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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고사성어사전 / 바 ~ 자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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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발본색원(拔本塞源) // 폐단의 근원을 아주 없애 버림. 出典春秋左氏傳昭公 九年條

 

발본색원(拔本塞源)春秋左氏傳昭公 九年條 , 주왕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유래된 故事이다.

나에게 백부(伯父)가 계신 것은 마치 옷에 갓이 있는 것과 같다. 나무와 물에 근원이 있어야 하듯 백셩들에게 지혜로운 임금이 있어야 한다. 백부께서 만약 갓을 찢어버리고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으며[拔本塞源], 오로지 지혜로움을 버린다면 비록 오랑캐들이라도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春秋左氏傳昭公 九年條에 실린, 윗글의 원문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나에게 큰아버지가 계신 것은, 마치 의복에 갓과 면류관이 있고, 나무와 물에 근원이 있고, 백성들에게 지혜로운 임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큰아버지께서 만일 갓을 짜개고 면류관을 부수고, 근본을 뽑아 근원을 틀어막고[拔本塞源], 오로지 지혜로운 임금을 버리신다면, 비록 오랑캐라 할지라도 그 남음이 어찌 한 사람에 있으리오.

 

我在伯父 猶衣服之有冠冕 木水之有本源 民人之有謀主 伯父若裂冠毁冕 拔本塞源 專棄謀主 雖戎狄其何有餘一人..

 

이와는 다른 出典으로, 명나라 때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이 있다.

왕양명의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을 여기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가 평소 제창하던 하늘의 이치를 지니고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라.”는 말과 취지가 같다. , 사사로운 탐욕은 근본부터 뽑아버리고 그 근원을 틀어막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신적인 고사가 지금 세상에서는 범죄나 범죄 조직의 뿌리를 뽑아버린다는 데에만 사용되고 있으니 이는 통탄할 일인가, 아니면 언어의 사회성에 대한 금석지감이라 할 일인가?


61. 배수지진(背水之陣) // (물러설 수 없도록)물을 등지고 적을 치는 전법의 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의 비유.

出典史記淮陰侯列傳 / ‘十八史略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이 제위(帝位)에 오르기 2년 전(BC 204)의 일이다.

 

명장 한신(韓信)은 유방의 명에 따라 위()나라를 쳐부순 다음 조()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조나라에서는 2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나라로 들어오는 길목인 정형(井陘)의 협도(狹道) 출구 쪽에 성채(城砦)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폈다.

 

이에 앞서 군략가인 아좌거(李左車)가 재상 진여(陳餘)에게 한나라 군사가 협도를 통과할 때 들이치자고 건의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는데, 첩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한신은 서둘러 협도를 통과하다가 출구를 10리쯤 앞둔 곳에서 일단 행군을 멈췄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한신은 2,000여 기병을 조나라의 성채 바로 뒷산에 매복시키기로 하고 매복 임무를 맡은 장수에게 이렇게 명했다.

 

본대(本隊)는 내일 싸움에서 거짓 패주(敗走)할 것이다. 그 때 제군들은 적이 비운 성채를 점령한 뒤 한나라 깃발을 세우도록 하라.”

 

그리고 한신은 1만여 군사를 협도 출구 쪽으로 보내어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背水之陣]’ 한 다음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성채를 향해 나아갔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한나라 군사가 북을 울리며 진격하자 조나라 군사는 성채를 나와 응전했다. 2-3차 접전 끝에 한나라 군사는 퇴각하여 강가에 진을 친 부대에 합류했고, 승세(勝勢)를 탄 조나라 군사는 맹렬히 추격해 왔다. 한편 이러한 틈에 매복하고 있던 2,000여 한나라 기병대는 성채를 점령하고 한나라 깃발을 세웠다. 강을 등지고 진을 친 한나라 군사는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황인지라 필사적으로 대항하여 싸웠다. 이에 견디지 못한 조나라 군사가 성채로 돌아와 보니, 한나라 깃발이 나부끼고 있지 않는가. 당연히 전쟁은 한신의 대승리로 끝났다. 전승 축하연 때 부하 장수들이 배수진(背水陣)을 친 이유를 묻자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군사는 이번에 급히 편성한 오합지졸(烏合之卒)이 아닌가? 이런 군사는 사지(死地)에 두어야만 필사적으로 싸우는 법이다. 그래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것[背水之陣]’이다.”

 

동의어배수진(背水陣)


62. 백구과극(白駒過隙) // ‘흰 망아지가 빨리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본다뜻으 , ‘인생과 세월의 덧없고 짧음을 이르는 말. 出典莊子知北遊篇 / ‘史記

 

인생이 지나가는 것의 빠르기가, 문틈으로 흰 말이 지나가는 것을 봄과 같다는 말이다.

 

莊子知北遊篇에 다음과 같은 것이 실려 있다.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는 것은, ‘흰 말이 달려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白駒之過隙]처럼 순간일 뿐이다. 모든 사물들은 물이 솟아나듯이 문득 생겨났다가 물이 흐르듯 아득하게 사라져가는 것이다. 변화로써 태어났다가 또한 변화로써 죽을 뿐이다. 생물들은 이를 슬퍼하고, 사람들도 이를 슬퍼한다. 죽음이란 화살이 살통을 빠져나가고, 칼이 칼집을 빠져나감과 같이 혼백이 육신에서 빠져나가고 이에 몸이 따라 무()로 돌아가는 것을 말함이니, 이야말로 위대한 복귀(復歸)가 아닌가!

사람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이처럼 허무한 일이다.

 

史記유후세가(留侯世家)’에는 여태후(呂太后)가 유후(留侯)에 대하여 한 말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인생의 한 세상 사이는 흰 말이 틈을 지나가는 것[白駒過隙]’과 같다. 어찌 스스로 괴로워하기가 이와 같음에 이르겠는가?

 

人生一世間 如白駒過隙 何至自若如此乎.


63. 백년하청(百年河淸) // 중국의 황하(黃河)가 항상 흐리어 맑을 때가 없다는 , 아무리 오래 되어도 사물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뜻. 出典春秋左氏傳

 

()나라가 초()나라의 속국 격인 채()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도 정나라를 공격할

채비를 하게 되었다. 이에 정나라에서는 대책을 숙의하는 회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는 진()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자는 측과 초나라와 강화(講和)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때 자사(子駟)가 말하기를, “()나라의 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황하의 물이 맑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사람 수명으로는 맞지 않다. 여러 가지를 놓고 점을 치면 그물에 얽힌 듯 갈피를 못 잡는다.(周詩有之曰 待河之淸 人壽幾何非云詢多 職競作羅)그러니 우선 초나라와 강화를 해서 백성들을 위험에서 구하고 그 다음에 진나라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진나라의 구원병을 기다리는 것은 황하의 맑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 “황하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나라의 구원병이 올 것이 어긋난다는 비유로 쓴 말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대처하는 괴로운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이야기라 하겠다. 그 후 정나라는 자사(子駟)의 말대로 해서 위기를 면했다.


64. 백미(白眉) // 여럿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 出典三國志馬良傳

 

유비(劉備)는 적벽대전 후 형주(荊州), 양양(襄襄), 남군(南郡)을 얻고 군신(群臣)을 모아서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다. 이때 유비를 두 번이나 구하여 준 이적(伊籍), “새로 얻은 땅들을 오래 지키려면, 먼저 어진 선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유비가 이적(伊籍)에게 물었다.

어진 선비가 누구요?”

 

형양(荊襄) 땅 마량(馬良)의 다섯 형제가 모두들 재명(才名)이 있는데, 가장 어진 이는 양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으로 자()는 계상(季常)이라고 합니다. 또 향리(鄕里)에서도 마씨집 오상(五常)이 모두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가 있는 마량(馬良)이 제일 뛰어나다.(馬氏五常 白眉最良)’고 합니다. ()께서는 어찌 청하여 오지 않으십니까?”

 

유비는 즉시 마량(馬良)을 청하여 오게 했다.


65. 백아절현(伯牙絶鉉) // ‘백아(伯牙)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여 거문고 줄을 었다는 고사에서 참다운 벗의 죽음을 이르는 말.

出典列子湯問篇 / ‘荀子勸學篇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 높은 백아(伯牙)에게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잘 감상해 주는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며 높은 산과 큰 강의 분위기를 그려 내려고 시도하면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종자기의 잎에서는 탄성이 연발한다.

 

, 멋지다. 하늘 높이 우뚝 솓는 그 느낌은 마치 태산(泰山)같군

, 훌륭해, 넘칠 듯이 흘러 가는 그 느낌은 마치 황하(黃河)같군

 

두 사람은 그토록 마음이 통하는 연주자였고 청취자였으나 불행히도 종자기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백아는 절망한 나머지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기(知己)를 가리커 지음(知音)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순자(荀子)勸學篇,

옛날에 호파가 비파를 타면 물 속에 있던 물고기가 나와 들었고,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면 여섯 필의 말이 풀을 뜯다가 고개를 들어 쳐다 보았다. 그러므로 소리는 작더라도 들리지 않는 것이 없고 행동은 숨기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옥이 산에 있으면 풀과 나무가 윤택하고, 연못에 진주가 생기면 언덕이 마르지 않는다. 을 행하고 을 쌓지 않는다면 어찌 명성이 들리지 않겠는가?

 

그 후부터 친한 벗이 죽었을 때 <백아절현(伯牙絶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동의어백아파금(伯牙破琴)

유사어지음(知音), 고산유수(高山流水)


66. 백중지세(伯仲之勢) // 서로 어금버금한 형세. 出典魏 文帝典論

 

같은 부모의 형과 누님을 백부와 백모라 하고, 동생과 누이동생을 숙부와 숙모라고 부 르는 것은, 옛날부터의 중국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중국에서는 형제의 순서를 다시 세분하여, ‘· · · 로 부르고 있다.

 

禮記壇弓上篇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려서 이름을 짓고, 관례(冠禮)를 하고서 자()를 붙이고, 50에 백중(伯仲)으로써 하고, 죽으면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은 주()나라의 도리이다.

 

, 어린이가 태어나면 3개월만에 이름을 짓고, 20세가 되면 손님들을 초대하여 관()을 씌우고, ()를 짓는다. 50세가 되면 자() 위에 · 등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고, 죽으면 諡號를 내린다. 이것이 나라의 관습이었던 것이다.

 

<伯仲>이란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형제는 비슷하게 닮았기 때문에, 비교 평가하여도 서로 우열(優劣)을 가릴 수 없을 때, <그들은 伯仲之間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伯仲之間>이란 말을 처음에 쓴 것은, 나라의 文帝 조비(曹丕)였다.

文人들이 서로 가볍게 여기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했다. 부의(傅儀)와 반고(班固)에 있어서는 백중지간일 뿐이다.

文人相輕 自古而然 傅儀之於班固 伯仲之間耳. 魏 文帝典論


67. 분서갱유(焚書坑儒) // 중국 진시황이 민간의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을 구덩이 에 묻어 죽인 일. 出典史記秦始皇紀 / ‘十八史略秦篇

 

기원전 221, ()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나라 시황(始皇帝) 때의 일이다.

시황제(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 집권(中央執權)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咸陽宮)의 잔치에서 박사(博士)인 순우월(淳于越)현행 군현제도 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改體)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可否)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立案者)인 승상 이사(李斯)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發令)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 · 복서(卜筮) · 종수(種樹)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책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李斯)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焚書)라고 한다.

 

이듬해(BC 212)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神仙術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方士)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분노했다. 그런데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市中)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페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두어 놓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자기를 비방한 460명의 유생(幼生)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坑儒)’라고 한다.


68. 불구대천(不俱戴天) // ‘하늘을 같이 이지 못함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에서 같이 살 수 없을 만큼 큰 원한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出典禮記

 

禮記곡레편(曲禮篇)’에는 不俱戴天之讎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며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父之讎不與共戴天

兄弟之讎不反兵

交遊之讎不同國

 

,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원수를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

 

또 이 말은맹자(孟子)盡心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孟子의 말과 비교가 되어 다시 생각게 한다.

내 이제야 남의 아비를 죽이는 것이 중한 줄을 알겠노라. 남의 아비를 죽이면 남이 또한 그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그 형을 죽일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제 아비나 형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니라.”

 

오늘날 이 말은 아버지의 원수에 한하지 않고 더불어 살 수 없을 정도로 미운 놈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동의어대천지수(戴天之讎), 불공대천(不共戴天)

원 말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讎),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


69. 불혹(不惑) // 불혹의 나이. 곧 마흔 살. 出典論語爲政篇

孔子는 일생을 회고하며 자신의 학문 수양의 발전 과정에 대해論語爲政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 다섯 살 때 학문에 뜻을 두었고 吾十有五而志于學 <志學>

서른 살 때 입신했다. 三十而立 <而立>

마흔 살 때는 미혹하지 않았고 四十而不惑 <不惑>

쉰 살 때 하늘의 명을 알았다. 五十而知天命 <知命>

예순 살 때는 귀에 따랐고 六十而耳順 <耳順>

일흔 살이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從心>

 

<> 20: 약관(弱冠) 60: 환갑(還甲) 70: 고희(古稀)

77: 희수(喜壽) 88: 미수(米壽) 99: 백수(白壽)

 

동의어불혹지년(不惑之年)


70. 붕정만리(鵬程萬里) // 앞길이 매우 멀고도 큼. 出典莊子逍遙遊篇

 

이 말은莊子逍遙遊篇첫머리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나온 것이다.

 

북쪽 바다에 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의 큰 것은 그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새의 등은 그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지 못한다. 성내어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의 기운으로 장차 남쪽 바다로 옮기는데, 남쪽 바다는 하늘의 연못이다. 제해(齊諧)라는 사람이 있어 다음과 같은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있다.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김에, 물을 치기를 3천 리나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선풍(旋風)을 타고 위로 올라가기를 9만 리나 하며, 6개월이나 걸려서 남쪽 바다에 가서 쉰다.>

 

아지랑이와 티끌과 먼지를 생물들이 뿜어내건만, 하늘은 푸르고 푸르르니, 그 올바른 색깔인가? 그 멀어서 끝간 데가 없는 까닭인가?

 

그 내려다봄에 또한 이와같을 뿐이다. 또한 대저 물의 쌓임이 두텁지 않으면, 큰 배를 띄움에 힘이 없고, 술잔의 물을 뜰의 파인 곳에 부으면, 지푸라기는 배가 되어 뜨지만, 잔을 놓으면 엎어진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의 쌓임이 두텁지 못하면, 그 큰 날개를 띄움에 힘이 없다. 그러므로 9만 리면 바람이 그 아래에 있다. 그리하여 뒤에 곧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지고서, 아무 것도 걸리는 것이 없다. 이리하여 지금 비로소 붕새는 남쪽으로 날아가려는 것이다.

 

<붕정만리(鵬程萬里)>는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


71. 비육지탄(脾肉之嘆) // 성공하지 못하고 한갓 세월만 보냄에 대한 탄식.

出典三國志蜀志

 

유비(劉備)198년에 조조(曹操)와 협력하여, 한 마리 이리와 같은 용장(勇壯) 여포(呂布)를 하비(下邳)에서 격파한 다음, ()의 임시 수도 허창(許昌)으로 올라가 조조의 주선(周旋)으로 헌제(獻帝)에게 배알(拜謁)하고 좌장군에 임명되었지만, 그대로 조조의 휘하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허창을 탈출하여 각지로 전전한 끝에 황족(皇族)의 일족인 형주 (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여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유표에게 초대되어 형주성(荊州城)에 갔을 때, 변소에서 볼일을 보고 일 어서던 유비는 문득 자신의 넓적다리에 살이 많이 붙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눈물을 흘렸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유표가 유비의 눈물 흔적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묻자, 유비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말을 타고 전장을 돌아다녀서, 넓적다리에 살이 붙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말을 타지 않고 너무 빈둥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살이 들러붙었습니다. 세월이 가는 것은 빨라 늙음이 이르는데도, 아직 공업(功業)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슬플 뿐입니다.”

 

備住荊州數年 嘗於表坐起至厠 見髀肉生 慨然流悌 還坐 表怪問備 備曰 吾常身不離鞍 髀肉皆消 今不復騎 髀裏肉生 日月若馳 老將至矣 而功業不建 是以悲耳.


72.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 사물이 서로 화합하기 어려움을 일컫는 말. 出典楚辭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란, 그 성질이 전혀 반대여서, 아무래도 타협하기 어려운 사이를 말한다. 다음은楚辭칠간(七諫)’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사람 일의 불행을 슬퍼하여, 太命을 붙여서

함지(咸池)에게 맡긴다.

몸은 병을 얻어 쉬지 못하고,

마음은 임금과 같이 끓어오르네.

 

얼음과 숯은 가히 써 서로 함께하지 못하니,

내 본디부터 목숨이 길지 못함을 알겠구나.

홀로 괴롭게 죽어 즐거움이 없음을 슬퍼하여,

나는 나이가 아직 다하지 않음을 슬퍼한다.

 

氷炭不可以相竝兮

吾固知乎命之不長

哀獨苦死之無樂兮

措余年之未央.


73. 사면초가(四面楚歌) // 사면이 모두 적에게 포위된 경우와 고립된 경우를 이 르는 말. 出典史記項羽本紀

 

항우는 곧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 : 서주(徐州)]을 향해 철군(撤軍) 길에 올랐으나 서쪽의 한중[漢中 : 섬서성(陝西省)]으로 철수하려던 유방은 참모 장량(張良) · 진평(陣平)의 진언에 따라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윽고 해하[垓下 : 안휘성(安徽省)]에서 한신(韓信)이 지휘하는 한나라 대군에게 겹겹이 포위된 초나라 진영(陣營)은 군가사 격감한 데다가 군량마저 떨어져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밤중에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 소리[四面楚歌]’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초나라 군사들은 전의를 잃고 그리운 고향의 노랫소리 에 눈물을 흘리며 다투어 도망을 쳤다. 항복한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한 장량의 작전이 주효(主效)했던 것이다.

 

항우는 깜짝 놀라서 외치듯 말했다.

아니, 한나라는 벌써 초나라를 다 차지했단 말인가? 어찌 저토록 초나라 사람들이 많은가?”

 

이미 끝장이라고 생각한 항우는 결별의 주연(酒宴))을 베풀고는 사랑하는 虞美人四面楚歌의 애절한 노래를 부르자, 비분강개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건만

때는 불리하고 추()도 나아가지 않누나.

추가 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야 우야 그대를 어찌할 거나.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동의어사면초가성(四面楚歌聲)


74. 사불급설(駟不及舌) // 한 번 내뱉은 말은 네 마리가 끄는 빠른 마차로도 라잡지 못한다는 뜻으로, ‘말을 삼가야 한다는 말. 出典論語顔淵篇

 

자공(子貢)을 보고 극자성(棘子成)이 물었다.

君子는 그 바탕만 있으면 되지 어찌해서 문()이 필요합니까?”

 

이 말을 듣고 자공은 이렇게 말했다.

안타깝다. 그대의 말은 군자답지만 사()도 혀[]에 미치지 못한다. ()이 질()과 같고 질이 문과 같다면,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이나 개와 양의 가죽이 같다는 말인가?”

 

惜乎夫子之說 君子也 駟不及舌 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鞹猶犬羊之鞹.

 

나라 때의 명재상인 풍도(馮道)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口是禍之門 舌是斬自刀.

 

明心寶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으나 편안할 것이다.”

 

口是傷人斧 言是割舌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


75. 살신성인(殺身成仁) // 절개를 지켜 목숨을 버림. 出典論語衛靈公篇

 

이 말은 춘추시대, ()을 이상적 덕목으로 삼는 공자(孔子)의 언행을 수록한논어(論語)<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을 저버리지 않으며

스스로 몸을 죽여서 을 이룬다.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공자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의 도는 제자인 증자(曾子)논어(論語)<이인편(里仁篇)>에서 지적했듯이 ()’()’에 귀착한다.

 

부자(夫子)’, ‘일 뿐이다.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이란 자기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고, ‘()’()’의 정신을 그대로 타인에게 미치게 하는 마음이다. 曾子孔子()’이 곧 이 충서(충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76. 삼고초려(三顧草廬) //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草廬)를 세 이나 찾아서 마침내 그를 군사(軍師)로 삼은 일. 出典三國志蜀志 諸葛亮傳

 

후한(후한) 말엽, 유비(劉備)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의형제를 맺고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全軍)을 통솔할 군사(軍師)가 없어 늘 조조군(曹操軍)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날 유비가 은사(隱士)인 사마휘(司馬徽)에게 군사(軍師)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자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량(諸葛亮 : 孔明, 181-234)이 복룡인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襄陽)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은 새파란 애숭이라던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다.”

 

마침내 수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 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나라의 조조, ()나라의 손권(孫權)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三分)하고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蜀漢)을 세워 皇帝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어 후주(後主) 유선 때까지 2(二朝)를 섬겨 후세 충신의 표상이 되었다.

 

동의어초려삼고(草廬三顧), 삼고지례(三顧之禮)

유사어삼고지우(三顧知遇)


77. 삼천지교(三遷之敎) //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가르치기 위해 집을 세 번 나 옮긴 일. 出典列女傳’ / ‘母儀傳

 

전국시대, 유학자(儒學者)의 중심 인물로서 성인(聖人)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 맹자는 공자처럼 생이지지(生而知之)했다고 추앙되지도 않았고, 태어나자마자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이라고 했다는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승이 유명한 분도 아니어서 증자(曾子)의 문인(門人)에게서 사숙(私淑)했다는 것을 보면, 기초는 스승에게서 배웠으나 그의 독특한 이론인 성선설(性善說), 사단설(四端說), 호연지기설(浩然之氣說)은 다 그의 독학에서 얻은 독창적인 것이다. 맹자는 독학자였기에 노력과 의지 못지 않게 교육 환경이 중요했고, 이 교육 환경 조성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한 것이다.

 

孟子의 어머니는 처음 묘지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흉내만 내며 놀았다. 그래서 교육상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맹자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이곳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맹자 어머니는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맹자는 제구(제구)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고 놀았다. 서당에서는 유교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예절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 어머니는 이런 곳이야말로 자식을 기르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하며 비로소 만족했다.

 

원 말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유사어현모지교(賢母之敎),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


78. 상가지구(喪家之狗) // ‘상갓집 개’(속담)

초상집 개, 주인 없는 개.

여위고 기운 없이 초라한 사람을 빈정거리는 말.

出典孔子家語’ / ‘史記孔子世家

 

춘추시대 말엽의 대철학자요 사상가로서 유교의 비조(鼻祖)孔子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라 정공(定公)때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던 孔子는 왕족인 삼환(三桓)씨에게 배척을 당하여 노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그후 공자는 십 수 년간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도덕 정치를 펼 수 있는 나라를 찾아서 6-7개국을 순방했으나 받아 주는 군주(君主)가 없었다.

 

한 번은 정()나라를 찾아갔던 공자(56)가 제자들을 놓쳐 버리고 홀로 동문(東門) 옆에 서서 그들이 찾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스승을 찾아나선 자공(子貢)이 한 행인에게 의 인상 착의(人相着衣)를 대면서 혹시 보지 못했느냐고 묻자, 그 행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동문(東門) 옆에 웬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는 요()임금과 같았고, 목은 순() · ()임금과 같았으며, 어깨는 명재상(名宰相) 자산(子産)과 같았소. 그러나 허리 아래로는 우()임금에게 세 치쯤 미치지 못했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상갓집 개[喪家之狗]’같습디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동문으로 달려간 자공은 공자를 만나자 방금 행인에게서 들은 이야 기를 고했다. 이야기를 듣고난 공자는 웃으며 말했다.

용모에 대한 형용은 들어맞는다고 하기 어려우나 상갓집 개와 같다는 표현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 후 정()나라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공자는 그야말로 상갓집 개와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기운 없이 노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孔子適鄭 與弟子相失 孔子獨立郭東門 鄭人或謂子貢曰 東門有人 其類似堯 其項類皐陶 其肩類子産 自然腰以下 下及禹三寸 纍纍若喪家之狗 子貢以實告孔子 孔子欣然笑曰 形狀末也 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


79. 새옹지마(塞翁之馬) // 인생의 길흉화복은 늘 바뀌어 변화가 많음을 이르는 .

出典淮南子人間訓篇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要塞) 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老翁)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 노옹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몇 달이 지난 어느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치하(致賀)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화()가 될는지?”

 

그런데 어느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전사(戰死)했다.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그러므로 인간세상에서 가 되고 이 되는 것은 그 변화가 너무 깊어 측량할 수가 없다.

 

近塞上之人 有善術者 馬無故亡而入胡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數月 其馬將胡駿馬而歸 人皆賀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禍乎 家富良馬 其子好騎 墮而折其髀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一年 胡人大入塞 丁壯者引弦而戰 近塞之人 死者十九 此獨以跛之故 父子相保 故福之爲禍 禍之爲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원 말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

동의어새옹마(塞翁馬), 북옹마(北翁馬)

유사어새옹득실(塞翁得失), 새옹화복(塞翁禍福), 화복규승(禍福糾繩)


80. 성하지맹(城下之盟) // 적국에게 항복하고 맺는 치욕적인 강화(講和)의 맹약().

出典春秋左氏傳桓公 十二年

 

환공(桓公) 12(BC 700), 초나라가 교()로 쳐들어가 성의 남문에 진을 쳤을 때, 막오 (莫敖)라는 벼슬에 있는 굴하(屈瑕)가 환공(桓公)에게 말했다.

()의 사람들은 편협하고 경솔합니다. 경솔하면 도모함이 적은 법이니, 청컨대 땔나무를 취하는 인부를 호위를 붙여 내놓아, 이로써 그들을 유인하면 어떨까요?”

 

이리하여 그 계교대로 하자, ()의 군사들은 첫날 초()의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 다음날 교()의 군사들은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속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에 매복하였으므로, 크게 패하여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

 

楚伐絞 軍其南門 莫敖屈瑕曰 絞小而輕 輕則寡謀 請無扜采樵者以誘之 從之 絞人獲三十人 明日絞人爭出 驅楚役徒於山中 楚人坐其北門而覆諸出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81. 송양지인(宋襄之仁) // 지나치게 착하기만 하여 권도(權道)가 없음을 이르는 .

出典十八史略卷一

 

춘추시대인 주()나라 양왕(襄王) 2(BC 650), ()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자부(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자보가 위()에 올라 양공(襄公)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7년 후(BC 643), 춘추(春秋)의 첫 패자(覇者)인 제()나라 환공(桓公)이 죽고, 송나라에는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覇者)가 될 징조라며 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公子) 간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소(:孝公)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 (), () 세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목이(目夷)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禍根)’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通交)한 정()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河南省)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전군(全軍)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목이가 참다못해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君子不困於阨)

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숫적으로 열세(劣勢)였던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되어 이듬해 죽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송나라 양공의 인()’이라며 비웃었다.(世笑以爲宋襄之仁)


82. 수구초심(首丘初心) //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는 로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 出典禮記檀弓上篇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일으킨 여상(呂尙) 태공망(太公望)은 제()나라에 있는 영구(營丘)에 봉해졌는데, 계속해서 다섯 대()에 이르기까지 주()의 호경(鎬京)에 반장(反葬)했다.

 

군자께서 이르시기를 음악은 그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바를 즐기며 예()란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이르되,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향하는 것은 인()이라고 하였다.

 

太公封於營丘 此及五世 皆反葬於周 君子曰 樂樂其所自生 禮不忘其本 古之人有言曰 狐死正 丘首仁也.


83. 수서양단(首鼠兩端) // 진퇴,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 出典史記魏其武安侯列傳

 

전한 7황제인 무제(武帝 : BC 141-87)때의 일이다. 5문제(文帝)의 황후의 조카인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6경제(景帝)의 황후의 동생인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蚠)은 같은 외척이었지만 당시 연장자인 두영은 서산 낙일(西山落日)하는 고참 장군이었고, 전분은 욱일 승천(旭日昇天)하는 신진 재상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두영의 친구인 관부(灌夫) 장군이 고관 대작(高官大爵)들이 모인 주연(酒宴)에서 전분에게 대드는 실수를 범했다. 사건의 발단은 관부가 두영을 무시한 한 고관을 힐책(詰責)하는데 전분이 그 고관을 두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관부가 한사코 사죄를 거부하자 이 일은 결국 조의(朝議)에 오르게 되었다. 양쪽 주장을 다 들은 무제는 중신들에게 물었다.

 

경들이 판단컨대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 것 같소?”

 

처음에는 의견이 둘로 나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영의 추종자로 알려진 내사(內史) 정당시(鄭當時)조차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도 명확한 대답을 피했다.

 

폐하, 양쪽 다 일리가 있사와 흑백을 가리기가 심히 어렵나이다.”

 

중신들의 불분명한 태도에 실망한 무제가 자리를 뜨자 조의는 거기서 끝났다. 전분은 화가 나서 한안국을 책망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首鼠兩端]’처럼 망설였소? 이 사건은 시비곡직(是非曲直)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인데. 그대와 더불어 대머리가 벗겨진 늙은이를 해치우려 했는데, 어찌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했는가?”

 

與長孺共一禿翁 何爲首鼠兩端.

 

동의어수시양단(首施兩端)

유사어좌고우면(左顧右眄)


84. 수어지교(水魚之交) //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 出典三國志蜀志 諸葛傳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와 같은 용장이 있었지만, 천하의 계교를 세울 만한 지략이 뛰어난 모사(謀士)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은 사람을 얻었으므로, 유비의 기쁨은 몹시 컸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금후에 취해야 할 방침으로,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눌러서 그 곳을 근거지로 할 것과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어루만져 뒤의 근심을 끊을 것과 내정을 다 스려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실리를 올릴 것과 손권과 결탁하여 조조를 고립시킨 후 시기를 보아 조조를 토벌할 것 등의 천하 평정의 계책을 말하자 유비는 그 계책에 전적으로 찬성하여 그 실현에 힘을 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제갈공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어 두 사람의 교분은 날이 갈수록 친밀해졌다. 그러자 관우나 장비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제갈공명(이 때 공명의 나이는 28)만 중하게 여기고 자기들은 가볍게 취급받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이 이리 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 등을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즉 나와 제갈공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자, 관우와 장비 등은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 않게 되었다.

 

於是與亮情好日密 關羽張飛等不悅 先生解之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諸君勿復言 羽飛乃止.


85. 수주대토(守株待兎) // 변통할 줄 모르고 어리석게 지키기만 함. 出典韓非子

 

()나라에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다.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오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았다.

 

덕분에 토끼 한 마리를 공짜로 얻은 농부는 농사일보다 토끼를 잡으면 더 수지가 맞겠다고 생각하고는 농사일은 집어치우고 매일 밭두둑에 앉아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오기만 기다렸다.[守株待兎]

 

그러나 토끼는 그곳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농부 자신은 송()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밭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농사를 망친 것은 물론이다.

 

宋人 有耕田者 田中 有株 免走觸株 折頸而死 因釋其耒 而守株 冀復得免 免不可不得 而身爲宋國笑.

 

한비자(韓非子)는 요순(堯舜)을 이상으로 하는 왕도(王道) 정치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수주대토(守株待兎)의 비유를 들었다.

 

그는 시대의 변천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라고 보고 복고주의(復古主義)는 진화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착각이라고 주장하면서 낡은 관습을 지키며 새로운 시대에 순응할 줄 모르는 사상 또는 사람에게 이 수주대토(守株待兎)의 비유를 적용한 것이다.


86. 순망치한(脣亡齒寒) //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가까운 사이의 이웃 나라 중 한 쪽이 망하면 다른 한 쪽도 온 전하기 어려움의 비유.

서로 도우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 또는 서로 도움으로 써 성립되는 관계의 비유. 出典春秋左氏傳僖公五年條

 

춘추시대 말엽(BC 655), 오패(五覇)의 한 사람인 진()나라 문공(文公)의 아버지 헌공(獻公)이 괵() · () 두 나라를 공략할 때의 일이다.

 

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헌공은 진나라와 괵나라의 중간에 위치한 우()나라의 우공(虞公)에게 길을 빌려 주면 많은 재보(財寶)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우공이 이 제의를 수락하려 하자 중신 궁지기(宮之奇)가 극구 간했다.

 

전하,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입니다.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덧방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란 말이 있사온데, 이는 곧 괵나라와 우나라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되옵니다. 그런 가까운 사이인 괵나라를 치려는 진나라에 길을 빌려 준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옵니다.”

 

경은 진나라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진나라와 우리 우나라는 모두 주황실(周皇室)에서 갈라져 나온 동종(同宗)의 나라가 아니오? 그러니 해()를 줄 리가 있겠소?”

 

괵나라 역시 동종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진나라는 동종의 정리(情理)를 잃은 지 오래이옵니다. 예컨대 지난날 진나라는 종친(宗親)인 제()나라 환공(桓公)과 초()나라 장공(莊公)의 겨레붙이까지 죽인 일도 있지 않사옵니까? 전하, 그런 무도한 진나라를 믿어선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재보에 눈이 먼 우공은 결국 진나라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자 궁지기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일가권속(一家眷屬)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났다.

 

그 해 12, 괵나라를 멸하고 돌아가던 진나라 군사는 궁지기의 예언대로 단숨에 우나라를 공략하고 우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虢虞之表也 虢亡 虞必從之 晉不可啓 寇不可翫 一之爲甚 其可再乎 諺所謂輔車相依 脣亡齒寒者 其虞虢之謂也.

 

동의어순치지국(脣齒之國), 순치보거(脣齒輔車)

유사어조지양익(鳥之兩翼), 거지양륜(車之兩輪)


87. 신출귀몰(神出鬼沒) // 자유 자재로 출몰하여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음.

出典淮南子兵略訓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엮은淮南子兵略訓은 도가 사상(道家思想)을 기본 이론으로 한 전략론(戰略論)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군의 계략과 진()치는 일과 군대의 세력과 병기가 겉으로 보아서 적군이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것이라면, 용병에 교묘한 것이 못된다고 말하고 있다.교묘한 자의 행동은 신()이 나타나고 귀신이 돌아 다니는 것처럼 별과 같이 빛나고 하늘과 같이 운행하는 것이다. 그 나아가고 물러남과 굽히고 펴는 것은 아무런 전조(前兆)도 없고, 형태도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출귀행(神出鬼行)>이란 ()이 나타나고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뜻으로, 귀신과 같이 나오고 들어감이 자유자재여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말하거니와, 같은 말이 병서(兵書)삼략(三略)에도 실려 있다. 이 병서는 황석공(黃石公)이 이상(圯上)에서 유방(劉邦)의 공신인 장량에게 준 것으로, 나라의 적호(翟灝)가 지은통속편(通俗篇)귀신지부<神出鬼沒>에서 나온 것으로, 삼략(三略)<신출귀행(神出鬼行)>의 말을 들고 있다.

 

<神出鬼沒>이 직접 나온 것은당희장어(唐戲場語)에 나오는 두 머리 세 얼굴의 귀신이 나타나고 없어진다.(兩頭三面 神出鬼沒)’의 구절이지만, 이것은淮南子삼략(三略)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88. 실사구시(實事求是) //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

出典漢書河間獻王德傳

 

이 말은漢書河間獻王德傳에 실려 있는, ‘학문을 닦아 예를 좋아하고, 일을 참답게 하여 옳음을 구함.(修學好古 實事求是)’에서 나온 말이다.

 

19세기 초기, 즉 청나라 말기에서부터 중화민국 초기에 걸쳐 계몽사상가로서 활약한 양계초(梁啓超)淸代學術槪論을 써서 淸代 학술의 개론을 시도한 사람이다.

 

양계초는 다시 능정감(凌廷堪)이 대진(戴震)을 위하여 지은事略狀에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이용하여 대진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드러내 밝히고 있다.

 

옛날 하간(河間)의 헌왕(獻王)은 실사(實事)에 대하여 옳음을 구하였다. 도대체 실사(實事)의 앞에 있으면서 내가 옳다고 하는 것도 사람들은 억지로 말하여 이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하고, 내가 그르다고 하는 것도 사람들은 억지로 말하여 이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한다.” (교례당집35)

 

더구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학문의 표적으로서 존중한 것은 대지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보다도 후배에 해당하는 청나라 왕조의 학자들 중에는 주대소(朱大韶)나 왕정진(王廷珍)과 같이, 스스로를 實事求是齌라고 아호를 붙인 사람들도 있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란 사실을 토대로 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말하며, 청조(淸朝)의 고증학파가 공론(空論)만 일삼는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반동으로 내세운 표어이다.

 

고증학자(考證學者)들은 정확한 고증을 존중하는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학문연구의 입장을 취했다.


89. 양두구육(羊頭狗肉) // 겉으로 훌륭하게 내세우나 속은 변변찮음.

出典晏子春秋無門關 揚子法言

 

춘추시대, 제나라 영공(靈公) 때의 일이다.

 

영공은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男裝)을 시켜놓고 완상(玩賞)하는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취미는 곧 백성들 사이에도 유행되어 남장한 여인이 날로 늘어났다. 그러자 영공은 재상인 안영(晏嬰:晏子)에게 궁 밖에서 남장하는 여인들을 처벌하라.’는 금령(禁令)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그 유행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공이 안영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시며서 궁 밖의 여인들에게는 금령(禁令)을 내렸습니다. 하오면 이는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羊頭狗肉]’과 같습니다. 이제라도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금하십시오. 그러면 궁 밖의 여인들도 감히 남장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공은 안영의 진언(眞言)에 따라 즉시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이튿날부터 제나라에서는 남장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임금께서는 궁중에서는 미인에게 남장하는 것을 용서하면서도, 궁중 밖에서는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소의 머리를 문에 걸어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궁주에서는 미인에게 남장시키는 것을 금하지 않는 것입니까? 궁중에서 금한다면 궁중 밖에서도 감히 남장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君使服之於內 而禁之於外 猶懸牛首于門 而賣馬肉於內也 公何以不使內勿服 則外莫敢爲也.

 

동의어현양수매마육(懸羊首賣馬肉), 현우수()마육(懸牛首()馬肉)

유사어양질호피(羊質虎皮), 현옥고석(衒玉賈石)


90. 양상군자(梁上君子) // 대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집 안에 들어온 도둑의 비유.

천정 위의 쥐를 달리 일컫는 말. 出典後漢書陳寔

 

후한 말엽, 진식(陳寔)이란 사람이 태구현(太丘縣 : 河南省 所在)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 그는 늘 겸손한 자세로 현민(縣民)의 고충을 헤아리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현민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어느해 흉년이 들어 현민의 생계가 몹시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날 밤, 진식이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웬 사내가 몰래 드러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도둑이 분명했다. 진식은 모르는 척하고 독서를 계속하다가 아들과 손자들을 대청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악인(惡人)이라 해도 모두 본성이 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습관이 어느덧 성품이 되어 악행도 하게 되느니라. 이를테면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그렇다.”

 

그러자 하는 소리가 났다. 진식의 말에 감동한 도둑이 대들보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는 마루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했다. 진식이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얼굴을 보아하니 악인은 아닌 것 같다.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그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보냈다. 이로부터 이 고을에 다시는 도둑이 나타나지 않았다.

 

時勢荒民儉 有盜夜入其室 止於梁上 寔陰見乃起自整拂 呼命子孫 正色訓之曰 夫人不可不自勉 不善之人未必本惡 習以性成 遂至於此 梁上君子者是矣 盜大驚自投於地 稽顙歸罪 寔徐 譬之曰 視君狀貌不似惡人 宜深剋己反善 然此當由貧困 令遺絹二匹 自是一縣無復盜竊.

 


91. 양약고구(良藥苦口) // ‘효험이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충언(忠言) 귀에는 거슬리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말. 出典史記留侯世家 / ‘孔子家語六本篇

 

이것은 孔子의 말씀으로孔子家語六本篇’,설원(說苑)정간편(正諫篇)’에 실려 있다. 효과가 있는 좋은 약은 입에 넣을 때 쓰고, 사람들에게 듣는 충고는 좋은 말일수록 귀에 들어올 때 거슬린다는 뜻이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고하는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 나라 탕왕(湯王)은 곧은 말을 하는 충신이 있었기 때문에 번창했고, 나라의 걸왕(桀王)나라의 주왕(紂王)은 무조건 따르는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임금에게 다투는 신하가 없고, 아버지에게 다투는 아들이 없고, 형에게 다투는 동생이 없고, 선비에게 다투는 친구가 없다면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신하가 해야 하고,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르면 아들이 해야 하고, 형이 잘못을 저지르면 동생이 해야 하고,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면 친구가 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에 위태하고 망하는 징조가 없고, 집안에 패란(悖亂)의 악행도 없고, 부자와 형제에 잘못이 없고, 친구와의 사귐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孔子曰 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 湯武以諤諤而昌 桀紂以唯唯而亡 君無爭臣 父無爭子 兄無爭弟 士無爭友 無己過者 未之有也 故曰 君失之 臣得之 父失之 子得之 兄失之 弟得之 己失之 友得之 是以國無危亡之兆 家無悖亂之惡 父子兄弟無失 而交遊無絶也.

 

원 말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동의어충언역어이(忠言逆於耳), 간언역어이(諫言逆於耳), 금언역어이(金言逆於耳)


92. 어부지리(漁父之利) // ‘두 사람이 이해 관계로 다투는 사이에 엉뚱한 딴 사람 이 이득을 봄을 일컬음. 出典戰國策 燕策

 

전국시대, ()나라에 많은 군사를 파병한 연()나라에 기근(饑饉)이 들자 이웃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은 기다렸다는 듯이 침략 준비를 서둘렀다. 그래서 연나라 소왕(昭王)은 종횡가(縱橫家)로서 그간 연나라를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온 소대(蘇代)에게 혜문왕을 설득하도록 부탁했다.

 

()나라에 도착한 소대(蘇代)는 소진(蘇秦)의 동생답게 거침없이 혜문왕을 설득하여 혜문왕의 연나라 침공 계획을 철회시켰다고 한다.

 

오늘 귀국에 들어오는 길에 역수(易水)를 지나다가 문득 강변을 바라보니 조개[蚌蛤(방합)]가 조가비를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도요새[()]가 날아와 뾰족한 부리로 조갯살을 쪼았습니다. 깜짝 놀란 조개는 화가 나서 조가비를 굳게 닫고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도요새가 이대로 오늘도 내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너는 말라 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자, 조개도 지지 않고 내가 오늘도 내일도 놓아 주지 않으면 너야말로 굶어 죽고 말 것이다.’하고 맞받았습니다. 이렇게 쌍방(雙方)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운수사납게도 그곳을 지나가던 어부(漁夫)에게 그만 둘다 잡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연나라를 치려고 하십니다만,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나라는 도요새입니다. () · () 두 나라가 공연히 싸워 백성들을 피폐(疲弊)케 한다면, 귀국과 인접해 있는 저 강대한 진()나라가 어부가 되어 맛있는 국물을 다 마셔 버리고 말 것입니다.”

 

과연 옳은 말이오.”하며 혜문왕은 침공을 중지했다.

 

趙且伐燕 蘇代爲燕謂惠王曰 今者臣來過易水 蚌方出曝 而鷸啄其肉 蚌合而拑其喙 鷸曰 今日不雨 明日不雨 卽有死蚌 蚌亦爲鷸曰 今日不出 明日不出 卽有死鷸 兩者不肯相舍 漁者得而幷禽之 今趙且伐燕 燕趙久相支 以弊大衆 臣恐强秦之爲漁夫也 故願王之熟計之也 惠王曰 善乃止.

 

동의어어부지리(漁父之利), 방휼지쟁(蚌鷸之爭)

견토지쟁(犬兎之爭), 전부지공(田父之功),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93. 연목구어(緣木求魚) //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듯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 出典孟子梁惠王篇

 

전국시대인 주()나라 신정왕(愼靚王) 3(BC 318), (: )나라 혜왕(惠王)과 작별한 맹자(孟子)는 제()나라로 갔다. 당시 나이 50이 넘은 孟子는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인의(仁義)를 치세의 근본으로 삼는 왕도 정치론(王道政治論)을 유세(遊說) 중이었다.

 

전하의 대망(大望)이란 무엇입니까?”

 

선왕은 웃기만 할 뿐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맹자 앞에서 패도(覇道)를 논하기가 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맹자는 짐짓 이런 질문을 던져 선왕의 대답을 유도하였다.

 

전하,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 아니면 아름다운 색()이 부족하시기 때문입니까?”

과인에겐 그런 사소한 욕망은 없소.”

선왕이 맹자의 교묘한 화술에 끌려들자 맹자는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시다면 전하의 대망은 천하통일을 하시고 사방의 오랑캐들까지 복종케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하오나 종래의 방법(무력)으로 그것(천하통일)을 이루려 하시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같습니다.”

잘못된 방법[武力]으론 목적[天下統一]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을 듣자 선왕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토록 무리한 일이오?”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합니다.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일은 물고기만 구하지 못할 뿐 후난(後難)은 없습니다. 하오나 패도(覇道)를 좇다가 실패하는 날에는 나라가 멸망하는 재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曰 王之所大欲 可得聞與 王笑而不言 曰 爲肥甘 不足於口與 輕煖不足於體與 抑爲采色 不足視於目與 曰 吾不爲是也 曰 然則 王之所大欲 可知已 欲辟土地 朝秦楚 `中國而撫四夷也 以若所爲 求若所欲 猶緣木而求魚也 王曰 若是其甚與 曰 殆有甚焉 緣木求魚 雖不得魚 無後災.


94. 오리무중(五里霧中) // 짙은 안개 속에 잇어 방향을 알 수 없음과 같이, 일에 대해 알 길이 없음의 비유. 出典後漢書張楷傳

 

후한(後漢) 순제(順帝) , 학문이 뛰어난 장해(張楷)라는 선비가 있었다. 순제가 여러 번 등용하려 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대고 끝내 출사(出仕)치 않았다.

 

장해(張楷)春秋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서 평소 거느리고 있는 문하생만 해도 100명을 웃돌았다. 게다가 전국 각처의 숙유(夙儒)들을 비롯하여 귀족, 고관대작, 환관(宦官)들까지 다투어 그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는 이를 싫어하여 화음산(華陰山) 기슭에 자리한 고향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해(張楷)를 좇아온 문하생과 학자들로 인해 그의 집은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볐다. 나중에는 화음산 남쪽 기슭에 장해(張楷)의 자()를 딴 공초(公超)라는 저잣거리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해(張楷)는 학문뿐만 아니라 도술(道術)에도 능하여 쉽사리 오리무(五里霧)’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방술(方術)로써 사방 5리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장해(張楷)는 성격이 도술을 좋아하여, 능히 5안의 안개를 지을 수가 있었 다. 그때에 관서(關西) 사람인 배우(裵優)가 또한 능히 3의 안개를 일으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장해(張楷)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제자로 들어가 배우기를 바랬지만 장해(張楷)는 모습을 숨겨서 그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張楷 性好道術 能作五里霧 時關書人裵優亦能爲三里霧 自以不如楷從學之 楷避不肯見.


95. 오월동주(吳越同舟) // 사이가 나쁜 사람끼리 같은 장소와 처지에 함께 놓.

出典孫子兵法九地篇

 

孫子라는 책은 중국의 유명한 병서(兵書)로서 춘추시대 오나라의 손무(孫武)가 쓴 것이다. 손무(孫武)는 오왕(吳王) 합려(闔閭) , 서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읍을 공략하고 북방의 제()나라와 진()나라를 격파한 명장이기도 했다.

 

孫子九地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을 쓰는 법에는 아홉 가지의 지()가 있다. 그 구지(九地) 중 최후의 것을 사지(死地)라 한다. 주저 없이 일어서 싸우면 살길이 있고, 기가 꺾이어 망설이면 패망하고 마는 필사(必死)의 지()이다.

 

그러므로 사지에 있을 때는 싸워야 활로(活路)가 열린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필사(必死)의 장()에서는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유능한 장수의 용병술(用兵術)은 예컨대 상산(常山)에 서식하는 솔연(率然)이란 큰 뱀의 몸놀림과 같아야 한다. 머리를 치면 꼬리가 날아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벼든다. 또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덤벼든다. 이처럼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옛부터 서로 적대시해 온 ()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吳越同舟]’ 강을 건넌다고 하자.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큰 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 한다면 오나라 사람이나 월나라 사람이나 다 같이 평소의 적개심(敵愾心)을 잊고 서로 왼손, 오른손이 되어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전차(戰車)의 말[]들을 서로 단단히 붙들어 매고 바퀴를 땅에 묻고서 적에게 그 방비를 파괴 당하지 않으려 해봤자 최후에 의지(依支)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의지(依支)가 되는 것은 오로지 필사적으로 하나로 뭉친 병사들의 마음이다.“

 

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遇風 其相救也 如左右手.

 

동의어오월지쟁(吳越之爭), 오월지사(吳越之思)

유사어동주상구(同舟相救), 동주제강(同舟濟江), 호월동주(胡越同舟), 오월지부(吳越之富)


96. 오합지졸(烏合之卒) // 갑자기 모인 훈련 없는 군사.

규율도 통일성도 없는 군중. 出典後漢書耿龕傳

 

전한(前漢) , 대사마(大司馬)인 왕망(王莽)은 평제(平帝)를 시해(弑害)하고 나이 어린 영()을 세워 새 황제로 삼았으나 3년 후 영()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잦은 정변과 실정(失政)으로 말미암아 각지에 도둑떼가 들끓었다.

 

이처럼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유수(劉秀)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왕망(王莽) 일당을 주 벌(誅伐)하고 경제(景帝)의 후손인 유현(劉玄)을 황제로 옹립(擁立)했다. 이에 천하는 다시 한나라로 돌아갔다.

 

대사마가 된 유수가 이듬해 성제(成帝)의 아들 유자여(劉子輿)를 자처하며 황제를 참칭(僣稱)하는 왕랑(王郞)을 토벌하러 나서자, 상곡(上谷) 태수 경황(耿況)은 즉시 아들인 경감(耿龕)에게 군사를 주어 평소부터 흠모하던 유수의 토벌군에 들어 갔다. 그때 손창(孫倉)과 위포(衛包)가 갑자기 행군을 거부하는 바람에 잠시 동요가 있었다.

 

유자여는 한왕조(漢王朝)의 정통인 성제의 아들이라고 하오. 그런 사람을 두고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오?”

격노한 경감(耿龕)은 두 사람을 끌어낸 뒤 칼을 빼들고 말했다.

 

왕랑은 도둑일 뿐이다. 그런 놈이 황자(皇子)를 사칭하며 난을 일으키고 있지만, 내가 장안(長安:陝西省 西安)의 정예군과 합세해서 들이치면 그까짓 오합지졸(烏合之卒)’은 마른 나뭇가지보다 쉽게 꺾일 것이다. 지금 너희가 사리(事理)를 모르고 도둑과 한패가 됐다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하리라.”

 

그날 밤, 그들은 왕랑에게로 도망치고 말았지만 경감(耿龕)은 뒤쫓지 않았다. 서둘러 유수의 토벌군에 합류한 경감(耿龕)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마침내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이 되었다.

 

우리가 돌격 기병대를 일으켜 써 오합지중(烏合之衆)을 치는 것은 썩은 고목을 꺾고 썩은 것을 깎음과 같을 뿐이다.

發突騎以轔烏合之衆 如摧枯腐耳.

 

동의어오합지중(烏合之衆)

유사어와합지중(瓦含之衆)


97. 옥석구분(玉石俱焚) // 선악의 구분 없이 함께 멸망함. 出典書經夏書 胤征篇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망하는 것을 <옥석구분(玉石俱焚)>이라고 한다.

 

書經夏書 胤征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불이 곤강(崑岡)에 타면 옥()과 돌이 함께 탄다. 임금이 덕을 놓치면 사나운 불길보다도 격렬하다. 그 우두머리 괴수는 죽이고 협박에 못이겨 복종한 사람들은 벌하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물들어 더러워진 풍속은 모두 더불어 오직 새롭게 하리라.

 

火炎崑岡 玉石俱焚 天使逸德 烈于猛火 殲厥渠魁 脅從罔治 舊梁汙俗 咸與惟新.

 

胤征은 윤후(胤侯)나라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희화(羲和)를 치러 나갈 때 한 선언으로, 희화를 치는 까닭을 말한 것이다.

 

崑岡을 생산하는 산의 이름이다. 만일 곤강이 불에 탄다면 과 돌이 함께 타버릴 것이다. 화재는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거니와, 임금이 덕을 잃는다면 그 피해는 사나운 불길보다도 더 심하다. 따라서 지금 그 수령인 자를 쳐서 멸망시키는 것이거니와, 억지로 가담했던 사람까지 모두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니, 함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착함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동의어옥석혼효(玉石混淆)


98. 와각지쟁(蝸角之爭) // 매우 하찮은 일로 다투는 것, 또는 좁은 범위 안에 싸우는 일. 出典莊子則陽篇

 

전국시대, (:)나라 혜왕(惠王)은 중신들과 맹약을 깬 제()나라 위왕(威王)에 대한 응징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서 혜왕은 재상 혜자(惠子)가 데려온 대진인(戴晉人)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대진인(戴晉人)은 도가자류(道家者流)의 현인(賢人)답게 이렇게 되물었다.

전하, 달팽이라는 미물(微物)이 있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소.”

그 달팽이의 왼쪽 촉각 위에는 촉씨(觸氏)라는 자가, 오른쪽 촉각 위에는 만씨(蠻氏)라는 자가 각각 나라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들은 서로 영토를 다투어 전쟁을 시작했는데 죽은 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한 지 15일 만에야 전쟁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소?”

하오면, 이 이야기를 사실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전하, 이 우주의 사방상하(四方上下)에 제한(際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오면, 마음을 그 무궁한 세계에 노닐게 하는 자에게는 사람이 왕래하는 지상(地上)

나라 따위는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하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으음, 과연.”

그 나라들 가운데 위(:)라는 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대량(大梁:開封)이라는 도읍이 있으며, 그 도읍의 궁궐 안에 전하가 계십니다. 이렇듯 우주의 무궁에 비한다면 지금 제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려는 전하와 달팽이 촉각 위의 촉씨, 만씨가 싸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과연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소.”

대진인(戴晉人)이 물러가자, 제나라와 싸울 마음이 싹 가신 혜왕(惠王)은 혜자(惠子)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 사람은 성인(聖人)도 미치지 못할 대단한 인물이오.”

 

원 말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

동의어와우각상(蝸牛角上), 와각지쟁(蝸角相爭), 와우지쟁(蝸牛之爭)

유사어만촉지쟁(萬觸之爭)


99. 와신상담(臥薪嘗膽) //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 괴롭고 어려움을 참고 견딤의 비유. 出典史記越世家

 

춘추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과 취리에서 싸워 크게 패한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BC 496)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명(遺命)했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父王)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섶 위에서 잠을 자고[臥薪], 자기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앞에서 부왕의 유명을 외치게 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때마다 부차는 임종 때 부왕에게 한 그대로 대답했다.

, 결코 잊지 않고 3년 안에 꼭 원수를 갚겠나이다.”

 

이처럼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안 월왕 구천은 참모인 범려(范蠡)가 간()하는 것도 듣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월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오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헌책(獻策)에 따라 우선 오나라의 재상 백비(伯嚭)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했다.

 

구천은 오나라의 속령(屬領)이 된 고국으로 돌아오자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 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嘗膽], 회계의 치욕[會稽之恥]을 상기(想起)했다. 그리고 구천 부부는 함께 밭갈고 길쌈하는 농군이 되어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회계의 치욕으로부터 12년이 지난 후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로부터 역전(曆戰) 7년만에 오나라의 도읍 고소(姑蘇 : 蘇州)에 육박한 구천은 오왕 부차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회계의 치욕을 씻었다. 부차는 용동(甬東 : 折江省 定河)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결했다.

 

유사어회계지치(會稽之恥), 절치액완(切齒扼腕)


100. 월하빙인(月下氷人) // 월하노(月下老)와 빙상인(氷上人)이 합쳐진 말로, 혼 중매인을 일컬음. 出典續幽怪錄’ / ‘晉書索眈篇

 

⑴《續幽怪錄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太宗) , 위고(韋固)라는 젊은이가 여행 중에 송성(宋城 : 河南省 所在)에 갔을 때, ‘달빛 아래 한 노인[月下老]’이 손에 빨간 끈[赤繩]을 든 채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위고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묻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세상 혼사에 관한 책인데, 여기 적혀 있는 남녀를 이 빨간 끈으로 한 번 매어 놓으면 어떤 원수지간이라도 반드시 맺어진다네.”

그럼, 지금 제 아내감은 어디에 있습니까?”

, 이 송성(宋城)에 있구먼, 성 북쪽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진()이란 여인네의 어린아이야.”

위고는 약간 기분이 언짢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상주(尙州 : 하남성)에서 벼슬길에 나아간 위고는 그곳 태수(太守)의 딸과 결혼했다. 아내는 17세로 미인이었다. 어느날 밤 위고가 아내에게 신상(身上)을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실은 태수님의 양녀입니다. 친아버지는 송성에서 벼슬을 사시다가 돌아가셨지요. 그 때 저는 젖먹이였는데 마음씨 착한 유모가 성 북쪽 거리에서 채소 장사를 하면서 저를 길러 주었답니다.”

 

⑵《晉書索眈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라에 색탐(索眈)이라는 점쟁이가 있었다. 어느날 영고책(令孤策)이라는 사람이 몽 점(夢占)을 치러 왔다.

꿈 속에서 나는 얼음 위에 서서 얼음 밑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색탐(索眈)은 이렇게 해몽(解夢)했다.

얼음 위는 곧 양()이요, 얼음 밑은 음()인데 양과 음이 이야기 했다는 것은 얼음 위에 선 사람[氷上人]’인 그대가 결혼 중매를 서게 될 조짐이오. 성사(成事) 시기는 얼음이 녹는 봄철이고.”

 

그 후 얼마 안되어 과연 영고책은 태수의 부탁을 받고 태수의 아들과 장()씨의 딸을 중매 서서 이듬해 봄에 결혼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동의어월하노(月下老), 빙상인(氷上人), 빙인(氷人)

유사어적승(赤繩)


101. 위편삼절(韋編三絶) // 독서에 열심함의 뜻.

한 책을 되풀이하여 숙독함의 비유. 出典史記孔子世家

 

현대식으로 말하면, 한 권의 책을 몇십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어서 책을 철()한 곳이 닳아 흩어진 것을 다시 고쳐 매어서 애독(愛讀)을 계속하는 것을 韋編三絶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책이 소위 몇십 장의 죽간(竹簡)을 끈으로 철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그 끈이 몇 번이나 끊어지도록 책을 계속하여 읽는 것을 韋編三絶이라고 한다. ‘三絶란 딱 세 번에 한정된 수가 아니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끊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알려진 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 쓴史記가운데 孔子傳, 孔子世家에 실려 있는 말로, 공자가 만년에 역경(易經)을 애독하여 韋編三絶에 이른 데서 나왔다고 한다.

 

孔子晩年易經을 좋아하여, () · () · () · 설괘(說卦) · 문언(文言)을 서()하고, 易經을 읽어 韋編三絶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몇 해를 빌어 이와같이 하면, 나는 易經에 있어서 곧 빛나게 될 것이다.’

孔子晩而喜易 徐彖繫象說卦文言 獨易韋編三絶 曰 假我數年 若是 我於易則彬彬矣.


102. 유비무환(有備無患) // 준비가 있으면 근심할 것이 없음. 出典書經說命

 

열명(說命)’은 은()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에 대한 의견과 그 의견을 실천하게 하는 내용을 기록한 글인데, 有備無患이란 말은 부열이 고종 임금에게 한 말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 그 능()한 것을 자랑하게 되면 그 공()을 잃게 됩니다. 오직 모든 일은 다 그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춘 것이 있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處善以動 動有厥時 矜其能 喪厥功 惟事事 及其有備 有備無患.

 

,春秋左氏傳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서 보낸 값진 보물과 가희(佳姬)들을 화친(和親)의 선물로 보내오자 이것들을 위강에게 보냈다. 그러자 위강은 완강히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평안히 지낼 때에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하여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게 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입니다.”

 

居安思危 思危 則有備 有備則無患.


103. 은감불원(殷鑑不遠) // 멸망의 선례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뜻으로, ‘다른 람의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으라는 말. 出典詩經大雅篇

 

고대 중국 하() · () · ()3왕조 중 殷王朝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를 폭군 음주(淫主)로 치닫게 한 것은 정복한 북방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妲己)라는 희대의 요녀 독부(妖女毒婦)였다. 주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국고(國庫)를 기울여 시설한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주야장천(晝夜長川) 음주폭락(飮酒暴樂)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그는 가렴주구(苛斂誅求)에다가 충간자(忠諫者)를 처형하기 위한 포락지형(炮烙之刑)을 일삼는 악왕(惡王)의 으뜸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주왕(紂王)의 포학(暴虐)을 간()하다가 많은 충신이 목숨을 잃는 가운데 왕의 보좌역인 삼공(三公) 중의 구후(九侯)와 악후(鄂侯)는 처형 당하고 서백(西伯)은 유폐되었다.

 

서백은 그 때, ‘600여 년 전에 은왕조(殷王朝)의 시조인 탕왕(湯王)에게 주벌(誅伐) 당한 하왕조(夏王朝)의 걸왕(桀王)을 거울 삼아 그 같은 멸망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라고 충간(忠諫)하다가 화()를 당했는데 그 간언(諫言)詩經大雅篇탕시(湯詩)’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선례(先例)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 걸왕 때에 있네.

 

殷鑑不遠 在夏后之世.

 

삼공(三公)에 이어 삼인(三仁)으로 불리던 미자(微子) · 기자(箕子) · 비간(比干) 등 세 충신도 간했으나 주색에 빠져 이성을 잃은 주왕은 걸왕의 비극적인 말로(末路)를 되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침내 원성(怨聲)이 하늘에 닿은 백성과 제후들로부터 이반(離叛) 당한 주왕은 서백의 아들 발()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원 말재하후지세(在夏后之世)

동의어상감불원(商鑑不遠)

유사어복차지계(覆車之戒), 복철(覆轍)


104. 읍참마속(泣斬馬謖) //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으로 법의 공정을 지키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림을 비유. 出典三國志蜀志 諸葛亮篇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山野)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 만큼 군량 수송로(軍糧輸送路)의 요충지인 가정(街亭 :韓中)’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街亭)을 잃으면 촉나라의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책(重責)을 맡길 만한 장수가 마땅치 않아서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 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街亭)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 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치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 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협로(峽路)를 사수만 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욕심을 내어 적을 유인하여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다 진을 쳤다. 그러나 마속의 생각과 달리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만 한 채로 산 위를 공격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자 산 위에서는 식수가 끊겼다. 다급해진 마속은 전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위나라 용장 장합(張郃)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마속의 실패로 전군(全軍)을 한중(韓中)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5,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成都)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張垸)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105. 이심전심(以心傳心) // 말이나 글로 전하지 않고 마음으로 마음에 전함.

出典五燈會元’ / ‘傳燈錄無門關 / ‘六祖壇經

 

()나라의 중 도언(道彦)이 석가 이후 고승들의 법어를 기록한전등록(傳燈錄)에 보면, 석가가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以心傳心의 방법으로 불교의 진수(眞髓)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송나라의 중 보제(普濟)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느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산(靈山)에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拈華]’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微笑]’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교외별전(不立文字·敎外別傳)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世尊在靈上會上 拈華示衆 是時衆皆寂然 惟迦葉尊者破顔微笑 世尊云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付囑磨訶迦葉.

 

동의어염화미소(拈華微笑)

유사어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106. 일거양득(一擧兩得) // 한 가지 일을 하여 두 가지 이익을 거둠. 出典春秋後語戰國

 

()나라 혜문왕(惠文王)때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史馬金昔)는 어전에서 중원으로의 진출이야말로 조명시리(朝名市利)에 부합하는 패업(覇業)’이라며 중원으로의 출병을 주장하는 재상 장의(張儀)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신이 듣기로는 부국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국토를 넓히는 데 힘써야 하고, 강병(强兵)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백성의 부()에 힘써야 하며, 패자(覇者)가 되기를 원하는 군주는 먼저 덕을 쌓는 데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지면 패업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하오나, 지금 진나라는 국토도 협소하고 백성들은 빈곤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먼저 막강한 진나라의 군사로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는 길밖에 달리 좋은 방법이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면 국토는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은 쌓일 것입니다. 이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는 한()나라를 침범하면, 한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청할 게 분명하며, 더우기 주나라의 구정(九鼎)은 초나라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땐 진나라가 공연히 천자를 위협한다는 악명(惡名)만 얻을 뿐입니다.”

 

이에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먼저 국토를 넓혔다.

 

동의어일거양획(一擧兩獲), 일전쌍조(一箭雙鳥), 일석이조(一石二鳥)

반의어일거양실(一擧兩失)


107. 일망타진(一網打盡) // 한꺼번에 모조리 잡음. 出典宋史仁宗紀 東軒筆錄

 

북송(北宋) 4대 황제인 인종(仁宗) 때의 일이다.

 

당시 북방에는 거란[契丹:]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중국의 일부였던 안남(安南 : 베트남)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인종은 연약한 외교로 일관했다. 그러나 내치(內治)에는 괄목할 만한 치적(治績)이 적지 않았다.

 

전한(前漢) 5대 황제인 문제(文帝)와 더불어 어진 임금으로 이름난 인종은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 그리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문치(文治)를 폄으로써 이른바 경력(慶曆)의 치()’로 불리는 군주 정치의 모범적 성세(聖世)를 이룩했다.

 

이 무렵, 청렴 강직하기로 이름난 두연(杜衍)이 재상이 되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황제가 상신(相臣)들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조서를 내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내강(內降)이라 했다. 그러나 두연은 이 같은 관행은 올바른 정도(正道)를 어지럽히는 것이라 하여 내강이 있어도 이를 묵살, 보류했다가 10여 통쯤 쌓이면 그대로 황제에게 되돌려보내곤 했다. 이러한 두연의 소행은 성지(聖旨)를 함부로 굽히는 짓이라 하여 조야(조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때 공교롭게도 관직에 있는 두연의 사위 소순흠(蘇舜欽)이 공금을 유용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그러자 평소 두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어사(御史) 왕공진(王拱辰)은 쾌재를 부르고 소순흠을 엄히 문초했다. 그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공범으로 몰아 잡아 가둔 뒤 재상 두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범인들은 일망타진(一網打盡)’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두연도 재임 70일만에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108. 일이관지(一以貫之) //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음. 出典論語里仁篇

 

孔子께서 曾子에게 (),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參乎吾道一以貫之)” 曾子는 알아듣고 하고 대답했다.

孔子께서 나가시자 문인(門人)들이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자, 曾子선생임의 말씀은 충()과 서()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論語衛靈公篇에도 孔子께서 子貢에게 나는 한 가지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었느니라.(子一以貫之)”라고 말씀하신 것이 나온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다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子貢이 대답해 말했다.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나는 하나를 가지고 관철하고 있는 것이다.”

 

子曰 賜也 女以予爲多學而識之者與 對曰 然 非與 曰 非也 予一以貫之.


109. 자포자기(自暴自棄) // 절망 상태에 빠져서, 자신을 버리고 돌보지 않음.

出典孟子離婁篇

 

전국시대를 살다간 아성(亞聖) 맹자(孟子)자포(自暴)’자기(自棄)’에 대해맹자(孟子)이루편(離婁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포(自暴)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자기(自棄)하는 사람과도 더불어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입만 열면 예의 도덕(禮義道德)을 헐뜯는 것을 자포(自暴)’라고 한다. 한편 도덕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인()이나 의()라는 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自棄)’라고 한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원래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의 근본 이념인 ()’은 편안한 집[安宅]과 같은 것이며, 올바른 길인 ()’는 사람에게 있어서 정로(正路:正道)이다. 편안한 집을 비운 채 들어가 살려 하지 않으며 올바른 길을 버린 채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 것은 실로 개탄할 일이로다.“

 

孟子曰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


110. 전전긍긍(戰戰兢兢) // 매우 두려워 벌벌 떨며 두려워함. 出典詩經小雅篇

 

전전(戰戰)’이란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이고, ‘긍긍(兢兢)’이란 몸을 움추리고 조심하는 모양을 뜻한다.

 

이 말은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詩集)시경(詩經)소아편(小雅篇)’소민(小旻)’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데 그 시의 내용은 모신(謀臣)이 군주의 측근에 있으면서 옛 법을 무시한 정치를 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감히 맨손으로 범을 잡지 못하고 [不敢暴虎]

감히 걸어서 강을 건너지 못한다 [不敢憑河]

사람들은 그 하나는 알고 있지만 [人知其一]

그밖의 것은 전혀 알지 못하네 [莫知其他]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 [戰戰兢兢]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듯 하고 [如臨深淵]

살얼음을 밟고 가듯 해야 하네 [如履薄氷]

 

논어(論語)태백편(太伯篇)’에 보면, 曾子가 병이 해지자 제자들을 불러서 말했다.

 

내 발을 펴고, 내 손을 펴라.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매우 두려운 듯이 조심하고, 깊은 연못에 임한 것 같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하라.’고 했다. 지금 이후로는 나는 그것을 면()함을 알겠구나, 제자들아.”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동의어전전긍긍(戰戰兢兢)

유사어소심익익(小心翼翼)


111. 전전반측(輾轉反側) //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룸. 出典詩經周南

 

고민으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 혹은 잠자지 못하고 뒤척임을 되풀이 하는 것을 형용하여 輾轉反側이라고 하거니와, 이 말은 본래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형용해서 하는 말이다.

 

詩經周南의 관저(關雎)에 이렇게 실려 있다.

 

구룩구룩 물수리는 강가 섬에 있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들쭉날쭉한 마름풀을 좌우로 헤치며 따는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를 자나깨나 구하는도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자나깨나 생각하는도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지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도다.

 

關關雎鳩 在河之州

窈窕淑女 君子好逑

參差荇菜 左右流之

窈窕淑女 寤寐求之

求之不得 寤寐思服

悠哉悠哉 輾轉反側

 

이 제2절의 결구가 輾轉反側이다. 이 노래는 물쑥을 따면서 부르는 연가(戀歌)이다. 즉 노동가(勞動歌)임과 동시에 연애가(戀愛歌)이기도 하다.


112. 절차탁마(切磋琢磨) // , , 상아 따위를 자르고 쪼고 갈고 닦아서 빛낸다

 

는 뜻으로, ‘학문, 덕행을 갈고 닦음의 비유.

出典論語學而篇 / ‘詩經衛風篇

 

論語學而篇에는詩經에 실려 있는 시가 인용되고 있다.

 

자공(子貢)孔子께 여쭈었다.

가난해도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면서 교만함이 없는 것은 어떠합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그러나 가난해도 도()를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절을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느니라.”

 

자공(子貢)이 다시 여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끊는 듯이 하고, 닦는 듯이 하며, 쪼는 듯이 하고, 가는 듯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것을 이릅입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 비로소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하구나. 지난 일들을 일러 주었더니 닥쳐올 일까지 아는구나.”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 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원 말여절여차 여탁여마(如切如磋 如琢如磨)

준 말절마(切磨)


113. 정중지와(井中之蛙) // 우물 안 개구리, 즉 견문이 좁아서 넓은 세상의 사 을 모름의 비유. 出典莊子秋水篇 / ‘後漢書馬援傳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이 흐름을 따라 처음으로 바다에 나와, 북해(北海)까지 가서 동해(東海)를 바라보면서, 그 끝이 없는 넓음에 놀라서 북해의 신()인 약()에게 말했다. 그러자 북해의 신()인 약()이 이렇게 말했다.

 

우물 안에서 살고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를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좁은 장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여름 벌레에게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여 름만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식견(識見)이 좁은 사람에게는 도()를 말해도 알지 못하거니와, 그것은 그들이 상식의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좁은 개울에서 나와 큰 바다를 바라보고, 자기의 추()함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 더불어 큰 진리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北海若曰 井䵷不可以語海者 拘於處也 夏蟲不可以語於氷者 篤於時也 曲土不可以語於道者 束於敎也 今爾出於崖涘 觀於大海 乃知爾醜 爾將可與語大理矣.

 

이것은莊子秋水篇에 실려 있는 첫머리의 에피소드로, 하백(河伯)과 북해의 신()인 약()과의 문답은 계속된다.

이 문답을 통하여 莊子의 높고 큼과 대소귀천(大小貴賤)은 정하여진 것이 아니니, 대소귀천(大小貴賤)의 구별을 잊고서 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井中之蛙 不知大海우물 가운데 있는 개구리는 바다를 말해도 알지 못한다라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井蛙라고 말하며 또 井底蛙라고 말하기도 한다.

 

원 말정중와 부지대해(井中之蛙 不知大海)

준 말정와(井蛙)

동의어정와(井蛙), 정중와(井中蛙), 정저와(井底蛙), 감정지와(堪井之蛙)

유사어촉견폐일(蜀犬吠日), 월견폐설(越犬吠雪)


114. 조삼모사(朝三暮四) // 간사한 꾀로 남을 속여 희롱함을 이르는 말.

出典列子黃帝篇 / ‘莊子齊物篇

 

()나라에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란 원숭이를 뜻한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저공은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의 양식까지 퍼다 먹일 정도로 원숭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저공을 따랐고 마음까지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를 대는 일이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저공은 원숭이에게 나누어 줄 먹이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 같아 그는 우선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는 도토리를 앞으로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朝三暮四)’씩 줄 생각인데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한결같이 화를 내었다. ‘아침에 도토리 세 개로는 배가 고프다는 불만임을 안 저공은 됐다싶어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朝四暮三)‘씩 주마.”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宋有狙公者 愛狙養之成群 能解狙之意 狙亦得心之心 損其家口 充狙之欲 俄而匱焉 將限其食 恐重狙之不訓於己也 先誑之曰 與若芧朝三而暮四 足乎 衆狙皆起而怒 俄而曰 與若芧 朝四而暮三 足乎 衆狙皆伏而喜.

 

준 말조삼(朝三)

동의어조사모삼(朝四暮三)


115. 주지육림(酒池肉林) // 술로 못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술잔치를 이르는 말. 出典史記帝王世紀 十八史略

 

고대 중국의 나라 걸왕(桀王)나라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들은 각기 말희(妺姬)와 달기(妲己)라는 희대(稀代)의 두 요녀 독부(妖女毒婦)에게 빠져서 사치(奢侈)와 주색(酒色)에 탐닉(眈溺)하다가 결국 폭군 음주(暴君淫主)라는 낙인(烙印)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말희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을 베풀기로 했다.

 

또 무악(舞樂)에 싫증이 난 말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고기[]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그러니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나라에 복속(服屬)했던 나라 탕왕에게 주벌(誅伐) 당하고 말았다.

 

또한 탕왕으로부터 28대째로 나라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보내온 희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다. 그래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收奪)한 전백(錢帛)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酒池肉林을 만들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暴君淫主)로 악명을 떨치던 주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나라 시조(始祖)인 무왕(武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동의어육산주지(肉山酒池)

유사어육산포림(肉山脯林)


116. 죽마고우(竹馬故友) // 어렸을 때의 벗.(소꼽동무)

어렸을 때 친하게 사귄 사이.

어렸을 때부터 오랜 친구. 出典世說新語’ / ‘晉書

 

(: 東晉)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簡文帝 : 371-372) 때의 일이다.

 

()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桓溫)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殷浩)라는 은사(隱士)를 건무장군(建武將軍) 양주자사(楊州刺史)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政敵)이 되어 반목(反目)했다. 왕희지(王羲之)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하나인 후조(後趙)의 왕 석계룡(石季龍)이 죽고 호족(胡族)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동의어죽마지우(竹馬之友), 죽마구우(竹馬舊友)

유사어기죽지우(騎竹之友), 죽마지호(竹馬之好)


117. 지록위마(指鹿爲馬) //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가리.

出典史記秦始皇本紀

 

나라 시황제가 죽자 측근 환관인 조고(趙高)는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태자 부소()를 죽이고 어린 호해(胡亥)를 세워 2세 황제로 삼았다. 현명한 부소보다 용렬한 호해가 다구기 쉬웠기 때문이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어쨌든 조고는 이 어리석은 호해를 교묘히 조종하여 경쟁자인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 그밖에 많은 구신(舊臣)들을 죽이고 스스로 승상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 []을 바치오니 거두어 주시옵소서.”

승상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말로 보이오?”

 

말을 마치자 호해는 웃으며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한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趙高欲慰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 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問左右 左右或黙 或言馬 以阿順趙高 或言鹿者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 後群臣皆畏高.

 

그러나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打倒)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중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해 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세워 3세 황제로 삼았다.(BC 207) 그러나 이번에는 조고 자신이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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