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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잣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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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잣대

 

 

 

역사가 삶의 자취를 뜻하고 문명이 인간의 생활조건과 양식을 의미하며 진보는 인간의 번영을 지칭한다. 인간의 번영은 인간의 욕망 충족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욕망에는 우선 생물학적인 것이 있다. 이런 점에서 67천 년 전에 시작된 문명의 역사는 곧 진보의 역사임을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다. 아직도 무지의 어둠 속에서 헤매고 빈곤에 허덕이거나 기아로 죽는 이의 수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인류 전체로 볼 때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도 오늘날 인류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적 편의와 풍요를 누리게 됐다. 인류는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서 자연만이 아니라 지구 그리고 우주까지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은 곧 진보를 의미했고, 역사는 끊임없는 발전을 보여 왔으며, 앞으로 이러한 진보는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수준으로 계속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적 전망이 선다.

 

그러나 의문이 던져진다. 프랑스 시인 발레리는 이미 20세기 초, 그리고 그 뒤 영국의 사학가 토인비가 문명의 죽음을 언급했고, 최근 사회학자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료'를 선언한다. 그들의 사상을 동일시할 수 없지만 문명과 역사의 진보에 대해 의문과 회의를 던졌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성찰은 문명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계몽시대 이후의 낙관주의에 제동을 걸고 진보의 의미에 대한 반성을 요청한다. 문명의 죽음과 역사의 종료에 대한 그들의 진단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며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지 분명치 않다. 그들이 말하는 문명이 보편적 뜻을 갖는지 아니면 특수한 뜻을 지니는지 확실하지 않고, 역사에 대한 그들의 비관적 진단이 역사 일반에 대한 종말론적 통찰에 근거했는지 아니면 현대사의 구체적 관찰에 기초했는지 뚜렷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의 진단과 경고에 귀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진보가 인간의 번영을 의미하고 인간의 번영이 생리학적 욕망 충족에 있다면 문명은 진보해 왔고 앞으로 더욱 계속될 듯싶다. 생리학적 욕망은 물질적 욕망을 뜻하고 그러한 시각에서 본 진보는 물질문명의 진보를 뜻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진보의 첨단에 이르고 있는 현대와 이런 측면에서 가속적으로 발달될 앞으로의 삶의 양식과 상황, 즉 문명을 반성하고 상상해볼 때 진보의 잣대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무제한적 물질문명의 발전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물질문명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인류의 번영으로만 믿어 왔던 물질적 풍요과 편의가 결과적으로 생태계의 파괴, 자연의 죽음만이 아니라 인류의 존속까지를 위협하게 된 상황에 이르렀다. 현대문명은 자멸의 길을 맹목적으로 달리고 있는 듯싶다. 발레리나 토인비가 말한 문명의 죽음과 후쿠야마가 말한 역사의 종료는 과학기술의 현대문명과 역사만이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의 죽음과 인류 역사 전체의 종료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인간의 물질적 번영은 결코 진보의 잣대일 수 없다. 이대로라면 문명의 앞날은 어둡다.

 

현대문명과 진보에 대한 우리의 성찰을 밀고 나가기 위해 낙관적 미래학자들은 가속적으로 발달하는 과학기술로 현재와 앞으로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가정하여 인간의 생물학적, 즉 물질적 욕구가 완전히 충족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설사 그렇더라도 과연 그러한 삶이 인간의 이상일 수 있으며, 과연 그러한 문명이 참다운 인간의 번영, 즉 참다운 진보일 수 있는가. 진보의 새로운 잣대를 찾아야 한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자연의 무절제한 정복과 물질적 충족은 결코 참다운 인류의 번영을 지칭하는 진보의 척도일 수 없다.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빵만의 만족은 무한히 공허하다. 의미는 정신적 속성이다. 정신적 삶이 있을 때만 인간다운 삶이 있고, 정신적 번영을 동반하지 않는 물질적 번영은 참된 진보일 수 없다. 문명과 역사의 진보를 측정하는 궁극적 잣대는 정신적, 더 정확히 말해서 '도덕적' 가치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 이후의 문명이 그 이전에 비추어 진보했는지 의심스럽다.

 

새것만이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스미스의 자본주의 경제와 밴덤의 공리주의 윤리는 전통에 뿌리박은 경제와 윤리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근대적 사상이다. 이런 진보적 사상에 맞서 버크는 전통사회를 옹호했고, 로크빌은 계산적 공리주의 윤리관에 밀려 명예. 자존심. 충성. 희생. 봉사. 존엄성 등의 봉건사회의 정신적 가치가 사라짐을 개탄한 보수주의자였다.

스미스나 밴덤의 진보가 물질적 척도에 근거하는 데 반해 버크나 로크빌은 진보의 잣대를 정신에서 찾는다. 진보의 참된 잣대는 새것이 아니라 옳고 선하고 귀한 것이라면 보수적 가치가 더욱 진보적 가치일 수 있다는 역설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물질적 개발에 한계가 있다면 정신계의 진보는 무한할 수 있다. 어쨌든 문명의 의미 및 진보의 척도에 대한 획기적 사고전환이 절실하다.

(포항공대 박이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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