서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에서 일어난 것인지 또는 20여 년 동안 그렇게 길들여져 버려서인지 한 번 연구해 볼 문제이다.

 

귀중한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독점하여 때로는 별로 뜻도 없는 연속극과 경박한 쇼와 저속한 코미디와 흥미 본위의 스포츠 중계로 황금 시간을 꾸미며 잡담으로 남은 시간을 메우고 획일적인 보도나 토론을 늘어놓으며 무절제한 광고로 황금의 거미줄을 쳐도 별다른 거부 반응 없이 잘 받아들이기만 한다. 시청료를 지불하며 많은 광고도 보아야 하는 제도 아래에서 무조건 관용만 베풀고 멍청한 수동적인 시청자로만 전락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전파의 소유자와 방송 경비의 부담자로서 누려야 할 커다란 권리를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이 된다. 텔레비전을 일컬어 일명 제5의 벽이라고 한다. 네 개의 벽 외에 다시 하나 더 붙은 이 벽의 표면에 무엇이 그려져 있건 무조건 있어야 하는 생필품의 일종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 벽은 역사학자 다디엘 부어스틴의 표현대로 인간 사회의 여러 가지 이미지를 제공하는 벽이며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먹고 사는 동물이 된 것이다. 그 이미지의 세계는 실제 환경이 아닌 유사 환경이건만 우리는 실제와 유사를 식별할 능력을 잃어 가고 있다. 텔레비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사란 브라운관 속에 비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기의 직접적인 체험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화면에 나타난 사람은 정치가이든 사기꾼이든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의 스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신은 브라운관 속이 현실이며 당신의 생활은 허위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미쳐 버린 것이다.” 이것은 텔레비전 세계의 내막을 폭로한 <네트워크>라는 영화에서 사회자 역할을 맡은 버얼 하워드가 말한 텔레비전의 생태이다. 선진 사회에서는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 못지않게 텔레비전 중독 증상이 만연되어 가고 있으며 그것은 비판 의식이나 선택 능력이 약한 계층이나 어린이에게 특히 심하다는 것이다.

 

몇 년전 미국 디트로이트 시의 프리 프레지는 텔레비전을 습관적으로 시청하는 가족이 일시적으로 시청을 중단했을 때 나타나는 행동상의 변화를 조사한 일이 있다. 120 세대에게 30일간 텔레비전 시청을 완전히 중단하고 그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보고해 주면 500불을 지불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들 중 93세대는 어떤 대가로도 텔레비전을 멀리 할 수 없다는 회신을 보내 왔으며 나머지 27세대 중 5세대만이 과감하게 1개월간 텔레비전 금단 상태에 들어갔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은 다음과 같은 병적 증상이었다. 담배, 음주, 섹스의 증가, 심한 우울증, 신경과민증, 인간관계의 악화,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현상 등이었다. 그야말로 텔레비전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어린이가 받는 상처

해마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텔레비전으로 조건지워진 환경 속에 태어나고 있다. 다양한 인식 능력을 가진 갓난아이들의 귀와 눈에 텔레비전 음향은 너무 강하며 명멸하는 색채 화면은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유전 인자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짐작되는 생존을 위한 원초적인 능력은 텔레비전의 지나친 자극에 의해 자연스러운 발육이 저해당하며 텔레비전이라는 양어머니는 끊임없이 안아 주고 이야기하고 놀아 주는 친어머니의 역할을 차단한다. 많은 아동 심리학자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텔레비전에 의한 유아의 정신 장애 현상은 계속 같이 살아야 되는 텔레비전 양어머니에 의해 점점 더 심해 갈 뿐이다. 태아 교육적 측면에서도 매일 밤 수많은 폭력 장면과 살인 행위, 감각적인 쇼나 저속한 코미디, 격한 스포츠 장면을 보는 어머니의 정신적, 정서적 충격은 뱃속의 어린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텔레휘션(텔레비전 핵분열)의 저자 루네 벨지는 유아가 만족하는 대상이 어머니로부터 텔레비전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유아가 켜 있지 않은 텔레비전 수상기에까지 애착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달리 본능이 파괴되어 태어나는 유일한 동물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불완전한 상태에서 이 세상에 던져지는 것이다. 일반 대중들은 본능적으로 외계에 적응해 가는 데 비해 인간은 너무도 적응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부모의 보호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새로운 매체 환경의 탄생으로 부모와 어린이 간의 거리는 우려할 만큼 멀어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어린이의 정신적인 상처는 깊어만 가고 있다. 어린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애정에 찬 어머니와 눈을 맞대고 응석을 부리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체감적인 감수성으로 음성 모방이나 언어 습득의 과정이 된다. 텔레비전이라는 양어머니는 무반응의 차디찬 매체이며,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일방적인 과잉 자극으로 고립감을 조장하며 소극적인 외부 접촉 성향을 기르고 결과적으로는 어린아이의 인지 발달을 저하시킨다.

 

동물학자 콘라드 로렌츠는 오리나 기러기처럼 어미의 보호 기간이 짧은 조류의 새끼는 부화 후 곧 가까이 있는 움직이는 큰 물체를 어미로 알고 따라다니면서 흉내낸다는 인프린팅 현상(刻印現象)을 밝혔는데 이러한 현상은 포유류 동물에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후 일 년간은 대뇌 신피질의 발달이 별로 없고 그 대신 구피질계의 역할이 중심이며 그 시기가 다른 포유류 동물처럼 생존을 위한 기초적 학습(인프린팅)의 시기이다. 텔레비전은 살아서 움직이는 물체도 아니며 반응을 나타내거나 서로 접촉할 수 있는 생물도 아니다. 따라서 텔레비전은 부모로서 인프린팅될 수 없으며 된다 하더라도 비정상적이므로 심리적 상처의 원인이 되고 만다. 또 환경 생태학자 프레드릭 페스타도 인간의 뇌는 태아기에 유전 정보에 의해 이미 많은 부분이 형성되어 있으며 나머지 뇌세포의 결합도 주로 생후 3개월간에 거의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뇌피질이 배선망은 거의 초기에 형성되며 그 이후에 들어오는 자극은 코드화되어 기억으로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로렌츠의 인프린팅 시기는 페스타의 배선망 형성 시기에 해당되며, 어린이를 둔하다고 생각하여 이 시기에 아무 자극이나 마음대로 들어오도록 방치해 두면 나쁜 각인이 새겨진다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 방안의 분위기, 소리와 빛 등 모든 환경적 요소가 직접 어린아이의 대뇌에 각인되어 그 이후의 성장과 학습에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하루 종일 부단히 침입해 오는 텔레비전의 변화하는 소리와 빛, 그것은 누워 있는 어린아이의 감각을 통해 뇌세포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가장 큰 자극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자장가로 이용하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어린아이에게 텔레비전을 보이는 시기는 생후 2개월에 42%, 3개월일 되면 61%로 증가한다고 한다. 젖을 먹일 때 텔레비전을 본다고 대답한 어머니도 60%를 넘으며 5개월이 되면 텔레비전을 같이 보는 어린이도 어느 정도 반응을 나타내게 되고 첫돌 때에는 광고를 보고 손뼉을 치는 현상도 흔하다고 한다. 이리하여 피부를 접촉하거나 눈을 서로 마주치는 일, 음성을 주고받는 일일 없어지고 텔레비전이 어머니가 되는 텔레비전 세대라고 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류가 탄생하는 것이다.

 

 

습관을 깨뜨려라

일상 생활에서 쉽게 식별할 수 있는 텔레비전 세대의 행동적 특징을 시청 습관 깨뜨리는 법의 저자 조안 윌킨슨은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1) 학교에서 귀가하여 바로 텔레비전을 켜는 아이

(2) 토요일과 일요일을 주로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는 아이

(3) 시간이 있으면 무엇보다 먼저 텔레비전부터 켜는 아이

(4)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

(5) 놀 때도 텔레비전을 켜 놓는 아이

(6) 프로그램이 재미없다고 투덜대는 아이

(7) 텔레비전 광고에서 본 장난감이나 음식에 대해 트집을 부리는 아이

(8) 전기나 전자식 장난감을 좋아하는 아이

(9) 밤 열시까지 잠자리에 들기 싫어하는 아이

(10) 식사 때 텔레비전을 켜 놓는 아이

(11) 식사 때 텔레비전을 주로 화제로 삼는 아이

(12) 생활 시간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맞춰 조절하는 아이

 

이상에 해당하는 아이는 손색없는텔레비전 세대에 속한다.

미국의 전형적인 텔레비전 세대는 주당 평균 30시간 가량 텔레비전을 본다고 하는데 이 정도는 우리 주변에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또 텔레비전 앞에 있는 한, 밖에서 교통사고를 당할 염려도 없고 말썽도 부리지 않으므로 일부러 텔레비전 시청을 권장하는 부모도 늘어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텔레비전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아이는 없다. 다만 좋아하도록 습관이 들뿐이다. 이 사실은 부모가 시청 태도나 시청 시간을 잘 선도하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습관지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거의 결정적인 연구 결과의 하나는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아이들보다 적게 보는 아이들이 행실도 착하며 지능도 높고 학업 성적도 좋다는 사실이다. 부모의 시청 시간과 아이들의 시청 행위간에도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장시간 시청하는 가족일수록 가족 간의 대화나 단란한 분위기, 여러 가지 가족끼리 하는 공동 행위가 적다.

텔레비전과 관계가 멀수록 좋은 가정일 된다. 선진국에서는 전자 시대에 들어서면서 컴퓨터 증후군이니 비디오 증후군이니하여 예전에 없었던 여러 가지 병적 증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텔레비전 증후군은 아주 심각하다. 어린 시기의 사회화 과정은 평생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그리고 어린이를 부정적인 텔레비전 환경 속에 방치해 둔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될 말이다. 어린이 자신들은 스스로 대책을 강구하거나 자기를 보호할 힘이 없으며 따라서 부모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방송국의 통제나 외부의 타율 규제보다 보는 사람들 스스로의 자율이 가장 효과적이며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 같다. 부모란 역할은 가장 신성하고 뜻 깊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어려운 일인데 인류는 한 번도 부모의 적성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김 규/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와 스탠포드 대학 대학원에서 신문 방송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강대 신문 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방송원론󰡕, 󰡔방송 매체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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