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잘못된 글읽기와 바람직한 글읽기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잘못된 글읽기와 바람직한 글읽기

조 혜 정(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글읽기와 삶읽기에서)

 

 

현재의 대학생들은 치열한 입시 경쟁문을 뚫고 거의 탈진 직전에 대학에 들어왔다. 입시 준비 시절의 괴로움에 비례하여 기대감은 컸고, 막상 대학 입학 후에는 심리적 갈등이 많은 시기를 거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앞으로 이 사회의 지도적 지식인이 될, 아니면 적어도 안정된 생활을 할 가능성을 확보해 놓은 집단인데, 경제 성장이 급격히 이루어진 시대에 입시 경쟁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에서, 자식들의 출세에 목을 매단 부모들의 기대 속에 자라났다.

 

이들이 약 18년간에 한 삶의 체험이란 소위 일류 대학에 들어온 경우일수록, 재수를 안 한 경우엔 더욱, 극히 한정된 범위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학 신입생을 가르칠 때마다 그들의 체험이 국민학교 5학년 정도에서 멈추어선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나는 종종 한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극도로 경쟁적인 입시 풍토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나름으로 삶을 직접 살아보는 체험의 기회를 박탈당해 왔을 뿐 아니라 간접 체험의 장인 책읽기의 기회마저 빼앗긴 채 살아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에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책 읽기는 도식적 책읽기일 것이다.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는 책을 읽지 않으며-잠시잠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만화책을 읽는다-읽더라도 매우 수동적으로 읽는다. 시험 준비를 위한 보충 참고서 보기나 교리 문답 준비를 위한 성경 읽기식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러한 도식적 책 읽기에 길들여진 학생들 중에는 대학에 들어와서도 계속 교과서나 읽고 학점따기, 영어 공부, 취직 공부나 하면서 삶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책보다는 일간지, 월간지나 텔레비전 수준에서 정보를 얻으며 지낼 것이다.

 

하여간 이들의 책 읽기의 특성을 이해하려면, 소수의 저항적인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는, 시험 준비를 위한 책 읽기 방식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면 시험을 위한 책 읽기의 특성으로 어떤 점을 들 수 있을까?

 

첫째로, 시험을 위한 책읽기는 이론과 현실이 분리되는 책 읽기의 전형이다. 어느 교육학자가 입시 위주 교육을 극복하기 위한 세미나에서 든 예가 생각난다. 국민학교 일학년 때부터 아이들은 시험 답안에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항에 동그라미를 치도록 배우지만 실제로 밥 먹기 전에는 손을 씻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지방 국민학교 교사가 <우리 고장 이야기>라는 주제로 공부하는 시간에 그 고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아이들이 집에 가서 우리 선생님은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만 한다.”고 일렀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나는 국민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 마지막 부분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원고를 쓴 적이 있다. 반응을 보기 위해 국민학교 6학년 아이에게 읽혀 본 적이 있는데 이 공부 잘하는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재미는 있지만 교과서는 될 수 없겠어요. 어디다 밑줄을 쳐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이렇게 국민학교 고학년이면 벌써 입시 중독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현재와 같이 형편없는 수준의 사지택일형 시험 공부만 하다 보면 학생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교과서 안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현실과 관련이 없는, 외울 수 있는, 그러면서 점수 차이를 낼 수 있는 단편적 지식들을 요약·정리하고 출제자가 기대하는 정답을 찾아내기에 급급해진다. 달리 말해서 문명의 4대 발상지는?” 하고 질문이 떨어지면 퀴즈의 답을 맞히듯 답을 재빨리 찾아내는 훈련을 누구 못지않게 받게 되며 이때 이들은 문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본다던가 기준을 정한다는 것은 상상해 보지도 못한다.

 

자연히 암기력에 바탕을 둔 기계적인 사고를 하게 될 뿐 다른 식의 사고, 곧 비유적인 사고라든가 독창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들은 커다란 틀 안에서 개념과 기준이 먼저 주어져야만 머리를 굴린다. 정답을 잘 찍어 내기 위해서는 변화무쌍한 실생활과 연결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시험을 잘 보는 황금률 중의 하나다. 실생활과 관련시키다보면 헷갈리기 일쑤이고 그러면 너무 추상적으로 너무 현실적으로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공부를 위한 말과 생활을 위한 말은 일찍부터 분리되며, 삶과 따로 노는 지식이 공식적지식으로 군림하게 된다.

 

학생들이 단편적 지식을 조립하는 기계적인 사고 훈련만 받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이들은 반복적인 공부과정에서 엄청난 의지력과 참을성도 기르고 극심한 경쟁심도 갖추게 되며, 자기 속의 소리를 듣기보다 항상 남(특히 입시 출제자)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를 보는 기술도 배운다. 이런 모든 능력은 거대 규모의 생산 공장에서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는 산업 역군이 가져야 한 가장 필요한 자질들인지도 모른다. 상관의 마음을 잘 읽어 내고 경쟁심을 늦추지 않으며, 시키는 일이 아무리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기계적으로 꾸역꾸역 해내는 인내심을 가진 탈정치화된 인력 양성의 차원에서 말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은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는 지식인과는 거리가 먼 단순 체제 인간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입시 위주 교육과 병행하여 이들이 받는 이데올로기 교육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학교에서는 시험 문제를 푸는 작업을 반복적으로 하게 하여 자유로운 사고를 체계적으로 죽이는 반면에, ‘북한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적개심과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을 체계적으로 심어 주었다. 주입식으로만 배우고 생각해 온 학생들은 북한 사회에도 사람이 살아가고 있으며 정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과서에는 살아 있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외국 지사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을 사우디에 외화를 벌러 갔다.”라고 쓴 문장을 두고 수업 시간에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사우디에 간 사람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직장에서 보낸 출장으로 사우디에 갔지 외화를 벌려고 간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는 실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애써 감추는 듯 국가주의적 입장에서만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헌장을 외우게 하고 삶이 담기지 않은 교과서만 읽혀 온 것이다.

 

이 세대에게 훌륭한 책이란 삶이 담기지 않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벽한 체계를 갖춘 책아니면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권위주의적 목소리를 담은 책일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자기의 삶과 연결되는 소소한개인 이야기가 담긴 책은 심각하게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심어졌을 것은 분명하다. 학생들 중에 어려운 말이나 이론이 담기지 않은 책을 볼 때 불안해 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너무 쉽게 이해되면 배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이런 배움 아닌 배움에 길들여진 강박 관념에서 나오는 반작용들이다.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