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한문고사성어사전 차 ~ 하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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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천의무봉(天衣無縫) // 하늘의 직녀가 짜 입은 옷은 솔기가 없다는 뜻으로,

詩文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가 없음을 이름.

완전 무결함. 出典太平廣記鬼怪神寄

 

곽한(郭翰)이 뜰에 누웠는데 절세미인이 나타나서,

저는 천상(天上)의 직녀(織女)이온데, 남편과 오래 떨어져 있어 울화병이 생겨서, 상제(上帝)의 허락을 받고 요양차 내려왔습니다.”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를 요구하더니 매일 밤 찾아왔다. 칠월 칠석이 되자 며칠 안오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래서, “남편[牽牛]과의 재미는 좋았소?” 하자, “천상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과 다릅니다.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니 질투는 마십시오.” 했다.

 

곽한이 조용히 그녀의 옷을 살펴보니, 바느질한 곳이 전혀 없었다. 이상해서 물으니, “하늘의 옷은 원래 바늘이나 실로 꿰매는 것이 아닙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벗은 옷은 그녀가 돌아갈 때면 저절로 가서 그녀의 몸에 입히는 것이었다.

 

徐視其衣竝無縫 翰問之 謂翰曰 天衣本非針線爲也 每去 輒以衣服自隨.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직녀(織女)의 시녀가 소식을 한 번 전한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곽한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미인을 보더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집안의 혈통을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 싫어도 아내를 맞이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고 부부의 사이도 좋지 않아 아들도 얻지 못한 채로 끝나고 말았다.


119. 천재일우(千載一遇) //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 出典文選袁宏 三國名臣序贊

 

동진(東晉)의 학자로서 동양 태수(東陽太守)를 역임한 원굉(袁宏)은 여러 문집에 시문(詩文) 300여 편을 남겼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文選에 수록된 三國名臣序贊이다. 이것은三國志에 실려 있는 건국 명신 20명에 대한 행장기(行狀記)인데, 그 중 위()나라의 순문약(荀文若)을 찬양한 글에서 원굉은 이렇게 쓰고 있다.

 

대저 백락(伯樂)을 만나지 못하면, 곧 천년에 한 천리마도 없다.

 

夫未遇伯樂 則千載無一驥.

 

[]에 대하여 안목이 높은 말[]의 명인 백락을 만나지 못한다면, 천년이 지나도 한 마리의 천리마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어진 신하가 명군(名君)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과 통한다.

 

대저 만 년의 한 번 기회는 이 세상의 통하는 길이며 천 년에 한 번 좋은 기회를 만나는 것은 현인(賢人)과 지혜 있는 사람의 아름다운 만남이다. 이와같은 기회를 누구나 기뻐하지 않고는 못 견디니, 기회를 잃으면 누구나 어찌 능히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夫萬歲一期 有生之通塗 千載一遇 賢智之嘉會 遇之不能無欣 喪之何能無慨.

 

동의어천재일시(千載一時), 천재일회(千載一會), 천세일시(千歲一時)

유사어맹귀부()(盲龜浮())


120. 청운지지(靑雲之志) // 속세에 초연한 태도.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망.

出典張九齡 朝鏡見白髮 / ‘史記伯夷列傳

 

장구령은 현종(玄宗) 때의 어진 재상으로 간신 이임보(李林甫)의 모략으로 인해 벼슬길에서 파직되어 초야에서 여생(餘生)을 보냈다. 다음은 그가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의 감회를 읊은 시이다.

 

옛날 청운의 뜻을 품고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다 늙은 지금에 와서 차질을 빚게 되었다.

누가 알리요 밝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서로 측은히 여기고 있는 것을.

 

宿昔靑雲志 蹉跌白髮年

誰知明鏡裏 形影自相潾

 

오늘날, 보통이 아닌 큰 뜻, 입신출세에 대한 야망을 청운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청운이라는 말은 옛날史記伯夷列傳에도 나오며, 다음과 같이 쓰여지고 있다.

 

항간의 사람들은 행실을 닦아 이름 세우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靑雲의 선비라고 붙이는 것이 아니니, 어찌 능히 후세에 베풀 수 있으랴!

 

閭巷之人 欲砥行立名者 非附靑雲之士 惡能施于後世哉.


121. 청출어람(靑出於藍) // 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 스승보다 나음을 일컫는 말. 出典荀子勸學篇

 

이 말은 전국시대의 유학자(儒學者)로서 성악설(性惡說)을 창시한 순자(荀子)의 글에서 나오는 한 구절이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물보다 더 차다.

 

學不可以己 靑取之於藍 而靑於藍 氷水爲之 而寒於水.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끊임없이 발전과 향상을 목표로 하여 노력해야 하고 중도에서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학문은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한 걸음씩 완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 여기서 푸름과 얼음의 비유가 등장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학문과 마차가지로 그 과정을 거듭 쌓음으로써 그 성질이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가는 것이다. 스승에게 배우기는 하지만 그것을 열심히 익히고 행함으로써 스승보다 더 깊고 높은 학문과 덕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이 너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준 말출람(出藍)

동의어출람지예(出藍之譽), 출람지재(出藍之才), 후생각고(後生角高), 출람지영예( 藍之榮譽)


122. 촌철살인(寸鐵殺人) // 간단한 경구(警句)로 어떤 일의 급소를 찔러 사람 감동시킴의 비유. 出典學林玉露

 

학림옥로(學林玉露)’라는 책은 남송(南宋) 때의 나대경(羅大徑), 찾아오는 손님들과 주고받은 청담(淸談)을 시동(侍童)에게 기록하게 한 것으로 · · 의 세 부분 18권으로 구성된 책이다.

그 중 지부(地部)’ 7<살인수단(殺人手段)>에는 종고선사(宗杲禪師)가 다음과 같이 선()을 논하여 말했다.

 

비유하면 한 수레의 병기를 싣고서 하나를 희롱하여 마치면 또 다른 하나를 꺼내 가지고 와서 희롱함과 같지만, 이것이 곧 사람을 죽이는 수단은 아니다. 나는 곧 단지 촌철(寸鐵)이 있으므로, 문득 사람을 죽일 수 있다.

 

宗杲論禪曰 譬如人載一車兵器 弄了一件 又取出一件來弄 便不是殺人手段 我則只有寸鐵 便可殺人.

 

이것은 그가 선()의 요체(要諦)를 갈파한 말이므로, 살인이라고 하지만 물론 칼날로 상처를 입히는 것을 뜻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속의 속된 생각을 없애는 것을 뜻한다.

 

아직 크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그 속된 생각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성급하게 이것 저것 대답을 해 오겠지만, 정신의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두 날것들뿐이다. 그와 같은 칼로는 몇 천 몇 만 개나 되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모든 일에 온 몸과 온 정성을 다 기울일 때, 충격적으로 번득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큰 깨달음인 것이다.


123. 타산지석(他山之石) //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덕(知德) 을 연마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 出典詩經小雅篇

 

이 말은詩經小雅<학의 움음(鶴鳴)>에 실려 있다.

 

학이 높은 언덕에서 울거늘, 그 소리는 온 들에 들리는도다.

물고기가 잠겨 연못에 있다가, 혹은 물가로 나와 노는도다.

저 동산에는 즐겁게도, 이에 심어놓은 박달나무가 있으며,

그 아래에 오직 개암나무가 있도다.

남의 산의 돌도, 가히 써 숫돌로 삼을 수 있도다.

 

 

학이 높은 언덕에서 울거늘, 그 소리 하늘에 들리는도다.

물고기가 물가에 있다가, 혹은 잠기어 연못에 있도다.

저 동산에는 즐겁게도, 이에 심어놓은 박달나무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오직 닥나무가 있도다.

남의 산의 돌에, 가히 써 구슬을 갈 수 있도다.

 

鶴嗚于九皐 聲聞于野

魚潛在淵 或在于渚

樂彼之園 愛有樹檀

其下維蘀

他山之石 可以爲錯

 

 

鶴嗚于九皐 聲聞于天

魚在于渚 或潛在淵

樂彼之園 爰有樹檀

其下維穀

他山之石 可以攻玉

 

유사어절차탁마(切磋琢磨), 공옥이석(攻玉以石)


124. 태산북두(泰山北斗) // 태산과 북두성.

세상 사람으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

出典唐書韓愈傳贊

 

나라 때 4대 시인(四大詩人)의 한 사람으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한유(韓愈 : 退之)768년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서 태어났다.

 

그는 9대 황제인 덕종(德宗 : 779-805) 25세의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極諫)하다가 조주자(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 파직(罷職) 당했다가 다시 등용되곤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는 한유(韓柳)’로 불렸을 정도로 절친한 벗인 유종원(柳宗元 : 子厚)과 함께 고문부흥(古文復興) 운동을 제창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唐書韓愈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가 흥성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을 가지고 여러 학저들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학문은 더욱 흥성했으며, 그래서 학자들은 한유를 泰山北斗를 우러러보듯 존경했다.

 

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 如泰山北斗云.

 

준 말태두(泰斗), 산두(山斗)

동의어여태산북두(如泰山北斗)


125. 토사구팽(兎死狗烹) //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 짝처럼 버려진다는 말. 出典史記淮陰侯列傳 十八史略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소하(蕭何) · 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의 창업 삼걸(創業三傑) 중 한 사람인 한신(韓信)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 200)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고조(高祖)는 지난날 종리매에게 고전했던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을 어 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高祖)에게 한신은 반심(反心)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진평(陳平)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모든 제후(諸侯)들은 초() 땅의 진(:河南省 內)에서 대기하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이 나오면 진()에서 포박하고, 만약 나오지 않으면 진()에 집결한 다른 제후들의 군사로 한신을 주살(誅殺)할 계획이었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反旗)를 들까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서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신은 자결한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拜謁)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 당하자 한신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한()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내가,

이번에는 고조의 손에 죽게 되는구나.

 

果若人言 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원 말교토사 양구팽(狡兎死 良狗烹)

도의어야수진 엽구팽(野獸盡 獵狗烹)


126. 파죽지세(破竹之勢) // 대적(大敵)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 가는 당당한 기세. 出典晉書杜預傳

 

()나라의 권신(權臣) 사마염(司馬炎)은 원제(元帝)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무제(武帝:265-290)라 일컫고, 국호(國號)를 진()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나라와 진()나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제는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에게 출병을 명했다. 이듬해(280) 2,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 대나무란 처음 두 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버린단 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건읍(建業 : 南京]으로 쇄도(殺到)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어 오왕(吳王) 손호(孫晧)가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진()나라는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했다.

 

옛날에 악의(惡毅)는 제서(齊西)의 한 번 싸음에서 승리하여, 강한 나라를 합쳤다. 지금 아군은 위세를 이미 떨치고 있다. 비유하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 다. 몇 마디를 쪼갠 다음에는 다 칼날을 맞아 쪼개어질 것이니, 다시 손을 댈 곳이 없다.

 

昔樂毅藉齊西一戰 以幷彊齊 今兵威己振 譬如破竹 數節之後 皆迎刃而解 無復著手處也

 

동의어영인이해(迎刃而解), 세여파죽(勢如破竹)


127. 표사유피(豹死留皮) //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뜻. 사람은 사후( )에 이름을 남겨야 함의 비유. 出典新五代史死節篇

 

왕언장(王彦章)은 한갓 병졸에서 시작하여 후량(後梁) 태조(太祖) 주전충(朱全忠)의 장군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용기와 힘으로 쇠창을 옆에 끼고 촉한(蜀漢)의 조자룡처럼 적진을 누벼 군사들은 그를 왕철창(王鐵槍)이라 불렀다.

 

그는 후량(後梁)이 멸망할 때 겨우 500의 기병을 거느리고 수도를 지키다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되었다. 후당(後唐)의 장종(藏宗) 이존욱은 그의 무용을 아껴 부하가 되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왕언장은,

신은 폐하와 10여 년이나 싸워 이제 패군지장(敗軍之將)이 되었습니다. 죽음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또 아침에 양()나라, 저녁에 진(:後唐)나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습니까?”하고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해 무식했으나, “표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언제나 말하고 지키겠다.”고 하였다.

 

彦章武人不知書 常爲俚語謂人曰 豹死留皮 人死留名.

 

동의어호사유피(虎死留皮)


128. 풍성학려(風聲鶴唳) //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에도 놀람의 비유.

出典晉書謝玄傳

 

동진(東晉)의 명장 사현(謝玄)은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직접 이끌고 내려온 백만에 가까운 군사를 맞아 겨우 10분의 1밖에 안되는 적은 군사로써 이를 회하(淮河) 상류인 비수(淝水)에서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한 대승리를 거두었다.

 

사현(謝玄)이 대승을 하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의 재상 사안(謝安)은 동생 사석(謝石)과 조카인 사현(謝玄)을 선봉으로 삼아 8만의 군사로 서진(西秦)의 백만 대군을 맞이했다.

 

그리고 사현은 적의 총지휘관인 부융(符融)에게 사자를 보내 이렇게 청했다.

귀하의 군대를 조금만 뒤로 후퇴시켜 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물을 건너가 한 번 싸움으로 승부를 하겠습니다.”

군사의 수()를 믿고 상대를 깔보고 있던 부견과 부융은 얼마 안되는 적이 물을 반쯤 건너왔을 때 기습작전으로 간단히 이를 해치울 생각으로 사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융의 북군이 후퇴를 개시하고 남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을 때 북군 내에서 뜻하지 않은 혼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은 북군은 남군이 강을 건너오는 것 을 보자 싸움에 패()해서 물러나는 것으로 오인하고 앞을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기 때 문이다. 뒤쪽에 있던 군사들은 앞의 군사가 허둥지둥 도망쳐 오는 것을 보자 덩달아 겁을 먹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이리하여 북군은 자기 군사가 모두 적군으로 보이는 혼란 속에서 서로 짓밟으며 달아나다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남은 군사들은 갑옷을 벗어 던지고 밤을 새워 달아나며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진()나라 군사가 뒤쫓아 온 걸로 알고 길도 없는 가시밭 속을 헤매며 한데서 밤을 보냈다. 거기에다 굶주림과 추위까지 겹쳐 죽은 사람이 열에 일곱 여덟은 되었다. 청각적인 착각과 아울러 산천의 풀과 나무까지 다 적의 군사로 보였다는 초목개병(草木皆兵)이라는 시각적인 착각도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堅衆奔潰 自相答藉 投水死者 不可勝計 淝水爲之不流 餘衆棄甲宵遁 聞風聲鶴唳 皆以爲王師已至 草行露宿 重以飢凍 死者十七八.

129. 필부지용(匹夫之勇) // 소인의 깊은 생각 없이 혈기만 믿고 냅다치는 용.

出典孟子梁惠王下

 

나라 宣王이 물어 보았다.

이웃나라와 사귀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孟子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오직 仁者라야 능히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나라 湯王이 갈()나라를 섬기고, 周文王이 곤이(昆夷)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지혜있는 왕이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越王 구천(勾踐)나라를 섬겼습니다.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를 즐기는 것이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하늘의 를 즐기는 사람은 천하를 편안케 하고, 하늘의 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케 합니다.詩經에도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길이 나라를 편안케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크기도 하여라, 선생의 말씀이여! 그런데 과인에게는 한 가지 병이 있으니, 과인은 용기를 좋아합니다.”

 

왕께서는 제발 작은 용기를 좋아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칼자루를 어루만지고 노려보면서, ‘제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해낼 것이냐?’하신다면, 이는 필부(匹夫)의 용기입니다. 이는 곧 한 사람을 대적함이니, 왕께서는 제발 용기를 크게 부리소서.”

 

齊宣王 問曰 交隣國有道乎 孟子對曰 有 惟仁者 爲能以大事小 是故湯事葛 文王事昆夷 惟智者 爲能以小事大 故 勾踐事吳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詩云 畏天之威 干時保之 王曰 大哉言矣 寡人有疾 寡人好勇 對曰 王請無好小勇 夫撫劒疾視曰 彼惡敢當我哉 此匹夫之勇 敵一人者也 王請大之.


130. 한단지몽(邯鄲之夢) // 인생과 영화의 덧없음을 비유한 말. 出典沈旣濟 枕中記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이야기이다. 도사 여옹이 한단(邯鄲 : 河北省 所在)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 사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에 구멍이 뚫린 도자 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 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京兆尹)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 단주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 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 년 후 원죄(寃罪)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제수(除授)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 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 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애를 마쳤다.

 

노생이 깨어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하고 한단을 떠났다.

 

동의어한단지침(邯鄲之枕), 한단몽침(邯鄲夢枕), 노생지몽(盧生之夢), 일취지몽(一炊 之夢), 영고일취(榮枯一炊), 황량지몽(黃梁之夢)

 

 

 

 

 

131. 한단지보(邯鄲之步) // 자기가 지켜야 할 본분을 모르고 마구 남의 흉내 내면 두 가지를 다 잃는다는 말. 出典莊子秋水篇

 

莊子의 선배인 위모(魏牟)와 명가(名家)인 공손룡(公孫龍)과의 문답 형식으로 된 이야기가 있다.

 

위모가 공손룡에게 말했다.

 

또한 그대는 걷는 법을 배우러 수릉(壽陵)의 젊은이가 한단(邯鄲)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가? 아직 그 나라의 걸음걸이에 능하지 못하였는데 제 나라의 걸음걸이마저 잃어, 곧 엎드려 기어서 제 나라로 돌아갔을 뿐일세. 당장 그대가 가지 않는다면 장차 그대의 방법을 잃고 그대의 본분을 잃어버릴 것일세.”

공손룡은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고, 혀가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아, 곧 달려서 도망쳐 갔다.

 

且子獨不聞 夫壽陵餘子之學行于邯鄲與 未得國能 又失其故行矣 直匍匍而歸耳 今子不法 將忘子之故 失子之業 公孫龍口呿而不合 舌擧而不下 乃逸而走.


132. 한우충동(汗牛充棟) //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 안에 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란 뜻으로, 장서(藏書)가 매우 많음의 비유. 出典柳宗元 陸文通先生墓表

 

나라 중엽의 문장가 유종원(유종원)육문통선생묘표(陸文通先生墓表)’라는 글이 있는데, 그 첫머리 부분에 이렇게 실려 있다.

 

孔子께서春秋를 짓고서 1500년이 지났다.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이 다섯 있는데, 지금 그 셋을 쓴다. 죽간(竹簡)을 잡고 생각을 초조하게 하여 써 읽고 주석(註釋)을 지은 자가 백천(百千)이나 되는 학자가 있다. 그들은 성품이 뒤틀리고 굽은 사람들로, 말로써 서로 공격하고 숨은 일을 들추어 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지은 책들은 집에 두면 창고에 가득 차고’, 옆으로 옮기려면 소와 말이 땀을 흘릴정도였다. 孔子의 뜻에 맞는 책이 숨겨지고, 혹은 어긋나는 책이 세상에 드러나기도 했다. 후세의 학자들은 늙은을 다하고 기운을 다하여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돌아보아도 그 근본을 얻지 못한다. 그 배우는 것에 전념하여, 서로 다른 바를 비방하고, 마른 대나무의 무리가 되며, 썩은 뼈를 지키어 부자(父子)가 서로 상대를 상처내고, 임금과 신하가 배반하기에 이르는 자가 전 세상에는 많이 있었다. 심하도다. 성인(聖人) 孔子의 뜻을 알기가 어렵도다.

 

孔子作春秋 千五百年 以名爲傳者五家 今用其三焉 乘觚牘 焦思慮以爲讀注疏說者 百千人矣 攻訐狠怒 以辭氣相擊排冒沒者 其爲書 處則充棟宇 出則汗牛馬 或合而隱 或乖而顯 後之學者 窮老盡氣 左視右顧 莫得其本 則專其所學 以訾其所異 黨枯竹 護朽骨 以至於父子傷夷 君臣詆悖者 前世多有之 甚矣 聖人之難知也.


133. 형설지공(螢雪之功) // 갖은 고생을 하며 부지런히 학문을 닦은 공. 出典

 

의 차윤(車胤)은 자()가 무자(武子)이다. 어려서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널리 책을 읽었다. 집이 가난하여 항상 기름을 얻지는 못하였다. 여름철에 비단 주머니로써 수 십 마리의 반딧불을 담고 책을 비춰서 읽으며 밤으로써 낮을 잇더니, 후에 벼슬이 상서랑(尙書郞)에 이르렀다. 지금 사람이 서창(書窓)을 형창(螢窓)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晉車胤武子 幼 恭勤搏覽 家貧不常得油 夏月以練囊 盛數十螢火 照書讀之 以夜繼日 後官至尙書郞 今人以書窓 爲螢窓由此也.

 

의 손강(孫康)은 어려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사귀고 놂이 잡스럽지 않았으나 집이 가난하여 기름이 없어서 일찍이 눈에 비춰 책을 읽더니, 후에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다. 지금 사람이 서안(書案)을 설안(雪案)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晉孫康 少 淸介 文遊不雜 嘗映雪讀書 後官至御史大夫 今人 以書案爲雪案 由此也.


134. 호가호위(狐假虎威) //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림의 비유. 出典戰國策 楚策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초엽, ()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어느날 선왕은 위(:)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다가 그의 신하가 된 강을(江乙)에게 물었다.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 제국(諸國)이 우리 재상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북방 제국이 어찌 일개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 따위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전하, 狐假虎威란 말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오.”

 

그러면 들어 보십시오.어느날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게 된 여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너는 나를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로 정하신 천제(天帝)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천벌을 받게 된다. 만약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당장 내 뒤를 따라아 보라구.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단 한 마리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를 따라가 보았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만나는 짐승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짐승들을 달아나게 한 것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었는데도 호랑이 자신은 그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북방 제국이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은 소해휼이 아니라 그 배후(背後)에 있는 초()나라의 군세(軍勢), 즉 전하의 강병(强兵)입니다.”

 

이처럼 강을이 소해휼을 폄()하는 이유는 아부(阿附)로써 영신(佞臣)이 된 강을에게 있어 왕족이자 명재상인 소해휼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이었다.

 

 

虎求百獸而食之 得狐 狐曰 子無敢食我也 天帝使我長百獸 今子食我 是逆天帝命也 子以我爲不信 吾爲子先行 子隨我後觀 百獸之見我而敢不走乎 虎以爲然 故遂與之行 獸見之皆走 虎不知獸畏己而走也 以爲畏狐也 今王之地方五千里 帶甲百萬 而專屬之昭奚恤 故北方之畏奚恤也 其實畏王之甲兵也 猶百獸之畏虎也.

 

동의어가호위호(假虎威狐)

준 말가호위(假虎威)


135. 호연지기(浩然之氣) // 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게 가득찬 넓고도 큰 원기().

자유롭고 유쾌한 마음.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운 바 없는 용기.出典孟子公孫丑篇

 

공손축(公孫丑)선생님께서는 특히 어느 것에 뛰어나십니까?”하고 묻자, 孟子나는 남의 말을 잘 알며, 나는 내 浩然之氣를 잘 기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공손축이 무엇을 浩然之氣라 합니까?”하고 묻자 孟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敢問夫子 惡乎長 曰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何謂浩然之氣 曰,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기운은 몹시 크고 몹시 굳센 것으로, 그것을 곧게 길러서 해()되게 하지 않는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게 된다. 그 기운이 됨은 정의와 에 맞는 것으로 이 기운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 이 기운은 안에 있는 옳음이 모여서 생겨나는 것으로, 밖에서 옳음이 들어와 취해지는 것이 아니다. 행동하여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있으면, 곧 굶주리게 되는 것이다.

 

難言也 其爲氣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 是集義之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 則餒矣.

 

준 말호기(浩氣)

동의어정대지기(正大之氣), 정기(正氣)


136. 호접지몽(胡蝶之夢) // 나비가 된 꿈이란 뜻.

물아(物我)의 구별을 잊음의 비유.

만물 일체(萬物一體)의 심정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出典莊子齊物論篇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물()의 시비(是非선악(善惡진위(眞僞미추(美醜빈부(貧富귀천(貴賤)을 초월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한 사람이다.

 

장자가 어느날 꿈을 꾸었다. 자신은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莊周)가 아닌가.

 

이는 대체 장주(莊周)인 자기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나비이고 나비인 자기가 꿈 속에서 장주(莊周)가 된 것일까.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莊子의 이런 우화(寓話)는 독자를 유현(幽玄)의 세계로 끌어들여 생각게 한다.

 

옛날에 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나비가 된 것을 기뻐하였다. 스스로 즐겨서 뜻하는 대로 가고 있어, 자신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깨달으니 곧 莊周가 되어 있었다. 알지 못하겠다. 莊周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莊周가 된 것인지를. 莊周와 나비와는 곧 반드시 구별이 있다. 이것을 자연(自然)이 된다고 말한다.

 

昔者莊周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 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유사어장주지몽(莊周之夢)


137. 화룡점정(畵龍點睛) // 가장 긴요한 부분을 끝내어 완성시킴. 出典水衡

 

남북조(南北朝)시대, 남조(南朝)인 양()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군장군(右軍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고 하니 벼슬길에서도 입신(立身)한 편이지만, 그는 붓 하나로 모든 사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화가로도 유명했다.

 

어느날, 장승요는 금릉(金陵:南京)에 있는 안락사(安樂寺)의 주지로부터 용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절의 벽에다 검은 구름을 헤치고 이제라도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네 마리의 용을 그렸다. 물결처럼 꿈틀대는 몸통, 갑옷의 비늘처럼 단단해 보이는 비늘, 날카롭게 뻗은 발톱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용을 보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은 점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장승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성화독촉(星火督促)에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한 마리의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기로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용의 눈에 하니 점을 찍었다. 그러자 돌연 벽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펴지더니 한 마리의 용이 튀어나와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張僧繇於金陵安樂寺 畵四龍於壁 不點睛 每曰 點之則飛去 人以爲誕因點其一 須臾雷電破壁 一龍乘雲上天 不點睛者見在.


138. 화사첨족(畵蛇添足) // 쓸데없는 군일을 하다가 도리어 실패함. 出典戰國策’ / 史記

 

전국시대인 초()나라 회황(懷王)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인색한 사람이 제사를 지낸 뒤 여러 하인들 앞에 술 한 잔을 내놓으면서 나누어 마시라고 했다. 그러자 한 하인이 이런 제안을 했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마신다면 간에 기별도 안 갈 테니, 땅바닥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리는 사람이 혼자 다 마시기로 하는 게 어떻겠나?”

그렇게 하세.”

 

하인들은 모두 찬성하고 제각기 땅바닥에 뱀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뱀을 다 그린 한 하인이 술잔을 집어들고 말했다.

이 술은 내가 마시게 됐네. 어떤가, 멋진 뱀이지? 발도 있고.”

그 때 막 뱀을 그린 다른 하인이 재빨리 그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세상에 발 달린 뱀이 어디 있나?”

술잔을 빼앗긴 하인은 공연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楚有祠者 賜其舍人巵酒 舍人相謂曰 數人飮之不足 一人飮之有餘 請畵地爲蛇 先成者飮酒 一人蛇先成 引酒且飮之 乃左手持巵 右手畵蛇曰 吾能爲之足 未成一人蛇成 奪其巵曰 蛇固無足 子安能爲之足 遂飮其酒 爲蛇足者終亡其酒.

 

 

 

 

139. 화서지몽(華胥之夢) // 화서의 꿈이란 뜻으로, 좋은 꿈이나 낮잠을 이르는 .

出典列子黃帝篇

 

먼 옛날 중국 최초의 성천자(聖天子)로 알려진 황제(黃帝 : 公孫軒轅)는 어느날, 낮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 놀러가 안락하고 평화로운 이상향(理想鄕)을 보았다.

 

그 곳에는 통치자도 신분의 상하도 연장(年長)의 권위도 없고, 백성들은 욕망도 애증(愛憎)도 이해(利害)의 관념도 없을 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도 초연했다. 또 물 속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고 불 속에 들어가도 타 죽지 않으며, 공중에서 잠을 자도 침대에 누워 자는 것과 같고 걸어도 땅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또한 사물의 미추(美醜)도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고 험준한 산골짜기도 보행을 어렵게 하지 않았다. 형체를 초월한 자연 그대로의 자유로 충만한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번뜩 깨닫는 바 있어 중신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은 지난 석 달 동안 방안에 들어앉아 심신 수양에 전념하며 사물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려 했으나 끝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오. 그런데 짐은 이번 꿈 속에서 비로소 그 도(()라는 것을 터득한 듯싶소.”

그 후 황제(黃帝)()’의 정치를 베푼 결과 천하는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華胥氏之國 在弇州之西 臺州之北 不知斯齊國幾千萬里 蓋非舟車足力之所及 神遊而已 其國 無師長 自然而已 其民無嗜欲 自然而已 不知樂生 不知惡死 故無夭殤 不知親己 不知疏物 故無愛憎 不知背逆 不知向順 故無利害 都無所愛惜 都無所畏忌 入水不溺 入火不熱 斫撻無傷痛 指擿無痟癢 乘空如履實 寢虛若處牀 雲霧不礙其視 雷霆不亂其聽 美惡不滑其心 山谷不躓其步 神行而已.

 

유사어화서지국(華胥之國), 유화서지국(遊華胥之國)


140. 환골탈태(換骨奪胎) // 얼굴이 전보다 변해 아름답게 됨.

남의 문장의 취의를 본뜨되 그 형식을 바꿔 자작 (自作)처럼 꾸밈. 出典惠洪 冷濟夜話

 

 

황정견(黃庭堅)은 소식(蘇軾)과 함께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독자적(獨自的)인 세계를 만들어 냈는데, 그의 독자적인 수법을 도가(道家)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 것이 換骨奪胎라는 말이다.

 

황정견은 두보(杜甫)의 시를 일컬어 영단(靈丹)한 말로 쇠를 이어서 금을 이룸과 같다.(黃庭堅稱杜甫詩 如靈丹一粒 點鐵成金)’라고 말했다.”

 

두보의 붓에 걸리면 흔해 빠진 경치도 곧 아름다운 자연으로 변하는데, 그것은 연금술사가 쇠에 한 알의 영단을 넣어서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 때의 영단(靈丹)’시상(詩想)’을 의미한다.

 

도가(道家)에서는영단 혹은 금단(金丹)을 먹어서 보통 사람의 뼈를 선골(仙骨)로 만드는 것을 환골(換骨)’이라 하고, 탈태(奪胎)()’도 선인(先人)의 시에 보이는 착상(着想)을 말하며, 시인의 시상(詩想)은 마치 어머니의 태내(胎內)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그 태(: 着想)를 나의 것으로 삼아 자기의 시경(詩境)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탈태(奪胎)라고 말하는 것이다.

 

남송(南宋)의 중[] 혜홍(惠洪)이 쓴冷濟夜話에 황산곡(黃山谷 : 庭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의 뜻은 궁진(窮盡)함이 없고 사람의 재주는 한()이 있다. 한이 있는 재주로써 궁진함이 없고, 뜻을 쫓는 것은 도연명이나 두보일지라도 교묘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 뜻을 바꾸지 않고 그 말을 만드는 것, 이것을 환골법(換骨法)이라고 말하며, 그 뜻을 규모로 하여 이를 형용하는 것, 이것을 탙태법(奪胎法)이라고 말한다.”


141. 온고지신(溫故之新) [출전]論語》〈爲政篇[참조] 기문지학(記問之學), 구이지학(口耳之學).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 것을 안다는 뜻.

 

溫故옛 것[]을 배우다[]’이다. 에는 배우다는 뜻도 있다. 知新새 것[]을 알다[]’이니 溫故之新옛 것을 공부하면 새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공자는논어(論語)》〈위정편(爲政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 것을 익히어 새 것을 알면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느니라[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남의 스승이 된 사람은 고전(古典)에 대한 박식(博識)만으로는 안 된다. 즉 고전을 연구하여 거기서 현대나 미래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기(禮記)》〈학기(學記)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기문지학(記問之學:피상적인 학문)은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되기에는 부족하다[記問之學 不足以爲師矣].” 지식을 암기해서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는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다는 뜻인데 이 말은 실로 온고지신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고전을 연구함에 있어서도고전의 현대적 의의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며 여기에 고전 학습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142. 박학상설(博學詳說)

 

博學여러가지를 배워 많이[] 안다博識과 같다. 詳說자세히 설명하다[]’이니, 博學詳說널리 배우고, 상세하게 해설한다는 말이다.

 

盟子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여러 학문을 배우고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장차 반대로 간단 명료함을 설명키 위해서다)에서 나온 成語.

 

……詳說之詳說의 목적어로 앞의 博學을 나타낸다. ‘(앞에 서술한 내용에 대해) ‘오히려’ ‘도리어’ ‘반대로라는 뜻으로 쓰이며, 說約요점을 추려 간략히 하다는 의미다.

 

배우고 연구하는 것은 博學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진리를 얻어 생활에 활용키 위해서다. 인류문명은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갔다가, 다시 복잡한 것에서 간단한 것으로 되돌아 간다. 그러니까 博學說約의 과정인 셈이다.


143. 일인불과이인지(一人不過二人智)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처럼 제 아무리 잘난 사람도 여럿이 힘을 합하는 것만은 못하니 협동하고 협력하라는 가르침이다. 위의 글을 직역하면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서는 두 사람의 지혜를 넘지[] 못한다이다.

 

不過는 어느 정도에 이를지 못했을 때 쓴다. ‘不過五百名5백명이 안되다는 뜻이다.(겨우 5백명이라는 뉘앙스도 있다). 不過의 반대는 過多이다. 大入試처럼 경쟁이 치열한 것을 過多競爭이라고 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은 不過不及이다. ‘一人之能過千人之能’(한 사람의 능력이 천 사람의 능력을 넘는다)이라는 말도 있다. 이런 一當千의 사람을 過人이라고 한다. 自古胎敎를 잘 해서 나은 아이는 過人이 된다고 한다.


144. 일자천금(一字千金) [출전]史記》〈呂不韋列傳

 

戰國時代 末期 ()나라 맹상군(孟嘗君)과 조()나라 평원군(平原君)은 각 수천 명, ()나라 춘신군(春申君)과 위()나라 신릉군(信陵君)은 각 3000여 명의 식객(食客)을 거느리며 저마다 유능한 식객이 많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 이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일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최강국인 진()나라의 상국(相國:宰相)이 되어, 어린(13) 왕 정(:훗날의 시황제)으로부터 중부(仲父)라 불리며 위세를 떨친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B.C.235, 정의 친아버지라는 설도 있음)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가 태자가 되기 전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기화 가거(奇貨可居)’라며 천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오늘날의 영화를 거둔 여불위였다. 그는 막대한 사제(私財)를 풀어 3000여 명의 식객을 모아들였다.

당시 列國들 사이에는 著述사업이 유행이었다. 呂不韋食客들을 동원해 古今의 정치, 경제, 사상, 문화, 역사 등을 모두 網羅한 백과사전인 책을 완성해 마치 자기가 편찬한 양 呂氏春秋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수도인 咸陽 성문에 걸어놓고 누구든지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뺀다면 천금을 주겠다.(有能增省一字者予千金)”豪言했다.史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呂不韋는 자기 誇示겸 우수인사 誘致 목적으로 이 말을 했지만, 지금 一字千金심금을 울리는 아주 빼어난 글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과 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유사어일자백금(一字百金).


145. 일자사(一字師)

 

鄭谷나라때 시인이다.

어느날 제기(齊己)’라는 스님이 여러 편의 詩稿를 가져 왔다. 그 중 <조매(早梅)>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前村深雪裏 昨夜數枝開……’(앞마을이 깊은 눈 속에 파묻혀 있는데, 어제 밤에 몇 가지에 매화가 피었네).

 

이를 본 鄭谷이 말했다. “數枝(몇 가지)早梅(일찍 핀 매화)라는 詩題에 맞지 않으니 一枝(한 가지)가 좋은 것 같소.” 그렇게 바꾸어 놓고 보니 과연 전체의 느낌이 달라졌다. 이에 스님은 鄭谷에게 큰 절로 감사를 했고, 사람들은 鄭谷을 가리켜 一字師’(한 글자를 가르쳐 준 선생님)라고 했다.

 

自古로 공부하는 사람은 한 글자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또 훌륭한 스승은 간단해 보이지만 핵심을 짚어 준다고 했다.


146. 일가지언(一家之言)

 

學者들 가운데는 누가 보아도 깜짝 놀랄 정도로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이룬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一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말은史記太史公自序(저자인 史馬遷이 쓴 序文)에 나온다. ‘略以拾遺補藝 成一家之言’(빠진 것을 모으고 보충해 간략하게 만들어 일가의 학설을 이루었다). 宮刑을 당한 치욕을 참고 空前傑作史記를 남긴 그로서는 당연한 自負心이다.

 

역시 유명한 史書漢書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고금의 변화에 통달해 일가를 이루었다). 따지고 보면 著者가 한 사람인 책을 읽는 것은 모두 一家之言을 따르는 셈이다.

각자가 一家를 이루는 一家見을 갖도록 열심히 노력하되 학문적 맹종(盲從)學說對立을 가져온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147. 일침견혈(一針見血)

 

東西洋醫術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발목 같은 곳을 삐었을 때는 을 맞는 것이 제일이다. 경험자는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으로 병소(病巢;균이 모여 있는 곳)의 정곡(正鵠;핵심)을 찔러 죽은 피를 빼내면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기 때문이다.

 

한 방에 피를 본다一針見血간단한 요령으로 본질을 잡아낸다는 비유이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도 名醫一針見血하는 이 아니면 변죽만 울리다가 끝내 흐지부지 되고 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은 침()과 같다. 은 치(;다스리다)의 뜻으로도 쓴다. 예를들면 逍遙以針勞 談笑以藥倦’(산책은 피로를 풀어주고 담소는 고달픔을 낫게하는 약이다).


148. 일각천금(一刻千金)

 

은 시간의 단위이다. 요즘의 15분에 해당되지만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千金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니 一刻千金’(일각은 천금의 가치가 있다)시간을 아껴쓰라는 말이다. 나라때 大文豪 蘇東坡<춘소(春宵;봄밤)>라는 에 나온다. ‘春宵一刻値千金’(봄밤의 일각은 처금에 해당한다).

 

·西洋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朱子는 젊은이들에게 시간을 아껴 공부할 것을 이렇게 강조했다.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소년은 곧 노인이 되지만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일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말라……).

 

田園詩人 陶淵明도 비슷한 를 남겼다. ‘盛年不重來……歲月不待人’(한창 시절은 다시 오지 않으니……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歲月如流’(세월은 흐르는 물 같다)도 시간을 중히 여기라는 말이다.


149. 십년한창(十年寒窓)

 

十年寒窓‘10년동안 사람이 오지 않아 쓸쓸한 창문(寒窓)’이나, ‘오랫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채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한 세월을 비유한다.

 

나라때 유기(劉祁)<귀잠지(歸潛志)>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古人謂 十年窓下無人問 一擧成名天下知’(옛 사람이 이르길 10년동안 창문 아래 묻는 이가 없더니 한번에 이름이 나니 천하 사람이 다 알게 되었다). ‘이름이 나다’(成名)科擧及第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과거에 급제해야만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기에 젊은이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책과 씨름했다. 그런 고생스런 과정을 거쳐 일단 급제만 하면 天下知名’(세상에 이름이 알려짐)이었으니, 요즘 山寺에서 공부헤 考試에 합격, 揚名하는 것과 비슷하다. ‘十年寒窓十年窓下라고도 한다.


150. 십보방초(十步芳草)

 

十步는 열 걸음, ‘芳草는 향기로운 꽃과 풀이니, ‘十步芳草는 직역하면 열 걸음 안에 아름다운 꽃과 풀이 있다이다. 도처에 人才가 있다는 뜻으로 세상에는 훌륭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비유한다.

 

나라 유향(劉向)<설원(說苑)>에 나온다. ‘十步之澤 必有芳草 十室之邑 必有忠士’(10보 안에 반드시 방초가 있고, 10채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런 선비가 있다).

 

는 한 걸음이고, ‘는 반 걸음이다. ‘步武堂堂은 모든 걸음걸이가 당당하다는 말로 군인들의 행진같은 것이다.

綠陰芳草는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그늘[綠陰]과 아름다운 꽃이란 말로 여름 경치를 뜻한다. 윗 글에서는 芳草忠士에 비유했다. 한문은 이같은 비유가 많은데 반드시 좋은 것은 나쁜 것과 대응시킨다.


151. 사마난추(馬難追)

 

駟馬는 말 네 필이 끄는 수레로써 엄청나게 빠른 것을 비유한다. ‘駟馬難追는 이런 駟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難追)로 빠른 것이니, ‘입조심을 하라는 뜻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우리 속담과 같다.

 

선거철에 상대를 비방하는 流言과 비어(蜚語)의 퍼지는 속도가 TGV(떼제베)보다 빠른 것을 생각할 때 실감나는 警句이다.

 

原文一言旣出 駟馬難追’(입에서 나온 말은 四頭 마차[駟馬]도 따르기 어렵다)이다. ‘駟不及說’(駟馬는 혓바닥을 따르지 못한다)도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 말이 많은 것을 千言萬語, 그 반대를 一言半句라고 하며, 여러 말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할 때는 一言以蔽之라고 말한다. 孔子詩經에 실린 3에 대해 一言以蔽之 曰思無邪(한 마디로 나쁜 내용이 없다)’라고 하였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고 한다. ‘자나 깨나 입조심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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