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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사 - 한국 여인의 한과 기다림의 노래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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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인의 한과 기다림의 노래

대담 : 이어령, 장덕순

 

 

 

달하 노피곰 도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 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내 가논

졈그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사는 백제의 문학 유산으로 유일한 시가이다. 멀리 행상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이조 성종 때는 음사(淫詞)로 단정, 금지령까지 내렸으나 백제의 시가 수준을 짐작케하는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작품이다. 형식을 보면 후렴을 빼면 시조처럼 초, , 종의 삼장으로 되어 있고 종결이 오시라, 올세라, 랄세라로 전부 원망형(願望型)으로 되어 있다. 그렇듯 정읍사는 한국여인의 정서적 원천인 한과 기다림의 시가인 것이다.

 

= 삼국시대의 문화를 비교해보면 마치 광석(鑛石)의 표본을 보는 것처럼 재미있습니다. 고구려의 ()’, 백제의 ()’, 그러니까 고구려는 스파르타이고 백제는 아테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화랑에서 보는 것처럼 ()’()’의 조화에 그 특성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을 문화적으로 보면 고구려적인 것과 백제적인 문화의 양면성을 포용하고 있었던 문무(文武)의 융합으로 풀이될 수 있지요.

 

= 백제는 우수한 문화 예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늘날 남아 있는 그 유산은 삼국 가운데 가장 빈약합니다. 오히려 일본에 나가봐야 백제문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건축도 그렇고 불상도 그렇고…….

 

=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백제유민들을 늘 경계했지요. 그래서 유민(流民)들이 백제의 향수를 갖지 않도록 백제문화를 철저하게 인멸시켜 버렸지요. 그 때문에 오늘날 백제문화는 거의 살아남은 것이 없습니다.

 

= 백제유민들 자신이 신라에 흡수되기를 거부하여 호적을 거부하고 유리걸식 하였습니다. 여자들은 기생이 되어 겨우 고려궁중의 여악(女樂)을 남겼지요. 유랑민의 문화는 발을 붙일 곳이 없었어요.

 

= 백제문화의 단절에는 또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라왕조를 없애고 새나라를 만들었지만, 고려는 문화적으로 신라의 것을 그대로 계승했어요. 일연(一然)이가 <삼국유사>를 쓴 것을 봐도 알 수 있지요. 말이 <삼국유사>이지 신라유사(新羅遺事)라고 할 정도입니다. 역사나 문화를 신라 중심적으로 생각한 까닭입니다.

 

= 특히 문학 분야에서 백제의 시가가 전해내려오는 것은 <정읍사> 정도입니다. <서동요>가 있기는 해도, 그 주인공이 백제인으로 되어 있을 뿐, 그것을 엄격한 의미에서 신라의 설화로 봐야지요. 우리가 그 화려했던 백제 문화를 시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정읍사> 한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날의 한국문화를 봐도 백제문화권의 전통에 속해 있는 전라도 지방에서 우수한 예술감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문단을 살펴보면 이 고장에서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으며, 그림, 판소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정읍사> 한 편으로 백제의 시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애석하기 짝기 없는 일입니다.

 

= 비록 한 편이기는 하나 <정읍사>의 뛰어난 노래 솜씨를 가지고도 능히 백제의 시가가 어떤 수준이었는가 짐작할 만합니다. 더구나 행상을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을 노래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정읍사>는 어느 한 사람의 천재적인 시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정읍지방의 아녀자들이 불렀던 민요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언어 구사나 노래의 짜임새가 완벽한 개인창작의 시처럼 뛰어납니다.

 

= 우선 <정읍사>를 읽어 봅시다. 제목부터가 말썽인데 정읍을 단순히 지방 이름으로 풀이하는 쪽과 샘골이라는 성적우의(性的寓意)로 보는 쪽이 대립되어 있지요.

 

= 고려사의 악지(樂志)에 적힌 것을 보면 정읍은 전주의 속현(屬縣)이라고 못박아 놓았습니다. 우리가 밀양아리랑이니 정선아리랑이니 하는 식으로 정읍지방에서 생긴 민요라하여 <정읍사>란 말이 붙었다고 보는 견해지요. 단순한 지방명, 그리고 행상을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이 노래의 주인공(女子)이 정읍인이었다는 것밖에는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설이지요.

 

= 그런데 설화민요 고대시가들은, 대개가 섹스 모티브를 안에 숨기고 있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은 정읍(井邑)’을 여성상징(女性象徵)으로 해석하려 듭니다. 우물, 옹달샘은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나 모두 여성의 성기 상징의 은어(隱語)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경우도 샘골로 보자는 거지요. 모든 문화를 성적 리비도와 관련시키는 프로이트식 풀이가 아니면 낡았다는 세상이니까(웃음).

 

= 민요를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성과 관련 안된 것이 없어요. 천안삼거리의 삼거리도 성을 나타낸 것, 즉 남성 성기의 은어로 볼 수 있고 척 늘어졌구나 흥도 심상치 않은 표현으로 보는거지요.(웃음) ‘도라지타령에서 도라지는 남성을, 바구니는 여성을 각기 나타낸 것이므로 도라지를 캐어 바구니에 담는다는 것은 남녀의 정사를 나타낸 것이고.

= 그러니까 정읍을 단순히 지방을 나타낸 고유명사로 보느냐 아니면 성적상징어인 보통명사로 보느냐에 따라 이 시 전체의 뜻과 분위기가 전연 달라집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본문을 읽어봅시다.

 

=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어리곰 비취오시라.’ <정읍사>는 달을 향해서 이렇게 기원하는 말로 시작됩니다. 행상을 나간 남편이 오래도록 기다려도 집에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는 산에 올라갑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달이 높이 떠서 머리까지 비쳐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일종의 기도입니다.

 

= 밤이 되어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현대의 여성들은 전지를 들고 나갑니다.(웃음) 그것처럼 표면적으로 볼 때 먼 데서 남편이 오더라도 그 모습을 빨리 알아볼 수 있게 달이 높이 떠 먼 곳까지 비쳐달라는 이야기지요. 그러나 이 때의 달은 남편을 기다리는 내 가슴이 얼마나 초조한가를 나타낸 객관적 상관물(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구체적 이미지로 바꿔놓은 시의 기법)입니다. 달은 낲녕을 찾는 자신의 눈이며 한치라도 멀리 뻗쳐야할 그 달빛은 애틋한 자신의 마음이지요.

 

= 그러기 때문에 <정읍사>는 고도한 예술성을 지닌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주관적으로 토로하지 않고 달에 의탁하여 그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냅니다. 이 시의 표현은 자신이 환한 대낮에도 기다렸고 달 뜨기 전에도 기다렸다는 것을 은근히 나타내 보입니다.

 

= 이 시의 화자도 아무리 자기가 기원하고 발버둥친다 하더라도 천체의 법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달이 높이 뜨고 멀리 비쳐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고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그 초조한 마음은 달이 더디게 뜨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 달빛이 더 어둡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달을 보고 재촉합니다. 이미 그것은 객관적인 달일 아니라 자기 마음의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달을 보고 임을 기다리는 것은 한국시가의 어디에고 나타납니다마는, <정읍사>의 달은 임을 기다리는 데서한발짝 아나가 임을 찾는마음으로 되어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 신라여인들과 달리 백제인은 정절관념이 깊었던 것 같습니다. ‘도미의 아내라는 설화를 봐도 그렇고, 그 후예인 춘향전도 그렇지 않습니까(웃음). 수로부인이나 처용의 아내, 그리고 도화여형(桃花女型)하고는 달라요. 신라같은 지적요소보다 훨씬 더 정감적인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독수공방(獨守空房)하는 행상인의 처 정도라면 만약 서양이나 최소한 신라쯤에만 갖다놔도 남편을 찾는 <정읍사>와는 정반대의 노래가 생겨났을지도 모르지요. <처용가>처럼(웃음).

 

= 그것이 한국인의 마음과 머리에 깊이 박혀 있는 보수성이기도 합니다.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것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지요. 호격조사(呼格助詞)가 발달한 것을 보더라도 그래요. 영시 같았으면 번즈의 시처럼 , (O! Moon)’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달에 호격조사를 붙여 달하!’라고 부릅니다. 달이라는 명사에 호격을 붙여 부를 때 그것은 그냥 감탄사가 아니지요. 상대방을 내 안으로 불러들이는 강력한 이미지가 생깁니다.

우리처럼 호격이 없는 서양의 시에서는 사물이 늘 내 밖에 객관적으로 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정감 속으로 그 거리를 소멸시켜 일체화합니다. 소나무여! 바다여! 를 붙일 때 그것은 벌써 의인화되고 부르는 자의 소리를 듣는 생명체가 됩니다. 먼 데 있어도 가까이 있는 곳으로 다가섭니다. <정읍사>에서도 달님이시여라고 부를 때 그 달은 하늘에 있지만 자기의 부름 소리에서 이미 어머니나 친구처럼 그녀의 한 식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그곳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부름으로써 그것이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 ‘어느 저자에 가 계시는지요. 혹시, 진데를 딛으올세라라는 다음 구절이 문제입니다. 아까 우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시가 두 가지로 풀이되는 것도 이 진데를 무엇으로 보는가에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의 악지(樂志)에 나타난대로 따르자면 진데는 헌한 일, 궂은 것으로 남편이 밤길에 도둑을 만나 범해(犯害)되지 않을까 하는 아내의 염려입니다.

오로지 남편 걱정만 하는 착한 아내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정읍사>를 샘골 즉 여자의 음소(淫所)로 풀이하는 사람에게는 진데역시 정읍과 마찬가지 풀이가 되어, 남편이 어느 객주집 창녀와 함께 지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투심의 표현이 되어버립니다.

 

= ‘진데범해(犯害)’로 보느냐 혹은 여자의 음소로 보느냐에 따라 이 시가 로맨티시즘이 되느냐 리얼리즘이 되느냐를 판가름하는 것이 되는데 아무래도 후자 쪽이 유리합니다. 이 시의 구조를 봅시다. 달님이시여 높이 떠서란 시구 다음에 어긔야가 있고 먼데를 비치오시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긔야는 리듬을 맞추기 위한 무의미한 후렴구이라 잎의 말이 어귀야가 있어도 뒤 뜻과는 이어집니다. 높이 떠서는 원인이고 멀리 비치라는 것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앞시구처럼 저자에 가 계신가요는 원인, 진데를 밟는다는 것은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저자는 지금으로 볼 때 여자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도시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니까 객주집이 있고 술 파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진흙이 있는 더러운 곳으로 비유했고 아마도 그 당시에는 흔히 창녀를 뜻한 은어로 쓰인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요.

 

= 더구나 후설(後設)을 유력하게 하는 것으로 중종실록 32권에 <정읍사>가 음사(淫詞)이니 궁중에서 불러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그 대신 오관산(五冠山)을 부르자는 남곤의 상소가 있습니다. 남편만을 기다리는 순수한 노래라면 부덕(婦德)을 나타낸 것인데 음사라고 말할 턱이 없다는 게지요. 그리고 행상인의 처라면 교양있는 사대부집 여인들이 아닐 테니까,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게 여자라도 생기지 않았는가 하는 질투심이 앞설 거도 당연하지요. 오늘날 통금시간 가까이 도었을 때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놓고 여성들은 무엇을 연상할까요. 두 마음이 있을 겁입니다. 염려와 질투(웃음), <정읍사>도 어디 예외이겠습니까.

 

= 결국 <정읍사>는 한국의 여인들, 그리고 더 확대시키면 한국인 전체의 정서적 근원이 되는 한과 기다림의 시라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가논되 점그랄세라진데와 마찬가지로 양면에서 풀이되지요.

 

아무 곳에나 행상 봇짐을 풀어놓고 계십시오. 내 가는 길 해가 저물세라.’ 즉 어두운 길 걷다가 범행을 당하지 말도록 기원하는 갸륵한 아내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마음이라기보다 어머니의 마음이지요. 그래서 내 가는데 점그랄세라를 역시 섹스와 관련시켜 어느 곳에 지금쯤 짐을 풀어 놓고, 내 가는데를 다른 여자가 범하고 있는지로 보아서 점그다를 어두워지다()로 보지 않고, ‘물에 무엇을 점근다고 할 때의 적시다의 뜻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 구구한 해석이 많아 이 시의 종구(終句)는 갈피를 잡기 힘들어요. ‘내가는데가 이 시의 화자인 나를 가리킨 것이냐, 혹은 내가 이야기할 때에라도 남을 주체로 해서 표현하는 독특한 한국말의 어법으로 보아 남편이 가는길이냐도 문제가 됩니다. 가 누구냐에 따라서 이 시의 화자로 되어 있는 행상인의 아내가 열녀냐 악녀냐(웃음)로 판가름이 됩니다. 즉 제 걱정이냐 남편 걱정이냐로 말입니다.

 

= 여기에 간다는 말도 구체적으로 길을 가는 것이냐 이 생을 살아간다는 뜻이냐 즉 사실적 표현이냐 시적 암유(暗喩)냐로 논란의 여지가 있지요. 길을 간다는 뜻을 후자로 보고 자기는 이렇게 기다리는데 남편은 어느 곳에 짐을 풀어놓게하여 생과부가 된 내 삶의 길이 어둠에 싸이게 될까 두렵다는 투로 풀이한 사람도 있습니다.

 

= <정읍사>는 시 전체가 원망형(願望型)으로 되어 있어요. ‘오시라’ ‘올세라’ ‘랄세라로 말입니다. 후렴을 빼면 시조처럼 초장, 중장, 종장의 삼장으로 되어 있고 종결이 전부 원망을 나타낸 것이니까, 달을 보면서 말한 말로 보아야 된다는 이론이 성립됩니다. 달에게 기도하는 형식으로 쓴 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 이것은 민요로 볼 때 부녀자들이 달을 보며 부르던 노래라고 보는 것이 순리에 맞습니다. 독수공방을 하는 입장이든 그렇지 않든 봉건사회에서 남편과 사랑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 여자의 허전한 마음, , 기다림같은 것을 달을 보면서 푸는 노래 말입니다. 달이 높이 뜨라는 소망, 환하게 멀리 비쳐달라는 소망, 그것은 시집살이를 하거나 남편과 이별하여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여인들에게는 누구나가 다 아쉬워하는 것이지요. 어둠에서 밝음으로, 이것이 <정읍사>의 모티브일 것입니다.

 

= <가시리>처럼 이별가의 원형(原形)으로 <정읍사>를 볼 때 여기에서도 이별의 감정은 곧 기다림의 감정입니다. 그리고 제상(堤上)의 부인에서 유래된 망부석(望夫石)의 설화와 통하는 것이구요. 한국인은 유난히도 헤어지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체념적인 국민성을 말하자면 이별에 관한 한 결코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요.

 

= <춘향전>이 인기가 있는 것도 그 끈덕진 기다림 때문이지요. 유목민들은 양떼를 몰며 풀을 쫓아 늘 밖으로 나가지요. 그리고 페니키어나 바이킹같은 해양민족들은 늘 바다 밖으로 배르 몰고 나가야 살수 있습니다. 이들에겐 산다는 것이 곧 이별이고 이별이 있어야 먹을 것이 생기는 전통이 생겨, 그것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농경민은 밭이나 논에 곡식을 심고 그것이 영글 때까지 떠나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이별한다는 것은 죽음입니다. 떠나 산다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어요.

 

= 그래서 중국사신으로 갈 때에는 그 집안에서 통곡소리가 났습니다. 집만 떠나면 죽는 줄 알았으니까(웃음).

 

= 국제공항은 어느 나라나 그 모양이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김포공항엘 가면, 건물도 비행기도 보세구역도 세계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지만 출영객들의 풍경은 아주 색다릅니다. 떠나보내는 사람들과 떠나가는 사람의 의식이 그렇게 복잡하고 또 그렇게 슬플 수가 없어요.

 

= 정이 많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뻗어가는 남성적 문화가 발전 못했지요. 남들처럼 나라 밖에 식민지 개척을 해서 살아간 역사가 아니지요.

 

= <공후인>에서도 보았지만 여자는 떠나지 말라고 하고 남자는 언제나 떠나려고 합니다. 우리는 잡는 쪽이 강했습니다. <정읍사>같은 노래를 들으면 아무리 모진 남성도 행상보따리를 메고 다시 떠날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웃음).

 

한국 종소리의 여운을 보십시오. 한 울린 그 소리는 헤어지기 싫어서 흐느끼듯이 길게 길게 꼬리를 남기고 사라져 갑니다. 떠나는 사람이 한발짝 가다가는 뒤돌아보고 뒤돌아보고 하는 것처럼.

 

= <정읍사>의 아름다운 후렴이 되풀이되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이러한 후렴은 감정의 여운을 주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지요. 물론 노래를 부를 때 현성고음(鉉聲鼓音)을 나타낸 의성어이지만 말이지요.

 

= 노래에 의성어의 후렴이 많이 나오는 것은 대게 산간지방의 특성이라고 합니다. 상의 메아리소리에서 연유된 것이라는 게지요. 스위스의 요들송이 그렇지 않습니까? 해양민족들은 노젓는 소리에서 후렴이 생기구요. 이렇게 보면 <정읍사>의 경우 우리가 농경민이라는 것과 산간이 많은 나라에서 살아왔다는 전통적 생활양식의 반영을 볼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의 문학 역시 외연적(外延的)이고 집약적인 형태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읍사>만 해도 기다림의 감정을 달에 의탁하여 집약시켰고 그 형식도 시조처럼 짧습니다.

 

= 만약 행상인의 아내 쪽에서 시를 쓰지 않고 행상인의 남편 입장에서 노래를 불렀다면 <오딧세이> 같은 대서사시가 생겨났을 거예요. 길에서 도둑을 만나기도하고 호랑이도 만나고 끝없는 모험과 새로운 것의 경험이 전개되니까. 그 드라마도 심리적인 것보다 행동의 세계로 옮겨갔을 거구요. <공후인>의 경우도 역시 그랬습니다. 강 건너 가려는 남편의 입장에서 시가 쓰여진 것이 아니고 붙잡아 두려는 아내의 입장에서 노래가 흘러나왔지요.

 

= 그러니까 남성이 쓴 문학에도 여성적인 성격이 드러나 있어요. 오히려 남자들이 더했던 것 같아요. 온달장군이 죽었을 때 관이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달래지요. 이왕 죽었는데 떠나야 된다고 관을 어루만졌더니 비로소 관이 움직여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지요. 장군이 이랬으니필부(匹夫)야 말할 것이 없어요(웃음).

 

= 이야기하는 우리도 어지간히 떠나기 싫어하는군요. !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여기에서 이별합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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